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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高麗) 황도(皇都), 나성(羅城)과 황성(皇城) 이야기
2020년 04월 08일
○ ‘고려(高麗)’는 어디에 있었는가? 묻는 필자(筆者)가 어리석은 자(者)다. 어디에 있었느냐? 묻는 필자(筆者)가 어리석다는 이야기다.
고려(高麗) 황도(皇都)에는, ‘외성(外城)=나성(羅城)’과 ‘내성(內城)=황성(皇城)’이 대규모(大規模)로 축조(築造)되어 있었다는 역사기록(歷史記錄)이 존재(存在)한다.
그러나 실물(實物)은 없다. 물론(勿論) 조그만 돌덩이를 쌓아놓은 흔적(痕迹)은 있다고 한다. 전란(戰亂)과 내란(內亂)으로 파괴(破壞)되고 소실(消失)되었다고는 하지만 주춧돌인 기초석(基礎石)하나 없다는 것이나, 흔적(痕迹)조차 없다는 것은, 무언가 의심(疑心)의 눈초리를 지울 수가 없다.
➨ 위의 사진(寫眞)을 보자. 저 모양이 고려(高麗) 500년 도읍지(都邑地)의 만월대(滿月臺) 유적(遺跡)이라면… …기막힌 현실(現實)이다. 흔하디흔한 야산(野山)이잖은가? 저런 곳에 고려(高麗) 황도(皇都)가 있었다고… …이건 한국사(韓國史)를 쓰레기로 만들려하는 짓이다. 농촌(農村)마을의 농가(農家)주택(住宅)과 무슨 차이(差異)가 있는지 말해 줄래!
고려(高麗) 말(末)… …홍건적(紅巾賊)이 고려(高麗) 황도(皇都)를 점령(占領)했다가 고려(高麗)군의 대대적(大大的)인 공격(攻擊)을 받고 성(城)안에서 “십여만(十餘萬)”이 몰살(沒殺)당했다고 전해진다.
이때도 고려(高麗)의 나성(羅城)과 황성(皇城)은, 그대로 존재(存在)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역사(歷史)기록(記錄)을 살펴보자.
(1) 高麗史 卷四十/世家/卷第四十/恭愍王 11年 1월 17일 : 《甲子.安祐,李芳實,黃裳,韓方信,李餘慶,金得培,安遇慶,李龜壽,崔瑩等,率兵二十萬,屯東郊,摠兵官鄭世雲督諸將,進圍京城. : 갑자, 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황상(黃裳)·한방신(韓方信)·이여경(李餘慶)·김득배(金得培)·안우경(安遇慶)·이구수(李龜壽)·최영(崔瑩)등이 병사 200,000명을 거느리고 동교(東郊)에 진을 치자,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이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진격시켜서 개경[京城]을 포위하도록 하였다.》
1362년 1월 18일(음) : 《乙丑. 昧爽,諸將四面進攻,我太祖以麾下親兵二千人,奮擊先登,大破之,斬賊魁沙劉·關先生等.賊徒自相蹈籍,僵尸滿城,斬首凡一十餘萬級獲,元帝玉璽,金寶,金銀銅印,兵仗等物,餘黨破頭潘等一十餘萬遁走,渡鴨綠江而去,賊遂平. : 을축. 동틀 무렵에 여러 장수들이 사방에서 전진하여 공격하니, 우리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휘하의 친병(親兵) 2,000명을 거느리고 용기를 내어 공격하여 먼저 “성(城)에 올라가 적을 크게 격파”하였으며, 적의 괴수 사류(沙劉), 관선생(關先生) 등을 베어 죽였다. 적이 달아나면서 서로 짓밟아서 쓰러져 죽은 시체가 성(城)에 가득 찼으며, 머리를 베어 죽인 것이 무릇 100,000여 급(級)이었고, 원(元) 황제(皇帝)의 옥새(玉璽)와 금보(金寶), 금·은·동으로 만든 도장, 병장기 등의 물품을 노획하였다. 잔당인 파두반(破頭潘) 등 100,000여 명은 도주하여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가 버리니, 적들이 드디어 평정되었다.》
이때만 해도 「“나성(羅城)과 황성(皇城)” 모두 건재(健在)해 있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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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高麗史節要 卷27/恭愍王 十一年/1월 17일/갑자(甲子) : 《甲子. 安祐李芳實黃裳韓方信李餘慶金得培安遇慶李龜壽崔瑩等率兵二十萬,屯東郊天壽寺前.摠兵官鄭世雲督令進軍, 諸將進圍京城,世雲退屯兜率院. : 갑자. 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황상(黃裳)·한방신(韓方信)·이여경(李餘慶)·김득배(金得培)·안우경(安遇慶)·이구수(李龜壽)·최영(崔瑩) 등이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동교(東郊) 천수사(天壽寺) 앞에 주둔하였다.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이 감독하여 진군하게 하여 여러 장수들이 나아가 경성을 포위하게 하고, 정세운은 물러나서 도솔원(兜率院)에 주둔하였다. 時,方雨雪,賊弛備.餘慶當崇仁門,麾下護軍權僖詗知之曰,賊之精銳皆聚於此,若出其不意攻之,可克. : 이때 막 눈비가 내리니, 적의 방비가 해이하여졌다. 이여경이 숭인문(崇仁門)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휘하의 호군(護軍) 권희(權僖)가 이를 정탐하여 알고는 말하기를, “적의 정예병이 모두 여기에 모여 있으니, 만약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틈을 타서 공격한다면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乙丑.昧爽,僖率數十騎突入,鼓譟奮擊,賊衆驚駭.我太祖以麾下兵二千人,先登大破之. : 을축. 동이 틀 무렵, 권희가 수십 기병을 거느리고 돌입하여 시끄럽게 북을 치며 날쌔게 공격하니, 적의 무리가 깜짝 놀랐다. 우리 태조(太祖)가 휘하의 군사 2,000인으로 먼저 올라가서 그를 크게 격파하였다. 