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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 꽃은 지지 않았다] -허경영 저-
절판 되어 지금은 중고서점에 가끔 나오기도 하지만 찾아보기 힘든 책이라
처음부터 차례대로 올려봅니다
☆무궁화 꽃은 지지 않았다.☆ [1]
♡기룡지상의 52세의 박정희 대통령과 20세의 허경영♡
용의 허리에 올라탄 사람은 그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가야지 중간에 목표를 포기하고 뛰어내리면
죽는다는 기룡지상이 박 대통령과 나의 운명의 닮은 점이다.
호랑이나 말이나 소를 타고 가는 사람은 중도에 포기하고 뛰어 내려도 다치기만 하지 죽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상과 목표가 높은 사람에게는 선천적으로 고난과 죽을 고비가 산적해 있는 것이다.
나와 박대통령은 죽을 고비를 많이 넘기는 숙명의 일치를 타고났다.
1917년생인 박 대통령에 비해 나는 1950년 1월 1일 이니까 32살 차이가 나지만 내가 20살
(호적 신고가 잘못되어 호적에는 1947년 생으로 잘못되어 있음, 호적 나이로는 22살 때임 *단 1950년생은
확실하지만 태어난 날자는 확실치 않음)때 박 대통령을 만나 박 대통령의 정책 보좌역이 되어 돌아가시는
1979년까지 숨 막히는 경제개발과 정치적 소용돌이를 함께 했다는 것은 참으로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에게는 국가 경영을 경험해 보는 큰 깨달음의 시간이었다.
방송통신대학과 새마을운동, 소련의 핵기지 인수 등 100여 건의 정책을 건의하여 관철 시키면서
나는 어린 나이에 많은 것을 경험했다.
6.25 사변이 나던 해인 1950년 1월1일 서울의 중량교 다리 밑 가마니 움막에서 나는 태어났다.
그때 날씨가 너무 추워서 나의 어머니는 몸이 얼어서 산후병을 얻었고 내가 태어난지 6개월 만에
6,25 사변이 일어나 어머니는 나를 선친들의 고향에 데려놓고 내가 네 살때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서울의 중량교 다리 밑 가마니 움막에서 기거하고 계셨던 것은 내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만석꾼의 아들이었는데 나의 어머니와 결혼을 한 얼마 뒤 할아버지께 물려받은 10,000여 마지기의
전답을 수백 명의 소작인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줌으로서 다른 지주들이 아버지를 사상범으로 고발하였고
아버지는 서울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을 기다리고 계셨다.
그러다가 내가 태어난지 6개월이 되는 1950년6월22일. 6.25사변을 사흘 앞두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33살의
나이로 사형이 집행되어 돌아가셨다. 그 때 어머니는 아버지 면회를 하기 위해 만삭의 몸으로 서울에 와서
중량교 다리 옆 농가에서 일을 해주며 면회를 다녔는데 농가에서 주는 방은 거절하고 잠자리는 중량교 다리밑
가마니 움막에서 촛불을 켜놓고 아버지를 살리기 의해 기도를 하며 지내시다가 나를 낳았다.
어린 나를 안고 서대문 교도소에 면회를 갔을 때 옥중에 계신 아버지가 나에게 남긴 유일한 ("서울의 동쪽엔 일본의 동경이 있고, 서쪽엔 중국의 서경 있고, 남쪽엔 남경, 북쪽엔 북경 있으니 서울은 네 개의 위성수도를 거느린 세계적인 서울이 될 것이라면서 네가 자라서 꼭 남북통일을 이루고 서울을 세계 중심이 되게 해서 가난한 국민들을 편안하게 해주어야 한다.") 라는 뜻이 담긴 허경영=(허락할 허, 서울 경, 편안할 영)이란 이름을 지어주셨다고 한다.
