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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인이 남긴 작별인사 ⸺이가림 유고시집 『잊혀질 권리』(2018,시학)
김 창 수 (문학평론가)
이가림 시인의 유고시집 『잊혀질 권리』(2018, 시학)가 그의 3주기인 7월에 간행되었다. 총 6부로 구성된 유고시집에 그의 작품 97편이 수록되었다. 유고시집에 수록된 작품은 이가림 시인이 2012년경부터 시집을 간행하기 위해 손수 정리해 둔 「돌의 꿈, 정리본 2014」을 중심으로 10여편의 미발표작이 포함되어 있다. 이가림 시인은 불치의 루게릭병으로 타계하기 바로 전 해인 2014년까지 병상에서도 원고를 썼다고 하니 시집을 대하는 마음이 숙연하다. 『시와시학』 2014년 겨울호에 게재된 「저무는 풀」과 「흰 구름 술」, 「누에고치」, 「죗값」, 「초승달을 구해줘」등이 그가 꺼져가는 불꽃으로 구워낸 마지막 항아리들이다. 유고시집의 제5부에 수록된 19편의 작품들은 그가 루게릭병과 싸우면서 쓴 투병기(鬪病記)이기도 하다.
「잊혀질 권리」 (『현대시학』 1014년 5월호), 「저무는 풀」 (「시와시학』 2014년 겨울호), 「흰구름 술」 (「시와시학』 2014년 겨울호), 「누에고치」(「시와시학』 2014년 겨울호), 「죄값」(「시와시학』 2014년 겨울호),「초승달을 구해줘」 (「시와시학』 2014년 겨울호), 「하얀편지」, 「멋진 식도락」,「동막동 저어새」, 「장독대」 (미발표) (「시와시학』 2017년 9월, 가을호), 「추억으로 사는 법」(미발표) (「시와시학』 2017년 9월, 가을호), 「대추」(미발표 유고),「바람개비」 (미발표 유고) ,「봄이 오는 들녘」 (미발표 유고) ,「팽이 치기」(미발표 유고),「나무와 매미」(미발표 유고), 「산사의 풍경風磬」(미발표 유고) ,「솟대」 (미발표 유고), 「혼불 마을」(미발표 유고) -이상 19편: 『잊혀질 권리』 제5부
그는 치유도 거부도 할 수 없는 중병을 선고받고도, 괴로워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천주교도인 그는 신의 섭리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었을 터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상에 허여된 시한을 확정하고 시계는 채권자처럼 운명을 독촉하는 상황은 가늠키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는 ’월아천‘의 초승달로 몸을 바꾸어 ’머잖아 사나운 모래바람 손아귀에 목이 졸려 죽을 것만 같은 마지막 찰나, 구원 가능성이 정말로 없는지 절박하게 소리쳐 물어본다.(「초승달을 구해줘」) 그는 또 가장 죄없는 일이 시를 짓는 일이라고 믿고 시인과 시를 빙자하여 언어를 혼란스럽게 만든 자신의 죄에 대해 고백한다. 그리고 그 죄값으로 다음 세상에서 농부의 짐을 져 나르는 프랑시스 잠의 당나귀가 되겠다고 신 앞에 머리를 조아려 보기도 한다.(죗값」) 그는 또 죽은 사람의 흰 천을 싸매 묶어 놓는 장례의식이 번데기가 고치 속에 숨었다가 나방으로 부활하는 모습과 같다고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러나 ‘끊임없이 굴러가는 시간의 수레바퀴’는 그에게 가장 두려운 ‘사령관’이다. (「누에고치」) 근무력증으로 육신이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나날이 가라앉기만 하는 고통 속에서 그 육신의 무게를 다 덜어내고, 비상(飛翔)하는 영혼을 상상해본다. ‘끊임없이 굴러가는 시간의 수레바퀴’에 절망하면서, 꿈의 공중누각을 짓기 위해 온몸의 진액을 다 쏟아내는 거미의 모습을 보고 시인과 숙명적 유사성을 발견한다. 공중에 집을 짓는 거미와 달빛을 먹고 사는 시인, 둘 다 ‘허공에서’ 꿈꾸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풀’은 만년의 그가 찾은 새로운 시적 상관물 중의 하나였다. “해가 서산마루 너머로 떨어질 때, 날이 저무는 것처럼 저물어가는 풀”이었다. 그 풀은 “제 살던 땅에 고스란히 허물을 벗어 놓고 지하로 내려가 어둠이 사는 아늑한 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할 뿐, 결코 긴 깊은 잠에 빠지지 않는 풀이다. ‘저무는 풀’은 죽은 것도 시드는 것도 아니며, 깊은 잠에 빠지지도 않고 그저 아늑한 지하로 쉬러 갈 뿐이다.
