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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전쟁의 전략
(디모데전서 1:18~20)
신앙생활은 영적 전쟁입니다. 성경은 성도들의 삶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충돌, 경쟁, 적이라는 군사적인 아미지로 가득 차있습니다. 성도인 우리가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영적 전쟁에 참전하고 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싸우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이 영적 전쟁을 선한 싸움이라고 규정합니다. 또한 이 선한 싸움을 하는데 있어서 균형적인 생각이 중요하고 그 싸움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술이 무엇인지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균형 잡힌 생각을 가지고 선한 싸움을 할 수 있을까요? 선한 싸움을 원어 성경에서는 훌륭한 싸움이라고 쓰고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할 때 선한 싸움과 훌륭한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요? 승리하는 기술은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은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세 가지 기술을 말합니다.
첫째, 예언의 말씀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것입니다. 딤전1:18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무엇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명령합니까?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예언의 말씀이 영적 싸움의 무기가 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바울이 말한 예언의 의미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고정관념을 하나 깨뜨려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예언이라는 말을 들으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예언하면 앞으로 일어날 어떤 일들에 대하여 족집게처럼 알아맞추는 것을 예언이라고 합니다. 요셉이 바로의 꿈을 해석해 주면서 앞으로 7년 동안 풍년이 들고 그후로 7년 동안 흉년이 들 것을 알아맞혔던 것처럼 생각합니다. 또한 엘리야 선지가가 3년 6개월 동안 이스라엘 땅에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을 예언했던 것처럼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하여 알아맞히는 것을 예언이라고 합니다.
물론 예언의 큰 범위 안에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하여 말하는 것도 포함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예언의 더욱 많은 비중은 오히려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인가? 하는 이야기가 더 많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구약에 등장하는 많은 예언자들의 사역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를 맞추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음성을 듣고 현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얼마나 많이 떨어져 있는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어떤 것을 버려야 하는가?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인가?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향하여 ‘예언의 말씀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라’에서 예언의 말씀은 우리의 삶에 표준이 되고 안내서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라는 것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으로 자신의 모습을 점검하라는 것입니다. 군인이 전쟁터로 나가기 전에 싸울 무기와 필요한 물품이 준비되었는지 점검하는 것처럼 예언의 말씀으로 현재 나의 영적인 상태, 믿음의 상태, 하나님과의 관계, 성령의 충만함 등을 점검하게 될 때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기쁨을 맛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도 영적 전쟁에서 말씀으로 승리하심으로 시작이 됩니다.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신 예수님에게 마귀는 영적인 싸움을 걸어옵니다. 세 번에 걸친 시험과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치신 예수님의 대답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돌로 떡을 만들라는 시험에 대해서는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셨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시험에 대해서는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엎드려 경배하라는 시험에 대해서는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기록되었으되, 기록되었으되 말씀을 무기로 삼아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말씀의 권위와 힘을 의지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악한 영의시험을 이겨내실 수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말씀 자체이십니다. 구차하게 말씀을 인용하지 않아도 물리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리고 세 번식이나 대답하실 필요가 없이 한 방에 싸움을 끝내실 수 있는 능력과 권능이 있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기록되었으되 말씀을 인용하고 세 번씩이나 반복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의 길을 따르는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 나를 따른다면 돌을 떡으로 만들고 싶은 육신의 정욕, 높은 자리에 앉고 싶을 안목의 정욕,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 싶은 이생의 자랑이 끈임 없이 찾아오게 될 텐데 그때마다 보임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욕스러운 것이 무너졌던 아담과 하와처럼 되지 말고 기록되었으되, 기록되었으되 말씀으로 승리하는 것임을 우리에게 샘플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선한 싸움을 이야기했던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장에서 자세하게 선한 싸움에 대한 내용을 확대시킵니다. 에베소서 6장에서 마귀의 간계를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6개의 아이템으로 되어 있는데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아십니까? 허리에는 진리의 허리띠, 가슴에는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머리에는 구원의 투구를 쓰고, 발에는 복음의 신을 신고, 한쪽 손에는 믿음의 방패를 다른 한 손에는 성령의 검을 가지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6가지의 전신갑주 가운데 적을 공격할 수 있는 공격무기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무엇일까요? 