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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자전거 이야기 - 투르 드 프랑스 신화와 전설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4. 11. 11:26
투르 드 프랑스
신화와 전설
1952년 알프듀에즈를 달리는 파우스토 코피와 장 로빅
두 사람은 모두 투르의 챔피언들이다.
프랑스 일주 대회
지금부터 1백 년 전 자전거로 프랑스를 일주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당시에는 도로가 형편없었으며 자전거는 무겁고 기어도 하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한여름의 뙤약볕 아래서 수천 킬로미터를 자전거를 타고 달린다는 것은 거의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스포츠 신문 〈로토 벨로(L'Auto Velo)〉의 기자였던 조르주 르페브르(Georges Lefevre)는 파리의 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다가 프랑스 국토를 일주하는 자전거 대회를 생각해냈다. 르페브르가 이런 구상을 한 것은 신문의 발행부수를 늘리기 위해서였다.
당시 신생 신문이었던 〈로토 벨로〉는 경쟁지인 〈르 벨로(Le Velo)〉보다 발행부수가 훨씬 적었다. 신문의 부수를 늘릴 수 있는 수단이 필요했다. 〈르 벨로〉는 이미 파리-보르도 대회와 파리와 브레스트를 왕복하는 대회를 개최해 성공을 거뒀는데 자전거 대회는 신문 발행부수를 늘릴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다. 르페브르가 상사인 앙리 데그랑주(Henry Desgrange)에게 이 구상에 대해 말하자 데그랑주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데그랑주는 "뉴스를 만들어내고 상상력을 사로잡을 수 있는 대단한 경기다.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고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투르 드 프랑스의 창시자 앙리 데그랑주는 전직 자전거 선수였다.
이 신문의 편집자였던 앙리 데그랑주는 한 시간 기록을 보유한 유명한 전직 자전거 선수였다. 그는 르페브르의 구상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당시에는 무모하기 짝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이 계획이 세계 최고의 자전거 대회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로토 벨로〉는 투르 드 프랑스(Tour de France)를 대대적으로 홍보했지만 처음에는 선수들이 이 무시무시한 경기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결국 〈로토 벨로〉가 참가비를 낮추고 상금은 올리자 60명의 선수가 참가했다.
1903년 7월 1일 새벽 3시, 선수들이 파리 교외를 출발했다. 대회 코스는 19일 동안 여섯 개 구간에 걸쳐 무려 2428km를 달려 다시 파리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선수들은 대회 중 같은 자전거를 이용하고 고장이 나면 자전거를 직접 고쳐야만 했다. 한 구간이 400km가량 됐기 때문에 선수들은 한밤중에도 달려야만 했고 한 구간 경기를 마친 뒤 며칠씩 쉬었다.
르페브르는 기차와 자전거를 타고 선수들을 따라다니면서 경기 결과를 기록하고 선수들을 감시했다. 또 신문에 기사를 쓰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프랑스의 모리스 가랭(Maurice Garin)이 여섯 개 구간 중에서 네 개를 우승했고 2위는 루시앵 포티에(Lucien Pottier)였다. 이포리트 아꾸투리에(Hippolyte Aucouturier)는 두 개 구간을 우승했는데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은 사실 때문에 실격됐다. 이에 불만을 품은 아꾸투리에의 팬들은 마지막 구간에 숨어 있다가 가랭에게 복수를 하려고 했는데 그가 옷을 바꿔 입고 가는 바람에 알아보지 못한 에피소드도 있다.
대회 기간 동안 선수들이 지나는 도시마다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대회를 구경했다. 마침내 7월 19일 서른두 살의 모리스 가랭을 선두로 스물한 명의 선수들이 파리에 도착했다. 파리 시민들이 한꺼번에 구경하러 나왔고 투르는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뒀다. 가랭이 그의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도 대규모 행렬이 그를 환영했다. 대회 개최 전에 3만 부였던 신문의 발행부수도 대회 개최 후에는 6만5천 부로 늘었다. 경쟁지였던 〈르 벨로〉는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우승자인 모리스 가랭은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에 데그랑주에게 준 글에 이렇게 썼다.
"당신은 사이클 경기에서 혁명을 이룩했습니다. 그리고 투르 드 프랑스가 열린 날은 도로 경기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 될 것입니다."
속임수와 방해
첫 번째 대회가 크게 성공하자 선수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회에서 이기려고 했다. 관중들 역시 자기 고향 선수를 위해 다른 선수를 방해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결국 대회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졌다. 두 번째 대회에서는 대회 자체가 아주 끝난 것처럼 보였다. 선수들은 끊임없이 협박에 시달렸다.
선수들 스스로도 감시를 피해 속임수와 부정을 일삼았다. 르페브르가 혼자서 이 모든 과정을 다 감시하기는 어려웠다. 길에 못을 뿌리고 난폭하게 차를 몰아서 대회 첫 우승자인 가랭과 포티에를 도랑으로 밀어 넣으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폭도들이 나타나 자기 고향 선수를 응원하며 이탈리아 선수들을 때리기도 했다. 심지어는 대회 관계자들이 권총을 뽑아들고 이들을 쫓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2회 대회 때 가랭은 "내가 파리에 도착할 때까지 암살당하지 않으면 우승할 것이다"고 농담을 했다. 이 대회에서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한 모리스 가랭을 비롯해 네 명의 상위 선수들이 규칙 위반으로 실격됐다. 차 뒤를 따르거나 지름길로 가기도 하고 동료 선수와 공모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모리스 가랭 역시 경기 도중 자가용 운전자로부터 음식을 받아먹은 아주 경미한 일로 실격됐다. 가랭은 평생 동안 자신의 억울함을 주장했지만 2회 대회 챔피언의 자격을 되찾을 수는 없었다. 그는 1953년 투르 드 프랑스 50주년 기념식에서 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2회 대회에서는 선두 주자들이 모두 실격하자 5위를 한 앙리 코른(Henry Cornet)이 우승자가 됐다. 데그랑주는 대회는 죽었다며 실망감을 나타냈다. 1905년에는 선수들의 부정을 막기 위한 조치들을 취했다. 선수들이 한밤중에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일을 막기 위해 야간 주행을 금지했다. 대회 방식도 바꿨는데 감시하기 쉽게 대회 구간을 열한 개의 짧은 구간으로 나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05년에는 첫 번째 구간에서부터 재난이 시작됐다.
