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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 8권, 3년(1652 임진 / 청 순치(順治) 9년) 3월 4일(을해)
청나라에 역적 토벌에 대한 상황을 아뢰다
이때 역적을 토벌하는 일이 일단락되었으나 청나라가 의심하는 단서가 될까 염려하여 전후에 걸친 옥사(獄事)의 상황을 모두 주문(奏文)하였는데, 그 주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소방이 불행하여 변란이 근친들 사이에서 일어났으므로 그 전말(顚末)을 두루 진달하겠습니다. 다음은 의정부의 장계(狀啓) 내용입니다.
신들이 조소원(趙昭媛 소원은 정4품의 후궁이다)의 시비(侍婢)인 겸선(兼先)의 고발장을 접수하였는데, 거기에 말하기를 ‘소원 조씨가 안으로는 여복(女僕)과 결탁하고 밖으로는 승니(僧尼)와 교통하며 왕의 처소에 저주를 하여 왕의 몸을 해치려 꾀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사건의 진상을 조사해 본 결과 역모의 정상이 모두 구비되었으므로 소원을 별소(別所)에 안치시킴과 동시에 내외(內外)의 흉당(兇黨)을 잡아들여 그 정황을 추궁하였습니다.
그 결과 조씨의 시비 영이(英伊)는 공초하기를 ‘나는 소원이 친히 믿는 시비이기 때문에 소원의 행동에 대해서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모르는 것이 없다.
소원은 늘 가슴에 불만을 품고 항상 원망하는 발언을 하였는데, 그 어미와 서로 얼굴을 맞대고 밀어(密語)를 나누면서 옆에 있는 사람이 듣지 못하도록 금하였다.
하루는 소비(小婢) 및 반비(班婢)인 가음춘(加音春)·덕향(德香) 등을 불러 술과 음식을 내주고는 등을 두드리면서 말하기를 「나에게 한 계책이 있다. 장차 국왕 부자를 모해하고 낙성위(洛城尉) 김세룡(金世龍)을 임금으로 추대하려 하는데, 너희들 말고 누구와 일을 이루어 나가겠는가. 다행히 성사가 되면 나만 크게 이롭게 될 뿐 아니라 너희들도 장차 안락한 생활을 향유할 것이며 족당(族黨)에 이르기까지 부귀를 누리지 않는 자가 없게 될 것이다. 너희들은 기꺼이 따르겠는가.」 하였다.
우리들이 목숨을 걸고 명을 따르겠다고 대답하자, 나의 귀에 입을 대고 말하기를 「수고하지 않고 성공하는 길로는 저주하는 것이 최상이다. 여무(女巫) 가운데에 필시 이 술법에 능한 자가 있을 것이니, 네가 그녀와 깊이 관계를 맺어 두어라.」 하면서 백금(白金)과 문수(文繡) 등의 물건을 내 주었다.
이에 따라 우리들이 요무(妖巫)인 앵무(鸚鵡)에게 후하게 선물을 주고 그와 함께 소원의 모녀를 보러 갔더니 소원이 술잔을 받들어 축수(祝壽)하고는 같이 일을 해 나가기로 약조하였다.
이 뒤로 그 무당이 늘 후문으로 은밀히 드나들면서 방술(方術)을 가르쳐 주었는데 이루 기억할 수조차 없다.
이에 소원이 친히 믿는 하천배들을 시켜 죽은 사람의 두골·수족·치아·손톱·발톱·머리카락 및 벼락맞은 나무·무덤 위에 있는 나무 등의 물건을 몰래 구해 오게 하고, 또 다른 사람의 무덤을 파헤쳐 시체의 살점을 떼어 오고 관목(棺木)의 조각을 찾아 오게 하였으며, 시체에서 흘러나온 즙을 적신 솜, 마른 뼈다귀를 갈아 만든 가루, 심지어는 햇빛에 바짝 말린 닭·개·고양이·쥐 등등의 저주하고 기도하는 용도에 필요한 물건이라면 모아들이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는 늘 덕향 등으로 하여금 상자 속에 숨겨 가지고 왕의 처소에 들어가 야음을 틈타 왕대비 및 국왕이 거처하는 방과 거치게 되어 있는 길에 두루 파묻게 하였으며, 그 딸 효명 옹주(孝明翁主)로 하여금 치아를 속옷띠에 매달거나 뼛가루를 화장품 상자에 넣어 두었다가 왕의 처소에 드나들면서 살짝 넣어두거나 몰래 뿌리게 하여 방과 문지방 사이의 구역에 거의 빠진 곳이 없었다.
