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050
2월28일 [연중 제8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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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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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l8joMzfpoMQ (임시백 치백요셉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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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자들은 눈을 부릅뜨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거듭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는 예수님의 말씀, 언뜻 생각하면 부자들을 강력히 질타하고 경고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위 말씀은 반대로 부자들을 격려하고 도와주며, 구원과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게 인도하는 사랑의 말씀이 분명합니다.
평생토록 노력하고 또 노력한 끝에 엄청난 부를 축척한 부자들 가운데 참으로 불행한 부자들을 자주 봅니다. 혼자, 혹은 가족들 전체가 펑펑 써도 백 년 이상 쓸 엄청난 부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자신이 영원히 살 것으로 여깁니다. 남은 세월은 길어 봐야 십 년, 이십 년인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그 막대한 재산에 영원히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으려니 생각합니다. 그 막대한 재산 십분의 일만 쪼개서 극도의 가난으로 고통받고 있는 이웃들, 쫄쫄 굶주리는 이웃들, 쓸쓸하고 외롭게 죽어가고 있는 청년들 위해 관대하게 희사 좀 한다면 참 좋으련만, 죽었다 깨어나도, 단 1도 그런 마음이 없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 아까운 재산 남겨두고 가려니 어디 눈이나 제대로 감기겠습니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자라고 다 같지 않습니다. 참으로 관대하고 너그러운 부자들을 만납니다. 부를 축척하기까지 겪었던 힘든 시절의 고통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동료 인간을 향한 측은지심과 연민의 정으로 가득합니다. 가련한 사람 만나면 절대로 그냥 지나치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 크게 기뻐하시고 자자손손 축복하실 부자들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모든 부자를 다 한꺼번에 싸잡아 경고하신 것이 아닙니다. 부자들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하루하루 근면 성실하고 정직하게 재산을 모은 부자들은, 주님으로부터 흘러넘치는 축복과 칭찬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부정한 방법으로 태산같이 재산을 축척하지만, 땡전 한 푼도 나눌 줄 모르는 부자들, 자신의 재물을 일종의 권력으로 여기면서, 없는 사람들을 내리누르고 경멸하고, 갑질을 일삼는 부자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런 부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초강력 경고 메시지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알렉산더의 클레멘스 교부의 말씀에 따르면 “인간은 재산을 지니기만 하면 그것을 무절제하게 사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자는 신앙을 지니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부자들을 절망 속에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재산이 많다 하더라도, 그 힘센 마력으로부터 돌아서서 주님만을 찾으며 자제할 수 있는 사람은, 재물로 인한 피해를 입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예수님 말씀 앞에 부자들께서는 절망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부자로서 영원한 생명에 도달하는 길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하면 됩니다. 고민과 성찰 끝에 도출해낸 결론에 따라 관대한 사랑의 나눔을 실천하면 됩니다.
저는 사목자로 살아가면서 참으로 멋진 부자들을 많이 만납니다. 최선을 다해 맡은 일에 충실합니다. 남들 다 가는 해외 여행 한번 가지 않습니다. 그렇게 모으고 또 모은 재산을 아낌없이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기부합니다. 제 개인적으로 그분들의 삶 앞에 참으로 큰 부끄러움과 동시에 큰 존경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부자의 모습입니다.
부자들이 주님의 계명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며, 지나가는 재물보다 주님의 계명을 더 추구한다면, 주님께서는 부자들을 결코 구원의 대열에서 제외시키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부자들의 구원을 가로막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부자들은 눈을 부릅뜨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거듭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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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부자'의 의미>
영국의 유명한 부자인 컨글튼 경이 어느 날 집에서 일하고 있는 하녀가 부엌에서 접시를 닦다말고 한숨을 쉬며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이고, 5파운드만 있으면... 5파운드만...”
이 소리를 들은 컨글튼 경은 그 하녀에게 5파운드가 급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힘내라며 5파운드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돌아 나오는데 더 큰 한숨소리가 들리며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아이고, 10파운드라고 할 걸... 10파운드라고 할 걸...”
우상은 내가 지배를 받는 대상이고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내가 섬기는 것입니다. 만약 지금 하느님의 뜻이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임을 알았지만 그대로 할 수 없다면 그 재산은 나를 지배하는 우상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내가 섬기는 우상이 나에게 무엇을 주는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의 양심의 소리입니다. 분명 양심에서는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라고 소리 지릅니다. 그러나 부자 청년은 그 목소리가 진리이고 그게 옳은 일음을 잘 알고는 있지만 그 소리를 따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재산이 그 자신의 것이고 그래서 자신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섬기는 대상, 즉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옳은 대로 할 수 없는 처지에 서게 되었을 때 ‘슬픔’이 옵니다. 감옥에 갇혀서 기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마치 이집트의 노예 살이 할 때처럼 자유를 빼앗기고 지배를 받아 우울한 삶을 살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내 위에는 하느님의 뜻 외에 어느 것도 두지 말아야합니다. 스스로 노예가 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에는 ‘어떤 농구 시합’이라는 소제목으로 이런 어린이들의 가슴 따듯한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케빈’이라는 아이는 같은 또래의 아이들보다는 모든 면에서 뒤처지는 부족한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동네에서 어린이 농구팀을 만든다는 얘기를 듣고는 그 농구팀에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물론 케빈이 속한 농구팀은 경기에 나가 단 한 번도 이겨보지 못했습니다. 바로 케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케빈은 계속 슛을 연습했습니다. 한 번은 공이 골대를 스쳤습니다. 케빈은 너무나도 좋아서 펄쩍펄쩍 뛰었습니다. 케빈이 속한 농구팀의 마지막 경기가 펼쳐졌습니다. 상대는 어린이 농구팀 중에 한 번도 저 본 적이 없는 가장 강한 팀이었습니다. 예상대로 3쿼터까지 점수는 30점차 이상 벌어졌습니다.
