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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성리학을 만든 사단칠정론
조선을 이끌었던 사상은 성리학이었다. 성리학은 자연과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와 그 가치를 파악하려는 철학이다. 이의 밑바탕에 깔린 개념이 이(理)와 기(氣)다.
이(理)와 기(氣)는 불교나 도교에 대한 유학의 빈곤한 철학사상을 보완하기 위하여 송나라의 사상가들이 내세운 용어다. 불교의 인연설이나 도교의 도(道) 개념은 다 우주론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러나 그때까지 유학은 불교에 맞설 만한 우주론이 없었다. 이를테면, 불교는 눈에 보이는 현상과 그것을 있게 하는 그 너머의 원리를 정립하고 있는데 반하여, 유학은 현실(현세)에 대한 논의로만 꽉 차 있을 뿐, 현상을 있게 하는 그 뒤의 본체나 원리를 설명할 수 없는 사상적 빈곤성에 빠져 있었다.
예를 들면, 불교는 우리 앞에 보이는 현상(현실)은, 일시적인 가상(假象 허상)일 뿐이며, 그것은 저 너머의 인연(因緣)이란 원리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도교도 우주 자연 만물은 도(道)라는 원리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라 설명한다.
그러나 유학은 현세의 바람직한 윤리와 도덕을 말할 뿐, 그것을 성립시키는 저 너머의 원리에 대해서는 말하는 바가 없었다.
그래서 유학이 불교를 제압하려면, 그러한 형이상학적인 우주론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의하여, 송대(宋代)의 철학자들이 만든 학문이 주자학 곧 성리학이다. 덧붙여 말하면, 불교에 대항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성리학인데, 그러한 성리학의 이론적 밑바탕은 역설적이게도 불교의 교설을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졌다.
그들은 일차로 유학의 여러 경전을 찾아 입론(立論)을 구했는데, 그들이 주목한 최초의 용어가 주역에 나오는 태극이었다. 태극은 우주 생성의 모태로서 서양의 혼돈(chaos)과 유사한 개념이다. 우주의 시원인 이 태극에서 음양과 오행이 생기고 나뉘어 현실세계가 이루어졌다고 주역은 설명한다. 태극은 현상으로 드러나는 음양, 오행, 만물 속에 내재하는 보편의 원리다.
주자는 이 우주의 본바탕인 태극을 받아들여 그것을 이(理)라고 이름하여 만물 생성의 근본원리로 삼고, 태극에서 생성되는 음양, 오행, 만물과 같은 현상적인 세계를 기(氣)라고 이름 붙였다. 이는 불교의 이사론(理事論)에 영향 받은 바 크다. 불교에서 이(理)는 현상계를 떠받치는 본질을 가리키고 사(事)는 현상계를 가리킨다. 이(理)는 모든 사물이 존재하게 하는 근본 원인과 이유이며 현실을 지배하는 법칙이다. 다시 말하면 우주를 형성하는 근본 원리다. 그러므로 이(理)는 감각으로 경험할 수 없는 형이상(形而上)에 속한다. 사(事)는 구체적인 사물 즉 현상을 가리킨다. 우주에 널리 존재하는 물질과 에너지를 통칭하는 개념으로 형이하(形而下)다.
이와 마찬가지로, 유학의 이(理)도 우주가 존재하는 원리를 가리키고, 기(氣)는 불교의 사(事)와 같이 드러나 보이는 현상 세계를 가리킨다. 현상이란 눈으로 보거나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理)는 볼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 것인데 비하여, 기(氣)는 보거나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덧붙이면, 이(理)는 기의 근원이 되는 것이고, 기(氣)는 이(理)의 원리에 의해 생겨나는 구체적 현상이다. 이(理)란 어떤 것이 그것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이치요 본래성이며, 기(氣)란 어떤 것의 이치가 실현될 수 있는 재료 즉 물질이요 에너지다. 그러니까 이기(理氣)는 ‘원리와 그에 따른 현상’이란 개념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따라서 이기론(理氣論)은 우주의 생성 원리와 그 현상을 다루는 동양의 우주론이요 존재론이다.
이와 같이, 이(理)와 기(氣)는 인간을 포함한 우주 전체, 곧 자연과 인간에 대한 존재원리와 현상을 탐구하기 위한 철학적 개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이(理)와 기(氣)를, 우주론보다는 주로 인간의 심성과 관련한 선악문제를 해결하는 데 주력하였다.
우주에는 하늘의 이치 곧 천리(天理)가 있다. 이 천리는 인간과 모든 개별적 사물에 내재되어 있다. 모든 것은 천리에 의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 중 인간에게 존재하는 천리를 성(性)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의 성은 천리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성, 곧 천리는 원래 ‘선하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이 성(性)이 어떤 자극을 받아 흔들려 생기는 감정 상태를 정(情)이라 한다. 하늘의 이치를 받은 인간의 본성은 이(理)이고, 이것이 움직인 감정 즉 정(情)은 기(氣)에 속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성인 이(理)는 선하고, 그것이 흔들린 정은 악을 포함하는 것이 된다.
