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저마다 도시생활의 건조함을 조절하고, 내부에 쌓인 스트레스 해소법으로 나름대로의 방법들을 갖고 있다.
술을 매개로 한 여러 놀이들이 있을 수 있고, 또 노래방을 전전긍긍하기도 하며, 기분 내키면 디스코텍도 불사한다.
누구는 날보고 두주불사라고들 하지만 음, 그렇게 많이 안마신다. 조금 많이 먹는다.(*__)
어쩌다 지인들과 노래방을 들락거리기도 하는데, 일단 흥이 좀 돋는다 싶으면 볼것없이 처절한 엽기행각을 펼치는 바, 노래방,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 디스코텍은 춤만 추면 그만이지만 노래방은 노래까지 불러야 하니까.
아아! 나으 무대매너여!
좀 고상한 치들은 문화생활이나, 자연속에서 상처받은 심신을 달랜다.
음악을 듣거나, 독서를 하거나, 영화나 연극을 관람하고, 등산 등의 여행을 즐긴다.
요즘 들어 가장 주목받는 문화코드는 바로 음악과 영화다.
나 같은 사람이야 요것 쪼끔, 조것 쪼끔 하는 식으로 모든 면에서 아웃사이더 즉, 주변인물처럼 깊이 있게 동참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맛은 살짝살짝 다 보고 다니는 편.
지난 일요일에는 점심을 먹고 영화를 한 편 보았다.
보통 영화관에서 5~6 편의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는데, 일단 ‘실미도’, ‘반지의 제왕’, ‘말죽거리 잔혹사‘ 세 편 중에 하나를 보기로 마음먹고 티켓팅을 하러 갔는데 밥을 먹고 오면 이미 두 편은 '상영중'으로 시간이 맞지 않아서 ’말죽거리 잔혹사‘로 낙찰! 표를 두 장 끊었다.
약 한 시간 이상 시간을 확보했으므로 느긋하게 점심을 먹기로 하고 근처의 이름난 삼계탕집으로 향했다.
요즘 조류독감이다 뭐다 밤이고 낮이고 매스컴에서 한창 떠들어 대는데, 나야 뭐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다.
설사 그것에 걸린 닭이라 할지라도 펄펄 끓는 도가니에서 균이 버텨낼 리 만무고, 정작 중요한 것은 닭이란 놈이 워낙 바이러스에 약한 동물이라 양계업자들이 사료에 항생제를 무분별하게 섞어 먹인다던데 그게 더 우리 몸에 더 해로운 법.
우리의 음식문화는 각 개인 개인이 달라져야 한다. 저 잘난 매스컴에서 떠들어 대는 것에 너무 현혹하지 말 것이며, 생태계 파괴자나 먹는 걸로 장난치는 것들은 바로바로 잡아 넣고 극형에 처할 것.
하여간 삼계탕의 죽까지 다 긁어먹고 후식까지 챙겨먹고 난 후 배를 뚜드리며 밖으로 나왔더니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다.
으~ 기분 삼삼한거!
상영시간이 대충 맞아 떨어져서 영화관으로 들어섰다.
‘태극기 휘날리며’를 예고편으로 틀어줬다. 오! 볼만하겠는데! 이건 꼭 극장판으로 봐야겠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평할 때 나는 우선적으로 보는 게 ‘영상미’다.
그래서 나에게 있어 최고의 영화는 로버트 레드포드와 메릴 스트립의 ‘아웃 오브 아프리카’다. 열차가 광활한 아프리카 대평원을 가로지르는 광경과, 수천 마리의 물새가 날아오르는 수면위를 나는 경비행기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단연 압권. 아마 이 영화를 본 게 말죽거리 잔혹사의 ‘현수’ 나이 때 쯤 이었는데 ‘언젠가는 꼭 저 짓(?)을 해보리라’고 다짐했었다.
근데 영상미는 할리우드 쪽보다는 유럽 쪽이 더 나은 것 같다. ‘뽕네프의 연인들’이나, ‘마농의 샘’만 봐도 그렇다. 할리우드의 상업성 짙은 영화는 내게 있어서 더이상 흥미롭지 못하다.
하여튼 영화를 왜 영화관에서 보는가? 당연히 큰 화면이 주는 감동 아닌가?
한마디로 나는 영상미가 좋은 영화는 별 두 개 반쯤을 우선적으로 준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말죽거리 잔혹사는 영상미로 볼 영화는 아니다.