풀은 죽는 법을 모르는 자이기에 작별의 인사도 하지 않는다 해가 동산 마루에 다시 솟아오르듯 솟아오르기 위해 제 살던 땅 그 자리에 서서 묵묵히 노을을 맞이한다 -「저무는 풀」에서
그의 시 「솟대」는 탈육의 혼이 아니라 탈혼의 순수 육신이 그려져 있다. 솟대에 앉은 나무새는 “영혼은 빠져 나가고 육신만으로 더 신성하게 된” 불사조이다.
새가 죽어 천 년 넘어야 그 혼 빚어 솟대의 새가 된다 조선 사람들 가슴마다 세우던 순수 샤머니즘 그 푯대위에 정좌한 새 한 마리 (……) 영혼은 빠져 나가고 육신만으로 더 신성한 새 깨끗한 종교 한 자락을 눈뜨며 장구한 세월 불사조가 된다
‘유년회상’은 그의 시에 흔치 않은 주제이다. 투병 과정에서 쓴 만년의 시에 유년기와 함께 고향의 풍경은 다양하게 변주된다. “세월도 물과 같아 뒤로 밀지 않으며, 유년의 추억도 강나루에 그대로 머물 것”이라며 추억을 더듬거려 머리맡에 두고 화분식물처럼 가꾸어 본다. 초등학교 운동회 날의 만국기 가득한 하늘과 환하게 굽이치는 코스모스 꽃들이 있는 고향 마을을 동네방네 치닫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추억으로 사는 법」) 또 “아지랑이 산허리, 누이의 아름다운 수틀, 이슬 함초롬한 창포꽃이 핀 고향 길섶”을 떠올리면, 여전히 소년처럼 가슴이 두근거린다. (「봄이 오는 들녘」) 또 어머니의 손때로 반들거리는 장독대를 떠올리며, 그 독 안에 켜켜히 앉혀 있는 맵고 짠 어머니의 눈물, 어머니의 짜디짠 생애가 절어서 피워 올린 하얀 소금꽃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어머니의 손때로만 반들거리는 옹기 검은 숯덩이에서도 저리 결 고운 빛이 나오다니 어머니 짜디짠 생애가 절고 절어 하얗게 피는 염화(鹽花)
열일곱 어린 나이로 낯선 부엌 들어서서 캄캄하게 울던 어머니
-「장독대」에서
이가림 시인이 세상을 떠난 날이 프랑스대혁명 기념일인 7월 14일이었다는 것은 우연이리라. 그가 이날을 기념하는 작품 「붉은 악보」(『황해문화』 2011년 가을호)를 남겼다는 것도 우연이겠다. 이 작품에서 담장 위에 핀. 붉은 장미들이 자신에게 폭죽을 쏘아 올리며 혁명기념 축제에 가담하라고 손짓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자신은 박렬(朴烈) 같은 아나키스트도 아니고, 어정쩡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혁명에 가담할 자격이 없다고 고개를 흔든다. 박렬은 1923년 일본 왕자 암살계획 사건으로 22년 2개월간 옥중에서 보낸 아나키스트 혁명가였다. 「붉은 악보」의 시적 수사학은 아이러니이다, 오히려 시의 주인공은 아나키스트 박렬처럼 살고 싶은 뜨거운 열정을 간직하고 있다는 고백이다.
오늘은 7월 14일 불란서 혁명기념일 담장의 장미꽃들이 오선지 위의 붉은 음표처럼 피의 폭죽을 펑, 펑, 터뜨리고 있다 저 불순한 것들이 어정쩡히 살아온 나를 박렬(朴烈) 같은 젊은 아나키스트로 잘못 본 것일까 오늘밤만은 장렬한 불꽃축제에 주저 없이 가담하여 함께 폭죽을 쏘아 올리자고 자꾸만 손짓한다. -「붉은 악보」
「소사나무 숲」은 이웃과 세상을 보는 이가림의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시인은 서해안 영흥도 십리포 해변에 군락지를 이루고 있는 소사나무 방풍림을 마을을 수호하는 민병대라고 생각했다. 십리포의 소사나무들은 150년 세월을 해풍과 파도를 견디느라 뒤틀리고 휘어져 옹이투성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옆으로 옆으로' 튼튼한 연대를 이루어 여전히 자신들과 이웃과 마을을 지키는 있는 민병대의 모습을 하고 있다. 십리포의 소사나무들은 방파제보다 더 완강하게, 거센 바람을 이기기 위해 낮은 포복으로 바리케이트를 치고, 어깨를 건 스크럼을 짠 시위대의 모습과 흡사하다. 비록 뒤틀리고, 휘어지고, 뼈만 앙상하지만, 십리포에서 태어나 평생 십리포를 사수해온 마을 노인들과 영낙없이 닮아 보인다. 오랜 세월을 마을을 위해 바람과 파도를 막아온 소사나무 숲은 오늘도 수평연대의 강고한 스크럼을 짜고 거센 해풍과 해일에 맞서고 있다.
