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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魂終作沒胡沙 : 충혼(忠魂)의 마지막은, 호사(胡沙)땅에 던졌다.
2020년 04월 02일
○ 오늘날의 요녕성(遼寧省) 성도(省都)인 ‘심양(瀋陽)’은, 심하(瀋河)의 북(北)쪽에 자리 잡고 있어, “심양(瀋陽)”이라는 이름이 만들어진 것이다.
19세기 이전(以前) 조선사(朝鮮史)의 “심양(瀋陽)”이 오늘날의 “심양(瀋陽)”일까?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은, 그게 무슨 소린가? 하겠지만, 〈아닌 것이 아니고, 진실(眞實)은 감춰질 수 없는 것이다.〉
조선사(朝鮮史)의 “심양(瀋陽)” 땅은 “호사(胡沙)”위에 만들어진 도회지(都會地)로, “오늘날의 “심양(瀋陽)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조선사(朝鮮史)의 심양(瀋陽)은, 조선(朝鮮) 강토(疆土)의 서(西)쪽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하며, 그곳은 “오랑캐(胡) 땅의 사막지대(沙漠地帶) 모래(沙)위에 세워진 도시(都市)였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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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달제충열공유고부록(吳達濟忠烈公遺稿附錄).附錄.記事五絶句.曹漢英
《欲把阿膠止濁河.忠魂終作沒胡沙.微公一死吾何面.三士光應萬古多》 右屬三學士.仙源,淸陰,洪巡察,丁端客合爲五絶.詳晦谷集.
〈忠 魂 終 作 沒 胡 沙 : 충의(忠義)를 위해 죽은 혼(魂), 오랑캐 모래(胡沙) 땅에서 죽었다.〉고 하였다.
충의(忠義)가 무엇이냐? 충성(忠誠)과 절의(節義)다.
충성(忠誠)이란 무엇이냐? 국가(國家)와 군주(君主)에게 몸과 마음을 다하여 헌신(獻身)하는 것을 말한다.
절의(節義)란 무엇이냐? 국가(國家)나 군주(君主)에 대한 절개(節槪ㆍ節介)와 의리(義理)를 말하는 것이다.
즉(卽) 위 〈“오달제(吳達濟)” 선생(先生)은, 충의(忠義) 곧 충절(忠節)과 절의(節義)를 위해 스스로 순절(殉節)하였다.〉는 뜻이다.
○ 다음백과 / 오달제(吳達濟)【1,609(광해군1)∼1,637(인조15)】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화의를 반대한 3학사 중 한 사람이다. 본관은 해주. 아버지는 윤해(允諧)이다.
1634년(인조 12)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해 전적·시강원사서를 거쳐, 이듬해 정언·지평·수찬 등을 지냈다. 1636년에 부교리로 있을 때 청이 사신을 보내 조선을 속국시하며 굴욕적인 조건을 제시하자 청나라 사신을 죽이자고 주장했으며, 주화파(主和派)인 최명길(崔鳴吉)·이민구(李敏求) 등의 주장에 따라 사신을 교환하게 되자 이들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해 겨울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들어가 끝까지 척화를 주장했다.
이듬해 인조가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한 뒤, 청에서 척화론자의 처단을 요구하자 스스로 척화론자로 나서서 “윤집(尹集)·홍익한(洪翼漢)” 등과 함께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고문과 회유에 굴하지 않고 항변하다 심양성 서문 밖에서 처형당했다. 그의 절개를 기리기 위해 고향에 정문(旌門)을 세웠으며, 영의정에 추증했다. 광주 현절사(顯節祠), 평택 포의사(褒義祠), 홍산 창렬서원(彰烈書院), 고령 운천서원(雲川書院), 영주 장암서원(壯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충렬공유고 忠烈公遺稿〉가 있으며, 〈묵매도 墨梅圖〉 2점이 전한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출처 / [Daum백과] 오달제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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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양(瀋陽)”의 서문(西門)밖에서 ‘형장(刑場)’의 이슬로 사라지셨는데, 그곳 “심양(瀋陽)” 땅은 〈오랑캐 사막지대(沙漠地帶)【호사(胡沙)】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요녕성(遼寧省) 심양(瀋陽) 땅이 “사막지대(沙漠地帶)”냐? 묻는다면, 정신 줄 나간 놈 취급(取扱)당하지 않겠나?