‘향수’를 자극하는 영화다. 물론 10대나 20대 관객들은 다르겠지만.
영화 중간 중간에 현수(권상우 분)가 손가락 세 개로 푸샵을 하는 장면이라던가, 상체의 근육이 씰룩거릴 때마다 젊은 여자관객들의 괴성이 여지없이 쏟아져 나왔다.
나 역시 ‘화산고’에서 권상우의 이미지가 인상적이어서 그에 대해 기대도 했었지만 좀 심하다 싶었다.-_-
이 영화를 가볍게-즐기면서- 본다는 전제하에 보았을 때 관객은 두 부류로 나뉘는 것 같다. 하나는 이른바 386세대 이상은 향수에 치중하고, 그 이하는 스타배우에 집중하고.
조금 무게감 있게 본다면 두 부류의 공감대도 있다.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것 없는 학교의 권위주의, 획일주의, 폭력성, 대학진학이라는 절대적 지상과제, 그리고 젊은 날의 순수한 사랑.
아마도 감독이 말하려는 메시지는 이런 것이겠지.
영화 후반부에 현수가 외치는 절규. “대한민국 학교, 다 XX라 그래!"
시나리오 전개상 고등학교 2학년생이 대한민국 학교를 죄다 싸잡아서 욕을 하다니 좀 오버(over)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대한민국'을 '이따위'쯤의 단어로 바꿨다면 어쩌면 더 어울렸을 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영화 자체를 좀 더 무게 있게 만들던가.
티켓팅을 하고 난 후에야 이 영화의 감독이 ‘詩人 유하’인 것을 알았다.
그는 이미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와 <결혼은 미친 짓이다> 두 편의 영화를 만들었지만 한 편도 본 적은 없고, 내겐 <세운상가 키드의 생애>나 가장 최근(2000)에 펴낸 시집 <천일馬화>로 익숙한 이름이다.
어쨌거나 난 이것저것 맛만 보는 주변인물이니까 시인이 만든 영화라 해서 그가 뭘 말하려 하는지 집중하지 않기로 하고 가볍게-즐기면서- 보기로 했다.
많은 부분에서 자연스럽게 나의 학창시절을 회상하고 비교하게 만들었다.
중학교 3학년 때 벗어버렸던 그 검정 교복과 대학교 2학년 때까지 입었던 교련복이 반갑기도 했지만, 그 획일적이던 학업 분위기와 폭압적인 몇몇 선생님들을 기억하게 만들었다.
아울러 반에는 꼭 몇 명씩은 있었던 맨 뒷자리에 앉아서 딴짓들을 하는 껄렁패 친구들과의 추억도 떠올렸다.
사실 난 고등학교 시절 ‘범생’ 쪽이 아니었나 싶다. 동창들을 만나면 그렇게 인정해주는 놈들은 별반 없지만. 아마도 이 짜식들은 내 평소의 모습을 기억하는 게 아니고 어쩌다가 터뜨리는 ‘사고’만을 기억하는 탓일 게다. 자의 반 타의 반 ‘자해’ 비슷한건 몇 번 했지만, 싸움은 싫어했으니까. 성적도 그런대로 괜찮았던 거 같고.
범생 현수와 주먹짱 우식(이정진 분) 그리고 친구들 몇 명이서 ‘고고장’에서 춤추는 장면과 함께 영화관 서라운드 시스템으로 Boney M의 <One Way Ticket>이 흘러나올 때는 가슴이 다 쿵쿵거렸다. 오! 이 귀에 익은 멜로디! 아! 오도방정 한 번 떨어보고 싶다. 오래전에 그래봤듯이.
현수의 은주(한가인 분)에 대한 사랑은 나의 풋사랑에 대한 추억도 반추하게 한다.
비 오는 날 그녀가 지나는 곳에서 괜히 서성대기도 하고, 그녀가 버스를 타는 정류장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기도 하는 모습들은 고교시절의 내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나마 그 녀석(현수)은 손이라도 잡아봤지, 나는 예나 지금이나 몰골이 흉악하니 될 리 만무, 얼마 지나지 않아 눈치 깐(?) 그녀는 골목길을 돌았고, 한 정거장 위쪽으로 올라가 버렸다. 흑흑.
말죽거리 잔혹사의 가장 큰 키워드는 ‘이소룡’의 ‘쌍절곤’과 ‘절권도’다.
