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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달 / 이성선
반은 지상에 있고 반은 천상에 보인다
반은 내가 보고 반은 네가 본다
둘이서 완성하는
하늘의
마음꽃 한송이
내 몸이 비어지면 / 이성선
내 몸이 다 비어지면
그대 곁에 가리라.
겸허한 손 깨끗한 발로
그대에게 가서
쉬리라.
잠들리라.
그대 영혼의 맑은 사랑을
내 빈 그릇에 담고
내 꿈을 그대 가슴에 담아서
잠속에 눈부신 나비가 되리라.
금빛 침묵의 땅에
꽃처럼 떨며 열려서
사랑을 고백하리라.
티없는 눈빛으로
그대와 함께 걸어 강에 가서
엎드려 물을 마시리라.
노래 부르리라.
다 비우고 빈 몸으로 깨어나
새 악기가 되어서.
손의 명상 / 이성선
손바닥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나의 얼굴이 보인다.
내게로 불 밝혀 가야 하는
땅이 보인다.
세상을 다 받아들고도 비어 있는 손
잠들지 못하는 나라
산맥이 일어서고 골짜기가 깊다.
강물이 꿈을 꾼다. 바다가 깨어 있다.
미래의 내 음성이 들리는 곳
손바닥 깊이 들어가면
고요하다.
이 고요한 길 속에
길이 엇갈려져 끝이 없다.
혼돈과 창조의 거센 바람소리
우주의 숨소리
밤 하늘 별의 운행이 화안히 비친다.
모두가 죽어 여기 돌아와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난다.
항시 침묵으로만 말하는
내 미지의 손이여.
이 깊은 신비의 기슭에서
누군가 밤마다 내 영혼을 향하여
활을 쏘고 있다.
깨끗한 영혼 / 이성선
영혼이 깨끗한 사람은
눈동자가 따뜻하다.
늦은 별이 혼자서 풀밭에 자듯
그의 발은 외롭지만
가슴은 보석으로
세상을 찬란히 껴안는다.
저녁엔 아득히 말씀에 젖고
새벽녘엔 동터오는 언덕에
다시 서성이는 나무.
때로 무너지는 허공 앞에서
번뇌는 절망보다 깊지만
목소리는 숲 속에
천둥처럼 맑다.
찾으면 담 밑에 작은 꽃으로
곁에서 겸허하게 웃어주는
눈동자가 따뜻한 사람은
가장 단순한 사랑으로 깨어 있다.
절정의 노래 / 이성선
내가 최후에 닿을 곳은 외로운 설산이어야 하리.
얼음과 백색의 눈보라
험한 구름 끝을 떠돌아야 하리.
가장 외로운 곳
말을 버린 곳
그곳에서 모두를 하늘에 되돌려주고
한 송이 꽃으로 가볍게 몸을 벌리고
우주를 호흡하리.
산이 받으려 하지 않아도
목숨을 요구하지 않아도
기꺼이 거기 몸을 묻으리.
영혼은 바람으로 떠돌며 孤絶을 노래하리.
그곳에는 죽은 나무가 살아 있는 나무보다 더 당당히
태양을 향하여 無의 뼈대를 창날같이 빛낸다.
침묵의 바위가 무거운 입으로 신비를 말한다.
가장 추운 곳.
외로운 곳
말을 버린 곳에서
최후를 마치리.
흔들림에 닿아 / 이성선
가지에 잎 떨어지고 나서
빈 산이 보인다
새가 날아가고 혼자 남은 가지가
오랜 여운 흔들릴 때
이 흔들림에 닿은 내 몸에서도
잎이 떨어진다
무한 쪽으로 내가 열리고
빈 곳이 더 크게 나를 껴안는다
흔들림과 흔들리지 않음 사이
고요한 산과 나 사이가
갑자기 깊이 빛난다
내가 우주 안에 있다.
到彼岸寺 / 이성선
허리 굽고 귀도 절벽인 노승이
누덕옷 속에
길을 모두 감추고 떠나버려서
그곳으로 가는 길은
아무데도 보이지 않았다
뜻밖에 일찍 뜬 달이
둑 위 가랑잎과 누워 섹스하는 모습만
훔쳐보고 돌아왔다
*
시인이 세상을 바라다보는 시선― 곧 시각을 나는 다음의
세 가지로 나눈다.
지상적 시각과 수평적 시각 그리고 천상적 시각이다.
지상적 시각을 가진 시인은 현실을 중요시 여겨 비판적이고
참여적인 작품을 즐겨 쓰게 된다.
수평적 시각은 대상을 객관적 입장에서 바라다보는 태도다.
