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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23. 사순절 셋째 주일
예배 시편 / 시편 84편 5-12절
찬송 / 364장 ·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성서 / 창세기 32장 22-32절, 갈라디아서 4장 26절
말씀 / 하늘의 예루살렘은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Ⅰ
교회 화단을 정리하면서 장미를 심었습니다. 교회 화단으로 담배꽁초나 쓰레기를 버리는 일이 많아서, 꽁초나 쓰레기를 버리는 곳이 아니라 화단이란 걸 보여주기 위한 요량으로 심은 것이지요. 일주일에 걸쳐 열심히 땅을 깊고, 넓게 팠습니다. 그리고 매뉴얼에 따라서 넉넉한 흙도 채우고 장미를 심었습니다. 다행히 화단을 정리하고, 장미를 심었더니 쓰레기나 꽁초를 버리는 확연히 줄었습니다. 이제 장미에 어느덧 새싹도 제법 많이 올라왔습니다. 제가 심었고 물을 주겠지만, 섭리에 따라, 때에 따라 자라고 아름답게 꽃을 피우길 기대해 봅니다.
원래 장미는 일조량이 많이 필요한 식물이라고 합니다. 교회 화단은 해가 많이 들지 않아서, 그늘에서도 잘 자라는 품종을 찾아야 했습니다. 저 같은 초보정원사가 가꾸려면 병충해에도 강하고, 월동도 잘할 수 있는 품종이어야 했지요. 여러 장미 품종을 살펴보다가 그늘에도 잘 자라고 병충해에도 강하고, 영하 25도까지 월동도 거뜬히 한다는 품종을 발견했습니다. 부드럽고 온화한 노란 꽃을 피우며 덩굴로 올라가는 영국 장미였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이 장미의 이름이 참 좋았습니다. ‘더 필그림(The Pilgrims)’, 바로 순례자란 이름의 장미입니다. 오래전부터 신앙인들은 우리의 삶을 여행자보다는 순례자에 비유하곤 했습니다. 여행이 특별한 곳에서 여가를 보내는 것이라면, 순례는 목적하는 방향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길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여행자는 필요를 가는 곳마다 요구하곤 하지만, 순례자들은 방해물을 만나고 걸림돌을 만나도 그것 또한 안내자로 이해하고, 모든 것에 감사하며 걸어간다고 하지요. 그래서 중세의 오랜 격언은 ‘여행자는 요구하지만, 순례자는 감사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도 여행자가 아니라 순례자와 같은 마음으로 음지든 양지든, 우리의 일생을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장미에 대해서 공부를 하다가 알게 된 흥미로운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이전에는 그저 장미의 가시가 아름다운 꽃을 보호하기 위한 건 줄로만 알았는데, 가시가 장미의 성장과 크게 관련이 있답니다. 보통 장미의 가시는 아래로 향해 있는데, 그 가시가 갈고리와 같아서 장미가 다른 식물이나 벽이나 무언가를 붙들고 의지하는 역할을 한다는 거지요. 그래서 가시로 어딘가에 고정된 장미는 계속해서 성장하지만, 무언가를 붙들지 못하고 흔들리는 장미는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답니다. 무언가를 붙들고 살아가는 장미를 생각해 보면, 어쩌면 사람들도 누구든 살기 위해서 무언가를 부단히 붙들고 살아가는 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불안한 세상에 사람들이 무속을 의지하는 것도, 젊은이들이 영혼까지 끌어모아 서울에 집을 사려는 것도, 학생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의사가 되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모두 평범한 방식으론 안정적인 생활 자체가 어렵게 된 현실 때문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바라기는 우리가 어려울 때일수록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시고 붙들어 주시는 주님을 붙들고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Ⅱ
성서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무언가를 정말 잘 붙들었던 사람이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름도 ‘붙들다’, ‘꼭 쥐다’라는 뜻을 지닌 ‘야곱’입니다. 야곱은 아브라함의 손자이고, 이삭의 아들이지요. 이삭은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태어날 때 형 에서의 발꿈치를 꼭 붙들고 나왔답니다. 그래서 이름도 꼭 쥐다라는 뜻의 야곱이 되었지요. 야곱은 형 에서를 넘어서기 위해 부단히 애썼던 것 같습니다. 형이 사냥하고 돌아오는 길목에서 팥죽을 만들어 기다렸다가, 배가 고파 나타난 형 에서에게 팥죽을 줄 테니 장자권을 팔라고 말했습니다. 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장자권을 넘겼지요. 에서를 붙잡아 누르고 올라서는 야곱의 모습입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에게 복을 받고자 그를 붙들었습니다. 아버지 이삭이 나이가 들어 생을 마무리하기를 준비할 때 장자에게 축복을 빌어주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털이 많은 형 에서처럼 변장하곤, 아버지가 좋아하는 고기 음식을 드리며 아버지를 속여 축복을 받아 냈지요. 이러한 일들이 형 에서의 분노를 폭발하게 했고, 야곱을 죽여서 한을 풀겠다는 형을 피해서 고향 집을 떠나 나그네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머나먼 길을 떠나는 여정 가운데 야곱이 어떤 곳에 이르렀을 때, 해가 저물었지요. 그래서 거기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는 돌 하나를 주워 베개로 삼고 누워서 잠이 들었습니다. 돌베개. 그 딱딱한 베개를 베고 잠에 들었을 때, 그 꿈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천사들이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는 너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을 보살펴 주었고, 너의 아버지 이삭을 보살펴 주었고, 이제 너와 함께 있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고, 너를 이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고 말씀하여 주셨지요.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창 28:15). 야곱은 잠에서 깨어서 혼자 생각했지요. ‘주님께서 분명히 이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그것을 몰랐구나’라고 말하면서, 두려움 가운데 그가 있는 곳을 벧엘이라고, 하나님의 집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야곱은 이제 평안한 마음으로 고향을 떠나 순례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야곱은 하나님께 응답하며 기도를 드리길 하나님께서 다시 이 고향으로 안전하게 돌아오게 해 주시면, 그 순례의 길을 마칠 때, 하나님이 진정으로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되고,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열매 가운데 열에 하나를 드리겠다고 서원하며 순례의 길을 떠납니다(창 28:20-22).
