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편지 58신]바람직한 시제時祭의 한글축문
어느새 50대 중반이 된 동생에게.
너도 알다시피, 나는 대망의 꿈(천재 바둑기사)의 꿈을 꾸고,
초등학교 시절 전북 임실 고향에서 전주로 전학을 했었다.
5학년 2학기였고, 아버지쪽의 유일한 친척인 작은집,
그러니까 너희집에서 학교를 중학교까지 다녔다.
작은 어머니가 1968년 사촌동생인 너를 낳았는데,
어찌나 이쁘든지 학교만 갔다오면
내가 네 손가락 발가락을 빨아대는 통에
그 여린 손톱이 빠졌대지.
몇 년 전 네가 나에게 빠진 손톱에 대해 ‘손해배상’을 요구해 웃었구나.
네 밑의 여동생 두 명도 무척 예뼈했었다.
원래 숙부叔父처럼 남의 애기조차 예뻐하는 성격인데,
하물며 내 동생이었으니 오죽했겠니.
나의 <찬샘통신>, <찬샘뉴스>, <찬샘편지>를 받을 때마다
그 글에 안성맞춤인 시들을 어디에서 그리 잘 찾아내어
보내주는지 늘 신통방통하다고 생각한 동생아,
오늘은 너에게 평생 처음으로 쓰는 편지구나.
내일이 청명이고 모레가 한식.
해마다 이때쯤이면 두 집 형제들이 모여
‘산제사’인 시제時祭를 지내는 것을 알고 있겠지.
오늘 비가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큰아버지와 둘이서 시제를 지내고 왔다.
너야 독실한 기독교신자여서 절조차 하지 않지만
(그것을 뭐라 비난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올해 시제는 코로나시국인 만큼 아무도 오지 말고,
지내지 말자고도 했었구나.
하지만, 바로 가족묘지 밑에 사는 내가 있는데,
그냥 지나갈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오수장에서 약간의 제수祭需(큰 배 3개, 사과 5개, 귤 1팩, 알밤 1팩, 최고급 육포,
식혜와 청하 각 1병)를 구입하고, 새벽에 일어나 축문 석 장을 썼다.
시제는 원래 5대조 할아버지 이상을 모시는 산제사山祭祀이나,
우리집은 방안제사를 십 수년 전부터 진안 마이산에서
1년에 세 번 천도재를 지내는 것으로 대신하고,
청명 한식 즈음에 5대조부터 조부·조모까지의 제사를
산에서 딱 한번 지내오고 있는 것을 알고 있겠지.
올해 처음으로 이 형이 축문을 한글로 써봤구나.
앞으론 이렇게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다.
<비는 글>
서기 2021년 4월 3일 토요일 오전 10시
현손이자 고손자인 영록은
21대 현조고顯祖考 증통정대부贈通政大夫 복문福文
현조고비顯祖考妣 숙부인淑夫人 서천西川명씨明氏
22대 고조고高祖考 시관時寬
고조고비高祖考妣 유인孺人 전주全州이씨李氏소숙小淑
봉분 앞에 엎드려 절하옵니다.
계절이 바뀌어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오고
청명淸明 한식寒食이 돌아왔습니다.
사모하는 마음이 가슴에 가득합니다.
이에 현조·고저 할아버지 할머님의 높은 은덕을 생각하며
맑은 술과 소찬으로 재배를 올리오니
부디 흠향하시고
자자손손 굽어 살펴주시옵소서.
상향
어떠냐? 어려운 한문으로 ‘유세차’ 어쩌고하며 ‘감소고우敢昭告于’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냐?
이어서 증조부·증조모님<23대 증조고曾祖考 정선定宣·증조고비曾祖考妣 유인孺人 평산平山신씨申氏계주季住>과
조부·조모님<24대 祖父考 형우亨友·조모고비祖母考妣稿 진양晉陽하씨河氏채녀采女>
봉분에 절하고 축문에 이름만 바꾸어 읽어드렸구나.
이런 제사문화를 조선 500년을 지탱해온 유교문화의 마지막 잔재라면 할 말 없지만,
꼭 그렇게 볼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남상濫觴'이나 '음수사원飮水思源'이라는 말이 있듯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근원과 조상님들의 깊은 은덕을 생각해보는 이러한 의식儀式은
특정종교와 상관없이 우리가 지키고 보존해야 할 미풍양속美風良俗일 것이다.
너도 기억할 것이다.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라는 책을. 영화로도 만들어졌지.
자신의 뿌리를 모른대서야 되겠냐는 게 이 형의 생각이다.
여기에 대해서도 너와 나는 생각이 다를까 모르겠지만, 그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어차피 우리는 한자와 한문의 문맹자文盲者나 마찬가지인 마당에
뜻은커녕 쓸 수도 모르는 한문투성이의 축문을 쓸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으로 한글로 풀어본 ‘비는 글’을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1년중 하루, 그것도 잠깐 가족묘지에 올라
2,3,4,5대(조부, 증조부, 고조부, 현조부) 할아버지와 할머님들을 동기同氣들과 추념追念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어찌 쓸데없는 일일까?
그래서 오늘 형은 은근히 조금 뿌듯했구나.
오늘의 날짜와 이런 의식, 염두에라도 두라는 뜻으로 소식을 전한다.
이 비 그치면 바야흐로 봄이 날개를 활짝 필 것이다.
두릅과 엄나무순도 싹을 피울 것이고, 고사리도 솟아나지 않을까?
내일모레는 산에 올라 ‘고사리바탕’을 가볼 생각이다.
제철음식을 먹는 것은 보약補藥에 다름 아니다.
도회지에서 숨막히게 사는 사람들을 연민의 마음으로 보는 이유이다.
아무리 코로나가 기승을 부린다한들,
주말이면 가족들과 조금이라도 여유를 찾았으면 좋겠다.
핑계로 ‘방콕’과 ‘집콕’만 고집하면 ‘코로나 블루’에 시달리지도 모르겠다.
시간을 내어 훌쩍 전주집과 형의 집을 다녀가는 것도 좋은 길일 듯싶다.
잘 지내라. 줄인다.
4월 3일
임실 우거에서 형이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