〈한반도(韓半島)엔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없었다는 것이고, 또한 그 북방지대(北方地帶) “만주(滿洲)” 땅엔 여진족(女眞族) 또한 없었다.〉는 이야기다.
○ 「청(淸)은, 뒤에 ‘심양(瀋陽)’에 삼학사(三學士)를 기리는 사당(祠堂)을 세우고, 삼한산두(三韓山斗)라는 비(碑)도 세워 기렸다.」고 전해지는데, 이게 또 아주 웃기는 스토리(Story)가 전개 된다.
즉(卽) 「일제강점(日帝强占) 시절인 1,930년에 봉천(奉天)의 한 땅속에서 부러져 묻혀있던 비석(碑石)이 발견(發見)되었는데, 이게 바로 “삼한산두(三韓山斗)”비(碑)로, 삼학사(三學士)를 기리는 비석(碑石)이었다.」고 하면서 당시(當時)의 신문(新聞)에 기사(記事)까지 실렸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인터넷에서 이를 찾아보니, 〈1,933년 오달제 선생 후손 등에 의해 머리 부분이 발견돼, 1935년 10월 항일운동의 한 방법으로 다시 중건(重建)됐다. 이후 모택동 집권 후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다시 파괴돼 선양을 가로지르는 훈허강에 버려진 것으로 전해진다고 말하는 기사도 있었다. 출처 서울신문〉고 하는 곳도 있었다. 도대체 누구의 설명(說明)이 올바른 것인가?
◆ 그런데 말이다. 조선사(朝鮮史) 이야기만 나오면, 대부분(大部分)의 유물유적(遺物遺蹟)들이 일제강점(日帝强占)때에 맞춰 발견(發見)되고, 발굴(發掘)되어, 반도(半島) 조선왕조(朝鮮王朝)를 증거(證據)하는 거냐? 하는 거다.
또 이때 발견(發見)되고, 발굴(發掘)된 금석문(金石文)들은, 특이(特異)하게도 주요부분(主要部分)이 풍화작용(風化作用)으로 마모(磨耗)되어, 판독(判讀)불가(不可)라는 공통점(共通點)이 또 적용(適用)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건 반도(半島) 땅과 그 북방지대(北方地帶)가 공통적(共通的)으로 적용(適用)된다. 이게 참 웃기는 이야기다. 우리에게 “일제(日帝) 36년(年)은, 다시는 결코 겪지 말아야 할 악몽(惡夢)중의 악몽(惡夢)이다.”
➨ “반도(半島) 땅과 그 북방지대(北方地帶) 만주(滿洲) 땅”의 유물유적(遺物遺蹟) 대부분(大部分)은, 일제(日帝)가 반도조선왕조(半島朝鮮王朝)를 만드는데, 증거품(證據品)으로 기획(企劃)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것들에 대한 의문(疑問)조차 가지지 않는 대한민국(大韓民國)의 학계(學界)는, 비난(非難)받아야 마땅하다.
언제 쯤 대한민국(大韓民國)은, 식민사학(植民史學)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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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瀋 獄 寄 內 南 氏 : 심양(瀋陽)의 감옥(監獄)에서 부인 남씨에게 / 吳達濟
琴 瑟 恩 情 重 : 금슬의 은혜와 정이 무거워
相 逢 未 二 朞 : 서로 만난 지 두 해 남짓
今 成 萬 里 別 : 지금 만 리(萬里)를 이별하였으니
虛 負 百 年 期 : 백년약속을 헛되이 짊어졌구나.
地 闊 書 難 寄 : 땅 넓어 편지 부치기도 어렵고
山 長 夢 亦 遲 : 산은 길어 꿈마저 더딘데
吾 生 未 可 卜 : 내 생명은 점 칠 수가 없으니
須 護 腹 中 兒 : 마땅히 복중의 아이를 보호하여 주시오.
