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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661
11월1일[모든 성인 대축일/연중 제30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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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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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Z3qjke4tCvE
[서울대교구 노동준 안토니오 신부님 집전(흑석동 본당 보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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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모두 성인이 됩시다!>
오늘 모든 성인의 날과 내일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이 딱 붙어 있습니다. 우리 모두 너무나 잘 아는 바처럼,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지상에서 우리의 목숨 역시 영원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우리가 원치 않는다 할지라도 각 개인의 종말이라고 할 수 있는 죽음은 필연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죽음 이후의 삶은? 살아생전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가에 따라 향방이 달라집니다. 평생토록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 가난한 이웃에 대한 나눔이나 배려라고는 단1도 없이 그저 흥청망청 떵떵거리며 살아온 사람들, 가까운 사람들을 끝도 없이 힘들게 만든 사람들의 미래는 암담할 것입니다.
물론 죄인을 부르러 오신 자비의 하느님이시기에 그들에게도 당신의 크신 자비를 베푸실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악이란 악만 골라 저지르는 사람들의 최후는 그 대가가 혹독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과 복음적 권고에 충실했던 사람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에 있어서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에서나 또 다른 세상에서나 행복이 흘러넘칠 것입니다.
오늘 모든 성인의 날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기억하는 대축제의 날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에 충실했던 사람들, 존재 자체로 하느님께 영광이 되고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어준 모든 사람들, 비록 이름이 온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계시는 모든 익명의 성인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오늘 모든 성인 대축일을 맞아 저는 확신합니다. 성인이란 우리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별세계에서 살다간 유별난 사람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보다 한 3분 정도 더 인내한 사람, 우리보다 조금 더 친절했던 사람, 우리보다 조금 더 사랑했던 사람들이 분명합니다.
우리보다 조금 더 따뜻함을 지녔던 사람들, 우리보다 조금 더 인간미를 풍겼던 사람들, 우리보다 조금 더 영적 생활에 투자했던 사람들이 성인들이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머무는 빛인 사람들, 이제는 어둠의 세력과 결연히 단절하고 떳떳하고 당당한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확실한 성인 후보자들입니다.
어렵고도 어려운 길이 성화의 길이지만, 어떻게 보면 조금도 어렵지 않은 길이 성화의 길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충실히 함을 통해서, 좀 더 기쁘게 살아감을 통해서, 조금만 더 기도함을 통해서, 조금만 더 양보하고 물러섬을 통해서 우리 역시 충분히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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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F65ZexAZi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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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이라니까, 이 멍청아!>
오늘은 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이고 오늘 복음은 행복 선언입니다. 우선 제목을 보고 성처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는 빌 클린턴이 선거 때 사용한 "경제라니까, 이 멍청아!"를 패러디한 것입니다. 성인이 되거나 참 행복을 원하는 이에게 저는 '정체성'을 강조하고 싶을 뿐입니다.
참 행복을 아는 존재가 바로 성인들입니다. 조던 피터슨은 행복이 인생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행복은 짧은 쾌락을 의미합니다. 오히려 그런 행복을 추구하면 참 행복에서는 멀어집니다. 그는 인생의 고통을 이겨나갈 수 있는 삶의 의미를 찾으라고 말합니다. 결국 이것도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행복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부모가 자녀를 낳을 때 자녀가 고생만 하며 살기를 바랍니까? 창조자는 자기 피조물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피를 흘리며 창조합니다. 그 덕분에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피조물이 창조자에 대한 합당한 예의입니다. 자기를 망치는 사람은 부모에게도 하느님에게도 불효하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려 합니다. 자살하는 사람도 행복하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지금 삶이 너무 고통스러워 덜 고통스러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죽음으로 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려 하는데 어떤 이들은 고통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할까요?
참 행복과 참 고통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진돗개 호순이 이야기가 있습니다. 진돗개가 첫 주인을 찾아 먼 길을 달려온 이야기는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진돗개는 더 편안할 수도 있는 곳을 마다하고 주인을 찾아오는 것일까요?
호순이는 용인시에 있는 한 사설 유기견 보호소에서 키워지고 있었습니다. 많은 유기견 중 제일 착하고 인기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보호소 소장이 장기간 병원에 입원해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나머지 유기견들은 봉사자들에게 맡겨졌고 호순이는 수원에 있는 소장의 여동생 집에 맡겨졌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호순이가 사라졌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1년 동안 찾았지만, 찾지 못하였습니다. 나이가 많아 길에서 죽었겠거니 생각하고 있을 무렵 호순이의 짖는 소리를 듣습니다. 소장은 밖으로 나가봤고 호순이가 맞았습니다. 호순이는 1년 넘게 수원에서 용인까지 자기 냄새를 추적하며 찾아온 것입니다. 호순이는 마지막 몇 년을 주인과 함께 살다 하늘로 갔습니다.
왜 진돗개들은 한 번 주인을 영원한 주인으로 여기는 것일까요? 주인의 여동생 집도 편하기는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개들도 무엇이 가장 큰 고통이고 무엇이 가장 큰 행복인지 잘 압니다. 가장 큰 고통은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알아야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호순이는 유기견이었습니다. 주인이 잠깐 있었다가 사라진 고통은 감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기견 보호소 소장이 주인이 되어주었고 호순이는 행복했습니다. 주인에게 충실하고 주인이 원하는 일을 하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먹고 생존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았다면 첫 주인을 그렇게까지 찾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유명한 진돗개 백구는 약 7개월 동안 대전에서 진도까지 300㎞를 주인 할머니를 찾아 여행하였습니다. 먹을 음식도 마땅치 않고 숨은 위협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그러한 유혹에 떨어지지 않은 이유는 그의 행복은 내가 누구인지 알게 해 준 할머니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과 만남은 갓 태어난 존재가 부모를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으로써 울음을 그치고 부모가 주는 젖을 먹으며 자기가 누구인지 깨닫게 됩니다. 또한, 부모가 원하는 대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성인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묻습니다. 왜 모두가 행복하길 바라는데 어떤 사람은 행복하지 못할까요? 그들이 참 행복이 무엇인지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어린이처럼 되어야 합니다. 어린이에게 참 행복은 게임기도 아니고 자전거도 아니고 스마트폰도 아닙니다. 부모 자신입니다.