그리하여 나는 시골의 친척집에서 자랐는데 초등학교 시절 새벽 4시부터 6년간 서당을 다녀 주역 등 30여 권의 한문서적과 사서삼경 등 유교서적 등을 모두 배웠으며, 초등학교 졸업 때는 모두 중학교를 갔는데 머슴살이를
하면서 나 혼자만 중학교를 가지 못했다. 내가 일곱 살 때부터 한문을 배우게 된 데에는 한 스님이 도움이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일곱 살이 되던 어느 날 오후 늦게 집에서 소 죽을 끓이고 있는데 지리산에서 경주 불국사 쪽으로 가는 길에 들렸다는 한 늙은 탁발승이 집으로 찾아와 시주를 청하므로 곡식을 시주 하자, 소죽을 끓이는 나를 쳐다보면서 (''너는 이집 아이가 아니구나'') 하길래 내가 (''스님은 그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 스님이 (''심부름 온 사람은 속히 돌아가야 하는 법. 너의 부모님은 너를 이 세상에 데려다
주면 곧바로 떠나야 하는 거야'') 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라고 묻자 그 스님은
(''그것은 네 얼굴에 쓰여 있느니라, 너는 지금부터 열심히 한문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너는 14살이 되면 이곳
진주의 지리산 자락의 정기를 다 받게 될 터이니 그 때는 서울로 가서 삼각산의 정기를 받은 뒤 장차 공부를 해서 세계적인 정치 지도자가 될 것이며, 푸른 집 (청와대)의 열쇠를 4개를 가지고 있다.'')는 그 당시로서는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그 스님은 새삼 강조 라도 하듯이, (''네 부모님의 함 자가 무엇인고?'')
라며 질문하자 나는 (''저는 김해 허씨이며 서울 경, 편안할 영 ,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존함은 허락할 허,
남쪽 남,권 세 권이며, 어머니 존함은 나라 조, 계수나무 계, 심을 식입니다.'') 라고 하자, 그 스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래! 훌륭한 선물을 주는 사람은 그 대가를 바라지 않고 일찍 떠나는 법이란다. 공자와 석가를 낳은 어머니도 모두 일찍 떠나셨느니라. 그래야 더욱 큰 고통 속에서 강한 열매가 되는 거란다.
큰 나무에서 씨앗이 태어날 수는 있어도 큰 나무 바로 옆에서 자란다면 그 씨앗은 큰 나무가 될 수 없단다.
큰 나무와 붙어 있는 작은 나무가 햇볕을 볼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한 가난한 음지의 젊은 시절을 보내
보아야 고통 받고 가난한 사람들의 가슴을 감동시킬 수 있게 된단다. 네 아버지, 어머니의 이름을 합쳐보니
허남권 조계식은 남쪽 나라의 권세의 월계수 나무를 심는 것을 허락한다 로 되어 있으니 한 사람의 인물을
이 땅에 심어놓고 급히 떠나야지 본인들이 기르지는 못하게 되어있는 이름이란다.'') 라고 말했다.
또한 스님은 김해김씨 라면서 허씨(김해허씨)인 나와 김수로왕의 한 핏줄이니 큰 인연이 있기에 만나게
되었다면서 두 시간쯤 머물다 떠나가셨다. 그렇지 않아도 7살의 나이에 나무하고 풀뜯고, 소 먹이고,
때고, 겨울에는 소죽 끓이고, 농사일을 도우며 온갖 머슴이 하는 일 다 하면서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던 나는
늙은 스님의 말을 들은 뒤부터 한문을 배우기 위해 새벽으로 서당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주역 등 30여 권의 한문책을 배워 이미 유학을 거의 끝내게 되었다. 내가 서울로 올라오기 얼마 전 20리 길을 걸어 중학교를 통학 하는 우리 마을의 초등학교 동기생 남녀 백 여 명의 졸업생들 중 유일하게 6년간 우등을 하고도 중학교를 가지 못 한채 이슬에 흠뻑 젖은 채 다 떨어진 옷을 입고 항상 새벽 일찍 밭언덕과 논두렁에서 풀을 베다가 그들과 마주치곤 하는 내가 안타까워 보였는지 하루는 돈을 모아 서울에 올라가 공부할 것을 종용하며 손에 들고 있던 낫과 지게를 뺏고 대신 신문지에 싼 돈을 건넨 일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일손이 부족한 양아버지를 걱정하여 쉽게 떠나지 못했다.
하루종일 산에서 나무를 한 짐해서 이십여 리를 걸어서 해저녁에 마을로 돌아올 때면 중학교를 이십여 리를 걸어서 통학하는 동기생 남녀 백여 명이 떼를 지어 산모퉁이를 돌아서 마을로 돌아 오는데 나는 그때 마다 마주치기가 괴로워 나무 짐을 지고 산 속에 숨은 채 멋진 모자와 교복을 입은 친구들의 모습에 혼이 빠진 채 그들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쳐다보다가 마을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던 내가 탁발 승려가 일곱 살 때 말한 대로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반드시 서울로 가야 한다는 말 때문에 많은 고민을 하다가 결국은 15세에 서울로 올라가기로 결심을 하게 되었다. 정든 시골을 떠나던 마지막 날 저녁, 나는 마굿간으로가서 내가 송아지때부터 키워온 소의 목을 끌어안고 소리 없이 울어야 했다.