길에는 무려 125kg의 못이 뿌려져 있었다. 선수들은 그야말로 못이 뒤덮인 길을 가야 했다. 그런 길을 지나다가 타이어가 펑크 나는 바람에 많은 선수들이 시간제한에 걸려 실격됐다. 대회는 혼란으로 빠져들었고 화가 난 데그랑주는 대회를 아예 없애버리겠다고 했다. 수행원들과 선수들이 그를 설득하자 데그랑주는 마지못해 시간제한에 걸렸던 모든 선수들을 복귀시키고 경기를 재개했다.
그런데 선수들의 순위를 확인했을 때 선수 한 명이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1907년 1회 밀란-산레모 대회에서 우승한 프랑스의 루시엥 프티 브르통(Lucien Petit-Breton)이었다. 브르통은 투르의 우승 후보로까지 거론되던 선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실격된 줄 알고 실망해서 기차를 타고 파리로 돌아가 버렸다. 뒤늦게 시간제한에 걸렸던 선수들이 다시 뛸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낭시로 돌아왔지만, 70점의 벌칙을 받고 두 번째 스테이지부터 경기에 참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해 투르에서 브르통은 종합성적 5위로 경기를 마쳤다.
부정을 막기 위한 여러 가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속임수는 끊이지 않았다. 1906년에는 세 명의 선수가 기차를 타고 가다가 실격됐다. 그러나 경기는 계속됐다. 최악의 사태는 1911년 대회 때 일어났다. 뛰어난 선수 중 한 명이었던 폴 듀복(Paul Duboc)이 경기 중 갑자기 얼굴이 창백해지고 경련을 일으키며 비틀거렸다. 그는 한 시간 만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다시 달렸다. 이 사건에 관해서는 몇 가지 추측이 있었다. 그의 트레이너가 기운을 돋우려고 만든 음료가 잘못됐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선수들에게 음식물을 나눠주는 곳인 '피드 존'에서 독약이 든 물병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무서운 소문이 돌았다. 듀복이 쓰러지면 또 다른 우승 후보로 꼽히는 구스타프 가리구(Gustav Garrigou) 선수가 가장 큰 혜택을 받을 것이었기에 가리구가 의심을 받았다.
선수들은 듀복의 고향인 루앙을 지나가야 했는데 그곳 주민들이 가리구를 의심할 것이 뻔했다. 가리구는 안전을 위해 다른 옷을 입고 번호도 떼어냈다. 또 가발과 짙은 안경으로 변장을 한 채 그곳을 지나가야만 했다. 이런 위험 속에서도 가리구는 우승을 차지했다. 광적인 관중들이 길에 못이나 유리 조각을 뿌리는 일은 점차 사라졌지만 방해 공작은 여전했다.
구스타브 가리구 선수는 또 다른 사건의 희생자였다. 1910년 대회 때 님에서 페르피냥까지의 구간에서 있었던 일이다. 님에서 가리구는 평소와 같이 그의 자전거를 방으로 가지고 들어갔다. 그의 팀은 아주 압도적으로 앞서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예방책이 그리 필요해 보이지 않았다. 가리구는 그날 밤 문을 잠그는 것을 깜빡 잊고 잠이 들었다. 그 대가는 엄청났다.
새벽 세 시 경기를 하는 중에 앞바퀴가 망가져버렸다. 볼 베어링이 쏟아져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누군가가 그의 자전거 바퀴 허브를 풀어놓았고 가리구는 그것을 모른 채 자전거를 탔던 것이다. 새벽 시간에 그는 기술자를 찾아야 했고 잃어버린 것과 같은 베어링을 구해야 했다. 거기서 그는 한 시간 반을 잃어버렸다. 그의 우승 가능성도 사라졌다.
초기의 투르는 이런 부정과 속임수, 협박과 폭력이 난무하고 아주 혼란스러웠다. 맹목적인 관중들도 크고 작은 사건을 일으키곤 했다. 그러나 이런 부정행위에도 대회의 인기는 여전히 높았다. 독특한 개성을 가진 선수들도 대회를 더욱 다채롭게 했다. 1911년 대회에서 페펭 남작은 자신의 시종 두 명을 앞세워 자신을 보조하도록 한 채 달렸다.
"당신들은 모두 살인자야!"
데그랑주와 〈로토 벨로〉의 기자들은 투르 드 프랑스의 선수들을 역사상 가장 강인하고 초인적인 사람들이라고 홍보했다. 그들이 묘사한 선수들의 모습은 보통 사람의 한계를 뛰어넘는 인내력으로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이겨내는 사람들이었다. 데그랑주는 투르가 가장 힘든 경기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산악코스를 도입했다. 이미 1905년에 발롱 드 알자스(Ballon d'Alsace)가 포함이 됐다. 발롱 드 알자스는 보주 산맥에 있는 산으로 꼭대기는 해발 1178m인데 투르에 포함된 최초의 산악코스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 다음에 등장하는 산들에 비하면 언덕에 불과했다.
앙리 데그랑주와 〈로토 벨로〉의 기자인 알폰스 스텐(Alphonse Steines)은 1910년 대회의 코스를 심사숙고하고 있었다. 스텐은 대회의 코스를 더 넓히기를 원했다. 그는 데그랑주에게 국경 지대를 탐사해 보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데그랑주는 북쪽은 괜찮지만 남쪽은 피레네 산맥이 가로막고 있어서 안 된다고 대답했다. 그때 스텐이 말했다.
"바로 그겁니다. 이제 선수들은 피레네와 싸워야 합니다."
"당신 정말 미쳤군."
데그랑주는 그의 생각을 일축했다. 그는 나무꾼들조차 가지 않는 곳에서 누가 목숨을 걸겠느냐고 말했다. 사실 1910년 당시 상황으로 볼 때 피레네 코스를 포함시키자고 한 제안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그곳에는 사는 사람도 없고 길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스텐이 포기하지 않고 고집을 부리자 데그랑주는 마지못해 한번 피레네로 정찰을 가보라고 했다.
스텐은 처음에는 차를 타고 가다가 나중에는 눈 때문에 걸어서 투르말레(Col du Tourmalet)를 넘었다. 산의 아름다움에 매혹된 스텐은 해가 지는 줄도 몰랐다. 그다음 날 경찰은 저체온증으로 거의 죽다시피 한 스텐을 발견했다. 그는 이를 덜덜 떨면서 말했다.
