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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은 지방 자치시대 인지라 여러 고을로 산행을 다니다 보면 그 지방의 이미지를 강하게 각인 시키기 위한
여러 문구들이 고을 입구에 요란하게 쓰여져 있음을 본다.
청풍 명월의 고장이다 보은 충절의 고장이다 등등이 있는데 경북에서 오지라고 할 수 있는 안동,영주 그리고 봉화와 같은
북부지방에선 서로가 원조를 고집하며 내 세우는 말이 바로 양반과 선비의 고장이다.
일제가 한반도를 침략할 때 일본 정부로 부터 받은 지침 중의 하나가 조선땅에 가선 양반과 무덤만 건들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였듯이 이 양반이란 존재 만큼 맘 푠하게 먹고 사는 개팔자가 이 세상엔 없다.
땡볕에 들판에 나가는 힘든 농사일은 머슴들에게 맡기고 대청 마루에 돗자리 깔고 앉아 정자관이나 쓰고 공자왈 맹자왈 이나
하다가 심심하면 어린 종년들이나 찝적 거리면 만사 형통이다.
우리 어릴 적에 보면 나이 사십을 채 넘기신 분들이 문지방을 넘어 서면서 아이구 다리가 아푸다 머다 하면서 소위 말하는
어른 행세를 하기 시작하는데 지팽이와 쥘부채는 이미 필수품이 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사농공상이란 신분 제도가 있었지만 엄밀히 말 하면 반상 즉 양반과 상놈 그리고 중간에 어정띠게 끼여 든 중인이란
엄격한 계급사회가 형성되어 있어 흔히 말하는 쌍놈은 최근에 까지도 이곳 경북 북부지방에선 도무지 사람 대접을 받질
못 하였으니 그 설움은 대단하였던 가 보다. 그래서
영주땅에서 운수업을 하여 거금의 재산을 모은 어떤 쌍놈 출신 한 분 께선 한풀이로 자신의 부친 산소를 어마 어마하게 꾸며
놓았는데 무덤 주위에 세워 진 석물들이 수를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 인지라 일본 관광객들 마져 원조 짝퉁 양반의 표본을
본답시고 관광버스로 밀어 닥칠 정도라고 한다.
이 양반이란 것을 지상 최대의 목표로 일평생을 목을 매고 살아 오신 분이 바로 내 아버님 이시다.
내가 머리에 묻은 쇠똥이 벗겨 지기 바쁘게 귀에 못이 백히게 들었던 말이 우리는 양반이다 라는 아버님의 말씀 이셔서
난 정말 내 자신이 엄청난 집안의 후손인 줄로만 착각을 하여 군바리 훈련 받을 적에 배가 고파서 남들은 서로 먼저 들어 가서
양이 많은 식기를 차지 할려고 밀고 땡기고 할 적에도 내가 양반의 후손인데 이럴 수는 없다고 하면서 전우들이 다 들어 간
뒤에야 뒷짐을 지고 여덟 팔자 걸음으로 어슬렁 거리며 군대 식당엘 들어 가기도 했었다.
조선 시대 때 동 서 양반이라고 하면 엄밀히 말해서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로 등용된 집안을 일컫는데 그 약발이 삼대 까지만
효험이 있다 즉 다시 말해서 자신의 할아버지 그리고 아래로 자신의 손자 대 꺼정은 최소한 벼슬을 해야 양반 대접을 받을 수가
있었다.
웃대 먼 조상이 벼슬을 했다고 해서 그 아랫대 자자 손손이 양반 행세를 하는 게 아니란 걸 난 성인이 되어서야 겨우 알게 되었다.
유학이다 주자학이다 하는 양반 교육을 잘못 받아 일평생을 무위 도식하면서 살아 가는 한 분이 있다.
임진왜란 때 영의정으로 맹활약을 하시고 후일 징비록을 집필하신 서애 류 성룡 선생의 생가가 있는 하회마을 인근에서
어정띤 성씨를 갖고 편모 슬하에서 자란 내 고종 사촌 형이 바로 그 분인데 어설푼 양반 노릇을 할려니 도무지 사회 생활에
적응을 할 수가 없다. 참으로 묘 하게도
하회마을로 조선시대 생활상을 연구하러 왔던 미모의 박사 과정 여학생 한 분이 정신이 나갔는지 백수 건달인 이 형과 열애 끝에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물론 작금 까지도 이 형수는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고 우리 형이란 얼치기 양반은 일평생을 전업 주부로
살림만 살고 있다.
