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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중국행 (1)
중국에서 유대인들이 살게 된 계기는?
▲1901년 영국 고고학자 오럴 스테인이 신장 허톈에서 발견한 A.D. 8세기 유대인 상인의 히브리어로 기록된 페르시아 서신.
중국에서 유대인들이 언제부터 살게 됐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선 우선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추적해봐야 한다.
유대인이 세계 곳곳으로 흩어진 것은 참담한 역사의 산물이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B.C. 1010년 이스라엘 왕국은 죽은 사울 왕의 아들을 따르는 북쪽 11개 지파와 다윗 왕을 따르는 유다 지파로 나뉘었다. 다윗 왕은 7년 6개월이나 기다린 끝에 12개 지파를 모두 끌어안으며 통일 왕국을 일궈냈다. 그러나 처음엔 상황이 만만치 않았다.
유다 지파만의 왕이었던 다윗에게 7년 반 뒤 북쪽의 실력자 아브넬이 찾아왔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하지만 다윗의 측근 요압이 사사로운 이익에 얽매어 아브넬을 암살해 상황이 꼬이기 시작했다. 다윗이 요압을 시켜서 아브넬을 암살했다고 많은 사람들이 여겼다. 오해는 눈덩이처럼 커져갔다. 남북 모두 다윗을 믿지 못할 사람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뒤틀려진 상황 속에서 다윗 왕은 애가를 지어 불렀다. 종일 금식하며 울기도 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다윗과 아브넬의 죽음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됐다. 요압의 단독 소행임을 믿게 된 것이다. 다윗은 7년 6개월간 절치부심 끝에 각 지파 장로와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 통일을 달성한 뒤 33년간을 더 통치했다.
그러나 어렵사리 만들어진 통일 왕정은 다윗 왕 치세와 솔로몬 왕 치세의 70여년을 이어오다가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르면서 분열되기 시작했다. B.C. 930년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즉 ‘한 민족, 두 국가’ 체제가 된 것이다. 르호보암을 따르던 유다 지파, 베냐민 지파를 제외하곤 10개 지파 모두가 여로보암을 추종하며 북이스라엘을 형성했다. 10개 지파는 르우벤, 시므온, 갓, 잇사갈, 스블론, 에브라임, 므낫세, 단, 아셀, 납달리 등이다. 그러면서 12지파로 이뤄진 이스라엘 민족을 200여 년간 철저하게 분리됐다.
급기야 B.C. 722년 앗시리아(앗수르)의 침략으로 북이스라엘이 패망하자 10개 지파는 포로로 전락하게 됐다. 결국 수많은 이들이 흩어지게 되고 점차 지파 개념이 소멸하게 됐다. 이는 인위적인 인구 혼혈정책을 통해 반란을 미연에 방지하도록 한 앗시리아의 교묘한 식민지 정책때문이었다. 북이스라엘 사람들을 잡아다가 앗시리아 제국 내 여러 나라로 흩어져 살게 했다.
구약성경 열왕기하 17장 3-6절을 보면 앗시리아의 관련 정책을 알 수 있다. “호세아 제구년에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이스라엘 사람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끌어다가 고산 강 강에 있는 할라와 하볼과 메대 사람의 여러 고을에 두었더라”
앗시리아는 북이스라엘에도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 이주해와 살도록 했다. “앗수르 왕이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매 그들이 사마리아를 차지하고 그 여러 성읍에 거주하니라.”(열왕기하 17장 24절)
그러면 북이스라엘의 멸망에 따라 역사의 기록에서 사라진 10개 지파는 과연 어디로 갔다는 말인가. 메소포타미아 등 중근동을 넘어 아시아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졌을 것이다. 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는 ‘유대고대사’에서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뒤 앗시리아 통치자가 유대인들을 메디아와 페르시아 경내, 즉 이란 내지로 대거 이주시켰다고 서술했다.
아프가니스탄 부족 가운데 두라니(Durrani)인들은 자신을 ‘이스라엘의 후손’이라고 불렀다는 점에서 사라진 10개 부족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이들은 실제로 외모가 유대인들과 비슷할 뿐 아니라 고대 히브리법전과 유사한 법률 체계를 갖고 있었다. 열왕기하 17장에 언급된 하볼은 인도의 한 지역(하이바)를 지칭한다는 점에서 사라진 10개 지파 중 일부가 인도까지 진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설상가상으로 B.C. 586년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면서 나머지 2개 지파도 포로 상태에 놓이게 됐다. 바벨론은 3차례에 걸쳐 남유다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 B.C. 605년 바벨론으로 끌려간 1차 포로 가운데 훗날 바벨론과 페르시아에서 재상으로 활동하게 된 다니엘이 포함돼있었다. B.C. 598년 남유다 왕국의 여호아긴 왕과 에스겔을 포함한 예루살렘의 고위층과 우수한 인재 1만 명 등이 2차 포로로 끌려갔다.