부모가 자신을 단순히 먹여주고 보호해주어서가 아닙니다. 보육원에서도 그것은 합니다. 부모를 통해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부모 외에 다른 모든 즐거움들은 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괴로움을 잊기 위한 방책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자녀를 행복하게 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느님을 만나 진정 내가 누구인지 깨닫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러면 저절로 성인의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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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성지 순례 중에 우연히 아는 분들을 만났습니다. 한분은 31년 전에 ‘혼배 성사’를 했던 분입니다. 제가 사제서품을 받고 처음으로 혼배 미사 주례를 했습니다. 큰 딸은 시집갔다고 하니 세월이 그렇게 흘렀습니다. 그때는 앳된 청년이었는데 지금은 중년의 멋진 신사가 되었습니다. 물론 저도 흰 머리의 사제가 되었습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 많은 것이 변했지만 성지순례를 열심히 다니는 걸 보니 신앙은 더욱 깊어진 것 같았습니다. 30년 전에 본당 기획 분과 위원으로 봉사했던 형제님도 만났습니다. 70이 훌쩍 넘은 형제님은 성지순례를 오셨고, 제가 봉헌하는 미사에 함께 참례하였습니다. 평화의 인사를 하면서 제게 인사하였고, 저도 그제야 형제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본당에는 많은 행사가 있었습니다. 형제님은 본당의 행사가 잘 진행 될 수 있도록 철저하게 준비해 주었습니다. 주일학교 친구도 만났습니다. 저는 신학생이었고, 친구는 주일학교 교사였습니다. 친구는 서소문 역사박물관에서 해설사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친구는 현실의 문제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불의한 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였고, 약한 이들의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하였습니다. 친구는 순교자들의 열정과 영성에서 우리가 나가야 할 길을 찾은 것 같았습니다. 친구의 해설을 들으니 기뻤고, 감사했습니다.
오늘은 ‘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입니다. 성지 순례 중에 많은 순교자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주도에서는 황사영의 아내 정난주(명연)의 무덤을 보았습니다. 지금은 천국에서 헤어졌던 남편과 만나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2살 때 헤어졌던 아들을 만나고 있을 것입니다. 밀양에서는 김범우의 무덤을 보았습니다. 지금은 명례방에서 함께 기도했던 형제와 자매들을 만나고 있을 것입니다. 거제에서는 유섬이의 무덤을 보았습니다. 지금은 아버지 유항검을 만나서 그리운 정을 나누고 있을 것입니다. 9살 때 헤어졌으니 사무치는 정이 더욱 컸을 것입니다. 해미에서는 이름 없는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분들은 생매장당했고, 물에 빠져 죽었고, 돌에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환한 웃음으로 가족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입니다. 베티에서는 최양업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신부님은 부모님과 동생들을 만나서 그리운 정을 나눌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들었던 것처럼 순교자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입니다.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습니다. 순교자들은 모두 부활하여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을 지내는 이유입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았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하느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을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이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모두 행복해 질 수 있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본인은 물론 이웃들까지 변화된 삶을 살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언제가 하느님 품에서 영원한 삶을 살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모든 성인들은 바로 그런 삶을 사셨습니다. 낙엽 지는 가을 뒤엔 반드시 눈 내리는 겨울이 오듯이 우리의 삶도 반드시 어떤 종점이 있습니다. 우리들 또한 신앙의 별이 되어서 우리 후손들에게 신앙을 물려 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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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은 하늘나라의 모든 성인을 기리는 대축일이다.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는 성인들을 기리며, 또한 우리가 성인이 되어야 함을 일깨워주는 날이다. 아무리 많은 성인을 모시고 그분들을 공경한다고 하여도 내가 성인이 되지 못하면 그 성인들과 나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내가 성인이 되도록 결심하는 날이어야 한다.