1910년 옥타브 라피즈가 자전거를 타고 가다 끌고 가다 번갈아 하면서 투르말레 정상을 오르고 있다.
"모든 게 좋아. 투르 드 프랑스 선수들은 투르말레를 올라갈 거야!"
스텐은 건강을 회복했지만 데그랑주를 설득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그가 피레네를 넘자는 얘기를 다시 꺼내자 데그랑주가 말했다.
"선수들한테 그런 데로 가라고 했다가 그 분노를 누가 감당하겠는가?"
그러나 1910년 데그랑주는 결국 피레네를 투르 드 프랑스 코스에 포함시켰다. 당시의 자전거는 변속기가 없고 기어도 단 하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산을 오르기에는 너무 힘이 들었다. 또 피레네의 산 속에서는 곰과 독수리에게 쫓길 우려도 있었다.
1910년에는 모두 열한 개의 산봉우리를 넘어가야 했는데 선수들이 산을 넘지 못하면 대회가 실패로 끝날 수도 있었다. 그해 대회에 참가한 110명의 선수 중에는 프랑수아 파베르(Francois Faber), 옥타브 라피즈(Octave Lapize), 구스타브 가리구(Gustav Garrigou) 등 투르의 역대 우승자들을 포함해 용감한 여러 선수들이 있었다.
데그랑주는 선수들이 험한 산을 고통스럽게 넘어가는 것을 보고 과연 대회가 성공할 수 있을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쌓아온 대회의 명성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산악 경기가 열리던 날 데그랑주는 과로로 몸이 아프다며 스텐에게 코스 감시를 맡겼다. 결국 옥타브 라피즈가 오비스크산 정상에서 대회 관계자들에게 욕을 퍼부어댈 때 욕을 먹은 사람은 그 자리에 있었던 스텐이었다. 스텐은 차로 산을 올라간 뒤 산꼭대기 부근에서 선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구경꾼들도 거기에 많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이 역사적인 현장을 사진에 담은 이름 모를 사진사도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선수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스텐은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가 실패로 돌아가지 않을까 걱정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 재난이 닥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마침내 한 선수가 나타났다. 그에게 다른 선수들은 다 어디 있느냐고 질문을 퍼부어댔지만 그는 말이 없었다. 이어서 옥타브 라피즈가 나타났다. 그는 자전거에 기댄 채 엄청나게 고통스러워하며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대회 심판들을 보자마자 이렇게 소리쳤다.
"당신들은 살인자야! 당신들 모두 살인자야! 사람에게 이런 일을 시킬 수는 없어."
이 산악구간에서는 라피즈가 우승을 했다. 그들은 정말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해냈다. 라피즈는 산악 구간에서 많은 점수를 딴 덕분에 그해 투르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오늘날 알프스와 피레네가 없는 투르는 생각할 수 없다. 진정한 투르의 역사와 전설은 산악지역에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투르 드 프랑스의 첫 주는 주로 평지가 연속되는 구간을 달린다. 그러나 평지에서는 선수들의 실력에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선수들이 혼자서 또는 팀별로 한 구간을 달려 시간을 측정하는 타임 트라이얼과 산악구간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경쟁이 시작된다. 진정한 승부는 산악지역에서 가려진다고 할 수 있다.
산악 지역은 선수들의 한계를 시험한다. 강한 선수들만이 투르의 악명 높은 산봉우리를 넘어 파리로 갈 수 있다. 투르 드 프랑스의 루트에는 알프스와 피레네의 우뚝 솟은 산봉우리들이 빠짐없이 포함이 된다. 랄프뒤에즈(1860m), 오비스크(1709m), 갈리비에(2645m), 투르말레(2360m), 몽방투(1909m) 등은 가장 험한 산들이다.
산악지대가 도입되면서 투르는 더욱 흥미진진하게 됐다. 데그랑주는 1933년 산악지역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에게 상을 주는 '산악왕'제도를 도입했다. 투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챔피언들은 평지와 타임트라이얼에서도 뛰어났지만 무엇보다도 산악지역에서 강한 선수들이었다.
투르 드 프랑스의 여정
투르 드 프랑스의 루트는 처음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대회는 항상 육각형의 프랑스 국토 전역을 일주한다. 한 해는 시계방향으로 돌고 그 다음해에는 시계반대방향으로 돈다. 알프스를 먼저 넘기도 하고 반대 방향으로 돌면 피레네를 먼저 올라간 뒤 알프스로 간다. 대회 첫 주는 평탄한 평지 구간이 이어진다. 그 후 피레네와 알프스를 넘기 시작한다. 대회가 인기를 얻어가면서 프랑스의 도시와 마을은 이 대회의 루트에 자신들의 고장이 포함되기를 열렬히 원하게 됐다. 대회 조직위원회는 해마다 수많은 희망 지역 중에서 투르가 지나갈 곳을 선정한다.
투르 드 프랑스는 3주 동안 육각형의 프랑스 국토를 일주한다.
선수들은 알프스와 피레네의 험준한 산봉우리를 넘어 해바라기와 라벤더 꽃이 만발한 들판을 지나간다. 또 한여름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몇 시간씩 달리기도 하고 눈이 쌓인 산악지대를 지나가기도 한다. 때로는 비와 우박이 쏟아지는 악천후를 만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을 지나 대회의 여정은 항상 파리에서 끝이 난다.
출발은 '프롤로그'라고 하는 짧은 구간 경주로 시작된다. 프롤로그는 벨기에, 룩셈부르크, 영국, 덴마크, 스페인 등 주변국에서도 개최된다.
외젠 크리스토프의 대장간
투르 드 프랑스 초기에 선수들을 괴롭힌 것은 무엇보다도 험한 도로와 잦은 자전거 고장이었다. 지금은 도로 경기에서 자전거가 고장 나면 바로 지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초기에는 선수들에게 줄 여분의 자전거와 부품이 없었고 선수들은 스스로 자전거를 고쳐서 타야만 했다.
1909년 우승자인 프랑수아 파베르는 결승선을 1마일도 채 남겨두지 않은 지점에서 체인이 끊어져 결승선까지 자전거를 끌고 달리기도 했으며 1928년 우승자인 니콜라 프란츠(Nicolas Frants)는 자전거가 고장이 나는 바람에 주변에 있던 자전거 가게에 유일하게 남아 있던 여성용 자전거를 타고 경기를 마쳤다. 그는 이 때문에 무려 30분가량이나 시간이 지체됐지만 그 전에 2위 선수를 한 시간 정도 앞서 있던 덕분에 챔피언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외젠 크리스토프가 대장간에서 자전거를 고치고 있다. 심판들은 옆에서 그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지 감시하고 있다.