마지막 4쿼터도 거의 끝나갈 무렵 케빈이 속한 농구팀의 한 아이가 타임을 불러 경기가 잠시 중단되었습니다. 그 아이는 영문을 모르는 감독에게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지금까지 경기해 오면서 케빈은 단 한 번도 슛을 성공시킨 적이 없어요. 이번이 마지막 경기입니다. 이길 수 있는 가능성도 없으니 케빈에게 한 번만이라도 슛을 성공시킬 수 있는 기회를 주죠.”
모두가 이 말에 동의하였습니다. 동료들은 케빈에게 평소에 슛 연습하던 가장 좋아하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공을 잡으면 케빈에게 무조건 패스를 하였습니다.
케빈은 계속 공을 던졌지만 골대를 맞추지도 못하고 오히려 상대팀에 빼앗겨 점수 차는 점점 벌여졌습니다. 그런데 상대팀 한 아이가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눈치를 채고는 자신이 몰고 가던 길을 되돌아와 케빈에게 공을 패스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케빈은 골을 성공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이번에는 골대 밑에 있던 상대팀 선수가 공을 잡아 다시 케빈에게 패스하였습니다. 역시 성공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양 팀 선수들은 서로 뒤섞이어 케빈을 둥그렇게 둘러싸고는 공을 계속 케빈에게만 던져주었습니다. 경기 마칠 시간이 다 되어 갔지만 역시 케빈은 골을 성공시키지 못했습니다.
감독님은 전광판 시간을 보았는데 시간은 40초를 남겨놓고 멈추어 있었습니다. 심판들도 이 상황을 눈치 챈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장시간 노력한 끝에 케빈은 생애 첫 골을 성공시켰고 모든 이들은 케빈과 함께 기뻐 뛰었습니다.
그 날 집으로 돌아가던 모든 사람 중 우울했던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승부욕도 있었겠지만 케빈에게 기회를 주고 싶은 좋은 마음에 모두가 동의하였습니다.
그렇게 승부의 우상에게 억눌리지 않는 자유로운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기쁘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아이들에게 승부의 우상을 심어주는 것은 어른들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적이 조금만 떨어져도 자살하는 일까지 벌어지는 것입니다.
우상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왜냐하면 양심의 목소리를 따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나라의 자유와 평화와 기쁨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우선은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상을 섬기는 이들을 ‘부자’라고 말씀하시고, 그 부자들은 절대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자가 곧 우상숭배자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걱정되고 두렵고 우울하다면 우리는 무언가에 지배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유롭고 행복하게 해방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오늘 슬픈 마음으로 돌아간 부자청년처럼 되지 말고 자유롭게 그분 뜻을 따를 수 있는 하늘나라의 백성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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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0,17-27 : 부자 청년의 이야기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17절). 율법을 잘 지켰다 해서 교만해진 젊은이가 율법의 주님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알아 뵙지 못한 채 행동으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젊은이는 믿음이 없이 율법만으로 구원될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18절)하셨다. 당신을 하느님으로 여겨 그렇게 불렀다면 ‘선하다’는 표현을 거절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생명으로 나아가고 싶거든 계명들을 지켜라. 고약한 악의와 사악함을 버려라.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도둑질하지 마라.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그리하여 ‘마른 땅’(느헤 9,11; 시편 66,6)이 드러나 어머니와 아버지를 공경하는 일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19절 참조)이 싹트게 하라고 하신다.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습니다.”(20절)고 그는 대답하였다.
율법의 계명들을 잘 지킨 것처럼 보이던 청년은 슬퍼하며 떠나갔다. 계명들을 잘 지켰다고 하는 그의 대답은 진실이라기보다 교만이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어렵다. 하느님 나라의 시민은 어디에도 묶이지 않고 짓눌리는 일이 없이 높이 솟아오르는 가벼운 날개 같은 영혼을 지닌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는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21절) 친구나 친척이나 가족이나 아내나 자녀가 아니라 가난한 이들에게 주리고 하신다.
주님은 하늘의 보화를 열어 주시면서 선의 책무를 실현하셨고, 몸소 거기에 이르는 길잡이가 되어 주셨다.자기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부자 청년은 떠나갔고, 주님께서는 그가 자기 뜻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신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의지대로 선택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는 슬퍼하며 떠나갔고 그분을 따라가지 않았다. 그는 자기 욕심에 묶인 채 슬퍼하며 떠나갔다. 자기 탐욕의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짊어진 채 슬퍼하며 떠나갔다.(22절)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23절) 제자들도 이 말씀을 듣고 매우 슬퍼져서 말한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26절) 부자라는 것은 하느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욕심이나 욕망으로 가득 찬 사람을 의미한다. 진정한 부자는 재물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물을 맡겨주신 분의 뜻에 따라 잘 사용하는 사람이다. 재물이라는 말 자체가 ‘소유하다’라는 데서 나오지 않고 ‘사용하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유일한 선(善)이신 하느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다른 이차적인 선(善)의 유혹이나 매력을 극복하면서 주님을 따르고 있는지 나를 돌아보아야겠다. 그리고는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채워 나가는 삶을 살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유일한 선(善)이신 하느님을 추구하면서 기도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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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낙타가 바늘귀로>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마르 10,17-18)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은, “특별히 실천해야 할 율법이 무엇입니까?”라는 뜻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특별히 실천해야 하는 율법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자주 토론했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라는 말씀은, 당신에 대한 그의 태도를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존경한다는 표시로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지만,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은 것은 아니었고, 그냥 ‘랍비’ 가운데 한 사람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선하신 스승님’이라고 불렀는데, 당시에는 ‘선하신...’이라는 호칭은 하느님께만 사용하던 호칭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은, “너는 나를 사람으로만 생각하면서 왜 그런 호칭을 사용하느냐?”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그 사람이 달려왔다는 것은, 예수님을 꼭 만나고 싶어 했다는 뜻일 뿐이고, ‘절박함’을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횡령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마르 10,19)
예수님의 답변은 간단합니다.