그리고 승니(僧尼)로 하여금 절을 창건하고 불상을 만들게 하여 자신의 복을 기원하게 하였는데, 국가에 화를 끼치려고 흉악한 행동을 자행하면서 못하는 짓이 없었다.
우리들이 「저주를 한 효과가 나타난 뒤에라도 의빈(儀賓 여기서는 김세룡을 가리킴)을 옹립(擁立)하는 일이 쉽지 않을 듯한데, 무슨 계책이 있습니까?」고 물으니, 소원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런 것은 너희들이 알 바가 아니다. 자연히 이 일을 이룰 자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가음춘과 덕향의 공초도 영이의 공초와 서로 부합됩니다.
여무(女巫) 앵무를 추궁하여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저주하는 일을 일찍이 배운 적이 있었으나 군상(君上)을 모해하려는 것이야 어찌 나의 본심이었겠는가. 그러나 처음에 영이의 무리에게 잘못 이끌려 들어갔다가 나중에는 소원 모녀의 후한 대접에 감격하여 온갖 방법을 지시해 가르쳐 주었으니 실로 모주(謀主)가 된 셈이다.’ 하였습니다.
소원의 노비로서 같이 악행을 하여 역모를 한 무리는 통틀어 수십 명에 달하였습니다. 모두들 자복하여 빠짐없이 털어놓았는데 추악하고 더러운 여러 물건들을 구해 온 정황이 각 공초에 한없이 낭자하게 열거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각 범죄자들에 대해 율(律)대로 처치하려고 할 즈음에, 조인필(趙仁弼)의 사위인 종실(宗室) 해원령(海原令) 이영(李暎)과 진사 신호(申壕) 등이 상변(上變)하여 알리기를 ‘장인 조인필은 곧 조 소원(趙昭媛)의 사촌 오빠이다. 전 영의정 김자점과는 본래 서로 친하게 지냈는데 김자점의 손자 김세룡이 소원의 딸인 효명 옹주(孝明翁主)에게 장가들어 의빈(儀賓)이 되자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친밀해졌다.
김자점이 일찍이 조인필을 흥양(興陽)의 감목관(監牧官)으로 삼았는데, 김자점이 제멋대로 탐학(貪虐)을 일삼다가 온 나라 사람들의 분노를 사 전라남도 광양현(光陽縣)에 유배되자, 조인필도 파직되어 순창군(淳昌郡) 지역에 우거하였다.
대체로 순창에서는 광양이 먼 거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인필이 늘 필마(匹馬)로 몰래 갔다가 머무르다 오곤 하였는데, 꼭 밤에 출입하는 등 그 동안의 정적(情迹)이 은밀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는 때때로 서울에 와서 김세룡의 집에 머물러 숙식(宿食)을 하곤 했는데, 옛날의 편비(褊裨)들을 보면 꼭 말하기를 「너는 상공(相公)의 은혜를 잊었느냐. 상공이 지금 어려운 처지에 있다고 해서 남쪽 변방에서 끝내 늙어 죽으리라고 너는 생각하느냐.」라고 하면서 편비들과 회동하지 않는 날이 없었으며, 편지로 끊임없이 김자점 부자와 통하며 의논하였다.
또 일찍이 우리들에게 말하기를 「낙성위(洛城尉)는 보통 분이 아니니 너희들은 잘 대우하도록 하라. 훗날 필시 이 분을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등 행동이나 말 하나하나가 역적 모의와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김자점과 조인필의 반역하려는 정상은 명백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주 사건으로 구금된 죄인인 김세룡의 여종 업이(業伊)도 공초하기를 ‘조인필이 일찍이 순창에서 김세룡의 집에 와서는 바로 김세창(金世昌) 및 도사(都事) 이두일(李斗一) 별장 정계립(鄭繼立), 진사 이주(李霌), 감목관 이언표(李彦縹)와 함께 김자점의 편지를 뜯어 보고 머리를 맞대 은밀히 모의하면서 아침에서 저녁까지 보냈는데, 문밖으로 들리는 소리가 모두 「계책을 합해 군사를 일으켜 김세룡이 스스로 점거하게 해야 한다.」는 일이었다.
