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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없는가? / 대원스님
수봉추천 0조회 524.09.07 16:31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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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산 대원 대종사 [스님] (커피잔을 들어 보이시며) 오늘 커피 맛이 괜찮나요? 맛이 어떤가요? [대중들] 맛이 좋습니다. [스님] 커피가 맛이 있다고 했는데, 그 대답이 맞느냐 이겁니다. 현실적으로 소통하기로는 “맛이 있다”, “맛이 없다” 하는데, 그렇게 인식하는 것으로 다 알았는 것이라고 봅니까? “맛이 달다.”고 하니 “틀렸다!” “쓰다”고 하니 “틀렸다!” “쓰지도 달지도 않다.”고 하니 “그것도 틀렸다!” 그러면 어떻게 한마디 해야 시비가 되지 않겠느냐 이겁니다. [대중] 화두를 열심히 참구해서 깨닫고 나서 대답을 해야 정답일 것 같습니다. [스님] 경(經)에는 그리 말을 안 했지요. 경(經)에는 중생의 의식으로 분별해서 달다 쓰다 하는 것이지, 실지로는 달다, 쓰다 하는 건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달다, 쓰다 하는 게 없다는 것도 잘 모를 걸요? 경전에 나온 그 말을 확실히 알까요? 어째서 반야심경에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 없다고 했을까요? 현실에는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 분명히 있는데요. 말로 들어서 생각으로 아는 건 안 되는 겁니다. 실질적으로 화두가 순일하게 일념 선정 속에 깊이 들어간 그때를 뭐라고 해야 되겠어요? 화두 일념 삼매에 깊이 들어가 본 일이 있나요? 부처님 당시에 수행하는 선인이 부처님을 찾아가서 “나는 대로변 나무 밑에 앉아서 한 생각에 몰입해 있을 때, 오백 대의 수레가 지나가는 것도 몰랐습니다.”하고 자랑하니, 부처님은 “나는 벼락을 쳐서 집이 날아가는 것도 몰랐노라.” 그러자 선인이 “저는 거기에 미치지 못합니다. 세존은 천상천하에서 누구도 능가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집이 날아가도 모르는 그때의 경계를 뭐라고 해야 되겠습니까? [대중] 주관과 객관이 끊어진 자리입니다. [스님] 주관과 객관이 끊어졌다고 한다면, 어째서 주관과 객관이 끊어졌다는 말이 나오는 거요? 그건 스스로 자기 다리를 잡고 넘어지는 소리요. 만약 오백 대 수레가 지나가는 걸 몰랐다는 선인을 만났으면 거사님은 혼났을 거야. “나는 오백 대 수레가 지나가는 것도 몰랐는데, 그대는 어떻게 객관과 주관을 말하는가?” 하겠지요. 그러면 어찌 하겠어요? 거기서 못 깨달으면 안 되지요. 일체 모든 중생의 오온십팔계,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벗어날 수 있는 차원의 세계가 어떠냐? 집이 날아가도 모르는 거기에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가 있다고 해야 되겠어요, 어떻다고 해야 되겠어요? 그러한 것을 여러분이 맛을 안 봤고, 해 보지도 안 했는데, 말이 안 통하지! 생짜배기로, 과일로 말하면 아직 모양도 형성이 안 된 그런 형색인데, 푹 익은 과일을 세계를 말하면 그게 되겠어요? 그렇지만 이야기를 안 해줄 수 없어서 한다 이겁니다. 도시 사람이 벼가 어떻게 생겼는지, 쌀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는데, 농촌에 가서 농사를 지어보면 비로소 농촌의 벼 소식을 알듯이, 여러분이 실질적으로 깊은 선정삼매에 들어가 봤다면 모를 턱이 있느냐, 다 안다는 것입니다. 일념 선정에 깊이 들어가면 불안한 마음, 괴로운 생각, 일체 모든 중생의 번뇌가 싹 끊어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걸 말로만 자꾸 해주지, 여러분은 말로만 듣지, 그러면 뜬구름 잡기라. 암만 이야기해 줘봐야 소용이 없는 것이고 본인이 실지 맛을 봐야 됩니다. 그래서 하는 소리가 ‘어떤 사람이 물을 마셔서 차가운지 뜨거운지 본인이 알 뿐이다(如人飲水冷暖自知).’ 깊은 선정의 삼매의 맛을 누가 대신 해줄 수 있나요? 대신 해줄 수 있으면 한 사람만 열심히 해 가지고 컴퓨터에 입력하듯이 다 넣어주면 되는데, 과학이 아무리 발전을 해도 그건 할 수가 없습니다. 