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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662
11월2일[모든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연중 제30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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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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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N_ow2ht1vhA
(예수회 김연수 스테파노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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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아무런 걱정하지 마십시오. 성모님께서 안전하게 우리를 강 건너로 안내하실 것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이 세상을 살다가 하느님 아버지 품으로 건너가신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 우리의 기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가련한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는 위령의 날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들, 그리고 아직 내게는 해당되지 않으려니 하고 안심하고 있는 오늘 우리 모두를 향한 위령의 날입니다.
모순된 말처럼 보이지만, 삶 속에 죽음이 들어있고, 죽음 속에 또 다른 삶에 대한 희망과 기쁨이 들어있습니다.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천태만상입니다. 죽음의 순간을 자신의 인생이 종치는 날, 일생일대 가장 두려운 날, 어떻게서든 피하고 싶은 날, 생각만 해도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날로 여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느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에 힘입어 영생의 씨앗을 이미 간직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 이상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죽음은 비록 베일에 가려있어 신비스럽지만, 그토록 꿈꾸던 하느님과 온전히 합일하고 일치하는 축복의 순간입니다. 또한 그 순간은 공포에 못이겨 부들부들 떨고 치를 떠는 순간이 절대 아닙니다. 그 순간 평생토록 우리를 동반해주셨던 성모님과 성요셉, 성령께서 함께하시며 안전하게 우리를 하느님 품으로 안내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순간이 오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두 손을 크게 뻗쳐 자비하신 하느님 품에 원없이 안길 일입니다.
몇 년 전 선친께서 돌아가실 때가 기억납니다. 저희 아버지는 무척 낙천적이셨습니다. 물론 주치의 선생님으로부터 더 이상 치료가 힘들겠다는 말씀을 듣고, 잠시 낙담하는 기색을 보이셨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보기 딱해서 집으로 모시고 오는 길에...제가 뭐 그깟 일로 그렇게 상심하시냐? 좋아하시는 낚시나 가자고 했을때, 얼굴에 환한 미소가 깃들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도 환하고 씩씩한 얼굴로 모범 환자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돌아가시는 날 오전까지 두툼한 영성 서적을 열심히 읽고 계시던 모습을 잊지 못합니다
지금 이 순간도 죽음을 목전에 두고 병고와 맞서느라 힘들어 하시는 분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너무 두려워마시기 바랍니다. 부들부들 떨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기쁘게 맞이하실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여러분을 안전하게 강건너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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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7vhVbQy2i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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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를 위한 기도가 착각이라도 좋은 이유>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 오늘만이 아니라 매일, 어쩌면 매 식사 후 기도를 통해서 만이라도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우리 자신에게도 좋은 일인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연옥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만으로도 비록 그것이 착각일지라도 우리에게 매우 유익합니다.
영화 ‘먼지로 돌아가다’(2022)에서 시골 노총각은 4만 원을 주고 장애가 있는 신부를 데려옵니다. 둘은 진정으로 위해주고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아내가 죽자 노총각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습니다. 그 이전에는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것을 견딜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일하는 맛을 알고 난 뒤에는 더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 일하는 것이 힘들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내어주고 아내를 따라갑니다.
베르테르 효과라고 있습니다. 유명인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자신도 죽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예를 들어 2005년 이은주 씨가 사망한 한 달 후는 하루 평균 23명이 자살하던 것이 41명으로 늘었습니다. 2007년 정다빈 씨가 사망한 후 전달 평균 21명에서 45명으로 늘었고 최진실 씨 동생 최진영 씨가 자살하기 이전 38명에서 이후 51명이 되었습니다.
최진실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 평균 32명에서 59명으로 껑충 뛰었습니다. 이를 한 달, 혹은 그 이후의 파급효과로 따지자면 유명 연예인이 자살하면 수백 명이 뒤따라간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돌아가신 분을 위해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또 연옥을 믿지 않으니 무조건 하늘나라로 간다고 믿고 자기들도 따라가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유일하게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그 사랑을 증명할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러나 연옥을 믿는다면 이 세상에서도 연옥에 있는 사람을 위해 일을 할 수 있고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살아있는 것처럼 통교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버릴 필요가 없고 따라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연옥이 있다면 지옥도 믿기 때문입니다.
자살도 살인이기에 마지막에 그 대죄를 짓는다면 구원받을 확률은 매우 희박하다 할 수 있습니다.