日晡時,斬賊魁沙劉關先生等,賊徒自相蹈藉,僵尸滿城, 斬首凡一十餘萬,獲元帝玉璽二顆金寶一顆金銀銅印兵仗等物. : 해질 무렵, 적(賊) 괴수 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 등의 목을 베니, 적의 무리가 자기들끼리 서로 밟고 쌓여서 쓰러진 시체가 성 안에 가득하였으며, 목을 벤 것이 무릇 10여 만이었고, 원(元) 황제의 옥새 2개, 금보(金寶) 1개, 금인(金印), 은인(銀印), 동인(銅印), 병장기 등의 물건을 획득하였다. 諸將曰,窮寇,不可盡.乃開崇仁炭峴二門,餘黨破頭潘等一十餘萬奔還,渡鴨綠江而走,賊遂平. : 여러 장수들이 말하기를, “궁지에 몰린 도적을 다 없앨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에 숭인문과 탄현문(炭峴門) 2개의 문을 열어두니, 남은 무리 파두반(破頭潘) 등 10여 만이 도망하여 돌아가서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서 도망가니, 적이 마침내 평정되었다. 攻城之日,賊雖窮蹙,築壘固守.會日暮,諸軍進圍逼之,太祖止路邊一家.夜半,賊闌圍而走,太祖馳至東門,賊及我軍爭門,雜沓不可出,有後至賊,以槍刺太祖右耳後,勢甚迫. : 성을 공격하던 날, 적이 비록 궁지에 몰렸으나, 성채를 쌓고 굳게 지키고 있었다. 마침 날이 저물자 여러 군대가 진군하여 그를 나아가 그를 포위하여 핍박하였는데, 태조는 길가의 한 집에서 머물고 있었다. 한밤중에 적이 포위를 뚫고 달아나니, 태조가 말을 달려 동문에 이르렀으나, 적과 우리 군사가 문을 다투면서 섞이어 나갈 수가 없었는데, 뒤에서 도착한 적이 창으로 태조의 오른쪽 귀 뒤편을 찌르니, 형세가 매우 급박하였다. 太祖遂拔劍,斮前七八人,躍馬踰城,馬不蹉跌,人皆神之. : 태조가 마침내 검을 빼어서 앞의 7~8명을 베고 말을 높이 뛰게 하여 성(城)을 뛰어넘었는데, 말이 넘어지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를 신기하게 여겼다.》
➤ 이때도 ‘나성(羅城)이나 황성(皇城)’등은, 그대로 존재(存在)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그 엄청난 규모(規模)를 자랑했던 나성(羅城)과 황성(皇城)은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이냐?〉하는 거다.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이다.
위의 역사서(歷史書) 원전(原典) 기록(記錄)에서 보다시피 조선사(朝鮮史)이야기만 나오면 ‘반도(半島) 땅에서 이해불가(理解不可)한 이야기들로 점철(點綴)되어 있다.’는 점이다.
고려사(高麗史) 또는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등의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의 역사해설(歷史解說)을 보자.
➊ 홍건적(紅巾賊) 20여만(餘萬)의 무리들이 무인지경(無人之境)으로, 산동(山東)∼하북(河北)∼요녕성(遼寧省)∼압록강(鴨綠江)을 건너, 파죽지세(破竹之勢)로 황도(皇都)로 진격(進擊) 함락(陷落)시켰다는 것도 이해불가(理解不可)한 것이고,
➋ 또 어디에서 어떻게 징발(徵發)했는지도 모르는 장수(將帥)와 병사(兵士)들 20여만(餘萬)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냥” 경성(京城)을 포위(包圍)했고, 성벽(城壁)을 타고 올라 홍건적(紅巾賊)과 치열(熾熱)한 전투(戰鬪) 끝에 10여만(餘萬)의 목을 베고… …목 베는 숫자가 엄청나, 숭인문(崇仁門)과 탄현문(炭峴門) 2개의 문을 열어 놓으니, 나머지 10여만(餘萬) 홍건적(紅巾賊)은,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도주(逃走)했다고 전(傳)한다.
➍ 이때 획득(獲得)한 것 중에서, “원(元) 황제(皇帝)의 옥새(玉璽) 2개, 금보(金寶) 1개, 금인(金印), 은인(銀印), 동인(銅印)”등도 있었고, 병장기(兵仗器)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고 하는데… …,
또 이들 홍건적(紅巾賊)들이 어떻게 “원(元) 황제(皇帝)의 옥새(玉璽) 2개, 금보(金寶) 1개, 금인(金印), 은인(銀印), 동인(銅印)”등을 가지고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옥새(玉璽)가 무슨 장난감도 아니고, 옥새(玉璽)를 2개씩이나 갖고 있었으며, 금보(金寶) 1개, 금인(金印), 은인(銀印), 동인(銅印)까지 가지고 있었는가? 반도(半島) 고려사(高麗史)는, 이해불가(理解不可)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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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성(羅城)이나 황성(皇城)에 대해, 대륙(大陸)사정(事情)은 어떤가?
(3) 대륙에서의 황성(皇城)이나 외성(外城), 기타 많은 성(城)들은, 전란(戰亂)이나 내란(內亂)등 하루 한 날 바람 잘 날이 없었다고 하며, 반도(半島)보다 휠 씬 많았었음에도, 옛 기록(記錄)과 함께 내성(內城)과 외성(外城)등등의 많은 성(城)들이 그대로 현존(現存)하고 있어, 당시(當時)의 내성(內城)과 외성(外城), 생활상(生活相)들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 송(宋) 개봉부(開封府) 성곽(城廓) 〈출처 : 다음(Daum) 이미지〉
➤ 남(南)쪽 해중(海中)에 있다는 〈탐라(耽羅)의 성(城)에도, 참호(塹壕 : 垓子)가 있고, 목우(木偶)도 있으며, 판교(板橋)도 설치(設置)되어 있다.〉고 하였는데,
어째서 삼천리(三千里) 본토(本土) 땅에는, 이런 성(城)다운 성(城)은, 단 한곳도 존재(存在)하지 않는 것일까?