난 그래서 이 양반이다 주자학이다 머다 하는 걸 무척이나 싫어 하는 사람 중의 하나인지라 아버님과는 내가 성인이 되면서
종종 언쟁을 벌이기 시작하게 된다.
아버님! 우리 할아버님은 남의 논밭을 소작 하느라 똥구녕이 찢어 지게 가난하게 살았던 지라 아버님을 중등 교육 조차 시키지
못 하셨는데 어째서 우리가 양반 입니껴? 그라고 할아버지 뿐 만이 아니라 그 웃대 웃대 어떤 할배가 벼슬을 하셨습니껴?
그래도 우리는 양반이다.
안동 지방에선 보학이라고 하여 전문적으로 족보만 연구하는 분들이 부지기수 이다.
물론 우리 아버님도 대백과사전 크기로 무려 아홉권이나 되는 우리 복야파 족보책을 여러 번의 실랑이 끝에 마침내 고향땅을
찾았던 내 차 트렁크에 싣게 되었는데 그 이후론 우리 아버님은 심심찮게 내 딸에게 전화를 하셨던 가 보다.
니 애비 혹시 족보책을 쓰레기통에 버리지나 않나 잘 감시를 하라는 것인데 물론 난 이 족보책을 버리진 않았지만 단 한번도
책장을 넘겨 본 적은 없다.
정년퇴임을 하시고 환갑을 갖 넘기신 나이에 이미 먼옷이라고 불리우는 수의도 마려해 두시고 신발장 옆에는 손수 깍고 다듬으신
지팽이가 스무개가 넘을 뿐 아니라 가묘라고 하여 자신이 돌아 가시면 쉬게 될 음택(무덤) 마져 마련해 두시고 이 가묘로 매일
출근을 하시다 싶이 하시면서 잡초를 뽑고 그 주위를 돌 보는 것이 생활의 낙이셨다. 물론
망주석 같은 일반적인 석물 뿐만이 아니라 검은 오석으로 만든 자신의 비석 꺼정 미리 장만해 두셨다.
노인들이 수의를 미리 마련 하는 등등의 자신의 사후 문제를 준비해 둠은 난 죽은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다는 강력한 몸부림이란
걸 난 늦게서야 알았지만 좌우간 내 아버님은 안동 지방에서 최고령 오너 드라이버로 알려 질 만큼 건강하게 사셨는데 어느 날
부터인가 건강에 이상 징후가 오셨는지 거처를 형님이 사시는 부천으로 옮기게 되신다.
사람이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 하거나 가족이나 재산 등등에 너무 심한 애착을 갖고 있었던 분은 자신이 죽은 줄을 모른다.
그래서 저 세상으로 가질 않고 자신의 죽음 근처에서 떠 도는 중음신이 되고야 마는데 데미 무어가 열연한 사랑과 영혼이란
영화에서의 남자 친구와 식스 센스란 영화에 나오는 브루스 윌리스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두 사람 모두 갑작스런 죽음과 사랑하는 이를 못 잊어 편하게 저 세상으로 가질 못한지라 점 점 쇠약해 지시는 울 아버님을 뵈 올
적이면 자신의 살아 오신 생에 너무 과한 애착을 보이시는 아버님 때문에 남들에게 대 놓고 말 못할 고민이 여간 큰 것이 아니
였다.
안동 지방에서 제일 유명한 사찰에서 신도회장 꺼정 하셨던 아버님께서 장례 절차가 맘에 드신다고 젊었던 시절 잠깐씩 다니셨던
성당엘 다시 나가기 시작 하셔서 결국엔 영세를 받으셨는데 내가 아버님께 딱 한마디를 물어 본 적이 있다.
아버님! 일평생을 양반 타령을 하시던 분이 아버님이신데 성당엘 나가시면 천주교의 교리나 신부님의 말씀이 아버님의 관점으로
보셔서 부합되는 점이 있니껴?