그러면 이들 이(理)와 기(氣)는 어떤 관계에 있을까?
주희는 이에 대하여, 이(理)와 기(氣)는 서로 떨어질 수도 없고, 서로 섞일 수도 없다.[不相離 不相雜]고 하였을 뿐, 명확한 정의나 구분을 하지 않고 세상을 떠났는데, 그 후 중국의 학자들도 이에 대한 구체적 논의를 하지 않았다. 주자의 그러한 모호한 정의는 조선의 학자들로 하여금 다양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기제로 작용하였다. 아무도 하지 않았던 이(理)와 기(氣)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를 조선의 학자들이 앞서서 천착한 것이다. 인간의 본성과 감정이 이기(理氣)와 어떻게 관련되는가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고자 한, 학자간의 논쟁이 그 유명한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이다.
그럼 여기서 먼저 사단칠정에 대하여 살펴보자.
사단(四端)이란 유학의 인성론에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선하다는 덕목[四德] 곧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단서가 되는 네 가지를 말하며, 칠정(七情)이란 인간이 지닌 7가지 감정을 가리킨다.
사단은 맹자의 용어로서 맹자(孟子) 공손추편(公孫丑篇)에 나오는 말인데, 인간의 선한 본성인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 등 네 가지 단서(端緖)와 관련지어 설명한 것이다. 즉 측은지심은 남의 불행을 가엽게 여기는 마음으로 인(仁)의 단서(端緖)가 되고, 수오지심은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잘못을 미워하는 마음으로 의(義)의 단서가 되며, 사양지심은 남에게 양보하는 마음으로 예(禮)의 단서가 되고, 시비지심은 선악과 잘잘못을 판별하는 마음으로 지(智)의 단서가 된다는 것이다. 이때 ‘단서’라는 것은 인간의 마음 속에 인의예지의 선한 본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실마리)라는 뜻이다.
이를테면,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보면, 누구든지 아무런 보상을 받으려는 생각이 없이 무조건 아이를 구하려 드는데, 이것은 측은지심의 발로로서 인간의 성품이 본래 선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좌라는 것이다. 즉 타인의 불행을 보면 그것을 도우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인간의 마음 바탕에 선한 인(仁)이 있음을 알 수 있는 단서가 된다는 것이다.
칠정은 예기(禮記) 예운편(禮運篇)에 처음 나오는 것으로, 인간의 감정을 희(喜), 노(怒), 애(哀), 구(懼), 애(愛), 오(惡), 욕(欲)의 일곱 가지로 나누어 말한 것이다.
그런데 이 사단과 칠정이 이기와 관련하여 어떻게 구분되고 관계를 맺는가에 대한 문제가, 조선 성리학의 중요한 담론으로 대두되었다.
사단과 칠정은 원래 별개의 것이었다. 그런데 인간의 성정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한 송대(宋代)에 와서 맹자의 사단설에 대립되는 칠정을 아울러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주자는 맹자의 사단설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맹자의 주장대로, 인간이 사덕(四德) 곧 선한 인의예지로만 채워져 있다면, 온 세상이 도덕군자로만 가득 차고 도척(盜跖) 같은 악한(惡漢)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고자 받아들인 것이 7정이다. 인간의 감정인 7정에는 선한 것도 있고 악한 것도 있기 때문이다. 사단은 순선무악(純善無惡, 순수한 선만이 있고 악이 없음)하고, 칠정은 선악이 섞여 있으므로 인간의 현실을 설명하는 데 유용하다.
그런데 앞서도 말했지만, 주자는 사단과 칠정의 관계에 대하여 명확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그는 “칠정을 사단에 배속시킬 수는 없다. 칠정은 사단 속을 꿰뚫어 지나가고 있다.”고도 하고, “본디 사단과 칠정은 서로 비슷한 점이 있긴 있다.”고도 하여 일관된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의 학자들은 사단과 칠정의 해명에 들어갔다. 우리나라의 사단과 칠정에 대한 논의는 처음에 이황과 기대승 사이에서 벌어져, 뒤에 이이가 기대승의 설을 지지함으로써 논쟁이 확대되어, 성리학의 핵심 문제로 등장하였다.
그러면 여기에 대한 이황의 설을 먼저 보기로 하자.
