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 연꽃님 글...누구도 나의 안전을 지켜 주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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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나의 안전을 지켜 주지 않지만
담마다사 이병욱 2024. 2. 26. 10:51
누구도 나의 안전을 지켜 주지 않지만
흔히 “네 할 일이나 잘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충분히 진리일 수 있다. 세상사람들에게 회자 되는 말 중에 상당수는 진리에 가깝다.
오랜만에 햇볕이 든다. 백권당 작은 창가에 아침햇살이 가득하다. 대체 얼마만인가? 지난 일주일은 내내 비가 오거나 눈이 왔다. 그에 따라 하늘은 잿빛 하늘이 되었다. 마음까지 우울해지는 것 같았다.
아침이 되면 기분이 새롭다. 하루 밤 자고 나면 세상이 바뀌어 있다. 어제 밤 그 절망의 세상이 아니다. 아침 햇살을 가득 받으며 일터로 향할 때 살 맛이 난다.
오늘은 무얼 써야 할까? 이미 마음에 정해져 있다. 어제 머리맡에 있는 쌍윳따니까야에서 한 구절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이 정도 내용이면 글 하나 나오기에 충분하다. 어떤 것인가?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자신을 수호함으로써 남을 수호하는가? 살피고 닦고 익히는 것을 통해서 가능하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방법으로 자신을 수호함으로써 남을 수호한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남을 수호함으로써 자신을 수호하는가? 인내하고 해치지 않고 자애롭고 연민하는 것을 통해서 가능하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남을 수호함으로써 자신을 수호하는 것이다.”(S47.19)
싸띠빳타나쌍윳따(S47)에 실려 있는 ‘데싸까의 경’ (S47.19)에 있는 내용이다. 이 가르침이 마음에 깊게 남았다. 두고두고 새기고 싶은 가르침이다.
청출어람(靑出於藍)
부처님은 자신을 수호하는 것이 남을 수호하는 것이라는 취지로 말했다. 이는 “자신을 수호함으로써 남을 수호한다.( attānaṃ, bhikkhave, rakkhanto paraṃ rakkhati)”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자신을 수호하는 것이 어떻게 남을 수호하는 것이 될까? 이는 경에서 부처님이 하나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한 것으로 알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수행승들이여, 옛날에 한 대나무 곡예사가 대나무 곡예봉을 세워서 제자인 메다까달리까를 불러 ‘오라 메다까달리까야, 그대는 대나무 곡예봉에 올라 나의 어깨 위에 서라.’라고 말했다. 수행승들이여, 그래서 ‘스승님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제자인 메다까달리까가 대나무 곡예사에게 대답하고는 대나무 곡에 봉에 올라 스승의 어깨 위에 섰다.
수행승들이여, 그 때 대나무 곡예사는 제자인 메다까달리까에게 이와 같이 ‘메다까달리까야, 그대는 나를 수호하라. 나는 그대를 수호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서로를 지켜주고 서로를 수호하면서 곡예를 보여 주고, 관람료를 걷고, 안전하게 곡예봉에서 내려오도록 하자.’라고 말했다.
이처럼 말하자, 수행승들이여, 제자인 메다까달리까는 대나무 곡예사에게 이와 같이 ‘스승님,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스승께서는 자신을 수호하십시오. 저는 저 자신을 수호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자신을 지키고 자신을 수호하면서, 곡예를 보여 주고 관람료를 걷고, 안전하게 곡예봉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라고 말했다.”(S47.19)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말이 있다. 제자가 스승보다 더 뛰어남을 말한다. 학문을 포함한 어느 세계에서나 가장 바라는 것이라고 본다. 스승은 제자를 가르친 보람을 느낄 것이다.
곡예사의 비유에서도 제자가 스승을 뛰어 넘었다.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는 아슬아슬한 공연을 할 때 조금이라도 실수 하면 무너질 것이다. 이럴 때 스승은 제자를 염려했다. 그러나 제자는 스승 자신을 염려하라고 했다. 서로서로 조심하면 문제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남의 업(業)에 개입할 때
세상을 살다 보면 남의 업(業)에 개입할 때가 있다. 사회적 부조리에 분노하는 것도 남의 업에 개입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았을 때 안쓰러운 마음을 가지는 것도 이에 해당될 것이다.
어떤 이는 북한 동포를 생각하면 따뜻한 데서 잠을 잘 수가 없다고 말한다. 과거 운동권으로서 평양을 다녀온 후 전향했는데 이제 열렬한 북한 파괴론자가 된 것이다. 북한을 장악하고 있는 정권에 대한 적개심을 가진 것이다.