“특별히 실천해야 할 율법이나 계명은 따로 없다. 네가 알고 있는 십계명을 잘 실천하면 된다.”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0-21)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셨다는 말은, 어려서부터 십계명을 다 지켜 왔다는 그의 말을 인정하셨다는 뜻이고, 또 그가 위선자가 아니고, 진실하고 경건한 신앙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의 십계명 실천에는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었습니다. ‘재물에 대한 애착심’이 크다는 것, 그것이 그의 부족한 점입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라는 말씀은,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말씀입니다. “나를 따라라.”라는 말씀은 “나의 제자가 되어라.”, 즉 “나를 믿어라.”라는 뜻입니다. 이 이야기의 바로 앞에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15).”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만 믿고, 하느님에게만 의지하는 어린이 같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재물의 힘으로는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또 사람의 힘으로는 들어갈 수 없고,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셔야 합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이고 자비입니다.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 나라에 들어가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이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아니었고, 자기 힘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10,22)
그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영원한 생명과 현세의 재물, 그 두 가지를 모두 차지할 수는 없다는 것 때문에 울상이 되어서 슬퍼하며 떠났는데, 그가 재물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받기를, 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포기했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에게는 평생의 숙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의 뒷이야기는 알 수 없지만,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는 “재물에 대한 그의 애착심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입니다. (이 말에는, 예수님을 믿기가 싫어서 떠난 것은 아니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그는 경건한 신앙인이었기 때문에 재물을 하느님처럼 섬기지는 않았을 것이고, 또 당시의 경건한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불우이웃 돕기도 잘했을 것입니다. (물론 재산이 축나지 않는 범위에서.) 그러나 재산을 전부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에게는 너무나도 실천하기가 어려운 말씀이었습니다.
여기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앞의 9장에서, 예수님께서는 “......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르 9,41)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마실 물 한 잔’의 선행으로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가능한 것 같은데, 왜 꼭 전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야만 하는가? 잘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 모순되는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자기 소유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 않으면 ‘물 한 잔’을 주는 것도 아까워하게 됩니다. 또 예수님께서 ‘지금 당장’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아닙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자마자 모든 것을 버렸지만,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는 사람마다 모든 것을 버린 시점이 달랐습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어떤 결정적인 시간이 왔을 때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도록 평소에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중요하고, 또 필요합니다. 모든 것을 버리지 않아도, 어차피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이 세상을 떠날 때에는 모든 것을 놓아두고 떠나야 합니다(1티모 6,7).>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사도들과 같은 급의 제자로 삼고 싶어서 사도들에게 하셨던 것과 같은 요구를 하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도 어떻든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는 것은 모든 사람이 실천해야 할 일입니다. 그 애착심을 버리지 못하면 바늘귀로 빠져나가지 못하는 낙타가 됩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낙타라고 해도, 회개하고, 예수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변화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꾸준히 실천하면, 누구나 바늘귀 같은 하느님 나라의 문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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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눈이 내리는 것은 자연현상입니다. 하지만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것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첫사랑을 시작한 연인들에게 내리는 눈은 하느님의 축복일 것입니다. 예술 하는 사람에게 눈은 작품에 영감을 주는 선물일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눈 내린 마당은 신나는 놀이터가 될 것입니다. 적당히 내리는 눈은 제게도 즐거움입니다. 하지만 10인치 이상 눈이 내리면 장난이 아닙니다. 신문사 마당의 눈을 치워야 차가 다닐 수 있습니다. 신문사 앞의 길에 쌓인 눈을 치워야 사람들이 편하게 다닐 수 있습니다. 다행히 옆 본당의 신부님이 눈이 많이 내리면 눈 치우는 장비를 가져와서 마당의 눈을 치워 주시니 감사할 일입니다. 대부분의 집은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눈을 치워 놓습니다. 하지만 휴가를 갔거나, 여의치 않은 집은 눈이 그대로 쌓여 있습니다.
믿음의 목적인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내 마음에 쌓인 허물과 죄를 깨끗이 치워야 합니다. 내리는 눈은 보이기 때문에 치울 수 있고, 이웃을 위해서 치워야 합니다. 그러나 마음에 쌓인 허물과 죄는 눈에 보이지 않기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방치하기 마련입니다. 허물과 죄로 무거워진 마음은 하느님을 멀리하게 됩니다. 눈을 치우기 위해서는 장비와 삽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에 쌍인 허물과 죄를 치우기 위해서는 10계명이라는 기준이 있습니다. 10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는 사람은 깨끗해진 마음으로 하느님께 나갈 수 있습니다. 10계명은 해야 할 것이 3가지 있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 7가지 있습니다. 하느님을 흠숭하고, 주일을 지키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해야 할 계명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고,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도둑질 하지 말고, 거짓 증언하지 말고, 남의 아내를 탐하지 말고, 남의 재물을 탐하지 말아야 합니다.
10계명 중에 2가지가 연관된 것들이 있습니다. 이성에 대한 욕망은 간음하지 말고, 남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고 합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은 도둑질 하지 말고, 남의 재물을 탐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두 가지는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큰 유혹이기 때문입니다. 다윗 왕은 이성에 대한 욕망 때문에 충실한 부하인 우리아를 죽게 하였습니다. 아합 왕은 욕심 때문에 나봇을 죽이고 포도밭을 빼앗았습니다. 인간을 비참하게 하고,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은 욕망과 욕심이 만들어낸 죄와 죽음입니다. 욕망의 덫에 걸려 넘어지는 성직자와 수도자도 있습니다. 욕심의 덫에 걸려 평생 이루어 놓은 명예가 무너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성에 대한 욕망을 품는 것만으로도 죄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욕망과 욕심의 유혹이 크기 때문에 하신 말씀입니다.
