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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문학인가?” 이 질문에, 사람에 따라서는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것이다. 성경은 전지전능하시고 지고지순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반면, 문학은 낮고 천한 인간들에 의해 세상에 나온 것이라는 관점으로 본다면 수긍하지 못할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문학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이 질문에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은 인간의 사상이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한 예술이다. 말로 된 것(口碑文學,口傳文學)이든, 글로 적은 것(記錄文學)이든 언어예술이면 모두 문학이다.
사실 ‘문학’이라는 명칭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과학, 수학, 철학, 논리학, 미학 등은 모두 학문인데, ‘문학’은 어떤가. 학문이 아니라 예술 아닌가. 예술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영역이 아닌가 말이다. 그렇다면 ‘문학(文學)’이라기보다는 ‘문예(文藝)’라 함이 더 적절하다 해야 할 것이다.
어떻든 문학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성경은 문학 그 자체야 아닐지라도 문학적 표현이 많이 포함된 책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학을, 무엇인가를 상상의 힘을 빌려 언어 또는 문자를 써서 표현한 예술작품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으니, 이런 관점으로라면 성경을 문학이라 한다면 큰일 날 일이다. 성경을 사실 아닌 허구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성경에 문학적 표현이 쓰이지 않았다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학적 표현이란 어떤 것일까? 대국적으로 말한다면 ‘비유적 표현(比喩的表現)’이다. 그런데 성경에는 신·구약을 막론하고 비유가 얼마나 많이 쓰이고 있는가. 우선 예수님의 가르침만 해도 그 가운데 1/3정도는 비유이다. 그것도 특히 중요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말씀하신 것을 듣는 자들이 더욱 선명하고 확실하게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믿는 우리가 문학적 소양을 갖춰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비유법 중에 알레고리라는 것이 있고, 성경해석에도 알레고리 해석이 있다. 알레고리란 추상적인 개념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그것과 유사한 구체적 이미지로 표현하는 문학 형식인데, 동화 <개미와 베짱이>에서 그 예를 찾는다면 이런 것이다. ‘개미→근면성’ ‘베짱이→게으름뱅이’와 같이 표현하는 것이 알레고리이다. 알레고리 성경해석도 성경을 그처럼 해석한다. 그런가 하면 성경해석에는 역사적 성경해석도 있는데, ‘성경 본문의 의미와 기록자의 의도, 역사적인 정보, 본문의 구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해석 방법’이다.
그런데 알레고리 성경해석은 역사적 성경해석과 함께 2세기부터 양대 성경해석방법으로 자리매김해 왔고, 우리 기독교(개신교)에서는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 줄곧 역사적 성경해석을 기준으로 하여 알레고리 성경해석은 보조적으로만 사용해 왔다.
그러나 기독교를 표방하는 많은 이단들은 반대로 알레고리 성경해석을 중시하여 역사적 성경해석은 외면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알레고리가 <개미와 베짱이>처럼 누구나 간단명료하게 한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을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이해하게 된다는 데에 있다. 말하자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인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라는 것이 있다.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마13:24-30)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떤 가르침을 주시고자 이 같은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는지 잘 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인자(예수), 밭→세상, 좋은 씨→천국의 아들들, 가라지→악한 자의 아들들, 가라지를 뿌린 원수→마귀, 추수 때→세상 끝, 추수꾼→천사들, 등과 같은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것을 잘 안다. 말씀하신 예수께서 친히 그렇게 설명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승 예수의 이 설명은 듣기까지는 늘 함께 지내며 배우고 있는 제자들까지도 무슨 비유인지 알지 못했다. 이 설명이 없었다면 이 비유에 대한 해석은 천차만별로 달랐을 것이다. 사이비 교주라면 아마 ‘좋은 씨를 뿌리는 이’가 교주인 자기라고 해석할지도 모른다.
예수께서 들어 말씀하신 비유 중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알레고리가 아니라 간단명료한 비유이다.
(어떤 율법교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하였으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하시니라 (눅10:29-37)
예수께서 진정한 이웃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드신 비유인 것이다. 유대인이 생각하는 이웃은 자기네 동족 유대인뿐이었고 이방인은 이웃일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 사마리아 사람은 불의한 죄인에 불과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심으로 이웃의 한계와 범위를 무너뜨리셨다. 누가 자신의 이웃이냐를 생각하기에 앞서 자신이 다른 사람의 이웃이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비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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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조차도 알레고리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비유에 대한 동탄명성교회 정병진 목사에게 재미있는 글이 있어, 그 일부를 약간 손질하여 소개해 본다.
― 만약 신천지에서 이 비유를 알레고리 방식으로 푼다면 이 같은 식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오늘날의 기존 교회 교인들이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간다’는 것은 교인들이 기존교회에서 하는 신앙생활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런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사탄마귀인 ‘강도’를 만날 수밖에 없다.
