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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하늘을 보며 지나온 한 주입니다. 새벽에 일어나 총총한 별빛을 보는 것은 마음마저 밝게 해줍니다. 밝은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보면 하루가 기대됩니다. 차가운 아침 공기를 마시며 산행을 나서면 몸도 가벼워집니다. 산행?이라, 요 정도 가지고 산행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럽습니다. 이게 무슨 ‘산행’이야? 동네 산책이지, 그렇습니다. 그래도 조금은 헐떡거리며 오르기도 하니 예쁘게 봐주면 좋겠습니다. 짧게 다녀와서 아침 신문을 봅니다. 식사는 진작 끝났고 시계는 여덟시 반 전후입니다. 요즘은 신문 스크랩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그냥 읽고 넘어가지요. 한동안 열심히 했습니다. 십여 년 해놓은 것만 책장 하나를 차지했습니다. 그래서 이사할 때 반 이상 버렸습니다. 그리고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언제 다시 볼 여유나 있겠습니까? 쓸데없는 짓만 열심히 했던 것이지요. 거참!!
가끔 그런 생각도 듭니다. 열심히 기록하고 저장하고 있는데 어디다 쓸 거지? 또 책을 낸다고? 누가 봐준대? 이 또한 쓸데없는 짓 아닌가? 그래서 집어치웠습니다. 단지 관람한 영화는 그냥 지나치기 아까워서 생각을 정리할 겸 끄적거립니다. 가끔 되돌아보기도 합니다. 장면들이 삼삼하게 지나갑니다. 내 인생 지나가듯 말이지요. 아마도 다가오는 시간에 대하여 점점 더 자신이 없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없어질 때까지는 내 곁에 두어도 누가 뭐라 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가 ‘영화평’이라는 칭호를 써주었는데 과분한 명칭입니다. 그저 ‘감상문’ 정도일 뿐이지요. 개인의 느낌이고 생각일 뿐입니다. 짧은 시간 안에 다른 세계, 다른 사람의 인생을 경험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어느덧 시월도 하순입니다. 날씨가 잘 따라가고 있네요. 건강하고 복된 시월의 마지막 한 주가 되기를 빕니다. ^&^
2021년 10월 23일 김종우 목사
쉽게 읽는 요한계시록 12
김종우 목사
펴 놓인 책 곧 열린 책(계 10장)
우리가 지금 ‘요한계시록’을 읽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부터 약 2천 년 전에 사도 요한이 지중해에 있는 밧모라 하는 섬에 유배되어 있을 때 예수님께로 받은 계시입니다. 그래서 계 1 : 1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시작합니다. 그런데 왜 ‘요한계시록’인가요? 그야 예수님이 계시해주신 것을 요한이 받아서 기록하였으니까요. 당시 기록한 이 말씀은 그 당시에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마지막 때 일어날 일입니다. 백년이 될지 천년이 될지 언제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벌써 2천 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오래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때’라고 이야기들 했습니다. 과연 그 때가 언제일지는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아버지 하나님 외에는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특히 요즘 들어 관심이 많아지는 것을 보면 혹시 그 마지막 때가 정말 가까워진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주의를 일으켜줍니다. 마 24 : 42 - 44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잘 아는 대로 이 요한계시록은 장차 일어날 예언의 말씀입니다. 반복하지만 당시 일어날 사건이 아니므로 일어날 그 때까지는 아무리 읽고 연구를 해도 결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때까지 봉해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습니다. 옛날 선지자들은 꿈이나 이상 또는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하실 일을 미리 보았습니다. 보고 듣기는 했어도 알지 못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알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때 일어날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은 봉해놓으셨는데 그것을 구태여 알고 싶어서 연구하고 상상하고 만들어서 성도들에게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그럴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일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어련히 밝혀주십니다.