나머지 모두 방어를 위한 무기입니다.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구원의 투구, 적의 창과 칼을 막기 위해 믿음의 방패를 들고, 가슴을 보호하기 위해 의의 호심경을 갖춥니다. 근데 이중에서 유일한 공격 무기는 무엇일까요? 성령의 검입니다. 위급할 때 투구로 들이받고 방패로 찍고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적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어서 다시는 도적하지 못하도록 할 수 있는 무기는 성경의 검입니다. 에베소서 6장 17절에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의 검이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함께 예배하는 여러분에게 우리를 찾아오는 수많은 영적인 도전앞에서 유일하면서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위에 굳게 서서 생명의 말씀으로 넉넉히 이기는 승리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둘째,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수해주는 선한 싸움의 기술은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선한 싸움의 무기라고 소개합니다. 딤전1: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을 가지라고 말하고 있고 믿음에 관하여 파선하였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파선이라는 말이 어떤 말입니까? 배가 부서지거나 침몰하는 것을 파선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은 하지만 진정한 믿음이 없기에 영적인 시험이 찾아왔을 때 넘어지는 모습을 항해하던 배가 산산조각 나서 물속에 갈아 앉는 파선의 모습을 비유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비유를 보면 믿음의 공동체를 배에 비유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교회는 어떤 배일까요? 유람선이나 크루즈에 비유하는 것이 좋을까요? 전투함에 비유하는 것이 좋을까요? 무엇이 맞을까요? 지금 주제가 영적 전쟁과 선한 싸움이니 유람선보다는 전투함이 맞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금 내가 타고 있는 배가 어떤 배인가를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영적 전쟁에서 믿음을 잃지 않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승리하기 위해 작전을 펼치고 있는 전투함에 승선해 있는 것입니다. 여유롭고 한가롭게 관광을 즐기는 유람선을 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사실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유람선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유람선으로 생각하기에 서비스를 문제 삼습니다. 왜 이렇게 서비스가 좋지 않냐? 불평을 하고 서비스가 마음에 안 들면 서비스가 좋은 교회로 옮깁니다. 그리고 교회를 이끌어 가는 목회자나 리더들을 유람선 안에서 쟁반을 들고 음식을 날라주고 편리를 제공해 주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우리가 타고 있는 배를 영적인 싸움터에 있는 전투함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유람선으로 생각하면 전투 준비를 못하고 있으니 악한 영이 쏜 포탄이 떨어지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침몰해 버리는 모습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전투함에 승선해 있음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전투함에서는 서비스가 좋지 않아도 밥이 잘 나오지 않아도 잠자리가 불편해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모든 관심과 초점에 그곳에 집중하게 됩니다. 목회자와 리더들은 쟁반을 든 사람이 아니라 승리할 수 있는 작전을 세우고 그 작전대로 사람들을 배치시키고 앞장서서 전쟁을 진두지휘하는 사람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유람선과 전투함 같은 배이지만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딤전1:20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라는 사람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믿음의 공동체에서 믿음에 대하여 파선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럼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기에 이런 평가를 받고 사탄에게 내어주었다는 무서운 심판의 말을 받게 되었을까요? 이 두 사람 가운데 후메내오라는 사람의 이름이 디모데후서에서 다시 한 번 언급됩니다. 딤후2:17~18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18절 말씀에 비추어 보았을 때 후메내오는 잘못된 교리를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만이지 부활이 있기는 무슨 부활이 있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역사적으로 믿지 못하고 더더욱 성도의 부활이란 허탄한 이야기다 그래서 부활이 없다고 생각한 후메내오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생활을 했을 것이고 이런 모습이 교회 안에 믿음 생활 잘하는 사람에게까지 낙심하게 하고 실족하게 한 것입니다. 성도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다못한 바울은 후메내오를 향하여 이전 개역한글판 성경에서는 “독한 창질의 섞어져감과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17절 말씀처럼 악성 종양과 같이 몸속에 있는 암덩어리와 같이 온 몸에 퍼져나가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암 덩어리를 끄집어내듯 이 후메내오를 교회 밖으로 추방하고 징계하여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제는 믿음에 관하여 파선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믿음을 헬라어로는 ‘피스토스’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한글 성경으로 번역할 때는 믿음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런데 영어성경에서는 피스토스는 믿음이라는 말이 3가지 정도 다른 표현으로 기록하였습니다. faith, belief, trust라는 말로 나옵니다. 우리 성경에는 모두 믿음이라고 나오는 단어가 영어 성경에서는 다른 형태의 단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어떤 분이 칼럼에서 이 부분에 대하여 소개하길 서양인들의 인식 체계 속에서는 같은 믿음이지만 조금씩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faith라는 말은 지식적인 체계로 믿음이란 무엇인가? 구원받는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 머릿속으로 인식되고 알아가는 믿음의 표현이라고 합니다. belief는 머릿속으로 이해된 믿음의 체계가 나의 내면의 동의를 통해 믿어지는 것, 마음속으로 믿어지는 것, 나는 어떤 사실을 믿는다고 할 때 belief를 씁니다. 그런가 하면 trust는 신뢰, 신탁이라는 말이 있듯이 마음으로 믿는 동기를 가지고 모든 것을 맡기는 것, 온전히 의지하는 것을 trust라고 합니다.
