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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1일 [부활 제2주일]
복음 : 요한 20,19-31
교회는 용서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언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며 죄를 용서하는 권한도 주십니다.
당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하느님에게만 있다고 믿었는데, 또 제자들이 그러한 권한을 행사하러 다닌다면 이는 분명 목숨에 위협이 되는 행위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행사하고 다녔다면 이는 분명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뵈었음을 보여줍니다.
토마스 사도는 그들과 함께 없었기 때문에 감히 죄를 용서해주는 사도가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뵙지 못한 것이 동시에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갖지 못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사도들과 하나가 되어 여드레 뒤 예수님을 만나 뵙게 된 이후로는 따로 그러한 권한을 받지 않더라도
자동으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부여되었음을 믿게 됩니다.
따라서 교회가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행사하는 것만큼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뵈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이는 비단 교회 전체에 해당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개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남과 자비를 베풂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다면 그 황송함과 기쁨에 놓아주고 용서합니다.
그러면 그 모습을 보는 이들도 그 용서하는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 부활의 증거를 발견합니다.
용서가 쉽지 않다는 것을 모두가 알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에서도 이러한 용서의 모범은 수없이 많지만 개신교 한 집사님도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소개해 드립니다.
우리 교회 이모 집사님은 직장 전도훈련(BBS)을 열심히 합니다.
그 BBS 동료인 A라고 하는 어느 집사님의 실제 이야기입니다.
A집사님은 어느 날 직장 회식 자리에서, 자꾸 권하는 술을 그리스도인의 양심으로 계속 거절하다
급기야 화가 난 직장 상급자에게 뺨을 맞게 되었습니다.
처자식이 있고, 연배도 있는 사람이 여러 사람 앞에서 뺨을 맞았으니, 얼마나 창피하고 분하겠습니까?
집에 와 며칠 동안 회사도 무단결근하며, 분을 삭이다가 결국 회사를 그만두려고 결심하고, 사표를 내기 전
산으로 올라가 기도드렸답니다.
뺨 맞은 서러운 생각, 분한 마음, 막상 직장을 그만두려니 막막한 두려움 등으로 간절히 하느님께 호소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는 중, 뜻밖의 음성을 들으셨답니다.
‘너는 겨우 뺨 한 대 맞은 것으로 그렇게 분해하고 억울해하느냐?
나는 모든 이에게 멸시 천대와 고난을 받았고, 너를 위해 십자가를 지었다.’
침 뱉음을 당하고, 저주와 욕설, 살을 찢는 채찍으로 맞으시면서, 아무런 자존심도, 혈기도, 변명도 없이
묵묵히 당신의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길을 오르셨던 우리 예수님.
손과 발에 못을 박고, 조롱하던 그 무리를 저주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고통의 십자가 위에서도 저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셨던 그 예수님의 음성이 아닙니까?
뺨 한 대 맞은 것을 어찌 고난이라고 분해하고, 직장까지 그만두려 했을까?
A집사님은 그 신비한 음성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깊이 생각하며, 자신의 자존심을 버리고 눈물로 회개하셨답니다.
그리고는 산에서 내려와 다음날 직장으로 출근하였습니다.
며칠 간의 무단결근 후 출근한 회사에서는 그 며칠 동안 놀라운 일이 벌어져 있었습니다.
그의 뺨을 때린 상급자가 아주 곤란한 지경에 처하여 징계를 받을 처지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 상급자가 회사에서 처리했던 여러 일이 문제가 되었고, 그중에 A집사님의 뺨을 때린 사건도 있었던 것입니다.
A집사님은 자신의 뺨을 때린 그분을 두둔하며, 그분의 구명을 위해 힘썼습니다.
피해 당사자인 A집사님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분을 도우니 결국 회사에서 내리려던 징계도 잘 해결되었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뺨을 때렸던 그 상급자는 A집사님의 ‘이해하지 못할’ 관용과 사랑에 감동하고 복음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지금은 직장 선교회의 한 지부의 leader(지도자)가 되어 열심히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술 마시지 않는다고 뺨을 때렸던 바로 그 사람이 말입니다.