투르 역사에서 최악의 불운의 주인공은 바로 프랑스의 외젠 크리스토프(Eugene Christophe)다. 피레네 산맥의 투르말레와 아스판 구간 사이의 깊은 골짜기에는 돌로 지은 오래된 헛간이 있다. 이곳은 이름 없는 건물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이곳이 '크리스토프의 대장간'이었다고 적힌 명판이 붙어 있다. 바로 이 헛간이 투르 역사상 가장 불운했던 사고를 목격한 건물이다.
1912년 대회에서 2위를 했던 프랑스의 외젠 크리스토프는 그다음 대회에서 어느 때보다 우승을 갈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그에게 승리 대신 가혹한 시련을 안겨줬다. 1913년 7월 9일 투르의 우승 후보들은 피레네 구간을 달리고 있었다. 크리스토프는 가리구와 티스 등 투르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들과 함께 투르말레를 넘어가고 있었다. 투르말레를 내려오는 동안 지나가는 차가 그를 치었다. 다행히 그는 다치지 않았지만 그의 자전거 포크가 부러져 버렸다.
크리스토프는 자전거를 어깨에 메고 13km를 달려 내려와 가까운 마을로 간 뒤 대장간을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뛰어 들어갔다. 대회 규정에 따라 아무도 그를 도와줄 수 없었다. 그는 혼자서 쇠를 녹이고 두드려서 포크를 만들고 그것을 자전거에 부착했다. 그가 자전거를 고치는 동안 심판들은 그가 외부의 도움을 받지는 않는지 감시했다. 그는 그곳에서 무려 네 시간 동안 힘들게 작업을 했다.
그가 두 손으로 쇠를 잡고 작업을 하는 동안 한 어린 학생이 풀무질을 해줬는데 이것 때문에 3분의 벌칙을 받았다. 이미 그가 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는 가능성은 사라져버린 뒤였다. 그가 자전거를 고치는 동안 그를 감시하던 심판들이 그에게 샌드위치를 사러 가도 되느냐고 물었다. 그때 그는 불같이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
"배고프면 석탄을 먹어요. 내가 당신들의 죄수가 됐으니 당신들이 해야 할 일은 나를 잘 감시하는 것뿐이오."
그는 자전거를 다 고친 뒤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려 대회를 마친 크리스토프는 그해 대회에서는 8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그의 불운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1919년에는 북프랑스에서 다시 포크가 부러졌는데 이때는 작은 자전거 공장을 발견해 바로 자전거를 고쳤다.
그러나 이 때문에 두 시간을 지체했고 우승은 날아가 버렸다. 1922년에는 갈리비에를 내려오면서 다시 같은 사고가 생겼는데 그때는 그 마을 성직자의 자전거를 빌려 타고 달렸다. 그는 1919년 종합 선두 주자가 입는 노란색의 엘로 저지(Yellow Jersey)가 도입됐을 때 처음으로 엘로 저지를 입는 주인공이 됐다. 그러나 한 번도 투르의 종합우승자가 되지는 못했다.
크리스토프가 자전거를 고치는 동안 어린 학생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것 때문에 벌칙을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그는 오히려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게 됐다. 사람들은 냉혹한 심판들이 무자비하게 규정을 적용하는 바람에 크리스토프 같은 선수가 희생자가 됐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1996년 투르의 5회 우승자인 스페인의 미겔 인두라인(Miguel Indurain)에게 알프스에서 일어난 일은 경기 규칙이 얼마나 가혹한지를 잘 보여준다. 인두라인은 그해 투르 6연승에 도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춥고 우박이 쏟아지는 날 빗속에서 산을 넘던 인두라인은 체력이 바닥나고 말았다. 이런 상태는 선수들에게 최악의 상황이다. 자칫하면 경기를 그만둬야 할 수도 있었다.
그는 지원차량에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경기 규칙상 결승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는 음식을 제공할 수가 없었다. 옆에 있던 다른 팀의 선수들이 그에게 마실 것 한 병을 건네줬다. 그는 이것을 받고 규칙 위반으로 20초의 벌칙을 받았다. 위대한 챔피언인 인두라인이 빗속에서 먹을 것을 간청하는 모습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이것이 비정한 투르의 참모습이다.
엘로 저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1915년부터 1918년까지 투르 드 프랑스는 중단됐다. 전쟁 중에 많은 챔피언들과 일류 선수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중에는 1909년 우승자인 프랑수아 파베르와 1910년 우승자인 옥타브 라피즈가 있다. 옥타브 라피즈는 타고 있던 전투기가 퐁타무송에서 격추되면서 전사했다. 파베르는 룩셈부르크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살고 있었지만 성인이 됐을 때 프랑스 국적을 선택하는 것을 깜빡 잊어버리는 바람에 자신도 모르게 외국인으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를 투르에 참가한 최초의 외국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에게 국적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파베르는 자원입대해 부상자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다가 적의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그는 프랑스 대중들의 최초의 자전거 영웅이었다. 경기 중 지친 선수들을 위해 먹을 것을 구해오고 여러 대회에서 우승한 뒤에는 기꺼이 동료들의 우승을 도울 정도로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전쟁 후에는 전쟁영웅으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1919년 다시 대회가 열렸다. 이때부터 투르 드 프랑스의 상징이 된 가장 중요한 전통이 생겨났다. 바로 '엘로 저지(Yellow Jersey)'라고 부르는 노란색 상의(Maillot Jaune, 마요 존)를 입는 전통이다. 이 전통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대회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참가 선수가 늘어나고 수많은 군중이 선수들이 지나가는 도로가에 나왔다.
군중들은 누가 대회의 선두 주자인지 알고 싶어 했다. '대회의 아버지' 앙리 데그랑주는 이런 군중들의 요구에 맞춰 선두 주자를 쉽게 알아 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선두 선수에게 노란색 상의를 입도록 했다. 그 다음부터 사람들은 노란색의 옷만 보고도 누가 선두인지 쉽게 알 수 있게 됐다.
