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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계신 우리의 보혜사 예수 그리스도
요한일서 2:1-6
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2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6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나의 자녀들아” (테크니아 무)!
이렇게 부르는 것은 사도 요한의 마음이 이 서신을 받는 성도들을 향해 얼마나 사랑과 애착이 큰지를 보여주는 진실한 표현입니다.
저도 제 손주를 보면 “나의 자녀들아”라는 말이 어떤 감정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을 향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한없이 사랑하는 그런 마음이 있으니, 이런 감정을 가지고 그들을 부르는 것 같습니다.
비슷한 표현이 다른 여러 곳에도 있고 요한일서에도 더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감정을 알지 못하면 성경을 읽을 때 매우 어색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 주 예수께서 (테크니아)라는 말을 제자들에게 사용하시는데 이는 이런 깊은 사랑의 감정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
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
33 작은 자들아 (테크니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3:30-31, 34-35)
자기 생명을 이제 곧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바치실 텐데 얼마나 그들을 사랑하기에 이런 표현을 하셨겠습니까? 자기 피 값으로 사신 제자들이 얼마나 사랑스럽겠습니까?
아기를 사랑하는 아름다운 엄마는 자기 아기가 병에 들어 죽을 고비를 지나게 되면 진심으로 그 아기 대신에 죽더라도 아기가 살아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하물며 예수께서 그런 마음을 이미 갖고 계시니 자기 제자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것입니까? 그 제자들이 바로 여러분이 아닙니까? 예수께서 여러분을 향해 부르십니다.
“작은 자들아!”
“아, 나의 지극히 사랑하는 내 자녀들아”
바울도 그러한 심정을 갖고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부릅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라”(갈 4:19).
바울이 해산하는 수고라고 말하고 있으니 “나의 자녀들”은 내 생명을 다 주어서라도 바르게 세워보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런 자녀들이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사도 요한은 이 서신을 받는 자들을 향해 이러한 사랑을 반복적으로 표현합니다.
“자녀들아 이제 아들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 2:28).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요일 3:7).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 4:4).
심지어 요한일서의 마무리도 이 표현으로 합니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요일 5:21).
아무튼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에서 “나의 자녀들아”라고 하며 깊은 사랑 가운데 간곡한 부탁을 합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 편지를 너희에게 쓴 이유는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요한은 “죄를 범하지 말라”라고 쓰지 않았습니다.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서신을 썼다고 말합니다. 즉, 죄를 범하지 않아야 할 이유와 또한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는 원칙을 알려주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요한일서는 요한이 거의 죽음에 가까운 때에 쓴 것입니다. 밧모 섬으로 유배를 당하기 전에 보낸 서신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인류의 역사를 담은 웅장한 서신이라면 요한일서는 사도 요한의 유언과도 같은 내용을 담은 서신입니다. 그런데 그 유언과 같은 사도 요한의 글이 목적한 바는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사도 요한이 마지막 유언처럼 남긴 이 말씀을 우리 마음에 새기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가장 깊은 마음 속에 품고 명심해야 하는 말씀 중 하나는 “아, 어떻게든 죄를 지어서는 안 되는구나. 절대로 죄를 범하지 않도록 요한의 가르침을 꼭 붙들어야겠다”라는 것입니다.