이황은 이(理)와 기(氣)는 엄밀히 구분되며 갈래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사단은 이(理)의 발(發 움직임)이요, 칠정은 기(氣)의 발이라고 하였다. 이(理)도 기(氣)도 다 같이 움직인다고 본 것이다. 이른바 이(理)와 기(氣)가 다 같이 움직인다[發]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내세운 것이다. 그리고 이(理)는 순전히 선하고 악이 없는 순선무악(純善無惡)인데 반하여, 기(氣)는 선과 악이 혼재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주장을 담은 일군의 학파를 주리파(主理派)라 한다.
이에 대하여 기대승은, 이(理)는 변하지 않는 하늘의 이치(원리)이고, 기(氣)는 모든 변화의 근원을 말하는 것인데, 변하지 못하는 이(理)가 움직여서 사단이라는 감정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며, 사단과 칠정은 모두 움직이는 기(氣)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말로 말하면, 이(理)와 기(氣)를 분리하며 원리인 이(理)도 움직인다는 이황의 논리는 틀렸다는 것이다.
그는 이어서 마음의 이치는 사물의 이치와 같다는 성리학의 기본 입장을 언급하며, 사물의 이(理)와 기(氣)는 서로 떨어지지 않고 작용하는데, 사람의 마음에서만 그 둘이 분리되어 작용한다는 것은 불가하며, 이(理)에 속하는 사단과 기(氣)에 속하는 칠정은 분리되는 감정이 아니라, 칠정 중의 선한 부분이 사단을 가리키는 것이라며 이황의 설을 반박하였다. 이(理)와 기(氣)는 별개의 것이 아니며, 움직이는 것은 기(氣)뿐이며 이(理)는 그 중의 선한 부분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이황은, 이(理)와 기(氣)는 별개라는 처음의 주장을 보완‧수정하여, 인간의 정서 가운데 사단은 우주의 근본원리인 이(理)가 움직인 후 기(氣)가 그것을 따른 것이고, 칠정은 기(氣)가 발동한 후 이(理)가 거기에 올라타서 생기는 것이라[理發而氣隨之 氣發而理乘之]고 하였다. 마음 그 자체는 하나이지만, 이(理)와 기(氣)는 나누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理)와 기(氣)를 나누어 볼 수 없다는 기대승의 주장에 대하여, 그는 사람이 말을 타고 가는 것에 비유하여 이렇게 설명하였다.
“사람이 말을 타고 가는 것은 서로를 필요로 하여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한꺼번에 묶어서 말한다면, 사람과 말은 그 가운데 함께 있다. 사람도 가고 말도 함께 간다. 이것이 내가 이(理)와 기(氣)를 섞어서 말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듣고서 사람과 말은 하나이니 나누어 말할 수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사람과 말이 ‘간다’는 점에서는 같지만(하나지만), 사람과 말은 ‘구분’되듯이 사단과 칠정의 구분도 이와 같은 이치라는 것이다. 또 ‘기가 따른다’는 것과 ‘이가 올라탄다’는 개념도 사람과 말의 관계에서 볼 때, 말도 가고 사람도 가지만 가는 것의 주체는 역시 이(理)인 사람임을 강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황은 이처럼 이(理 사단)와 기(氣 칠정)는 구분되며, 이(理)도 움직인다는 주장을 끝까지 견지하였다.
율곡도 기대성의 설에 동조하여, 이(理)와 기(氣)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주장을 폈다. 곧 이(理)와 기(氣)는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라 하였다. 그들은 또 움직이는[發] 것은 기(氣)며, 원리인 이(理)는 결코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들을 일러 주기파(主氣派)라 한다.
이이는 이황이 주장한, 이(理)가 움직인 후에 기(氣)가 그것을 따른다는 것을 부정하고, 기(氣)가 움직이면 이(理)가 그것을 올라탄다는 것만[氣發理乘] 인정하였다. 이것이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이다. 움직이는 것은 기(氣)뿐이고 이(理)는 그것을 타는 오직 한 길뿐이라는 것이다.
즉 움직이는 것은 기(氣)요, 움직이는 까닭이 이(理)이다. 기(氣)가 아니면 움직일 수 없고, 이(理)가 아니면 움직일 까닭이 없다고 하여 기(氣)는 움직이는 기능을 갖고 있고, 이(理)는 기(氣)가 움직이는 원인 내지 원리로서만 존재한다고 하였다. 만약 형이상자로서의 이(理)가 움직인다면, 이것은 기(氣)와 다를 바 없는 것이 되고, 언제 어디서나 움직인다면, 그것은 결코 이(理)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 퇴계가 이(理)는 선한 것으로서 받들어야 할 신성한 것이라 하고, 기(氣)는 악하고 방종한 것이어서 경계의 대상이라 한데 대하여, 율곡은 기(氣)도 이(理)만큼 중요하다는 등가의 위상으로 파악하고, 나아가 기(氣)의 가변성을 인간 심성의 변화와 진보의 원동력으로 보아 이(理)와 기(氣)의 상보성을 강조하였다. 이이가 이와 같이, ‘이(理)와 기(氣)는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라는 이기(理氣)의 상보성을 피력한 것은, 그가 일찍이 금강산에 들어가 공부한 불교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화엄사상의 요체인 이사무애(理事無碍)설이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곧 이(理)와 사(事)는 서로 떨어져 있지 않고 상호관계 속에 있다는 교설이 이사무애다. 의상대사 법성게에도 ‘하나가 곧 일체요 많은 것이 곧 하나[一卽一切多卽一]’라 하고, ‘이(理)와 사(事)는 명연히 분별이 없다[理事冥然無分別]’는 말이 있다.