노란색 상의를 입도록 한 것은 이 대회를 주최하는 〈로토 벨로〉의 신문 색깔이 노란 색이었기 때문이었다. 대회 중에는 종합 선두를 달리는 선수가 이 엘로 저지를 입고 파리 샹젤리제 거리의 시상대에서는 대회 종합 우승자가 이 옷을 차지하게 된다. 노란색 상의는 모든 자전거 선수들이 갈망하는 것이다.
투르에는 다른 색깔의 상의도 있다. 흰색 바탕에 빨간색 물방울무늬가 있는 상의(Maillot à Pois Rouges, 마요 아 푸아 루주)는 산악 코스에서 가장 뛰어난 '산악왕'이 입는 옷이다. 녹색 상의(Maillot Vert, 마요 베르)는 타임 트라이얼과 평지에서 잘 달리는 스프린터 선수가 차지한다. 흰색 상의(Maillot Blanc, 마요 블랑)는 25세 이하의 선수 중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에게 주어진다.
이 모든 저지를 한 해에 다 차지한 선수가 딱 한 명 있다. 바로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선수로 일컬어지는 에디 메르크스다. 에디 메르크스는 처음 출전한 1969년 투르에서 모든 색깔의 저지를 다 휩쓸었다. 그 다음부터 그에게는 '식인종'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도메스티크
도로 사이클 경기는 팀 스포츠의 성격이 강하다. 프로 사이클 팀은 한두 명의 세계적인 선수를 중심으로 각각 특기를 가진 선수들로 구성이 된다. 팀에는 산에서 강한 클라이머와 타임트라이얼(Time Trial, 일정한 거리를 개인 또는 팀별로 달려서 시간을 측정해 승부를 가리는 경기방식)에 강한 선수, 평지에 강한 스프린터가 있다. 가장 우승 가능성이 높은 선수가 팀의 리더가 되고 다른 선수들은 리더의 우승을 돕는 역할을 한다.
프로 사이클 팀에는 계급 구조 같은 것이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특이한 것이 바로 '도메스티크(Domestique)'의 존재다. 도메스티크는 프랑스어로 '하인'을 뜻한다. '보조선수'라고도 하는데 이들은 팀의 리더를 돕는 일을 할 뿐 아니라 팀의 궂은일을 도맡아 한다. 리더와 동료들을 위해 물병을 나르고 먹을 것을 갖다 준다. 리더의 앞에서 바람을 막아주고 리더를 다른 선수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는 것도 이들이 하는 일이다. 자전거 경기에서는 공기저항을 줄이는 것이 중요한데 앞에서 다른 선수가 바람을 막아주면 훨씬 쉽게 달릴 수 있고 힘을 아낄 수 있다.
도메스티크는 상대편 선수들을 유인하는 작전도 수행한다. 이들이 앞서 달리면 상대팀 선수들이 추격을 하고 상대팀의 선수가 지치면 그때 팀의 리더가 본격적으로 앞으로 나선다. 때로 리더의 자전거가 고장이 나면 자신의 자전거를 주기도 한다. 투르 드 프랑스에 출전하는 선수들은 세계 정상급 선수들이지만 기꺼이 도메스티크의 역할을 맡는다.
투르의 우승 뒤에는 이런 도메스티크의 희생이 숨겨져 있다. 투르에서 7연승을 기록한 암스트롱도 팀 동료들에게 그의 우승상금을 나눠줬다. 그렇기 때문에 투르의 우승자들은 자신의 팀 동료들에게 우승 상금을 나눠주는 전통이 있다. 대신 우승자는 상금 이외에도 스폰서와 광고주들로부터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다.
도메스티크로 시작한 선수가 나중에는 챔피언이 되기도 한다. 이탈리아의 파우스토 코피는 지노 바탈리의 도메스티크로 경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리더인 바탈리의 가장 강력한 적수가 됐다. 베르나르 이노(Bernard Hinault)와 그렉 르몽드(Greg Lemonde)의 관계도 유명하다.
1985년 투르 드 프랑스에서 이노는 5연승에 도전했다. 그런데 이노가 뒤처지고 이노의 도메스티크인 르몽드가 앞서갔다. 그러자 팀 감독은 르몽드에게 앞서가지 말고 이노를 도우라고 지시했다. 이노의 5연승이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르몽드는 리더를 위해 자신의 기회를 포기했다. 이노는 르몽드의 도움으로 5연승을 달성했으며 그다음 해에는 르몽드를 돕겠다고 했다. 다음 해에 이노는 약속대로 르몽드를 도왔고 르몽드가 우승을 했다.
르네 비에토
도메스티크 중에서 프랑스의 르네 비에토(Rene Vietto)만큼 유명한 선수는 없을 것이다. 르네 비에토는 뛰어난 선수였다. 그는 알프스 구간에서 몇 차례 구간 우승을 하며 우승 후보로까지 꼽힐 정도였다. 그러나 1934년 대회에서 그는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그는 팀 리더인 앙토넹 마뉴(Antonin Magne)의 도메스티크 역할을 해야 했다. 페르피냥 부근에서 엘로 저지를 입고 있던 팀 리더 마뉴가 넘어졌고 그의 자전거 앞바퀴가 망가져버렸다. 비에토는 마뉴가 선두를 유지할 수 있도록 그의 자전거를 마뉴에게 줬다. 여기서 비에토는 5분의 시간을 잃었다.
르네 비에토는 팀 동료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선수였다.
그다음 날 피레네 산맥의 포르테 다스페 내리막길에서 비에토는 리더보다 앞에서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뒤에서 달리던 마뉴의 자전거 체인이 끊어졌다. 마뉴를 추격하던 이탈리아 선수는 그를 앞설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속력을 냈다. 앞에서 달리던 비에토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마뉴 옆에는 팀 동료가 아무도 없었기에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가 없었다. 마뉴는 선두를 놓칠지도 모르는 위기에 놓였다.
그때 마뉴의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벌어졌다. 한 선수가 산을 올라오고 있었다. 바로 비에토였다. 모터사이클을 탄 대회의 진행요원이 마뉴가 곤경에 처했다는 것을 비에토에게 알려줬고 그는 다시 자전거를 돌려 산을 올라온 것이다.
비에토는 이번에도 그의 자전거를 마뉴에게 줬다. 그러고 나서 비에토는 자신의 자전거가 교체될 때까지 기다렸다. 이미 구간 승리나 파리에서 시상대에 설 수 있는 가능성은 사라져버렸다. 마뉴는 비에토의 도움으로 대회의 우승을 차지했다. 마뉴는 파리의 벨로드롬에서 우승 축하 퍼레이드를 할 때 비에토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며 함께 경기장를 돌았다.