➨ 위의 구절(句節)은, 피 끊는 심정(心情)으로, 오직 충의(忠義)와 절의(節義)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다. 오달제(吳達濟) 선생(先生)의 마지막 서신(書信)이었다고 전해진다.
○ 당시의 봉건왕조(封建王朝) 시대(時代)의 사상(思想)은,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는 이해(理解)곤란(困難)한 이야기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들의 증조부(曾祖父), 고조부(高祖父)시대엔 당연한 충효사상(忠孝思想)이었다.
위의 시문(詩文)을 보고 있노라면 :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는가! 어떻게 그걸 보고 있을 수가 있었겠는가! 이렇게 국가(國家)와 군주(君主)를 위해 순절(殉節)하신 분이 있는가 하면, 사적(私的) 이익(利益)을 추구(追求)하고자, 외적(外敵)에게 나라를 팔아먹은 부역(附逆) 매국노(賣國奴)들이 있었다.
아이러니(irony)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랑캐 곧 되놈(胡)에게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킨 그 분들의 후손(後孫)들이, ‘만이(蠻夷) 곧 도이(島夷)’에게 나라를 팔아먹고, 부역(附逆) 매국노(賣國奴)들이 되었으니 말이다. 세상만사(世上萬事)는 요지경(瑤池鏡)이라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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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淸陰先生集卷之十一.雪窖集.二百八十九首.龍灣留贈守而.癸未春再作瀋行時作
〈二年沙漠二年灣.歷盡千辛與萬艱.今日又成江上別.世間人事幾時閑〉
〈二 年 沙 漠 二 年 灣 : 2년은 사막(沙漠)에서, 2년은 용만(龍灣)에 있었다.
전(傳)하는 바에 따르면 :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선생(先生)”이 청(淸)나라로 끌려가기 전(前)에, 몸이 불편하여 2년 동안 용만(龍灣)에서 대기(待期)상태로 있었고, 또 심양(瀋陽)으로 끌려가 2년 동안 감옥(監獄)살이를 했는데, 「심양(瀋陽), 그곳은 사막지대(沙漠地帶)였다.」고 이야기를 하고 계시다.
➨ 위의 글 예시(例示)를 보면 : “심양(瀋陽)”이란 역사적(歷史的) 도회지(都會地)는 본명 존재(存在)했었지만, 오늘날의 반도(半島)와 그 북방지대(北方地帶)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또한 “용만(龍灣)이 의주(義州)”라 한다고 했을 때, 이곳은 반도(半島) 북방(北方)이 아니라 “막남(漠南)과 막북(漠北)”의 경계(境界)지역에 있어야 역사서(歷史書)의 지형지세(地形地勢)를 충족(充足)시 킬 수 있다. ‘용만(龍灣)’은 당시 만호(萬戶)가 살고 있는, 국경(國境)도시(都市)였다는 사실(事實)이다.
○ 다음백과 / 김상헌(金尙憲)【1570년(선조 3)∼1652년(효종 3)】
숙도(叔度), 청음(淸陰), 석실산인(石室山人), 서간노인(西磵老人), 문정(文正) / 이조참의, 도승지, 부제학, 대사헌, 예조판서 / 본관 안동(安東)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석실산인(石室山人: 중년 이후 楊州 石室에 退歸해 있으면서 사용)·서간노인(西磵老人: 만년에 安東에 은거하면서 사용). 서울 출생. 중략(中略). 1,590년(선조 23) 진사가 되고 1596년 전쟁 중에 실시한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임명되었다. 이후 부수찬(副修撰)·좌랑·부교리(副校理)를 거쳐 1601년 제주도에서 발생한 길운절(吉雲節)의 역옥(逆獄)을 다스리기 위한 안무어사(安撫御史)로 파견되었다.