[출처: ‘뺨 맞고 용서하신 집사님’, 다음 카페, ‘주님 오실 때까지’]
비록 개신교 신자의 이야기이지만 우리 현실과 매우 밀접하여 예화로 선택해 보았습니다.
우리 삶 안에서 이러한 크고 작은 용서해야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용서를 하기 위해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당신 상처에서 나오는 성령을 주시며 용서하라고 교회를 파견하십니다.
그 용서의 힘이 전교의 힘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마음에 미움을 담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을 직접 우리 안에 모시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며 “내가 너를 용서하기 위해 당한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주는 사람이 있다면 미워해도 괜찮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그분께서 나를 위해 참아주신 십자가의 고통에 비하면 나에게 그만큼 고통을 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힘이 모이면 교회에 더 많은 신자가 모이는 선교의 씨앗이 될 것입니다.
교회는 용서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4월11일 [부활 제2주일]
사도행전 4,32-35, 요한 1서 5,1-6
요한 20,19-31
사랑하십시오. 그럼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토마스 사도가 자신의 손가락을 구멍 뚫린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에 넣어봤다는 표현은 없지만, 그의 성격상 끝까지 세심하게 확인해봤을 것입니다.
아마도 자신의 손가락을 구멍뚫린 예수님의 옆구리에 직접 넣어봤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이런 신앙 고백을 하게 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복음 20장 28절)
토마스 사도의 늦었지만 장엄한 신앙 고백 앞에 예수님께서는 각별한 말씀 한 마디를 덧붙이십니.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복음 20장 29절)
사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옛날 토마스 사도를 위한 말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오늘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 가운데 단 한명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직접 자신의 눈으로 목격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그분께서 주신 믿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믿음 하나 단단히 붙들고 우리 앞에 펼쳐지는 희미한 안갯속 같은 신앙 여정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도들의 기쁨은 지극히 제한적이고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눈으로 확인한 주님 부활의 그 기쁨을 가슴에 안고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의 삶으로 나아갔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신앙 여정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나가면서 종종 체험하는 강렬한 신비 체험이나 은총 체험들은 평생 지속되지 않습니다.
일생에 단 한번 혹은 두세번 뿐입니다.
그 은혜로운 체험을 가슴에 안고 믿음의 삶, ‘보지 않고도 믿는’믿음의 삶으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나무 나도 특별한 사건이었기에 당시 이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초대교회 공동체에 주어졌던 가장 큰 과제는 설명하기 정말 난해한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전대미문의 대사건이었기에 예수님과 동고동락했던 제자들 역시 부활사건 앞에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이 참되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십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말을 걸어오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돌아가시기 전과 똑같은 목소리로, 똑같은 사랑의 마음으로, 똑같은 자상한 얼굴로 불안과 공포에 떠는 우리들을 안심시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지니고 계신 절대불변의 속성, ‘극진한 사랑’을 먼저 제자들에게 보여주심을 통해
당신의 부활이 참됨을 입증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불신과 의혹으로 가득 찬 제자들 앞에 예수님께서는 극단적 방법을 선택하십니다.
두 번 다시 보기조차 싫은 십자가의 상흔, 손과 발에 뚫린 대못 구멍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극진한 노력 앞에 제자들은 의혹의 시선을 거두어들입니다.
스승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다는 사실 앞에 너무나 기뻐 어쩔 줄 모릅니다.
우리들의 나약한 신앙을 굳게 하시려고, 흔들리는 우리의 믿음을 붙들어주시려고 당신께서 하실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시는 부활 예수님이십니다.
머리로만, 지성으로만, 논리로만 모든 것을 파악하려는 사람들에게 부활의 신비는 항상 베일에 가려져 있기 마련입니다.