복음: 마태 5,1-12: 참 행복: 산상 설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1절) 산으로 올라가셨다는 것은 사람들을 더 높은 삶으로 데려가시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제자들이 가장 높은 영적 덕을 갖추고서 그분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이다. 거기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르치신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3절)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란 회개하여 어린아이처럼 겸손해진 사람을 말한다. 세상의 부유보다도 하느님 안에서 부유하게 된 사람이 참으로 복된 사람이다. 하늘나라는 이미 덕을 실천하고 있는 이들에게 가장 어울리는 삶이다. 이렇게 복된 사람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가난해진 사람들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4절) 슬퍼하는 사람은 슬픔이라는 고통이 끝남으로써 위로를 받는다. 여기서 ‘슬퍼한다.’라는 말은 죽음이 아니라 죄 때문에 슬퍼한다는 의미이다. 나의 죄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 그리고 온 세상의 죄 때문에 슬퍼하는 이들은 더욱 복된 이들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5절) 복음 정신으로 젖은 온유한 사람은 주님의 온유함을 본받는다. 온유한 이들은 모욕하기보다는 모욕을 견디는 사람들이며, 그들은 이 세상과 앞으로 올 세상에서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세상이 타락의 종살이에서 풀려나 하느님 자녀의 영광에서 오는 자유를 얻으면, 살아있는 온유한 이들의 땅이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6절) 이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의로움만을 생각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의로움에 대한 목마름은 가난도 배고픔도 두려워하지 않는 참된 부를 낳는다. 하느님을 뵙는 것은 우리가 무로 사라지는 종말이 아니라, 우리가 완전해지는 종말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7절) 하느님께서 주시는 보상은 인간의 선행에 대해 다른 이들이 내리는 어떤 보상보다 뛰어나다. 거지의 목소리를 들을 때면, 나도 하느님 앞에서 거지임을 기억하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거지를 대하는 대로 당신의 거지를 대하실 것이다. 참으로 자비로운 사람은 자신의 원수들에게도 자비를 베풀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8절)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죄를 끊고 믿음과 의로움을 실천하여 쌓는 행실로 하느님 마음에 든 사람을 의미한다. 바르게 행동하며 그렇게 하고자 생각하는 이는 누구나 하느님을 본다. 인간의 정의는 하느님의 정의와 닮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느님으로 만족하지 못하면 어느 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한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9절) 평화는 믿음이 빛나고 희망이 굳게 자리 잡고 자비의 불이 타오르는 곳에 있다. 평화를 이루는 이들은 사도들의 가르침, 말씀 아래 하나 되어 교회의 평화를 지키는 이들이다. 이 평화가 있는 곳에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모든 일에 질서가 잘 잡혀있으며, 다툼이 없다. 그들은 하느님의 다스림을 몸소 보여주는 이들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10절)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견디는 이들에게는 불안에 떨지 않고 그것을 견디는 은총이 주어진다. 사도들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의로움을 위하여 받는 박해의 복됨을 가장 잘 보여준다. 이 박해는 외국인에게서 만이 아니라, 자기 백성에게서도 의로움 때문에 받을 수 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11-12절)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늘나라를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영광에 걸맞은 동료가 될 수 있도록 어떤 고통이라도 견뎌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서 땅에서 걸림돌에 부딪히면 하늘의 영광을 그것에 비교해 보아야 한다.
“참 행복”이라는 이 말씀은 인간적 논리로는 어리석어 보인다. 마음이 가난한 이들, 온유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나라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비난받는 사람들은 어디서나 세상은 아무도 세상에 드러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오직 이들만이 하느님 나라의 가운데 자리를 잡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얼굴에 그들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같이 완전하게”(마태 5,48) 하려고 그들과 고통당하신 주님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강령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팔을 벌리고 그들 안에서 영광의 왕의 얼굴을 발견하면서(마태 25,31-46), 가장 위대한 사랑을 발견한 사람들이다. 이것이 인간들을 바라보는 복음의 주요한 선포이다. 참 행복을 묵상하며 우리 자신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 하늘나라를 얻는 우리, 즉 성인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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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성인>
신앙생활의 목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은 모두 ‘성인’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의 목표는 ‘성인이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성식을 거행하고, 공식적으로 성인이라고 선포해야만 성인인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나라에 맞아들여 주신 사람은 모두 성인입니다.) 혹시 사람들 가운데에는 “내가 어찌 성인이 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요한 1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1요한 3,2-3)
여기서 “그분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라는 말은, “누구든지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뵙기를 바란다면, 즉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희망한다면, 예수님을 본받아서 끝까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라는 뜻인데, 희망하고 노력하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성인이 될 수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은 그 희망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이고, 그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우리 교회는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뵙는 행복”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행복 가운데에서 가장 큰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그 행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이 바로 성인입니다. 성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 누구든지 하려고만 하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모든 성인 대축일’은 글자 그대로 모든 성인을 공경하는 날인데, 전례력에 들어 있지 않은 성인들을 특별히 더 기억하고 공경하는 날입니다.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사는 사람들을 모두 공경하는 날이고, 그들을 본받겠다고 다짐하는 날입니다. 즉 우리도 그곳에 가서 그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 더욱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다짐하는 날입니다. (이 대축일이 서양에서는 세속적인 축제로 변질하였는데, 그것을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흉내 내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할로윈 축제는 ‘모든 성인 대축일’의 정신과는 맞지 않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에 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 ‘좁은 문’은 들어가기를 희망하고, 그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는 사람은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문, 러나 희망하기만 하고 노력하지는 않는 사람은 들어가지 못하는 문입니다. 그 문으로 들어가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신학을 잘 알고, 성경을 잘 아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아니라, 자기 이름을 쓸 줄 모르는 사람도 들어갈 수 있는 문입니다.
