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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카데미부동산경매 원문보기 글쓴이: 파도소리
이슬람교란 ?
종교방에 개신교와 불교 그리고 무신론자/무교가 대세인지라, 세계 3대 종교 중의 하나인, 이슬람교에 대해서도 잠시 알아봅시다~
ㅋㅋ 다음은 책-
'하룻밤에 읽는 중동사' 와 sbs 다쿠멘터리 '신의 길, 인간의 길' 2편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이슬람교란 ?
1. 이슬람교는 610년에 발생하였다. / 현재 약 13억 인구가 신자임.
2. 이슬람교의 신(알라 신)도, 결국엔 유대교-기독교의 하느님과 같은 분이다.
3. 이슬람교는 유대교의 구약과 기독교의 신약과 이슬람 경전인 꾸란을 신앙의 대상으로 한다.
4. 이슬람교는 유대교와 기독교 경전과 예언자(모세,예수)를 인정하지만, 가장 새로운 신의 계시를 전하는 분은 예언자 무함마드로서, 무함마드가최후의 그리고 최고의 예언자로 믿는다.
5. 이슬람교는 예수도 무함마드와 같은 예언자-메시아로 보지, 절대로 신의 아들로 보지 않는다.
6. 이슬람교(꾸란)에서는,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지도 않았다고 본다.
7. 이슬람교에서는 예수를 신으로 보지 않는다. 즉, 모세가 믿었고, 예수가 믿었던 원래 초창기의 그 신-하느님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이슬람교이다.
8. 무함마드는 살아생전에, 자기를 믿지(우상화) 하지 말것을 강조한다. 즉, 제2의 예수처럼 자신이 우상화되는 것을 철저히 경계했다.
9. 무함마드는, 일자 무식한 사람이었으나 신의 계시로 꾸란을 읽어 줄 수 있었다.
10. 무함마드는 유복자(태어날 때, 아버지가 죽은 아이)로 태어났고, 할아버지와 삼촌에 의해 키워졌다.
11. 무함마드는, 메카의 토호/귀족 집안-가문의 일원이었으나, 어릴 때 부모를 잃어서 우울한 초년기를 보냈다. / 그는 12세부터 삼촌과 메카-다마수커스를 잇은 무역상으로 활동한다. 이때 기독교 중심지 다마수커스에서 유대교-기독교에 대해 접한다.
12. 무함마드는 25세 때, 40세인 과부 부자인 여인과 결혼한다.
13. 무함마드는 40세때 이슬람교를 창시한다.14. 유일신을 믿고, 선행을 쌓으면 최후의 심판일에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생각은 유대교나 기독교와 같다.
15. 이슬람교는 특별한 종교적 수행을 중시하지 않고, 일상생활과 신앙생활을 결합해 놓은 전형적인 '재가(在家)'신앙이다. 그래서 공식적으로 성직자는 없다.
16. 재가 신앙이기 때문에, 종교상의 지도자가 일상생활의 지도자가 된다.
17. 터키어를 사용하는 터키와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이란은 아랍의 세계가 아니다.
18. 아랍인은 전 이슬람의 20% 정도에 불가하다. / 아랍인이란, 아라비아어를 말하는 사람을 일컷는다.
19. 이슬람 신도가 가장 많은 나라는 인도네시아(2억)와 인도(2억)이다.
20, '한 손에 꾸란, 한 손엔 칼'이라는 오해를 부르는 말이 있어서 이슬람은 타 종교에 관용적이지 않다는 오해를 받고 있다. 하지만 이슬람교에 친근성이 있는 기독교와 유대교는 지즈야(인두세)를 지불하면 자신의 신앙을 지킬 수 있었다.
21. 이슬람 세계에서 사람 이름을 지을 때, 예수는 '이사'이고, 솔로몬은 '술레이만'이고 아브라함은 '이브라힘'이고 이스마엘은 '이스마일'이다.
22, 아랍인의 본명은 매우 길어서 본인,부친,조부의 이름이 죽 이어지고, 네 번째 자리에 부족명, 출신지, 직업 등이 온다.
23. 이슬람교는 1년을 12번의 달의 변화로 생각하는 완전한 태음력을 사용하여, 1년은 354일이 된다.
24. 이슬람교는 하루에 다섯 차례의 예배가 의무로 규정되어 있다. 시간은 일몰직후, 밤, 새벽(해 뜨기 전), 낮, 오후이다.
25. 5차례의 예배에 걸리는 시간은 전부 합쳐서 30분이 채 안된다.
26. 유대교에서는 토요일을, 기독교에서는 일요일을 안식일로 정했지만, 이슬람에서는 금요일이 안식일이다.
27. 이슬람력의 9월은 '라마단'으로 불리는 단식월로서, 이때는 일출부터 일몰까지 오랜시간동안 물과 음식, 담배 따위가 일체 허용되지 않으며, 성관계, 논쟁 따위도 금지된다. 28. 라마단 때, 식사는 동트기 전과 일몰 후에 먹는데, 실제로는 이때의 음식 소비량이 평소의 2~3
배에 달한다고 한다.
29. 이슬람교는, 민족/노약/빈부에 관계없이 알라(신-하느님)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함을 확인한다.
30. 꾸란은 읽어야 할 것, 독송해야 할 것이란 뜻으로 , 예언자 무함마드의 입을 빌려 23년간 알라가 일인칭으로 말한 것을 제3대 칼리프 우스만 시절(650년경)에 모아 놓은 것이다.
31. 이슬람교는,음주, 돼지고기나 죽은 동물의 고기를 먹는 것과 이자를 받는 것, 월경 중인 여자와 정을 통하는 것 등을 금지하는데, 돼지고기를 피하는 계율은 유대교에도 있는 중동지방의 일반적인 관습이었다. / 물론, 살인, 간통, 중상 등은 당연히 금지다.
32. 금주는 사우디,피키스탄, 리비아를 제외하면 거의 잘 지켜지지 않는다. 터키는 금주 규정을, 과음하지 말라라는 의미로 해석하여 공공연하게 술을 마시고 있다. / 터키, 시리아, 이집트 등에서는 수퍼마켓에서 와인을 살 수도 있다. 그러나 라마단 기간이 되면 이야기는 달라져서, 이 때는 철저히 금주가 되고 있다.
33. 이슬람 남성은 수염을 기르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중동지방 고대 관습으로, 특히 예언자는 턱수염을 기르는 관례가 있어 무함마드도 예수도 턱수염을 길렀다. / 고대 그리스에서도 남성은 모두 수염을 길렀다.
34. 이슬람 사회에서는 주권이 알라에게 있다고 생각할 뿐 주권재민의 사고 방식은 없다. 민주주의는 이슬람 세계에서는 어디까지나 이질적인 발상일 뿐이다.
35. '알라'의 어원은 아라비아어로 '신'을 뜻하는 '이라후'에 정관사 'al'이 붙은 것으로 영어의 'the God'에 해당한다.
36. 유대교나 기독교는 비록 오류는 있을지언정 같은 신의 계보에 속하는 동료로 보았으며, 조로아스터교도나 불교도 같은 카피르(불신자)와는 명백히 구별하였다.
37. 이슬람교는 6신5행의 의무가 있는데, 6신은(6가지 믿어야 할 것)
1. 유일신 알라
2. 천사
3. 계전(신의 계시를 적은 책, 즉 꾸란)
4. 예언자 5. 내세 6. 천명 이고,
5행은(5가지 실천해야 하는 것)
1. 신앙고백
2. 예배
3. 희사
4. 단식
5. 순례이다.
38. 꾸란에는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죽여도 좋다고 씌여있다.
39. 아브라함은 이슬람교에서도 조상으로 여긴다. 즉 아브라함은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의 공통 조상이다.
40. 그러나 이슬람교에서는 아브라함의 첫째 아들인 이스마엘(하녀에서 태어난 아들)을 장자로 보고 있으며, 유대교-기독교에서는 둘째 아들이지만 본처의 아들인 이삭을 적자(정통)로 보고 있다. / 이 당시, 아랍세계는 일부다처제였다. 그러므로 먼저 태어나는 아이가 장자로 본다. 결론, 이슬람교는 유대교와 기독교를 이어서 만든 종교이고, 유대교와 기독교를 모두 인정하지만, 이슬람교의 예언자 무함마드가 최후/최고의 예언자로 생각하고 있다.또한 이슬람교의 알라 신도 영어로 하면 the God를 의미하고, 이슬람교의 알라신이 곧 하느님이고 이것은 곧 유대교와 기독교의 하느님과 같은 대상이다.기독교와 큰 차이는, 예수를 신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예수나 무함마드나 예언자-메시아로 동격으로 보고 있으며, 또한 예수의 십자가 죽음도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결국, 이슬람교는 어쩌면, 기독교에서 이단으로 배척당한 네스토리우스파(중국의 경교)나 아리우스파가 중동 사막에서 부활한 것으로 보면 어떨가 ? ㅋㅋ / 참고로 기독교 네스토리우스파와 아리우스파는 예수를 신으로 보지 않거나, 인성이 더 많은 것으로 보는 파다. 이 파들는 예수를 오직 신성한 존재로 보는 아타라시우스파(삼위일체설)에 의해 이단으로 몰려 죽거나 배척당하게 된다.맹목적인 배타적인 종교가 모든 악의 근원입니다
과학시대에 종교는 보조적으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ㅋㅋ 참고 도서 : 시대정신 , 예수는 신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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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슬람교란?
- 7세기에 마호메트가 창시한 세계 3대 종교의 하나로 북아프리카에서 동 남아시아에까지 널리 포교된 종교로, 신도 수는 약 5억에 달함.
- 이슬람교는 마호메트가 유대교와 크리스트교의 영향을 받아서 창시한 교
◇ “이슬람”의 뜻은?
- 마호메트가 득도할 때 가브리엘 천사가 “마호메트야 일어나 세상에 나아가 알려라! 진실한신, 오직 하나의 신만을 믿으라....이는 하늘의 뜻 이니라” 라는 명을 받을 때, “이슬람(복종하겠습니다)” 라고 외치고서 이슬람교를 선포하였음.
- “마호메트교”라는 말은 “크리스트교”와는 다름.
마호메트는 어디까지나 유일신 알라의 가르침을 전하는 전령, 예언자임을 자처할 뿐이므로 “마호메트교”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표현임.
◇ 이슬람의 5계명
1.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다.
2. 하루에 다섯 번 메카를 향하여 절하라.
3. 가난한 자에게 돈을 주어라.
4. 성스러운 달인 라마단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마라.
5. 일생에 한번은 메카를 순례하라.
◇ 이슬람교도가 따라야할 규범.
1. 술 마시지 말라.
2. 돼지고기를 비롯하여 두 갈래 발을 가진 짐승의 고기는 먹지 말라.
3. 아내는 넷까지 거느려도 된다.
4. 도둑은 손을 잘라라.
5. 알라를 모독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라.
6.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
7. 이교도는 용서 말고 냉엄히 처단하라.
8. 이교도와 싸우는 전쟁은 성스러운 전쟁이요,
이 전쟁에서 싸우는 자 에게는 천당이 약속되어 있다.
* 이상의 5계명과 8규범이 이슬람 국가의 통치적 수단으로 이용되고 이러한 종교적 문화에 젖어서 모든 생활이 비판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으므로, 앞으로 회교권에 관심이 있거나 직무상 또는 개인적으로 여행을 할 때라도 종교적 배경이 짙게 깔려있는 문화를 조금이나마 이해를 한다면 이슬람 세계에서 생활하는데 도움이 되겠기에 본인의 경험을 기술함.
1.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다.
2. 하루에 다섯 번 메카를 향하여 절하라.
Sembayang(슴바양)이라하며
05:00 - 06:00 Subuh
12:30 - 15:00 Lohor
13:00 - 15:00 Ashar
18:30 - 19:00 Maghrib
19:30 - 05:00 Isya
* 이상과 같은 이름으로 하루에 다섯 차례 기도를 하는데 이들의 기도 는 약 10-15분 소요된다. 이러한 행위는 Wajib(의무)라고 하여 당연히 매일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교도가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 하거나 비난하면 생명을 잃을 수가 있기 때문에 강조하는 바이다.
특히 기업가들이 Indonesia나 이슬람권 국가에 진출하여 종업원들이 기도할 수 있는 사원을 건립하지 않고 또는 업무 중에 바쁘다는 핑계로 짜증을 부리 거나, 싫어하는 행위는 절대 금물임.
3. 가난한 자에게 돈을 주어라.
* 이슬람교의 이 부분이 교도들의 행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왜곡된 부분이 많은 것 같음.
* 정통 이슬람국가에서는 규범에 명시됐듯이 “도둑은 손을 잘라라” 했는데, 이 세 번째 계명이 변질되어 Indonesia에는 좀도둑이 많음. 가난한 자에게 돈이나 선물을 주는 것은 주는 사람이 신으로부터 칭찬받을 짓(?)을 했으므로 도움을 받는 사람은 감사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모든 국민들의 정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이 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음.
따라서 돈을 빌려주면 되돌려 받을 수가 없고, 가정부나 종업원 들이 주인집에 남아도는 물건이라고 판단되어 갖고 가는 것은 도둑이 아니라는 생각이기 때문에 마찰이 자주 일어남.
4. 성스러운 달인 라마단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마라.