이 대회의 사진 한 장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것은 비에토가 자신의 자전거를 리더에게 내준 뒤 돌로 된 담 위에 앉아 지원 차량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는 앞바퀴가 없는 자전거를 앞에 둔 채 체념과 실망이 가득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이 사진은 비에토를 유명한 선수로 만들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이타주의의 상징이 됐다.
르네 비에토가 팀 리더에게 자신의 자전거를 준 뒤 고장난 자전거가 교체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영원한 2등 풀리도
1964년 투르에서 프랑스의 자크 앙크틸(Jacques Anquetil)과 레몽 풀리도(Raymond Poulidor)가 어깨를 부딪치며 퓌드돔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모습은 투르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 중의 하나다. 두 사람의 경쟁관계는 이탈리아의 바탈리와 코피의 관계만큼이나 유명하다.
1964년 투르에서는 앙크틸이 대회를 주도하고 있었다. 풀리도는 앙크틸에게 뒤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팬들은 그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다. 앙크틸은 5연승을 노리고 있었고 종합선두로 엘로 저지를 입고 있었다. 풀리도는 집요하게 앙크틸을 추격했다. 두 사람은 모두 최상의 상태였으며 앙크틸이 종합선두에서 겨우 1분 정도를 앞서고 있었다. 7월 12일 그들의 대결은 정점에 달했다. 퓌드돔 정상까지는 10km의 오르막이 놓여 있었다. 풀리도는 산악에 강한 선수였다. 두 사람은 마지막 오르막 구간까지 서로 어깨를 부딪치며 산을 올라갔다.
"우리는 서로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상대방이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그만큼 힘들다는 것을 알았죠. 우리는 피로에 맞서 싸우고 있었습니다."
풀리도가 이렇게 당시를 회상했다. 정상을 앞둔 지점에서 풀리도가 앞서갔지만 그는 자신이 앙크틸을 따돌렸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날 앙크틸은 거의 탈진상태였다. 결승선을 약 1km 앞둔 상태에서 풀리도가 치고 나갔고 그날 앙크틸은 42초를 잃었다. 그날 풀리도는 앙크틸과의 차이를 많이 좁혔다. 경기가 끝났을 때 앙크틸은 풀리도보다 겨우 14초를 앞선 상태에서 가까스로 엘로 저지를 지키고 있었다.
"만약 그때 풀리도가 엘로 저지를 차지했다면 나는 그날 저녁 짐을 싸서 돌아갔을 겁니다."
앙크틸이 말했다. 앙크틸은 풀리도의 추격을 받고 있었지만 파리로 가는 마지막 타임 트라이얼에 기대를 걸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가장 강한 분야였기 때문이다. 앙크틸은 타임 트라이얼에서 쉽게 이기고 풀리도보다 55초 앞선 기록으로 투르에서 5연승을 달성했다. 파리의 시상대에서 앙크틸은 몸을 구부리고 풀리도의 귀에 대고 말했다.
"자네가 나를 기분 좋게 해주는군."
선수들의 시련과 죽음
투르 드 프랑스에서 선수들은 수많은 부상과 사고에 시달리는데 대회 중에 선수들이 목숨을 잃는 참사가 일어나기도 한다. 1935년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세페다 선수가 갈리비에를 내려오다 추락해서 사망했다. 1967년 무더운 날씨 속에서 몽방투를 오르던 영국의 톰 심슨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약물을 사용하고 술까지 마신 채 산을 오른 것이 원인이었다. 그는 세계도로사이클 챔피언이자 영국을 대표하는 선수였다.
1995년에는 이탈리아의 파비오 카사텔리(Fabio Casartelli)가 경기 도중 목숨을 잃었다. 투르의 막바지인 15구간에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도로 챔피언인 파비오 카사텔리가 포르테 다스페의 내리막길에서 다른 선수 20여 명과 함께 넘어졌다.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지만 헬멧을 쓰지 않은 파비오는 목과 두개골 파열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은 선수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그는 이탈리아의 희망이었다. 결혼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갓 태어난 아들도 있었다. 그가 소속된 모토로라 팀은 충격에 빠진 채 경기를 계속할지 그만둘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선수들 중 반은 경기를 중단하고 돌아가 슬픔을 나누자고 했고, 다른 선수들은 파비오를 위해 계속 달리자고 했다. 파비오의 아내가 와서 파비오도 경기가 계속되기를 원했을 것이라며 경기를 계속해 달라고 했다.
이튿날 열린 경기는 사실상 파비오를 추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날 선수들은 질주하지 않았다. 모두 슬픔에 잠긴 채 포까지 240km를 여덟 시간 동안 달렸다. 파비오의 자전거를 실은 차량이 선수들을 뒤따라왔다. 그날의 승리는 상징적으로 모토로라 팀에게 주어졌다. 리모주(Limoges) 구간을 앞둔 날, 모토로라 팀 감독은 팀원들을 모아놓고, 파비오에게는 그해 투르 드 프랑스에서 두 가지 목표가 있었는데 하나는 투르를 완주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리모주 구간에서 우승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파비오의 팀 동료인 랜스 암스트롱은 파비오를 위해 리모제 구간에서 우승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결승선을 30km 앞두고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아무도 그를 따라잡지 못했다. 암스트롱의 이날 질주에 대해 리샤르 비랑크는 "오늘 누군가가 저 위에서 그에게 믿을 수 없는 놀라운 힘을 줬다"고 말했다.
암스트롱은 혼자서 결승선을 통과하면서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켜 파비오를 추모했다.
"나의 승리는 파비오와 그의 가족, 아이 그리고 이탈리아를 위한 것이다. 나는 결승선을 지나면서 하늘을 바라보고 손을 흔들었다. 파비오를 향해."
투르가 끝난 뒤 오크는 파비오를 위해 피레네의 포르테 다스페에 대리석으로 기념비를 세웠다. 지금도 선수들은 그곳을 지날 때 파비오를 추모한다.