한편, 사도 요한은 우리의 본문 바로 앞에서 신자라도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
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요일 1:8-10)
즉, 우리는 죄성을 지닌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며, 또한 범죄한 후에 죄책이 들 때마다 죄를 자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약속에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를 죄를 사하여 주시고 또한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여 주신다고 합니다. 여기서 깨끗하게 하여 주신다는 것은 우리의 양심과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주셔서 다시 의로운 삶을 살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편지를 쓴 것은 “나의 자녀들아 너희가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지만, 그러나 죄를 범하게 되면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새언약의 대제사장 되시는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죄를 범하게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지는 않지만 당장 하나님과의 사귐이 단절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사귐이 단절되면 우리는 곧바로 마귀와 죄에게 종노릇 하는 상태로 전락합니다. 이때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으로 인한 죄 사함 및 죄 씻음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양심 때문에 자책 및 우울증에 빠져 어둠으로 들어가거나, 혹은 양심의 고함소리를 묵살하면서 위선자의 삶을 살면서 죄의 노예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점점 양심이 화인 맞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신자라도 죄성 때문에 이런 상태에 떨어지는 때가 종종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주면서 그럴 경우 어떻게 마귀와 죄에게 종노릇하는 상태에서 다시 나올 수 있는지 알려줍니다. 이때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로 죄와 마귀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올 수 없습니다. 오직 회개와 믿음으로 빠져 나올 수 있습니다. 물론 회개와 믿음 그 자체가 나를 구출하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보내 주신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 나아가 믿고 의지할 때 하나님은 약속에 따라 죄와 마귀의 손아귀로부터 우리를 구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책이 사라지고 성령으로 인해 죄 씻음을 확신하게 되면서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새로운 마음으로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에 이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우리를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는 사도 요한이 말합니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여기서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참으로 진실로 의로우신 예수님께 의롭다고 선언하신 사실에 기인합니다. 즉, 우리 죄인이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과는 달리 우리 주 예수님은 평생 주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지켰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분의 완전한 순종으로 인하여 실제로 의로우신 분이라고 하나님께 인정 받으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라”(롬 2:13).
“그리스도의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 5:18).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요일 2:29)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로우니 …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 3:7-8).
십자가의 죽음까지 마다하고 평생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신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에 대해 하나님은 그를 의롭다 인정하시고 영화롭게 하여 주신 것입니다.
[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 2:8-11)
그런데 그렇게 완전한 의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대언자로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죄를 범하여도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면 우리가 범한 죄 문제가 해결되고 신속히 하나님과 사귐을 회복하게 되면서 새 출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놀라운 것은 여기서 개역개정이 ‘대언자’라고 번역한 원어는 (파라클레톤)입니다. 원형으로는 (파라클레토스)인데 그 헬라 원어의 뜻은 “나를 돕기 위해 곁에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법적으로 증거를 가지고 나를 변호하는 분, 옹호하는 분이라는 뜻이고, 일반적인 의미로는 상담자, 돕는 자, 보호하는 자, 위로자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놀랍게도 이 동일한 단어를 성령께 사용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16-18).
여기서 또 다른 보혜사가 성령이신데 원어로 (알론 파라클레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 자신도 보혜사이신데, 또 다른 보혜사를 이 땅에 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내가 너희를 고와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으로 주의 백성들에게 돌아오셨습니다. 이는 그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육체적으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 우편에서 중보자의 역할을 하십니다. 무엇보다 본문에서 ‘대언자’로 번역된 ‘보혜사’의 역할을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분의 영을 보내셨으니 그 영은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또 다른 보혜사”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십니다.
지금 ‘대언자’는 우리가 범한 죄 문제를 해결하는 관점에서 언급된 칭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의 역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언자로서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으로 서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자기의 생명으로 치른 영원한 속죄를 근거로 하여 우리의 죄악들을 하나님께서 사하여 주실 것을 변호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러한 보혜사 또는 대언자 역할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
사실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 역시 우리 안에서, 그리고 이 땅에서 중보의 역할을 하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6-27).
그러므로 성령으로 충만하여질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들을 위해 성령을 따라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우리 주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 18:21-22).
이렇게 말씀하신 주 예수께서는 지금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의 죄를 얼마나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한없이 끝까지 용서해 주십니다. 자신의 속죄를 근거로 주의 죄사함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와 새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신자의 죄악을 아들의 속죄를 근거로 하여 얼마든지 용서해 주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가 흘러나와서 우리의 죄를 한량없이 사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4-16)
“믿는 도리를 굳게 잡으시기 바랍니다.” 믿는 도리가 무엇입니까? 믿음의 원칙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해 마련해 주신 복음의 원칙을 의지하여 우리가 행여 어떤 범죄를 저질렀더라도 당장 돌이켜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과 사귐을 다시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 속에서 맺은 언약이기 때문에 기계적, 또는 악용하는 자세로 복음의 원칙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악용하는 자들이 있다면 하나님의 진노를 피치 못할 것입니다. 즉, “아, 많은 죄를 짓고도 보혜사되시는 대제사장에게 나아가면 죄사함과 죄 씻음을 받을 수 있다고 하니 더욱 많은 죄를 짓자”라는 논리를 펴는 악한 심보는 복음의 은혜를 더럽히는 간교한 사탄적 마음인 것입니다.