* “라마단”이라 하여 해가 떠있는 동안(엣 날에는 시계가 없었으므로 손으로 실을 들어 올려 육안으로 식별이 가능한 때를 기준으로 하였다 함) 모든 음식을 먹지 않는데, 예외적으로 환자나 여성들의 경우 생리기간(불결하다고 간주함)에는 금식 의무를 지키지 않아도 됨.
* 이때 이방인들이 주의해야할 점은 음식을 먹지 못하는 사람들 앞에서 예의를 갖추어야 할 필요가 있음. 그리고 이 기간에는 도시지역을 벗어나 여행할 때는 영업 하는 식당이 없다는 것을 대비해야 함.
5. 일생에 한번은 메카를 순례하라.
* 이러한 종교적 의무감 때문에 일반인들의 소득 수준에 비하면 천문학적인 돈을 들이고서 “메카”에 다녀오는데, 성지를 순례한 사람은 Haji라 하여 모든 이들의 부러움은 물론 거의 성인이나 또는 믿음이 강한 자로 취급받아 존경을 받음.
6. 술 마시지 말라.
* 마호메트의 포교활동이 메카 지배층의 박해를 받아 622년 7월에 메디나라는 도시로 피신함.
* 625년에 3,000명의 메카 군대가 메디나를 공격하였을 때 살아남은 마호메트는, 이러한 전투 경험에서 훈련의 중요성을 깨닫고 강력한 군대 양성과 군기확립의 필요성을 느끼고 금주령을 내려 627년에 메카군대가 다시 쳐들어 왔을 때 잘 막아냈고, 630년에 마호메트는 메카를 점령하여 알라신 외의 잡신을 모두 배척하고 이슬람교로 전 아라비아를 평정하였음.
* 이슬람교는 이와 같은 전쟁을 치루면서 강력한 군대의 힘과 엄격한 통제를 위한 금주 명령이 아직도 강력한 이슬람교의 힘으로 작용 하는 것 같음.
* 이슬람교도들은 이를 특별히 「헤지라」 라로 불러 기념하여 이슬람력의 원년으로 삼 고 있음(보통 양력 1월경임).
7. 돼지고기를 비롯하여 두 갈래 발을 가진 짐승의 고기는 먹지 말라.
* 돼지 외의 두 갈래 발을 가진 짐승의 고기는 먹는 것 같음. 화교들은 대부분 불교나 기독교도임으로 만약 돼지고기를 먹고 싶으면 그들 한데 물으면 구할 수가 있음.
8. 아내는 넷까지 거느려도 된다.
* 이슬람교 국가에서는 부인이 있는 유부남이 처녀를 부인으로 맞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관점에서 그들을 폄하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됨. 실제로 부인을 많이 거느린 사람은 많지 않으며, 경제적 여건이나 개인의식이 깨어나면서 핵가족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것 같음. 특히 공무원은 축첩을 할 수는 없음.
9. 도둑은 손을 잘라라.
* 종교적 배경 때문인지 도둑이라는 개념이 에매한 경우도 많음. 가진 자의 것을 갖는 것이 도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우와, 가난해서 도둑질을 한다면 많은 과일가게가 저녁에 덮게만 덮어놓고 귀가해도 도난당하지 않는다는 점은 좋은 예라고 생각되나, 외국인에게는 이중적인 태도로 접하기 때문에 주의해야 함.
10. 알라를 모독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라.
* 이슬람교 사회에서 대화중에 종교적 갈등이 있으면 매우 위험하므로 주의를 요함. 대화 중에 “알라”를 “모욕한자”라고 인식되면 즉시 위험에 처해질 수가 있음으로 특별히 주의를 요함
11.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
12. 이교도는 용서 말고 냉엄히 처단하라.
13. 이교도와 싸우는 전쟁은 성스러운 전쟁이요, 이 전쟁에서 싸우는 자 에게는 천당이 약속되어 있다.
* 마호메트가 메카를 점령하고 이어 아라비아를 평정하며 타종교 특히 크리스트교를 적으로 간주하여 성전을 선포하고, 무력적으로 포교했다는 과거와는 달리 Indonesia에서는 불교, 힌두교 기독교를 인정하고 있으나, ID카드(주민등록증)에 종교를 기록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탄압(?)이 있으며, 아직도 이슬람교도가 지배적인 지역은 종교적 소요가 없으나, Ambon과 같이 기독교도가 70%정도 되는 곳은 이교도와의 성전으로 생각하고 극한투쟁을 벌이고 있다.
◇ 안식일은 애 금요일일까?
유대교는 여호아께서 천지창조를 끝낸 날이라 하여 매주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고, 크리스트교는 예수의 부활에 뜻을 두어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는데, 이슬람교는 그날들을 피하여 금요일을 안식일로 정하였을 뿐 다른 의미는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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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교 [Islam]
7세기 초 아라비아의 예언자 무함마드[Muhammad, 570.4.22~632.6.8] 가 완성시킨 종교.
그리스도교·불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의 하나이다. 全知全能한 알라(Allah)의 가르침이 大天使 가브리엘을 통하여 무함마드에게 啓示되었으며, 유대교·그리스도교 등 유대계의 여러 종교를 완성시킨 유일신 종교임을 자처한다. 유럽에서는 창시자의 이름을 따서 무함마드교라고 하며, 중국에서는 위구르족[回紇族]을 통하여 전래되었으므로 回回敎 또는 淸眞敎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이슬람교 또는 回敎로 불린다.
⑴ 알라와 《코란:Koran](쿠란)》
알라는 다신교 시대부터 메카에서 최고신으로 숭배되어 왔는데, 무함마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모든 신을 부정하고 오직 알라만을 유일신으로 내세웠다. 알라는 만물의 창조주이며, 이와 동등하거나 비교될 존재는 없다. 모든 피창조물과는 엄격한 거리가 있으면서도 사람들의 頸動脈보다도 더욱 가까이 있다. 알라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주지만 아무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마음은 어디까지나 관대하고 자애에 넘쳐 잘 용서하고, 잘 들어 주고, 잘 보아 준다. 알라는 진리이며 빛이며 “동도 서도 알라의 것, 어느 쪽을 향해도 알라의 얼굴은 거기에 계신다. 골고루 존재하며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코란 2:11)고 한다.
알라의 계시를 모은 것을 《코란》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슬람교의 經典으로,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가 610년 아라비아 반도 메카 근교의 히라(Hira) 산 동굴에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처음으로 유일신 알라의 계시를 받은 뒤부터 632년 죽을 때까지 받은 계시를 집대성한 것으로서, 그가 죽은 뒤 신도들이 수집·정리한 것이다. 현재의 《코란》은 650년경, 제3대 칼리프인 오스만의 명을 받들어 만들어진 표준본이다. 이 경전은 이슬람의 敎義·제도, 무함마드의 생애와 사상을 알 수 있는 근본 문헌이며, 무슬림들은 이것을 독송할 때마다 法悅의 경지에 빠져 감격의 눈물을 흘릴 만큼 힘과 미를 갖춘 것이지만 그 진가는 아랍어로 된 원전에 따르지 않고는 좀체로 이해하기 힘들다.
《코란》은 무함마드에게 계시된 바를 해설이 없이 모은 것이므로, 이것을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후세 학자들이 쓴 많은 注釋書에 의존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이슬람의 法學·神學의 최고 근원은 역시 《코란》에 있다.
⑵ 이슬람의 근본신조
이 가르침의 정식 명칭은 ‘알 알이슬람’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유일 절대의 알라의 가르침에 몸을 맡긴다”는 말로서 즉 ‘歸依’를 뜻한다. 그 가르침은 모두 명확한 아랍어로 계시되었고 무함마드도 이것을 아랍어로 전달하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알라 이외에 신은 없다”는 것이 이슬람교의 신조이며, 후에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자(라수르)이니라”가 추가되었다. 이 聖句(카리마)를 외는 일은 신도의 중요한 의무의 하나로 되어 있다.
알라의 가르침을 모은 《코란》에는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에 관하여 “믿음이란, 그대들의 얼굴을 동으로 또는 서로 돌리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란, 알라와, 최후의 날(최후 심판의 날)과, 천사들과, 여러 經典과, 예언자들을 믿는 사람이다” 라고 말하고 있으며, 이 모든 사항을 믿는 것을 ‘이만’이라고 한다.
또 오로지 알라만을 믿고 그 외에 아무것도 숭배하지 않으며, 禮拜·喜捨·齋戒 등의 勤行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만이 알라에 귀의하는 길인데, 이것을 ‘이슬람’이라고 칭한다. ‘이만’을 지닌 사람을 ‘무민’, 이슬람에 입교한 사람을 ‘무슬림’이라고 부르므로, 이것들 모두가 이슬람교 신자의 호칭이다.
⑶ 이슬람 신앙의 요소
이슬람 신앙을 구성하는 요소는 다음의 셋으로 분석된다.
첫째는 ‘知’인데, 이것은 알라의 계시를 잘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言’인데, 마음으로 알고 또한 믿는 바를 말로 표현하는 일이다.
셋째는 ‘行’인데, 이슬람교도로서의 의무(즉 5주 등)를 열심히 실행하는 일이다.
⑷ 五柱
무슬림에게는 실행해야 할 중요한 의무 다섯 가지가 있다. 이것을 오주(아르칸 알이슬람:Pillars of Islam)라 하며, 이들 의무를 다함으로써 알라에게 봉사하는 일을 ‘이바다트(奉化 또는 勤行)’라고 한다. 《코란》에서는 喜捨와 斷食을 중요한 봉사로 들고 있으나, 후세에 이르러 다음의 다섯 가지를 가리키는 것이 상례로 되었다.
① 證言 또는 고백(샤하다):
“나는 알라 이외에 신이 없음을 증언합니다. 또 나는 무함마드가 알라의 사자임을 증명합니다”를 입으로 왼다. 신도는 어릴 때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증언을 고백하게 되어 있다.
② 禮拜(살라트):
일정한 시각에 규정된 형식에 따라 행하는 예배를 말하며, 개인적으로 수시로 행하는 기도는 ‘두아’라고 부른다. 예배는 하루에 다섯 번을 일출·정오·하오·일몰·심야에 하며, 특히 금요일 정오에는 모스크에서 집단예배를 행한다. 예배를 드릴 때는 반드시 메카가 있는 쪽을 향하고 행한다.
③ 喜捨(자카트) 또는 天課:
국가재정의 근간을 이루며, 비이슬람 국가에서는 선교기반이 이루어지는 데 필요불가결한 무슬림의 의무중의 하나이다.
④ 斷食(샤움):
성년인 무슬림은 매년 라마단 月間(제9월) 晝間에 음식·흡연·향료·성교를 금하고, 과격한 말을 삼가며 가능한 한 《코란》을 독송한다. 단 음식은 흰실과 검은실의 구별이 안 될 만큼 어두워진 야간에는 허용된다. 라마단 월이 끝난 다음 새 달이 하늘에 떠오르면 단식완료의 축제가 시작되는데, 화려한 의상을 입은 군중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서로 축하하는 풍습이 있다.
⑤ 巡禮(하주):
모든 무슬림은 매년 하주의 달(이슬람력 제12월)에 카바 신전 부근 또는 메카 북동쪽 교외에서 열리는 大祭에 적어도 일생에 한 번은 참가할 의무가 있다. 능력이 없는 자는 하주를 못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 해에 따라 일정하지는 않으나 현재도 매년 약 20만 명에 달하는 신도가 하주에 참가하고 있다. 메카 다음가는 성지는 메디나에 있는 무함마드 묘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 예루살렘의 여러 聖蹟 등이 있으며, 또 시아派의 무슬림은 알리의 廟가 있는 나자프, 알리의 아들 후세인의 묘가 있는 카르발라, 이란 동부의 마슈하드 등을 순례하는 사람이 많다.
⑸ 교도의 일상생활
이슬람 세계는 많은 이민족을 포함하고 있어 그들은 각각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으므로 그 사회의 요소는 지극히 복잡하고 다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대한 지역에 분포하는 많은 무슬림은 하나의 형으로 통일되어 공통의 생활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것은 샤리아(이슬람법)로써 통제되어 있기 때문이며, 샤리아는 《코란》과 《하디스 Hadith》(무함마드와 그의 추종자들의 전설에 관한 서적에 사용되는 명칭)에 입각하여 제정된 이슬람법이다. 무릇, 무슬림된 자는 출생에서 사망까지 이 샤리아에 따라 생활하도록 요구된다.
인간의 행위는 5가지로 크게 나누어지는데,
① 반드시 행해야 하며 이것을 하면 보상을 받고 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 것,
② 可賞할 행위로, 이것을 행하면 보상받으나 행하지 않아도 벌을 받지 않는 것,
③ 허용된 행위로, 이것은 행하여도 보상도 없고 벌도 받지 않는 것,
④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이것은 행하여도 벌을 받지 않지만 그래도 행하지 않는 편이 좋은 것,
⑤ 금지된 것으로 이것을 행하면 알라의 벌을 받는 것이다(하람, Haram:이슬람법 용어). 예를 들어 돼지고기를 먹거나 음주하거나 하는 일은 하람 ⑤에 해당한다. 그러나 하람에 대하여는 시대와 지방에 따라 의견의 차이가 있어 약간은 허용되는 경우도 있다.