150년 동안 십리포 마을을 지켜온 방파제보다도 더 완강한 저 낮은 포복의 민병대 바리케이트
그 어떤 칼바람의 송곳니에도 그 어떤 해일의 탱크 같은 기습에도 결코 밀리지 않는 저 낮은 포복의 민병대 바리케이트
전기고문이라도 당한 듯 뒤틀리고, 휘어지고, 늙어버린 뼈만 남은 나무들 십리포 마을을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는 옹이투성이 노인들 같다 - 「소사나무 숲」에서
「잊혀질 권리」는 『현대시학』 2014년 5월호에 수록된 작품으로 이가림 시인이 생전에 발표한 마지막 작품으로 그의 종생기(終生記)와 같다. 그는 강물에 던진 물수제비가 가뭇없이 가라앉은 것처럼, 오두막에서 홀로 조는 등잔불 까물거리다가 꺼지듯, ‘으악새 우거진 골짜기에’ 운석이 나타났다 사라지듯 ‘지워지고’ 싶다고 담담하게 노래하고 있다. 자신에게 다가올 운명을 이미 수긍하였기에 가능한 고요한 심경이다. 「잊혀질 권리」에서 소멸의 시적 상관물은 조약돌에서, 등잔불로, 다시 운석과 모래무치로, 보리씨로 변주되는 과정을 보면 이미지들이 서로 겹치고 충돌한다. 돌과 불은 서로 다른 물질 이미지이다. 무게 때문에 물속으로 가라앉은 광물 이미지인 조약돌과 제2연의 수직으로 타오르는 기체 이미지인 등불은 제3연에서 ‘불타는 돌’, 곧 타오르며 하강하는 운석으로 통합된다. 이는 어둠 속으로 침전하는 육신과 창공으로 비상하는 정신이라는 모순된 상황을 상징하는 것이다. 제4연의 ‘보리씨’도 역설적인 이미지이다. 보리씨는 조만간 땅에 묻힐 썩어갈 운명이지만 촉촉한 흙 속에서 푸른 싹을 틔워 썩은 껍질을 뚫고 재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구절, “없어진 있음으로/ 조용히/ 지워지고 싶다”는 표현은 부인할 수 없는 자신의 부재를 넘어, 죽음을 통해 존재하는 역설의 경지를 상상해보는 것이다.
어린 날 물수제비뜨기의 가뭇없이 가라앉은 조약돌인 듯
후미진 마을의 오두막 홀로 조는 등잔불인 듯
캄캄한 밤 으악새 우거진 골에 떨어진 한 조각 운석인 듯
모래 이불 밑에
몰래 숨은 한 마리 모래무치인 듯 촉촉한 흙에 반쯤 묻힌 보리씨인 듯
나 그렇게 없어진 있음으로 조용히 지워지고 싶어
-「잊혀질 권리」 전문
떨어진 한 조각 운석과 대지에 묻혀 썩어가는 보리씨의 이미지는 육신의 죽음에 대한 수긍이다. 그렇지만 어두운 밤하늘을 찬란하게 수놓을 운석의 빛, 봄의 대지에 뚫고 나올 푸른 보리 이삭은 죽음을 넘어 되살아날 노래의 씨앗, 부활의 은유이다. 이가림은 ‘저무는 풀’은 죽는 법을 모르는 자이기에 작별의 인사도 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잊혀질 권리」는 그가 지상의 벗들에게 남긴 절절한 작별인사이다. (*)
⸺계간 《시와 시학》 2018 겨울호, 서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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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이수 선생님 올려주신
글을
잘 읽고갑니다
죽음의 시간을 받아놓은 이의 마음으로 시를 쓴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을까요?
삼가 영전에 명복을 빌어봅니다. -회장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구입해서 보아야 겠습니다.
저도 어쩔수 없이 잊혀지고 잊는 존재임을 수궁하지만,
선생님의 마지막 노래
'잊혀질 권리'를 보며 눈물 흘립니다.
참 아름다운 시입니다.
천국에서는 아프시지 않고 편히 지내시기를 빌면서 그리움과 회한의 마음을 전해드립니다.
좋은 글 보여주신 정이수 선생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