《乃有千年古䧺州 : 이곳에 바로 천 년 된 웅장한 고을이 있다네 / 板橋駕塹通人馬 : 판교를 참호에 걸쳐서 인마가 다니게 하니 / 兩邊木偶鐵索鉤 : 양쪽의 나무인형에 쇠사슬 갈고리 감겨있네 / 登城引索橋拆開 : 성에 올라 쇠사슬 당기면 판교가 설치되니 / 蓋云緩急備外憂 : 급변이 있을 때에 외침을 막기 위함이라네. / 重門繚垣迷所向 : 겹겹 문과 에워싼 담장은 길을 헤매게 하고 / 南牆碧色是果園 : 남쪽 담장의 푸른색은 과수원의 빛이니 / 橘柚千樹相綢繆 : 천 그루 감귤나무 유자나무 뒤섞여있네 / 閭閻櫛比可千戶 : 여염집이 즐비하여 천 호는 될 만하고 / 人物頗與中土侔 : 인구는 자못 중토에 비길 만큼 많다네. / 夾道荒碑石兼銅 : 길 양쪽 비석은 돌과 구리로 만들었는데》하였다.
제주성(濟州城) : 판교(板橋)를 참호(塹壕)에 걸쳐 놓고, 양쪽의 목우(木偶)에 있는 쇠사슬을 내리고 올리면, 판교(板橋)가 올라가고 내려오니, 급변(急變)이 있을 때, 외침(外侵)을 막기 위해 설치(設置)해 놓았다고 전한다. 오늘날의 탐라(耽羅) 제주성(濟州城)에 이러한 유물유적(遺物遺蹟)들이 현존(現存) 또는 징후(徵候)는 있는 것일까?
급변(急變)시를 대비(對備)해 만들어 놓았다는 판교(板橋)와 참호(塹壕)의 효율성은, 여기서 설명(說明)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짐작(斟酌)가는 일이다. 오늘날 대한민국(大韓民國)의 각 곳에 있었다던 수많은 옛 성(城)중에서 이런 시설(施設)을 해 놓았다고 하는 곳이 어디에 있을까? 있었다고만 이야기할 뿐, 그 확실(確實)한 유적(遺蹟)이나 유물(遺物)등이 현존(現存)하고 있는 곳이 있을까?
삼국시대(三國時代), 동이(東夷)의 축성(築城)법은 인접(隣接)나라에서조차 감탄(感歎)했고, 점령(占領)하기 매우 어렵다고 했다. 반도(半島)땅엔, 성(城)다운 성(城)이 단 한군데도 없다. 웅장(雄壯)한 성(城)과 성문(城門)주위(周圍)의 판교(板橋)와 참호(塹壕)는, 축성(築城)의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한 요소(要所)다. 한반도(韓半島)에도 수많은 성(城) 유적지(遺蹟地)가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성(城)이면 다 성(城)일까? 반도(半島) 땅 어느 곳에 제대로 된 성(城)이 있느냐?
축성술(築城術)을 자랑한다는 동이(東夷)들의 한반도(韓半島) 땅엔 왜 이런 시설물(施設物)은, 단 한군데도 없을까?
(4) 高麗史56卷-志10-地理1 지리(地理) 서문(序文)의 첫머리에서 말하기를 : 〈惟我海東三面阻海一隅連陸輻員之廣幾於萬里.〉라는 구절이 있다.
역사통설(歷史通說)에서는, 번역하기를 : 〈우리 해동(海東)은 삼면이 바다에 막혀 있고, 한 모퉁이가 육지에 이어져 있는데, 그 폭과 둘레는 거의 10,000 리(里)나 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 번역(飜譯)이 올바른 것일까?
그동안 많은 이들이 위 구절(句節)의 “幾” 자(字)를 어떻게 번역(飜譯)하느냐에 대한 말들이 무수히 많았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 「幾」
➊ 10 이하(以下)의 확실하지 않은 수를 물을 때 쓰인다. 대개 10 이하(以下)의 적은 수효를 막연하게 이를 때 쓴다.
➋ 국어사전 : 십, 백, 천, 만 따위 수(數)의 단위를 나타내는 일부 명사나 수효를 나타내는 일부 의존 명사 앞에 붙어, ‘여럿’ 또는 ‘몇’의 뜻을 더하는 말.
위의 ‘➊+➋’의 용도(用途)설명(說明)으로 보면 : 몇 만리(萬里) 또는 수만리(數萬里)로 표현(表現)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즉(卽) 〈1. 2보다는 많고, 10보다는 작은 숫자를 가리킬 때 쓰는 글자다.〉 이게 맞는 말이다.
➌ 역사통설(歷史通說)에서 “거의 일만(一萬)리”라고 하였는데, 이는 뜻풀이한 것에 불과하다. 「반도(半島) 땅을 보면, 동서남북(東西南北) 각 면(面)의 길이를 합(合)하면 1만 리(萬里)가 되기 때문에, “거의”로 번역(飜譯)하고 해설(解說)하고 있는 것이다.」
위의 ‘➊+➋’ 설명(說明)에서 보면, 수효를 나타내는 일부 의존 명사 앞에 붙어, ‘여럿’ 또는 ‘몇’의 뜻을 더하는 말이 올바른 것이라고 본다.