이런 논리와 자세를 가진 자들이 바울에게도 도전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강력하고 분명하게 대답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1-2).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 6:14-15).
우리는 이와 같은 식으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죄 사함의 은혜를 업신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내가 지은 죄악에 대해 나의 죄성으로 인한 것임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마음을 가진 진실한 신자라면 지은 죄로 인해 너무 오래 낙심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즉, 지은 죄 때문에 우울증에 걸려 자살하거나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아파하며 자신을 환멸하되, 하나님의 새언약이신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심지어 주의 징계를 받는 상태라도 계속 회개하며 더욱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에 2절에서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역할을 선포합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2).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 제물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면 그분의 화목 제물 되심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습니다.
한편, 여기서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을 원어로 보면 (톤 하마루티온)이라 하여 복수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가 아니라 ‘죄악들’로 번역되어야 마땅합니다. 즉, 우리 신자들이 짓는 죄악들에 대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보혜사 또는 대언자로서 우리의 죄악의 문제를 친히 해결해 주시는데 그 근거는 자기 자신이 화목 제물이 되신 희생양이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화목제물은 원어로 (힐라스모스)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속량의 효력은 대언자의 역할과 함께 신자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얼마든지 화목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뿐만 아니라 온 세상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그런 효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무한한 화목의 효력을 가진 희생 제물이신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을 통일 시키는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범죄한 신자가 부활하셔서 영원히 살아계시는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에게 나아가면 대제사장이시며 또한 영원한 희생제물이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그 신자의 범죄가 완전하게 해결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안의 있는 옛사람에게 져서 비록 범죄할지라도, 그래서 하나님과의 사귐이 서먹해지더라도 내 안의 옛사람이 주의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고 인정하면서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오면 내가 지은 죄악들에 대해 철저하게 사함 받고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범죄한 상태에 있을 때 우리에게서 나는 향기는 하나님께 더러운 죄의 냄새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죄악의 냄새가 제거되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오실 수 없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보혈과 우리의 제사장 되시는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그에게 가서 죄 사함과 죄 씻음을 받고 오라고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화목제물입니다. 살아있는 제사장의 역할입니다. 오직 그 제물과 제사장의 역할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함과 공의가 만족되며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범죄하였더라도 그리스도께 나아가면 죄 사함과 죄 씻음을 받고 하나님과 다시 사귐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조치를 누가 하셨냐 하면 바로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가 무한하신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많은 죄악을 범하고 자신을 혐오하는 가운데 빨리 새롭게 일어나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힘차게 달리기를 바란다면 우리의 화목제물이시며 영원한 대언자이신 그리스도께 나아오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은 죄악의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주 예수께 나아가 마음을 새롭게 하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한편, 십자가의 속량을 치르신 화목제물이며 동시에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계신 부활하여 영원히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님을 사도 요한은 계시록에서 환상 가운데 “일찍이 죽임 당하신 어린 양”으로 보았습니다.
[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9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 그들로우리하나님앞에서나라와제사장들을삼으셨으니그들이땅에서왕노릇하리로다
](계 5:6-10)
그러므로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해 슬픔 가운데 있더라도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자는 범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고 도리어 죄 사함과 죄 씻음으로 인한 평강과 감사와 기쁨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범한 신자들이여! 당장 그리스도께 나아오기 바랍니다. 그분은 우리의 소망과 기쁨과 평강의 반석이십니다.
