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권의 책으로 노무현을 말하다
김병준·김창호 외 지음/오마이북
'오마이뉴스'가 한국미래발전연구원과 함께 개최한 강독회 <노무현 대통령이 읽은 책들>의 강의 내용을 엮은 책이다. 독서와 토론과 글쓰기를 즐겼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밑줄까지 치며 탐독했던 10권의 책에 대해 각 분야별 전문가들이 맡아 강의를 진행했고, 100여 명의 수강생들이 뜨거운 열기 속에서 함께 공부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선택한 10권의 책을 통해 그가 고민했던 진보의 화두와, 그가 꿈꾸었던 우리 사회의 미래를 엿볼 수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서너 번 읽은 <유러피언 드림>을 진보적 관점에서 한국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지 검토해보라고 이야기했다. <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하다>를 보면서는 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진보적인 정책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해 깊이 고민했고, <빈곤의 종말>과 <국가의 역할>을 통해서는 신자유주의, 양극화, 성장과 복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다. 이 책은 그밖에도 <슈퍼자본주의>, <더 플랜>, <이제 당신 차례요, Mr. 브라운>, <역사를 바꾸는 리더십>,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 <생각의 오류> 등의 책들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어떻게 읽었는지 친절하게 안내한다.
"시장의 엄청난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어서 때로는 밀리기도 하고 때로는 양보도 하고 그랬죠. 그러나 노 대통령은 기본적으로 시장이 갖는 결함, 그 문제점을 깊이 인식하고 계셨습니다. … 그래서 국가는 과연 어떠한 역할을 어느 정도까지 해야 하는가라는 논제에 후반기로 갈수록 큰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 1장 <국가의 역할> 중
적어도 그는 국가 권력의 수장으로서 시장에 대한 긴장감만은 놓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국가의 역할> (장하준 씀)이란 책을 펼쳐든 이유도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리라는 신앙과도 같은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가운데 국가라는 마지막 울타리만큼은 지켜내려는 뜻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노력은 성공했다고 보기 어렵다. '삼성공화국'이란 비아냥거림은 임기 내내 참여정부를 따라다녔고, 노 전 대통령 자신 역시 이미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간 것 같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취임 2년을 갓 넘겼을 무렵의 일이었다. 후반기로 갈수록 국가의 역할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인 이유도 어쩌면 자신의 국가가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한 데 대한 초조함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가 생각한 국가의 역할은 어떤 것이었을까. "앞으로 정부와 국가는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하는 데 비중을 많이 둬야 한다. 산업정책도 필요하지만 어머니와 같은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다.“ 적극적 산업정책으로 시장을 이끌어가는 것이 아버지와 같은 역할이라면 그는 시장 실패를 바로잡고 시장으로부터 소외된 이들을 따듯하게 어루만져 일으켜 세우는 어머니의 역할에 더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그의 바람과는 달리 참여정부 아래서 우리 사회의 양극화는 오히려 더 깊어져만 갔다. 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그는 <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하다 >라는 책에서 그 원인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보수적 분위기가 압도적인 상황에서 이 같은 복지정책을 일관성 있게 추진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보수 패러다임으로 온 사회가 질식 상태에 놓인 이른바 보수의 시대를 뛰어넘지 않는 한 진보 정책들이 제자리를 잡거나 효과를 발휘하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국민의 정부에 이어 참여정부에 이르는 10년의 세월은 외환위기 이후 시작된 대한민국 구조조정 시기이자, 세계적으로는 IT 혁명 이후 경제의 금융화와 세계화가 정점에 이르면서 이른바 돈이 일하는 경제(money working economy)에 대한 환상과 함께 고용 없는 성장이 굳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참여정부 막바지인 2006년 말에는 전 세계 금융자산의 규모가 GDP의 3배가 넘는 167조 달러에 이를 정도로 금융의 비중과 영향력은 막대해졌고, 그와 함께 사람들의 욕망도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빚과 투기'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결국 미국 발 세계 금융 위기라는 참혹한 결과를 맞긴 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욕망의 정치를 편 이명박정부가 들어선 뒤의 일이다.