그리고 또 하나는 ‘양희은’의 노래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
당시 사춘기라면 누구라도 그랬듯이 라디오에 집중하고, 팝송에 열광하는 모습들을 그대로 보여준다.
약간의 팝송 지식을 갖고 있는 현수를 반가워하는 은주는 언제 한 번 기타소리를 듣고 싶다고 말하고, 현수는 양희은의 저 노래로 기타 독학을 죽어라 한다.
결과적으로 현수와 은주는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복선으로 깔은 의도도 있는 듯하다.
그 당시 기타 한 번 잡아보지 않은 이 없으니, 기타를 독학으로 배운 사람들은 다 알만한 노래,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
노래 중간에 고음 부분에서는 느닷없이 음계를 낮춰 부르거나 삑사리 나는 모습은 어찌나 옛 생각을 나게 하던지.
기타코드 4가지만 알면 반주를 튕길 수 있었던, 저 노래로 나는 또 얼마나 주변의 사람들을 고문했었던가. C, Am, Dm, G7. “너어에~ 치임무게~ 메마아른~ 나의 입술~♬~” 으웩!!!
요즘 영화에 감초처럼 등장하는 액션씬은 이 영화에서도 또 하나의 볼거리다.
물론 역동적인 면으로 보면 ‘올드보이’에서 최민식의 ‘장도리 격투’가 더 나아 보인다. 그러나 영화의 주된 키워드가 ‘이소룡’이므로 쌍절봉 액션은 나름대로 볼거리. 권상우가 쌍절봉 연습을 열심히 한 것 같다.
요즘 깡패들이 사시미 대신 쌍절봉을 갖고 다닌다면 살인 같은 강력사건이 좀 줄어들 듯도 한데, 벼라별 황당무계한 잡념.
영화 전반적으로 봤을 때 처음 씬과 마지막 씬이 별로 기억에 없을 만큼 강하지는 못했지만 그다지 억지스러운 부분이 없어서 나름대로 즐겁게 봤다.
전문적인 시나리오 작가가 드문 현실에서 그나마 시인감독이 시나리오를 맡아서 무리가 없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든다. 요즘처럼 영화로 돈을 좀 벌면 시나리오 작가 육성에도 돈을 좀 투자할 만도 한데, 아직도 국내 영화의 인기에 편승해서 쓰레기를 만드는 이들이 더러 있는 듯 하다.
영화관을 나와 화원(花園)과 문구점을 들른 후 ‘도솔천’이라는 전통찻집에서 철관음을 마셨다.
오목조목한 다구(茶具)가 귀엽고, 차향이 향그럽고, 은은한 국악이 감미롭게 흘러 나왔다.
조그마한 찻잔을 받쳐 들고 어두워진 창 밖을 내다보니 영화관을 나오면서 그쳤던 눈발이 아스팔트에 내려앉지 못하고 하늘로 휘휘 날아올랐다.
첫댓글큭큭^^...파아란님~ 후기 너무 재미있네요. 요즘 다시 닭 먹자고 난리더군요. 얼마 전부터 TV에서두 심지어는 삼성 직원들이 점심식사로 삼계탕 먹는 사진이 신문에 실리기도 하구 언론은 늘 그런 식 이에요. 대책없는 거...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다음 번에도 후기 올려 주세요^^
첫댓글 큭큭^^...파아란님~ 후기 너무 재미있네요. 요즘 다시 닭 먹자고 난리더군요. 얼마 전부터 TV에서두 심지어는 삼성 직원들이 점심식사로 삼계탕 먹는 사진이 신문에 실리기도 하구 언론은 늘 그런 식 이에요. 대책없는 거...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다음 번에도 후기 올려 주세요^^
여학교에도 폭력교사는 있었지요. 그분은 교감선생님 되셨고, 얼마전 해양수산부 장관 갈릴때 교장 교감님들 얼굴보며 그분도 거기 있지 않았을까 싶데요.
영화로 보는것 보다(영화도 못봤지만서도^^) 파아란님의 입담(글담?)으로 보는 영화가 더 재미난 듯..^^ /우리도 날마다 닭 먹는데 끄떡 없다지요.^^ /설날 아침이네요.. 복 많이 지으세요.^^
글 잘읽었어요^^ 전 영화 끝나고 나오는 김진표의 랩이 더 인상깊고 좋던데요.....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