정물화를 그리듯 사물을 냉정하게 그려낸다.
천상적 시각은 현실 너머 저쪽에 관심을 갖는 시선이다.
그래서 본질의 세계, 이상향이나 내세 등을 추구한다.
이성선 시인의 시선은 주로 천상적 시각을 선호한다.
화자가 절을 찾아간다.
'도피안사(到彼岸寺)'라는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절이다.
(실제로 철원의 개화산에 동명의 절이 있지만 굳이
작품 속의 현실과 결부시키지 않아도 상관없다.)
'피안에 이르는 절'이라는 뜻이 아닌가.
피안이란 강 건너 저 편, 불교에선 사바(娑婆,속세)인
이승을 넘어선 저쪽의 정토(淨土,이상향)를 의미한다.
곧 번뇌를 해탈한 열반경이다.
승려들이 토굴 속에 들어가 면벽좌선(面壁坐禪)을 하기도
하고, 긴 세월을 장좌불와(長坐不臥)나 혹은 묵언정진
(默言精進)의 수행을 감행하는 것은 바로 그 피안에
이르는 길을 찾고자 함이리라.
절의 이름이 '도피안사'니 그 절에 가면 마치 피안에
이르는 길이 보일 것도 같은 예감이 든다.
그래서 화자는 도피안사에 찾아간 것이다.
그러나 그 절에 가 봐도 이름과는 달리 피안으로 가는
길은 보이지 않는 다고 한다(제2연).
화자는 그 이유를 제1연에서 재미있게 서술하고 있다.
노승이 이승을 떠나면서 그의 누더기 옷 속에 그 길을
감추고 가버렸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고….
허리가 굽고 귀가 절벽인 노승이니 한평생의 고행으로
육신이 다 허물어진 고승이 연상된다.
그의 '누덕옷'은 무욕청정한 삶의 징표이기도 하지만,
또한 해탈한 육신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 누덕옷 속에
'피안에 이르는 길'을 감추고 가 버렸다는 것이다.
피안이란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니,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일지도 모른다. 설령 어느 고승이 한평생의
정진으로 그 세상을 얻었다[得道] 치더라도 그것은
개인에게 한정된 신묘한 체험이므로 이웃에게 전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리라.
더욱이 그 길이 사바의 번뇌를 떨쳐버리는 것이라면
마음에 달린 문제이니 어찌 남과 더불어함께 할 수
있겠는가?
이성선 시인은 피안 곧 정토에 이르는 길은 찾을 수 없다고
극적인 구조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렇게 부정하고 있다.
제3연은 화자가 피안에 이르는 길을 찾지 못하고
돌아오는 도중에 겪은 정황의 제시다.
밤길이 어두우면 어쩌나 하고 내심 걱정을 했는데,
때마침 보름 무렵이었든지 예상하지 않았던 둥근 달이
떠올라 가는 길을 환히 비춰주고 있다.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둑길을 걷던 화자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지상에 쏟아지는 교교한 달빛을 주시한다.
화자의 시선이 가 닿는 자리에 마른 낙엽이 한 잎 떨어져
있다. 그 낙엽 위에 달빛이 내려 앉아 그 고운 빛깔과
맑은 모양을 황홀히 드러낸다.
화자는 문득 지상의 조화와 아름다움에 눈이 열리며
희열에 잠긴다.
그 희열을 '성의 기쁨(섹스)'으로 은유하고 있다.
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무엇인가? 꽃인가?
여인인가? 물론 꽃이나 여인도 아름답지만 잘 익은
과일이나 동물의 새끼들도 너무 곱다.
아니 자세히 들여다보면 풀잎이며, 곤충, 떠도는 구름,
흘러가는 물, 길가의 돌멩이도 다 아름답다.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다보면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세상이 못마땅하고 괴로운 것은 욕심 때문이다.
세속적인 욕망에 사로잡혀바라다보면 이 세상이 苦海가 된다.
만일 욕심 없이 바라다본다면 이 세상에 근심의 대상이 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떤 마음으로 바라다보느냐에 따라
이 세상은 지옥이 되기도 하고 천국이 되기도 한다.
이 지상을 지옥으로 만드느냐 천국으로 만드느냐는 자신의
마음에 달린 것이다. 그러니 피안에 이르는 길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제3연을 다시 읽어
보면, 피안이 어느 먼 곳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지상이 곧 피안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가랑잎과 달빛'이 빚어내는 황홀은 현세를 정토로 파악한
화자의 기쁨이다.
피안에 이르는 길이 어디냐고?
그대가 지금 서 있는 곳, 바로 이곳이 피안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한 것은 이승을 그처럼 황홀히 여기던
이성선 시인은 서둘러 저 세상으로 떠난 것이다.