그리고 소원(昭媛)의 모녀도 모든 음모에 대해서 반드시 여인 승례(勝禮)와 서로 통하여 야음을 틈타 와서 모여 새벽이 되는 줄도 몰랐으며, 늘 보화(寶貨)를 서로 주면서 불상을 세우는 데 필요한 시주라고 하는가 하면, 작은 함에 뼛가루를 담아 보낸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즉시 김자점·조인필 및 자점의 아들인 한산 군수(韓山郡守) 김련(金鍊)과 곡성 현감(谷城縣監) 김식(金鉽)과 진사 김정(金鋌), 그리고 그 손자인 낙성위(洛城尉) 김세룡과 진사 김세창(金世昌) 및 이 사건과 관련된 일체의 인물을 붙잡아 추궁하여 신문하였습니다.
김식은 공초하기를 ‘나의 아들 세룡이 조 소원의 사위가 된데다가 소원 역시 큰 뜻이 있었기 때문에, 일찍이 기축년 겨울과 경인년 봄에 수원 방어사 변사기(邊士紀), 광주 방어사 기진흥(奇震興), 전 절도사 안철(安澈), 지사(知事) 이형장(李馨長), 전 현감 이순성(李循性), 전 군수 이효성(李孝性) 등과 대사(大事)를 일으키기로 모의하여 부서(部署)도 이미 정하였는데 대장은 변사기, 책사(策士)는 기진흥이고 금백(金帛)을 뿌려 무리배들을 결집시키는 일은 이형장이 맡았다.
그리하여 약조하기를 「수원과 광주(廣州)의 병력으로 밤을 틈타 곧바로 경성을 침범하고 우리들 부자와 형제는 불러 모집한 무사들을 데리고 안에서 일어나 숭선군(崇善君)을 임금으로 추대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날짜까지 정하고서 아직 일을 벌이지 못하고 있는 때에 변사기가 파직당하고 기진흥도 체직되었으며 나의 아비가 멀리 광양으로 유배되었는가 하면 우리 형제도 모두 남쪽 고을로 제수되었으므로 계책이 마음과는 어긋나 지금까지 지체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자주 변사기와 기진흥 등에게 글을 보내 사기가 저하되지 않도록 북돋우면서 기회를 기다리도록 하는 동시에 세룡의 처로 하여금 더욱 무고(巫蠱)에 대한 일을 힘쓰도록 하였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흉계는 내가 실제로 담당하였다.’ 하였습니다.
김자점은 공초하기를 ‘내가 비록 조정에 죄를 지어 멀리 외방에 쫓겨났지만, 나의 손자가 일단 옹주에게 장가들었고 나의 두 아들이 각자 교우관계를 맺고 있는 이상, 안과 밖에서 서로 호응하면 일이 쉽게 이루어지리라 여겼다.
그리고 변사기·기진흥·안철 등은 혹은 족친(族親)이거나 혹은 편비로서 평소의 정분으로 볼 때 부자(父子)와 같았고 이형장은 일찍부터 친밀하게 지내면서 목숨까지도 버리겠다고 결심을 하였으므로, 이에 자식으로 하여금 같이 일을 하자고 타이르도록 하였더니, 모두들 즉시 기꺼이 따랐다.
그리하여 기일을 정해 군사를 일으키기로 하였는데, 마침 분산되었기 때문에 즉시 계획대로 행하지 못한 것이다.
항상 생각기에 시간을 오래 끌면 모의가 누설되고 말 터이니 차라리 한번 결판을 내야겠다고 여겨 맏아들 연(鍊)은 한산(韓山)의 병력을 출동시키고 둘째 아들 식(鉽)은 곡성(谷城)의 병력을 출동시키고, 기진흥은 마침 경기 수사(京畿水使)에 임명되었으므로 본진(本鎭)의 병력을 유인해 출동시켜 세 길로 일제히 진격케 하고 안철과 이형장 등은 서울 안에서 호응하도록 일을 꾸미고 싶었으나, 다만 변사기가 북쪽 변방의 임무를 맡아 대장이 없었던 관계로 어쩔 수 없이 주저하다가 마침내 낭패를 당하고 말았다.’ 하였습니다.
