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그림자, 일월오봉도
신권 지폐중 만원권의 도안을 보면 앞면의 세종대왕 초상은 그대로지만 배경 그림이었던
용포무늬가 사라지고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 가 들어가 있다.
이름조차 생소한 이 일월오봉도는 과연 어떤 그림일까? 한마디로 말해 왕의 그림자와도 같은
존재였다. 미국과 러시아 대통령이 가는 곳에 늘 핵 가방이 세트로 다니듯 조선 시대 왕이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따라다녔던 그림이 바로 일월오봉도이다. 이 그림을 그려놓은 병풍을
일월오봉병(日月五峯屛)이라 부르는데 왕이 행차할 때도, 왕이 죽은 뒤 왕의 혼백을 모시는
곳에도 심지어 왕의 초상화에서도 왕 뒤에는 늘 일월오봉병이 있었다.
지금도 경복궁 근정전이나 창덕궁 인정전, 덕수궁 중화전 등에 가보면 왕이 앉았던
용상의 뒤편에는 일월오봉병이 놓여 있다.
푸른 하늘에 걸려 있는 붉은 해와 하얀 달, 다섯 개의 봉우리,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폭포,
그리고 출렁이는 파도와 신비의 상징인 붉은 소나무를 소재로 장엄하게 그려낸 이 그림은
얼핏 보면 한 편의 완벽한 풍경화이다. 하지만 왕이 이 그림 앞에 있지 않으면 그림은 미완성이
돼버린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알쏭달쏭 수수께끼 같은 이 문제의 답은 삼재(三才)의 원리에서
찾을 수 있다.
일월오봉도를 보면 위에서부터 3등분으로 나뉘어 그려져 있는데 각 부분이 우주를 이루는
세(三)바탕으로 하늘, 땅, 사람을 가리킨다. 이 중에서 사람은 가장 신령하고 도덕적인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그 많은 사람 가운데 으뜸이 바로 왕이다. 그래서 왕은 예로부터 삼재를
꿰뚫는 안목을 갖춘 사람(ㅣ)이라 여겼다. 그러므로 일월오봉도 앞에 왕(三 +ㅣ)이 앉음으로써
곧 그가 우주의 조화를 완성하는 진정한 왕(王)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는 의미다.
아울러 일월오봉도도 완전한 의미를 지닌 그림으로 재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내년이면 새로운 만 원권이 나와 많은 사람이 일월오봉도를 볼 수 있게 된다.
단순히 달라진 디자인에만 관심을 기울일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숨은 뜻을 알아가는 것도
쏠쏠하나 재미가 될 수 있겠다. [옮긴 글]미리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