**허경영 이름은 아버지의 옥중 유언**
***[서울은 왜 세계적인 수도인가? 1950년1월1일 서울의 중령교 다리밑 가마니 움막에서 태어난 허경영이
한살 때 그의 아버지가 사형받기전 서대문 형무소에서 면회온 그의 어머니에게 지어준 허경영의 이름에는 서울을 편안하게 하라는 허락할 허, 서울 경, 편안한 영, 자를 넣으면서 동서남북에 동경, 서경, 남경, 북경이라는 네개의 위성수도를 거느린 중앙에 있는 서울이 세계의 수도가 될 곳이니 꼭 이루어 달라는 유언이였음]***
내가 여섯살 때 양아버지가 비실거리는 깡마른 송아지 한마리를 사왔는데 결국 소죽을 먹지 않고 누워서 일어나지도 못할 때 내가 먹던 보리밥을 어른들 몰래 아침저녁으로 조금씩 나누어 먹여 살려서 몇 년간 산으로 들로
풀을 뜯기며 결국 큰 어미소가 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수많은 논밭을 갈아주며 농사일을 도왔다. 그 소가 새끼를 낳은 얼마 뒤 양아버지는 어미소를
도살장으로 팔게 되었다. 논밭에 쟁기를 메고 일하는 소가 조금 느리게 걷는다고 사정없이 양아버지는 회초리를 내리 칠 때마다 옆에서 일을 하고 있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우는 듯한 표정을 짓던 그 소를 볼 때마다
내가슴이 참으로 아팠다. 그 소가 팔려가던 날 대문을 나서지 않으려고 평소에 하지도 않던 뒷걸음질을 하며 자꾸만 고개를 뒤쪽으로 쳐다보며 새끼 송아지를 향에 (음메) 하고 우는 것이었다. 어미 소는 팔려가는 것을 알고 있는듯 했다.
아궁이에서 부지깽이를 들고 나오신 양어머니가 뒷걸음치는 소의 엉덩이를 마구때리면서 많이 맞아야 비싼 값을 받는다고 할 때 송아지와 어미소가 서로 눈을 바라보며 울고 있었다. 죽도록 주인을 위해 논밭을 갈며 일해주고 새끼 송아지 까지 낳아 주웠는데 자식과 함께 살기도 못하게 하고 도살장으로 죽음을 향해 팔려가야하는 소의
운명을 보며 나는 인간의 배운망덕이 원망스러웠으며 어머니와의 이별이 떠올랐다.
그 팔려간 어미소가 낳은 송아지가 지금의 이 소가 아닌가. 산에서 풀을 뜯고 있던 소가 갑자기 내 앞에서 새끼송아지를 낳을때 나는 그것이 새끼를 낳는 것인지도 모르고 소가 죽는 줄 알고 발을 동동 굴렸 으며, 그리고 그 새끼를 데리고 집으로 왔을때의 일. 밭 언덕에서 풀을 뜯다가 좁은 개울에 꺼꾸로 소가 뒤집혀 일어나지도 못하고 두 눈이 하얀색이 되며 입에서 거품을 내며 죽어갈 때 내가 들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불러와 소를 살려낸 일들이 떠올랐다. 나와의 이별을 모르는채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소와 영원한 이별을 하며 나는 처음으로 사람의 무정함을 느꼈다. 나무하러 갔다가 절에서 읽은 글귀가 생각났다. 신의 제단에 동물을 죽여 그 피로서 제사를 지내는 자를 보며 석가가 말했다.
[그대가 행복해 지기위해 다른 생명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모든 생명은 그대와 같이 살아 있기를 원합니다. 자기를 위에 남을 해치는 것은 이기주의 입니다. 그러한 자는 일생동안 불행한 결과를 받게됩니다.
짐승의 피를 요구하는 신은 좋은 신이 아닙니다. 만일 그대가 모든것을 향해 사랑과 친절로써 대하면 신은 저절로 그대를 돕게 될 것입니다.] 이 글귀를 생각하며 나는 집을 나섰다.