조인필은 공초하기를 ‘나는 소원(昭媛)의 사촌 오빠로서 김자점의 심복이 된 이상 길흉과 화복을 그와 함께 해야 할 운명이었다.
그리하여 양쪽 사이를 왕래하며 계책과 의논을 서로 통했으니 안과 밖의 역모를 모두 참여하여 알고 있다.’ 하였습니다.
김세룡·김세창·김정(金鋌)·변사기·기진흥·안철·이효성(李孝性)·조성로(趙星老)·이두일(李斗一)·정계립(鄭繼立) 등의 공초를 보건대 한입에서 나온 것처럼 모두들 김세룡을 장차 추대하기로 하였다고 한데 반해 김세룡 부자의 공초만은 숭선군(崇善君)을 추대하기로 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이어 각 범죄자들을 대질신문토록 한 결과, 각 범죄자들이 낱낱이 굴복해 반역하려던 정상이 모두 드러났습니다.
또 왕대비 및 국왕께서 거처하는 방을 철저히 수색하여 저주의 형적에 대해 확인하게 하였더니 굴뚝과 문지방 사이나 섬돌과 뜰의 벽돌틈에 묻어 둔 흉물(凶物)들이 형형색색으로 잡다하게 튀어나와, 심장이 뛰고 보기에 참혹하여 차마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조역(趙逆 조서원)은 이미 옹주와 더불어 저주하고 흉악한 행동을 자행하여 국모(國母)와 국군(國君)을 모해하면서 안과 밖으로 서로 호응한 역모의 정상이 뚜렷이 드러났으니, 아무리 선왕(先王)의 시희(侍姬)였다 할지라도 이야말로 종묘와 사직의 죄인으로서 이치상 용서할 수가 없는데, 더구나 대비께서 위에 계시어 왕이 자유로 할 수 없는 처지이겠습니까.
옹주도 율대로 처치하는 것이 합당하겠기에 신들이 여러 차례 정법(正法 사형)의 시행을 청하였으나 끝내 윤허를 받지 못했으므로 은혜로 의리를 덮는 지극한 뜻을 곡진히 체득하여 경률(輕律)로 낮추어 적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조역(趙逆)은 자살하게 하고 옹주는 중도(中途)에 안치시키도록 하였습니다.
숭선군 이징(李澂)은 관작을 삭탈하여 근도(近島)에 안치하여 권도(權道)에 맞게 임기응변하시는 국왕의 도리를 극진히 하게 하고, 수복(首服) 김자점·김식·김세룡·변사기·기진흥·조인필·안철·김정·김세창·이효성·이두일·조성호·정계립 등 및 저주하는 일에 동참한 여무(女巫) 앵무와 조역(趙逆)의 여종 덕향·영이·덕이(德伊)·예춘(禮春)·업이(業伊)·막금(莫金)·예일(禮一)·가음춘·앙진(仰眞)·점향(點香)·이례(二禮)와 남종 파회(破回)·무응송(無應松)·말금(末金)·귀생(貴生)과 늙은 비구니(比丘尼) 설명(雪明)과 승려 법행(法幸)·보상(普祥)·자운(慈運) 등은 전형(典刑)대로 분명히 바르게 시행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김자점의 아들 김련(金鍊)과 함께 모의한 각인(各人)들 및 저주를 같이 모의한 약간 인이 옥중에서 죽었는데, 기타 각 범죄에 한결같이 관련된 자들은 경중에 따라 의논하여 처단할 생각입니다.
이형장은 사신을 수행하여 의주로 돌아왔을 때 붙잡아다 심문하였는데, 공초하기를 ‘김자점이 탄핵을 받은 뒤에 성 밖에 있는 그를 찾아가 보았더니, 김자점이 그 아들 식 및 장서기(掌書記) 이인달(李仁達)과 밀실에 같이 앉아 있었다.