이에 덧붙여, 이(理)는 형체가 없고 기(氣)는 형체가 있기 때문에, 이(理)는 모든 것에 두루 통해 있고 기(氣)는 개개 사물에 국한(局限)하여 있다고 하여, 이른바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을 주장하였다.
이(理)와 함께 기(氣)도 강조하는 이러한 이론적 전개는 현실문제에 대한 개혁론으로 나타난다. 그가 주장한 십만양병설도 그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현실문제에 대한 관심이 뒷날 실학으로 이어진다. 철학적인 정합성(整合性 논리적 모순이 없음)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주기론은 주리론을 앞서는 것 같다. 그러나 도덕적 실천이라는 면에서 보면 주리론이 강점을 갖는다.
만약 선의 밑바탕이 되는 이(理)가 움직이지 못하고 어떤 규약처럼 정지‧고착되어 있다면, 인간이 왜 선행을 하려고 애를 쓰는지를 해명할 수가 없다. 성리학의 수양론은 ‘존천리 거인욕(存天理去人欲)’을 목표로 하고 있다. 즉 천리를 잘 보존하고 사람의 욕심을 제거하자는 것이다. 천리, 즉 인간의 선한 본성을 잘 지키고 키워서, 악에 속하는 욕심을 제거하여 군자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려면 본성인 이(理)가 움직이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선한 이(理)가 움직여서 천한 기(氣)를 제어하지 않으면, 이욕(利慾)에 매몰되어 비도덕적인 존재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주리론자들은 이(理)가 발동하여 우리의 삶을 선의 세계로 견인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황과 기대승 간의 사단칠정에 대한 논의는 7년간이나 계속되었는데, 양자 사이에 오간 서간을 모은 책이 사단칠정분이기왕복서(四端七情分理氣往復書)다. 이황은 1501년생이고 기대승은 1527년생이다. 나이가 거의 한 세대나 차이가 나지만, 두 사람은 깍듯이 예의로 대하며 서로 공경함으로써 선비의 풍모를 보여 주었고, 이황은 기대승의 논변에 귀를 기울여 자기의 설을 세 번이나 수정하는 학자적 금도를 나타내었다. 또 중국의 주자학이 천리 속의 인간 탐구에 치중한데 비하여, 우리는 이보다 한 단계 높은 인간 속의 천리를 살피려 하였다.
그러한 논의를 통하여 조선의 학자들은 성리학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켜, 한국의 성리학이 중국의 성리학을 능가하게 되었고, 또 한국 성리학에 학파가 성립되는 기념비를 세웠다.
사단칠정론은 그 후 성혼과 이이 그리고 그들의 후학들에게 이어져, 300여 년 간이나 계속되었다. 세계 어느 나라도 이처럼 오랜 기간에 걸쳐 철학문제를 논의한 나라는 없다. 이와 같이 깊이 있는 논의를 통하여, 우리가 철학하는 민족이라는 자부심도 갖게 해 주었다.
❋ 여기서 한 가지 사족을 붙이려 한다. 우리는 흔히 성리학을 가리켜 공리공론의 무용지학이라고 비판한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새겨야 할 것은 성리학 자체가 무용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사람들이 잘못하고 그에 따른 사조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이다. 성리학은 인간의 본성을 파악하고 나아가 그것을 갈고 닦아서 참된 인간 세상을 만들려고 한 유용성을 지닌 철학이다. 그런데 조선의 학자들은 성리학 이외의 다른 학문은 사문난적(斯文亂賊)이란 이름을 붙여 이단시하며 배척하였고, 또 오직 성리학 한 가지만을 파헤치는 데 몰두했을 뿐, 위학(僞學)이라 하여 다른 것은 일체 행하지 않는 폐쇄성을 보임으로써, 문화의 다양성을 잃게 되었고 역동성이 없는 사회로 만들었다. 그러니 성리학이 나쁜 것이 아니라, 사람이 나빴던 것이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깊이 있는 글에 절로 고개가 끄덕였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리'이고, 육체는 '기'라는 뜻으로 생각해도 될는지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마음이라고 하면 사덕과 칠정을 다 말하기 때문에 이와 기의 일부가 포함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