그리고 저녁 8시 경 어둠이 짙게 깔렸는데도 구비치며 흘러가는 진주 남강이 끝없이 바라보이는 언덕에 있는
어머니의 무덤을 찾아갔다. 그동안 배운 한문책과 독학으로 배우기위해 구입했던 중학교 교과서와 일기장이
전부인 보따리를 어머니 산소 옆에 놓자마자 나는 절을 하고 무릎을 끓은채 멍하니 어머니의 무덤을 바라보고만 앉아 있었다.
몇시간이 지나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무덤이 마을에서 가까운데다 나무하러 산으로 갈때나 내려올때나 꼭 지나야 되는 산길의 옆에 있다보니 7살 때부터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절을 하러 매일 들르던 곳이었기에 그 초라한 무덤을 두고 천리 서울로 떠나려니 자리에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친구들과 나무를 하러 가고 올 때마다 친구들을 기다리게 해놓고 어머니 무덤에 절을 하는 것을 보고 친구들이
흉을 보기도 했지만 나는 꼭 살아계신 어머니를 보는 것처럼 즐겁 기도 하고 우울하기도 했었다.
비석도 하나없이 묘의 봉분이 다 가라앉다시피 했지만 나는 진달래, 철쭉 등 온갖 꽂나무들을 어머니 산소 주변에 심었으며 잡초도 뽑았었다.
무너진 어머니 무덤을 흙을 파와서 내가 집적 고친일이 있었는데 동네 어른들이 뒤늦게 알고 아들이 직접 어머니의 묘를 고치면 아들이 죽는다면서 크게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어머니가 추울까 봐 추운 겨울 어머니의 무덤 주변에 갈잎나무로 울타리를 만들었는데 나무를 한참 해오다 그곳에 앉아 멀리 노을에 물들어가는 지리산을 구비구비 감싸며 흘러가는 진주남강과 끝없이 펼쳐진 하얀 백사장 옆의 파란 대나무숲과 마을에서 올라오는 저녁 연기를 바라볼때면 갈잎에 둘러싸인 어머니의 무덤에서 어머니가 금방이라도 나를 부르며 저녁밥상을 들고 나올것만 같았다. 그때마다 나는 이곳이 어머니가 살아계신 내 집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 마을로 내려가기가 싫었다.
수많은 초등학교 졸업생 중 나 혼자만 중학교를 진학하지 못했던 그날도 어머니의 무덤에서 꼬박 밤을 새었지만, 열다섯 살까지 정이 들었던 어머니 무덤앞에 앉아서 나는 두 번째 꼬박 밤을 샌뒤 아침이 되자 6년간 받은 우등상장을 어머니 산소 앞에 묻었다. 그리고 서울을 가기 위해 20여리 떨어진 기차역이 있는 반성으로 떠나가기 시작했다.
반성에는 기차역 있는 곳이었다. 저녁과 아침을 굶은 채 20여길을 걸어 반성을 향해 걸어가면서 나는 수없이
정든 고양의 산천을 뒤돌아 보았다. 눈이 퉁퉁부어서인지 눈물때문인지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친구들이 준 돈은 서울에 가서 중학교에 들어갈 때 써야 한다고 생각하고 서울까지 1000리 길을 걸어가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철길로 들어가 서울 방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철길이 굴속으로 들어갈 때는 산을 넘어 다시 철길을 찾아 헤매다가 검정고무신이 다 짲어지고 맨발로 철길을 이틀간 걸어가 도착한 곳이 마산이었다.
발바닥이 피가 나고 부어올라 어쩔 수 없이 서울가는 기차표를 사기로 했는데 대전까지 밖에 갈 수 없는 돈이었다. 서울행 완행열차를 타고 가다 대전에서 내려야 하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대전에서부터는 무임승차가 되고 만것이다. 역무원이 차표검사를 하는 것을 보고 나는 의자 밑으로 들어가 숨었다. 그리고 서울역에서 내리다가 역무원에게 무임승차로 붙잡혔다. 그리고 역무원들의 사무실로 붙들려 들어갔다.