선지자가 환상으로 본 것을 기록한 것을 보니 온통 비유입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이 알 수 없도록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앞에서 하늘언어(천국어)라고 말한 것이 그것입니다. 따로 배워야 알 수 있습니다. 설령 언어를 배운다 해도 사건이 일어날 때 실제 사물이나 사람과도 맞춰봐야 합니다. 과연 이 말씀이 이 사람을 가리키는 것인지, 이 사건을 말하는 것인지 따져봐야 합니다. 확실해야 믿는 것입니다. 그러려니 하고 믿으면 맹신이나 어리석은 신앙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자식을 키워보면 알겠지만 내 자식이 어리석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이왕이면 똑똑하고 확실하기를 바랍니다. 잘 배워서 남들을 가르칠 수 있는 지도자가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 하나님도 마찬가지 마음이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인 우리가 똑똑하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바르게 알고 그 마음과 뜻을 똑바로 알아서 행해주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사도 요한을 하늘로 불러서 하늘(하나님 계신 영계)도 보여주시고 장래 있을 사건들을 보여주십니다. 요한이 그것을 자기가 본 대로 기록해준 것이 바로 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이제 계 10장에 옵니다. 1절 “내가 또 보니 힘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 계시록을 읽다 보면 이 구절이 많이 나옵니다. ‘내가 또 보니’ 누가 보는 겁니까? 예, 요한이 보는 것입니다. 물론 환상입니다. 당시의 사건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기록되면 비유의 말씀입니다. 자 ‘힘센 다른 천사’가 나타납니다. 그러니 앞의 일곱 나팔을 가진 천사가 아닙니다. 그의 모습이 설명됩니다. 그리고 2 - 3절 “그 손에 펴 놓인 작은 책을 들고 그 오른발은 바다를 밟고 왼발은 땅을 밟고 사자의 부르짖는 것 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 외칠 때에 일곱 우뢰가 그 소리를 발하더라” 이 힘센 천사의 손에 무엇이 있습니까? ‘펴 놓인 작은 책’입니다. 어떻게 펴졌을까요? 왜 구태여 펴있다고 말씀할까요? 봉해져 있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몇 가지 살펴보고 가겠습니다. 이 천사의 모습이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다고 합니다. 기억나는 것은 계 1장에서 본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계 1 : 15 - 16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물론 이 천사는 예수님이 아닙니다.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다고 하지요. ‘무지개’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옛날 홍수 후에 언약의 표징으로 세워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무지개’라고 하면 언약이 생각납니다. 아 이 천사는 예수님이 보내실 언약의 사자이겠구나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다. 당신 이름으로 보내실 보혜사 성령입니다. 요 14 :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이 천사가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습니다. 한 마디로 심판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바다는 무엇이고 땅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설마 정말 바다를 심판하는 것은 아닐 테니 말입니다. 심판의 대상은 사람입니다. 아니면 세상이지요. 더불어 ‘하늘’이란 용어가 자주 나옵니다. 그러니 좀 알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① ‘하늘’부터 봅니다. 여태 보았지만 우선은 ‘하나님이 계신 곳’을 가리킵니다. 첫째는 영계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옛날에는 성막 또는 ‘장막’이라고도 표현했습니다. 둘째는 ‘지도자’를 가리킵니다. 세상에서는 왕이고 교회에서는 목자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끔 듣는 조언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네 주인을 하늘처럼 모셔라.’ 옛날에는 시집가는 딸에게 말해줍니다. 남편을 하늘 같이 생각하라고요.
② ‘바다’입니다. 단 7 : 3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다르니” 자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답니다. 그런데 그 네 짐승이 무엇인가 봅니다. 17절 “그 네 큰 짐승은 네 왕이라 세상에 일어날 것이로되” 네 짐승은 네 왕이고 세상에 일어날 것이라 했으니 바다는 곧 세상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천국을 말씀하시는데 바다에 친 그물 같다고 하십니다. 마 13 : 47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잘 아는 대로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드시겠다 하셨으니 ‘물고기’는 사람이요 바다는 ‘세상’입니다.