며칠 전에 문자를 하나 받았습니다. ‘그대의 꿈은 무엇인가요?’ 저는 문자를 받으면서 잠시 생각했습니다. ‘나의 꿈은 무엇일까?’ 주교가 되는 꿈을 가진 적이 없습니다. 더 높은 자리, 권력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도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제게 문자를 보낸 분은 ‘자신의 꿈’은 무엇인지를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은 자라고, 이런저런 봉사를 하지만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각자의 꿈은 누군가가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각자의 꿈은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 가진 것을 팔아서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누어주는 것과 같은 행위를 통해서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열역학 제1법칙은 모든 에너지의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한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영구기관’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내가 가진 꿈은, 결국 내 삶이라는 에너지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제자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불로 단련을 받는 아름다운 금을 봅니다. 아름다움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주어진 순간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그 순간들에 감사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최선을 다한 시간들은 아름다운 과거가 될 것이고, 최선을 다할 시간은 희망찬 미래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하느님 은총의 빛으로 순간을 충실하게 살면 ‘꿈’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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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돈 많은 부자가 되는 것을 싫어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돈이 행복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들 하지만, 살아가는 데 돈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일정 수준까지 돈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 수는 있지만, 어느 수준에 도달하면 돈이 인간 행복에 미치는 영향력이 현저하게 줄어든다고 합니다.
절대적 빈곤을 겪고 있는 이들이 노력만 하면 필요한 돈을 얻을 수 있어야 하고, 넘치게 많은 부를 누리는 이들이 정당하게 세금을 내면서도 연민과 자비의 정신으로 자신의 부를 나눌 수 있다면,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오늘 재산이 많은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는 율법의 정신에 따라 하느님 앞에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합니다. 재산의 유혹에도 율법의 덕행을 지키는 이 부자를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사랑스럽게 보십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추구하는 ‘영원한 생명’은 돈으로 얻을 수 없는 것임을 일깨우시고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도전적인 질문을 던지십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넉넉하기에 율법도 지킬 수 있고, 평화롭게 살 수 있다고 믿었던 부자에게 이 말씀은 좌절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영원한 생명도 지상의 부유함의 일부로 믿고 싶었던 부자에게는 따를 수 없는 요청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 부자로 사는 것은 특권이 아니라 의무이어야 합니다. 부의 축적은 결코 나만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관계 속에서 서로의 희생과 배려로 얻어진 재산이 자신의 능력으로만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천박한 부자가 많아지는 한 사회는 건강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늘 우리에게 도전이자 숙제처럼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인가 봅니다. ‘천박한 부자’로 살기보다 가난하지만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 주님의 뜻임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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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상효 필립보 신부님]
간혹 우리는 제3세계 국가, 저개발국가의 사람들을 폄하할 때가 있습니다. 게으르고 무질서하고 경제관념 없고 범죄에 쉽게 빠지고 그러니 가난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소위 말해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의 경제학자들은 한술 더 떠서 제3세계 국민들의 인간성이 바뀌기 전에는 절대로 경제개발에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예견합니다.
그들은 제3세계 국가의 빈곤의 원인을 그 국가의 국민성에서 찾으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교육열이 낮아서 아동 노동을 허용하며, 정치의식의 결여로 비리와 부패가 만연한 정부를 보고만 있으며, 게으른 천성 탓에 낮은 노동 생산성을 가지고 있고, 미래에 대한 설계도 없이 마약과 범죄에 쉽게 빠져드는 그들의 국민성이야말로 저성장 저개발의 근본원인이라고 진단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부자가 등장합니다. 예수님 눈에도 사랑스럽게 보일 만큼 훌륭하고 반듯한 부자입니다.
그는 유대사회가 요구하는 계명들을 어려서부터 다 지켜올 만큼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는 살인을 하지도 않았고, 간음을 하지도 않았으며, 도둑질, 거짓증언, 횡령을 하지도 않았으며, 부모를 공경하는 일에도 소홀하지 않은 반듯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럴만한 조건을 이미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는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그가 가난했다면 그런 계명들을 지키기가 수월했을까요?
그가 만일 가난했다면 인간적인 품위를 뽐내며 '그런 계명들을 어려서부터 잘 지켜왔습니다'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할 수 있었을까요? 그가 가난했다면 말입니다.
사실 이 부자가 예수님께 달려와서 묻는 내용 자체도 사치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예수님께 달려와 무엇인가를 청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보게 해 주십시오', '듣게 해 주십시오', '낫게 해 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 와 같이 너무나 현실적이고 너무나 직설적이며 한편으로 처절하기까지 한 청을 드렸습니다만 이 부자가 예수님께 드린 질문은 다분히 현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이며 초월적인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사치스런 여유가 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 여유도 예수님의 한 말씀에 무너지고 맙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자신의 품위와 반듯함, 그리고 여유와 현학의 기초가 되었던 그 재물이라는 토대를 다 허물어버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부자는 울상이 되어 예수님을 떠납니다. 그가 애초에 가난했다면 그렇게 반듯한 품위를 예수님 앞에서 주장할 수 있었을까요?
제3세계국가의 국민들, 아니 부자나라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그들이 보여주는 열악한 인간성들은 가난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가난해서 교육을 받을 수도 줄 수도 없는 것이고, 가난해서 질서를 지킬 여유가 없는 것이고, 가난해서 정치적 감각을 키울 수도 없는 것이고, 가난해서 경제성장의 수단들을 소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반듯하고 품위있는 선진국가의 경제정책 책임자들은 제3세계 국가의 국민들을 비난합니다. 천성 때문에, 국민성 때문에 어쩔 수 없다라고 말입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사심없이 이들 나라를 도울 생각도 없으면서, 그들을 지원하는 것은 밑빠진 독에 물붙기라고 생각해 버립니다. 그러면서 도덕적 해이라는 근사한 말도 동원합니다. 시장의 혼란이라는 알쏭달쏭한 말도 끌어옵니다.
선진경제학자들이 믿어 의심치 않는, 시장이라고 부르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자연스럽게 해결해 줄 것이라고도 말합니다. 지금은 파이를 키울 때이고 파이가 커지면 자연스럽게 나누어질 몫이 커질 것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들은 반듯하고 품위가 있으며 여유가 있고 현학적입니다. 베르사이유 궁의 마리 앙뚜아네뜨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간혹, 아니 자주 우리나라의 경제정책 담당자들은 자기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을 이런 방식으로 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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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궁금해합니다. 부자 청년은 이 의문을 풀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려서부터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켜 온 부자 청년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 부자 청년은 슬퍼하며 예수님 곁을 떠났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면 영원한 생명을 얻기에 충분하지만, 아직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재물의 탐욕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재물을 많이 가질수록 ‘재물에 대한 애착’이 더 커지기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성 안토니오 은수자는 예수님의 권고를 글자 그대로 실천하여 하늘 나라로 가는 문을 열었습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실천한 복음적 청빈은 교회가 가야 할 길을 보여 주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되라고 하십니다.