그리고 야곱은 계획대로 순례의 여정을 떠나 삼촌 집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편안한 생활이 아니라, 외국인 노동자가 되어 머슴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야곱은 적절한 대가도 받지 못하고 라반의 둘째 딸을 아내로 맞을 조건만으로 칠 년을 일했지요. 칠 년간 야곱은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그런데 라반은 야곱이 첫날 밤 아내를 맞이하는 자리에 둘째 딸을 큰 딸로 바꿔서 야곱을 속였습니다. 큰 딸을 두고 작을 딸부터 시집을 보내는 것이 도리에 맞지 않다는 핑계였지요. 속이는 사람 야곱이 한 방 크게 당한 것일까요? 야곱은 굴하지 않고, 둘째 딸을 얻겠다며 칠 년간 더 머슴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가산을 조금이라도 늘리겠다는 마음으로 육 년을 더 일했지요. 성실하면서도 끈질긴 야곱은 이제 어느 정도 가산도 지니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더 이상 종살이를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자기 재산과 가족을 챙겨 도망치듯 라반에게서 떠나게 되었지요. 수십 년간의 세월을 타향에서 보낸 뒤 두 아내와 자녀들과 많은 가축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이렇게 야곱의 인생 여정은 고향을 떠나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는 순례의 여정으로 끝을 맺어 갑니다.
Ⅲ
야곱이 지난한 세월을 보낸 뒤, 돌아오는 순례의 여정에서 생각지 못했던 일들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천사들이 야곱 앞에 나타난 것이지요. 야곱은 그들을 알아보고 그곳 이름을 ‘마하나임’이라고 불렀습니다. 마하나임은 ‘두 무리의 군대’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이 이름은 하나님께서 야곱의 앞과 뒤를 지켜주신다는 의미일 겁니다. 야곱의 뒤를 쫓는 라반과 이제 고향으로 향하는 야곱이 앞으로 만나야 할 형 에서에게서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리라는 믿음입니다.
하지만 야곱의 두려운 마음과 불안은 가시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야곱은 우선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합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형 에서에게 심부름꾼들을 먼저 보냈습니다. 안부 인사를 전하면서 형 에서의 동향을 파악하려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돌아온 심부름꾼들의 소식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그들이 돌아와 야곱에게 “에서가 부하 사백 명을 끌고 야곱에게로 향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야곱은 너무 두렵고 걱정되는 마음에 일행과 짐승 떼를 두 무리로 나누었습니다. 에서가 와서 공격하면 한 무리라도 피하겠다는 계산이었지요.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다 취했습니다. 이제 야곱에겐 더 이상 할 수 있는 행동도, 그 무엇도 의지할 것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제, 다만 하나님만 의지하고 기도할 뿐입니다. 야곱은 그렇게 겸허히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다만, 에서의 손에서 구해달라는 기도였지요. 야곱은 기도를 드린 후에도 두려움이 채 가시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한밤중이었지만, 짐승의 한 무리를 종에게 맡겨서 먼저 가게하고, 그 뒤를 따르는 무리들을 여럿 만들어 뒤따르게 했습니다. 이렇게 서로 떨어진 무리 넷을 만들었고, 시간 간격을 두고 에서에게로 향하게 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짐승들을 앞장서게 한 것은 선물로 바쳐서 에서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려는 계획이었지요. 야곱은 무리를 그렇게 모두 보낸 뒤, 마지막으로 아내들과 자녀들도 얍복강을 건너 자기보다 앞서 떠나게 했습니다.