③ ‘땅’입니다.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 ‘좋은 땅’이 나옵니다. 땅이, 땅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이고 사람의 마음입니다. 눅 8 : 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그리고 또 하나 ‘하늘’과 비교되는 ‘땅’이 있습니다. 하늘이 ‘지도자’라면 땅은 ‘일반 백성’이고 ‘성도’입니다. 이것을 비교할 수 있는 성구가 있습니다. 사 1 : 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지금 하나님이 배역한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하늘과 땅이 정말 하늘과 땅이겠습니까? 이 대칭되는 구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10절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찌어다” 관원 즉 지도자와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천사가 바다와 땅을 밟고 있는 것은 장차 세상과 하나님 백성을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밟고 섰다는 표현이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계 10 : 2, 5, 8절) 그러니 확실히 심판하시겠지요. 그리고 ‘펴 놓인 작은 책’이 무엇입니까? 앞에서 봉해져 있던 책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 인을 하나씩 다 떼셨습니다.(계 6, 8장) 마지막 일곱째 인 떼실 때에 일곱 나팔 가진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계 8, 9장에서 여섯째 나팔까지 불렸습니다. 남은 일곱째 나팔에 대해서 이 천사가 하나님께 맹세하며 말합니다. 계 10 : 7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아직 나팔을 불지는 않았습니다. 미리 예고를 해주는 것이지요. 마지막 일곱째 나팔이 불면 하나님의 비밀이 이루어진답니다. 그러니 일곱째 나팔 곧 마지막 나팔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마지막 나팔이라 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고전 15 : 51 - 52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그렇습니다. ‘마지막 나팔’이 도대체 무엇인가 했습니다. 답은 계시록에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 이루어집니다. 바로 일곱째 나팔이 불어지면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그 때 기다리던 부활의 사건이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놀라운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참으로 믿고 지키는 신자라면 바로 이 소망을 가지고 신앙을 합니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우리에게 이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우리 믿음의 모든 이야기가 헛것이며 우리야말로 가엾은 자들입니다. 19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앞에 일곱 우레가 나옵니다.(전에는 한자대로 雨雷라고 했는데 우리 한글로 ‘우레’로 바뀌었습니다) 소리를 발한다고 하지요.(계 10 : 3, 4절) 그 소리를 기록하려고 하니 하늘에서 소리 나서 말하기를 하지 말라고 합니다. 4절 “일곱 우뢰가 발할 때에 내가 기록하려고 하다가 곧 들으니 하늘에서 소리 나서 말하기를 일곱 우뢰가 발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 하더라” 조금 후 요한이 받아먹고 증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하늘에서 소리’ 내는 분은 누구일까요? 8절 봅니다.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책을 가지라 하기로” 이 음성도 같은 분이지요. 그 분이 요한에게 명하십니다.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의 손에 있는 책을 받으라 합니다. 이 분이 누구입니까?
요한이 그 책을 받아먹습니다. 9 - 10절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요한이 그 분의 명대로 천사에게서 열린 책을 받아먹습니다. 그 분이 누구일까요? 우리 시작할 때 하늘의 계시가 내려오는 과정을 보았습니다. 지금 그대로 되고 있음을 보는 것입니다. 계 1 :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그렇지요? 하나님 - 예수님 - 천사 - 요한 - 종들. 계 5장에서 예수님이 하나님께로 받아 6장과 8장에서 인을 떼어 책을 펼치셨습니다. 그리고 천사에게 주는 것이지요. 그것을 이제 요한이 받아먹습니다. 다음은 종들에게 가서 전해야지요. 그래서 11절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아멘!
<푸른 호수>
생각해봅니다. 이 가족은 그 후 다시 만날 수 있었을까? 그 때 그렇게 헤어지고 다시 만날 수 없었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 상상하기도 싫습니다. 그 사건 후 그래도 2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는데 세상은 변한 것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기야 법이란 것이 쉽게 만들어지지도 변하는 것도 아닙니다. 관련된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 아니니 말이지요. 당장 자기 신상과는 별개의 문제이니 서두를 일도 없습니다. 막말로 아픈 사람만 아프고, 아파서 죽거나 말거나 나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당사자에게는 그야말로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일 수 있어도 법을 제정하는 사람들에게는 먼 나라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잖아도 할 일이 쌓였는데 말이지요.
과연 올바른 판단이었을까 하는 것도 생각해봅니다. 남편이 추방되어 알지도 못하는 곳으로 갑니다. 태어난 곳이라 해도 이미 30년 넘는 세월 가본 적도 없습니다. 고국이라 해도 아는 지식은 전무 합니다. 그냥 쫓겨나서 가는 곳이지 연고가 있어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공항에 도착하면 그 때부터 방랑객이 될지도 모릅니다. 돕는 자도 없고 당장 먹고 잘 곳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가진 돈이라도 있어야 어디 기댈 텐데 주머니도 여의치 않습니다. 정말 캄캄한 미로로 들어서는 기분일 것입니다. 단지 아직은 젊은 몸이 있으니 어디서인들 살 수 없겠는가 하는 막연한 희망만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 가족이 딸린다면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괜스레 가족까지 생고생시킵니다. 그러니 아이들 생각을 해서라도 가족은 살던 곳에 남는 것이 낫습니다.