[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 11:28-30)
그리고 무한하게 감사한 것은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된 자들은 그들이 어떤 죄악을 범하였더라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와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의 중보 기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결코 버림 받는 일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
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3-35, 37-39)
이와 같은 화목 제물 되시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이제 3절부터 6절은, 이러한 참 사랑이 보장된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죄 사함을 받고 죄 씻음을 받은 상태에서 하늘 아버지와 사귐을 갖게 되면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게 된다고 말합니다. 지금 죄 사함과 죄 씻음을 받은 상태에 있으니 우리의 마음은 평강하며 감사와 기쁨 가운데 있습니다. 바로 이때 우리는 계속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주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우리 안에서 온전하게 되는 것으로써 우리는 계속적으로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이 편지를 쓴 목적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즉,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고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 자신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아버지의 계명을 지킴 같이 그리스도를 아는 너희도 주의 사랑 안에서 주의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
한편, 3절의 말씀을 원어로 보면 “그를 안다”라는 말이 완료형 동사로 되어 있습니다. 즉, 그를 알아온 상태로서 이는 그리스도와 언약을 맺고 성령으로 거듭난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즉, 이미 과거에 예수님과 언약을 맺은 소위 하나님의 참된 자녀요 그리스도의 참 제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태에 있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바로 “주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습니다. 이는 우리 마음 속의 깊은 의도를 알려주는 표현법으로써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언제나 주의 계명들을 지키려는 의도가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자녀요 주의 제자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1절부터 보면 우리는 비록 죄인들이라서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죄를 범하게 되는 경우들이 있을 수 밖에 없지만 그럴 경우 참 신자들에게는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범죄를 합법적으로 해결해 주시는 분이 있는데 바로 우리의 화목제물이신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고 그리스도를 알아온 사람은 주의 계명들을 지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완전히 모든 계명들을 항상 지키는 경우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경우는 참 신자라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의 계명을 지키지 못할 경우 그 사실에 대해 아파하면서 회개하고 대언자이신 의로우신 예수께 나아와 죄 사함과 죄 씻음을 받는다면, 그리고 그 후 다시 주의 계명을 지키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나아간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한,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를 아는 한, 또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상태에 있는 한, 그는 주의 계명들을 지키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러면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상태에서는 신자는 그의 계명을 지키도록 되어 있기에, 만일 그리스도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다고 선포합니다.
한편, 4-5절에서는 거짓말하는 가짜 신자를 드러내고 진짜 신자를 구별해 냅니다. 다같이 4-5절을 읽겠습니다.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여기서 보면 그를 “아노라”고 할 때 원어는 (에그노카)라고 되어 있는데 예수님을 알아왔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와 언약을 맺은 참 신자라는 뜻입니다. 이에 NLT 성경은 완료형으로 된 “아노라”를 “belong to”라고 번역했습니다. 즉, “그리스도께 속하였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즉, 나는 그리스도와 언약을 맺은 참 신자라고 말하면서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라는 뜻입니다. 즉, 가짜 신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짜 신자를 분간하는 가장 중요한 표현은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인데 원어로 (테레온)이라고 하여 분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주의 계명들을 늘 지키지 않는 자라는 뜻이고, 주의 계명들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는 뜻이며, 그 계명들을 진지하게 지킬 의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하신 명령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런 자들은 사실 그리스도를 감사하지 않는 자이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목 제물 및 대제사장이 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에 대해 바른 인식과 감사와 충성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주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에 마음이 가 있는 않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바로 가짜 신자입니다.
하지만 참 신자들은 비록 내 안의 죄성으로 인해 죄를 범하는 일이 있더라도 지은 죄로 인해 가슴 아파하고 안타까워하면서 하나님이 보내주신 대언자이신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 즉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속량을 치르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셔서 영원히 살아계신 대제사장이 되신 그리스도께 나아가 그분을 더욱 의지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사귐의 상태에서 다시 주의 계명들을 지키려고 온 마음과 뜻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주의 계명들을 하나씩 더 많이 더 오래 지켜나가는 성장을 보이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더욱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인 것을 확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바르게 안다는 것은 점점 더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연합함으로 더욱 주의 계명들을 온전히 지켜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사도 요한이 이 서신을 쓴 의도처럼 우리가 “죄를 범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사람 안에서 온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상태가 진행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상태를 확인하는 가장 중요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고 주와 연합한 상태에서 주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그대로 우리도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의 완성이니 비록 이 땅에서 완전하게 성취되지는 못할 지라도 우리의 삶과 성품에서 사랑이 계속 무르익으면서 사랑의 결실들을 맺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오늘 요한일서 2장 1절에서 6절을 통해 참 신자의 가장 중요한 현상은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사람 즉, 주의 ‘말씀’을 지키는 자 안에서 온전하게 되는 것”임을 발견합니다. 또는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하게 된 사람은 주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인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여기서 “온전하게 되었다”라는 번역의 원어를 보면 (텔레이오우)라는 완료형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 뜻은 “완성되다, 성취되다, 실행하다. 성공적으로 마치다. 이루어지다”라는 뜻입니다. 즉, 주의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이 “이루어졌다, 완성되었다”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완전하며 영원한 진리이기 때문에 현재든, 과거든, 미래든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가 비록 죄를 범하는 일이 있더라도 주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며 주를 감사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말씀을 지키면 이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즉, 우리 안에서 말씀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말씀을 지키는 깊이와 시간이 많아진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더욱 더 우리 안에서 성취되고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 22:37-40)
이러한 주의 사랑의 성취가 우리에게 나타나면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주변과 세상과 역사에 빛과 소금의 영향력을 나타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열매라는 개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때 열매는 성장하는 과정에 있기에 추수로 따 먹을 수 있는 열매라기보다 다만 분명하게 성장하며 변화하는 열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복음과 관련해서 “자라게 하는지라”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합니다.