재산을 아주 많이 바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아니라, 바칠 것이 동전 두 닢밖에 없는 사람도 들어갈 수 있는 문입니다. (사실 재산을 많이 바치는 것과 그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상관없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이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는 예수님 말씀은,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들어가는 사람보다 더 많다는 뜻은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들어가는지, 또는 못 들어가는지, 그것은 모릅니다. 묵시록에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다음에 내가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그들은, 희고 긴 겉옷을 입고 손에는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서 어좌 앞에 또 어린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묵시 7,9)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라는 말은,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생명을 받아 누리는 사람이 매우 많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고, 잃은 양 하나를 찾으려고 애쓰시는 목자이신 분이기 때문에, ‘심판’은 한 사람이라도 더 떨어뜨리려고 하는 일이 아니라, 어떻게든 한 사람이라도 더 합격시켜 주려고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르 9,41)
“마실 물 한 잔을 주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작은 선행입니다. 우리는 그 한 번의 작은 선행 덕분에 지옥으로 가는 일을 피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놓는 큰 사랑”(요한 15,13)만 사랑이 아니라, 목마른 사람에게 물 한 잔을 주는 작은 사랑도 사랑입니다. (‘물 한 잔’에 관한 예수님 말씀에는, “사랑 실천에 대한 심판은 사랑의 크기로 따지지 않고, ‘실천했느냐, 안 했느냐?’로만 따진다.”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바로 이 말씀이 우리에게 큰 위안을 줍니다. 먹고살기에 바빠서, 여러 가지 여건과 능력이 부족해서, 신앙생활이 아주 많이 부족하게만 느껴지고, 사랑 실천도 제대로 못 한 것만 같고, 그래서 하느님 앞에 나서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그래도 자기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서 했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신앙생활은 거창한 일이 아닙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입니다. 바로 그것을 가르쳐 주시려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날마다 묵주기도를 수십 단, 수백 단 바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짧은 화살기도 한 번 바치는 것으로 그칩니다. 그런데 둘 중에 누가 하느님 나라에 더 쉽게 들어갈지는 모릅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정성스럽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리사이들의 신앙생활은 철저하고 엄격하고 거창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위선자들이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칭찬을 받은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작은 이들’, 즉 가난하고 못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에 바리사이들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 멸시하고 천대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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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신앙의 목마름은 우리를 가끔 엉뚱한 곳으로 이끕니다. 특별한 미사, 특별한 성서 공부, 특별한 기도 모임, 특별한 신심, 특별한 치유는 인간적 부족함을 채워 줄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에서 “나는 인장을 받은 이들의 수가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들었습니다.”라는 내용이 소개됩니다. 인장은 하느님 백성에 속함을 드러내며, 하느님께서 보호하시는 이들을(에제 9장 참조) 가리키기도 합니다. 십사만 사천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서 만 이천 명씩 뽑은 총합으로 하느님 백성의 충만함을 나타내는 상징적 숫자입니다. 제2독서에서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라는 내용을 듣습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의 상황과(요한 1,12; 3,5; 2코린 3,18 참조)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게 될 종말 때의 상황을(콜로 3,3-4 참조) 나누어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한편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여덟 가지 참 행복을 선포하십니다. 하늘나라를 소유함, 위로를 받음, 땅을 차지함, 흡족해짐, 자비를 입음, 하느님을 뵙게 됨, 그분의 자녀라 불림이 예수님께서 신앙인에게 약속하신 행복의 선물입니다. 모든 성인 대축일을 맞아 우리의 신앙을 성찰합니다. 가톨릭 신앙은 사회, 문화, 역사를 넘어 인류에게 선물로 주어진 보편적 신앙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나약함은 이 보편 신앙보다는 구체적이며 특별한 신심 행위를 찾게 합니다. 세례 때 받은 신앙의 선물을 각자의 자리에서 어떻게 가꾸며, 얼마나 성장시키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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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한영 야고보 신부님]
<영이 가난한 사람들>
11월 1일은 ‘모든 성인 대축일’이고 2일은 ‘위령의 날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천국에 있는 성인들과 정화 중에 있는 연옥교회의 영혼들을 기억하며 모든 성인의 통공(communion of saints)을 나눕니다.
전통적으로 모든 성인 대축일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드러내는 큰 축제이기에, 그 전날 10월 31일 저녁부터 ‘거룩한 전야’ 축제일로 지냈습니다. 이 전야제가 바로 ‘핼러윈 데이’입니다.
성인을 뜻하는 고대 영어 ‘할로(hallow)’와 저녁이라는 단어 ‘이브닝(evening)’이 합쳐져서 ‘모든 성인들의 전야(all hallows eve)’가 되었고, ‘핼러윈(halloween)’으로 축약된 것입니다.
핼러윈 때 아이들이 무서운 가면이나 복장을 한 채 거리를 행진하고, 호박등이 켜진 집마다 방문하여 사탕을 요구하는 것은 고대 켈트족의 전설과 중세의 풍습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켈트족은 겨울이 시작되는 11월이 되면 저승의 귀신이나 망령들이 지상에 출몰하기 시작한다고 믿고, 그 귀신이나 망령보다 더 무섭게 변장을 하고 야단법석을 떨어서 그러한 존재들을 쫓아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탕을 요구하는 것은 중세 시대 연옥 영혼들을 기억하는 ‘위령의 날’에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이 집마다 돌아다니며 ‘영혼들을 위한 기도’를 바쳐주면, 그 기도에 대한 답례로 ‘영혼의 단 빵’을 주었던 것에서 유래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이방 종교의 전설과 문화를 복음으로 대체하고 그 의미를 새롭게 밝혀 주는 토착화의 과정을 끊임없이 밟아 왔습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허물어진다고 생각하던 켈트족의 전설적 믿음을 모든 성인의 통공 교리로 포용하여 승화시킵니다.
즉 ‘지상의 순례하는 교회’에 속한 신자들이, 천국교회와 연옥교회와 소통하고 기도하는 전통을 통해서 미신적인 공포와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에게 평화와 위안과 희망을 준 것입니다. 특히 연옥 영혼을 위한 기도와 가난한 이들에게 특별한 음식을 나누어 주는 아름다운 전통을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세상은 코로나19로 인한 공포와 우울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예수님의 ‘참행복’ 선언은 희망을 북돋아 주는 역설적인 약속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직역하면 ‘영(靈)이 가난한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차지할 것’이라고 약속해 주십니다. 인간은 영이신 하느님께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요한 4장 24절)하면서 끊임없이 사랑이신 하느님(요한1서 4장 16절)의 은총을 충만하게 받아야 하는 가난한 영적 존재입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하느님과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신앙인들은 영원히 그리고 끊임없이 베푸시는 사랑의 은총 안에서 유한한 세상의 고통과 시련을 충분히 이겨낼 힘과 용기와 희망을 간직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 가난한 영으로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충만한 은총을 서로 나누며 이 시기를 다 같이 이겨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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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기철 이사악 신부님]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오늘은 천국의 성인들과 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음을 묵상하는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설명대로,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그 지체로써 그분과 한 몸인 ‘신비체’를 이루고 있습니다.(로마서 12장 4절-5절 ; 코린토 1서 6장 15절-17절 ; 12장 27절 ; 에페소서 4장 15절-16절 ; 콜로새서 1장 18절) 사도 신경에서 고백하는 ‘모든 성인의 통공’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머리는 ‘그리스도’이시고, 지체는 ‘교회’인데, 이 교회는 우리보다 먼저 그리스도를 섬기다가 세상을 떠나 천국에 다다르신 분들이 계시는 ‘천상 교회’와 아직 천국에 이르지 못했으나 그곳을 향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계시는 ‘연옥 교회’ 그리고 지금 우리가 몸담고 있으며 나그넷길을 걸어가고 있는 현세의 교회인 ‘지상 교회’로 나눠집니다.