그 사람은 겨울에 난방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북한 동포들이 추위에 떠는데 어떻게 나만 편하게 잘 먹고 잘 살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런 것은 지나치다. 남의 업에 개입하는 것이다. 연민의 마음을 내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럼에도 마치 고행하듯이 산다면 남의 업에 개입하며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유튜브에서 강아지 영상을 보았다. 축생으로 태어난 것이 너무나 불쌍해 보였다. 강아지들이 귀엽기는 하지만 앞으로 살아갈 날을 생각하면 한심하기 그지 없어 보였다. 그런데 축생만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도 한번 태어난 이상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한다.
형성이라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생명은 형성된 것이다. 유정중생이라면 암수가 있어서 형성된 것이다. 이는 생식본능과 종족보존 본능에 따른 것이다.
스님의 개가 발정 난 것 같다. 작년 추석 때 새끼를 네 마리 낳았는데 또 나으려는 모양이다. 스님에게 중성수술을 권했으나 실행하지 않았다. 이전에도 새끼를 낳았다. 이번에도 새끼를 낳을지 모른다.
발정기가 되면 본능에 따라 움직인다. 숫컷들이 냄새를 맡고 몰려 올 것이다. 목줄로 묶어 놓아도 목줄을 끊고 기어이 관계를 맺고 만다. 그 결과 새끼들이 나온다.
강아지들을 볼 때 드는 생각이 있다. “대체 얘네들은 어디서 왔을까?”에 대한 것이다. 어떤 인연으로 이렇게 모습을 보일까에 대한 것이다. 이는 연민심을 넘어선 것이다. 연민을 넘어 강아지 인생에 깊숙이 개입한 것이다. 그 결과 우울한 마음이 된다. 사람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건강할 때는 건강의 소중함을 잘 모른다. 아픈 데가 있어야 알게 된다. 그런데 몸이 아프면 세상만사가 다 싫다는 것이다. 매 순간 괴로움에 지배 당했을 때 살 맛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 ‘건강의 자만’으로 살아간다. 이 건강이 천년만년 갈 것처럼 살아 가는 것이다.
젊을 때는 늙음을 잘 모른다. 나이가 들어 늙어 보아야 알게 된다. 그런데 늙어지면 서글퍼진다는 것이다. 더구나 형편없이 늙어 버린 사람을 보면 남의 일 같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대부분 ‘젊음의 자만’으로 살아간다. 이 젊음이 천년만년 갈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자신의 문제는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 자신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자가 남의 문제에 걱정하고 있다면 이는 남의 업에 개입하는 것이 된다. 이럴 때 “네 할 일이나 잘 해!”라는 말을 들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가르침이 경전에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스승께서는 자신을 수호하십시오. 저는 저 자신을 수호하겠습니다.”라는 말로 본다. 경전적 근거를 발견한 것이다.
“네 할 일이나 잘해!”
경전은 진리의 말씀을 모아 놓은 것이다.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누구나 공감하는 것이다.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면 사람에 따라 받아 들이는 것은 다르다. 그러나 진리의 말씀은 시대와 인종과 나라를 초월하여 보편적으로 받아 들여진다.
부처님은 “자신을 수호함으로써 남을 수호한다.”(S47.19)라고 했다. 이는 진리의 말씀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일까? 부처님은 친절하게도 “살피고 닦고 익히는 것을 통해서 가능하다. ”(S47.19)라고 설명했다.
어느 누구도 나의 안전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 왜 그런가? 남은 나의 마음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남의 안전을 책임져 준다. 왜 그런가? 나는 착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남의 안전보다 먼저 나의 안전을 지키라고 했다. 나를 먼저 보호해야 남도 보호됨을 말한다. 바로 이 말은 자신을 “살피고 닦고 익히는 것을 통해서 가능하다. (āsevanāya, bhāvanāya, bahulīkammena)”(S47.19)라고 했다.
부처님은 자신을 닦고 익히고 닦으면 자신도 수호될 뿐만 아니라 남도 수호된다고 했다. 이는 곡예사의 비유에서 제자가 스승에게 “스승께서는 자신을 수호하십시오. 저는 저 자신을 수호하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곡예사의 스승은 제자의 안전을 걱정했다. 아슬아슬한 곡예에서 자신보다 제자의 자세를 걱정한 것이다. 이는 쓸데 없는 걱정이다. 자신의 일만 잘 하면 된다. 제자는 제자의 일만 잘 하면 된다. 서로서로 자신의 일만 잘 하면 안전은 보장된다.