때로는 투르의 험난한 여정에서 아예 선수 생명이 끝나버리는 일도 있다. 1950년 투르 우승자인 스위스의 페르디 쿠블러(Ferdi Kubler)는 1955년 7월 18일 몽방투(Mont Ventoux)의 오르막을 앞두고 있었다. 프로방스의 거인 몽방투 정상까지는 가파른 고개를 22km나 올라가야 했다. 한여름의 태양 아래서 길은 타들어갈 듯 뜨거웠다. 프랑스의 라파엘 제미니아니 선수가 쿠블러에게 경고했다.
페르디 쿠블러(왼쪽)는 몽방투에서 더위에 굴복하고 말았다.
"조심해 페르디, 몽방투는 다른 산하고는 달라."
그러나 쿠블러는 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페르디도 다른 선수하고는 달라."
페르디 쿠블러는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처음부터 속도를 내 앞에서 달렸다. 마치 결승선을 앞둔 것처럼 혼자서 빠르게 산을 향해 돌진했다. 달 표면과도 같이 삭막한 몽방투는 그늘이 하나도 없는 민둥산이었다. 그는 타는 듯한 더위 속에서 계속 비틀거렸다. 조금 가다가 멈춰 서기를 반복하며 겨우 정상에 도달했을 때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내려올 때는 비틀거리며 카페에 들어가 잠시 쉬었다가 다시 경기를 시작했지만 다른 방향으로 달리고 말았다. 그의 팀 감독이 그를 다시 돌려세웠다. 잠시 후에 쿠블러는 폭발해버렸다. 그는 아무도 가까이 오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다. 일사병으로 몇 번을 넘어진 끝에 겨우 레이스를 마친 쿠블러는 그날 저녁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있어 투르는 끝났다. 페르디는 너무 늙었다. 그는 고통을 겪고 있다."
그는 자신에 대해 3인칭 어법을 사용해 이렇게 말했다. 투르의 챔피언도 자연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만 것이다. 그의 말은 선수들이 겪는 고통을 가장 잘 표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페르디는 몽방투에서 자신을 죽였다."
쿠블러는 그다음 날 바로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리고 다시는 투르 드 프랑스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는 이듬해 사이클을 그만둔 뒤 취리히에서 꽃가게를 열었다.
톰 심슨의 죽음
1967년 투르 드 프랑스에서 영국의 톰 심슨(Tom Simpson)은 시상대에 서기를 갈망했다. 그는 1965년에 세계도로사이클 챔피언이 됐는데 영국인으로서는 국제 대회에서 가장 좋은 성적이었다. 7월 13일 그는 선두 선수보다 거의 8분 차이로 뒤지고 있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몽방투 구간의 경기가 가장 중요했다.
선두에서 리더들과 보조를 맞추던 심슨이 몽방투를 5km 앞두고 공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날은 너무 무더웠고 황량한 몽방투의 정상으로 오르는 길에는 오직 이글거리는 태양만이 있을 뿐이었다. 심슨은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올라가다가 힘이 빠졌다. 그는 조금 올라가다 자전거에서 굴러 떨어졌다.
"나를 자전거에 태워줘요."
심슨은 간청했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심슨은 자전거를 타고 조금 더 올라가다가 심하게 비틀거렸다. 관중들이 그를 부축했지만 그는 바로 길가에 쓰러져 의식을 잃고 말았다. 관중과 의료진들이 응급조치를 실시하고 헬리콥터가 도착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심슨의 사망 원인은 일사병과 암페타민이었다. 게다가 그는 술까지 마신 상태였다. 그의 혈액에서는 알코올과 암페타민 성분이 검출됐다.
나중에 증인들은 그가 몽방투를 오르기 전에 술을 두 잔 마시는 것을 봤다고 증언했다. 또 그의 상의 주머니에서 암페타민이 발견됐다. 약물과 알콜 그리고 몽방투가 그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 심슨이 죽은 다음날 펠로톤은 그를 추모하며 그의 팀 동료에게 구간 우승을 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것은 영국 팀에게는 비통한 승리였다. 오늘날 몽방투 정상 부근에는 톰 심슨의 기념비가 서 있는데 선수들은 이곳을 지날 때 그를 추모한다.
톰 심슨의 죽음은 1960년대에 일어난 가장 어두운 사건이다. 그의 죽음 이후 사이클계는 약물 검사를 실시하면서 약물을 추방하고자 노력해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이클계의 금지약물 스캔들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톰 심슨이 죽기 전까지 선수들은 아무런 제한 없이 약물을 복용했는데 당시에 가장 많이 사용한 것이 암페타민이었다. 선수들은 암페타민을 사용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파우스토 코피와 자크 앙크틸은 공개적으로 약물을 복용한다고 말했다.
코피는 항상 약물이 필요하다고 했으며, 앙크틸 역시 "투르 드 프랑스는 물만 먹고 달릴 수 없다"며 약물 복용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선수들은 힘든 경기에서 고통을 덜고 좀더 좋은 기록을 얻기 위해 약물을 사용했지만 10년을 주기로 대형 약물 스캔들이 터지면서 사이클의 이미지는 추락했다. 약물 스캔들은 지금까지도 사이클링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다.
8초 차이의 승리
1989년 76회 투르 드 프랑스 마지막 날 벌어진 프랑스의 로랑 피뇽(Laurent Pignon)과 미국의 그렉 르몽드(Greg Lemonde)의 타임 트라이얼만큼 극적인 경기도 없을 것이다. 로랑 피뇽과 그렉 르몽드는 모두 투르의 챔피언이었다. 피뇽은 1983년과 1984년 우승자였으며 르몽드는 1986년 우승자였다. 르몽드는 1987년 사냥을 하다 총기사고로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는 2년 뒤 다시 투르에 복귀했는데 그의 몸에는 여전히 납탄이 박혀 있는 상태였다. 로랑 피뇽은 투르의 3연승을 노렸고 르몽드는 피뇽을 추격하고 있었다.
그해 대회에서 두 사람은 종합선두 선수가 입는 엘로 저지를 다섯 번이나 주고받았다. 그렉 르몽드는 타임 트라이얼에서 두 차례 이겼고 로랑 피뇽은 산악지역에서 다시 엘로 저지를 되찾아왔다. 파리 시내에서 끝나는 마지막 구간을 남기고 있을 때 피뇽이 종합성적에서 르몽드를 50초 앞서고 있었다.
