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정부 '비전 2030 인적자원 활용 전략' 발표 현군복무자 최대20일 단축 공익근무·전경·의경 폐지 6-3-3-4 학제 개편키로
정부는 5일 오는 2014년(입대일기준)까지 현역병의 복무 기간을 단 계적으로 6개월 단축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최종적으로 육군·해병대는 18개월, 해군은 20개월, 공군은 21개월로 복무 기간이 짧아진다. 올해부터 2,3주일 단위로 하루씩 단계적으로 줄어들기 때문에 현재 군복무 중인 병사도 최대 20일까지 단축 혜택을 볼 수 있다. 한명숙(韓明淑) 총리는 이날 정부중앙청사에서 권오규 경제·김신일 교육 부총리와 관계부처 장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 내용을 담은 ‘비전 2030 인적자원 활용 전략’을 발표했다. 한 총리는 “취업 시기는 2년 일찍 당기고 일하는 기간은 5년을 늘리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정부는 이를 위해 현행 ‘6-3-3-4’인 초중고대학교 학제를 개편하고 2008년까지 실업계고교 학생의 장학금 수혜율을 80%까지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키로 했다. 또 정년을 보장하는 대신 임금을 줄이는 임금피크제를 시행하는 기업체에 대해서는 보전수당을 늘리고, 정년을 연장하는 사업주가 부담하는 임금 일부를 지원하는 정년연장장려금 신설을 검토할 것이라고 했다. 정부는 공익근무요원, 전·의경, 경비교도(교도소 근무인력), 산업기능요원 제도는 2011~2012년 사이에 없애기로 했다.
[2003년] 금강산 육로관광 50년 만에 재개
← 해금강
2003년 2월 5일, 휴전 50년 만에 처음으로 남북을 오가는 관광도로가 뚫렸다.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 등 금강산 육로관광을 위한 사전답사단 87명은 이날 오후 2시30분 강원도 고성군 통일전망대에서 버스 10대에 나눠타고 휴전선을 넘어 동해선 임시도로를 따라 북한으로 향했다. 민간인들이 판문점을 거치지 않고 다른 지역의 도로를 통해 남북을 왕래하는 것은 지난 1953년 휴전협정 체결 이후 처음이다.
사전답사단은 정 회장을 비롯한 현대아산 임직원과 통일부 및 관광업계 관계자로 구성됐다. 답사단은 이날 통일전망대에 마련된 임시 출입국관리시설(CIQ)을 통과해 남방한계선~군사분계선~북방한계선~삼일포주차장~온정리 태창샘물공장 부지를 거쳐 출발 40분 만인 오후 3시10분쯤 북측 CIQ에 도착했다. 답사단은 금강산에서 하룻밤을 자고 6일 같은 코스를 거쳐 오후 4시30분쯤 통일전망대에 도착했다.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은 북한과 30년간 독점하기로 합의한 대북사업은 금강산 관광을 비롯해 개성· 통천 지역 공단 건설과 운영, 경의선· 경원선 등 남북 철도 연결 및 운영, 북한의 유무선 통신사업, 발전시설 건설 등이라고 밝혔다. /조선
[1998년] 최고의 스타일리스트 김기영 영화감독 별세
← 영화감독 김기영씨
영화감독 김기영(79)씨와 부인 김유봉(69)씨가 1998년 2월 5일 오전 3시쯤 서울 종로구 명륜동 자택에서 발생한 불로 숨졌다. 김기영 감독은 ‘최고의 스타일리스트’로 평가받은 한국영화계 원로였다.
그는 ‘화녀’를 비롯한 작품에서, 인간 내면에 가라앉은 악마적 본성이나 성욕을 상징과 환상을 섞어 표현하는 독창적 영화세계를 쌓았다. 한국 영화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게 그로테스크한 영화를 만든 탓에 현역 시절엔 ‘괴짜’ 취급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1997년을 전후해 국내외에서 ‘한국의 대표적 영화작가’로 재조명 받으면서 생애 가장 화려한 마지막 순간들을 보냈다.
김 감독은 평양에서 태어나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의사 출신이다. 부산 피난시절 병원 레지던트로 일할 때 극작가 오영진의 소개로 미국공보원(USIS) 문화영화 제작에 참여한 게 계기가 돼 영화에 입문했다. 1955년 반공영화 ‘주검의 상자’로 감독 데뷔, `현해탄은 알고 있다`(1961년) ‘고려장’(1963년) 등 30여 편을 연출했다.