이듬해 왕에게 결과를 보고하고, 고산찰방(高山察訪)과 경성도호부판관(鏡城都護府判官)을 지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문과 중시에 을과로 급제,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교리·응교(應敎)·직제학을 거쳐, 1611년(광해군 4) 동부승지가 되었다. 중략(中略).
이어 대사간·이조참의·도승지·부제학을 거쳐, 1626년(인조 4) 성절 겸 사은진주사(聖節兼謝恩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후 육조의 판서 및 예문관·성균관의 제학 등을 지냈다. 1,632년 왕의 생부를 원종(元宗)으로 추존하려는 데 반대해 벼슬에서 물러났다. 1635년 대사헌으로 재기용되자 군비의 확보와 북방 군사 시설의 확충을 주장하였다.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예조판서로 주화론(主和論)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펴다가 인조가 항복하자 안동으로 은퇴하였다.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후 풀려 귀국하였다. 중략(中略). 1,653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661년(현종 2)효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 정주봉명서원(鳳鳴書院), 개성숭양서원(崧陽書院), 제주귤림서원(橘林書院), 정평망덕서원(望德書院), 함흥창덕서원(彰德書院), 경성경산서원(鏡山書院), 의주기충사(紀忠祠), 광주현절사(顯節祠), 상주 서산서원(西山書院), 종성화곡서원(華谷書院), 안동서간사(西磵祠), 예안운계사(雲溪祠), 정평모현사(慕賢祠)에 제향되었다.
시문과 조천록(朝天錄)·남사록(南槎錄)·청평록(淸平錄)·설교집(雪窖集)·남한기략(南漢紀略) 등으로 구성된 ‘청음전집(淸陰全集)’ 40권이 전한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출처 : [Daum백과] 김상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다음백과, 인용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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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언제까지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에 끌려 다닐 건가?
➤ “아베 노부유키(阿部 信行)”의 마지막 연설(演說)【“아베 노부유키(阿部 信行)” 가 이러한 말을 했는지 여부(與否)는 확실(確實)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고 전해진다. 다만 이런 말을 했든, 하지 않았던 대한민국(大韓民國)은, 이와 관련(關聯)없이 친일파(親日派)가 득실거리며, 국론통일(國論統一)을 방해(妨害)하고 있는 것은 분명(分明)하다.】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朝鮮)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조선민(朝鮮民)이 제 정신을 차리고 찬란(燦爛)한 위대(偉大)했던 옛 조선(朝鮮)의 영광(榮光)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세월(歲月)이 훨씬 더 걸릴 것이다. 중략(中略).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植民敎育)을 심어 놓았다. 결국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중략(中略). 현재 조선(朝鮮)은, 결국 ‘식민(植民)교육(敎育)’의 ‘노예(奴隸)’로 전락할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阿部) 노부유키(信行)”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라고 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진의(眞意)여부(與否)와 관계없이, 오늘날 대한민국(大韓民國) 사회(社會)를 그대로 대변(代辯)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過言)이 아닐 정도(程度)로 똑같다.
대한민국(大韓民國) 상위(上位) 몇 %가 문제(問題)되는 것이 아니다. 대다수(大多數) 국민(國民)들이 원하지 않는다면 상위(上位) 몇 % 기득권자(旣得權者)들, 결코 “지들” 맘대로, 내키는 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事實)이다. 이게 가장 중요(重要)한 대목이다.
중단(中斷)없는 개혁(改革)【낡아서 못 쓰게 된 것을 개혁(改革)하여 없앰. / 기구(機構)ㆍ제도(制度)ㆍ법령(法令) 따위를 낡거나 문제(問題)가 있어 폐지(廢止)함】이 정답(正答)이다. 변화(變化)는 끊임없이 계속(繼續)되어야 하며, 걸림돌은 혁파(革罷)시키며, 나아가야 한다. 이게 대한민국(大韓民國) 국민(國民)들이 살길이다.