재물은 소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누기 위해 존재합니다. 우리는 자선으로 속죄하게 되며 물질의 탐욕에서 해방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1티모 6,10)임을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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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오늘 <복음>에서 어떤 부자 청년은 길을 떠나시는 예수님 앞에 달려와 무릎을 꿇고 묻습니다.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마르 10,17)
이 질문은 신앙인에게 있어서 참으로 중요하고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하지만, 부자 청년의 이 질문은 “영원한 생명”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무엇인가를 해야 을 것’이라고 여기는 데서 나오는 질문입니다. 혹 우리도 그렇지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적으로 당신의 사랑이요, 당신의 선물입니다. 또한 타인과는 무관한 ‘자신의 영원한 생명’에만 관심을 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십니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이 대답은 그를 벌거숭이로 만들어 버립니다. 자신을 가리고 있는 껍데기의 옷이 발가벗겨지고, 그의 실상이 드러나게 만들어 버립니다. 사실, 부자 청년은 자신의 영생을 위해, 율법을 지켜왔고 죄도 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비록 율법을 지켰으나 단지 자신을 위하여 죄를 짓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풀지는 안 했습니다. 곧 사랑을 행하지는 안 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자기 자신의 결백을 넘어서, 오히려 자기 나눔과 선을 실행하라 하십니다. 타자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라 하십니다.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는 일, 바로 이것이 당신을 따르는 길이라 하십니다.
한편, 이어지는 제자들의 의혹, 곧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마르 10,26)라는 의문은 앞의 부자 청년의 질문과는 달리,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구원에 대한 의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10,27)
이는 ‘구원이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말씀입니다. 결코 자기 자신의 행실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결코 우리의 능력이나 노력으로는 바늘귀를 빠져나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 선사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에게는 가능합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어디로부터 떠나왔느냐?”보다 “어디를 향하여 나아가느냐?”입니다. 사실, 제자들은 이미 떠나온 이들입니다. 그러나 떠나왔다고 해서 반드시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집과 고향을 떠나온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그렇습니다. 이제는 이미 떠나온 자기마저 버려야 할 일입니다. 사실, 수도자인 우리는 이미 집과 부모를 떠나왔지만, 떠나온 자신을 아직 떠나지 못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진정 떠나왔다면, 오늘도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르느라 여념이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신변안전이 아니라, 자신을 주님께 넘기고 주님께 속한 주님의 소유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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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마르 10,21)
주님!
약하지 않으려함이 제게는 부족함입니다.
부족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바로 부족함입니다.
약할 줄을 알고, 부족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약하고 부족한지라, 당신께 매여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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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정의와 사랑>
마르코 10,17-27 (하느님의 나라와 부자)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에 놀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그러자 제자들이 더욱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정의와 사랑>
너의 것을
빼앗지 않는 것이
정의입니다
나의 것을
나누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 없는
정의는
죽이지 않을 뿐입니다
정의를 품은
사랑만이
참으로 살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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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기초생활 보장 수급자로 정부에서 나오는 보조금으로 생계를 유지 하시는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생활공간도 컨테이너로 꾸민 한 칸의 방이 전부입니다. 그 방은 주방이고 침실이며 기도방입니다. 어렵게 살고 계시지만 항상 웃음을 잃지 않고 평일 미사참례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봉투하나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난방 기름을 절약하고, 쓰고 싶은 것을 절제하여 모은 돈이라고 하시며 꼭 필요한 곳에 써 달라고 하셨습니다. 너무 적어서 미안하다고 하시면서 가져오신 돈은 제가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과부의 헌금을 귀하게 여기시는 예수님을 생각했습니다.
살아가면서 하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고.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한 가지를 선택할 시점이 옵니다. 그리고 선택합니다. 이때야말로 그 사람의 진면목을 봅니다. 가치를 어디에 두고 선택한 것인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은 자기가 선택한 것이 최선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밖에서 보면 차선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적인 계산이 깔려있다는 것을 본인만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떤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고 거기에 도달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른 것은 다 잘 지켰는데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10,21)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영생을 얻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지만, 그는 하나가 부족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세상의 보화 때문에 하늘의 보물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사실 천상의 보물을 우리 내면의 보물로 삼는 일은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 결혼준비로 집도 장만하고 값비싼 보석을 비롯하여 혼수품을 다 마련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결정적으로 배우자를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이를 위하여 모든 것을 준비하였는데 그 대상을 만나지 못하였으니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값진 보석이라도 누구를 위해서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미 가치를 잃은 것입니다.
영생을 희망하면서도 그것을 위해 다른 모두를 포기할 수 없다면 결국, 아름다운 보석을 창고에 방치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족한 하나를 채워서 하늘의 보물을 차지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일상 안에서 나에게 부족한 하나는 무엇일까? 자존심일 수 있고 체면일 수도 있습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일 수 있고 명예나 지배하는 마음, 자식에 대한 애착일 수도 있으며 남보다 더 많이 배웠다는 지식일 수도 있습니다.
시기 질투의 마음이나 눈먼 사랑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허영의 우상숭배, 교만의 우상숭배, 돈의 우상숭배에서 지켜 달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하느님께로 나아가는데 방해하는 “안락함의 문화와 일시성의 매혹”이 강한 이 시대에 부족한 하나를 채울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합니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것 하나는 구원은 내가 충실히 덕을 쌓아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자비로 주시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내 위주로 생각하고 판단하지 말며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방법을 용기 있게 믿음으로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분명 사람의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와 기쁨이 함께할 것입니다. 자선이 중요한 것은 그것을 통해 하느님의 눈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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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부산 분도명상의 집)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부자 청년은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재물에 대한 집착 때문이었습니다. 미사를 봉헌하기에 앞서 지금 나는 무엇에 집착하며 살고 있는지, 예수님을 따르는데 방해되는 것 가운데 버리지 못하고 움켜 쥐고 있는 재물에 대한 집착, 사람에 대한 미련, 자아에 대한 집착은 없는지 반성하며 이 미사를 온 정성을 다 해 봉헌하도록 합시다.