초기엔 사회상을 드러낸 영화나 멜로드라마를 만들었지만, 대표작 ‘하녀’(1960년)를 시작으로 ‘화녀’(1970년) ‘충녀’(1971년)등 이른바 ‘여(女)시리즈’로 관객을 전율시키면서 주목받았다. 김 감독은 수많은 스타도 발굴했다. 1958년 ‘황혼열차’엔 김지미와 어린 안성기를 함께 데뷔시켰다. 최무룡 문희 박암 강효실 윤여정 임예진 등이 그의 손을 거쳐 데뷔했다./조선
[1979년] 이란의 호메이니, 새 총리를 지명하고 이란혁명을 시작
← Young Mehdi Bazargan
오랜 망명 끝에 2월 1일 귀국한 회교지도자 호메이니(Khomeini, Ayatollah, 1900~1989)는 2월 5일 바자르간(Bazargan, Mehdi, (مهدی بازرگان In Persian) 1907. 9 ~ 1995. 1.20)을 총리로 지명하여 팔레비 국왕이 임명한 바흐티야르(Bahtiyar) 정권과 2중정권 상태가 되었다. 이어서 2월 11일 반팔레비 세력이 니야바란 궁전을 공격하여 바흐티야르 내각이 소멸하고 왕제가 붕괴되었다. 3월 30일 국민투표가 실시되고, 4월 1일 호메이니에 의해 이란이슬람공화국의 성립이 선언되었다. 12월 2일 국민투표로 새헌법이 채택되어 이란혁명이 완성되었다. /Google
[1977년] 중국 정부, 덩샤오핑[鄧小平] 복권 결정
← 덩샤오핑
류사오치[劉少奇] 등과 함께 경제발전을 위하여 물질적 보상제도를 채택하고, 엘리트를 양성하자는 실용주의노선을 주장하였다. 그 결과 마오쩌둥과 노선갈등을 빚어 1966년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紅衛兵)으로부터 반모주자파(反毛走資派)의 수괴라는 비판을 받고 실각하였다.
1973년 3월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추천으로 복권되어 국무원 부총리가 되었으나, 1976년 1월 저우언라이가 죽자 마오쩌둥의 추종자인 4인방(四人幇)에 의하여 다시 권좌에서 밀려났다. 그해 9월 마오쩌둥이 죽고 화궈펑[華國鋒]이 저우언라이 계열의 노간부인 예젠잉[葉劍英], 특무부대장인 왕둥싱[汪東興]과 결탁하여 4인방을 숙청하였으나 화궈펑의 힘만으로는 정국수습이 어려웠으므로 예젠잉의 종용으로 1977년 7월 덩샤오핑은 복직되었다.
그후 화궈펑과 5년간의 권력투쟁 끝에 1981년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때부터 실용주의노선에 입각하여 과감한 개혁조치들을 단행하였다. /naver
[1969년] 서울시내 중학무시험 실시
← 중학교 무시험 추첨제가 처음 시작된 1969년 2월 5일, 어린이들이 은행알 추첨기를 돌리고 있다.
중학입학 무시험 추첨이 1969년 2월 5일 서울에서 처음 실시됐다. 이 제도는 1968년 7월 15일 권오병 문교부 장관이 발표한 입시개혁안에 따른 것이었다. 개혁안은 중학교 입학을 위한 과외수업의 폐단을 뿌리뽑고 사교육비 부담 과중 등을 해결하기 위해 입학시험을 폐지하고 학군별 추천제를 실시해 무시험으로 입학한다는 내용을 담고있었다.