깊은 일념 선정 삼매에 본인이 들어가야 오온(五蘊: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 육근육식(六根六識)의 색성향미촉법에서 벗어나는데, 그냥 중생의 의식 가지고는 어려운 일이 해결될 수도 없고 마음이 영원히 편안할 수도 없습니다. 돈 없을 때는 ‘돈!돈!’ 하지만, 돈을 많이 벌고 나면 그냥 그래요. 그것 가지고 내 마음이 만족하고 편안한 건 아닙니다. 벼슬 못해서 한이지만, 벼슬하고 보면 그것도 별 거 아닙니다. 그걸로 내 마음이 영원히 편안하냐? 아닙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편안한 건 없다 했는데(三界無安), 어떻게 해야 편안한가에 대해 부처님께서, “너 자신을 깊이 관찰해서 돌이켜보라. 너란 존재가 어떤 것인지 살펴보라(☞회광반조).” 깊이깊이 살펴보면 자신이 공(空)한 걸 깨닫고, 비로소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생들은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에 놀아납니다. 현실 세상 모든 게 물질을 가지고 사는데, 자본주의, 유물론 등 물질에 관한 학문도 많이 나왔고, 그 물질인 색(色)을 큰 재산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색(色)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라 했으니 기가 막힌 것 아닌가요? 그것이 없으면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가나요? 그게 없다면 ‘맛이 있다’는 말은 어떻게 하는가요? 여러분은 이런 것을 생각도 안 해보고, 없다고 하니까 그냥 ‘없구나’ 합니다. 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가 없다고 했는지 생각을 해봐야 됩니다. 예전에 어느 행자가 절에 들어와서 생전 묻는 일도 없으니, 큰스님이 불러서 묻길, “너는 어째서 한 번도 묻는 게 없느냐?” “제가 별로 물어야 할 건 없지만, 한 가지 의심나는 것은 있습니다.” “무엇이냐?”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 없고,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가 없다고 하니, 그것이 저는 의심이 갑니다. 어째서 없는가 말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반야심경을 수 없이 읽었을 건데, 거기서 낚시바늘에 고기가 탁 걸리듯 ‘어째서 없나?’ 생각해 봐야 됩니다. [대중] 그 없다는 뜻은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 고정돼 있지 않고 항상 변하는 것이어서 거기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스님] 그렇지만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 현실적으로 다 있는데요? 본인이 당장 일하다가 칼에 손이라도 베이면 “아야!”하고 느끼는데요? 또, 길 가다가 돌부리를 차면 느끼고, 차를 마시면서도 맛이 있는 걸 느끼는 데, 그게 없다. 생사도 없다, 무명도 없다, 왜 전부 없다고 했을까요? [대중] 현상적으로는 독립된 실체가 없이 계속 연기 (緣起)에 의해서 변해가는 거니까 없다. 그래서 무아이고 공입니다. [스님] 연기(緣起)가 어디서 일어나느냐? 연기가 있어서 일어나는 거여, 없어서 일어나는 거여? [대중] 있기는 있으되 응무소주(應無所住)로 머무는 바 없이 일어납니다. [스님] 그러나 저러나 있는 것 아니야? 마찬가지라. [대중] 제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육근육식(六根六識)의 의식이 일어난 상태를 그대로 인정을 하면서 살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스님] ‘무의식계(無意識界)’라고 했는데? 의식이 있어야 뭘 있다 없다 분별하지, 의식세계도 없고 다 없다고 했는데 뭘. 우리가 현실적으로 “커피가 맛이 있냐?”하는 질문을 받았을 때, 색성향미촉법이 없으니까 대답을 안 한다고 가만히 있으면, “너는 대답할 줄 몰라? 넌 색성향미촉법이 없으니 일생을 벙어리로 살아갈 거냐?” 하고 시비가 생겨 반대로 “맛이 있습니다.” 대답하면, “색성향미촉법이 없는데 어디서 맛이 있다는 게 나오는 거야?” 이렇게 묻는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요? [대중] 매이지 않으면 됩니다. [스님] 글쎄, 색성향미촉법도 없고 의식계도 없는데, 매이지 않는다는 그 말을 어떻게 하느냐 이거야. [대중] 있고 없고가 아니라, 매이지만 않으면 됩니다. [스님] 글쎄, 매이지 않는다는 자체가 이상한 거라. 