긍정적 착각이 있습니다. 버락 오바마는 흑인이었음에도 어렸을 때부터 꿈이 대통령이었습니다. 모두가 비웃었지만, 그는 어렸을 때부터 대통령이 된 세상에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실험에서 한 여성에게 농구 자유투를 해 보라고 했습니다. 여성이 열 번을 던졌지만, 열 번 중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실험 진행자는 믿으면 된다고 말해주고 믿는다는 뜻에서 눈을 가리고 해 보라고 했습니다.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여자가 공을 던지자 환호성을 올립니다. 그 사람들은 처음부터 관중이 아니라 그렇게 하도록 교육받은 사람들입니다.
공은 들어가지 않았지만, 눈을 가리고 공을 던지는 여자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 그렇게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여자는 진짜 공이 들어간 줄 알고 자신을 믿게 됩니다. 이제 눈가리개를 하지 않고 공을 던집니다. 열 번 던져서 네 번을 성공시켰습니다.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해줄 때도 이런 효과가 있습니다. 내가 지옥에 갈 것이라 여기며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할 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나도 내가 기도해주는 이처럼 연옥이나 천국에 갈 것이라 믿게 됩니다. 그러면 그곳에 가기에 합당하게 자기 삶을 변화시킵니다. 죄를 덜 짓게 되고 하느님을 더 믿게 됩니다.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진짜 연옥이 있다면 가장 좋을 것입니다. 그럴 리는 없지만, 만약 연옥이 없더라도 자녀들과 함께 연옥 영혼을 위해 식후 기도라도 하면 자녀들은 적어도 연옥을 목적지로 여기며 살아가게 됩니다. 천국과 지옥과 연옥의 교리가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자기 안에 완전히 박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착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좋은데도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보석을 알아보지 못하고 돌 버리듯 버리는 어리석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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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휴가 중에 제일 먼저 찾아 간 곳은 ‘비봉 추모관’이었습니다. 그곳에는 12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와 3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함께 있습니다. 볕이 좋은 가을날에 베드로와 요한이 주님이 계셨던 무덤으로 달려가듯이 추모관으로 갔습니다. 부모님이 계신 곳에는 동생 수녀님이 부모님이 함께 찍은 사진을 갖다 놓았습니다. 부모님을 위해 연도를 바치면서 이제는 기억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생각했습니다. 기억 속의 아버지는 늘 책을 가까이 하였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어머니와 함께 산책을 갔습니다. 생각했으면 행동으로 옮기는 결단력이 있었습니다. 술 때문에 실수하는 자식을 보면서 술을 입에 대지 않는 금주로 모범을 보였습니다. 약주를 좋아했었지만 돌아가실 때까지 술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성경 필사를 하였고, 예수님의 탄생을 축복하였던 시메온처럼 늘 성당에서 성무일도를 하며 기도하였습니다. 하느님을 믿었고, 신앙 안에서 충실하게 살았으니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리라 믿습니다.
어머니는 생활력이 강하였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늘 일을 하였습니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 왔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합니다. 가난했기에 서울로 올라왔다고 합니다.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서 서울로 올라왔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쌀가게를 하였고, 작은 슈퍼를 하였고, 밥장사를 하였고, 파출부로 일을 하였습니다. 고된 일을 하셨기에 몸이 많이 아팠습니다. 펠리컨이 새끼들에게 자신의 피를 먹이는 그림을 보았습니다. 어머니는 펠리컨처럼 자녀들을 위해서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아들이 본당 신부가 되었을 때입니다. 어머니는 기쁜 마음으로 아들과 함께 3년을 지냈습니다. 첫 단추를 잘 끼워야 옷을 제대로 입듯이 어머니가 함께했던 첫 본당 신부였기에 큰 어려움 없이 무탈하게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곧은 느티나무처럼 강하였다면 어머니는 흐르는 물처럼 부드러웠습니다. 어머니는 대녀들이 많았고, 대녀들을 잘 챙겼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성모님이 예수님께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였던 것처럼 대녀들이 아프면 제게 봉성체를 부탁하였고, 대녀들의 자녀들이 혼배를 하면 제게 주례를 부탁하였습니다. 어머니는 하느님을 믿었고, 신앙 안에서 충실하게 살았으니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리라 믿습니다.