이날 서울시내 2백3개 초등학교 졸업반 어린이 중 5만3백11명의 남자 어린이들이 4개 학교군별 추첨장에 모여 자신이 진학할 학교를 직접 추첨했고 이튿날 4만1백13명의 여자 어린이들도 추첨했다. 1970년에는 추첨이 전국 10대 도시로 확대됐고 1971년에는 전국으로 확대 실시됐다. 학교 추첨은 처음 2년간은 수동식 추첨기(은행알)로 직접 추첨하다 1971년부터는 컴퓨터에 의해 추첨 배정됐다. /조선
[1967년] 상하이 코뮌[Shanghai Commune] 설립
←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의 시위 모습
1967년 2월 5일 장춘차오[張春橋]와 야오원위안[姚文元]이 상하이 코뮌(上海 -, Shanghai Commune)을 조직했다. 중국공산당 주석 마오쩌둥[毛澤東]은 중국 혁명정신을 재건하기 위해 자신이 권좌에 있던 마지막 10년간(1966∼76)에 걸쳐 문화대혁명을 추진했다. 그는 도시 청년들을 대거 동원해 홍위병이라는 집단을 조직했고 당과 군대를 통해 이들의 운동을 적극 지원했다. 그러나 당과 정부 지도부가 장악한 권력을 탈취하려는 움직임이 상하이에서 일어났다. 1967년 2월 장춘차오와 야오원위안은 홍위병을 재편성해 32개 조반조직(造反組織)을 바탕으로 파리 코뮌과 비슷한 조직인 상하이 코뮌을 만들었다. 그러나 베이징[北京] 정부의 승인을 얻지 못해 혁명위원회 방식에 따라 개편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브리태니커
[1936년]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스' 개봉
← <방랑자>에서의 채플린
찰리 채플린(Chaplin, Charlie, 1889~1977)의 마지막 무성영화 ‘모던 타임스(Modern Times)’가 1936년 2월 5일 개봉됐다. 영화는 컨베이어 벨트에 얽매인 노동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시계에 지배되는 현대 자본주의 문명 속에서 인간이 겪는 소외를 날카롭게 파헤친 것으로 평가받았다.
채플린은 영화 1백년 역사상 대중들로부터 가장 폭넓은 사랑을 받은 배우이자 감독, 그리고 제작자였다. 또한 첫 장편 연출작 ‘키드(The Kid)’(1920년)에서부터 후기 대표작 ‘라임 라이트(Limelight)’(1952년)에 이르기까지 같은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에게는 영화보는 재미와 멋을 알게 해준 영화예술가였다.
배우출신의 알콜중독자인 부친과 정신병원을 전전한 모친 사이에서 태어난 그의 어린시절은 늘 불우했다. 채플린이 뉴욕 연극무대를 거쳐 헐리우드에 진출한 것은 헐리우드가 영화도시로서의 틀을 갖춰가던 1913년이었다. ‘키드’와 ‘시티라이트(City Lights)’(1931년)에서 따스한 인간애의 중요성을 강조한 채플린은 전체주의가 휩쓸던 1940년 ‘위대한 독재자(The Great Dictator)’를 통해 시대의 잘못된 조류에 정면으로 대항했다. 그는 2차대전이 끝난 뒤 냉전 분위기속에서 공산주의자로 몰려 1952년 미국에서 추방되었으나 미국으로 다시 돌아와 1977년 88세로 사망했다. /조선
[1934년] 미국 프로 야구 선수 행크 아론(Aaron, Hank)출생
← Aaron in 1978
본명은 Henry Louis Aaron. 메이저 리그 23시즌 동안 베이브 루스, 타이 코브, 스탠 뮤지얼 등 최고의 타자들이 세웠던 타격기록을 경신했다. 오른손잡이에 신장 183㎞, 체중 82㎏인 그는 1952년에 프로 야구 선수생활을 시작해 니그로아메리칸리그의 인디애나폴리스 클라운스 팀에서 유격수로 몇 개월 간 있었다. 내셔널 리그의 보스턴 브레이브스 팀과 계약을 맺고 마이너 리그(2부 리그)에 소속되어 위스콘신 주의 오클레어와 플로리다 주의 잭슨빌에서 활약했다. 1954년에 연고지를 밀워키로 옮긴 브레이브스 팀에 합류해 줄곧 외야수로 뛰었다. 1956년에는 평균타율 0.328로 내셔널 리그의 타격왕이 되었으며, 1957년에는 팀을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시킴으로써 리그의 MVP가 되었다. 1965년말 브레이브스 팀이 애틀랜타로 옮길 때까지 398개의 홈런을 쳤다. 1974년 4월 8일 애틀랜타에서 1935년 이래 한 번도 깨진 적이 없는 베이브 루스의 기록을 깨뜨리는 715번째의 홈런을 쳤다. 그후 1976년 시즌이 끝난 후 현역에서 은퇴하고, 선수 개발과 스카우트의 책임을 맡은 부감독으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팀에 다시 입단했다. 1982년 1월 13일 야구 명예의 전당 회원으로 선정되었다.