어느 청년이 세상의 얽힌 인연의 끈을 모두 끊어 버리고 구도의 길을 걷기 위해 자신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수도자의 길을 가고자 스승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언젠가 어려울 때 자신을 위해 쓰려고 재산 가운에 얼마를 꼬불쳐 두었습니다. 그가 스승을 찾았을 때, 스승은 모든 것을 버리지 못한 제자의 마음을 간파하였습니다.
스승이 찾아온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그대는 진정 수도자가 되기를 원하는가?”
“예 스승님!”
“그렇다면 먼저 마을로 내려가, 고기를 조금 사게나! 그리고 그대는 웃옷을 벗고, 벗은 몸에 그 고기를 달아매고 다시 이 곳으로 오게나."
그는 스승의 지시대로 자기의 몸에 고기를 달고 산길을 되돌아오고 있었습니다. 몸에 달린 고기는 흔들거리며 냄새를 피웠습니다. 그리자 냄새를 맡은 들개와 새들이 주위로 몰려들었습니다. 그 고기를 노리고 덤벼들었고, 그는 들개들과 새들에게 대항하며 도망쳤으나 그것들은 끝까지 따라붙었습니다. 아무리 대항하고 도망쳐도 소용없었습니다. 들개들과 새들의 계속되는 공격에 그는 많은 상처를 입었고 너무나 지쳐버렸습니다. 그는 그것들이 자신에게 달린 고기를 노리고 있음을 알아챘습니다. 고기를 들고 스승이 있는 곳까지 간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을 그는 가차없이 그 고기를 던져버렸습니다. 그러자 짐승들은 자신에게서 떨어졌고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가 다시 돌아와 상처투성이가 된 몸을 보이며 상황을 설명하자 스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을 버리면서도 자기의 돈에 집착하는 자에게는 마귀가 이처럼 공격을 한다네. 모든 것을 벗어버린 진정한 빈 몸이 되게나."
우리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말하면서도 실상 버리지 못하는 것이 참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재물에 대한 욕심은 가장 쉬운 것 같지만 가장 어려운 것 중에 하나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것을 잘 알고 계셔서 “하느님과 재물(맘몬)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루카 16,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실 재물이 없으면 우린 살 수가 없습니다. 먹고 자고 입고 하는 일상에 돈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여기 계신 우리 교우분들 중에서도 위의 이야기에서 처럼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신의 것을 하나도 남겨 두지 않고 가진 모든 것을 다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줄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수도자의 길을 걷지 않는 우리에게 재물은 삶에 꼭 필요합니다. 아니 수도자들도 개인 소유가 없을 뿐이지 공동체를 유지하고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재물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왜 모든 재물을 버리고 당신을 따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을까요?
문제는 집착입니다. “나의 것”에 집착하다 보면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임을 너무 쉽게 잊는다는 것입니다. 충분히 가진 사람도 더 가진 사람 앞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더 가지고 더 누리고 싶어 합니다. 어떤 부자들은 많이 가지고도 “가지고 모으는 것 그 자체”에 만족하며 나누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면 가난한 사람들도 가지는 것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롭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가난하지만 만족하며 풍요로운 마음으로 성실히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난을 원망하며 돈에 대한 집착으로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빈곤하게 사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 모든 불행이 바로 “나의 것”에 대한 집착에서 나옵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임을 깨닫고 진정 재물에 대해 자유로우며 만족과 감사로 사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특히 부유할수록 더 이것은 힘든 것 같습니다. 가진 것이 많기 때문이죠!
그런데 제가 아는 어떤 교우분은 자신의 삶을 유지하고 최소한의 기본적인 생계를 위한 재산만을 남겨 둔 채 더 벌어 들인 것, 혹은 남는 것은 교회와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연옥 영혼을 위한 미사 봉헌을 위해 모두 사용한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늘 재물이 모자라지도 남지도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분도 사람인데 왜 욕심이 없겠습니까! 하지만 이 교우분의 삶은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마칩니다. 저는 재물의 마귀를 물리칠 수 있는 것은 바로 기도라는 것을 이분을 통해 배우게 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데 있어 비단 재물뿐만 아니라 다양한 걸림돌들과 마귀들이 우리를 유혹하기 위해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앞서 말한 이야기에서 꼬불쳐 둔 재물만이 아니라, 마음 속에 “꼬불쳐 둔 내 뜻대로 하고 싶은 고집”, “꼬불쳐 둔 일에 대한 욕심들”, “꼬불쳐 둔 사람에 대한 집착과 욕망들”, “꼬불쳐 둔 게으름”, “꼬불쳐 둔 나만의 영역을 방해받지 않고 싶은 마음” 등등 다양한 마음들이 썩은 냄새를 풍기는 고기 덩어리들처럼 우리에게 붙어 다닙니다. 들개와 새들이 그 냄새를 맡고 우리의 가장 약한 부분을 공격하고 유혹하는 것 같습니다. 고기 덩이를 들고 있으면 들고 있다고 괴롭히고, 내버리려 해도 떨어지지 않고 계속 붙어 따라다닙니다. 진정 이런 종류는 기도가 아니고는 물리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자비로우신 주님,
모든 것을 비우고 버리지 못하는 저희 마음의 집착들,
마음의 고기 덩어리들을 저 멀리 던져 버리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은총을 주소서.