무슨 까닭이었을까?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 임보 시인
이성선 시인 / 허형만
신선봉이 어느날 사람 옷 을 입고 세상에 나와
세상을 거닐다가 다시 산으로 갔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이성선이라고도 하고 시인이라고도 하고 그가
육십년을 살았다고도 전하나 그를 다스렸던
설악산이 보기엔 그는 풀잎이었고 이슬이었고
별이었고 구름이었다 적요의 골짜기를 흐르는
한줄기 바람이었다
그가 세상을 건너간 뒤
세상엔
무엇 하나 건드려 진게 없었다
무엇 하나 상한 게 없었다
구도(求道) / 이성선
세상에 대하여
할 말이 줄어들면서
그는 차츰 자신을 줄여갔다.
꽃이 떨어진 후의 꽃나무처럼
침묵으로 몸을 줄였다.
하나의 빈 그릇으로
세상을 흘러갔다.
빈 등잔에는
하늘의 기름만 고였다.
하늘에 달이 가듯
세상에 선연히 떠서
그는 홀로 걸어갔다.
저녁밥 / 이성선
- 山詩 1
나는 저 산을 모른다
모르는 산 속에 숨어 피는 꽃
그것이 나의 저녁 밥이다.
귀를 씻다 / 이성선
- 山詩 2
산이 지나가다가 잠깐
물가에 앉아 귀를 씻는다
그 아래 앉아 물을 마시니
입에서 산(山)향기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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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 신의 가슴길로 들어가는 시
이성선은 '아름다운 탈속'의 세계를 추구한다.
이성선의 시집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는 세속의
세계에서 신성의 세계로 나아가는 정신적 '출가'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아직은 인연이 모자라 비록 육신은 세속에 매여 있지만,
그의 영혼은 언제나 사바세계 저 너머, 온갖 굴레를 벗어
던진 본래의 자리를 그리워한다.
그것은 어쩌면 유한한 인간 누구나 지니고 있는 꿈일지도
모른다. 유한한 인간계를 벗어난 그곳은 어떠한 세계인가?
그것은 바로 자연의 세계, 무한한 우주의 세계일 것이다.
우리가 그곳으로부터 온 바로 그 자리 말이다.
그래서 이성선의 시집 속에는 정적에 쌓인 자연의 은밀한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그의 친구들은 시집의 서문(<자서>)
에도 보이듯이 탐욕과 우치로 가득한 인간들이 아니라
자연과 우주의 구성원들인 달이나 별, 물과 바람, 나무와 꽃,
새와 구름 같은 것이다.
문을 열면 언제나
거기 달이 떠 있지
그에게 차 한잔 대접하듯
이 시집을 나의 평생친구
달에게 바친다
시인은 그의 '평생친구'가 교활하고 변덕스런 인간이 아니라
'달'이며, 그 친구에게 이번 시집을 바친다고 서문에서 쓰고
있는 것이다.
우주는 본래부터 선정에 들어있어 언제나 고요한 정적으로
감싸여 있는데, 사바세계는 축생과 아귀들로 아수라장을
이룬다. 그것은 '참나'를 잃어버린 중생들의 탐욕과 어리석음
때문이다.
시인은 그러한 지옥을 떠나 처음부터 열반에 들어있는
자연과 우주의 세계, 법열(法悅)의 세계를 지향한다.
그것은 또한 '허공'의 세계, 혹은 '무'의 세계와 통해 있다.
'허공'의 세계, '무'의 세계는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가?
비움으로써 가능하다.
욕망으로 가득한 세속의 인간들은 무언가를 자꾸 채우려고
들지만, 신성의 세계를 지향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비우려고
한다. 버리고 버려서 무소유의 상태가 되고 싶어한다.
그곳에 참된 행복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시인의 고향은 설악을 곁에 두고 있는 강원도 고성이다.
그는 틈만 나면 설악으로 간다. 거기엔 '봉정암'이 있고
'청산백운실'이 있다.
그리고 달, 바람, 별, 풀꽃, 가랑잎 같은 시인의 친구들이
있기 때문이다.
달의 여인숙이다
바람의 本家이다
거기 들르면 달보다 작은
동자 스님이
차를 끓여 내놓는다
허공을 걸어서 오지 않는 사람은
이 암자에 신발을 벗을 수 없다
― 봉정암 전문
여기서 '봉정암'은 물론 설악에 있는 암자이지만, 시인이
닿고자 하는 정신적 세계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곳에는 '허공을 걸어서' 즉 텅 빈 마음으로 다가가야만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함으로써 탈속의 전제를
달아두고 있다.