처음에 나라를 원망하는 말을 꺼내자 김식이 그 아비에게 눈짓을 하면서 만류하였는데, 김자점이 식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은 우리와 정분으로 볼 때 한집안이나 마찬가지이고 너와는 의리상 형제나 매 한가지인데, 어떻게 겉으로만 대하여 숨길 수 있겠는가.」하였다.
그리고는 변사기·기진흥·안철 등과 역모를 약정하였다고 말하면서 군자(軍資)와 호상(犒賞)을 내가 주관하도록 하였다. 나도 옛날의 은혜를 감사하게 여기고 있었으므로 마침내 그의 말을 따랐으니, 역모에 동참한 것이 사실이다.’ 하였으므로 즉시 이형장을 법대로 적용하여 정형(正刑)에 처했습니다.
이상 의정부가 아뢴 내용의 전말을 응당 알려야 하겠기에 주문하는 바입니다.”
【병조 참판 허적(許積)이 지었다.】
김자점[ 金自點 ]
본관 안동. 자 성지(成之). 호 낙서(洛西). 성혼(成渾)의 문인.
성삼문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다 동지를 배반하고 세조에게 고해바친 김질(金礩)의 후손이며 할아버지는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김억령이다.
음서(蔭敍)로 벼슬길에 나아가 광해군대(代)에 병조좌랑에 이르렀다.
인목대비 폐모론이 발생한 이후로 벼슬길을 단념하고, 이귀(李貴) ·최명길(崔鳴吉) 등과 함께 반정을 기도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성공하자 1등공신으로 책록되었는데 공적보다 실세였던 김상궁에게 상당한 뇌물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귀의 딸과 김자점의 동생이 혼인을 하여 사돈지간이 되었으나 김자점의 동생이 병약하여 일찍 죽는 바람에 이귀의 딸 이예순은 궁중의 무수리가 되었다. 이예순이 무수리로 있으면서 김상궁의 눈에 들자 연줄을 대었던 것이다.
이후 출세가도를 달렸으며 급한 성격과 다혈질의 기질로 순검사(巡檢使) ·한성판윤 등을 맡아 능력을 인정받고 강직하다는 평판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인조는 그를 탐탁지 않게 여겼으며 1625년(인조 3년) 윤인발의 딸을 동궁비로 간택하려는데 역적의 자손이라 불가하다고 간언하자 삭탈관직시켜 버렸다.
그러다가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병권에 적임자가 없어 다시 등용되었다. 정묘호란 때 왕실을 호종한 공로로 도원수가 되었고 서북쪽을 방어하는 책임자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도원수로서 임진강 이북에서 청군을 저지해야 할 총책임을 맡고도 전투를 회피하여 적군의 급속한 남하를 방관하였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군율로 처형해야 한다는 간관들의 비난 속에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 유배에 처해졌으나, 1년 만에 해배(解配)되었다.
1640년(인조 18) 1월 강화유수로 제수되었고 그해 2월에는 호위대장으로 재기용되었다. 계속된 비난 속에서도 인조의 비호를 받아 승진을 거듭하였다.
1644년에는 심기원(沈器遠)의 역모사건 이후 권력기반을 확고히 하고 1646년에는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1645년 소현세자(昭顯世子)가 갑자기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고 부인인 강빈이 역모죄에 몰리게 되었다. 김자점은 강빈을 처형할 것을 주장하였고, 자신의 손자인 세룡(世龍)을 인조 소생인 효명옹주(孝明翁主)와 결혼시킴으로써 인조와의 밀착을 더욱 확고히 하였다.
그 후에도 인조의 신임 아래 정권을 담당하면서 청(淸)나라의 위세에 빌붙어 정치적 입지를 굳혀갔다.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자 김자점은 급속하게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고 사림(士林)의 세력이었던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등이 대거 조정에 등용되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북벌론이 대두되자 위협을 느끼고, 청나라의 앞잡이인 역관 정명수(鄭命壽), 이형장(李馨長)을 통해 그 계획을 청나라에 누설하였다.
대간들의 극렬한 탄핵을 받아 인조가 죽은 지 6일 만에 광양으로 유배되었고, 뒤에 아들 김익(金釴)의 역모사건이 발생하자 처형되었다.
[출처] 김자점 |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