faith – 머리에서 이루어지는 것, belief – 가슴에서 이루어지는 것, trust – 손과 발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말로 표현하면 믿음의 지정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독교의 믿음을 말할 때 덮어놓고 믿으면 나중에 믿음이 생긴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런 차원의 믿음의 아니라 하나님의 원하시는 믿음이 무엇인지 분명히 깨닫게 되고 그 믿음을 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고백하고 그 고백과 함께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믿음의 지정의가 이루어져 그 믿음을 가지고 선한 싸움에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넷째,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수하는 선한 싸움의 기술은 양심으로 산한 싸움을 싸우라고 말합니다. 딤전1: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저는 설교 준비를 위해 본문을 정하고 처음 시작할 때는 양심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제 설교의 특징이 삼대지로 설교하는 것이라고 예언의 말씀과 믿음을 정하고 난 뒤 한 가지 더 필요한데 하다가 그냥 끼워넣기 식으로 들어온 것이 양심입니다. 주제가 선한 싸움, 영적 싸움이니까 말씀으로 싸우고 믿음으로 싸우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양심이 말씀과 믿음만큼 선한 싸움에 강조할 가치가 있을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묵항하고 말씀을 준비하면서 양심에 대한 내용이 점점 제 마음속에서 커지고 더 중요하다는 의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처음에는 말씀, 믿음, 양심, 말씀을 다 준비하고 보니 말씀, 믿음, 양심, 19절에서는 바울은 믿음과 착한 양심으로 동급으로 놓고 있는데 처음에는 그 이유는 몰랐는데 이제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워치만 니는 그의 책 ‘영에 속한 사람’에서 영적인 사람의 특징을 영적 교제, 영적 직관 그리고 선한 양심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영적 싸움을 만나게 되는 현장은 주로 어디입니까? 물론 주일날 우리가 주로 만나는 선한 싸움의 현장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자리입니다. 많은 경우가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친교와 교제를 나누는 곳에도 영적 싸움은 일어나지만 많은 경우가 우리의 6일 동안의 삶속에서 벌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말장난을 만들어 봤습니다. 신앙생활 vs 생활신앙.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겠지만 저는 신앙생활을 앞으로 생활신앙이라고 바꾸어서 불렀으면 좋겠습니다.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참 잘합니다. 기도도 열심히 하고 성경도 많이 보고 신령한 은사로 체험을 합니다. 그런데 생활 속에서 그 신앙이 발휘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6일 동안은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이 살고 때로는 좀 더 심하게 살다가 주일날 교회에 와서는 예배드리는 것으로 6일 동안의 삶을 무마하려는 신앙생활 그리고 이제 주일날 교외에 와서는 예배드렸으니 앞으로 6일 동안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면죄부를 받는 느낌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신앙생활은 좋지만 생활신앙은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의 말씀 한처럼 화인 맞은 양심이 되어서 감각이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화인을 맞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옛날에는 노예가 있었습니다. 주인이 노예를 자신의 소유라는 표시로 인두를 달구어 이마나 팔뚝이나 엉덩이 부분을 지집니다. 죽기 전에는 그 표시가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화인 맞은 부분은 감각이 없습니다. 차갑고 뜨거운 것 구분을 하지 못합니다. 만지는 것인지 만지지 않는 것인지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어디에 화인을 맞았습니까? 양심에 화인을 맞았습니다. 마귀가 너는 내 것이라고 양심에 화인을 친 것입니다. 그러니 거짓말을 하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미안해하지 않습니다. 남의 가정에 큰 어려움을 주고도 즐거워합니다. 이웃을 헤어 나오지 못할 구렁텅이에 집어넣고도 보란 듯이 잘 살아갑니다. 양심에 화인을 맞아서 그런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선한 싸움인 영적전쟁에서 이기려면 세 가지로 무장을 해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두 번째는 강한 믿음이고 세 번째는 선한 양심입니다. 아무쪼록 말씀 충만, 믿음 충만, 양심 충만해서 선한 싸움의 승리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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