아론은 홈런 755개, 장타 1,477개, 타점 2,297개, 3,298게임 출장에 1만 2,364타석, 평균타율 0.305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가 세운 안타(3,771)와 득점(2,174) 기록을 능가한 선수는 타이 코브 한 사람뿐이었다. /브리태니커
[1922년] 미국 월간지 '리더스 다이제스트(Reader's Digest)' 창간
'리더스 다이제스트(Reader's Digest)'는 1922년 2월 월리스 부부(Wallace, DeWitt, 1889~1981 ; Wallace, Lila Bell Acheson, 1889~1984)에 의해 창간되었다. 창간호는 불과 5,000부였으나, 그 후 해마다 증가하여 미국 최대의 잡지로 성장하였다. 세계의 중요한 잡지나 단행본 속에서 일반적인 흥미가 있는 것을 골라서 요약 ·소개함으로써 성공을 거둔 이 잡지는 1930년부터는 독자적인 기사도 게재하게 되었는데, 다이제스트라는 이미지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 본지가 준비한 원고를 먼저 타지에 무료로 제공하여 발표하게 한 후 그것을 요약하여 게재하는 방법까지 채택하였다. 인기가 높아지자 외국으로부터의 주문이 늘어 1938년에는 런던에서 영국판이 창간되어 오늘날에는 135만 부를 발행하는 영국 유수의 잡지가 되었다.
한편, 라틴 아메리카 제국의 독자를 위해 에스파냐어판《셀렉시오네스:Selecciones》가 창간되어 150만 부를 넘는 최대의 에스파냐어 잡지가 되었다. 프랑스어판 《셀렉시옹:Sélection》, 독일어판 《다스 베스테:Das Beste》도 각각 100만 부를 넘는 대잡지가 되었다.
1946년에는 일본어판이 창간되고, 1950년에는 한국에서도 한글판이 발행되었다. 이 한글판은 피난지 부산(釜山)에서 인기를 끌었으나, 환도 후 중단되었다가 1979년 두산그룹의 연강학술재단에서 다시 발행하였으며, 1987년부터는 (주)두산출판BG에서 발행하고 있다. 1995년 현재 17개 언어로 번역 ·발행되고 있다. /naver
[1922년] 불교 사상을 바탕으로 자의식의 세계를 추구한 시를 쓴 시인 김구용(金丘庸) 출생
1922. 2. 5 경북 상주~2001. 12. 28 서울.
불교사상을 바탕으로 자의식의 세계를 추구한 시를 썼다. 본명은 영탁(永卓). 성균관대학교 국문학과를 마치고 1955년 〈현대문학〉 기자, 숙명여자대학교 강사, 성균관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일찍이 불교에 귀의하여 해방직전까지 동학사 등에서 유불선(儒佛仙)의 경전과 동서양 고전을 두루 익혔다. 1936년〈회고〉를 시작으로 1949년 〈신천지〉에 시〈산중야〉·〈백탑송〉등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다. 1940년에는 관념적이고 한자가 많은 난해한 시를 썼는데〈탈출 脫出〉(문예, 1953. 2)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분광(噴光)의 심장〉(신천지, 1953. 6)·〈오늘〉(문예, 1953. 12)·〈슬픈계절〉(현대문학, 1955. 6) 등에서는 전쟁 뒤의 극도로 불안한 현실을 그렸다. 이어〈관조〉(문학예술, 1956. 2) 등을 발표했는데 이 무렵에는 정교하고 섬세한 언어로 행과 연을 무시한 산문시를 주로 많이 썼다.
6·25전쟁으로 황폐해진 현실에서 불교사상을 바탕으로 자의식의 세계를 추구했다. 1957년 〈현대문학〉에 〈소인〉·〈심장없는 인형〉 등을 발표했으며 뒤이어 발표한〈불협화음의 꽃〉(현대문학, 1960. 1)·〈육곡〉(현대문학, 1969. 2) 등은 원고 100장이 넘는 장시이다. 그밖에도 〈현대문학〉·〈자유문학〉에 동양의 불교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초현실주의 기법을 실험한 시를 발표해 현대시의 범위를 넓혔다. 1955년 제1회 현대문학상을 받았다. 시집으로 〈시집 1〉(1969)·〈구곡〉(1978) 등이 있고, 역서로 〈채근담〉(1955)·〈옥루몽〉(1957)·〈열국지〉(1990) 등이 있다./브리태니커
[1881년] 영국 역사학자 토마스 칼라일 사망
← 토마스 칼라일.