그런데 이 세 차원의 교회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몸을 이룬 채, 서로가 그리스도께로 가는 데 도움과 힘을 주고 있습니다.
천상 교회는 지상 교회를 위해 기도하여 주고, 지상 교회는 천국에 들어간 천상 교회 시민에게 전구를 요청하며, 그분들에게서 이 나그넷길을 더 굳건히 살아갈 실제적이고 직접적인 도움과 용기를 얻습니다. 그리고 지상 교회는 연옥 교회를 위해 기도를 바쳐 드림으로서 그분들이 하느님의 얼굴을 뵈올 수 있는 날을 앞당기게 도와줍니다.
그런데 가톨릭교회는 우리에게, 오늘이 천상 교회의 성인들만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 있는 분들도 기억하자고 합니다. 주위 교우들, 가족, 친지, 옆집 이웃들 역시 서로 기도해주며, 유형무형의 도움들을 주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도록 도움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황님도 이 점들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는 많은 증인’(히브서 12장 1절 참조)이 우리가 목적지를 향하여 끊임없이 나아가도록 독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초대받습니다. 이러한 증인들 가운데에 우리 어머니, 할머니, 또는 그 밖에 사랑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티모테오 2서 1장 5절 참조) 성인들은 이미 하느님 계신 곳에 있지만 계속해서 우리와 사랑과 친교의 끈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 저는 하느님의 벗들에 둘러싸여 안내를 받고 있습니다. … 사실 저 혼자서 결코 짊어질 수 없는 것을 혼자 짊어지지 않아도 됩니다. 하느님의 모든 성인이 저를 보호하고 돌보시고 저와 동행하시기 때문입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3-4항)
간혹, 외롭고 쓸쓸하다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우리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신비체적으로 보면, 나는 혼자일 때라도 ‘모두’이며, 부분일 때라도 ‘전부’입니다. ‘모든 것’이신 그리스도와 나는 ‘같은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오스딩 성인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우리가 단순히 그리스도인이 된 것뿐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 자신이 된 것을 기뻐하고 감사드립시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머리로 보내주신 이 은혜를 이해하십니까? 놀라고 기뻐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가 된 것입니다.”(「요한복음강해」, 21,8)
여러분, 우리가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는 많은 증인’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전혀 외롭지 않고, 오히려 외로워하는 분들을 위로해 줄 수 있습니다.
“절대로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희망의 불꽃이 꺼지도록 내버려 두지마십시오. 현실은 바뀔 수 있습니다. 인간은 바뀔 수 있습니다. … 교회는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보배로운 신앙의 유산을 전하면서 여러분과 함께할 것입니다.”(「교황 프란치스코, 자비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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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정영우 요한 세례자 신부님]
<성인이시길..>
사람의 인생은 생로병사를 거치는 삶이지만, 건강할 때는 그 마지막인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려는 게 일반적입니다. 그렇지만 죽음은 또 다른 세상으로 옮아가는 삶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도 없을 것입니다.
모든 성인 대축일!
오늘(1일)은 천국에 계신 수많은 성인을 생각하되, 특히 한국 교회의 주보 성인이신 천주의 성모 마리아, 내가 다니는 본당의 주보 성인, 내 세례명의 주보 성인을 생각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내일(2일)부터 일주일은 연옥에 계신 모든 영혼을 묵상해야겠습니다.
세상에는 통념(通念)이 있습니다. 재물은 많을수록 좋고 재물이 있어야 행복하다, 굶주리는 것은 불행하다, 우는 것은 불행하고 웃으며 사는 것은 행복하다, 지위는 높아야 하고 높은 사람이라야 대우받는다, 마땅히 죄인은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 등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이 통념에는 어떤 부정(否定)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곧 모든 생명은 똑같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부정하면서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 의지를 약화합니다.
오늘 복음의 행복선언에 나오는 각 사람은 우리 통념으로 볼 때 모두 부정되는 이들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 또한 하느님 안에서 모두 행복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말하자면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아무리 가난해도, 굶주려도, 또 죄인이라도 버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우리 통념에서 벗어나서 어떤 생명이라도 소중히 생각하고 돌보면서 살 것을 원하시는 하느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려고,) …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레위기 11장 45절)하고, 예수님께서도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한다.”(마태오 5장 48절)고 말씀하십니다.
성인이 되는 길은 어려움과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이지만, 그분들 또한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거룩함과 완전함의 덕을 쌓고자 애쓸수록 하느님께서는 그리로 향한 희망과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모든 성인 대축일을 맞이하여 우리도 천상의 모든 성인 반열에 들 수 있도록 노력하고 성인들의 전구를 빌며 주님의 필요한 은혜를 간구하도록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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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행복하십시오!>
교회가 어떤 사람을‘성인’으로 선포하는 것은‘성인들의 생애에서 드러나는 은총의 위대한 업적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하느님을 흠숭하고, 성인들의 거룩한 생애나 업적을 일부라도 본받도록 신자들을 격려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미 하느님과 일치하여 영생에 참여하고 있는 성인들이 아직 현세에서 구원의 길을 순례하는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께 전구하여 주기를 청원하기 위한 것입니다.’(정하권) 다시 말하면 현세를 살고 있는 우리의 영적 도움을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인들의 삶의 모범을 우리가 살아감으로써 성인들과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성인을 올바로 공경한다는 것은 외적 행사의 복잡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하는 사랑의 깊이에 있는 것입니다.