물론 그러질 못해서 몇 번이나 의문점을 신부님께 여쭈어 보았지만 시원한 해답을 듣지 못 하셨다는 것이다.
아버님! 종교란 건 자신의 영혼과 직결되는 중차대한 문제 입니다. 잘 판단 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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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히 눈을 뜨신 아버님이 뜬금 없이 불가 사의 라고만 한마디 하시더니 한참을 있다 재차 눈을 뜨시곤 얼굴엔 약갼의 미소를
흘리시면서 이 세상의 일이란 건 원래가 없었던 것인데 무어 라고 하시곤 끝내는 말문을 닫으신다.
양력으로 5월 16일 내 아버님은 큰 고통 없이 아무런 병환도 없이 93세를 일기로 아주 자연스런 죽음을 맞이 하셨다.
아버님 일도 있고 내 생업 문제도 있어 여러 달을 함께 산행하지 못했던 느림보 산악회에서 내 고향땅에 있는 청량산으로
일정을 잡았다는 소식을 접 하곤 부모님 생각에 여름 휴가를 땅겨 느림보 산악회에 방부를 디 밀고 이른 시간에 오리역으로
나가니 강 대장님의 반가운 얼굴이 오랜 친구를 다시 본 듯 하다.
청량교와 매표소를 지나 얼마 가지 않은 하청량에서 하차를 하여 청량산 제일봉인 장인봉으로 직등 코스를 잡았는데 가파른
콘크리트길 옆으로 산뽕과 벚나무가 지천으로 우거져 있어 검붉은 오디와 뻐찌가 우리를 유혹한다.
옛말에 뽕도 따고 님도 보고란 말이 있다.
모텔이 없던 시절 뽕잎이 잔뜩 우거진 뽕밭과 보리밭은 자빠뜨리기엔 더 없이 좋은 적소이다. 글구
뽕이라고 하면 젖소부인,변강쇠와 함께 대종상에 여러 번 노미네이트 되었던 명화가 한 편 생각 난다. 흐 흐.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 서서란 명문을 남겼던 미술사학자 최 순우 선생의 말씀이 생각 난다.
아름다운 문화재란 그 보는 이의 아는 만큼만 보인다 라고 하셨듯이 농 익어 마악 터질듯한 검스름한 오디를 보는 순간
내 뇌리에 떠 오르는 생각은 농염한 여인네의 가슴 꼭지로만 보인다. 괜한 기분에
손은 뒷짐을 진 채로 마치 오카방고의 기린 처럼 목을 길게 빼고는 혀만을 널름 널름 거리면서 터질듯한 오디를 핥으니 그 기분이
어떠냐구요?
수박 껍띠기 혀로 천번을 핥아도 그 맛을 알 수가 없답니다. 청량산 갈 일이 없다구요?
구럼 밤에 사모님 윤허만 득 하시면 대충이라도 그 맛을 알 수가 있으실 껍니다.
개 눈에 띄는 건 똥 밖에 업따고 하더니만 난 아무래도...
배흘림 기둥이란 절집을 지을 적에 세운 기둥들이 기와나 대들보 같은 상부의 무거운 자재들 때문에 어쩜 시각적으로 약해 보일
수가 있어 기둥의 중간 허리 부분을 김 준현의 배 처럼 약간 부풀어 오르게 깍아 세운 기둥을 뜻 한답니다.
비록 나무라는 무생물에게도 무거운 짐을 받히고 있는 것이 안스러워 이런 자상한 배려를 하는 우리네 선조들의 지혜가 놀라울
따름 입니다.
거친 숨을 헐떡 거리며 온 몸이 물벼락을 맞은 듯이 땀으로 흥건히 젖은 채 장인봉을 목전에 둔 고개턱을 오르니 어머나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날씨에 이곳은 얼음뽀송이 바람이 불고 있다.
살아 오면서 이리도 시원한 바람은 난생 처음이다. 몇 몇 여성 횐님들은 추위에 떨다 급기야는 윈드 쟈켓을 꺼내 입으신다.