현실보다 중요한 것이 문서입니다. 하기야 일일이 확인하며 업무를 진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어찌 다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눈앞에 보이는 서류가 전부입니다. 그것으로 조사하고 확인하고 판단합니다. 당사자가 찾아와서 하소연해도 그 사정을 알 리가 없고 확인할 방도도 없습니다. 한 나라의 국민이 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요즘처럼 돌발사고가 일어나고 여기저기 테러가 발생하는데 누구인지 확실하게 알아보지도 않고 함부로 승인해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때 적당하고도 필요한 조처를 해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무심코 넘어가면 일이 생겼을 때 매우 당혹스러운 사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 때는 수습하기 매우 어려워집니다.
입양을 하고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를 버립니다. 참으로 무책임한 일이지요. 그래서는 안 되는데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아이는 자기도 모르게 이 사람 저 사람 손으로 옮겨 다닙니다. 그래도 누군가는 아니면 입양기관에서 책임을 지고 추적을 하면서 아이에 대한 보호를 이어가야 할 것입니다. 아이가 일정한 보호자 없이 옮겨 다닌 모양입니다. 다행히 보호자로 나선 사람이 있기는 했지만 긴 시간을 지내면서 이제는 학대를 일삼습니다. 달리 연고도 없고 갈 곳도 모르고 피할 곳도 없으니 그곳에 머물며 지옥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어느 정도 자랐을 때 비로소 탈출합니다. 아무런 생계수단도 없었으니 사람을 해치지는 않았지만 범죄를 저지르기도 하였습니다. 그것은 지워지지 않는 라벨이 되어 따라다닙니다.
문제는 마지막 그 입양 부모가 아이에 대하여 아무런 조처를 해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이에게는 아직 그곳의 국적이 없습니다. 계속 불법체류가 되고 있는 것이지요. 미성년자일 때는 보호자 밑에 있으니 누가 뭐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인이 되어서는 문제가 달라집니다. 10년을 살았든 20년을 살았든 그보다 더 30년을 살았음에도 불법체류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본인은 전혀 몰랐고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 상상도 하지 못한 일입니다. 여태 여기 살아왔고 결혼하여 아기까지 낳아 살고 있는데 이 나라를 떠나라니 이 얼마나 기막힌 일입니까? 하지만 그것이 법이란 말입니다. 전후 사정을 안다 해도 길이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착하고 성실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해도 세상은 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사회의 법과 문화, 질서를 알아둠이 필요합니다. 내가 놓인 공동체의 법과 질서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따르지 않으면 나는 불법을 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제대로 소속이 되어 공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타국에서 입양되어 온 사람이라면 먼저 입양자가 책임을 가지고 처리해야 합니다. 그것이 여의치 못하다면 입양기관에서 기간을 정하여 확인하고 처리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냥 한 사람, 한 가정의 아픔이라고 제쳐두어서는 안 됩니다.
<“내 이름은 안토니오 르블랑입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입양돼 `안토니오 르블랑`이라는 이름을 얻은 한 남자. 그에게는 누구보다 자신을 믿어주는 아내 `캐시`와 사랑스런 딸 `제시`, 그리고 곧 태어날 아기가 전부다. “나는 미국인도, 한국인도 아닙니다.”
어느 날, 억울한 상황에 휘말려 경찰에 붙잡힌 그는 영문도 모른 채 이민단속국으로 넘겨지고, 시민권이 없다는 사실을 난생처음 알게 된 그는 강제추방 위기에 처하는데…> 광고에 소개된 간단한 줄거리입니다. 영화 ‘푸른 호수’(Blue Bayou)를 보았습니다. 극장을 나오는 발걸음이 무겁습니다.
<불멸의 연인>
과연 운명이란 것이 있을까요? 이런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비단 이야기 속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 속에서도 종종 일어납니다. 그래서 사실은 소설보다 더 신비하다고도 말합니다. 일부러 그렇게 만들기도 어려운 소설 같은 이야기가 현실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기 좋은 말로 ‘운명’이라고 표현합니다. 피할 수 없는 현실을 뜻하는 것이겠지요. 때로는 비극으로 또 때로는 행운으로 우리 삶 속에 나타납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이룰 수 없는 사랑으로 때로는 기막히게 들어맞는 연인으로 만납니다. 그렇게 맺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달리 표현하기 어려우니 한 마디로 ‘운명’이라고 합니다.