가경자 알베리오네는 “날마다 쉬지 않고 조금씩 주님께로 발길을 옮기는 것, 이것이 성인이 되는 비결입니다.” “그리스도를 닮고자 노력하지 않는 한 결코 성인이 될 수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자 앙투안 슈브리에도 성인의 길을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님에 대한 앎이 모든 것의 열쇠입니다.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님을 아는 것, 바로 그것만이 성인의 길을 걷는 신앙인의 목표요, 지름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라고 말씀하시며 “사랑하는 이웃, 친구, 가족이기에 잘못된 점, 고쳤으면 하는 점을 알려 주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며, 분명 누군가는 해야 할 몫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미사여구에 완벽한 논리로 조언을 한다 하더라도 그 안에 진심으로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그저 난도질이자 뒷담화일 뿐입니다. 더욱이 당사자가 없는 곳에서 그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은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요.”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모두 혈육으로나 육정으로나 욕망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1요한 1,12-13)이기에 성인입니다.
시편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행복합니다. 당신께서 뽑아 가까이 오도록 하신 이! 그는 당신의 뜰 안에 머물리이다. 저희도 당신 집의 좋은 것을, 거룩한 당신 궁전의 좋은 것을 누리리이다.”(시편 65,4)
그러나 그 성인의 거룩함을 잃어가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거룩함을 잘 간수하여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복음은 8가지 행복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행복은 현세생활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모상대로 창조하시고 이 세상에 현존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현세는 마침내 얻어야 할 진정한 천상행복의 연장입니다.
우리는 약속된 미래, 영원한 생명의 수혜자로 뽑혔기에 지금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가난해서가 아니라 하늘나라가 우리의 것이기에 행복합니다. 슬퍼함이 행복이 아니라 위로를 받음이 행복입니다.
땅을 차지할 것이기에 행복하고 만족할 것을 기대하니 행복하고 자비를 입게 되고 하느님을 뵙게 되니 행복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되고 하늘나라가 우리의 것이니 행복하고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으니 참으로 행복합니다. 그러므로 그 큰 행복을 지금 여기서부터 누리고 간수하고 지키시길 바랍니다.
행복은 천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뵈려고 애쓰고, 하느님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함을 안타까워할 때가 행복의 순간입니다.”(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그리고 “행복한 사람이란 하느님에 대한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신 사람입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따라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성 아우구스띠노) 주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행복하십시오. 사랑합니다.
1.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음의 가난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희망을 두기에 그에게 온전히 의탁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할 것이기에 행복합니다.
2.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이웃의 고통에 동참하고 자기의 죄에 애통해 할 줄 아는 사람이기에 행복합니다.
3.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
온유하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상황, 처지, 여건에 흔들림 없이 평상심을 유지할 줄 아는 사람, 자제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4.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진선미를 갈망하며 천상 것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5. 행복하여라,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
자비는 사랑입니다. 애간장을 녹이는 안타까움을 간직하며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을 베푸는 사람, 이웃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사람입니다.
6.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주님은 ‘내가 완전한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고 하셨습니다. 거룩함을 지닌 사람, 죄에 물들지 않은 맑은 영혼을 지닌 사람은 행복합니다.
7.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외형적인 평온에 앞서 내 마음속에 있는 욕심과 무질서, 불의와 미움을 거두고 화해를 전해주며 갈라진 사람을 맺어주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8.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선한 일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시기와 질투, 모욕과 중상이 있기 마련입니다. 사도들은 주님 때문에 모욕을 당하는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고 기뻐하였습니다.(사도5,41) 어떠한 처지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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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심리학에 ‘동기이론’이란 것이 있습니다. 인간이 어떤 활동을 할 때, 높은 만족감을 얻고 그 행동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동기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동기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외재적 동기’이고, 다른 하나는 ‘내재적 동기’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동기가 중요할까요? 학자들은 ‘외재적 동기’보다 ‘내재적 동기’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외재적 동기는 돈, 물질 혹은 타인의 칭찬과 같이 바깥에서는 오는 동기입니다. 반대로 내재적 동기는 흥미, 호기심, 자발적 바람과 같이 자기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동기입니다. 그런데 외재적 동기만을 쫓다가 자기 안에 내재적 동기를 만들지 못한다면, 만족감이나 지속성이 현저하게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돈을 아무리 많이 번다고 해도 만족하지 못하고, 순간의 만족만을 가져올 뿐 지속성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는 것도 그러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통해 자기의 외재적 동기가 채워지기를 바라곤 합니다. 그러나 이때는 주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 과정에서 주님은 잊히고, 외재적 동기만 남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 우리가 어떤 동기를 채워야 할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 한 번도 돈 많이 벌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또 높은 자리에 올라가라고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보다 모든 것을 버리는 겸손한 삶을 살라고 하셨지요. 따라서 우리가 청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외재적 동기보다 먼저 내재적 동기를 채울 수 있는 힘을 달라고 청해야 했습니다. 내재적 동기를 채워가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더 큰 ‘기쁨’ 속에서 지금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늘 나라의 모든 성인을 기리는 모든 성인 대축일을 보냅니다.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는 성인들의 모범을 본받고자 다짐하는 날입니다. 이 성인들의 삶을 기억하면 세상의 것이 아닌 주님의 것만을 마음에 새겼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참 행복의 삶을 사셨던 분이십니다. 앞서 말씀하신 외재적 동기가 아닌 내재적 동기만을 마음에 담고 계시니 커다란 만족감과 함께 참 행복이 지속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삶에서 무엇을 채우는 데 집중해야 할까요?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만을 채우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내재적 동기를 채워가면서 우리도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는 성인들처럼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진짜 행복은 우리의 시선을 세상에서 주님을 향할 때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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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행복하게 살아갑시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저는 올해 모든 성인의 날 나눔을 위 둘 말씀을 가지고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먼저 하늘나라의 행복을 사는 성인의 삶을 가지고 나눔을 하겠습니다.