중세 이래 모스크는 교도의 생활중심이 되어 왔으나 11세기 투르크가 각지에서 지배권을 장악한 뒤부터는 오로지 예배장소로만 되고, 그 밖의 기능은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스크를 생활의 중심으로 삼고, 한편으로는 샤리아에 따라 규정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이슬람교도의 일상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메카(Mecca): 사우디아라비아 헤자즈 지방에 있는 도시.
아랍어로는 마카(Makkah)라고 한다. 이슬람교의 교조 마호메트의 출생지로 알려져 있으며, 이 나라의 종교·행정\·상업의 중심지이다. 헤자즈 지방의 홍해 연안에서 100km 떨어진, 민둥산이 두 줄로 늘어선 계곡에 있다. 아득한 옛날부터 인도양과 지중해 연안 및 메소포타미아와 홍해 연안으로 통하는 통상로로 발달하였으며, 2세기 때의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책에도 마코라바(Macoraba)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대부터 성지로서 순례자가 많이 모이는 종교도시이기도 하다. 전설에 의하면 아담과 이브가 만년에 살았던 곳이라 하며, 아브라함이 아들 이스마엘과 그의 어머니 하갈을 살게 한 곳이라고도 한다. 5세기 말 무렵에 쿠라이시족(族)이 장악하였으며, 570년경에 그 지파(支派)인 하심가(家)에서 마호메트가 태어나 이슬람교를 창도하였다.
계곡의 가장 낮은 곳에는 잠잠의 우물과 카바 신전이 있다. 카바 신전은 아브라함이 건립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632년 마호메트가 교도군(敎徒軍)을 이끌고 메카를 정복하여 알라의 신전으로 바꾸었으며, 그때부터 메카는 이슬람 세계의 으뜸가는 성지가 되었다.
메카를 중심으로 지름 약 100km의 지역이 하람(성역)이며, 7억이 넘는 전세계의 이슬람교도는 매일 5회씩 이 방향을 향하여 예배한다. 메카 순례는 이슬람교도의 중요한 의무 중의 하나이며, 해마다 순례의 달(12월)에는 약 250만 명의 순례자가 모여든다. 광장의 중앙에는 높이 12m의 흑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성묘(聖廟)가 있다. 이슬람교도가 아니면 출입을 못하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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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Islam)교란?
이슬람은 7세기에 아랍의 예언자 마호메트가 창시한 엄격한 종교의례를 행하는 유일신 종교다. 이 종교 안에서 여러 종파와 종교운동이 일어났고 이슬람 세계 내에서도 지역마다 문화적 · 종교적으로 큰 편차를 보이면서도 모든 신자는 공통된 신앙에 단일 공동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창시자 마호메트는 570년 아라비아 반도 메카에서 쿠라이시 부족의 하심가(家)에서 유복자로 태어나 6세 때 어머니마저 죽었다. 조부와 숙부에게 양육되다가 한 유목민의 부인에게 양자로 보내져 가난한 목동으로 소년시절을 보냈다. 10대 후반에 메카 상인들이 파견하는 대상을 따라 다니다가 하디자의 대상이 된다. 주인 하디자는 40세의 과부로써 자기 집에서 충성스럽게 일하는 25세의 마호메트와 결혼하였다.(후일 마호메트는 이슬람 교리에 일부다처 제도를 만들어 젊은 여자들과 결혼을 한다.)
610년경부터 매년 일정 기간 동안 메카 교외 있는 히라 산에서 명상과 기도를 하던 마호메트는 천사 가브니엘로부터 신의 계시를 받았다며 613년부터 사람들을 가르쳤으며 그의 사후에 그의 제자들이 그의 교훈들을 모아 편집한 것을 코란이라 하며 이슬람교의 최고 경전이다. 코란의 내용은 신구약 성경의 교훈들이 대부분이고 이란의 조러아스터, 인도의 힌두교 교훈까지 들어있다.
마호메트는 처음에 가족과 소수의 친한 동료들에게만 설교를 했으나 대중을 상대로 전도하면서 메카 시민의 반대가 시작 되었다. 아라비아 각처로부터 순례자들이 모이는 카바 신전은 메카 시민에게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므로 부유한 상인들의 평의회가 메카를 지배하였다. 마호메트가 상인들을 비난하자 메카 상인들이 마호메트를 박해하였다. 615년 박해를 받는 이슬람 신자들을 마호메트가 기독교 국가인 에티오피아로 피난시켜놓고, 피난처를 찾다가 메디나 사람들의 도움으로 메디나에 자리를 잡았다. 메카에 있던 이슬람교도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마호메트가 있는 메디나로 이주하여, 유대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유대교처럼 예배 때 예루살렘을 향하는 것을 비롯해 많은 유대교 의식을 이슬람교에 받아들였으나 유대교에서 그를 예언자로 인정하지 않으므로 관계가 험악해져 예배 때 예루살렘을 향하는 방향을 메카의 카바 신전으로 바꿨다. 그와 동시에 이슬람교는 메카에 카바 신전을 아브라함이 건립했다고 주장하며 유대교나 그리스도교보다 훨씬 오래된 일신교라고 주장하였지만 모든 종교 의식은 유대교를 모방하고, 유대교와 기독교, 인도의 힌두교와 이란의 조러아스터 등 여러 종교를 혼합한 혼합종교다.
맨몸으로 메카를 탈출한 이주자들의 생계를 위하여 624년 봄 메카로 오는 대상(隊商)에게 바드르에서 약탈을 하였다. 627년 봄 복수에 나선 메카군의 공격을 미리 파놓은 함정에 빠뜨려 대파 하고 서로 10년간 서로 침략하지 않고 대등하게 왕래하는 후다이비야 협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마호메트는 이 협약을 지키지 않고 3년 째 되는 630년 1월 메카를 진격하여 모든 주민은 강재로 이슬람교에 개종시키고 다신교의 신전인 카바를 이슬람교의 최고 신전으로 만들어 아브라함이 건축했다고 허위 주장을 하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마호메트는 火賊이다. 유대교와 기독교를 일신교인 이슬람과 신앙 본질의 동일성을 강조하던 마호메트가 아라비아 반도 메카를 신앙의 중심으로 삼고 나서부터는 점차 유대교와 기독교에 대하여 다른 종교라는 것을 명백히 하고 유대교인들의 취락지인 카이바르를 정복하고 기독교와도 충돌하기 시작하였다. 630~631년 아라비아 반도 각처에 사는 여러 부족들이 사절을 메디나로 보냈으나 오히려 마호메트는 군사원정으로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시켜나갔다. 그리고 혈연에 의한 인간의 결합을 종교에 의한 결속으로 대체시키고는 多神敎를 금지하고 이슬람교도의 평등원칙을 주장하며 〈코란〉 율법으로 지배하였다.
이슬람의 신학 칼람(대학)은 유대교, 기독교, 흰두교, 불교, 마니교, 조르아스터교, 등 다양한 종교의 영향을 받았고 가장 중요한 의식들은 유대교를 따르며 부활과 심판은 기독교 교리에 가깝다. 이슬람 세력이 페르시아와 인도 및 아프리카까지 넓히고 유럽으로 진격한 11세기에 와서 이들의 위협을 느낀 비잔틴 제국의 알렉스 황제가 로마교황 우르반 2세의 도움을 청하여 십자군 전쟁이 일으켰다. 이슬람교가 자기들이 한 짓은 생각하지 않고 이 십자군 전쟁으로 유럽과 기독교를 미워하며 증오하고 있다.
이슬람은 마호메트가 유대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를 혼합하여 만든 종교이며 그 추종자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대상들을 약탈하는 화적질로 세력을 키워 각처로 다니며 재산을 약탈하던 도적의 집단이다. 지금도 이슬람 국가들은 종교가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어 테러를 일삼는 극단적인 집단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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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교에 대해서
1.이슬람이란 무엇인가?
이슬람(Isl m)은 신에 복종하는 것을 뜻하는 아랍어로 신에 복종하다 라는 뜻의 동사 이슬라마의 명사형이다. 신에 복종하는 사람 , 즉 이슬람교도는 무슬림 이라고 부른다. 무함마드는 처음엔 그의 종교에 특별한 이름을 붙이지 않았으나, 유태교도와의 논쟁과정에서 그들의 종교와 구별하기 위해 이슬람 이라는 명칭을 채용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2.이슬람교란 무엇인가?
7세기초에 무함마드가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에서 唯一神알라의 예언자로서 창시한 종교의 하나로 유태교·그리스도교의 흐름을 탄 一神敎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무함마드교·회교 또는 회회교라고도 하고 중국에서는 淸眞敎·피피교라고도 했지만, 요즘 이런 호칭은 별로 쓰이지 않는다. 이슬람교의 經典인 쿠란 에는 [나(신)는 이슬람을 그대들을 위한 종교로서 승인했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원래 이슬람이란 아랍語로 [신의 의지와 명령에 절대귀의, 복종하는 것]을 뜻한다. 또한 이슬람 교도를 나타내는 [무슬림]은 원래 [귀의한 사람]을 뜻한다. 이슬람교는 불교·그리스도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로서, 최근의 국제연합 통계조사에 따르면 신도수는 세계 전인구의 25%인 약 13억 정도인 것으로 밝혀졌다.
3.기원과 배경
⑴자힐리야(J hil ya)시대
자힐리야란 이슬람 이전의 [無知의 시대], 또는 그 시대의 생활양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넓은 뜻으로는 고대 南아라비아의 여러 왕국이나 北아라비아의 나바타이 왕국·팔미라 왕국시대까지도 포함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이슬람 성립 전 1세기 남짓한 시대를 가리킨다. 이 시대는 바로 아랍 부족 사이의 투쟁기이다. 사람들은 자기 부족을 위해서 싸우고 그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이시대에 후세까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詩가 생겨났고, 카힌이라고 불리는 샤먼이 接神(접신)하여 사람들에게 信託(신탁)을 전하였다. 사막에서는 진(Jinn: 靈鬼)이 사람에게 위해를 끼친다고 하여 공포의 대상이 되었고, 돌을 聖石(성석)·神像(신상)이라고 하여 숭배하였다. 당시 아랍권의 신앙형태는 多神敎였고, 애니미즘적 성격이 강한 원시적인 것이었다. 이 무렵을 전후한 70년경의 예루살렘 성전파괴 이후 유태교의 아랍 침투가 시작되었다. 홍해 연안의 통상로를 따라서 남하한 유태교도는 야스리브(후의 메디나)와 예멘에 정착하게 되었다. 또한 그리스도교도 북부 변경에 단성론파(單性論派)와 네스토리우스파가 침투하였고, 히자즈 지방이나 남부의 나주란에도 이미 많은 그리스도교도들이 정착하고 있었다. 쿠라이슈族의 일원으로서 무함마드가 태어난 것은 바로 이 시대였다. 전승(傳承)에 따르면 南아라비아의 힘야르 왕국을 멸망시킨 아비시니아(이디오피아)의 장군 아브라하가 코끼리의 대군을 이끌고 메카를 공격한 [코끼리의 해](570)의 일이라고 한다.
⑵무함마드의 출현
무함마드는 어려서 고아가 되어 숙부 밑에서 자랐다. 25세 때 부유한 미망인 하디자와 결혼하여 안정된 생활을 하였다. 이 무렵부터 그는 상업을 하는 한편, 메카 근교에 있는 히라山의 동굴로 들어가서 명상에 잠겼다. 610년, 40세 무렵에 최초의 계시를 받았다. 처음에는 그것이 유일신 알라로부터의 것이라고는 믿지 못하고 고뇌하지만 이윽고 예언자로서의 자각을 얻고 선교를 시작했다. 천지(天地)의 종말이 다가왔다는 것, 그러므로 우상숭배를 중지하여 알라에 귀의하고, 싸움이나 부정을 멈추고 가난한 사람과 약한 사람을 도와주라고 설법했다. 그러나 메카의 사람들은 무함마드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오히려 그와 얼마 안되는 신도들을 비웃고 박해했다. 622년 그는 신도들과 함께 메카를 버리고, 포교의 길을 찾아 야스리브(메디나)로 이주했는데, 이것을 헤지라(히주라)라고 한다. 여기서 대다수의 메디나 주민과 메카로부터의 이주자의 지지를 얻어 비로소 이슬람 신앙을 실천하는 독자적인 공동체를 만들게 되었으나 이에 따르는 어려움도 많았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종교 지도자·정치가로서의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저항하는 메디나의 유태교도를 몰아내고, 주변 아랍의 여러 부족들을 교화하여 630년에는 마침내 메카를 정복하였다. 그리고 632년 무함마드가 죽을 때까지는 이슬람의 신앙 밑에 아라비아 반도의 거의 모든 지역이 통일되었다. 이리하여 무함마드는 예언자로서 신의 계시를 올바르게 전하고, 그것을 성전 쿠란 으로 남겼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지도자로서 그 가르침을 공동체 안에 뿌리내리는 데 성공했다.