포로 가운데 바벨론 성을 쌓을 수 있는 기술자들이 상당수 포함됐다. B.C 586년 남유다 패망과 함께 예루살렘에 남아 포도농사 등을 지을 수 있는 최소한의 인력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3차 포로로 끌려갔다. 이때 예루살렘에는 쓸만한 것이라곤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서 잠깐 유대인이란 공식 명칭이 등장한다. 바벨론은 여러 나라에서 끌고 온 각 나라 사람들을 구분해 남유다 사람들을 유대인이라고 불렀다.
약 50년 이후 중동의 최강자가 된 페르시아는 바벨론을 멸망시킨 뒤 유대인들을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했다. B.C. 5세기 중엽까지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성전도 재건하도록 했다. 그러면서도 페르시아 왕조는 B.C. 5세기부터 B.C. 4세기까지 일부 유대인들을 페르시아뿐 아니라 카스피해의 남쪽 해안에 있는 메디아로 이주시켰다.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키루스 2세)의 조서 내용이 담겨있는 구약성경 에스라 1장 4절을 보면 유대인 모두가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머물러 살든지 그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그밖의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에 세울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예물을 기쁘게 드릴찌지니라 하였더라.”(에스라 1장 4절)
훗날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한때 그리스의 침략을 받기도 했지만 마카비와 하세문 왕조를 세워 독자세력화에 성공했다가 결국 로마의 침공으로 받아 속국이 됐다. 그 뒤 A.D. 135년 유대인들은 완전히 예루살렘으로부터 쫓겨나게 됐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올 수 없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 성벽조차 바라볼 수 없게 됐다. 이를 어길 시에는 참형에 처해졌다.
▲이스라엘 텔아비브에 있는 유대인 디아스포라박물관(베드 하트포소드)에 전시돼있는 카이펑(開封) 회당 모형.
2006년 11월의 일이다. 인도 뭄바이의 해안가 명물 ‘게이트 오브 인디아’ 인근의 허름한 게스트하우스 레드 실드 하우스. 110명의 남녀 어른과 어린이들이 투숙하고 있었다. 이들은 인도 동북부의 미조람 주에서 살던 인도인들이었다. 외부인과의 접촉이 금지된 상태에서 이스라엘로 돌아갈 날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이들은 유대인 후손으로 판명된 사람들이었다. 당시 인도신문 ‘타임스 오브 인디아’의 보도에 따르면 1981년 미조람 인도인들에게 한 연구자가 찾아왔다. 그는 ‘브레이 메나쉐(히브리어로 ‘신의 자녀들’이란 뜻)‘라고 불리는 미조람의 부락민을 사라진 10개 부족의 후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2004년 콜카타의 연방 법의학연구실는 DNA실험결과, 이 부족이 이스라엘의 유대인과 간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보고서를 냈다. 2005년 5월 이스라엘의 고위 유대교 성직자가 공식적으로 브레이 메나쉐를 유대인의 후손이라고 인정했다. 이어 2005년 9월 218명의 부락민이 유대교로 개종했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노예생활에서 탈출한 유대인들이 각지로 흩어진 끝에 인도로 흘러들어와 거주하게 됐다는 점이다. 현재 인도에는 5개의 유대인 공동체가 형성돼있다. 인도의 유대인은 4500-5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574년 전인 B.C. 562년 유대인 상인들로 인도 남부 코친(Cochin)에 들어온 '코친 유대인'과 2100년 전 뭄바이를 끼고 있는 마하라슈라주에서 이주한 '베네 이스라엘', 250년 전 이라크와 이란, 아프가니스탄에서 넘어온 '바그다디 유대인', 동북부 마니푸르와 미조람 등에서 거주하는 '브레이 메나쉐', 내륙의 안드라프라데시주에서 살며 현지어인 텔루구어를 사용하는 '베네 에프라임' 등이 대표적인 인도 유대인 커뮤니티다.
'인도판 9·11테러'로 불리는 2008년 뭄바이 테러에서 유대인 집단거주촌인 ‘나리만 하우스’가 테러범들의 인질극 주 무대가 됐다. 이때 미국 국적의 유대인 랍비 부부를 포함한 9명이 희생됐다. 인도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전하거나 정치적 목소리를 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테러의 표적이 된 것이다.