“일만(一萬)리”와 “수만리(數萬里)” 또는 “몇 만리(萬里)”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다. ‘1만(萬)’의 ‘몇 배(倍)’이기 때문이다.
➤ 따라서 당시(當時)의 고려왕조(高麗王朝)는, 왕건(王建)에 의해 ‘삼한통일(三韓統一)=통일환영(統一環瀛)’을 이룬 뒤의 영토(領土)는 “수만리(數萬里)에 달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명일통지(明一統志)나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東西二千里南北四千里】에 비교(比較)해본다면 : 〈동서(東西) 2천리의 3배는 6천리다. 남북(南北) 4천리의 3배는 12,000리다.〉 그래야 고려사(高麗史) 지리지(地理志) 서문(序文)에서 말하는, “폭원지광기어만리(輻員之廣幾於萬里)”를 이해(理解)할 수 있게 된다.
➤ 6천리+6천리+1만2천리+1만2천리= “3만6천리는 즉(卽) 수만리(數萬里)” 예(例)를 들어본 것이다.
곧 ‘수만리(數萬里)’란 말은, 〈1, 2를 제외한 3에서 7까지의 중간(中間)정도를 나타낸다고 보더라도 “3배에서 7배”의 표현(表現)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韓半島) 땅의 몇 배(倍)나 되는 땅에, 고려(高麗)가 개국(開國)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高麗)는, 대륙(大陸) 땅에 존재(存在)하지 않고는, 이런 영토(領土)를 가질 수 없는 것이다.
王 京, 開 城 府
(5) 高麗史 地理志 /《王京,開城府,本高勾麗扶蘇岬新羅改松嶽郡太祖二年定都于松嶽之陽爲開州創宮闕. : 왕경(王京) 개성부(開城府)는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부소갑(扶蘇岬)이다. 신라(新羅)에서 송악군(松嶽郡)으로 고쳤다. 태조(太祖) 2년(919)에 송악(松嶽)의 남쪽에 도읍을 정하여 개주(開州)라 하고 궁궐을 창건하였다. 會慶殿後改承慶; 膺乾殿改奉元; 長齡殿改千齡; 含慶殿改向福; 乾明殿改儲祥; 明慶殿改金明; 乾德殿改大觀; 文德殿改修文; 延英殿改集賢; 宣政殿改廣仁; 宣明殿改穆淸; 舍元殿改靜德; 萬壽殿改永壽; 重光殿改康安; 宴親殿改睦親; 五星殿改靈憲; 慈和殿改集禧; 正陽宮改書和; 壽春宮改麗正; 雲樓改觀祥; 宜春樓改韶暉; 神鳳門改儀鳳; 春德門改 通; 大初門改泰定; 闔門改雲龍; 會日門改利賓; 昌德門改興禮; 開慶門改皇極; 金馬門改延水; 天福門改紫宸; 通天門改永通; 景陽門改陽和; 安祐門改純祐; 左右承天門改通嘉; 左右宣慶門改敷祐; 左右延祐門改奉明; 延守門改敎化; 長寧門改朝仁; 宣化門改通仁; 興泰門改芬芳; 陽春門改廣陽; 大平門改重化; 百福門改保化; 通慶門改成德; 東化門改慶度; 西化門改向成; 大淸門改淸泰; 永安門改興安. : 회경전(會慶殿)은 뒤에 승경전(承慶殿)으로 고쳤다. 응건전(膺乾殿)은 봉원전(奉元殿)으로 고쳤다. 장령전(長齡殿)은 천령전(千齡殿)으로, 함경전(含慶殿)은 향복전(向福殿)으로, 건명전(乾明殿)은 저상전(儲祥殿)으로, 명경전(明慶殿)은 금명전(金明殿)으로, 건덕전(乾德殿)은 대관전(大觀殿)으로, 문덕전(文德殿)은 수문전(修文殿)으로, 연영전(延英殿)은 집현전(集賢殿)으로, 선정전(宣政殿)은 광인전(廣仁殿)으로, 선명전(宣明殿)은 목청전(穆淸殿)으로, 함원전(含元殿)은 정덕전(靜德殿)으로, 만수전(萬壽殿)은 영수전(永壽殿)으로, 중광전(重光殿)은 강안전(康安殿)으로, 연친전(宴親殿)은 목친전(睦親殿)으로, 오성전(五星殿)은 영헌전(靈憲殿)으로, 자화전(慈和殿)은 집희전(集禧殿)으로 고쳤다. 정양궁(正陽宮)은 서화전(書和殿)으로, 수춘궁(壽春宮)은 여정전(麗正殿)으로, 망운루(朢雲樓)는 관상루(觀祥樓)로, 의춘루(宜春樓)는 소휘루(韶暉樓)로 각각 고쳤다. 신봉문(神鳳門)은 의봉문(儀鳳門)으로, 춘덕문(春德門)은 체통문(棣通門)으로, 대초문(大初門)은 태정문(泰定門)으로, 창합문(閶闔門)은 운룡문(雲龍門)으로, 회일문(會日門)은 이빈문(利賓門)으로, 창덕문(昌德門)은 흥례문(興禮門)으로, 개경문(開慶門)은 황극문(皇極門)으로, 금마문(金馬門)은 연수문(延水門)으로, 천복문(天福門)은 자신문(紫宸門)으로, 통천문(通天門)은 영통문(永通門)으로, 경양문(景陽門)은 양화문(陽和門)으로, 안우문(安祐門)은 순우문(純祐門)으로, 좌우승천문(左右承天門)은 통가문(通嘉門)으로, 좌우선경문(左右宣慶門)은 부우문(敷祐門)으로, 좌우연우문(左右延祐門)은 봉명문(奉明門)으로, 연수문(延守門)은 교화문(敎化門)으로, 장녕문(長寧門)은 조인문(朝仁門)으로, 선화문(宣化門)은 통인문(通仁門)으로, 흥태문(興泰門)은 분방문(芬芳門)으로, 양춘문(陽春門)은 광양문(廣陽門)으로, 대평문(大平門)은 중화문(重化門)으로, 백복문(百福門)은 보화문(保化門)으로, 통경문(通慶門)은 성덕문(成德門)으로, 동화문(東化門)은 경도문(慶度門)으로, 서화문(西化門)은 향성문(向成門)으로, 대청문(大淸門)은 청태문(淸泰門)으로, 영안문(永安門)은 흥안문(興安門)으로 각각 고쳤다.