“머리를 붙드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골 2:19).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골 1:10).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골 1:6).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5-1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6-7).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막 4:30-32).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막 4:26-28).
히브리서 6장 7-9절은 우리의 본문에 대한 해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자라나면서 보여주는 열매들이 그 사람의 정체입니다. 참으로 그 사람에게서 자라나는 열매에 의해 그가 주 예수님께 속한 자인지 아닌 자인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만일 인생의 세월을 보내면서 계속 죄악과 관련하여 악화되면서 결국 쓴 열매를 맺는 신자라면, 그러면서도 무엇보다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는 가룟 유다와 같은 가짜 신자인 것입니다.
하지만 비록 처음에는 여러 죄악이 드러나며 엉성하고 투박한 성품이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선한 열매가 자라나고 결국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성령의 열매를 맺어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면 그 사람은 참 신자인 것입니다.
[
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히 6:7-9)
이러한 변화는 우리 주 예수님께도 있었습니다.
[
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진행형입니다)
9 온전하게 되셨은즉 (주의 사랑이 그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뜻입니다)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히 5:8-10)
그러므로 남은 삶은 더욱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더욱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살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계속 변화하여 자라나기 바랍니다.
[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 3:11-14)
그리고 주의 추수 때에 우리가 맺어 놓은 열매의 풍성함에 따라 영원한 영광이 결정 날 것입니다. 즉, 내 안의 성품이 얼마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았는지, 또한 세상을 향해 얼마나 선한 영향을 끼치고 얼마나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켰는지에 따라 영원한 영광이 결정 날 것입니다.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계 22:14).
그러나 그리스도를 모르는 거짓 신자들과 불신자들은 그들이 지은 죄악의 분량에 따라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
7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9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10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이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살후 1:7-10)
그러므로 주 하나님을 경외하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를 경외한다면 주의 계명을 지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계명을 지킬 수 없는 내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더욱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살아계신 우리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살고자 할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죄사함을 받고 죄씻음을 받으면서 새롭게 일어나서 또 달려갈 것입니다.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사 50:10).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시 97:10-11).
사랑하는 여러분!
주의 말씀을 늘 묵상하며 마음에 새기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을 따라 행하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행여 마음에 가책이 생기는 실수나 범죄나 사건들이 있으면 신속히 하늘에 계신 우리의 보혜사 예수 그리스도, 즉 우리의 영원한 속량이시며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죽임 당하신 어린양 우리 주 살아계신 그리스도께 나아와 죄사함과 죄씼음을 받고 하나님과 교통하며 사귐을 갖는 상태를 유지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더욱 주의 계명을 지키고자 온 마음을 다하기 바랍니다. 주의 말씀의 성취는 사랑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즉, 범죄하지 않는 것은 다름 아닌 율법의 완성으로서 사랑의 성취로 이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이 귀한 사도 요한의 말씀으로 더욱 세월이 지날수록 그리스도의 온전한 형상까지 자라나는,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성취되는 참된 신자의 삶이 이어지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pyright@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