4.이슬람교의 신앙
⑴알라와 코란(쿠란)
다신교 시대부터 알라는 메카에서 최고신으로 숭배되어 왔으나 무함마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모든 신을 허위라 하여 부정하고, 오직 알라만을 유일신으로 내세웠다. 알라는 만물의 창조주이며, 이와 동등하거나 비교될 존재는 없다. 모든 피창조물(被創造物)과는 엄격한 거리가 있으면서도 사람들의 경동맥(頸動脈)보다도 더욱 가까이 있다. 알라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주지만 아무 것도 대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마음은 어디까지나 관대하고 자애(慈愛)에 넘쳐 잘 용서하고, 잘 들어주고, 잘 보아준다. 알라는 진리이며 빛이며 동(東)도 서(西)도 알라의 것, 어느 쪽을 향해도 알라의 얼굴은 거기에 계신다. 골고루 존재하며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쿠란 2:11)고 한다. 알라의 계시를 모은 것을 코란(쿠란) 이라 하는데, 이것을 물론 무함마드가 전한 것이며 그가 죽은 후 신도들에 의하여 수집·정리된 것이다. 현행의 쿠란 은 650년경, 제3대 칼리프인 우스만이 명령하여 만들게 한 표준본이다. 이 경전은 이슬람의 교의(敎義)·제도, 무함마드의 생애와 사상을 알 수 있는 근본적인 문헌이며, 무슬림들은 이것을 독송(讀誦)할 때마다 법열(法悅)의 경지에 빠져 감격의 눈물을 흘릴만큼 힘과 미(美)를 갖춘 것이지만 그 진가는 아랍어로 된 원전에 의하지 않고는 좀체로 이해하기 힘들다. 또 쿠란 은 무함마드에 계시된 바를 해설이 없이 모은 것이므로, 이것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후세의 학자들이 서술한 많은 주석서(注釋書)에 의지하여야 한다. 그렇지만 이슬람의 법학(法學)·신학(神學)의 최고 근원은 역시 쿠란에 있는 것이다.
⑵이슬람의 근본신조
이 가르침의 정식 명칭은 알 알이슬람 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유일절대의 신, 알라의 가르침에 몸을 맡긴다는 말이며 귀의(歸依) 를 의미하는 말이다. 그 가르침은 모두 명확한 아랍어로 계시되었으며 무함마드가 이것을 아랍어로 전달하였다는 점이 중시되고 있다. 알라 이외에 신은 없다 는 것이 이슬람교의 근본신조이며, 후에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자(라수르)이니라 가 추가되었다. 이 성구를(聖句: 카리마) 외는 일은 신도의 중요한 의무로 되어 있다. 알라의 가르침을 모은 쿠란 에는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여 믿음이란 그대들의 얼굴을 동으로 서로 돌리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란 알라와, 최후의 날(최후 심판의 날)과, 천사들과, 여러 성전(聖典)과, 예언자들을 믿는 사람이다 라고 적혀 있어 이 모든 사항을 믿는 것을 이만 이라고 한다. 또 오로지 알라만을 믿고,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숭배하지 않고, 예배·희사(喜捨)·재계(齋戒) 등의 근행(勤行)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만이 알라에 귀의하는 길이라하여 이것을 이슬람 이라고 칭한다. 그리고 이만을 지니고 있는 사람을 무민 , 이슬람에 입교한 사람을 무슬림 이라 부르며 모두 이슬람교 신자의 호칭으로 되어 있다.
⑶이슬람 신앙의 요소
이슬람 신앙을 구성하는 요소는 다음의 셋으로 분석된다. 첫째는 지(知) 로, 이것은 알라의 계시를 잘 이해함을 말한다. 둘째는 언(言) 으로, 마음에서 알고 또한 믿는 바를 말로 표현하는 일이다. 세째는 행(行) 이며, 이슬람교도로서의 의무를 열심히 실행하는 일이다.
⑷교도의 일상생활
이슬람 세계는 많은 이민족(異民族)을 포함하고 있어 그들은 각각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으므로 그 사회의 요소는 지극히 복잡하고 또한 다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대한 지역에 분포하는 수많은 무슬림은 하나의 형(型)으로 통일되어 공통의 생활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것은 샤리아(이슬람법)로써 공통되어 있기 때문이며, 샤리아는 쿠란 과 하디스에 입각하여 제정된 이슬람법이다. 무릇, 무슬림된 자는 출생에서 사망까지 샤리아에 따라 생활할 것이 요구된다. 인간의 행위는 5가지로 크게 나누어진다. ①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며 이것을 하면 보상되고, 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 ②가상(可賞)할 행위로, 이것을 행하면 보상받으나 행하지 않아도 벌받지 않는 것이다. ③허용된 행위로 이것을 행하여도 보상받지 못하고 벌도 받지 않는다. ④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이것을 행하여도 벌을 받지 않으나 그래도 행하지 않는 편이 좋은 것. ⑤금지된 것으로 이것을 행하면 알라의 벌을 받는 것이다(하람). 예를 들어 돼지고기를 먹거나 음주하거나 하는 일은 하람이다. 그러나 후자에 대하여는 시대에 따라 또는 지방에 따라 의견의 차이가 있어 약간은 허용되는 경우도 있다.
중세 이래 모스크는 교도의 생활중심이 되어 있었으나 11세기 투르크가 각지에서 지배권을 장악한 후로부터는 오로지 예배의 장소가 되었고, 그 밖의 기능은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스크를 생활을 중심으로 삼고, 한편으로는 샤리아에 의하여 규정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이슬람교도의 일상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5.교리와 실천
이슬람교는 유태교·그리스도교의 역사를 무함마드가 나타나기 이전의 역사로 간주한다. 그리하여 이슬람의 교리나 실천 가운데는 이들 종교와 공통되는 것이 많다. 그 기본은 [6신(六信)·5주(五柱: 五行)이다. [
6신]이란 신(神)·천사·성전(聖典)·예언자·내세(來世)·예정(豫定)이라는 6가지의 신앙조항을 가리킨다. 그리고 [5주]란 신앙고백·예배·자카트 희사 喜捨 ·단식·순례의 5가지 주요의무이다.
⑴6신(六信):
①神(알라) … 쿠란 에서 되풀이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대들의 신은 유일한 신]이라는 엄격한 일신교 원리이다. 신은 절대유일하고, 전지전능(全知全能)하며 인간을 포함한 천지만물의 창조자·지배자이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것으로서 신의 의지와 힘에 의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신이 유일하다고 하는 것은 [신에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그것은 신은 반려(伴侶)를 가지지 않는다고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본질·속성에서 인지(人知)를 넘어서고, 피조물과의 유비(類比)를 거부하는 초월신(超越神)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신과 피조물의 격절성(隔絶性)이 강조되는 한편, 신은 또한 [각 사람의 목의 혈관보다도 가까이]에 있고, 인간의 말로 자기의 뜻을 말하고, 인간처럼 보거나 듣고 화내거나 생각하는 인격신이기도 하다. 신은 또 악인을 벌하고, 신을 믿고 올바른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보상을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회개하고 돌아오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기꺼이 용서하는] 자비로운 신이기도 하다. 인간은 다만 신의 말에 온순하게 순종하며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신의 유일성 문제는 슨의 초월성과 내재성(內在性)·인격성을 그 본질 ·속성과 관련하여 어떻게 통일적으로 이해하는가 하는 것이, 후일의 신학적 논의의 최대 주제가 된다. 즉, 쿠란 이나 하디스(예언자의 언행에 관한 전승) 에서의 신의 의인적(擬人的) 표현을 그대로 긍정하고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입장(하슈이파 등)과, 그와 같은 표현을 모두 비유라고 해석하고 피조물에 공통되는 속성을 모두 부정하는 입장(자푸미파·무타질라파·철학자 등)이 있다. 이들을 양극단으로 한다면, 정통파는 의인적 표현으로 나타낸 신의 속성을 긍정하면서도 그것을 신의 초월성과 모순되지 않도록 해석하려고 한다(아슈아리파·마투리디파).
②천사(말리크: malak) … 이슬람과 같은 철저한 일신교에서도 신과 인간의 중간적인 초자연적 존재로서의 천사를 인정하고 있다. 이들은 신의 명령에 충실하게 따르며 여러 가지 역할을 수행한다.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신으로부터의 계시를 전하고, 또 [성령]으로서 [예수]를 강하게 만들었던 가브리엘, 나팔을 불며 천지의 종말을 알리는 이스라필, 만물의 질서와 생명을 감시하는 미카엘, 죽음을 관장하는 이즈라일의 4대천사가 있다. 이 밖에 하늘의 옥좌를 받치고 언제나 신을 찬양하고 있는 천사, 각 사람의 선악의 행위를 모두 기록하는 천사, 지옥을 지키는 천사들이 있다. 이와 함께 신의 명령을 어기고 인간을 유혹하는 사탄(또는 이블리스), 진이라고 불리는 영귀(靈鬼), 진 가운데서도 특히 힘이 센 이프리트가 있다.
③성전(알키타브: al-Kit b)
④예언자(나비: nab ) … 신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인간이 모든 것을 주관하고 지배하는 절대적인 신 앞에서 안전하게 생활하고 또한 내세에서의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인간의 지혜나 지성으로서는 불충분하다. 신의 계시가 없으면 암흑에 놓여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신은 인류의 조상 아담의 창조 이후 계속해서 예언자(사도)를 각 공동체에 보내서 올바른 신앙과 행위규범을 전하게 했다. 아담을 비롯하여 노아·아브라함·이사악·요셉·모세·다윗·솔로몬·요한·예수 이외에 후드·살리·슈아이브 등 28명의 이름이 쿠란 에 기록되어 있다. 전승에 따르면 그 총수는 약 12만 4000명이라고 하는데 정확한 숫자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러한 예언자 중 최후의 예언자가 무함마드이다. 그 중에서도 모세·다윗·예수·무함마드는 각각 하늘의 계시로서 [율법] [시편] [복음서] 및 [쿠란]을 특별히 받았다. 이들 일련의 계시 및 성전들의 내용은 보편적 일신교라는 점에서는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고, 쿠란은 최후의 성전으로서 그것들을 최종적으로 확인하고 보완하는 것이라고 한다. 즉, 현실에 존재하는 쿠란 이전의 성전들은 왜곡되어 있어서 본래의 계시를 올바르게 전하고 있지 않으므로, 신은 최후로 무함마드를 보내어 인간이 지켜야 할 신조와 규범을 완전히 나타내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올바르게 전했다는 것이다.
⑤내세(아히라: khira) … 천지만물은 과거의 한순간에 신에 의하여 창조되었듯이 영원한 것은 아니고 얼마 후에 종말의 시간을 맞게 된다. 종말은 천지이변(天地異變)으로서 나타나지 않으면, 그것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한순간 후의 일인지도 모르고, 아득한 장래의 일인지도 모른다. 초기의 계시에는 종말이 눈앞에 다가왔음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 많다. 모든 것이 멸망하고 난 후, 죽은 사람은 생전의 상태로 소생하고(부활), 신 앞에 나와 생전의 신앙과 행위에 대한 심판을 받는다. 신을 믿고 올바르게 생활한 사람은 천국에서 평안한 생활을 영위하고, 신을 믿지 않고 불의를 저지른 사람은 지옥에서 영원한 벌을 받는다. 이것에 관한 쿠란 의 기술은 구체적이고도 사실적이다.
⑥예정(카다르: qadar) … 과거·현재·미래에 인간 및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 또 인간의 행위도 모두 미리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하늘에 보관되어 있는 서판(書板)]에 미리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쿠란 에는 [악을 저지른 자에게는 그에 따른 응보가 돌아가고 선을 행한 자에게는 최고의 보상이 주어진다]는 말처럼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 말하는 부분도 많다. 이 자유의지와 예정의 문제도 타우히드(taw id)의 문제와 더불어 여러 가지 해석을 낳았고, 훗날 신학적 논의의 중심주제의 하나가 되었다. 결국 인간의 의지적 행위에 대한 신의 관여를 부정하는 자유의지설(카다리파·무타질라파)은 이단으로 간주되었고, 다른 한편 인간 자신의 의지적 관여를 일체 부정하는 극단적인 예정설(자부리파)도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다만, 인간이 자기의 행위에 대해 지니는 윤리적 책임과 조화되는 형식의 예정설(아슈아리파·마투리디파)이 정통설로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이 밖에 다음과 같은 것이 정통신조로서 인정되고 있다. 즉, 쿠란 은 신의 말이며 창조될 수 없다는 것, 신앙자는 내세에서 최대의 행복으로서 신을 본다는 것, 죽은 사람은 무덤 속에서 문카르와 나키르라는 두 천사의 심문을 받는다는 것, 죄에 의하여 신앙은 증감(增減)되지 않는다는 것, 큰 죄를 지은 사람을 위해서 사도들은 신에게 중재할 수 있다는 것 등이다. 또한 무함마드는 깨어 있는 상태에서 영육이 함께 하늘 위로 올라갔다는 것, 성자의 기적은 진실이라는 것, 예언자 다음으로 뛰어난 인간은 정통 칼리프 초대인 아부 바크르, 2대인 우마르, 3대인 우스만, 4대인 알리 順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맘(칼리프)은 눈에 보이는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 죄인 뒤를 따라서 예배를 보더라도 그 예배는 유효하다는 것, 성자가 예언자의 영역에 이르거나 인간이 신의 명령과 금지가 필요없는 영역에 이르는 일은 없다는 것 등이다.
⑵5주(五柱):
①신앙고백(샤하다: shah da) … [알라 이외에 신은 없다. 무함마드는 그 사도(예언자)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자가 될 때에 고백하는 말이고, 또 예배나 그 밖의 경우에 태자가 항상 나타내는 표현이다. 이런 형식의 말은 쿠란 에는 없으나 그것은 단적으로 신자가 되는 것, 또는 신자라는 것을 표명하는 것이다. 즉, 전반 부분에서는 일신교의 원리를, 후반 부분에서는 무함마드가 신의 사도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에 따라서 무함마드를 통하여 신이 계시한 말, 즉 쿠란 을 진실이라고 인정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신도는 어려서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증언을 행하게 되어 있다.