중략(中略). 二十年,京都羅城成. : 현종 20년(1029)에 경도(京都)의 나성(羅城)이 완성되었다. 王初卽位徵丁夫三十萬四千四百人築之至是功畢.城周二萬九千七百步羅閣一萬三千*閒大門四中門八小門十三曰紫安曰安和曰成道曰靈昌曰安定曰崇仁曰弘仁曰宣旗曰德山曰長覇曰德 曰永同曰會賓曰仙溪曰泰安曰 溪曰仙嚴曰光德曰乾福曰昌信曰保泰曰宣義曰 猊曰永平曰通德. : 왕이 처음 즉위했을 때, 정부(丁夫) 304,400명을 징발해 쌓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공사를 마쳤다. 성의 둘레가 29,700보(步)이고, 나각(羅閣)이 13,000칸이며, 대문(大門)이 4개, 중문(中門)이 8개, 소문(小門)이 13개로, 자안문(紫安門)·안화문(安和門)·성도문(成道門)·영창문(靈昌門)·안정문(安定門)·숭인문(崇仁門)·홍인문(弘仁門)·선기문(宣旗門)·덕산문(德山門)·장패문(長覇門)·덕풍문(德豐門)·영동문(永同門)·회빈문(會賓門)·선계문(仙溪門)·태안문(泰安門)·앵계문(鸎溪門)·선엄문(仙嚴門)·광덕문(光德門)·건복문(乾福門)·창신문(昌信門)·보태문(保泰門)·선의문(宣義門)·산예문(狻猊門)·영평문(永平門)·통덕문(通德門)이 그것이다. 又皇城二千六百*閒門二十曰廣化曰通陽曰朱雀曰南薰曰安祥曰歸仁曰迎秋曰宣義曰長平曰通德曰乾化曰金耀曰泰和曰上東曰和平曰朝宗曰宣仁曰靑陽曰玄武曰北小門. : 또한 황성(皇城)은 2,600칸이고, 문이 20개인데, 광화문(廣化門)·통양문(通陽門)·주작문(朱雀門)·남훈문(南薰門)·안상문(安祥門)·귀인문(歸仁門)·영추문(迎秋門)·선의문(宣義門)·장평문(長平門)·통덕문(通德門)·건화문(乾化門)·금요문(金耀門)·태화문(泰和門)·상동문(上東門)·화평문(和平門)·조종문(朝宗門)·선인문(宣仁門)·청양문(靑陽門)·현무문(玄武門)·북소문(北小門)이 그것이다. 一云丁夫二十三萬八千九百三十八人工匠八千四百五十人城周一萬六百六十步高二十七尺厚十二尺廊屋四千九百一十*閒 : 다른 기록[一云]에는, 정부(丁夫) 238,938명과 공장(工匠) 8,450명이 동원되었으며, 성의 둘레는 10,660보, 높이 27척(尺), 두께 12척, 행랑 건물[廊屋]이 4,910칸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 참고(參考) : 척(尺) : 발의 길이 만큼인 23~30cm를 뜻한다. 조선(朝鮮) 초까지 “1척은 32.3cm”, 세종 이후 31.2cm, 구한말 이후에 30cm로 바뀌었다.
➊ 나성(羅城)=외곽성(外廓城) : 정부(丁夫) 304,400명을 징발(徵發), 성의 둘레가 29,700보(步)이고, 나각(羅閣)이 13,000칸, 대문(大門)이 4개, 중문(中門)이 8개, 소문(小門)이 13개, 높이 27척(尺), 두께 12척(尺)이다. 나성(羅城)은 황성(皇城)의 외곽성(外廓城)인데, 21년 만에 완성(完成)되었다고 한다.
㊀ 둘레(周) : 29,700 보 * 1.0 m = 29.70km 【한 변의 길이 : 7.425km】한 면(面)의 길이가 ‘7.4km’라면 ‘20 리’에 해당하는데, 4면은 ‘80 리’라는 이야기다. 어마어마한 크기다.【한양(漢陽) 도성(都城)은, 총 18.9Km라고 하는데, 고려(高麗)의 도성(都城)은 29.7km라고 한다.】 고려(高麗)의 도성(都城)은 한양도성(漢陽都城)보다 휠 씬 더 크고, 웅장(雄壯)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㊁ 높이(高) : 27척 * 0.323m = 8.27m : 이 정도(程度)라면 우리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Apt) 3층 높이에 해당된다고 보아지는데, 침입(侵入)하는 적병(敵兵)을 방어(防禦)하는 데에 충분(充分)하다고 본다.
㊂ 두께(厚)는 12척 * 0.323m = 3.87m : 이 정도(程度)의 두께(厚)라면 성벽(城壁) 위에서는, 기마(騎馬)가 순찰(巡察), 교대(交代)하는데 전혀 거리 킬 것이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모습이 역사서(歷史書)에서 말하는 성(城)이다. 돌무더기를 쌓아 놓고 성(城)자를 쓰는 것은, 대한민국(大韓民國)이 유일(唯一)하다고 본다.