흔히 “학생은 학생답게”라고 말한다. 학생은 본분사인 학업에 충실해야 함을 말한다. 그런데 이런 말은 유신시대나 군부독재 시절에 악용되었다. 현실에 참여하려는 학생들을 억압하기 위해서 말한 것이다.
학생은 학생답게 살아야 한다. 본본사인 학업에 충실하는 것이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된다. 똑 같은 논리로 군인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군인은 군인의 역할에 충실하면 된다. 군인이 군인답게 살면 자신도 보호되고 타인도 보호된다.
요즘은 검사독재시대이다. 검사가 정치에 개입하여 정권을 잡았다. 이는 검사의 본분사에 어긋난 것이다. 자신의 영역을 넘어서 타인의 영역에 개입했을 때 혼란에 빠진다. 이는 검사의 본분사에 충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나라를 걱정한다. 나라가 이대로 흘러 가서는 안된다고 분개한다. 그런데 이런 분개가 지나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다면 지나친 것이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말은 “네 할 일이나 잘해!”라는 말을 것이다.
자신을 수호하면 타인도 수호된다
현실은 아슬아슬한 곡예와 같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사고가 날 수 있다. 운전 중에 태만 하면 사고가 난다. 앞도 살펴야 하고 옆도 살펴야 하고 뒤도 살펴야 한다. 특히 고속으로 달릴 때는 눈을 두리번 거리며 앞, 뒤, 옆을 살펴야 한다. 이렇게 해야 안전이 보장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살피고 닦고 익히는 것을 통해서” 안전이 가능하다고 했다.
운전 중에 주시를 태만하면 사고가 난다. 사고가 나면 나만 불행한 것이 아니라 타인도 불행하게 만든다. 인생은 운전하는 것과 같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사고가 난다. 마치 운전하는 것처럼 인생을 살아야 한다. 그래야 자신도 보호되고 타인도 보호된다.
자신을 수호하면 타인도 수호된다. 타인을 먼저 수호하고 나를 수호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이렇게 자신을 먼저 수호하면 자연스럽게 타인도 수호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신을 수호함으로써 남을 수호하고 남을 수호함으로써 자신을 수호한다. (attānaṃ, bhikkhave, rakkhanto paraṃ rakkhati, paraṃ rakkhanto attānaṃ rakkhati)”(S47.19)라고 했다.
누구도 나의 안전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 가장 가까운 사람도 나의 안전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누구도 나의 안전에 목숨을 걸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다르다. 다른 사람의 안전에 책임 질 수 있다. 왜 그런가? 나는 기본적으로 착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목숨까지 걸 정도라면 곤란하다. 마치 나라 걱정에 잠 못 이루는 사람 같다. 마치 강아지의 일생에 우울에 빠지는 것과 같다.
남의 업에 개입해서는 안된다.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았을 때 잠 못 이룰 정도로 노심초사해서는 안된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업으로 사는 것이다. 강아지는 강아지의 업으로 사는 것이다.
그 사람이 그렇게 사는 것은 업이 그 사람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사람은 자신의 업의 상속자이다. 그럼에도 그 사람에 대하여 노심초사한다면 그 사람의 업에 개입하는 것이다.
연민의 마음이 실패할 때
불행하고 불쌍한 사람을 보았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그 사람과 같이 산다면 될지 모른다.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서 산다면 될지 모른다. 마치 북한동포가 추위에 떨고 있다고 해서 겨울에 난방을 하지 않고 사는 것과 같다. 마치 강아지가 불쌍하다고 하여 강아지의 입장이 되어서 사는 것과 같다. 이는 남의 업에 개입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남의 업에 개입하지 말라고 했다. 남의 업에 개입하면 미쳐 버릴 것이라고 했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이는 “행위의 과보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니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서는 안되는데, 만약 생각한다면 미치거나 곤혹스럽게 된다.”(A4.77)라는 가르침에 따른다.
남의 업에 개입해서는 안된다. 남의 업에 개입하면 미쳐버리거나 곤혹스럽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 사람이 불행하고 가난하다고 해서 노심초사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 가짐을 가져야 하는가? 부처님 가르침에 해법이 있다. 이는 부처님이 “어떻게 남을 수호함으로써 자신을 수호하는가? 인내하고 해치지 않고 자애롭고 연민하는 것을 통해서 가능하다.”(S47.19)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여기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에게 어떤 마음을 내야 할까? 지하도에서 구걸하고 있는 사람을 보았을 때 그 사람처럼 살아야 할까? 이럴 때 “인내하고 해치지 않고 자애롭고 연민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해야 남도 수호되고 자신도 수호되는 것이라고 했다.