②예배(살라트: al t) …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인 신 앞에서 자기를 갖추고, 신의 위대함과 영광을 찬양하는 의례적 행위이다. 하루 5번(새벽·정오·오후·일몰 후·밤) 일정한 시간에 규정된 형식에 따라 진행되며, 개인적으로 수시에 행하는 기도는 두아 라고 부른다. 금요일 정오에는 모스크에서의 집단예배가 거행되고, 그 밖에 단식 직후의 제례나 희생제(犧牲祭)·기우제(祈雨祭) 등의 특별한 경우에도 거행된다. 또한 예배를 할 때는 메카 쪽을 향하여 행한다.
③자카트(zak t) … 희사·자선을 가리킨다. 사다카가 자발적으로 수시로 행하는 자선인 데 비해, 자카트는 일정량 이상의 재산에 부과되는 종교세(宗敎稅)·자선세(慈善稅)라고도 할 수 있다. 돈·곡물·가축 등의 종류에 따라 과세율이 정해져 있다(예컨대 돈은 2.5%). 이런 방법으로 모인 자카트는 가난한 사람·나그네·고아 등의 구빈자에게 주기로 되어 있다. 세속화의 경향에 있는 오늘날의 많은 무슬림 제국에서는 자카트 헌금은 개인의 뜻에 맡겨져 있다. 국가재정의 기본이 되며 비이슬람 국가에서는 선교기반이 이루어지는 데 필요불가결한 무슬림의 의무 중의 하나이다.
④단식(사움: awm) … 이것은 성년인 무슬림이 이슬람력(曆)의 제9월인 라마단월(月) 주간(晝間)에 음식·흡연·향료·성교를 금하고, 과격한 말을 삼가며 가능한 한 쿠란 을 독송하는 것을 가리킨다. 단 음식은 흰 실과 검은 실의 구별이 안 될만큼 어두어진 야간에는 허용된다. 병이나 여행 때문에 할 수 없는 사람은 다른 달에 같은 날수만큼 단식하든가, 가난한 사람에게 음식을 대접함으로써 보상될 수 있다. 단식은 인간의 최대 욕망인 식욕을 극복하고 동시에 먹을 것이 없는 사람에게 대해 새롭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라고 한다. 라마단월이 끝나고 다음 새달이 하늘에 떠오르면 단식 완료의 축제가 시작되는데, 화려한 의상을 입은 군중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서로 축하하는 풍습이 있다.
⑤순례(하지: ajj) … 이슬람력의 제12월인 둘히자월(月)에 7∼10일 동안 [신의 집]인 메카의 카바 신전 및 메카 북동쪽 교외에서 열리는 대제(大祭)에 육체적 능력이 있는 신자가 적어도 일생에 한 번은 가야 하는 의무로 되어 있다. 능력이 없는 자는 하지를 못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 해에 따라 일정하지는 않으나 현재도 매년 약 200만 명에 달하는 신도가 하지에 참가하고 있다. 메카 다음가는 성지는 메디나에 있는 무함마드의 묘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 예루살렘의 여러 성적(聖蹟) 등이 있으며, 또 시아파의 무슬림은 알리의 묘(廟)가 있는 나자프, 알리의 아들 후세인의 묘가 있는 카르발라, 이란 동부의 메시에드 등을 성지로 하여 순례하는 사람이 많다.
이상의 5주를 [이바다트]('ib d t)라고 하는데, 이것은 신에 대한 인간의 봉사의무를 가리킨다. 이에 대해서 일상생활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의 인간 상호의 관계, 예컨대 혼인·상속·계약·매매·재판·형벌·성전(聖戰) 등을 규제하는 인간의 의무관계, 즉 법적규범을 [무아말라트(mu' mal t)라고 한다. 이 이바다트와 무아말라트가 이슬람법(法)의 내용을 이루고, 이슬람 법학을 규정한다. 이슬람이란 이와 같은 생할규범 속에 나타나 있는 신의 명령에 따라서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이슬람교는 생활과 밀착된 종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무슬림이 되는 것은 어떤 특별한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자각적으로 올바르게 영위하려는 것이다. 이슬람은 이것을 추상적인 도덕으로서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생활규범으로도 밝혀놓고 있다. 그와 같은 생활 가운데 현세의 복지와 내세에서의 구원이 있다. 또한 이슬람 신앙은 필연적으로 공동체적인 형태를 띠게 되고, 나아가서는 국가적인 형태를 가지게 된다. 이슬람의 이 실천적 신앙은, 가장 고도로 발달한 학문이 신학이 아니라 법학이라고 하는 것에 잘 나타나 있다. 그것은 이슬람의 교리가 단순 평범하다는 것에서도 기인하지만 무슬림에 최초로 직면하는 문제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즉 [어떻게 행동하면 신의 뜻에 맞는가]하는 구체적인 행위규범인 것에서도 기인한다. 그것을 위한 첫째 근거가 되는 쿠란 을 어떻게 올바르게 해석하느냐 하는 것에 따라 쿠란학(學)이나 문법학이 생겼고, 나아가서 고시학(古詩學)·전승학(傳承學), 이슬람법 해석의 방법론을 밝히는 법이론, 그리고 신학이 생겼다.
6.역사
⑴정통 칼리프시대(632∼661)
예언자 무함마드는 교우들에게 聖典 쿠란 과 공동체, 그리고 그들의 기억 속에 무슬림으로서의 모범적인 생활방법을 남겨놓고 죽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 이슬람 공동체는 아랍 부족들의 이반(離反: 背敎)에 따라 한때 붕괴의 위기에 직면했지만, 그의 [후계자(칼리프)]로서 공동체의 지도자(이맘)라 뽑힌 아부 바크르의 노력으로 재통일되었다. 다음의 칼리프 오마르 때에는 대정복이 개시되었고, 한순간에 이슬람의 판도는 아라비아 반도에서 벗어나 동서로 확대되었다. 이를 뒷받침한 것이 아랍 부족들로 이루어진 이슬람 전사단(戰士團)이었다. 그 후 칼리프의 자리는 우스만에서 알리로 계승되었고, 공동체는 다시 내란의 위기에 직면했다. 이것은 알리와 옴미아드가(家)의 무아위야와의 지도권 다툼이었으며, 이것에 깊이 관련되어 있던 것이 하와리주파이다. 그들은 이슬람 공동체가 지닌 윤리성을 극단적으로 추구한 과격파로 공동체가 급속한 확산에 의하여 세속화되는 것에 종교적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무아위야 및 그와 타협한 알리의 행동을 잘못이라고 규탄하고 그들 양자와 싸웠다. 걸국 661년 알리가 그들에 의해 암살당하여 정통 칼리프 시대는 종말을 고했으며, 그후 90년 동안 공동체의 지도권은 옴미아드 왕조가 독점하게 되었다. 이들 기존의 이슬람 체제(훗날 수니파라고 불린다)에 대해, 공동체의 지도권은 예언자의 피를 받은 알리의 후예에 속해야 한다는 시아파 그룹이 생겨났고, 마찬가지로 옴미아드 왕조의 체제 자체를 비(非)이슬람적이라고 비난하며 인정하지 않는 하와리주파와 함께 무력저항을 계속했다.
⑵우마이야 왕조시대(661∼750)
반(反)우마이야 왕조의 움직임에 대해 우마이야 왕조는 신앙은 행위(죄)와는 관계가 없다는 무르지아파의 주장에서 지배의 정당성을 찾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엄한 탄압으로 맞섰다. 우마이야 왕조하에서도 이슬람의 정복은 계속되었지만 정복에 의해서 곧 이슬람화(化)가 실현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무슬림의 정치적 지배를 받아들이는 피정복민은 일정한 조건 아래 [이슬람의 평화]와 신앙의 자유를 향유했다. 따라서 이슬람의 지배지역은 우마이야 왕조 말기까지는 이미 서쪽은 시리아·팔레스타인으로부터 이집트, 북쪽은 아프리카의 전(前) 비잔틴 제국령에서부터 에스파니아에까지 이르고, 동쪽은 사산조(朝)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중앙아시아로부터 인더스강(江) 유역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슬람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우마이야 왕조하의 공동체는 평온하지 못했다. 정부의 세속적 성격이나 아랍 중시 정책이 비(非)아랍 무슬림과 경건한 신도의 불만과 반발을 낳게 했고, 이것이 시아파와 하와리주파의 운동과 결부되었으며 나아가 아랍의 부족대립에도 결부되어 반정부운동을 일으키게 했다. 마침내 우마이야 왕조의 지도자들은 이슬람의 공동체를 새로운 환경속에서 확대·유지·발전시키는 데에 힘썼으나 이슬람적으로 다지는 데는 실패했고, 또 무엇이 이슬람적인가 하는 것에 관한 기준도 미처 확립하지 못했다.
⑶압바시야 왕조시대(750∼1258)
압바시야 왕조는 국가 통일의 원리가 이슬람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그때까지 민간학자들 사이에서 정비되어 가고있던 이슬람법에서 국가통치의 기초를 찾았다. 그리하여 쿠라이슈족(族) 출신인 칼리프가 다민족적 공동체를 하나의 법 밑에서 단일국가로서 지배한다는 이상에 가까운 형태를 실현하였다. 여기에 교역(交易)의 발달과 더불어 고대 오리엔트·헬레니즘·그리스도교, 인도·이란 문명의 영향하에 독자적인 이슬람 문명이 꽃피게 되었다. 그러나 압바시야 왕조도 1세기가 지나자 칼리프의 실권이 약화되어 각지에서 독립·반독립의 왕조가 성립하였다. 특히 10세기에는 이집트에서 시아파내의 이스마일파인 파티마 왕조가 성립되어 칼리프를 자칭하였고, 또한 아라비아 반도에서도 시아파내의 카르마트파가 지배하였다. 그리고 에스파니아에서는 같은 수니파이면서도 후(後)우마이야 왕조가 칼리프를 자칭하여 바그다드의 수니파 칼리프와 대립했다. 그리고 10세기 중엽에는 바그다드의 칼리프 자체도 이름뿐인 존재로 되고, 시아파 부와이 왕조의 왕들이 지배하게 되었다. 11세기 중엽 동방에서 일어난 수니파의 대(大)셀주크 왕조에 의하여 칼리프의 권위는 가까스로 회복되었으나, 실권은 술탄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이슬람 세계의 혼란과 분열을 더욱 심화시킨 것은 11세기말에 시작된 십자군의 침공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1258년 몽고군의 침입에 의하여 압바시야 왕조 칼리프는 멸망되었다. 몽고군의 살육과 파괴는 이슬람 세계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고, 아랍적인 고전 이슬람의 종식을 나타내는 상징적 사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슬람의 역사 자체가 이로써 끝난 것은 아니었다. 중세적·수피적 이슬람으로서 새로운 모습을 갖춘 후 새 주역에 의하여 다시 전개되었던 것이다.
⑷수피즘과 이슬람 세계의 확대
수피즘(S fism)이란 이슬람의 신비주의를 가리키는데 이슬람 신앙의 형식주의, 즉 행위의 겉모습만 보고 심판하는 이슬람법 등에 대한 반동으로 발전했다. 고전 이슬람이 성법(聖法)의 준수를 통하여 신과 교제하는 공동체적 이슬람인 반면, 수피즘은 각자가 자기의 내면에서 직접 신과 교제하는 개인형의 이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수피즘은 소수 엘리트의 운동으로서 출발했으나, 차츰 수행방법이 정비되고 신(新)플라톤주의와 인도사상 등의 영향에 의해 이론화되었다. 12∼13세기의 사회적 혼란기에는 디크르(dhikr: 신의 이름을 부르는 일)에 의한 수행의 간소화와 신과 인간의 중개자로서의 성자에 대한 신앙에 의하여 대중화되기 시작했고, 교단의 형태(타리카: arica)로 이슬람 세계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이와 같은 혼란 속에서 오스만 왕조 투르크는 14세기 이후 소아시아에서 발칸 반도로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16세기 전반의 술레이만 1세(대제)때에는, 소아시아는 말할 것도 없고 멀리 빈까지 이르는 발칸 반도 안쪽 깊숙한 곳까지, 남쪽은 예멘에 이르기까지의 지중해 주변 아랍 지역들을 정복하여 광대한 통일국가를 이룩하고, 술탄은 칼리프라고 자칭하여 수니파 이슬람 세계의 수호자로서 등장했다. 16세기 초엽 오스만 왕조 술탄 셀림 1세가 시리아를 정복했을 때, 제일 먼저 13세기 초의 수피 사상가 이븐 알 아라비의 사당을 세운 것은 이 왕조와 수피즘의 결부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 무렵 페르시아에서는 일한국·티무르 왕조를 거쳐 이란 민족을 통일하여 12이맘파(시아파의 하나)의 사파비 왕조가 일어나서 수니파의 오스만 왕조와 대립하면서도, 16∼17세기에 걸친 샤 아바스 1세 때에는 정치·문화적인 융성기를 맞이했다. 수니파 이슬람 세계에서는 A.H.M.가잘리의 철학비판 등도 있어서, 에스파니아의 이븐 루슈드(아베로에스) 이후 소멸된 것으로 여겨오던 그리스 철학의 전통은 수피즘과 융합하여 물라 사드라를 정점으로 하는 일련의 사상가들 속에서 새로운 전개를 보였다. 또 인도 아대륙(亞大陸)의 이슬람화(化)가 진행된 것도 13세기 이후의 일이었다. 즉, 인더스강 상류의 북서 변경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가즈나 왕조를 멸망시키고 등장한 구르 왕조 이후 무슬림의 본격적인 인도 침입이 개시되었다. 1206년 구르 왕조에 이어서 델리 사르 타나트 왕조(노예왕조)가 성립되었지만, 1526년 무굴 왕조의 등장에 의해 무슬림의 전(全)인도적 지배는 일단 확립되었고, 이슬람화가 거세게 진행되었다. 이리하여 16세기 후반 악바르 대제 때에 극성기를 맞이하였다. 이슬람이 동남아시아·중국·아프리카 등지로 전파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이슬람은 아랍 무슬림이 활동의 무대에서 자취를 감추자, 몽고인 정복자를 개종시키고, 터키인·이란인·인도인·말레이시아인·인도네시아인·중국인·아프리카인 속에서 그 담당자를 찾아내어 새롭게 발전하였다. 이러한 발전과 이슬람화에 활력을 준 것이 수피적 이슬람이었고, 수피 교단의 성자와 상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도 16∼17세기의 절정기를 넘어서자 종식되었고, 이슬람 세계는 다시 쇠퇴기로 접어들었다. 수피들이 체험을 중시하는 나머지 지식을 경시했으므로 이성에 의한 규제를 떠난 수피즘으로 변질되었다. 그리하여 더욱더 주술화(呪術化)되어 [신으로의 귀의]가 적극적인 활동 속에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무위(無爲)·무활동, 현세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해되어, 수피즘은 무기력과 침체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전락했던 것이다.
