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시장 367 (10권 6. 김홍신. 펌글)
* 교묘한 술수 *
나는 다혜가 퇴원하는 날까지 사흘간 꼭 그 시간에 그만큼씩만 다혜의 병실에 나다녔고,
밤이 되면 전화기를 잡고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사흘 동안 병원 나다니는 것 외엔 내처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경제상황이 몹시 나빠 불황 모르던 은주 누나네 가게도 꽤나 타격을 입은 모양이었다.
은주 누나는 그럴수록 부지런해서 새벽에 나갔다가 밤늦게 들어오곤 했다.
은근히 도와 주었으면 하는 눈치였는데 나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것을 알기에 아예 모르는 체했다.
불황이 이렇게 장기적으로 풀리지 않으면 세상 인심은 더욱 흉흉해지기 마련이었다.
필요한 사람들도 그만큼 늘어갔지만 나는 두문불출하기로 작정했다.
혜련이한테 전화를 건 것은 다혜가 퇴원한 다음날이었다.
잠에서 덜 깬 목소리였지만 꽤나 반겨 주었다.
종합검사 결과가 한참 더 걸려야 나오는데 우선은 피로 외에,
다른 병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다혜의 시치미가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흥정 때문에 전화 했나요?"
반겨 주던 말 끝에 혜련이가 이렇게 물었다.
"빚은 빨리 갚는 게 편하니까요."
"빚진 사람 치곤 좀 도도하네요."
"그게 나요."
"빚을 준 사람이 요즘 세상엔 고분고분해야 한다지만.... 이건 좀 지나치잖아요?"
"결론만 말합시다. 오늘 하루에 빚을 갚고 싶으니까요."
"그럼 받죠. 나한테 너무 딱딱하게 대하지 마세요. 나도 토라질 줄 아는 여자예요."
"어디로 가면 되겠소?"
"여전하시네. 결국 내가 필요할 거예요. 그때 내가 도도하게 나오면 총찬씨는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죠?"
"그건 그때 일이지요."
"드라이브하고 싶어요."
"난 차가 없어요. 은주 누나한테 빌긴 싫고."
"내 차로 가면 돼요."
"우리 집 알죠?"
"은주 언니네 집 말이죠."
"그래요."
"한 시간 안에 가겠어요. 여자가 외출할 땐 시간이 좀 걸리죠."
나는 전화기를 내던지듯 내려놓고 말았다.
말대꾸하기 불편한 여자였다.
다혜 일만 아니면 상종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터인데 답답한 건 내 자신이었고 그런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여자였다.
병원 집 딸이 그렇게 부러워 보이긴 처음이었다.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화사한 차림으로 혜련이는 나타났다.
가볍게 드라이브나 하자던 그녀의 말을 그대로 믿었던 내가 조금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 몰고 다니던 고급 승용차였지만 꾸며놓은 실내장식이며 갖추어진 용품들이 유별나게 고급스러운 것들이었다.
옆좌석에 올라타자 그녀는 아까 말투와 다른 화사한 웃음을 보였다.
"오늘은 하루 종일 내가 빌린 겁니다. 내 말이 맞죠?"
"물건 취급하는 거요?"
"아뇨. 믿을 만한 신사로 대하겠어요."
"성질대로 하쇼."
"좋아요."
자동차는 언덕을 쏜살같이 내려와 큰길로 접어들었다.
운전 솜씨가 제법인 듯싶었다.
무릎까지 보이는 짧은 치마 차림에 새 하얀 구두며 곡선미가 제대로 나타나는 차림새들이 여간 대담한 복장이 아니었다.
나는 속으로 웃었다.
이 여자가 나를 유혹하려고 벼른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유혹할 대상을 잘못 선정한 것이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어디로 갈 거요?"
"내 맘대로 아녜요?"
"나를 언제까지, 오늘 몇 시까지 빌릴 생각요?"
"밤 열 두 시까지는 반납하겠어요."
"반납이라.... 말투가 여전하시군, 실컷 가지고 놀아보쇼. 빌린거니까 상처 하나 내지 마십쇼."
"빌려 쓰다 보면 상처가 날 수도 있죠. 그러나 가능하면 깨끗하게 반납하도록 노력하겠어요."
혜련이의 도도한 기는 아직도 살아 있었다.
그 기를 꺾어놓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자동차는 강변도로로 접어들었다.
이 여자의 속셈을 읽어두고 싶었다.
"어느 쪽으로 데려갈 참이죠?"
"물 좋고 산 좋은 곳예요."
"내가 보디가드요, 아니면 정말 물건처럼 끌려가는 거요?"
"너무 신경쓸 거 없어요."
"어떤 대접을 할 거냐고 묻는 거요. 약속을 취소할 권리가 나에게도 있잖아요."
"물론이죠. 그러나 그렇게 하는 건 총찬씨답지 않는 일이죠."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자동차는 북쪽 길로 들어섰다.
"이 길로 가니까 괜히 으스스해집니다."
"호젓한 곳으로 모시는 거예요."
"이 길로 가면 청평이고...."
"얼추 맞췄네요."
"실례인 줄 알지만 나 눈 감아도 되겠죠. 요즘 잠을 설쳐서 그럽니다."
"숙녀 혼자 운전하란 실례가 어디 있어요. 졸려도 참으셔야지. 그러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요."
산굽이가 많은 길이어서 운전하기에 썩 좋은 길만은 아니었다.
"사고나면 저승 길동무가 되는 거 아닙니까?"