한 역무원이 내 보따리를 풀어보고 내가 배운 한 문책과 일기장, 그리고 중학교 책들을 보더니 내 일기장을 소리내어 읽으며 글씨를 보고 감탄을 하면서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처음엔 경찰서로 보내야 한다고 하던 직원이 태도가 돌변하여 직원들에게 돈을 거두어 나에게 주면서 꼭 학교
들어가서 공부 열심히 하라면서 나를 서울역 광장으로 내 보내줬다.
6.25사변 도중 서울에서 태어나 한 살 때 어머니품에 안기어 서울을 떠났던 15년 전의 바로 그 서울에 돌아온 것이었다. 15년 전에 내가 태어난 곳이지만 한 번도 보지못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헤어진 서울을 멍하니 바라보며 나는 빛바랜 책 보따리를 끓어안은 채 망부석처럼 서울역 광장에 서 있었다.
천리타양 서울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남편을 잃은 어머니가 병든 몸으로 통곡하며 어린 나를 안고 전쟁중인 서울을 떠났던 통환의 서울! 나의 이름 속에까지 남아서 나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숙명의 서울로 나는 다시 돌아온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훗날 나에게 알려 준 어머니의 유언이기도 했지만 나는 어머니가 찾지 못한 아버지의 유골을 찾아야 하며 그것을 찾지 못할 때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서대문형무소 자리에 반드시 아버지의 비석이라도 세우겠다며 어릴 때부터 다짐해 왔기에 먼저 서대문형무소를 찾아가 형무소 정문을 향해 땅바닥에 엎드려 아버지를 향해 큰 절을 올렸다. 그때 나는 스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대통령이 된다면 이곳에 아버지의 비석을 세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남대문시장 지하도 입구에서 구두를 닦으며 무허가 합숙소에서 협성고등공민학교라는 야간 중학교를 다녔는데 밤이면 담배 연기 때문에 공부를 할 수 없어 결국 삼각산에 있는 수유리 화계사로 찾아가 주지인 숭산 이행원 스님의 양아들이 되었다.
그곳에는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승려 이백여 명의 석민회라는 기숙사가 있었기에 승려가 이백 오십여명 되는 대가족이었는데 나는 그곳에서 하루에 일천 명 분의 밥짓는 일을 하면서 야간엔 광화문에 있는 협성고등공민학교 (야간) 을 졸업하게 되었다.
그때 이미 나는 초등학교 때 주역 등 30여 권의 한문 서적을 배워 유교의 중용 사상을 배운 데 이어 그 절에서 불교의 팔만대장경과 불교의 중도 사상을 3년간 배웠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과정인 협성상업전수학교에 들어갔다.
숭산 이해원 스님이 40세에 미국으로 포교차 떠나버린데다, 너무나 절의 일이 많아 고등학교 공부가 어렵게 되자 나는 어떤 스님의 안내로 세검정에 작은 암자를 소개받아서 그곳으로 가게 되었다. 책가방 한 개가 전부인 내가 세검정 암자를 찾기 위해 세검정의 산을 올라가는데 다섯 명의 아주머니가 해저녁에 산에서 내려오길래 (''여기 청룡사란 암자가 어디 있느냐'') 며 길을 물었다. 그랬더니 (''학생이 왜 해저녁에 절를 찾느냐'') 며 되묻길래 있을 곳이 없어서 절에 가서 낮에 일해주고 밤에 학교를 다니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러니까 그 분들은 삼각산 제일기도원에서 기도를 하고 내려오는 길이라면서 광화문에 있는 내수동 교회의 목사님한테 가면 공부할 수 있다며 나의 책가방을 뺏 다시피 하면서 교회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나는 내수동 교회의 홍근섭 목사의 양아들이 되어 야간 고등학교를 다니는 2년간 교회를 다니며 기독교의 구약, 신약, 모세의 오경을 배우며 주일반을 맡아 가르쳤다.
그런데 교회재정이 어려워 나는 낮에는 목사님이 소개하는 교인이 경영하는 서울역의 동양당이라는 금반지를 만들어 수출하는 공장에 다니게 되었다. 나는 신주와 금을 녹여서 24K 18K 등을 만드는 것을 담당했는데 금과 신주를 끓일 때 하얀 밀가루 같은 청산가루를 넣는데 그 일만 하다 보니 매일 청산가루 때문에 코피를 흘렸다. 그러던 중 나는 2년간 성경을 열심히 배워 이미 유교의 중용사상과 불교의 중도 사상과 기독교의 중립 사상을 배워 비교, 분석의 경지를 벗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교회의 주일반의 어린이들을 가르치다 보니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저녁까지와 낮에는 공장에서 일을 해야 하므로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한데다 나는 학업과 건강 문제로 고등학교 3학년인 19세에 세 번째 양아버지가 되는 목사님과 헤어졌다.