‘거의 죽게 되었다’는 것은 교인들이 기존교회에서는 영생을 얻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도 기존교회의 목자들인 ‘제사장들’이나 그 목자를 돕는 전도사들인 ‘레위인’은 이를 본체만체할 뿐이다. 하지만 ‘어떤 사마리아인’은 지금이야 비록 기존 교회로부터 배척을 받으며 이단삼단 하면서 사이비이단교주라고 비난하는 신천지의 약속된 목자(이만희)를 가리킨다.
이만희인 ‘사마리아인’은 강도만난 사람을 치료해 주는데, 그때 사용한 기름과 포도주는 <집 나간 탕자의 비유>(눅15:11-32)에서의 “살진 송아지 고기”와 <가나의 혼인잔치 비유>(요2:1-11)에서의 ‘포도주’이다. 고기와 포도주로 향락을 누려 영적으로 타락한 것을 의미하는데, 그렇게 타락한 사람들은 신천지에 와서 이만희의 가르침을 받음으로 구원을 받게 된다. 그리고 ‘두 데나리온’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이천년의 기간이 다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때가 되면 예수께 영으로 오셔서 이만희의 육체와 합일되고, 이만희가 인치는 자로서 신천지 성도들을 인치면 그들은 제사장이 될 것이다. 그러면 그때 세상의 열방 사람들이 재물을 싸들고 와서 신천지 성도들에게 “우리는 하나님이 당신들과 함께 하심을 들었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저들 신천지가 말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대한 완전한 영적 해석입니다. ―
이와 같은 것이 알레고리 성경해석이다. 성경(하나님, 예수)이 말하고자 하는 것과는 달리 해석자가 자의적으로 해석하다 보니 얼마든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니 이단이 수도 없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니 그 교주들이 사단의 하수인 노릇을 하게 된 것이다.
성경은 그 의미를 어느 특정인만이 알 수 있도록 쓰여 있지 않다. 누구라도 알 수 있도록 쓰여 있는 책이 성경이다. 그런 성경인데 읽어 알 수 없는 것은 자신의 무지와 이해부족 때문이다. 성경은 물론 하나님의 감동(영감)에 의해 쓰였기 때문에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제대로 알 수도 믿을 수도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성령이 성경에 쓰여 있지도 않은 것을 새롭게 깨달아 알도록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성경은 과거, 현재, 미래의 온 인류를 위해 쓰인 책임이 맞지만, 쓰인 당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쓰인 것이기 때문에 현대를 사는 우리는 읽어도 모르는 내용이 많다. 더욱이 쓰인 시대뿐 아니라 지역도 다른 우리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성경 외의 다른 책은 읽을 필요가 없다는 사람도 있는데, 아니다. 물론 성경만큼 값진 책은 없다. 인간이 하나님께로 가는, 그래서 새 생명의 구원을 얻게 하는 안내역(案內役)은 성경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이 아무리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쓰였다 해도 성령이 우리에게 성경이 쓰인 시대나 지역 상황까지 모두 알려 주는 것은 아니다. 성경외의 다른 책도 읽어야 하는 연유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정보까지 성령이 알려 주시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예언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예언은 이해보다는 그대로 믿는 것이다. 제자들은 스승 예수의 부활에 대한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게도 많이 강조하여 가르쳤는데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부활 후에서야 알게 되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머리를 아무리 굴리고 짜내 본다 해도 그것으로 이해될 리 없는 일이다. 성경에 쓰인 그대로 믿는 수밖에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잘 안 믿어지는데 어떻게 믿냐고? 그러니 기도가 필요한 것이다. 성령의 도움이 필요하니 기도하는 것이다.
성경을 거듭해서 읽다 보면 전에 이해되지 않았던 사실들이 깨달음으로 가슴에 와 닿는 경우도 있는데, 성령의 도우심 때문이다. 두뇌활동에 의한 지적작용으로 인해 이해되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그것은 깨달음에 따른 믿음이 아니라 지식을 더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런 지식을 믿음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지만 성경은 특정인만이 이해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성령의 도움을 받으면 누구라도 깨달아 믿음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해석을 자기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기라도 한 것처럼 자의적으로 이해하다 보니, 억지로 풀다 보니, 그들이 마귀사단의 하수인인 이단이 되어 세상에 나타나 활개를 치게 된 것이다.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3:16) 저들 이단이 지금은 의기양양해 보이나 스스로 소멸되거나 이 세상 마지막 날 멸망에 이르게 될 것이다.
알레고리 성경해석, 그것이 바로 성경을 자의적으로, 억지로 푸는 것이다. 알레고리는 화자(또는 필자)가 그 의미를 말하지 않으면 누구도 알 수 없는 수사법(표현방법)이다. 알레고리 성경해석을 지양해야 할 까닭이다.
거듭 말하지만, 성경을 문학 그 자체라 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소설’은 문학의 대표적 장르인데, 사실과 다른 거짓에 대해 말할 때 ‘소설을 쓴다’ 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에 문학적 표현이 다량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은 탁월한 문학가이심이 틀림없다. 이것이 믿는 우리가 문학적 소양을 길러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