'달의 여인숙', '바람의 本家'란 곧 문명에 오염되지 않는
청정자연의 세계 그 자체일 것이다. 그러한 곳에서라야
절대자의 음성으로 이해되는 '그분 소리' (몰현금)를 들을
수 있다.
구름 열었다 닫았다 하는 산길을 걸으며
내 앞에 가시는 당신을 보았습니다
들의 꽃 피고 나비 날아가는 사이에서
당신 옷깃의 향기를 맡았습니다
당신 목소리는 거기 계셨습니다
― 당신이 나를 스칠 때 부분
시인은 산(자연) 속에서 절대자의 모습을 보고 향기를 맡고
목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기척도 없이 화자의 어깨에 내려앉는 나뭇잎을 보고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미시령 노을)고 말함으로써
시인의 자아와 우주와 합일된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체험을 보여준다.
이러한 체험은 이미 화자가 어릴 때부터 시작되어 그의 생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자연 속에서 우주와 교감하며
시인은 자랐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명으로 인하여
오염된 인간의 영혼과 현실에 대해 시인은 은연중에 비판의
메스를 가하고 있는 것이다.
수우족처럼은 아니지만
어릴 때 들길을 걸으면서 알았다
내 영혼은 바람이 주셨다는 것을
지금도 걸으면서 느낀다
내 눈동자 속의 눈동자에서는
그분과 하나다
나는 이것을 그치지 않고
노래하기를 열망한다
새벽 풀잎에 별이 흐를 때
나의 귀는 듣는다
밭고랑 감자가 냇물에게 들려주는 노래
메꽃 속에 늦잠 자는
벌레의 잠꼬대 소리
바람은 이들로 향기롭다
이들은 내게 와서
들판으로부터 나를 키웠다
수우족처럼은 아니지만
나는 알았다
그리고 지금도 안다
아름다운 것은 단순하고 작다
수우족이 그렇게 살고
내가 어릴 때 그렇게 살았던 것처럼
― 바람의 노래 전문
서구문명은 1 더하기 1은 2라는 수학의 원리를 바탕으로 문명을
건설해왔다. 이러한 유위(有爲)의 문명은 합리와 이성에 의해
자연을 정복하고 문명을 건설하였으며 또한 팽창의 논리에
의해 약소국을 짓밟는 제국주의 침략의 바탕이 되어 인류의
영혼을 병들게 하지 않았던가.
이미 오래 전에 이를 갈파한 노자의 '소국과민'(小國寡民)의
무위(無爲)의 정치철학처럼 시인은 '단순하고 작은 것'의
아름다움을 강조함으로써 포화상태의 인류문명을 은연중에
비판하고, 잃어버린 유토피아에의 그리움을 토로하고 있다.
'아름다운 것은 단순하고 작다'(<바람의 노래>)고 보는
이러한 미의 관점은 시인으로 하여금 '수우족'이나 이 지구에서
가장 종교적인 나라라 할 인도와 인도 사람들에게로 눈을
돌리게 한다. 이들이야말로 작고 단순하게 살아가는 민족의
표본일 것이다.
이번 시집에는 특별히 이 작고 단순한 삶의 깊은 아름다움을
지닌 인도에 다녀온 체험을 바탕으로 한 기행시들이 많이
눈에 띈다. 시인의 그러한 미학적·정신적 취향이 결국 인도로
나아가게 했던 것 같다.
맑게 웃어주는 저 남루한 아이의
이슬 같은 눈동자 속에 살짝 숨어 들어가 목욕하고 나오다
비로소 이 먼지의 땅이 연꽃 속이구나
이제 나무를 바라보는 법으로 사람을 바라본다
- 연꽃잎 속 이슬 부분
인도는 신성의 땅이다.
그곳은 '편견을 던져버려 영원히 늙지 않는 땅'이며 '
소보다 깊은 눈을 가진 사람들의 대지'(<인도의 시1>)이다.
시인은 그곳에 가서 '숨은 성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몸 위로 쏟아지는 '하늘의 말씀'을 듣는다(<라자스탄의 밤
사막에 누워>).
인용시에서 시인은 남루하고 가난하지만 맑게 웃어주는
이슬 같은 눈동자의 한 소년을 통해 새로운 세계인식에 이른다.