7.여러 이단파와 수피즘
이슬람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쿠란 이지만 무함마드가 죽은 후에는 그것만으로 교의상의 판단이 안 되는 경우가 많게 되어 그러한 때는 순나(무함마드의 언행) 에 의하여 보완되었다. 그리고 이 순나를 이상(理想)으로 삼는 사람들을 수니파(派)라 하여 이것이 이슬람교의 정통파로 지목되고, 이슬람교도의 대부분이 수니파로 이루어진다. 아라비아의 원시이슬람은 다른 여러 민족을 정복함에 따라 많은 종교와 사상에 부닥쳐, 이들을 받아들이거나 동화(同化)시키는 과정에서 몇 개의 이단적 유파가 생겼다. 페르시아만 연안의 뱃사람이나 장사군을 그 주력으로 하는 하지라파(派)가 그 최초의 것으로, 7세기 중반부터 시작되었으나 현재는 오만·동아프리카·북아프리카 등에 약간 잔존할 뿐이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혈통은 딸 파티마와 제4대 칼리프인 그의 조카 알리와의 사이에 태어난 하산과 후세인의 두 남아계층에 의하여 전해졌으며, 이 중에서 특히 후세인의 계열을 교주로 추대하는 시아파(派)는 후에 이란의 종교사상을 받아들여 최초의 이단적 종파가 되었다. 무함마드는 이슬람의 교리는 70개로 분열될 것이다 라고 예언하였다 하는데, 확실히 시아파는 많은 지파(支派)로 분열되어 극단파를 낳게 되고 그 가운데는 이미 이슬람교로는 간주할 수 없게 된 것까지 있다. 이와 같이 이단파는 상당한 수가 있으나 신도수는 전체의 10%에도 미달된다. 이슬람의 신비주의라고 일컫는 수피즘(또는 수피파)은 원래 원시이슬람 사회 안에서 금욕고행을 주의로 삼는 일파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후에 그리스 사상과 유태교·그리스도교·불교 등의 신비주의까지 받아들여 사상계의 일대조류로 발전하였다. 이 수피즘은 이슬람 신앙의 형식주의, 행위의 표면만을 보고 심판하는 이슬람법(샤리아) 등에 대한 반동으로 발전한 것이며, 이슬람교가 세계적 대종교로 발전한 것은 실은 이 수피즘의 힘입은 바가 크다고 주장하는 자도 있다. 반면 이슬람사상 속에는 그러한 사고방식을 배격하려는 자도 있다.
8.현상과 동향
침체된 이슬람 공동체 상태에 비판을 가하고 그것을 개혁하려는 움직임이 18세기 인도의 샤 왈리율라와 아라비아 반도의 무하마드 이븐 압둘 와하브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전자는 영국의 인도 진출 속에서 힌두 교도나 시크 교도의 각성에 자극되어 내부개혁을 통하여 쇠퇴해가는 무굴 왕조의 부흥을 꾀하려고 했다. 그의 이상은 중세적 이슬람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수나(예언자의 범례)와 수피즘을 순수한 형태로 결합시킨 이슬람이었다. 그의 개혁사상은 아들과 손자에게 계승되고 정치적으로 조직화되어 갔다. 이에 비해 와하브는 이슬람 공동체의 쇠퇴와 타락은 수피즘적인 불순물이 더해진 때문이라고 하여 그것을 제거하고, 쿠란 과 수나의 순수한 원시 이슬람으로 복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사우드가(家)의 이븐 사우드와 협력하여 그 주장을 정치적으로 실현하려고 했다. 결국 그 지방을 지배하는 오스만 왕조와 충돌하게 되지만, 아랍인에 의한 터키인 정부에 대한 반항은 곧 중세적 이슬람으로부터 근대 이슬람으로의 전환을 상징하였다. 와하브파의 운동은 오스만 왕조의 탄압에 의해서 실패로 끝나지만 운동 자체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 후 1932년에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에서 그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 와하브파가 지닌 우상파괴적인 개혁사상은 무슬림 속에 잠들어 있던 공동체 의식을 널리 일깨워 공동체의 현상으로 눈을 돌리게 했다. 이어서 19세기 후반에 이슬람 공동체 전체가 서양으로부터의 침략적 위기에 놓이게 되자 자말 웃딘 아프가니는 세계의 무슬림이 단결하여 [이슬람의 땅]을 방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때 아프가니가 말한 범(汎)이슬람주의의 꿈은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24년, 터키의 케말 아타튀르크의 혁명에 의해서 1300년부터 존속해 온 칼리프제의 폐지와 더불어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아프가니의 개혁사상은 내셔널리즘과 혼합되어 그 후의 이슬람 개혁사상으로 계승되었다. 특히 이집트에서는 아프가니의 제자인 무하마드 아브두가 전통적인 아즈하르 대학의 개혁과 이슬람법의 자유스러운 해석을 통해서 스승의 사상을 살리려고 노력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그와 같은 근대주의적 이슬람에 불만을 품은 민중이 전통적인 울라마(학자)가 아닌, 원리주의에 바탕을 둔 사회개혁을 지향하는 무슬림 동포단 등의 행동주의에 이끌려갔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이슬람 공동체는 민족국가로 분열되어 저마다 정치적 독립을 달성하게 되는데, 나라에 따라서 이슬람의 모습은 다르게 나타났다. 정교분리(政敎分離)와 세속화를 단행한 터키를 한쪽의 극(極)으로 한다면, 다른 쪽의 극에는 [이슬람 공화국]으로서 이슬람의 근대적 이념에 의한 국가적 형태를 취한 파키스탄, 같은 이슬람 국가에서도 전통적 형태를 유지하는 왕제(王制)의 사우디아라비아 등이 있다. 그리고 최근 왕제를 쓰러뜨리고 혁명에 성공한 이란의 이슬람 공화국(1979)이나 리비아(1969)를 들 수 있고, 그 밖에도 중간 형태의 이슬람 공동체가 있다. 그 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것은, 찬란한 과거의 전통을 갖고 있으면서도 1947년의 파키스탄 분리독립 후에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이슬람을 부정하고, 압도적 다수의 힌두교도와의 공존(共存)을 지향하는 인도 무슬림이다. 이들 여러 형태가 과거에 볼 수 없던 새로운 이슬람의 형태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9.현재의 세력
현재의 이슬람 교도수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세계 인구의 약 25%인 13억 전후라고 UN 통계조사국에서 밝힌 바 있다. 지역적으로는 북아프리카·아라비아 반도와 이란에 이르는 소위 중동지역과 동부 소련·터키·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서부·중공·인도에 이르는 동남아시아 지역에 주로 분포하고 있으며, 기타 한국·일본 등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 분포되어 있다. 예를 들면 남·북미지역과 유럽지역에도 오랜 이슬람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며 수백만의 무슬림들이 있다. 특히 독일과 프랑스 지역에서의 이슬람 문화·역사·종교학에 관한 연구는 그 역사도 오래거니와 또한 수준에 있어서도 높다.
10.이슬람 교도의 생활·풍습
①달력·제례·행사 … 이슬람교에서는 헤지라력(曆)이라고 불리는 독자적인 달력을 사용한다. 헤지라력은 완전한 음력이기 때문에 1년은 354일로 되어 있어 헤지라력에 따라서 산정된 라마단월(제9월)의 단식과 둘히자월(제12월)의 메카 순례, 그 밖의 행사는 태양력에 바탕을 둔 달력과 조금씩 다르게 된다. 이슬람교에서 공식으로 정한 축제로는 순례월의 [희생제]와 [단식 직후의 제전]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 쿠란 과 수나에 의하여 정해진 것이다. 이 밖에 후에 축제로 된 것으로는 예언자 무함마드나 성자의 탄생제가 있다. 또 시아파에는 무하람월(제1월) 10일의 이맘 후사인의 수난제 및 같은 달 18일의 가딜 홈므(메카와 메디나 중간에 있는 홈므의 연못)에서의 이맘 알리의 이맘 지명을 기념하는 제전 등이 있다.
②도박·이자 … 도박이나 점(占)은 쿠란 에 의하여 명확히 금지되어 있으며, 이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슬람의 이자는 금전뿐만 아니라 쌀이나 밀 등의 대부(貸付)에 대해서도 대부량 이상의 것을 받는 것을 가리킨다. 전에는 매매 그 밖의 형식을 취함으로써 사실상 이자를 받는 일이 있었으나, 최근에는 예금자가 공동경영자로서 이익 배당에 참여하는 [이슬람 은행]의 형태가 모색되고 있다.
③식생활 … 무슬림(이슬람 교도)의 식생활에는 갖가지 종교상의 규제가 있다. 예컨대 금주 및 돼지고기의 식용금지는 잘 알려진 일이다. 이것은 모두 쿠란 의 규정에 따른 것이다. 그 밖에 무슬림이 신의 이름을 찬양하고 일정한 절차를 쫓아서 도살한 동물 이외의 고기의 식용도 금지되어 있다. 그 이유에 관해서는 역사적·위생학적인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그것을 금한 신의 의지를 완전하게 알 길은 없다.
④여성 … 여성이 베일과 차도르로 얼굴이나 신체를 가리는 풍습과 하렘(집안의 여성 전용의 장소)에 여성을 격리시키는 것이 무슬림 사회의 특징인 것처럼 알려져왔다. 그것은 여성(및 남성)이 남에게 자기의 신체를 드러내 보이는 것을 금한 쿠란 의 가르침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한다. 인간은 약한 존재이므로 남녀의 접촉과 신체의 노출에 따라서 일어날지도 모르는 죄를 미연에 방지한다는 생각과 남성은 바깥 일, 여성은 집안 일과 자녀 양육이라는 분업관에서 비롯되었다. 이 풍습도 여성해방 운동과 더불어 변해가고 있지만, 표면적으로는 무슬림 사회가 남성 중심 사회이므로 변화는 없다.
⑤유산상속 … 쿠란 이나 예언자의 전승에 바탕을 두어 세부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특징적인 사항은 고아와 미망인에게도 재산을 인정한 것, 남자의 ½이기는 하지만 여성에게도 상속권을 인정한 것, 재산의 ⅓을 유언에 따라 처분할 수 있게 한 것, 피상속인이 살해자나 이교도이면 상속에서 제외되는 것 등이다. 상속에 의한 재산의 분할을 막기 위해서 자선재단에 기증하고, 그 용익권(用益權)을 가족 전체가 인계받는 방법이 종래에 있어 왔다.
⑥종교적 지도자 … 수니파 이슬람교에는 본래 신과 인간을 중개하여 인간의 구원에 관계하는 성직자의 제도는 없다. 그것에 해당하는 것으로서는 울라마가 있으나, 그들은 어디까지나 신도의 외부규범과 교리에 관한 전문학자일 뿐 신과의 관계에서는 일반신도와 마찬가지다. 그러나 시아파에서는 이맘이 중개자적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9세기말에 이 이맘이 최종적으로 몸을 감추고 [숨은 이맘], 즉 가이바(ghayba)의 상태로 들어가면 울라마는 그 대리로서 더욱 정신적 권위를 가지게 되고, 아야툴라 오즈마, 아야툴라와 같은 울라마 사이의 위계제도적인 서열이 명확해진다.
⑦할례(割禮) … 남녀의 성기 일부를 절개·제거하는 할례는 예로부터 흔히 볼 수 있는 관습으로, 오늘날에도 무슬림 이외에 유태교나 세계 각지의 부족들에게서 볼 수 있다. 유태교에서의 할례는 신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계약의 표시로서 중시되고 있지만, 이슬람교의 성전에는 아무런 언급이 없고 아브라함의 할례를 전하는 전승에 의한 것이다. 법적으로 반드시 의무적인 것은 아니지만 무슬림의 상징으로서 7∼12세기경에 시행되고 , 가족들은 성대하게 축하잔치를 벌였다.