잠시 예수의 제자였던 도마가 인도에서 활동한 기록을 살펴보자. 도마는 20년간 남인도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케랄라(Kerala) 지역의 팔라유르(Palayur)에 사는 한 가족이 필사본으로 보관하고 있던 이야기에 따르면 도마는 상인 하반(Habban)과 함께 케랄라의 말리안카라(Maliankara)이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에 도착해서 이적과 기적을 행하며 세례를 주었고 교회를 세워 말씀을 전했다. 도마의 흔적은 인도 남서부 말라바 해안(Malaba Coast)의 7개 교회와 도마의 순교지인 마일라포르가 있는 첸나이 지역에 남아 있다. 도마가 북인도에서 서남해안으로 배를 타고 올 수 있었던 이유는 이미 인도의 서남해안의 케랄라지역과 코친지역에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남유다의 이스라엘인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인도의 서남해안 지역까지 도망쳐 유대인 정착촌을 형성한 것이다.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중국행(2)
중국에 오래 전 유대인이 들어왔다는 증거는?
▲ 1902년 '중국유대인구원협회' 초청으로 상하이에 온 8명의 카이펑 유대인 후예
한편 유대인들은 유량 속에서도 자민족의 종교와 정신을 이어갔다. 하지만 오랫동안 타민족과의 융합으로 인해 외모와 언어, 생활습관 등에서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 역사와 지역적 차이로 인해 유럽으로 이주한 유대인은 크게 세파디(Sephardim) 유대인과 아시케나지(Ashkenazim) 유대인으로 분류된다. 세파디 유대인이라는 이름은 스페인에서 기원한다. 유대인들은 서쪽으로 이동하던 중 장기간 스페인에서 거주하게 됐다. A.D. 10세기 전후 이들의 일부가 지중해 연안과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와 아프리카 남부 등지로 퍼져나갔으며 ‘동방의 유대인’으로 불렸다.
반면 유대인들은 자신의 나라가 로마제국에 의해 멸망한 뒤 이탈리아로 끌려가게 됐다. 이때 도망쳐 나온 유대인들은 남부유럽으로 숨어들었다. A.D. 476년 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많은 유대인들이 중부유럽과 서유럽으로 이주했다. 이들은 이른바 아시케나지 유대인, ‘서방 유대인’이라고 불렸다.
세파디 유대인은 1840년 이후에는 중국 상하이 등지로 진출, 이른바 ‘경제형 이민’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아시케나지 유대인은 폴란드, 러시아 등을 거쳐 하얼빈 등 중국 동북부로 이주했는데 이는 경제적 동기에 따른 것이 아니라 1880년대 러시아와 동유럽에서 일어났던 반유대주의(Anti-Semitism) 불길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1940년대의 한 통계에 따르면 당시 중국 내지에서 살고 있던 유대인이 4-5만명에 달했다. 이들 가운데 절반은 유럽에서 온 난민들이었고 그중 약 50%는 러시아에서 온 유대인이었다. 상대적으로 재력이 상당했던 세파디 유대인은 1000여명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중국에서의 유대인 흔적을 본격적으로 알아보자. 이와 관련해서 서양학자들은 ‘주대(周代)이전설’ ‘주대설’ ‘한대(漢代)설’ ‘당대(唐代)설’ 등을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중국학자들은 ‘주대이전설’과 ‘주대설’을 부정할 뿐 아니라 ‘한대설’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갖고 있다. 반면 ‘당대설’에는 힘을 실어주고 있다. 판광단(潘光旦)은 ‘북송(北宋)중엽설’을 주장한다. 일련의 유대인들이 천죽(天竹, 현재 인도)을 거쳐 북송의 수도 둥징(東京, 현재 카이펑, 開封)에 도착한 뒤 송 황조의 융숭한 환대를 받는 한편 거주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이때의 유대인들은 우즈베키스탄 3대 도시인 부하라에서 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하라는 A.D. 9세기 사만 왕조의 보호 속에서 각지에서 모여든 성직자, 과학자, 상인 등을 쉽게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오아시스 도시들을 연결하는 교역의 십자로이자 교통의 요충지였다. 중국 수당(隋唐) 시대에는 안국(安國)으로 불렸다. 유대인들은 카이펑에서 한족, 회족 등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민족 고유의 관습과 종교 신앙을 지키고 거주 이전, 취업과 취학, 토지매매 등에서 중국인과 동일한 권리와 대우를 받았다. 표면적으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어떠한 차별대우도 받은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안전한 상태에서 유대인들은 특유의 상술을 발휘하면서 카이펑 일대에서 부유한 계층을 구성하게 됐고 유대인 특유의 종교 활동자유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유대인의 유입 노선과 관련해서는 중국학자들의 주장이 ‘페르시아설’ ‘인도설’ 등으로 나뉜다. 육로인지 해로인지 논쟁도 일고 있다. 천위안(陳垣)은 ‘페르시아설’과 ‘해로설’을 주장한다. 판광단은 부분적으로 천위안의 관점에 동의하면서도 “인도로부터 해로를 통해 중국으로 유입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린메이춘(林梅村)은 고증을 통해 유대의 옛 비석 중에 있는 ‘천축(天竺)‘이 ‘서역(西域)‘의 동의어라고 밝혔다. 중국학자들은 중국 유대인들의 분포지역이 비교적 넓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중국 유대인의 존재를 서구에 알린 최초의 보고는 아랍의 여행가 압불 제이드 알 하산(Aboul Zeyd al Hassan, 아부 자이드 Abu Zaid로도 알려짐)가 A.D. 9세기 중국 남부 항구(광둥으로 추정됨)에서 발생한 대학살에 대해 언급한 데서 유래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는 ‘황소(黃巢)의 난’으로 12만명의 무슬림, 유대인, 크리스천과 페르시아계 조로아스터교들이 살해당했다고 전했다. 황소는 당(唐)나라 말기의 농민반란의 수령으로 왕셴즈(王仙芝)의 반란에 호응해 군사를 일으킨 뒤 전국 각지를 전전하면서 가는 곳마다 관군을 격파하고 창안(長安, 현재 시안 西安)에 입성해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올랐지만 관군의 반격으로 자결했다.