'비로소 이 먼지의 땅이 연꽃 속이구나'라는 깨달음은 곧
'진속불이'(眞俗不二) 즉 속세와 열반이 둘이 아니며
먼지 나는 사바세계 속에서 연꽃 같이 맑은 정토가 숨쉬고
있음을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분별심으로 인하여 차별과 편견의 눈으로 세계와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좀더 평등하게,
있는 그대로의 실체를 여여(如如)하게 바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깨달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의자 하나와 가위 그리고 바리깡이 전부
나무에 걸어둔 거울도 반은 깨어졌다
거울 속 얼굴 뒤에서 검은 피부의 이발사가
둥근 달처럼 화안하게 미소한다
얼마 만에 찾은 이 평화인가
거기 기대어 지그시 눈을 감는다
이발사가 내 티끌을 잘라 쓸어내는 동안
내 몸 아득한 지평에서
신일까, 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 노천이발소 부분
인도의 한 시골마을 시장 모퉁이에서, 시인은 머리를 깎는다.
자본주의가 팽만하여 타락의 극치로 치달은 침침한 한국의
퇴폐이발관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밝고 소박한 이발소에서
'둥근 달처럼 화안하게 미소'하는 검은 피부의 이발사에게
머리를 맡기고 시인은 지긋이 눈을 감은 채, 오랜만의 평화로움
을 맛본다. 그리고 그러한 아늑한 평화 속에서 그윽한 신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내 몸의 아득한 지평에서' 들려오는 소리이다.
신은 우리 몸 안에 내재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과의 만남의 상태는 몸의 평화와 긴밀한 관계에
놓여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명상에 들어갈 때에도 먼저
몸을 이완시키는 키르탄kirtan의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한 비움의 황홀 속에서 신은 현현하는 것이다.
인도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다름 아닌 무의 실체였다.
그것은 관념적인 무가 아니라 구체적인 무였을 것이다.
'얼굴도 몸도 텅 비어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는 전율한다.
가끔 드러난 얼굴이 땅빛을 너무 닮아서 지나다 모르고
밟을 뻔했네. 올려다보는 눈빛이 어찌나 부드러운지
섬칫 숨이 막혔네. 은은히 웃고 있는 눈동자 속이 그러나
아아, 텅 비어 있었네. 얼굴도 몸도 텅 비었네
희미한 안개 속에 묻힌 그들은 벌레 같았네. 이슬 젖은
꽃 같았네. 쓰러진 주검 같고 주검처럼 아무것도 아닌
지푸라기보다 못한 無였네
텅 빈 눈과 몸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두려워져서,
이 한없이 깊은 블랙홀, 무 안에 빠질 것 같아서 얼른
지나쳐 자리를 떠났네.
無에 몸 씻으러 여기 온 내가. 神의 가슴길을 찾아온
내가. 아아
― 神의 가슴길, 부분
유(有)의 아수라장을 목격하다가 이국땅에서 돌연 만나게 된
무의 실체, 욕망의 불길로 이글거리는 눈이 아니라 텅 빈
눈, 온갖 욕망을 버렸기에 자애롭고 부드러운 눈길,
피둥피둥 돼지처럼 살찐 모습이 아니라 마른 가지처럼
야위고 마른 얼굴과 몸, 그러나 움푹 들어간 눈에선 광채가
나는 모습이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어떤 성자의 이미지인데
인도에는 그러한 성자의 모습을 한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눈에 핏대를 올리고 싸우는 정상배들이 판을 치는 천민
자본주의의 나라 대한민국의 한 시인이 그러한 성자들의
모습을 만났을 때 심정이 어떠 했을지 짐작이 간다.
약간은 그로테스크하고 섬칫했으며 허탈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자칫 그 '한없이 깊은 블랙홀에 빠질 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엄습해 본능적으로 자리를 피해왔을 수도
있으리라. 바로 이 지점에 우리 나라의 소위 정신주의 시를
쓴다는 시인들의 허구성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이 시인은 비움을 노래하고 무를 노래해 왔으면서도
막상 무의 실체에 접하고는 도망 나오고 만 자신에 대해
탄식을 토로한다. '無에 몸 씻으러 여기 온 내가. 神의
가슴길을 찾아온 내가. 아아'하고.
이것은 비단 이 시인 뿐 아니라 한국에서 중산층 부르주아의
삶을 구가하면서 소위 정신주의 시를 운위하는 모든 시인들
또한 이 시인과 마찬가지의 반응을 하리라
생각된다.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나 유위의 삶에 길들여져
왔으며, 버리기보다는 모으는 데 열중해왔기 때문에,
모든 것을 갑자기 버리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될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집은 세속의 길에서 신성의 길에로 나아가려는
한 정갈한 영혼의 치열한 구도의 기록이며, 속기를
최대치로 떨구어낸 맑은 정신의 세계를 보여준 보기 드문
하나의 전범으로서, 이성선 시의 새로운 지평을 보여준
성과라 하겠다.
(필자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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