사랑이신 주님,
오직 당신만을 따르고자 하는 당신의 제자들과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딸들을
방해하거나 괴롭히지 않고
당신의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묵묵히 말없이 도울 수 있는 지혜와 인내의 마음을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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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요한 신부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오늘 복음에서 어떤 사람이 달려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던진 질문입니다. 그가 예수님께 달려왔다는 것은 그만큼 이 문제가 그에게 절박하였음을 의미합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 곧 구원을 얻는 일을 자기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삼았고, 이를 위하여 일평생 노력을 기울인 사람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율법에 기록된 계명들을 충실히 지켜 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시면서 한 가지 부족한 점을 말씀하십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런데 그는 이 말씀을 듣고서는 지금껏 품고 살아온 간절한 희망을 단념이라도 한 듯, 울상이 되어 떠나버립니다. 그에게 재물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신앙인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만큼 중요한 문제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희망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욕심이 우리 곁에 늘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현재 수중에 놓인 것, 자기 소유라 여겨지는 것을 하나도 잃지 않고 싶어 하는 욕심(慾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욕심은 신앙인의 눈을 어둡게 만듭니다.
재물(財物)이든 명예(名譽)든 권력(權力)이든, 그 어떤 것도 구원으로 향하는 좁은 문으로는 우리가 짊어지고 갈 수 없는 것들입니다. 모두 움켜쥐려다가 정작 중요한 것을 잃을 수 있습니다. 마치 오늘 복음에서 그토록 바라던 구원을 결국 재산 때문에 포기해 버린 사람처럼 말입니다. 오랜 기간 예수님을 따르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가 손에 쥐고 쉽게 놓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서 오늘 하루 진지하게 성찰(省察)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2월 한달동안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글 올려주신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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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마르코10,17)
<영원한 생명!>
'영원한 생명'은 어떤 사람이 달려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물었던 것처럼, 믿는 이들에게 주어진 '영원한 화두'입니다. '믿는 이들의 궁극적인 희망이며 목적'입니다.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어떤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지금 여기에서 그가 구체적으로 지켜야 할 계명들, 곧 이웃 사랑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가 "그런 것들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다."고 말하자, 그에게 부족한 결정적 한 가지를 지적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10,21)
예수님의 이 말씀은, 믿는 이들의 영원한 화두인 영원한 생명은 '지금 여기와 구체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실재'라는 '역설'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원한 생명의 또 다른 이름'인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는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애쓰면서 살아 낸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이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가진 것이 너무 많았던 사람, 그러면서도 영원한 생명을 원했던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갑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시고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기를 희망하셨던 하느님의 나라, 당신의 전부를 바쳐가면서까지 이룩하시려고 하셨던 하느님의 나라는 '서로의 나눔을 통해 모두가 함께 잘 사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처럼 너의 허물에만 집착하면서 너와 나를 갈라놓았던 양극화의 나라가 아니라, '모두가 하나로 나아가는 통합의 나라'입니다.
바로 이런 나라가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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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20년 도쿄 올림픽에서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신유빈 선수와 룩셈부르크의 니시아리안 선수의 탁구 경구였습니다. 신유빈 선수는 2004년생, 니시아리안 선수는 1963년생으로 자그마치 41살의 나이 차이였습니다. 결과는 신유빈 선수가 이겼지만, 니시아리안 선수는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보다 젊어요. 도전을 멈추지 말아야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즐기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거예요.”
‘~ 때문에’라는 이유를 들어 포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즐기는 마음을 갖는다면 포기할 이유는 없어지고 맙니다. 즉, 포기할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즐길 이유를 찾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신앙생활도 비슷합니다. 많은 이가 신앙생활을 하지 못할 이유를 이야기합니다. 시간이 없어서, 지루해서, 분심이 많아서, 돌 볼 가족이 있어서…. 그러나 신앙생활은 즐기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과의 만남에서 갖는 즐거움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됩니다.
부자 청년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는 계명을 철저히 지키는 올바르고 독실한 종교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에 대해 예수님께 물었던 것입니다. 열심히 사는 그를 보며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말씀하시지요.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르 10,21)
인간의 윤리 생활은 하지 말라는 것을 어기지 않는 것만으로는 완전하게 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됩니다. 완전해지려면 가진 것을 가난한 이에게 줘야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자기 것을 남에게 준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부자일수록 더 어렵습니다. 부자 청년도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 것을 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재산의 풍요로움을 차마 버릴 수 없었던 것이지요. 무조건 가난하게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부’도 하느님의 창조물로 하느님께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고, ‘부’를 사용하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필수 요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는 생명 유지와 사랑 실천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에 대한 애착 때문에 주님께 대한 사랑을 버린다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재산만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걸림돌은 아닙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으로 짓는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죄를 자기 마음대로 멈추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이,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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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와 부자>
- 부자는 구원받을 수 없는가? -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옛 사막 스승들을 찾았던 구도자들의 공통적 질문입니다.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잘 보면 잘못된 질문임을 깨닫습니다. ‘무엇을 해서(to do)’가 구원이 아니라 ‘무엇이 되어야(to be)’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인 이웃사랑의 계명을 다 지켰는데도 가슴의 허기는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부자입니다. 예나 이제나 영원한 생명의 하느님 나라는 구도자들의 궁극의 관심사입니다. 부자의 문제점을 정확히 진단한 주님의 정확한 충격적인 처방입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슬퍼하며 떠나갑니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 어려운 요구입니다. 과연 주님의 이 말씀에 응답할 부자가 얼마나 되겠는지요! 참으로 재물의 환상, 우상으로부터 벗어나기가 이처럼 힘듭니다. 정말 세상의 보물은 가짜요 하늘의 보물이 진짜인데 부자는 이것을 몰랐습니다. 정말 부자는 많은 재물을 지닌자가 아니라 최소한의 소유로 만족한 자입니다. 이래야 재물욕의 탐욕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부자는 주님의 권고를 받아들일 수 없어 주님을 떠나 자기의 길을 갔고 이후의 반응은 독자들의 상상에 맡겨지지만 아마도 부자의 내적 각성覺醒에 부단한 도움이 되었을 것이며 후에 주님을 찾았을 지도 모릅니다. 분명 예전의 부자와는 같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의 한계를 알아 더욱 겸손해졌을 것이며 부단히 나름대로 구원을 추구했을 것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이 점입가경입니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부자는 구원받기가 참으로 힘들다는 아니 불가능하다는 말씀에 거듭 놀란 제자들의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는 너무나 당연한 절박한 반응입니다. 이에 대한 주님의 답이 우리에게는 참 다정한 위로가 됩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한 마디로 하느님께는 부자의 구원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분명 가난하다하여 무조건 하느님 나라 입성의 구원도 아닐 것이며, 부자라 하여 무조건 하느님 나라 입성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소유로부터의 자유가 그 관건입니다. 가난한 자가 부자들에 대한 증오와 불만으로 가득하다면, 부자가 소유의 노예가 되어 참으로 빈자들을 무시하고 인색하다면 하느님 나라의 구원은 힘들 것입니다.