영국의 역사학자 겸 평론가 토마스 칼라일이 1881년 2월 5일 향년 86세로 사망했다. 스코틀랜드 청교도 집안에서 태어나 에든버러 대학에서 수학한 그는 한때 교사로도 재직했으나 곧 그만두고 평생을 저술가로 보냈다.
초기에는 독일문학과 관념론 철학을 연구하며 문학에만 전념했으나 역사문제로 관심을 바꿔 그의 대표작인 ‘프랑스혁명’(1837)을 집필했다. 이 책에서 혁명을 지배계급의 악정에 대한 천벌이라 하여 지지하는 한편 영웅적 지도자의 필요성을 제창했다. 이어 공개강연 내용을 모은 ‘역사에서의 영웅, 영웅숭배 및 영웅정신’(1841)에서 그의 영웅대망론을 더욱 구체화시켰다.
인류의 역사는 땅 위에서 활동한 영웅들의 역사이고 그래서 역사는 위인들의 전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차티즘’(1839)이나 ‘과거와 현재’(1843)같은 책에서도 노동계급의 어려운 처지를 동정은 하면서도 그 원인을 영웅이 지배하던 중세적 경제 질서의 해체에서 찾았다.
[1862년] 쿠자(Cuza, Alexandru Ioan)가 몰다비아공국과 왈라키아공국을 합병하여 루마니아를 세우다
← Alexander John Cuza
이아쉬와 부쿠레쉬티에 몰도바 공국과 문테니아 공국의 통일을 위한 "두 개의 의회"가 결성되었다. 이 의회는 문테니아 공국과 몰도바 공국의 중립과 자치권 유치,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유럽의 한 왕가를 루마니아에 도입하여 하나의 통일국가 실현, 루마니아 국호사용, 유럽 강대국들의 보증 하에서 입헌정치 실시 등을 요구하였는데, 서유럽의 강대국들은 이러한 루마니아인들의 요구사항을 아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루마니아인들은 1859년 1월 17일 몰도바 공국의 영주로 알렉산드루 이오안 쿠자 Alexandru Ioan Cuza를 선출하였고, 같은 해 2월 24일 그는 문테니아 공국의 영주로 선출되었다. 이로써 문테니아 공국과 몰도바 공국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알렉산드루 이오안 쿠자는 2년간의 짧은 통치기간 동안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문화 분야에서 루마니아 근대화의 기초를 다졌다. 터키 제국은 루마니아 통일을 1861년 12월 2일에 이르러서야 인정하였다. 1862년 2월 5일 쿠자는 부쿠레쉬티에서 사상 최초로 루마니아 의회를 개최하여 루마니아 공국의 완전한 통일을 선포하였다.
1863년 10월에서 1865년 2월 사이 미하이 코걸리체아누는 내각을 결성하였다. 따라서 이오안 쿠자 영주는 코걸리체아누와 함께 개혁을 단행하기 시작하였다. 즉 그는 농민들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게 토지 소유법을 제정하였고 나폴레옹 법전을 모델로 삼아 민법(codul civil)과 형법(codul penal)을 제정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상공회의소와 군대를 창설하였다.
루마니아 소망교회 2007-07-30 한국컴퓨터선교회
[1851년] 한말의 의병장 임병찬(林炳瓚) 출생
1851년 2월 5일 태어남 / 1916년 5월 23일 죽음
"하룻만에 뱃길따라 만리(萬里)를 왔네
저문 구름 밝은 달에 슬픔을 못이겨 서녘을 바라보네
고향산천(故鄕山川)은 어디인고
쓸쓸한 매미 소리는 옛 고향같구나."