➋ 황성(皇城)은 2,600칸이고, 문이 20개다. 【외성(外城)이 곧 나성(羅城)이고, 내성(內城)은 황성(皇城)을 말한다.】
➌ 위에서 말하는 고려(高麗)의 도성(都城)이야말로 성곽(城廓)다운 성곽(城廓)이랄 수 있을 것이다.
고려(高麗) 도성(都城)은 75 리다.
장안(長安) 도성(都城)은 65 리다.
낙양(洛陽) 도성(都城)은 55 리다.
신라(新羅) 도성(都城)은 55 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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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高麗史節要 / 현종, 기사 20년(1029), 송 천성 7년ㆍ거란 태평 9년 : 【命參知政事李可道,左僕射異膺甫,御史大夫皇甫兪義,尙書左丞黃周亮,徵丁夫二十三萬八千九百三十八人,工匠八千四百五十人,築開京羅城. : 참지정사 이가도(李可道)ㆍ좌복야 이응보(異膺甫)ㆍ어사대부 황보유의(皇甫兪 義)ㆍ상서좌승(尙書左丞) 황주량(黃周亮)에게 명하여 정부(丁夫) 23만 8천 9백 38명과 공장(工匠) 8천 4백 50명을 징발하여 개경(開京)의 나성(羅城)【성(城)의 외곽 또는 외성(外城)】을 쌓게 하였다. 先是,平章事姜邯贊,以京都無城郭,請築之.中略.周一萬六百六十步,高二十七尺,廊屋四千九百一十間. : 이보다 먼저 평장사 강감찬이, 서울에 성곽이 없기 때문에 성곽을 쌓도록 청하였다. 중략(中略). 주(周)가 10,620보, 고(高)가 27척(尺), 낭옥(廊屋)이 4,910칸이었다.】고 하였다.
「정부(丁夫) 238,938 + 공장(工匠) 8,450 = 247,388」 명이 동원되어 황도(皇都)의 나성(羅城)【황성을 둘러싸고 있는 외성을 말함】을 축조했으며, 둘레가 10,660보(步)요, 높이가 27척이요, 낭옥(廊屋)【넒은 복도 또는 행랑채】이 4,910 칸이었다.
21년 만에 완성(完成)되었다고 전해진다.
성(城)의 규모를 현대의 수치로 계산해보면
둘레가 10,660 보 * 1.0m = 10.660 Km 이니, 둘레를 사면(四面)으로 보면 한 면(面)의 길이가 2.665km나 되는 엄청난 규모(規模)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높이는 27 척 * 0.323m = 8.721 m라고 하니, 높이가 8 m 정도면 3층 건물 높이에 해당되는 것으로 황성(皇城)과 외성(外 城)을 생각하면 웅장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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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東史綱目 / 기사년 현종 20년【宋 인종 천성 7, 契丹 성종 태평 9, 1029】 : 8월 초하루(정해)에 일식이 있었다. 경도(京都)의 나성(羅城 큰 성(城)의 외곽(外廓))이 이루어졌다. 중략(中略). 무릇 21년 만에 필역(畢役)한 것이다. 성의 주위(둘레)가 29,700 보, 높이가 27척, 두께가 12척, 낭옥(廊屋)이 4,910간 이었다.
나성(羅城)은 황성(皇城)의 외곽성이다. 21년 만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둘레(周)가 29,700 보 * 1.0 m = 29.70km이며, (한 변의 길이 : 7.425km)
높이(高)는 27척 * 0.323m = 8.27m,
두께(厚)는 12척 * 0.323m = 3.87m
낭옥(행랑채 또는 복도)이 4,910 칸이나 되었다.
● 高麗史節要 : 周 10,620 보, 高 27 尺, 廊屋 4,910칸
● ‘東史綱目=高麗史 地理志’ : 周 29,700 보, 高 27 척, 厚 12 척, 廊屋 4,910칸
두 기록(記錄)을 놓고 보면 : 외성(外城)의 길이가 큰 차이(差異)를 보이는데, “동사강목(東史綱目)과 고려사(高麗史)” 기록(記錄)은 「29,700 보(步)」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10,620보(步)】보다 배(倍)이상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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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京 開城府의 舊城 修築
(8) 朝鮮王朝實錄 / 成宗 282卷, 24年(1493 癸丑)【明 弘治) 6年】9月 30日(辛酉) :【是月改築開城府舊城,高二十四尺,周一萬五千八百二十七尺. : 이달에 개성부(開城府)의 옛 성을 개축(改築)하였다. 높이가 24척(尺), 둘레가 1만 5천 8백 27척이었다.】
척(尺)을 30.3 cm로 계산(計算)해보면
높이(高)는 24척 * 0.323=7.752m【7.75m】
둘레(周) 15,827척 * 0.303=5,112m【5.11km】
고려왕조【高麗王朝 : A. D 1392년 亡】가 망(亡)하고 난 뒤 꼭 『일백(一百) 년 만의 일이다.』 개성(開城)에 있었던 전 왕조(王朝) 고려(高麗)의 도성(都城)을 대대적(大大的)으로 보수(補修)했다는 설명(說明)이다.
➊ 위에서 몇 기록(記錄)을 예(例)로 본 것이다. 고려(高麗)의 경성(京城)이었던 개성(開城)에는, 당시(當時)로써는 최고(最古), 최대(最大)의 ‘황성(皇城)과 나성(羅城)’이 축조(築造)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황성(皇城) 밖으로 나상(羅裳)이 개성(開城)내에, 「“75리의 성곽(城廓)이 있었다.”는 것이고, 그 “높이(高)는 8m요, 두께(厚)는 4m에 달하는 웅장(雄壯)한 성곽(城廓)인 나성(羅城)이 있어 황성(皇城)을 보호(保護)하고 있었다.」 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그 흔적(痕迹)은?