생각해 봐요. 매이지 않으려 한다 하면 허물이거든. 그렇잖아요? 오늘 이거 해결책이 없네! 커피를 아무리 아침마다 대접해 봐야 커피만 절단나지, 무슨 뾰쪽한 게 아무것도 없으니 어찌하면 좋은가? 허허. ‘병 안에 있는 새를 어떻게 꺼내겠느냐?’하는 그런 꼴이라.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고,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는 그런 문제입니다. [대중] 병을 깨면 안 되겠습니까? [스님] 병을 깨버리면 새가 죽어요. 새를 살려내라 했는데. 화엄경에서 이르길,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이러한 마음을 일으키면 열 가지로 청정해지는데, 무엇이 그 열 가지인가? 소위 깊은 마음이 청정하니 구경에 이르도록 무너지는 일이 없기 때문이요, 색신이 청정하니 마땅하게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며, 음성이 청정하니 모든 언어에 통달했기 때문이며, 변재가 청정하니 가이없는 불법을 잘 설하기 때문이며, 지혜가 청정하니 모든 어리석음을 여의었기 때문이며, 태어남이 청정하니 보살의 자재한 힘이 구족하기 때문이며, 권속이 청정하니 과거에 함께 수행한 모든 중생의 선근을 성취시키기 때문이며, 과보가 청정하니 모든 업장이 소멸했기 때문이며, 대원이 청정하니 모든 보살들과 성품이 둘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행이 청정하니 보현의 수레를 타고 출리하기 때문이니, 이것이 열이니라. 경(經)에서 부처님은 이렇게 보편적이고 대중적으로 공감이 갈 수 있도록 조리있고 구체적으로 말씀을 하셨는데, 조사스님들은 학인이 묻기를, “경의 말씀이 너무 많으니, 간단하게 요약해서 말씀해 주시길 원합니다.” “어제 나에게 어떤 사람이 와서 묻기에 바로 입을 닫고 있었느니라.” “어째서 그러합니까?” “상강(湘江)에 비친 달을 잡으려고 하지 않고, 푸른 하늘을 향해서 항상 흰 구름을 보느니라.” 라고 대답했습니다. 여러분은 부처님 말씀도 들었고, 조사스님 말씀도 들었습니다. (찻잔을 들어 보이시며) 그러면 이것에 대해서 문답하기를, “이게 무엇이냐?” “차입니다.” “이게 무슨 차냐? 찻잔이지.” “차가 찻잔에 들었습니다.” “찻잔에 차가 들었는데, 이걸 한 마디로 뭐라고 해야 되겠느냐? ‘차가 든 찻잔’이라고 해야 되겠지?” “그렇습니다.” “찻잔과 차는 말이 없는데, 그대가 ‘차가 든 찻잔’이라 한 것은 그대가 혼자 생각한 것 아닌가?” “혼자 자작(自作)으로 생각을 했지요.” “왜 찻잔과 차는 말이 없는데, 그대는 그런 말을 하는가?” “그게 내 앞에 보였기 때문에 말을 한 겁니다.” “우주는 한 뿌리요 만물은 한 몸이라 했거늘, 너는 뭘 가지고 찻잔이니 차니 그런 말을 하는고?” 이렇게 묻는다면 뭐라고 해야 될까요? 그것이 해결이 돼야 됩니다. 찻잔이라고 해도 안 되고, 찻잔이 아니라고 해도 확실히 해결하는 말이 안 됩니다. 이자불성(以字不成) 팔자불시(八字不是)라. 이(以)자라고 해도 완전한 글자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고, 팔(八)자라고 해도 옳지 않다 했으니, 뭐라고 해야 되겠습니까? 이것은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가지고는 해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에서 해결이 되는 것일까요? 이무소득(以無所得)! 일체 얻은 바 없는 이무소득(以無所得)이 돼야 여러분이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무엇이 얻은 바가 없다는 것일까요? ‘나는 무엇인가’를 깨달으면 이무소득도 알 수 있고 제가 말씀드린 걸 다 알 수 있습니다. 이뭣고가 그리 쉬운 게 아니라, 거기서 확실히 깨달으면 모든 게 다 해결이 됩니다. ‘무엇인고?’ 그것만 하세요. 일체 아는 것, 어떤 지식, 상식 그런 거 다 버리고, 오직 나를 몰라서 ‘무엇일까?’ 하고 할 뿐입니다. (2018.10.07 학산 대원 큰스님 소참법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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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삼보에 귀의합니다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
거룩하신 삼보님께 귀의 합니다
일체 중생의행복을 발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