진정으로 부활을 믿고, 느끼고, 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한가지뿐입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럼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럼 부활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럼 매일이 부활일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2021년 4월 11일 부활 제2주일, 하느님 자비 주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의 자비를 가득 머금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숨을 불어 넣으시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모인 곳에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을 태초에 하느님에게서 숨을 받아 생명체가 되었듯이, 부활하신 예수님에게서 숨을 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용서"를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명하신 대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제자들이 앙심이나 복수심, 미움이나 증오에서 그 사명을 시작하지 않기를 바라시기 때문일 겁니다. 스승을 죽음으로 내몰고 제자들의 생명마저 위협하는 무리들에 대해 제자들이 두려움과 원망, 적대감을 갖지 않도록 그들 마음에 사랑의 성령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이미 그들을 용서하셨지요.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어둠의 세력의 하수인이 된 이들에 대해 예수님은 연민의 사랑까지 품으셨을 겁니다.
그러니 당신을 버리고 달아났던 제자들은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지금 예수님은 그들의 잘잘못을 따지거나 서운함을 토로하러 오신 게 아니시지요. 그분은 사랑에 사랑을 더하러 오셨습니다. 그분이 드러내 보여 주신 사랑의 상처는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증거합니다. 용서 또한 마찬가지로 주님의 증거입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요한 20,27)
하필 예수님이 오셨던 자리에 부재했던 토마스는 예수님을 만나 들떠 있던 동료들에게 '그분 상처를 확인하고야 믿겠다'고 어깃장을 놓았지요. 예수님은 그를 위해서 수고로이 다시 나타나시길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사랑은 기싸움이 아니라 포용이고 용서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그러한 분을 어찌 믿지 않겠으며,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토마스의 고백은 주님의 용서와 자비를 체험한 모든 이의 고백입니다. 사랑의 상처와 용서, 자비야말로 그분이 주님이심을 증거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초대 교회 신자 공동체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들 가운데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사도 4,34)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서로를 돌보며 가진 바를 나누고 함께 살아갑니다. 누구도 가진 게 넘쳐 사치와 향락으로 제 영혼을 좀먹지 않고, 누구도 가진 게 없어 굶주리거나 움츠리지 않는 세상, 어쩌면 하느님의 숨을 받은 이들이 보여 주는 가장 충만하고 아름다운 상태일 겁니다.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사도 4,33)
모두가 하느님 숨을 받은 그분 모상성을 살아가면 모두가 은총을 누리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부유해지려 하지 않으면 모두 부유해질 것이며, 모두 가난해지려고 하면 아무도 가난해지지 않는다."(피터 모린)는 말이 떠오릅니다. 이념이나 시스템에 의존할 게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자비의 마음을 가지면 가능한 일입니다.
제2독서에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닮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이야기합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1요한 5,1)
하느님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분 자녀인 우리 형제들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자비로울 때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서 사랑이신 당신을 증거하십니다. 우리가 베푸는 자비와 사랑은, 형제들이 주님을 보지 않고도 믿는 이유가 됩니다.
우리는 겸손한 나눔과 기꺼운 희사로써 형제가 지고 있는 물질적 부채를 덜어 주고, 용서로써 마음의 부채 또한 가볍게 해 그를 풀어 줍니다. 그로써 우리도 하느님께 지고 있는 영혼의 빚을 탕감받지요. 꼭 그걸 바라고 계산해서 한 행동이 아니지만, 하느님은 기억하십니다. 당신의 또 다른 자녀에게 베푼 형제적 사랑을 그분은 결코 잊으실 수 없습니다. 이 구체적 자비와 사랑은 모두를 행복하게 합니다. 이 은총의 호환으로 "모두가 큰 은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의 자비 주일인 오늘, 우리 삶에서 베풀어 주신 주님의 자비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은총의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용서와 자비, 사랑이 절실한 형제들을 위해 한 걸음 나아가 손 내미는 은총의 전파자가 되면 더욱 좋겠지요.
우리 안에 충만한 사랑과 자비를 보고, 우리의 형제들이 주님께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을 고백할 것입니다. 주님을 증거하는데 그만한 것은 없답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우리, 자비를 실천하는 우리는 행복합니다.
♡알타반의 말씀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