사무량심에 연민이 있다. 연민은 아름다운 마음부수 중에 하나이다. 그렇다고 상대방의 불행에 대하여 푹 빠지는 것은 아니다. 단지 “하루 빨리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라고 바라면 그 뿐이다. 그런데 연민 이상이 되어서 노심초사한다면 어떻게 될까?
청정도론에 사무량심이 설명이 있다. 연민에 대한 설명을 보면 연민의 마음이 실패할 때도 있다는 것이다. 어떤 것인가? 이는 “근심이 생겨날 때 실패한다.”(Vism.9.94)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연민을 넘어서 노심초사할 때 실패함을 말한다.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 연민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상대방의 불행에 노심초사하면 괴로운 마음이 된다. 이는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 때 저러한 사람이었다.”(S15.11)라고 관찰해야 된다고 말했다.
윤회하는 삶을 살고 있다. 이 윤회는 언제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한량 없는 윤회의 과정에서 나는 갖가지 삶을 살았을 것이다. 어떤 삶에서는 행복하고 부자로 살았고 어떤 삶에서는 불행하고 가난하게 살았을 것이다. 심지어 축생으로 태어나서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았을 때 어떤 마음을 내야 할까? 강아지들을 보았을 때 어떤 마음을 내야 할까? 부처님 가르침에 정답이 있다. 그것은 한량 없는 윤회의 과정에서 “나도 한 때 저와 같은 존재였다.”라는 것이다. 이렇게 마음을 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업이 자신의 주인이고 나는 업의 상속자임을 알아야 한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부처님은 “뭇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입니다. 업이 뭇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M135)라고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타인의 업에 개입해서는 안된다. 단지 자애와 연민의 마음만 내면 된다. 이런 마음이 가장 공평한 마음이다. 이런 마음이 가장 중립적인 마음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인내하고 해치지 않고 자애롭고 연민하는 것(khantiyā, avihiṃsāya, mettacittatāya, anudayatāya”(S47.19)이라고 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남을 수호함으로써 자신을 수호하는 것”(S47.19)이라고 했다.
나는 내 할 일을 잘 하고 있는가? 남의 업에 개입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는가? 타인의 불행에 연민의 마음을 가지는 것은 좋지만 지나치게 개입하면 노심초사하게 될 것이다. 강아지를 보고서 불쌍한 마음을 넘어서 강아지의 업에 개입한다면 우울해진다. 이럴 때 마음의 평정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그 사람 업으로 보는 것이다. 당연히 강아지의 업으로 본다.
누구도 타인의 업에 개입할 수 없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업대로 살고 있는 것이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연민의 마음뿐이다. 이 연민의 마음을 넘어서 노심초사한다면 괴로운 삶을 살게 된다. 나라 걱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요즘 선거철이다. 총선이 두 달도 남지 않았다. 이번 총선에서는 극악무도한 무리들을 몰아내자고 말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야권에서는 200석 이상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지나치게 정치에 몰두하면 남의 업에 개입하는 것이 된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말은 “네 할 일이나 잘해!”라는 말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이렇게 매일 오전에 장문의 글을 쓰는 것이다. 그리고 좌선을 하고 빠알리어를 공부하고 경전과 논서를 읽고 책을 만드는 것이다. 물론 일감이 있으면 일을 해야 한다. 이것이 나의 본분사이다.
누구도 나의 안전을 지켜 주지 않지만
어느 누구도 나의 안전을 지켜 주지 않는다. 누구도 나에게 식량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 내가 먹을 것은 내가 벌어야 한다. 일을 해야 하는 이유에 해당된다. 나의 안전은 내가 지키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안전을 내가 지키면 타인의 안전도 지키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마치 곡예사들이 서로 자신의 안전을 지키는 것과 같다. 각자 제 위치에서 자신의 본분사를 했을 때 안전은 지켜진다. 마치 운전하는 것과 같다.
오늘도 하루를 달린다. 마치 운전하는 것처럼 달린다. 전방 주시하는 것을 태만하면 사고가 난다. 나도 불행해지고 타인도 불행해진다. 누구도 나의 안전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 나의 안전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 그런데 내가 안전하면 타인도 안전하다는 것이다.
타인의 불행에 대하여 안달복달 해서는 안된다. 지나치게 나라걱정 해서는 안된다. 먼저 내 할 일을 해야 한다. 내가 해야 할 것은 연민의 마음을 내는 것일 뿐이다. 안달복달하거나 노심초사하면 괴로운 상태가 되어서 연민의 마음은 실패가 된다. “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는 마음을 내는 것이 가장 공평하다.
2024-02-2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