2020년 04월 02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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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二年沙漠 二年灣' 에서 ...김상헌은 2년은 사막에서 2년은 용만(의주)에서 머물렀다 하는데 ....청나라로 끌려가기 전에 용만에서 대기했었다는 말이 맞는지가 궁금합니다. 혹 사막에서 2년있다가 고국(의주)에 돌아와 2년을 지낸것은 아닌지요....김상헌의 詩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에서 고국산천을 떠나기 전에 삼각산과 한강수를 보았을것데 어느 장소에서 이 시를 썼을까요...?
삼각산과 한강수가 있을법한 한양에서 썼는지,아니면 용만에서 고국산천을 떠나기 전에 썼는지...가 예전부터 궁금해 했었읍니다. 만약 용만에서 썼다면 그곳에 삼각산과 한강수가 있지 않았을까요...?
이 詩(가노라 삼각산아~~~~)를 여러번 음미해 보았는데, 청음 김상헌은 청으로 끌려가기 하루나 이틀전에 한번가면 다시 못 올 수 있다란 심정으로 삼각산과 한강을 보며썼을 것으로 추정되며 ,....
제가 생각했던 삼각산은 지금의 화산이고 한강수는 지금의 위수가 되며 용만(의주)는 지금의 화음시...가 아닐까 합니다. 그러니 압록강은 동(東)으로 흐르는 지금의 황하이며,황하에서 발견된 철우(鐵牛 ; 연행록과 이제현의 기록에 보이는... 압록강 철우의 고사)의 이야기와도 연결됩니다.
압록강 넘어의 사막지대는, 유주의 땅으로 그 땅은 정확히 사적(沙磧)지대로 모래개천의 불모지라고 승정원 일기에도 나와 있읍니다.
'유연(幽燕) 지방은 모래 개천의 불모지이므로 토지의 소출이 없는데, 황경(皇京)은 사방의 재물이 모두 모여드는 도회이므로, 이에 의지하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승정원일기 고종9년 1872 4 4>'
안녕하세요. <맑은영혼>님!
김상헌선생은 청(淸)나라로 들어가려 했으나 건강상태가 매우 좋지 않아 용만(龍灣)에서 낫기를 기다리며 일종의 대기상태로 2년 정도나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위에서 언급한 시(詩)는, 용만에서 2년, 심양(瀋陽)의 옥살이 2년을 마친 후가 아닐까 합니다.
연경(북경)으로 가는 여정의 지형지세에 대해서는 여러차례에 걸쳐 연행기록등을 논거로 논의가 되었습니다만, 입록강을 건너, 봉황성으로부터는 그 땅이 모두 모래(沙)였다고 하는 것을 보면, 그 땅이 어디에 있었을까를 그려보게 됩니다.
또 어느 곳에서는 진뻘때문에 사람과 말이 한 번 빠지면 헤어나질 못하니, 말몰이꾼들이 여럿 죽었다고 한 것을 보면, 흐르는 유사와 비슷한 곳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합니다.
원명청(元明淸)의 서울(京)이 과연 같은 '연경(燕京)=북경(北京)'이었을까? 하는 의심이 듭니다.연행기록으로 보면, 장안(長安)으로부터 약 4천리 정도되는 거리에 연경(燕京)이 자리잡고 있어야 하는데, 북쪽으로는 몽골의 올란바토르, 항애산맥 정도요, 서북쪽으로는 돈황(敦煌)정도가 됩니다.
압록강을 건너 서(西)쪽으로 간다는 기록이 많다보니, 대략 장안(서안)으로부터 西北(서북)내지 西(서)쪽으로 가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또 황하와 위수를 놓고 보면,
연행기록의 도리(道里)와 '연경=북경'이 어디에 있어야 할까? 그곳의 자연환경적 요소는 기록과 매치되는가가 문제가 된다고 보아집니다. 유주(幽州)는 동북(東北)쪽이 아니라 "북(北)"쪽 이었다는 돈황문서도 있고, 그곳은 말의 산출지, 어렸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말과 함께 살았다는 기록으로보면 이곳은 사막과 초원지대가 펼쳐져 있는 곳이란 것을 알 수 있죠. 북(北)은 산서성과 섬서성과 내몽고 일원으로 좁혀지게 됩니다. '연경=북경'에 대한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