⑧혼인 … 이슬람교에서 혼인은 일종의 계약으로 미리 대리인들 사이에서 남성이 여성에게 지급할 혼인자금의 액수와 방법, 그 밖의 조건을 정한 후에 이루어진다. 이슬람의 특징으로 알려져 있는 것에 [4인 아내]가 있다. 이것은 원래 고아의 구제에 관련하여 내려진 계시에 바탕을 둔 것이지만, 그 계시에 관해서도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전통적으로는 최고 4명이라고 해석되어 왔으나 최근에는 같은 쿠란 에 기록되어 있는 [만일 아내를 공평하게 다룰 수 있을지 염려가 되면 1명만을…]이라는 조건을 엄격히 해석하여 사실상 일부일처제를 법제화하고 있는 나라가 많다. 이혼에 관해서도 종래 남성 쪽으로부터의 일방적인 선언에 의한 방법이 가장 일반적이었으나, 최근에는 여성 쪽의 주장도 인정받도록 개혁되고 있다.
11.한국의 이슬람
이 논문은 ⓐ실크로드를 통한 무슬림과 한국인과의 관계, ⓑ한국의 현대 무슬림 소집단의 집단화 과정, ⓒ한국 무슬림의 현재의 상황(기구, 사회경제적인 면, 문제점과 미래의 전망)으로 구성되어 있다.
1)이슬람 이전의 한국과 서아시아의 문화적 관계
고대 이슬람과 터키문화가 한국문화에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여겨지는 참고문헌들은 드물지만 한국와 아랍사이의 상당한 교제를 증명하는 것들이 남아 있다.
한 예로 경주의 고대무덤에서 발굴된 도기가 있다. 고대 신라(B.C. 57∼A.D. 918)의 무덤에서 발굴한 대부분의 도기들은 아라비아, 또는 페르시아産이다. 고분들은 5세기 말이나 6세기 초쯤의 것으로 추정되며, 그것은 그 당시 아랍 상품이나 페르시아 상품들이 한국에 들어왔고 사용되어졌음이 조심스럽게 이야기 될 수 있다. 도기가 고대 한반도에 도착한 것은 유일한 것은 아니다.
아랍과 페르시아 문화의 전래와 이슬람 이전 한국에서의 그것들의 생산은 대개 한국과 중국을 통한 그 나라들 사이의 우회적 접촉의 결과이다. 게다가 한반도로의 아랍과 중앙 아시아의 직접접촉은 또한 때때로 있었다.
2)한국 최초의 이슬람 진출
언제 무슬림들이 한반도에 직접접촉을 가졌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런데 중세 동양기록의 자료를 보면 "Ta-shi"라 불리는 아랍 무슬림들이 11세기초 무렵 한반도를 여행했었고, 무슬림들은 명백히 통일신라말기(A.D. 661∼935)에 한반도와의 접촉을 시도했다.
우리에게 전해져 온 무슬림들의 항해기록을 보면 무슬림 항해사들이 동쪽 해양에 상당히 정통했음이 명백하다. Fan-Fang이라 불리는 그들의 자치 거류지가 8세기 초에 설립되었다. Fan-Fang에서 Qadi나 Sheikh라 불린 덕이 있는 사람들은 중국정부로부터 이슬람 법률과 관습에 따라 그 거류지의 우두머리로 임명되어 졌다. 그들은 점치 9세기 중엽 정착했고 약간의 과정이 있다 하더라도 중국 남동 해안에 100,000명의 무슬림들이 그곳에 있었다.
신라가 당의 협력으로 오랫동안 염원했던 통일을 실현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 또한 그 당시 당나라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신라는 정치·경제·문화적 관계에서 광범위하게 고도의 번영을 누렸다. 게다가 한국의 서쪽으로부터 큰 무슬림공동체 부락이 있었던 중국의 남동쪽까지는 겨우 며칠의 항해거리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따라서 신라사람들이 중국이나 한국의 무슬림들과 접촉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발전은 9세기 중엽의 Ibn Khurdadbih로부터 16세기 초의 A'bul Fazl사이의 17명의 무슬림 학자들에 의해 쓰여진 지리, 역사, 여행에 관한 20권의 이슬람책들에서 발견된 신라에 대한 기록에 의해 잘 증명되어 진다.
한국에 대한 최초의 언급일 뿐 아니라 역시 한반도 무슬림 정착을 언급한 最古의 기록은 Ibn Khurdadbih의 "Kitab al-masalik wa'l-mamalik"이다. 그 책은 한국에의 무슬림 진출과 그들의 정착에 대해 2페이지에 걸쳐 언급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중국의 건너편 Qansu를 가로지르는 곳에 많은 산들과 금이 풍부한 '신라'라고 불리는 나라가 있다. 우연히 그곳에 갔던 무슬림들은 좋은 환경에 매혹되어 영구히 그곳에 정착하고 그곳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건너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 길이 없다."
게다가 그 책에는 Ibn Rustah, Mas'udi, Al-Idrisi와 다른 몇몇 학자들이 기록한 신라에서의 무슬림들의 생활에 대한 보다 자세하고 흥미로운 여러 기록들이 있다. 처음 기록들은 무슬림들이 모험(한국 접근)을 시작했고 9세기나 그 이전부터 한반도에 정착하기를 시작했다고 전한다. 그들 가운데는 이라크인들 또는 4대 칼리프 알리의 핵심 추종자들인 알라위파들이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한국사회에 동화되었고, 훌륭한 환경과 한반도의 사회여건에 매혹되었다.
초창기 한국과 관련되 이슬람적 근원 가운데는 초기 작업들의 단편적이고 난잡한 의문때문에 확실성과 신빙성이 의심스러운 많은 페이지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리적 위치의 어떤 특징과 한반도의 생활상태들이 묘사되어 있다.
3)한국으로의 무슬림들의 최초의 상업적 접근
초기의 공식문서들은 무슬림과 한국과의 상호관계를 '高麗史(이하 高史)'에서 보여진다. 高史는 한국으로의 무슬림 진출과 그들의 상업활동에 대해 여러차례 언급한다.
1024년 9월에 Tashi國(Arabia)으로부터 Yol-ra-za와 백명가량의 사람들이 왔고, 그들의 자국 생산품들을 왕에게 바쳤다. 다음해 무슬림의 다른 무리가 한국과의 교역을 위해 아랍나라들로부터 한국을 방문한다.
"9월에 Tashi(Arabia)라는 이방국에서 Hason, Raza와 다른 수백여명의 사람들이 왔고 그들의 자국 생산품을 왕에게 바쳤다.
Ta-shi는 페르시아인이 아랍 무역상을 칭하는 Tazi, 또는 Tajir로부터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 장에서 보여지는 Ta-shi의 이름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전형적인 무슬림들이다.
1040년에 다시 같은 기록자료에 의하면 Bo-na-ga에 의해 주도된 아랍상인들의 무리가 한국에 왔고 자국의 진귀한 물품들을 고려왕에게 가져왔다. 그 왕은 그의 신하들에게 그들이 한국에 머무는 동안 그들의 숙박을 돌보라고 명령했다. 왕은 그들이 떠날 때 금과 베를 선물했다.
한국이 이슬람 세계와의 최초의 접촉은 국제무역을 통해 처음으로 일어났다. 그러나 무슬림 무리들의 유입과 한국사회에 대한 넓은 범위의 영향은 고려왕국이 처음엔 몽고, 그리고 나서는 원나라의 지배하에 있었던 13세기까지는 명백하지 않았다.
4)13∼15세기 동안 한-무슬림 관계(몽골 말기∼조선 초기)
몽고가 한반도를 지배했던 1270년 몽고정부 아래에서 대부분의 정책입안과 행정부문에서 그들의 능력을 발휘했었던 많은 무슬림들이 몽고인들과 동반하여 한국에 왔다. 우리는 고려왕조 동안 특히 원나라(1270∼1368)가 고려를 간섭했던 기간 동안의 한국역사문헌들의 자세한 연구를 통해 무슬림에 대한 대우와 유익한 경제적 이점으로 인해 많은 무슬림들이 영구히 정착했음을 이해했다.
무슬림의 한국사회 귀화의 한 예로 후에 고려의 왕비가 된 몽고 공주의 시종으로 한국에 왔던 Uygar 무슬림으로 여겨지는 'Samga'의 경우가 있다. 그는 한국여인과 결혼한 후에 한국에 귀화했고 현재까지도 번창하고 있는 덕수 장씨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이 중앙 아시아인들이었던 무슬림들은 고려왕실의 직무 뿐 아니라 개인 무역상이나 고려 구석 곳곳에 이민자들로 위치를 차지했다. 그들은 대대로의 상업적 사업의 경영에 주로 발탁되었다.
고려에서의 무슬림들은 고려의 수도와 그 변두리에서 그들만의 축제를 열고 그들 나라의 의상과 머리띠를 했으며, 그들의 종교전통(이슬람)을 지키며 그들 자신의 공동체를 형성했다.
어떤 무슬림들은 무슬림 국가들의 상품을 취급하는 상점을 열었다. 게다가 그들은 'Ye- Kung(문자적 의미: 의식 공간)'이라 불리던 사원을 세웠다. 'Doro'라 불리는 종교지도자들은 이슬람 법률과 관습에 의해 예배를 수행하기 위해 무슬림 공동체에서 선출되었다. 때때로 무슬림 지도자들은 공식적인 궁중의식에 초대되는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며, 그 곳에서 그들은 쿠란암송이나 왕의 장수와 국가이 번영을 기원하는 아랍식 'Dua'와 같은 그들 고유의 종교의식들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왕조(1392∼1910)의 동화정책하에서 높은 사회·경제적 지위를 유지했던 한국의 무슬림 정착자들은 점차 그들이 150년 동안 고수
했던 그들의 의복, 관습, 그리고 의식들을 벗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시민들이 머물렀던 것은 여전히 증거로 남아있다.
5)이슬람 문화의 영향
조선왕조의 동화정책하에서 무슬림 증가의 불리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천문학, 역학, 의학, 예술과 과학기구 분야에서 무슬림들에 의한 높은 문화와 과학적 성과물들이 조선사회에 널리 소개되었고 사용되어졌다.
게다가 진보된 이슬람 과학은 15세기 중엽 한국에 천구의, 물시계, 해시계, 천문시계, 우량계 등과 같은 다양한 과학기기들의 새로운 발명에 기여했을지도 모른다.
무슬림들의 한반도와 그곳의 문화, 상업활동과의 접촉은 감소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20세기 초까지 한국에서의 이슬람 활동들의 어떤 징조도 찾을 수 없다.
6)한국의 오스만 제국과 이슬람
동아시아 지역의 이슬람 활동들은 오스만 술탄 2세, 즉 Abdul Hamid의 '범이슬람 정책'의 일환으로 중국과 일본에 공식, 또는 비공식으로 파견된 몇몇 종교 사절단의 방문으로 활기를 띄게 되었다.
러시아로부터 애국적 범이슬람의 한 사람인 Abdulrashid Ibrahim Efendi가 확실한 이슬람 전파를 시작하기 위해 조선에 왔으나, 그의 노력들은 여러 장애물들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lem-i Islam(이슬람 세계)'이라 이름지어진 그의 여행기록은 한국이 1910년 일본에 합방되기 직전까지 한국의 실제상황을 무슬림의 관점으로 보여주는 한국 근대사의 가장 가치있는 연구자료로서 중요시되고 있다.
7)한국의 터어키계 무슬림 공동체
1920년에 한국인과 무슬림과의 관계는 러시아 볼셰비키 정권의 억압으로부터 탈출한 터어키계 러시아인이 한국으로 오면서 시작되었다. 터어키계 러시아 무슬림들 중 200명 정도-거의 Kazan Tatar-가 한국에 영구정착하였다.
한국의 일본 식민정부의 도움으로 200명 이상의 사람들이 한국에 정착하였고, 이 수가 점점 증가하면서 한국의 터어키인들은 곳곳에 흩어지게 된 것처럼 보였다.
1950년까지 그들은 'Mahall-i Islamiye'라 불리는 그들의 공동체 안에서 고유의 문화와 관습을 유지하며 한국 내에서 살았다. 그들은 서울에 2층 건물을 샀고 그것을 문화의 중심지, 그리고 교육기관으로써, 또한 예배당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만주, 한국, 일본간의 교역으로 이익을 얻고 일본인의 보호 아래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었던 이들 터어키 무슬림들은 1945년과 1950년 사이의 정치적 혼란기 동안 터어키와 다른 나라로 강제이주되었다. 이들 터어키 무슬림들 덕택에 이슬람과 터키문화의 약간의 요소가 한국사회에 만들어졌다.