- 임병찬
임병찬은 한말의 의병장으로 전라북도 옥구에서 태어났다. 호남지방에 대흉년이 들었을 때 진휼의 공을 인정받아 후일 낙안군수 겸 순천진동첨절제사로 임명되었다. 1885년 영국 함대가 남해안에서 거문도사건을 일으켰을 때 감독관으로 천거되기도 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 때 동학에 반대해 김개남을 체포한 공으로 무남영우영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듬해 최익현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순창전투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다가 최익현과 함께 체포, 압송되어 감금 2년 선고를 받고, 쓰시마 섬[對馬島]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이명상·이인순 등과 협의해 독립의군부를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할 목적으로 독립의군부의 편제를 재정비했다. 각 도·군 대표를 선출해 의병운동계획을 세웠으나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거문도로 유배되었으며 그곳에서 죽었다. 저서인 <돈헌문집>에 병오의병 당시 일제에 체포되어 취조받을 때의 기록을 비롯해 이 시기 항일의병전쟁과 관련된 자료들이 실려 있다.
[1669년] 몰리에르의 '타르튀프(Le Tartuffe)' 공개 초연
← 몰리에르, Pierre Mignard가 그린 유화
몰리에르(Molière, 1622~1673)의 5막 운문희곡(韻文喜劇) '타르튀프(Le Tartuffe)'는 1664년 베르사유 궁전에서 초연. 상연되자 곧 공개 금지되어 개작하였다. 1667년 재상연하였으나 다시 공개 금지, 1669년 또다시 공개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이와 같이 재삼(再三) 공개 금지되어 개작을 불가피하게 한 이유는 당시 교회의 고위 교직자들의 부패 ·타락한 생활을 폭로한 대담한 희극이었기 때문이다. 파리의 부유한 시민의 한 사람인 오르공은 신앙을 가장한 타르튀프에 속아 이미 애인이 있는 한 아가씨를 강제로 그와 결혼시키려 한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타르튀프는 오르공의 젊은 후처 에르밀을 유혹한다.
이러한 현장을 아들 다미스는 발견하였으나 오르공은 전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다. 결국 타르튀프의 정체는 에르밀의 간계로 폭로된다. 타르튀프는 오르공이 맡겨 놓은 비밀문서를 증거로 당국에 고발하나 국왕으로부터 은밀히 명령을 받은 경찰은 오르공 대신 타르튀프를 체포하여 오르공 일가는 구원된다. 이 작품은 몰리에르의 전성기의 작품이며 현재까지도 계속 상연되고 있다. 타르튀프는 프랑스어에서 위선자라는 보통명사로 사용될 정도로 유명하다. /naver
그밖에
2007년 "제이유 수사 검사가 거짓자백 강요" 구속 피의자 녹취록 공개
2007년 애플 로고 26년 다툼 끝 '애플코프' 모든 상표권 애플컴퓨터가 사기로
2007년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 대선출마
2007년 올스타만 7회 '비운의 쿼터백' 페이튼 매닝, 데뷔 9년만에 수퍼볼 MVP
2007년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 1심서 징역 3년형 선고
2007년 최은택 전 축구대표 감독 별세
2007년 보건복지부 의료법 개정안 일방 발표, 의협 반발
1999년 전자문서의 안정성 및 신뢰성 확보를 위한 전자서명법 공포
1997년 프랑스 주재 미국대사 파멜라 해리먼 사망
1980년 프랑스, 리비아와 단교
1979년 북한, 민족통일준비위원회 제의
1976년 과테말라에 대지진, 2만3천여명 사망
1971년 아폴로 14호 우주비행사 달 표면 산책
1971년 헝가리의 공산당 지도자 라코시 사망
1971년 주한 독일문화원 개원
1970년 전국10개 도시서 중학입시 무시험실시
1965년 주월 한국군사원조단 결단
1965년 이만희 감독의 반공영화 ‘7인의 여포로’가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됨
1963년 일본, 소련 신규통사협정에 조인
1961년 서울시내버스 파업단행
1957년 각의, 군재3심제 의결
1952년 유엔총회, 한국부흥결의안 채택
1951년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 창설
1951년 파리서 유럽군 창설회의 개최
1951년 육군, 해군, 공군 합동헌병대 발족
1949년 유엔 신한국위원단 내한
1949년 프랑스, 대한민국 정식 승인
1948년 북한, ‘토지개혁에 대한 법령’ 발표
1945년 미군, 2차대전 중 마닐라 진입
1941년 오스트레일리아 시인 패터슨 사망
1937년 독일 작가 루안드레아스 잘로메 사망
1930년 소냐 헤니, 피겨스케이팅 챔피언 연속 석권
1917년 한국 경제학자 고승제 출생
1903년 한성~평양간 시외전화 개통
1808년 독일 화가 슈피츠베크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