늦은 밤 야곱은 이제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또 일어났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타나 그와 씨름하게 된 것입니다. 야곱은 그가 누군지도, 영문도 알지 못한 채 밤새워 씨름했습니다. 그 사람은 날이 새려고 하니 놓아주라고 말했지만, 야곱은 자기에게 축복해 주지 않으면 보내주지 않겠다고 붙잡고 떼를 썼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그를 끝까지 붙들었습니다. 정말 대단한 야곱입니다. 그 사람은 야곱에게 이름을 물었습니다. 야곱이 자신의 이름을 붙드는 사람, 곧 “야곱”이라고 말하자,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사람이 야곱에게 대답하였습니다. “이제 너의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 하나님께서 싸우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그제서야 그가 바로 하나님이셨던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이렇게 하나님께 축복을 받았고, 찬란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그곳의 이름을 ‘하나님의 얼굴’, 곧 브니엘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고향을 떠나는 길에서 다시 고향 땅으로 돌아오도록 약속해 주셨는데, 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고향 땅으로 들어가는 야곱을 막으셨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조금 이상하지요? “막으신 정도가 아니라 야곱을 공격해서 그의 환도뼈가 상했고, 그의 다리를 절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야곱 이야기에서 말하는 ‘축복’이란 무엇인지부터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먼저, 축복이란 히브리어 ‘바라크’라는 단어는 원래 ‘무릎을 꿇는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무릎을 꿇는다’라는 말이 ‘축복’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고대에는 무릎을 꿇는 것이 항복이나, 순종 또는 복종이나, 모든 것을 내어 놓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신하가 왕에게, 자녀가 부모에게, 종이 주인에게 무릎을 꿇고, 헌신과 봉사를 약속하면 그것이 축복이 되었던 것이지요. 아마도 그 대가로 부와 영토를 보장 받았을 것입니다.
축복을 이렇게 이해한다면 야곱의 씨름을 조금 다르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야곱은 하나님께 축복해달라고 애원하며, 그렇게 하시지 않으면 보내드리지 않겠다고 끝까지 붙들었지요.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축복하시면서, ‘축복’이라는 말의 의미처럼 야곱의 환도뼈를 치셔서, 그가 하나님 앞에서 무릎 꿇도록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야곱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야곱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이름을 야곱이라고, 남을 붙드는 자라고 고백했으니 하나님 앞에서 자기에 대한 자백과 참회도 이루어진 셈입니다. 이제는 다른 이를 붙잡는 사람, 다른 것을 붙잡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붙드는 사람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이스라엘, ‘하나님께서 싸우실 것이다’라는 새로운 이름의 뜻대로 그를 위해 하나님께서 싸우실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하나님께서 야곱이 고향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그를 막으신 것은 그를 하나님 앞에 무릎 꿇게 하시고, 자기를 돌아보도록 하시고, 하나님만을 붙들게 하심이었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마음으로, 그가 새로워진 모습으로, 새로운 사람으로 고향 땅으로 들어가도록 축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야곱은 이제 빛나는 아침 햇살과 함께 ‘하나님께서 싸우실 것’이라는 든든한 이름을 받았습니다. 이제 야곱은 더 이상 다른 사람의 발목을 잡거나 속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이제 새 사람 이스라엘은 새로운 마음으로, 새 사람이 되어 두려움을 내려놓고 형을 만나는 길을 향해, 마침내 순례의 여정을 마치고 고향 땅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Ⅵ
야곱은 자신이 돌베개 삼았던 고향 땅을 떠나 돌아오는 여정을 순례길로 삼았지만, 예수님과 바울의 때에는 마땅히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순례하는 것이 삶의 의무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누구든 예루살렘으로 일 년에 세 번 순례하는 의무가 있었지요. 적어도 유월절만큼은 예루살렘으로 순례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신약 말씀으로 읽은 갈라디아서의 짤막한 한 구절에서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높고 숭고한 순례길이 있음을 말합니다. 바로 이 땅에 있는 예루살렘을 향한 길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26절입니다.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종이 아닌 여자이며,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이 구절에서 여자로 번역한 말은 ‘자유롭다’는 뜻의 단어입니다. 그래서 개역개정 성서는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라고 번역했습니다. 어쨌든, 바울은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을 자유하다고 표현하면서, 그 순례의 길을 어머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 누구든 마침내 돌아가야 할 하나님의 품, 바로 위에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걸어가는 순례자들은 자유하다는 것, 위에 있는 이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자녀들은 이 땅에서 자유하다는 말씀입니다. 그 여정은 우리를 끝까지 기다리고, 우리를 위해 부단히 애쓰며, 우리를 한없는 사랑으로 보살피는 어머니와 같은 순례의 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를 끝까지 기다리고, 우리를 위해 부단히 애쓰며, 우리를 한없는 사랑으로 보살피는 어머니처럼 우리가 마침내 순례의 여정을 마칠 때까지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님을 의지합시다. 우리의 인생길이 여행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걸어가는 순례의 여정이라면 불평과 원망보다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푯대를 향해 걸어갑시다. 사랑의 길, 생명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주님을 바라보며, 그 길을 따라갑시다. 그리고 우리가 흔들릴 때, 넘어질 때일수록,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주님을 붙들고, 의지합시다. 우리가 우리의 험난한 인생길 가운데 우리가 주님을 붙들고 나아갈 때, 그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주시고 우리를 생명과 평화의 길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변함없이 붙들어 주시고, 우리의 길을 인도해주시며, 언제나 어디서나 함께하시는 한없는 은총이 위에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순례의 길을 걸어가는 모든 이들에게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