제 생각에 모든 성인의 날에 행복 선언의 복음을 듣는 것은 모든 성인이란 하늘나라의 행복을 사는 사람은 모두 성인임을 알라는 뜻이고 그 하늘나라 행복을 이 세상에서 살면 우리도 모두 이미 성인이라는 뜻일 겁니다.
그러므로 그 행복을 살면 되는데 관건은 살 줄 아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늘나라의 행복을 이 세상에서 이미 삽니까?
말장난 같지만 하늘나라의 행복을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하늘나라를 이 세상에서 사면 됩니다. To live the Happiness is to buy the heavenly Kingdom in this world.
그리고 하늘나라를 사면 되는데 하늘나라는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돈 없이 가난으로 사는 것이라고 복음은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그러니 모든 성인은 하늘나라를 사 지금 하느님 나라에서 사는 신앙의 선배들이고, 그들의 모범을 본받아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의 행복을 이미 살고 있는 우리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감사송은 아름답고 우리를 격려합니다. “나약한 저희도 그들의 도움과 모범으로 힘을 얻어 활기찬 믿음으로 영원한 고향을 향하여 나그넷길을 서두르고 있나이다. 그들의 모범은 나약한 저희에게 힘이 되나이다.”
다음으로 모든 성인은 하느님 자녀의 행복을 사는 사람들인데 오늘 요한의 서간은 우리가 이제 하느님의 자녀라고 합니다.
오늘 요한의 서간은 우리가 과연 하느님의 자녀라고 얘기하고 이제 하느님의 자녀라는 표현도 이어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과연’을 먼저 얘기하고 ‘이제’를 이어서 얘기하는 것이고, 과연 하느님의 자녀임을 알게 될 때 이제 하느님의 자녀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과연(果然)이라는 한자어는 ‘알고 보니 정말’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과연 하느님의 자녀라는 말은 그전에는 하느님의 자녀임을 모르고 살았다는 뜻이고, 이제 알고 보니 정말로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남들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거짓이 아니고, 성인들의 말도 거짓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실은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 태어나는 것이라는 세례의 뜻도 이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모르고 살던 나, 애비도 모르고 살던 우리가 이제 하느님을 애비로 알게 되고 애비의 자녀로 살게 된 것이 세례입니다.
그러니 세례받아 신자가 된 우리는 이제 그리고 이미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사는 행복한 성인들입니다. 그런 줄 알고 행복하게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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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인이 됩시다>
-11월은 희망과 위로의 성월-
"당신께 아롸오니,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나이다.' "(시편16,2)
오늘부터 11월 위령성월이 시작되는 첫날 11월1일은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이때가 되면 어느 때보다도 교회 전례가 참 고맙게 느껴집니다. 만추晩秋의 가을과 더불어 허무하고 쓸쓸해지는 영혼들에게 희망과 위로가 되는 위령성월이요, 본격적으로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달입니다. 주님 안에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이 평화로이 공존하는 달입니다.
그래서 저는 위령성월을 ‘희망과 위로 성월’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11월 위령성월의 첫날인 오늘 모든 성인 대축일은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지요! 하느님의 희망과 위로를 반영하는 모든 성인이요, 희망과 위로의 은은한 빛이 회색빛 쓸쓸함과 외로움, 우울함의 어둠을 일거에 날려 버리는 느낌의 위령성월입니다.
결코 기념하고 기억만하라 있는 모든 성인 대축일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성인이 되라고 응원하고 격려하는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세례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모두 성인이 되라 불림 받고 있으며, 이것이 우리 인생의 궁극 목표입니다.
“성화되십시오!”
예전 수도형제에게 배운, 오늘 따라 만나는 이들에게 주고 싶은 인사말입니다. 그래서 강론 제목도 “성인이 됩시다-11월은 희망과 위로의 성월-”이라 정했습니다. 비상하거나 특별한 성인이 아니라 본연의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제역할에 충실한 분들이 평범한 성인들입니다.
때로 우리 요셉 수도원 형제들의 공동체가 “성인들의 공동체”라는 생각도 듭니다. 사실 예로부터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주님을 따르는 거룩한 신도信徒들이라 해서 성도聖徒들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잠시 위령성월과 모든 성인의 대축일에 대한 유래를 소개합니다. 위령성월은 998년 베네딕도회 소속의 프랑스 클뤼니 수도원에서 11월2일 위령의 날로 정하여 연옥 영혼들을 위한 미사를 봉헌한데서 비롯되어 전 세계 교회로 확장되어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반면 오늘 모든 성인 대축일은 동방교회에서 맨먼저 시작되어 609년 성 보니파시오 4세 교황 때부터 서방교회에서도 지내게 되었고, 처음에는 5월13일에 지내다 9세기 중엽에 11월1일로 바뀌었습니다. 새삼 가톨릭교회의 유구하고 아름다운 전례 전통이 참 자랑스럽고 고마운 생각이 듭니다.
“성인이 됩시다!”