50초는 작은 차이였지만 충분히 우승을 결정지을 수 있었다. 마지막 타임 트라이얼 경기는 불과 25km 거리에 불과했다. 르몽드는 타임 트라이얼이야말로 피뇽을 이길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경기 코스가 너무 짧았다. 피뇽의 소속팀 감독도 르몽드가 피뇽을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아무도 르몽드가 피뇽을 이기고 우승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오직 르몽드만이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개인 타임 트라이얼은 한 사람씩 정해진 코스를 달린 뒤 시간을 측정하는 경기다. 르몽드는 마지막에서 두 번째로 달렸다. 그는 당시까지는 사용되지 않았던 새로운 장비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바로 공기저항을 최대한 줄일 수 있는 공기역학적인 신형 헬멧과 핸들바였다. 이 새로운 핸들바는 팔을 쭉 뻗을 수 있고 상체도 최대한 구부릴 수 있어 공기의 저항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르몽드는 놀라운 속도로 달렸다. 그는 시속 54.55km를 기록했다. 이 기록은 투르의 타임 트라이얼에서 가장 빠른 구간 기록으로 남아 있다. 구간 승리는 확실했다. 그러나 전체 기록에서 피뇽을 이길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피뇽은 마지막 주자였다.
르몽드는 피뇽의 경기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피뇽이 경기를 끝냈을 때 관중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50초를 앞서던 피뇽이 마지막 경기에서 르몽드보다 58초 늦게 결승선을 통과했다. 종합 성적에서는 르몽드가 8초 앞선 기록으로 역전을 한 것이다. 프랑스 관중들은 충격에 빠졌다. 피뇽 역시 충격을 받아 결승선에서 쓰러졌다. 르몽드는 자신이 해낸 일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8초 차이의 승리는 투르 역사상 가장 근소한 것이다. 후에 피뇽은 자신이 투르에서 2연승을 한 챔피언이지만 사람들은 그렉 르몽드에게 8초 차이로 진 사실만 얘기한다며 불평했다.
투르의 불문율
암을 극복하고 불굴의 의지로 투르에서 7연승을 기록한 미국의 랜스 암스트롱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줬다. 또 그의 활약으로 투르 드 프랑스는 더 유명해졌으며 사이클을 잘 모르던 미국에서 사이클 붐이 일어나기도 했다.
암스트롱이 투르 드 프랑스에 출전하는 동안 최대의 경쟁자는 독일의 얀 울리히였는데 두 사람은 경쟁 관계이면서도 상대방을 존경하는 멋진 스포츠 정신을 보여줬다. 두 사람이 서로 상대방이 넘어졌을 때 기다린 이야기는 투르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다.
2003년 대회에서 암스트롱은 시작부터 고전했으며 경기 중 다른 선수들의 강력한 도전을 받고 있었다. 더군다나 경기 도중 뜻밖의 사고가 발생하면서 위기를 맞았다. 선수들이 15구간인 피레네 산맥의 뤼즈 아르디당 정상을 향해 오르막을 올라가고 있을 때였다. 길가에서 한 어린아이가 투어 기념품점에서 물건을 담아주는 노란색 비닐봉투를 흔들고 있었다. 갑자기 그 비닐 봉투가 암스트롱의 브레이크 핸들에 휘감겼다. 사이클이 심하게 요동쳤고 그는 인도 쪽으로 넘어졌다.
그때 사람들의 관심은 뒤따라오는 얀 울리히에게 쏠렸다. 울리히는 가까스로 충돌을 피했다. 그러나 그는 딜레마에 직면했다. 그의 앞에는 암스트롱이 없었고 속력을 높여서 달릴 수 있었다. 그렇게 했더라면 그가 우승을 차지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울리히는 엘로 저지를 입은 선수가 넘어졌을 때는 절대 공격하지 않는다는 투르의 불문율에 따라 멈춰 섰다. 그는 암스트롱이 다시 경기를 시작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는 자신에게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프로 선수다운 모습을 보여줬다. 그것은 아주 존경 받을 만한 행동이었다.
울리히의 행동은 2년 전 암스트롱이 그에게 보여준 것과 같은 것이었다. 2001년 피레네 산맥의 내리막길에서 울리히가 산길을 내려오다 도로의 갓길을 벗어나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졌다. 끔찍한 사고였다. 울리히의 사고를 목격한 암스트롱이 속도를 줄이자 다른 선수들도 일제히 속도를 줄였다. 그때 암스트롱이 다른 선수들에게 말했다.
"기다립시다. 울리히가 무사한지 모두들 기다려 봅시다."
몇 분 후 울리히가 낭떠러지를 올라왔다. 다행히 울리히는 큰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 선수들은 울리히가 다시 대열에 합류할 때까지 기다리며 천천히 달렸다. 이것이 바로 사이클 경기의 전통이었다. 암스트롱은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투르의 승리는 가장 강한 선수의 것이지 가장 운 좋은 선수의 것이 아니다. 예기치 못했던 다른 선수의 사고로 어부지리를 얻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투어에 참가한 선수들의 도덕이었다."
2년 전 암스트롱이 울리히를 기다린 것처럼 2003년 대회에서는 울리히가 암스트롱을 기다린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울리히에게는 경기를 희생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암스트롱은 일어서자마자 힘껏 질주하기 시작했고 모든 선수를 물리치고 구간 우승을 차지했다. 암스트롱은 그 대회에서 5연승을 기록했다.
투르의 현재와 미래
투르는 지난 2003년 1백 주년을 맞았다. 한 신문사가 발행 부수를 늘리기 위해 시작한 자전거 대회가 이제는 올림픽과 월드컵에 버금가는 세계적인 스포츠행사가 됐다. 1980년대 이후에는 사이클의 본고장인 유럽뿐 아니라 다른 대륙에서도 선수들이 투르에 몰려들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남미, 러시아 선수들이 투르에 참가한다. 또 전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TV 중계를 통해 이 경기를 시청한다. 오늘날 투르 드 프랑스는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한 대회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너무 상업적인 대회가 됐고 너무 비대해졌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투르 드 프랑스는 자전거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자동차 시대가 도래하면서 자전거에 대한 열기가 식었지만 유럽에서 투르를 비롯한 유명한 자전거 대회가 사이클링의 인기를 지켜왔다. 투르는 프랑스 사람들에게는 더욱 특별하다. 이 대회는 프랑스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는 역할도 하고 있다. 프랑스의 작가 폴 푸르넬은 투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투르 드 프랑스는 프랑스 사람들의 의식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2004년 투르 드 프랑스
대회는 항상 파리에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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