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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찬주 소설가
칼바람은 아직 날을 숨기고 있지만 마른 낙엽들이 시나브로 몸을 뒤척인다. 사립문 옆 감나무 가지에 앉은 물까치와 어치들이 바쁘다. 새들도 사람들 못지않게 날씨에 민감한 것 같다. 나는 사립문 옆에 선 감나무의 감만은 따본 적이 없다. 산방(山房) 주변에 사는 날짐승들의 겨울 양식이기 때문이다. 새들은 지혜롭다. 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린 감을 식탐 부리지 않고 겨울 비상식량처럼 두고두고 쪼아 먹는다. 덕분에 나는 눈 내리는 한겨울에도 감을 붉은 꽃처럼 감상하곤 한다.
오랜만에 안사람과 함께 외출을 준비한다. 안사람은 기대에 부풀어 묵은 겨울 외투를 꺼내 입는다. 나는 화순적벽 부근을 내 소설 '다산의 사랑'을 집필할 때 취재차 한 번 가본 적이 있지만 안사람은 처음일 것이다. 나이 들어 서로 의지하는 사이가 되다 보니 어디를 가든 동행하는 횟수가 잦아진 편이다.
화순적벽(和順赤壁)은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호 호숫가에 거대한 전탑(塼塔) 무리처럼 치솟아 있는 경승지이다. 중국의 적벽과 비슷하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조선 10경(景) 중 하나'로 불릴 만큼 예부터 널리 알려진 절경(絶景)이지만 올여름까지만 해도 멀리서 면회하듯 훔쳐볼 수밖에 없었다. 동복호가 무등산 너머 광주 사람들의 수원지가 된 뒤부터 출입을 금지당해 온 것이다. 그런데 지난 10월 광주광역시에서 적벽의 풍광을 화순군에 돌려주었다. 오염을 막느라 일부분만 개방했지만 무려 30년 만에 이뤄진 경사였다. 광주광역시의 양보와 화순군의 염원, 두 지방자치단체장의 의기투합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런 사연이 깃든 화순적벽은 내가 사는 이불재에서 승용차로 50여 분 거리에 있다. 화순읍에서는 좀 더 가깝다. 바람이 거칠어지기 전에 다녀오려고 나선 셈인데 꼭 관광하려고 서둔 길은 아니다. 머릿속의 온갖 잡된 생각을 동복호의 찬물로 씻고 적벽의 기운으로 눈을 맑히고 싶었다. 물론 아무 때나 적벽에 갈 수는 없다. 개방하는 요일과 시간이 정해져 있고, 미리 신청해야 된다.
나 역시 이미 신청했고 공무원의 안내로 화순군 이서면 월산리에서 작은 버스로 가는 중이다. 버스는 화순적벽 중에서 가장 웅장한 노루목적벽을 감상할 수 있는 망향정(望鄕亭) 아래에서 멈출 것이다. 망향정은 말 그대로 고향 집을 그리워한다는 정자다. 동복댐이 만들어지면서 적벽 주변 열일곱 마을이 물속에 잠겼으며 587가구 2654명이 이주하였다고 한다.
월산리 초소에서 10리쯤 더 들어가자 망향정이 나타난다. 조상이 묻힌 선산과 생명 같은 전답을 수몰시켜야 했던 이주민들의 한(恨)이 문득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호숫가의 산자락 대숲은 이주민들이 남기고 떠난 푸른 상흔이리라. 그러나 노루목적벽, 보산적벽, 창랑적벽, 장항적벽 등 네 적벽 중에서 가장 웅장한 옹성산의 노루목적벽을 보니 수몰의 아픔을 극복하고 있는 것 같은 힘과 기운이 느껴진다. 이주한 민초(民草)들의 한이, 우리 민족이 보였듯, 극복 의지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렇다. 적벽이 절경으로 그친다면 우리 삶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적벽이 내게 '온몸으로 살고 온몸으로 죽어라'고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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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무명의 바위 절벽을 적벽이라 이름 짓고 세상에 알린 사람은 조선 중종 때 기묘사화에 연루돼 동복으로 유배 온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1483~1536)였다. 최산두는 유배 생활의 고단함을 적벽 강변을 산책하며 달랬다. 그는 적벽이 중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에도 있다고 했다.
중국에는 적벽이 두 군데 있다. 모두 양자강이 흐르는 호북성에 있는데 하나는 삼국지 중에서 적벽대전을 치렀던 적벽시에, 또 하나는 소동파(蘇東坡)가 '적벽부(赤壁賦)'를 읊조렸던 황주시에 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삼국지의 적벽을 '무(武)적벽', 황주의 적벽을 '문(文)적벽'이라고 부른다.
최산두는 조광조의 개혁에 동참했다가 좌절한 기묘명현(己卯名賢) 중 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화순적벽을 최산두의 한이 서린 '한(恨)적벽'이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최산두는 해배(解配)되고도 고향인 광양으로 돌아가지 않고 동복에서 생을 마쳤다. 방랑객 김삿갓 역시 적벽 부근으로 내려와 눈을 감았다. 그러나 다산 정약용은 최산두와 김삿갓의 삶과 달리 젊은 날에 창랑적벽이 마주 보이는 물염정(勿染亭)에서 호연지기를 길렀다. '물염정기(記)' 한 구절은 이렇다.
'물염정은 동복현에 있다. 정유년 가을에 아버지가 화순 현감으로 계셨는데 적벽은 40리 떨어져 있었다. 이듬해 나는 그곳에 가서 노닐었다. … 적벽은 울퉁불퉁 모양이 기묘하고 빼어났다. 바위 높이는 수십 길이고 너비는 수백 보나 되었으며 빛깔은 담홍색이고 도끼로 깎아 세운 듯 우뚝하였다.'
고니 같은 흰 철새들이 고개를 처박고 있다가 수면을 차고 날아오른다. 어미 새가 새끼들에게 먹이 잡는 방법을 반복해서 훈련시키다가 비상하는 연습을 혹독하게 시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온실에서 과보호로 자란 자식의 자랑질을 서슴지 않는 인간을 부끄럽게 하는 새들의 철두철미한 모습이다.
글을 밥 삼아 쓰는 문단 말석(末席)의 작가로서 화순적벽을 보고 문장 몇 줄이라도 써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