하느님의 승리를 상징하는 희망과 위로의 성인들이요 우리의 빛나는 미래를 보여주는 우리에게 삶의 의욕과 용기를 주는 성인들입니다. 말 그대로 희망의 표징, 회개의 표징, 구원의 표징이 되는 성인들입니다. 우리의 미래를 보여주는 제1독서 묵시록에 나오는. 어좌와 어린양 예수님 앞에 서 있는 희고 긴 옷을 입은 성인들입니다. 이 성인들에 대한 한 원로의 설명이 우리에게는 큰 위로가 됩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
새삼 일상의 크고 작은 시련과 어려움을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잘 겪어낸 순교적 삶에 충실한 이들의 미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참 거룩한 장면입니다. 바로 여기 근거한 오늘 대축일 저녁 성무일도 마리아의 노래 후렴이 참 좋습니다. 11월 위령성월 중 끊임없이 짧은 기도 노래로 바치려 합니다. 잘 부르지는 못하지만, 용기 내 한 번 불러보겠습니다.
“성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하는 그 나라가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흰옷을 입고 어린양을 따라가는도다.”
이어지는 요한1서의 말씀도 고무적입니다. 우리의 빛나는 미래와 더불어 현세를 힘차게 살아야 함을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이미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그리스도 예수님처럼 하늘 나라의 순결한 삶을 살라는 권고입니다. 어떻게? 바로 오늘 복음이 답을 줍니다.
성화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되는 거룩함을 위한 대헌장과도 같은 산상설교중 참행복의 진복팔단입니다. 모세의 십계명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를 훨씬 능가하는 예수님의 참행복선언입니다.
모세의 십계명으로는 좋은 신자는 될 수 있을지언정 성인 되기는 힘듭니다.
참행복의 진복팔단이야 말로 끊임없이 우리를 분발奮發케 하면서 성화의 여정으로 이끌어 줍니다. 지상에서 이미 천국을, 성인의 삶을 살게 하는 참행복이요, 모든 성인들의 삶의 지침으로 삼았던 내용들입니다.
날로 예수님을, 하느님을 닮아가게 하는 금과옥조金科玉條의 말씀들입니다. 도대체 세상 어느 종교가 이런 하느님을 닮게 하는 거룩함의 대헌장같은 복음 말씀을 주실수 있을는지요! 너무나 잊고 소홀히 여긴 거룩함의 대헌장 참행복의 진복팔단입니다.
1.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2.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3.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4.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5.행복하여라, 자비로는 사람들!
6.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7.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8.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이런 이들이 우리 믿는 이들이 궁극으로 목표하는, 진짜 예수님을 닮은 ‘참행복’한 ‘참사람들’인 성인들입니다. 바로 하느님만으로 참행복했던 성인들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결정적 약속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행복을 두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우리 모두 진복팔단의 참행복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의 자녀로서 ‘거룩함의 대헌장’ 진복팔단의 참행복을 실천하며,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늘 나라를 살게 하십니다.
"당신은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시어, 당신의 면전에서 넘치는 기쁨을, 당신 오른편에서 길이 평안을 누리이다."(시편16,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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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5,12)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11월 '위령 성월'의 첫날인 오늘은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하늘 나라에서 참 행복, 영원한 행복의 영광을 누리고 있는 성인들, 특히 전례력에 축일이 따로 지정되지 않은 성인들을 기억하고 기리는 날입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하신 배기현(콘스탄틴) 주교님과 다른 모든 이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하늘나라에서 참 행복을 누리고 있는 성인들의 모습은 장차 우리가 누려야 할 목적이자 희망입니다.
오늘 제1독서인 '요한 묵시록의 말씀'은 천상에 계신 성인들의 숫자와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신천지 이단은 7장 5절의 말씀을 근거로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그 숫자를 144,000명이라고 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12지파에서 각각 12,000명씩 뽑힌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7장 9절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그다음에 내가 보니, 아무도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모든 민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그들은, 희고 긴 겉옷을 입고 손에는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서 어좌 앞에 또 어린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희고 긴 겉옷을 입은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 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묵시 7,14)
오늘 복음(마태 5,1-12)은 '참 행복'에 관한 말씀입니다. 참 행복은 이제와 영원히 하느님의 나라 안에 머무는 것이고,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지나가는 이 세상 것에 목말라 하지 않고, 항상 하느님 사랑에 목말라하는 사람들, 하느님의 사랑을 더 채우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모든 성인은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산 이들, 그래서 천상에서 참 행복을 누리고 있는 분들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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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K7dkb4V905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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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 12)
모든 성인의
실천이 모여
가톨릭의
숲이 되고
그 숲은
신앙의
빛이 되고
신앙의 빛은
그 어떤 빛보다
아름답고
강렬한 빛으로
우리를 비춥니다.
삶이
또 다른
삶을
비추는
복음의 빛입니다.
이미
우리 곁에
와 계신
예수님과 함께
빛의 길을 걸어간
성인들의
삶이었습니다.
우리 또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스스로
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모든 성인은
그들의 모든 것을
다 꺼내어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과 나눕니다.
다시 태어나는
크나큰 기쁨
그 하나가 바로
회개의
기쁨입니다.
모든 성인은
회개로
사랑받으셔야 할
하느님을
드러냅니다.
이 모든 회개가
가장 큰
하느님의
은총임을
알았습니다.
회개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람으로
기쁘게 살게 됩니다.
기쁨은
거짓으로부터
방향을 돌리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모든 성인의
건강한 신앙은
일상의 복귀를
통해 드러납니다.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으로
하느님을
향해 있습니다.
모든 성인은
깨끗한 마음으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행복을
체험합니다.
시대의 세속화와
시대의 잔인함
속에서도
말씀을 놓치지 않고
말씀을 살았던
모든 성인의
생생한 삶이
있었기에 우리의
역사는 부활하는
역사가 됩니다.
참된 인생의 문을
가리키는 모든
성인들의 삶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모든 성인은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십니다.
하늘에서와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라고 기도드리는
모든 성인
대축일의
빛나는
아침입니다.
살아 숨 쉬는
생동감 있는
일상에서
모든 성인의
삶과 함께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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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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