장인봉은 올랐다가 빽을 해서 다시 원위치로 와야 하는 코스이기 때문에 난 당근 그 자리에 퍼 질르고 앉았는데 후미로
횐님들을 인솔해서 오신 강 대장님의 매서운 눈초리가 채찍 처럼 내 등짝을 휘 갈긴다.
자그만 강 대장님 손에 귀를 잡혀서 복날 개 끌려 가듯이 힘든 철계단을 오르는 내 꼬락서니가 참으로 한심 스럽다는 생각은
잠시 잠깐이다. 정상엘 올르니
태백, 소백 준령들이 함지박에 넣어 둔 미꾸라지들 처럼 온 천지를 향해 사방 팔방으로 꿈틀 거리고 있다.
멀리 고향땅을 바라 보니 부모님 생각이 너무도 간절 하다.
강 대장님 말씀에 의하면 장인봉은 원래는 의상봉이라고 불리웠다고 하신다.
장인봉이란 표지석 글씨는 이곳 청량산 김생굴에서 공부를 하셨던 통일신라 시대 명필 김 생의 서를 각각의 글자를 따로 떼어서
짜집기 하듯이 즉 집자를 하였고 뒷면에 있는 청량산 시는 조선시대 정종 때 풍기군수로 부임해 오셔서 중국의
안 향을 배향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후일 소수서원)을 세운 주 세붕의 작품 이다.
청량산이라고 하면 청량산인으로 불리워 지길 원 했던 퇴계 이 황선생,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곳으로 몽진 온 고려시대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일화와 일대기를 빼 놓을 수는 없다. 모두들 잘 아는
정사 보다는 아리송한 야사 위주의 청량산 산행기 백미는 아무래도 후편으로 미루어야 겠습니다.
퇴근 시간이 임박해 오고 있군요.
후편에는 퇴계 선생의 일화와 함께 지난 번 제대로 마무리를 못한 내 친구 깽판이 이야기를 함께 써서 올리겠습니다.
자연과 산 그리고 우리 느림보를 사랑하시는 여러 횐님들의 다음에 만날 산행 때 까지의 안녕 하심을 기원 드리며 이만
탄천변에서 불곡산 방외지사 돌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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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도 생전에 선친께
"우리조상님들은 낙향을 하시더라도 말죽거리 정도에 자리를 잡으시지
전라도 산골짝 송광사 근처에다 잡으셨는지 모르겠다"고
농담하다가 크게 혼난 적이 있습니다.
저도 그랬어요..용인에 잡지않고 영암 월출산밑으로 왔다고 ..ㅎ.
선배님 잘 지내시지요..대전으로 가신뒤론 뵙기가 어렵네요..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바라겠읍니다..
오랫만에 돌삐님의 구수한 산행기로 포만감을 느낍니다.
몇번의 청량산을 오름을 통하여 보아온 산봉우리들이 눈에 선하였지만
녹음이 창창한 그 봉우리들은 더욱더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습니다.
뒷팀들이 하늘다리에서 느긋한 점심을 즐기고 뒷실고개에서 청량사로 향하는 동안
청량사에 얽힌 역사이야기는 산길이 짧게 느껴질 정도로 재미있었습니다.
옆에 있으면 살아있는 백과사전처럼 술술 풀리는 돌삐님과의 산행이
산나리는 무척이나 즐거웠답니다.
남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것도 크나큰 보시라 하였습니다.
돌삐님을 반갑게 맞이하시는 느림보님들의 사랑을 잊지마시기 바랍니다.
돌삐아우님 글을 대하니 무척 반갑군요..ㅎ..
돌삐님의 역사강의는 끝이 없습니다.
곳곳에 얽인 역사,
어찌그리도 술~술나오는지요~
한번은 들었음직한 이야기지만 돌비님의 말씀이
쏙쏙들어옴은 색이들어있는 역사이야기라서 일가요?ㅎ
자주오셔서 역사공부 많이 시켜주시고 초고추장과 오징어 맛있었습니다^^
예전에 그냥 무심하게 오른 청량산이 돌삐님의 글을 읽고 생각하니
예사롭지 않은 산으로 다시금 다가옵니다..
좋은글 항상 감사한 마음이구요...자주 뵙기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