"난 오래 살고 싶어요."
"그럼 운전을 똑바로 하쇼."
그러고는 등받이를 밀어놓고 눈을 감았다.
"곱게 자도록 내버려 두진 않을 걸요. 무슨 말인가 알아요?"
그러더니 차를 난폭하게 몰기 시작했다.
나는 할 수 없이 몸을 세우고 눈을 떴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그녀는 도도하지만 매력이 있었다.
언제 보아도 당당한 여자였다.
청평 호반에 빗줄기가 세차게 흩뿌리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소나기 같으면 어느 쪽이든 한쪽 하늘이 열려 있을 터인데,
호반과 하늘에 온통 시커먼 구름이 몰려들더니,
운전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세찬 빗발이 무더기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와이퍼가 시건방지도록 차창을 흔들어도 세찬 빗발을 닦아내지는 못했다.
차를 으슥한 길가에 세워놓고 빗발이 조금 뜸해지기를 기다렸다.
워낙 모질게 쏟아부으니까 지나가는 차가 한 대도 없었다.
성능 좋은 차인데도 습기 제거가 안 되어 차 안에서 지척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이렇게 억센 빗발 때문에 자동차 안에 갇혀 있는 상황을 자꾸 생각했다.
다혜와 단둘이 이렇게 호젓한 길에서 억센 소나기,
반 시간쯤 지척을 구별할 수 없게 쏟아져 준다면 얼마나 행복할까를 생각했다.
다혜와 이렇게 차 안에 갇혀서 도란도란 얘기만 할 수 있어도 행복할 것 같았다.
내 뇌리엔 다혜가 일부러 감추려고 하는 그 병명으로 꽉 차 있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지만 다혜가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자꾸하고 있었다.
이것이 정말 방정맞은 생각이길 바라는 마음이 물론 강했다.
논문을 완료한 후에 작고 아담한 보금자리를 만들어 우리들만의 자리를 만들고 싶었다.
"하늘이 우리 둘을 묶어두고 싶으신가 보죠?"
올라간 치마를 여몄지만 곡선미를 가릴 수는 없었다.
나는 피식 웃고 담배를 빼어물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멀쩡하던 하늘이 갑자기 이럴 수가 있어요."
"하늘은 때때로 그런 거 아닙니까."
"지금 뭘 생각했어요."
"솔직하게 얘길 해도 됩니까?"
"당연히 솔직해야죠. 난 솔직한 남자를 좋아해요."
"다혜를 생각했소."
"그럴 줄 알았죠. 난 그 정도 가지고 질투하지 않아요. 나는 승산있는 싸움이 아니면 걸지를 않으니까요."
"승산 있는 싸움요? 그렇다면 나를 유혹하겠다는 거요?"
"그 정도는 짐작했을 거 아녜요."
여전히 당당했다. 이렇게 다부지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여자도 드물 것이다.
"짐작했으면 내가 따라왔을 것 같소? 뭔가 착각하고 계시군요."
"날 속이려고 하지 마세요. 내 옷차림이나 내 표정이나 내 말투를 보면 누구라도 알 수 있죠.
여자는 이런 걸로 감정을 표시하니까요. 유혹당하지 않겠다는 자신감을 갖고 따라왔다고 말하면 이해하지만,
눈치를 채지 못했다는 건 총찬씨답지 않은 말이네요."
대꾸할 말이 없도록 야무지게 말을 했다.
나는 담배만 힘 주어 빨았다.
습기가 차도록 내버려 두어서 바깥은 아예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좁은 공간에 우리 두 사람뿐이었다.
미용체조 같은 걸로 몸관리를 철저히 한 여자라는 걸 대번에 느낄 만큼 드러나는 곡선미를 자랑하며,
혜련이는 자꾸 내 시선을 끌어드리려고 했다.
"습기나 제거합시다. 뭐가 보여야 할 거 아뇨."
"이 좁은 공간이 좋잖아요."
"뭐가 좋다는 거요?"
"상상하기 말예요."
"나하고 다혜 사이가 어떤 관계라는 걸 알잖아요? 우린 머잖아 결혼할 사이요.
만약 내가 혜련씨 유혹에 넘어간다고 해도 일시적일 거고 결국 혜련씨만 상처가 남게 되요.
내가 오늘 따라나선 건 약속 때문이었고 혜련씨가 다혜의 옛친구이기 때문이었어요.
또 분명히 얘기하고 싶은 것은 다혜의 병명, 검진 결과에 대한 걸 상세히 알고 싶은 욕심이 더 컸어요. 이게 내 솔직한 얘기요."
"물론 알아요. 솔직하게 말하죠. 난 총찬씨한테라면 상처받고 싶어요. 그리고 두 사람은 아마 결혼하지 못할 거예요.
여태 결혼하지 못했다면 두 사람 사이에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거든요.
또 다혜의 병명 같은 걸 나를 통해 알고 싶다고 했는데.... 날 그렇게 시시하게 보지 말았으면 해요.
지난번에 병실을 알려 준 건 이런 기회를 만들기 위한 내 계산였지만 이젠 달라요.
난 다혜의 병명에 대해 관심이 없어요. 관심이 있다면 총찬씨예요."
"나는 혜련씨에 대해 관심이 없어요. 다혜가 입원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만나지 않았을 거요."
나도 오기가 뻗쳐 이렇게 대꾸했다.
그리고 무섭게 쏟아지던 빗발이 제법 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