베니스의 마르코 폴로는 13세기 쿠불라이 칸(칭기즈칸의 손자로 원나라를 세움)이 통치하는 칸발리크(오늘의 베이징 北京, 원나라 수도)에서 유대인들과 만난 적이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푸젠(福建)성 취안저우(泉州)의 가톨릭 신부인 페루지아의 앤드류(Andrew of Perugia)가 1300년 유대인들을 개종시킬 수 없다는 내용의 편지를 자신의 로마 상급자에게 전했다. 진 디 마리그놀리(Jean di Marignolli)는 1342년 칸발리크에 종교문제로 대 설전을 벌였다. 아랍 바투타(Arab Ibn Batuta)는 1346년 항저우(抗州)의 유대인 공동체에 대해 썼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상술한 내용들은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증명된 바 없다는 한계가 있다.
현재 중국학계에서 유대인들이 카이펑에 거주하기 시작한 때라고 폭넓게 받아들이고 있는 시기는 A.D. 998년이다. 천창치(陳長琦) 웨이첸즈(魏千志) 등이 주장하는 학설로 이들은 카이펑에서 유대인이 거주하기 시작한 뒤 165년간 발전해나가면서 유대회당을 건립하고 유대인의 종교생활 또한 규격화됐다고 주장했다.
역사 기록으로 정확하게 유럽에 중국의 유대인 존재가 전해진 것은 1605년 6월 24일 이탈리아 예수회 신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베이징에서 카이펑에서 온 유대인 아이톈(艾田, 아이카오롄 艾考廉으로 불리기도 함)을 만난 이후이다. 그전까지는 중국에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아이톈은 리치에게 유대인이 수세기 동안 중국에서 살아왔으며 카이펑에는 유대인 커뮤니티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로써 외부 세계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중국의 유대인은 그 유입 경로에 대해서는 매우 명료하게 서술돼있는 것은 없지만 로마의 핍박을 피해 동으로 이동하다가 실크로드를 통해 카이펑으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A.D. 8세기부터 일단의 유대인들이 해로를 이용, 중국과 상거래를 하면서 연안지역에서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는 학자가 있다.
결론적으로 유대인이 오래전에 중국에 들어왔었다는 현존하는 증거는 많지 않지만 종합해보면 몇 가지로 좁힐 수 있다. 첫째, 당나라 때이다. 영국의 고고학자 오렐 스테인(Aurel Stein)이 1901년 중국 서북부 신장(新疆)의 허톈(和闐)에서 A.D. 718년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한 유대상인의 비즈니스 편지 한 통을 발견했다. 히브리어로 쓴 편지는 양떼를 사고 판 내용을 담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프랑스 고고학자 폴 펠리오(Paul Pelliot)가 1908년 둔황 부근에서 히브리어로 된 기도문을 찾아냈다. 중국 종이에 기록된 이 기도문은 A.D. 8세기 말에 쓴 것으로 판명됐다.
또 다른 사료에 따르면 유대인이 북송시절 벤량(汴梁, 東京, 현재 카이펑 開封)에서 살았으며 유대인으로부터 서양의 직물을 조공으로 받은 송나라 황제가 크게 기뻐하며 조서를 내려 "중하(中夏)로 들어와 조상의 풍습을 준수하면서 벤량에서 지내도 된다"고 약속했다. 또 간단한 규정을 약정하고 자신들의 전통을 유지하면서 생활해도 좋다고 윤허했다. 이후 금(金), 원(元), 명(明)나라에 이르기까지 유대인들은 정치·경제적 지위가 높았으며 과거에도 응시해 관료가 될 수 있었고 이른바 사대부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