그는 왜 인생 막바지 어려운 시간에 자기를 돌봐준 동생이 아니라 ‘영원한 연인’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려 하였을까요? 어쩌면 진작 결정해놓았던 일일 것입니다. 그것을 돌릴 여력이 없었던지 그럴 마음이 없었던지 그랬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알고 나면 후자가 훨씬 납득이 됩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자를 사랑했던 이유 외에 더 강력한 이유가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친구인 ‘쉰들러’도 유언장의 속사정을 잘 파헤쳤다고 생각했으리라 믿습니다. 보편적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유산이 얼마가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동생은 무척 서운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고인의 뜻이 그러한데요.
처음 알았을 때도 그랬지만 여전히 불가사의입니다. 들을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음악을 하며 어떻게 작곡을 하지요? 간단한 분량도 아니고 교향곡을. 이게 어떻게 가능한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볼 수 없는데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요? 마찬가지 아닙니까? 듣지 못하는데 어떻게 음악을 합니까? 물론 처음부터 듣지 못했으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듣는 생활을 하다가 어떤 사고나 질병으로 인하여 청력을 잃었으리라 생각합니다(그의 전기를 확인해보니 실제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가지고 있는 기억 속의 악보와 소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참으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얼마나 확인해보고 싶겠습니까? 또한 그것이 안 되니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 어려움들을 이겼다는 사실만으로도 비범한 사람입니다.
또한 우리는 대부분 삶 속에서 사랑을 겪습니다. 인생을 가장 열정적으로 만들 수 있는 동인 중의 하나가 바로 사랑입니다. 살맛나게 하기도 하고 죽을 맛나게 하기도 합니다. 하늘이 파랗다가 노래지기도 합니다. 이것으로 울고 웃고 별짓 다합니다. 인생이 꽃방석이 되었다가 금새 가시방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죽하면 생명을 걸기도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사람 사는 곳에는 수많은 이야기 속에 거의 모두 껴있습니다. 거의 누구나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재밌게 보고 재밌게 듣고 재밌게 이야기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의 촉각을 곤두서게 하는 소재도 많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시간과 장소를, 그리고 인종과 문화를 떠나 어디서든 관심을 끌 수 있는 소재입니다.
동생의 애인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여자도 그 명성을 알기에 은근히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두 사람이 마음이 부딪쳐 불을 내고 맙니다. 동생 몰래 교제하다 아기까지 배게 됩니다. ‘베토벤’은 둘이서 도망할 계획을 세웁니다. 날을 정하여 어느 호텔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합니다. ‘조안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얼굴을 베일로 완전히 가린 채 일찍 호텔에 와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베토벤도 마차를 타고 약속 장소로 달려갑니다. 하필 그 날 폭풍에 비가 억수같이 퍼부어 마차가 진흙탕에 빠져 나오지를 못합니다. 베토벤은 일단 급히 전갈을 보냅니다. 사정을 이야기하고 사랑의 고백과 반드시 갈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 편지는 호텔 주인아주머니의 손에 넘겨져 식사를 담은 쟁반에 담겨 조안나가 있는 방으로 전해집니다. 조안나는 식탁에 놓인 식사를 보며 그 초라한 차림과 자신의 모습을 겹칩니다. 식사 받침대 밑에 놓인 편지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속았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던 모양입니다. 속으로 화를 씹으며 방을 서둘러 나갑니다. 호텔을 나와 기다리고 있는 마차에 오릅니다. 지금 막 도착한 베토벤이 타고 온 마차입니다. 계단을 오르며 내리며 서로 엇갈렸습니다. 베토벤도 방에 들어와 조안나가 안 보이자 온 방안을 부수며 화를 냅니다. 그렇게 헤어진 조안나는 베토벤의 동생과 결혼합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사실을 알게 된 베토벤이 욕설을 퍼부으며 반대를 해도 두 사람은 결혼해서 살게 됩니다. 그러나 동생은 오래지 않아 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납니다. 그런데 베토벤은 그 아들의 양육권을 빼앗습니다.
마지막으로 병석에서 베토벤과 조안나가 만납니다. 서로가 마지막임을 직감하였을 것입니다. 베토벤은 조카(아들) 양육권을 포기하고 엄마에게 넘긴다는 약정서를 내줍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쉰들러는 호텔 아주머니에게서 받은 이 수사(?)의 중요한 단서가 되었던 그 편지를 조안나에게 건네줍니다. 조안나가 편지를 읽으며 눈물을 흘립니다. 쉰들러가 그 모습을 밖에서 돌아보며 떠납니다. 영화 ‘불멸의 연인’(Immortal Beloved)를 보았습니다. 1994년 작품입니다. 베토벤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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