➋ 개경(開京) 즉(卽) 개성(開城)은, 고려(高麗)의 망후(亡後)에도 사용(使用)되었고, 서력(西曆) 1,493년(年)에도 수축(修築)되었다고 역사서(歷史書)는 전하고 있다면, 4-500년 전만하더라도, 내성(內城:皇城) 및 외성(外城)이 위용(威容)을 뽐내고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➌ 서력(西曆) 1,493년 후(後)의 조선왕조(朝鮮王朝)시대의 큰 외침(外侵)은, 호란(胡亂)과 임란(壬亂)이 있었다.
후금(後金)이 일사천리(一瀉千里)로 진군을 했다고 하니, 기록(記錄)을 보면, 성곽(城廓)을 파괴(破壞)할 수 있는 시간적(時間的) 여유(餘裕)가 없었다.
또 왜(倭)는 이러한 천연(天然)의 요새(要塞)를 파괴(破壞)할 이유가 없는데, 그것은 방어(防禦)와 수비(守備)가 효율적(效率的)인 성(城)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그것을 이용(利用)하면 했지, 파괴(破壞)할 이유(理由)가 없었다는 점이다.
또 ‘호(胡)나 만이(蠻夷)’의 목적(目的)이 조선(朝鮮)의 항복(降伏)을 원했던 것이지, 성(城)을 파괴(破壞)하려는 목적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호(胡)나 만이(蠻夷)’는 성(城)을 파괴(破壞)하는 것에 조금의 이익(利益)도 취(取)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성(城)은, 조선군(朝鮮軍)의 반격(反擊)을 격퇴(擊退)시키거나 지연(遲延)시킬 수 있는 절호(絶好)의 방호물(防護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➍ 전쟁(戰爭) 와중에 방화(放火), 약탈(掠奪), 살인(殺人)등은 침략행위(侵略行爲)속에 수반되는 피해(被害)이지만 성곽(城郭)을 파괴(破壞)하고 그 주춧돌을 본국(本國)으로 가져갔을 리는 만무한 것이다. 설사 황궁(皇宮)은 화재(放火)로 소실(燒失)되었다고 치자. 그러나 그 엄청난 규모의 성곽(城郭) 및 유적(遺跡)은 계획적(計劃的)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동원(動員)하여 파괴(破壞)하지 않는 한 상존(尙存)해야 정상적(正常的)인 것이다.
대륙(大陸)의 옛 왕조(王朝)의 건축물(建築物) 등은 지금도 시대에 따른 그 위용(威容)을 찬란(燦爛)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데, 반도(半島)내 왕조(王朝)들의 건축물(建築物)과 성곽(城廓)만이 병란(兵亂)으로, 화재(火災)로 소실(消失)되었다고 하면서 기록(記錄)만이 존재(存在)한다는 것은 이해(理解)할 수 없다.
➎ 병란(兵亂)으로 치면 대륙(大陸)엔 단 며칠도 조용한 날이 없을 정도로 외적(外賊)과 내부(內部)의 내란(內亂), 반란(叛亂)등이 있었다. “자고나면 새로운 왕조(王朝)가 생겨났다고 했을까. 오죽하면… …” 이런 형편(形便)임에도 대륙(大陸)의 그 넓은 땅에는 옛 유적(遺跡) 때문에 몸서리를 치고 있다고 한다. 반도(半島)내의 유물(遺物), 유적(遺跡)은 어떤 이유(理由)와 명분(名分)을 내세운다 해도 이해(理解)할 수 없는 불가사의(不可思議) 한 것 들 뿐이다.
이러함에도 반도(半島) 내에서 수천(數千) 년 찬란(燦爛)한 조선(朝鮮)의 왕조(王朝)가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거듭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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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북원(北元)과 연(連)하고, 서(西)쪽은 대명(大明)과 접(接)했다.」
또 하나 중요(重要)한 코멘트를 한 사람은, “전(前) 대사성(大司成) “정몽주(鄭夢周)”다. ‘高麗史133卷-列傳46-辛禑1’편을 보면 :《本國北連大元,西接大明常鍊軍官以充守禦. : 본국(本國)【고려(高麗)】은, 북(北)으로 대원(大元)과 잇닿아 있고(連), 서(西)쪽으로는 대명(大明)과 접(接)하고 있어 항상 군관(軍官)들을 훈련시켜 수비하고 방어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고려사(高麗史) 기록(記錄)에 따르면 : 당시(當時)의 고려(高麗) 땅은 오늘날의 “반도(半島)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북원(北元)〉이란 「‘원(元)의 마지막 왕(王)이었던 순제(順帝)’가 막북(漠北)으로 도주(逃走)한 이후(後)의 원(元) 잔존(殘存)세력(勢力)」을 말하는 것이다.
지형지세(地形地勢)를 살펴보면 : 반도(半島) 땅과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서북방(西北方)에 있었던 원(元)의 잔존세력(殘存勢力)들이었다.
➤ 이런 것들을 보고, 해설하고, 번역(飜譯)을 하면서, “고려(高麗)가 반도(半島)에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필자(筆者)는 경의(敬意)를 표한다!!!!!!!!!! 그 뱃장에 대해서 말이다.」 뻔뻔한 것도 정도(程度)가 있는 법이거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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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동(東)쪽은 정벌(征伐)하고, 서(西)쪽은 토벌(討伐)하였다.」
고려(高麗) 말(末) 대신(大臣) 이제현(李齊賢)【1287년(고려 충렬왕 13) - 1367년(공민왕 16)】의 ‘益齋亂稿 拾遺(익재난고 습유)’【見東國通鑑】 :
修築京城.訪大臣時上書:경성(京城)을 수축(修築)하려 대신(大臣)들을 찾아 물으니 글을 올려 말하기를 :
《我太祖東征西討.統三爲一之後.七年而薨 : 우리나라의 태조(太祖)가 동(東)쪽은 정벌(征伐)하고, 서(西)쪽은 토벌(討伐)하여 삼한(三韓)을 통일(統一)하였는데, 7년 후에 죽었다.》고 하였다.