그리고 홍제동의 안산 꼭대기의 달동네인 판자촌 위쪽 산 중턱 약수터 옆에 2인용 군용텐트를 하나 쳐놓고 그곳에서 고등학교 3학년 과정을 다녔다. 나는 광화문의 야간고등학교가 끝나면 걸어서 홍제동 무악산까지 오면서
도중에 길거리에서 호떡 두 개를 사서 텐트에 도착해 저녁으로 한 개를 먹고 나머지 한 개는 아침 식사용으로
먹었다.
그런데 겨울에는 그 호떡이 얼어서 아침에 먹기 힘들거나 어떤 날은 들쥐 들이 들어와 먹어버리곤 하여 김치독보다 조금 작은 독을 하나 얻어서 텐트 바닥에 묻었다. 그리고 그 위에 합판을 깔고 가마니를 덮고 이불을 깔므로서 낮에 볼펜행상을 나갈 때는 책가방을 넣어 놓고 가면 동네 꼬마들이 책을 찢지 않고 밤에는 그 속에 호떡을 넣어 놓으면 얼지도 않고 쥐들도 먹지 못했다. 밤늦게 촛불을 켜고 숙제를 하려면 바람이 많이 불어 촛불이 꺼지므로 신문지로 초를 싸서 불을 켜면 꺼지지 않았다.
시
험이 있는 날은 그나마 낮에 볼펜행상을 할 수 없어 호떡을 사먹을 돈이 없었다. 그래서 야간 고등학교의 시험이 저녁 일찍 끝나므로 학교 주변에서 가까운 효자동, 옥인동, 팔판동, 궁정동, 내수동, 사직동, 양촌동 등의 한옥집 대문 밖에서 문을 두드린 다음 사정을 얘기한 뒤 밥 한 그릇과 냉수 한 그릇을 부탁하면 대부분 대문을 열어주고 밥을 주었다. 그렇게 저녁 한 끼를 먹고 하루종일 천막 속에 가서 시험공부만 했었다.
또한 내복이 없다보니 신문지를 교복 속에 감고 학교를 다니다가 체육시간에 학생들에게 발각되는 등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데 신문지를 몸에 감고 지내면 겨울에 절대 옷에 이가 생기지 않았다. 어떤 때는 한참 잠을 자고 있는데 텐트 속에 노루가 들어온 일과, 들쥐가 들어와서는 잠자는 나의 코끝을 무는등 수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한참 천막 속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갑자기 얼굴에 눈이 막 떨어져서 잠을 깨어보니 눈보라에 천막이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 것이다. 그래서 밤중에 그 천막을 찾느라 돌아다니다가 그만 바위 언덕에서 아래에 있는 판자집의 화장실로 미끄러져 떨어져 오른쪽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다.
한 달 동안 달동네 사람들이 준 라면 등을 먹으며 다리 기브스를 한 채 천막 속에서 다리가 나을 때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다리가 낫게 되자 판자촌 사람 중에서 실내용 샌달을 가게 부업으로 만드는 집이 있었는데 그 주인이 그것을 10컬레를 나에게 주면서 팔아서 다시 학교에 들어가라고 했다. 그래서 그것을 팔기 위해 슬리퍼 열 컬레를 책가방에 넣고 실내용 슬리퍼를 신을 만한 동네인 장충동으로 갔다.
그리고 그 곳의 어느 집의 대문이 열리면서 당시로는 처음보는 고급 승용차가 차고에서 나왔고 그것을 타려고
하는 어른에게 달려가 가방에 슬리퍼를 꺼내
[''이 슬리퍼를 다 팔아야 학교를 갈 수 있으니 공부할 시간을 좀 주십시오'']
라며 슬리퍼를 내밀었다. 그러자 그 어른은 내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내 손을 잡고 집으로 들어가 밥을
먹은 뒤 나에게 양아들이 되어 줄 것을 부탁하여, 나는 우연하게 산꼭대기의 얼어 죽을 것만 같은 2인용의 군용텐트 속에서 한국 첫째 재벌의 양아들이 되었던 것이다.
나중에 2편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