1930년대에 한국에 살았던 믿을만한 소식통에 의하면 단식과 일과적인 예배들과 같은 이슬람 규율을 행하는 한국인이 있었다. 그러나 터어키 무슬림들은 한국인의 집단에 이슬람 신념을 만드는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것과 더불어 만주의 한국인들은 무슬림과 이슬람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1930년대에 약 100만명의 한국인이 일제의 탄압아래 있는 모국을 떠나 만주로 이전했다. 그 당시 많은 터어키계 무슬림들이 러시아에서 만주로 정착했다. 많은 한국인들은 터어키계 무슬림들과 이웃으로 함께 살았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그들은 무슬림들과 교역했다. 한국인과 무슬림 간의 상업적, 사회적 관계를 통하여 한국인들은 그들 자신에게 무슬림 문화와 전통을 알리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1930년대에
만주에 거주하였고 후에 무슬림이 된 Haji Omar Jin-Kyu Kim과 Haji Omar Doo-Young Yoon의 설명에 따르면 만주에 많은 사원과 무슬림 공동체가 있었고 약간의 한국인이 거기에 있었다고 한다.
8)한국전쟁과 한국 무슬림 공동체의 형성
이슬람은 한국에 있어서는 새로운 종교이다. 비록 처음에는 통일신라왕조(668∼935)시기 동안에 한국에 이슬람을 믿는 아랍 무슬림들을 통하여 들어왔지만 한국에 현대 무슬림의 소수집단의 씨는 1955년 공산군의 공격으로부터 남한을 보호하기 위하여 유엔이 남한에 파견한 터어키 군대의 한 그룹에 의해 뿌려지게 되었다.
터어키 군인들-평화와 자유의 수호라는 그들의 의무이외에도-은 초기의 한국 무슬림들이 한국에 이슬람을 위해 새로운 시기를 열었다는 것으로 그들의 종교를 보급했다.
Abdulgafur Karaismailoglu와 Zubeyir Koch가 이슬람 활동에 공헌했다. 터어키 여단의 이맘들으 특히 훌륭했다. 그러나 1955년까지 한국인에 대한 터어키 이맘들의 이슬람 활동은 주로 터어키 정부의 세속적 원리에 기인하는 관련당국에 의해 제지되었다. Ankara의 특별한 허가 덕분에 이맘들은 이들 한국인에 대해 이슬람 교육을 시작할 수 있었다. 단지 처음에는 터어키군 캠프에 방문하는 한국사람들에게 교육하였고, 나중에는 방문강좌를 통해 일반 한국인에게 교육했다. 더우기 1955년 9월 이후 그들은 광범위한 이슬람 운동을 시작했다. 그들은 또한 임시적인 사원들을 세웠고 규칙적인 교육을 했다.
터어키군의 통역관인 신백경이 중간역할을 함으로써 약간의 한국인이 이슬람에 대한 강한 호기심을 가지고 터어키 이맘에게 모였다. 김진규와 윤두영은 터어키 이맘인 Abdulgafur Karaismailoglu의 인도로 이슬람으로 개종한 한국 무슬림의 1세대가 되었다. 특히 1955년 이맘 Karaismailoglu의 이슬람 강의에 감명받은 39명의 한국인이 이슬람을 믿게 되었다. 이것이 한국 이슬람 발전의 전환점이 되었다.
9)한국 이슬람의 현 상황
1967년 새로운 개종자들은 '한국 이슬람 협회'를 구성하고 세계의 무슬림과 접촉하였다. 이후 이슬람은 한국 내에 전파되기 시작했지만 눈에 띌 정도는 되지 못했다. 몇년이 지나 많은 이슬람 국가들에 있는 조직과 기구들은 한국 무슬림들에 큰 관심을 표명했다. 대표적인 국가로 말레이시아와 파키스탄을 손꼽을 수 있다.
그러나 1960년대까지 그 관계는 말레이시아와 같은 동남 아시아 국가들과 파키스탄 같은 남아시아 국가들에 주로 집중되었다. 1970년대 이후 한국은 갑자기 이슬람 국가들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특히 '석유 위기'는 큰 작용을 했다.
1970년대 중반 이슬람은 한국에서 급속한 발전을 이루는 새로운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많은 이슬람과 아랍 국가들은 문호를 개방하고 한국 무슬림들에게 더 많은 지원을 하였다. 1976년 설립된 서울의 모스크와 이슬라 센터는 한국-아랍협력의 상징이다. 동시에 한국 무슬림 협회는 한국내 이슬람 포교를 위해 유일한 법적 통합체로 작용하였다.
중앙 모스크를 설립한 것은 급속한 이슬람 전파를 위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1975년 5,000명의 무슬림들이 1979년에는 배로 증가하였다. 또한 부산과 광주에는 모스크가 설립되었다.
1976년 이슬람 센터의 조직구성 이후 한국 무슬림 협회는 주로 공식적으로 규칙적이고 전국적인 이슬람 선전을 시작했다. 그것은 한국인들에게 이슬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었다. 한국의 이슬람은 1979∼81년 사이에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것은 아랍국가들과 인도네시아의 한국인 노무자들을 위한 이슬람 활동이었다. 많은 한국인들이 한국 이맘들의 지도에 의해 이 기간동안 이슬람에 귀의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이슬람 발전은 1980년대들어 정체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란-이라크 전쟁, 중동시장 붐의 하락, 첫 세대 한국 무슬림 리더들의 죽음에 의한 부정적인 작용 때문이었다.
현재 남한의 무슬림들은 약 35,000명 정도이고 4개의 모스크가 주요 도시에서 활동 중이다. 또한 북한에 무슬림들이 있는지 확인할 바는 없는 실정이다.
한국 국민들에게 한국내 무슬림 포교의 가장 큰 어려움은 넓게 퍼져있는 이슬람에 대한 오해와 무지이다. 이슬람과 그 문화, 특히 일부다처제, 사도 무함마드의 위상, 군국주의, 이슬람원리주의 등은 학교 교과서와 대중매체에서 심각하게 오도되고 있다. 다른 장애요인은 효과적인 이슬람 활동을 조직화하기 위한 재정의 부족과 이슬람 국가에서 교육받고 훈련받은 지방 무슬림 전도자들을 지원할 수 있는 재정의 궁핍이다. 그 밖의 문제점들로는 한국학술협회와 출판매체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우수한 방법론에 기초한 고급 한국학자들에 의해 씌여진 이슬라 문학의 부족을 지적할 수 있다.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여러 이슬람 주제에 대한 연구를 할 수 있고, 이슬람의 이해를 개선할 수 있는 이슬람 연구기관의 부재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일련의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한국 이슬람의 미래는 밝다고 할 수 있다. 이슬람의 일신론적 여러 요소, 무슬림 형제애의 관심, 10억 이상의 인구를 가진 무슬림 세계에 대한 경제·정치적 관심, 이슬람 체제에 대한 관심의 증가 등도 한국 무슬림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슬람은 서구적인 교육과 대중매체의 악영향에 의해 야기된 철처히 잘못 이해된 종교이다. 한국의 교육에 있어서 주어진 비중은 대단히 크다. 남한 인구의 98%이상이 읽고, 쓸 수 있다. 국내에 설립된 200여개 대학교는 한국의 교육열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단일 민족으로서의 한국인은 여전히 전통과 문화를 고집스레 고수하고 있다. 이러한 면에서 한국 전통과 문화에 대한 깊이있는 연구 뿐만 아니라 이슬람 교육기구에 대한 개방은 한국 내에 효과적인 이슬람 발전을 위한 중요한 요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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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교(回敎 혹은 마호메트교)는 오늘날 세계에서 기독교 다음으로 급속한 성장을 보이고 있는 종교이다. 그 발상지인 아라비아를 중심으로 전세계에 현재 약 5역에 달하는 신도르 가지고 있다. 이제 그 발생 기원과 주요 가르침, 그들의 문화, 그리고 기독교와의 차이점에 대해서 살펴보고 성경적으로 비판하여 보고자 한다.
1. 발생과 기원
창시자 마호메트(Mahomet 570?-632)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였다. 그런 연유로 그는 고독했고 어렸을 때부터 명상을 즐겨 하였다. 그는 한때 유대교인과 기독교인을 통해서 유일신 사상을 체득했다.
이러한 그의 성장 배경은 후에 그가 환상 중에 만난 신을 유일신 알라(Allah)라고 선포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포교 활동을 시작한 것은 40세가 넘어서이다. 처음에는 고향인 메카(Mecca)에서 포교했으나 실패하자 메디나(Medina)로 옮긴 후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때가 주후 622년으로 이슬람교에서는 이 해를 그들의 기원 원년(즉A.H. 1년)으로 삼는다.
마호메트는 아카바 서약 6조를 제정하여 지키게 하였고 후에는 유대 교인들과 기독교인들이 자기를 따르지 않는다 하여 무자비한 학살도 감행하였다. 그리고 기독교를 본따서 카바(검은 돌)를 메카에 놓고 이곳만이 유일한 제단이라고 선포하여 어느 곳에 있든지 카바가 안치되어 있는 수도 메카를 향하여 기도하게 하였으며, 기독교의 금식처럼 라마단(ramadan)을 제정하여 의무적으로 금식일을 지키게도 하였다.
특히 마호메트는 구약의 족장들처럼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지배권을 확고히 하고 국가를 종교적 법률에 근거하여 통치하였다. 그러나 마호메트가 죽자 후계자의 정통성을 툴러싸고 갈등이 일어나 우마르 이븐알 카타브 이후 이슬람교는 수니파, 시아파 등 여러 갈래로 나뉘어졌다.
2. 경전의 구성
그들의 유일한 경전은 코란(Koran)이다. 또한 코란 못지 않게 회교법을 중요시한다.
코란은 유일신 알라(Allah)의 모든 가르침과 생활 규범 등을 담고 있는데 토라(Torah), 수후프(Suhuf), 자부르(Zabur), 인질(Injil) 등 4부분으로 구성된다.
① 토라는 구약의 모세오경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교의 토라는 마호메트가 기록한 것이다. ② 수후프는 선지자들의 글을 요약해 놓은 것이고 ③ 자부르는 다윗의 시편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④ 인질은 예수의 복음서 격인데 마지막 계시의 완성자는 마호메트 자신으로 보고 있다. 코란 전체는 신약성서의 80% 분량이며 총 11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코란의 주해 부분에는 하디스(Hadith; 전동)와 순나(Sunna; 관습)가 부록으로 실려 있는데 이 역시 코란과 함께 경전으로 취급된다.
3. 주요 가르침(5교리)
1) 유일하고 진실된 신 알라는 자존(自尊)하고 전지 전능(全知全能)하며 창조주(創造主)이자 심판자(審判者)이며 선과 악의 근원이다. 그러나 이슬람교가 강조하는 성품은 은혜가 아니라 심판이며 자비가 아니라 권능이다. 신론에 있어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속성과 같으나 그의 성품에 있어서는 은혜자 여호와 하나님과는 반대로 심판자로 나타나는 것이다.
2) 천사장인 가브리엘은 마호메트에게 코란에 담겨 있는 계시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천사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선과 악의 두 천사가 따라다닌다고 하였다.
3) 경전 : 코란만이 유일한 경전이며 코란의 계시만이 가장 완전하고 완성된 것이라고 가르친다.
4) 선지자 : 코란에는 모두 62명의 선지자가 나오며 그 중 가장 중요한 선지자 6명이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 그리고 마호메트이다. 그러나 자신을 제외한 모든 선지자들은 마호메트 자신을 위하여 예비된 선지자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5) 종말론 : 최후의 날에는 심판과 부활이 있을 것이다. 심판은 알라신이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알라와 마호메트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은 심판의 날에 쾌락의 전당인 낙원에 갈 것이요, 그렇지 않은 자들은 지옥에서 고통을 받을 것이다.
이슬람교는 알라의 뜻 안에 있는 운명의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 즉 인간의 모든 것들이 알라신의 예정에 달려 있다고 보며 인간의 신앙, 불신앙, 선행, 악행, 살인하는 것까지도 그의 예정으로 운명지어져 있다고 주장한다.
4. 삶의 양식
이들은 아라비아 양식이라는 그들 특유의 건축 양식을 갖고 있으며 운문과 산문에 있어서 많은 발전을 이룩했다. 그들은 남자에게 있어서 결혼이 필수적이며 여자는 남자의 소유물로 보고 있다. 남자의 할례는 필수적이며 여인들은 차도르(얼굴 가리개)를 써야 한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고기(특히 돼지고기)를 먹지 말 것과, 술과 도박을 절제할 것을 가르친다. 그래서 이슬람교도들은 유대교의 율법주의자들처럼 마호메트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지킨다.
5. 종파
마호메트의 사후 수니파와 시아파 그리고 수피파 등으로 나뉘어져 나갔다.
1) 수니파는 정통파 회교도들로서 선지자의 도를 따르는 무리들이라 볼 수 있다. 대부분의 회교도들이 여기에 속하는데 마호메트 생전의 모든 법들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2) 시아파는 오늘날 이란을 중심으로 한 종파로서 주로 활동을 강조하는 자들이 모인 집단이다.
3) 수피파는 이슬람교 내 신비주의자들로서 정통과 회교도들에 대항하는 철저한 율법주의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한마디로 이슬람교는 유대교를 모방한 이방 종교이다. 그러나 신 개념에 있어서 삼위일체를 인정하지 않으며, 또 그리스도 자체를 매우 격하시켜 이를 부인하고 있다. 그들은 구약성서에 없는 것들을 주장하고 있을 뿐 아니라 코란을 경전으로 내세워 성경의 권위를 무시한다.
결국 이슬람교는 마호메트라는 한 인간이 성경을 도용하여 세운 죽은 종교요, 기독교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제정하신 살아 있는 종교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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