➤ ‘반도(半島) 고려(高麗)’란 말은, 즉(卽) “허구(虛構)다”라는 것을, 증거(證據). 고증(考證)해 주는 자료(資料)다. 사실(事實) 이런 내용(內容)을 보면서, 이런 것들을 보고, 해설(解說)하고, 번역(飜譯)을 하면서, “고려(高麗)가 반도(半島)에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필자(筆者)는 경의(敬意)를 표한다!!!!!!!!!! 그 뱃장에 대해서 말이다.」
뻔뻔한 것도 정도(程度)가 있는 법이거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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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高麗)의 인구(人口)는 얼마나 되었을까?
(10) 당시(當時)의 주군현(州郡縣)등으로 살펴보는 고려(高麗)의 인구(人口)는, 어느 정도(程度)였을까?
당시(當時)의 당(唐)나라를 예(例)로 들어보자. 구당서(舊唐書)지리지(地理志)에, 〈開元28年. 郡府328,縣1573. 戶 8,412,871,口48,143,609〉이라고 하였다.
〈고려사(高麗史)에서는, 3경(京)ㆍ4부(府)ㆍ8목(牧)ㆍ118군(郡)ㆍ390현(縣)ㆍ3700도(島)였다.〉고 하였으니 : 구당서(舊唐書)를 기준(基準)해 보면,【여기서 섬(島)이 3,700개라고 했는데, 이건 유인도(有人島)를 말하는 것이다. 반도(半島) 땅이 될 수 없다. 또 노예(奴隷). 천인(賤人). 화척(禾尺)등은 포함(包含)되지 않았다.】
1 현(縣) / 평균(平均) 5,348戶 / 호당(戶當) 5.7 人
390 현(縣) × 5,348 호 =2,085,720 戶 × 5.7인 = 11,888,604 인
3,700 도(島) × 평균 50호 × 5.7 인 = 1,054,500 인
【고려(高麗)의 경성(京城 : 開城)엔 15만가(萬家)가 있었다고 하였으니, 8십만(十萬)이 살고 있는 대도회(大都會)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2백만(百萬)이 넘는 호수(戶數)이므로, 1백만(百萬) 대군(大軍)을 거느릴 수 있었던 것이다.】
➤ 총(總) 인구(人口) : 「12,000,000 인(人)」 정도(程度)로 추산(推算)해 볼 수 있다. 고려(高麗)때이므로, 지금(只今)으로부터 7-800년 전(前)의 반도(半島) 땅 인구수(人口數)다. 그렇다면 7-800년 뒤, 오늘날의 반도(半島) 인구(人口)는 얼마 정도(程度)가 되어야 정상적(正常的)일까? 「수억(數億)명 이상(以上)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2020년 04월 08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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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高麗말에 실존했던 홍건적 사유,관선생등은 오늘날 중꽁드라마 명,청교체기를 다루는 시대극에 나옵니다. 참으로 웃기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들 스스로가 명나라니,청나라니가 허구임을 증명해내고 있다니 놀라지 않을 수밖에요. 수백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시대극에 끌어다 쓸정도로 역사조작을 하니 참으로 개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홍건적!!! 이 오늘날 코로나바이러스와 같아보이는군요. 글 잘읽었습니다.
안녕하세요. <대부여>님!
그렇습니다. 오늘날의 중국 아이들은, 사극을 장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그 사극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으려하지만, 왜곡하면 왜곡할 수록, :허망하고, 허무해진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들이 자신들이 생각하고 있던 것들과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장안(서안)부근의 수많은 피라미드군과 려산의 시황제 유물유적(그들 표현대로)의 그것은 모두가 조선(朝鮮)의 풍(風)을 가지고 있죠. 또 다른 유물유적들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중국아이들은 조그만 왕국(제후)을 과대포장해 무슨 무슨 황제(皇帝)라고 말하지만, 무슨 어린아이들 놀이가 아니거든요. 지들도 웃고 있을 겝니다.
게재 글이 간혹 중복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옛 조선왕조의 터전은 반도(半島) 땅일 수 없다는 것에 중점을 두다보니, 하나 하나의 지명보다는 전체적인 구도를 그려 놓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자연환경적 요소, 특히 지형지세와 토산물, 기후, 특이지형등은 수백 또는 수천년 이전이나 크게 변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중점으로 근거 또는 증거를 찾고 있습니다. 논리엔 논거가 필수이니 말입니다. 관심과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세요.
고려의 성곽은 수만리대국의 수도에 있었으며 지상 최대였을 것입니다
안녕하세요. <러브 선>님!
당연한 말씀이라고 봅니다.
성 둘레가 5십리, 6십리, 7십리하는 것 자체가 대단한 예술품이라고 보아집니다.
수십만 장정들이 동원되어 십여년, 이십여년 동안 만들었다고 생각해 볼 때, 상상하기가 어려울 정도겠죠. 특히 동방세계에서 살던 우리 선조들의 축성술은 최고였다고 서술되어 있습니다.
반도 땅안의 성(城)은, 조그만한 돌무더기뿐이고, 한성부내의 성 역시 예상외로 볼 것이 없습니다.
나라의 영토가 수만리란 말은 가로세로 만리씩이면 4만리가 됩니다. 바로 수만리가 되는 것이죠. 이런 땅을 통치했던 고려의 성곽은 상상을 초월했다고 봅니다. 그 규모면에서 말입니다.
감사드리며, 건강하세요.
@문 무 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