이렇듯 지난 10여년을 되돌아보면 시대의 벽을 넘지 못했다는 참여정부의 평가도 그저 변명으로 흘리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미래를 말하다>를 읽은 뒤 그는 보다 긴 호흡으로 새로운 진보의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는 생각을 굳혔다고 한다. 그가 꼭 쓰고 싶다던 진보와 민주주의의 교과서 역시 시대정신을 바꿔 진보의 시대를 열고자 했던 그의 간절한 바람이 담긴 책인 것이다.
진보의 시대를 열기 위해 그가 펼쳐든 또 한권의 책이 <슈퍼자본주의> (로버트 라이시)다. 보수의 시대를 깊이 이해하지 않고서는 결코 이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압도하는 현실 앞에서 절망했을 그는 이 책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아픈 기억을 되살리는 고통스런 과정은 아니었을까. 보수의 경제적 이해가 국가 어젠다를 압도하는 왜곡된 우리 사회, 보수의 거센 반발 앞에서는 대통령마저도 어쩔 수 없었던 암울한 우리 현실… 노 대통령이 이 책을 읽고서 가졌을 복잡한 심사는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가 꿈꾼 세상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는 이미 1988년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첫 대정부질문에서 자신이 꿈꾸는 세상에 대해 "모두가 먹는 것 입는 것 이런 걱정 좀 안 하고, 더럽고 아니꼬운 꼬라지 좀 안 보고… 노동자와 농민이 다 함께 잘 살게 되고 임금의 격차가 줄어져서 굳이 일류대학을 나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리고 높은 자리에 안 올라가도 사람대접 받을 수 있는 세상"이라고 소개한 바 있다. 20여년이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가 변함없이 지녀온 이러한 꿈은 마침내 <더 플랜> (람 이매뉴얼, 브루스 리드)과 <유러피언 드림> (제레미 리프킨)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그는 두 책에 담긴 철학과 정책에 깊이 공감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노 대통령이 이 책에서 읽은 정신은 모든 시민이 동등한 공동체의 일원이며, 돈이 많든 적든 그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노 대통령은 <유러피언 드림>을 읽으면서 미국과 유럽, 그리고 한국의 각종 지표를 비교해 감세, 작은 정부, 규제 완화를 주장하는 시장만능의 보수주의가 아니라,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국가가 충분한 역할을 하여 삶의 질이 높은 진보의 나라를 만들어 가기를 희망했다. 다시 돌아봐도 그의 국가는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하지 않았다. 보수의 시대를 힘겹게 가로질러야 하는 운명이었다해도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그것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이는 노무현 자신이었을지 모른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간 뒤 진보의 시대를 열기 위해 그토록 애썼던 이유다.
하지만 '대통령 노무현'의 꿈을 이루고자 했던 '시민 노무현'도 더 이상 우리 곁에 없다. 우리 앞에는 그를 추억하는 한 권의 책이 남아있을 뿐이다.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을 비롯해 서로 다른 10권의 책을 들고 등장한 이들이 한결같이 되뇐 말이 있다. 바로 '깨어있는 시민의 힘'이다. 어쩌면 그가 평생을 다해 이루고자 했던 꿈은 어머니와 같은 국가를 만드는 일도, 진보의 시대를 열어내는 일도 아닌 시민의 힘을 깨우는 일이었을지 모른다. 그는 역사를 바꾸는 것이 국민이기 때문에 국민을 학습시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저자 김병준은 1962년 경북 근위에서 태어났다. 대구 청구고등학교와 계명대학교(사회학과)를 졸업한 후 군복무를 마치고 한국통신에 근무하기도 했다. 이어 1995년 성균관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1997년 39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2000년 29기로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변호사를 개업했으며 서울지방변호사회 국선변호특별위원회, 서울특별시선거관리위원 등을 거쳐 현재 좋은합동법률사무소에 변호사로 재임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