말 그대로 회개의 은총이 절대적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회개의 은총으로 참으로 재물의 소유로부터 자유로울 때, 최소한의 의식주로 만족하며 이웃에 자선을 베푸는 자비로운 부자라면 하느님 나라의 구원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가난해도 누구를 원망하지 않고 지족知足할 수 있다면 구원입니다.
사실 우리가 잘 나서 구원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구원입니다. 사실 잘 나서 구원 받기로 하면 세상에 구원받을 자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 은총이 없으면 아무리 똑똑해도 탐욕의 유혹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를 따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오늘 복음의 부자에게만 이런 극단적인 처방이었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우선적인 일은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를 사랑하라’, ‘나를 믿으라’ 하신 것이 아니라 ‘나를 따르라’ 말씀하셨습니다. 당장은 모두 버리고 나눈 후 주님을 따르지는 못할 지라도, 제 삶의 자리에서 하루하루 날마다 제 할 수 있는 만큼 사랑으로 비우고 나누며 주님을 따른다면 부자도 가난한 자도 영원한 생명의 하느님 나라의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삶을 가능하게 하는 하느님의 회개 은총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우선적으로 할 일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주님을 따르는 일입니다. 계명 조항을 지키는 일이 나무만 보는 경우라면 주님을 따르는 일은 주님의 시야를 지니고 숲을 보는 경우입니다. 계명 준수로 만족함이 유치원 수준의 믿음이라면 주님을 따르는 일은 대학원 수준의 믿음입니다. 끊임없는 회개의 은총이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하고 주님을 따르게 할 것이며 더불어 소유의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점점 사랑의 나눔과 비움도 함께 할 것입니다.
참으로 최고의 보물인 주님을 사랑하여 모실 때 세상 재물로부터 자유로울 것입니다. 주님 보물 앞에는 세상 재물도 빛을 잃을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따르면서 주님께 대한 믿음, 희망, 사랑이 깊어질수록 세상 것들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제1독서의 베드로가 이의 모범입니다. 희망에 대해 감사를 드리는 베드로입니다. 참으로 이런 참희망이신 하느님을 모실 때 자유롭고 행복하고 내적으로 부유한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 대한 궁극의 답을 주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줍니다. 하느님 은총의 선물인 구원의 희망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과제입니다. 참으로 한결같이 주님을 사랑하여 따르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희망 은총의 선물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 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고, 또한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도 않는 상속 재산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런 깨달음의 선물 앞에 세상 재물은 얼마나 덧없고 초라해 보이는 지요! 저절로 빛을 잃습니다. 사실 건강 잃고, 또 죽음을 목전에 두었다면 이런 세상 재물들은 아무 쓸모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무지의 탐욕으로 인해 헛것들의 우상에 빠져 살아가는 얼빠진 대부분 부자들입니다. 이어지는 베드로의 영혼에 깊은 울림을 주는 천둥같은 말씀도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용기백배, 이탈의 사랑으로 더욱 주님을 따르게 합니다.
“그러니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를 위시한 초대교회 교우들의 주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에 견주어 볼 때 우리는 얼마나 왜소하고 약하고 오염된 난장이 믿음이요, 희망이요, 사랑이요, 감사요, 기쁨인지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참으로 주님께 열렬하고 한결같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둘 때 저절로 세상 탐욕으로부터 이탈이요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의 삶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한 생명의 하느님 나라를 살게 합니다. 참으로 사랑으로 나누고 비우며 주님을 따라 홀가분하게 초연한 삶을 살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도 그 가난으로 부유해지게 하셨네.”(2코린8,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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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말씀 기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헛군데서 진리를 찾아 헤매던 나를
몸소 찾아 불러주시고
세례를 통해 당신의 아들로 삼아주셨으니.
찬미받으소서.
당신의 귀한 아드님
우리의 큰 형님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의 큰 사랑으로
우리를 죄와 악의 구렁텅이에서 건지시어
희망과 구원의 길로 이끌어 주셨으니.
찬미받으소서.
그분을 본 적도 없지만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본 적도 없지만 그분을 믿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을 주시고
영혼의 구원을 얻을 희망을 주시니.
찬미받으소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내어 주신 당신을 본받아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당신이 주신 선물임을 알고
내 것으로 취하지 않고
이웃과 나눔으로써
하느님 나라에 들러갈 길을 열어 주시니.
오! 나의 하느님, 나의 전부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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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NjyvdzXt4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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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르 10, 21)
가진 것이
너무 많아
주님을
따를 수 없다.
집착과
과욕으로는
주님을
따를 수 없다.
따른다는 것은
다시 태어난
삶으로
우리가 사는
것이다.
자기 것을
내려놓는 것이
소유욕에서
자유로워지는
비움의 삶이다.
내려놓아야
가야할 곳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우리의
근원적인 결핍은
비움으로 채워지는
삶의 역설이다.
비워내야
새로운 것을
맞아들일 수 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비움의
관계이다.
절대로
안된다는
그것마저도
비우는 것이다.
비움의 여정이
십자가의
여정이다.
십자가는
삶의 목적을
깨닫게 하지만
욕심은 우리의
모든 것을
잃게한다.
머물다 가는
우리들 삶이다.
영원한 생명은
비움에서
시작한다.
비움은 집착을
치유하는
은총이다.
너무 많은
소유욕으로
우리의 정신이
죽어가고 있다.
비워내는 실천이
나누는 실천이며
주님을 따르는
자유의 삶이다.
무엇을
버릴 것인가?
지나친
욕심으로
가득차 있는
우리 마음을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물질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자유를
다시 배우는
가난한
십자가의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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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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