아버지는 정신력이 강했지만 체질은 약하였습니다. 머리카락이 일찍 하얗게 되었고, 치아가 좋지 않아서 일찍 틀니를 사용하였고, 혈압이 높아서 약을 먹어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마음이 부드러웠지만 체질은 강하였습니다. 치아가 좋아서 돌아가실 때까지 튼튼한 치아를 사용하였습니다. 머리카락도 검었고, 혈압도 정상이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강한 정신력과 어머니의 강한 체질을 닮았으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체질은 아버지를 닮았습니다. 치아가 좋지 않아서 늘 신경이 쓰였습니다. 부드러운 음식을 선호하였습니다. 이제는 하얀 머리카락이 자연스러운 나이가 되어서 염색을 하지 않지만, 머리카락도 일찍 하얗게 돼서 염색을 하였습니다. 혈압이 높아서 일찍부터 약을 복용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체질을 닮은 것이, 어머니의 마음을 닮은 것이 사제생활에 불편함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도움이 되었습니다. 체질 때문에 건강에 관심을 가졌고, 아직은 불편함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앞장서서 끌고 가는 성격도 좋겠지만 뒤에서 밀어주는 성격도 좋았습니다. 저 역시도 하느님을 믿고, 신앙 안에서 충실히 살아 언젠가 천상에 계신 부모님을 다시 만날 것을 희망합니다.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욥은 현재의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모든 고통을 씻어 주리라는 믿음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욥에게 현실에서의 삶만이 있다면 고통과 아픔 앞에 좌절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십니다. ‘가난한 이, 자비를 베푸는 이,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이,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이, 주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이’ 이런 이들은 참된 행복을 만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현재는 천상에서의 미래를 약속하기 때문입니다. 죽은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성화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그것은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면 자연히 하느님의 나라에 대하여 묵상하게 되므로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여 성실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들이, 현재 우리가 바라는 것들이 과연 영원한 삶에 도움이 되는가 아니면 오히려 영원한 삶에 장애가 되는가! 묵상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래서 영원한 삶을 위한 준비를 합당하게 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세상을 떠난 모든 영혼이 하느님의 품 안에서 영원한 삶을 살아가도록 기도합니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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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1)
오늘은 우리보다 먼저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여 새로운 삶을 살고 계시는 분들을 기억하며 그 은혜에 대하여 감사드리고, 아직 연옥에 남아있는 분들을 위해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는 날이다. 그리고 우리도 언젠가는 맞이하게 될 죽음을 생각하고 현재의 나의 삶을 되돌아보는 날이기도 하다. 오늘은 연옥이 어떤 곳인가를 한번 보겠다. 연옥은 끝이 있는 일시적인 정화의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로서 누구나 결점은 있으며, 완전한 인간은 없다. 그래서 스스로 죄스런 인간이라고 한다. 그리고 죽은 후에는 더는 어떻게 해볼 수가 없다. 하느님을 뵙는 순간 자기 자신 스스로 판단하게 되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발전 가능성은 죽은 다음에는 없다. 그러므로 결점이 있는 부당한 인간으로서 완전하신 하느님께 나아갈 수가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하느님은 정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조그마한 결점도 용납이 안 된다. 이같이 인간이 하느님을 향해서 살아갔지만, 인간적 약점 때문에 가지게 된 부족한 것과 결점을 기워 갚는 그것을 연옥이라고 한다. 이 연옥은 마지막 정화단계라고 보는 것이 좋겠다. 하느님께 나아가는데 죄스러운 결점이 하느님의 완전하심을 통해서 정화되고 구원이 성취되는 마지막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교회가 가르치고 있는 연옥론(煉獄論)은 하느님의 성성(聖性), 정의, 자비를 명백히 보여주며, 인간을 절망과 윤리적인 경솔함으로부터 지켜주고, 더구나 죽은 사람도 도와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증하여 줌으로써 많은 위로와 도움을 주고 있다1) . 연옥에서의 영혼은 자신의 죄에 대해 정화 받는다. 이 세상에서는 죄에 대한 보속을 선행이나 기도로써 대신에 할 수 있으나 연옥의 영혼은 더는 무엇을 할 수 없고, 수동적인 형태로 하느님의 정의로 내려진 벌의 고통을 견디는 것으로 정화와 속죄되는 상태이다. 이 영혼은 하느님이 내리시는 고통을 즐겁게 수용함으로써 죄에 대한 유한적(有限的)인 벌의 보상을 하면 확실하게 정화되는 것이다.
연옥의 고통이란 모든 사람에게 같지는 않다. 각자가 지은 죄에 상응하는 벌을 받게 된다. 그다음 연옥 영혼은 하느님을 마음으로부터 사랑하고, 천국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확실하므로 고통으로 마음의 평화와 기쁨이 흔들리지는 않는다. 그 고통의 기간이나 엄중함도 지상교회의 기도와 선업(善業), 신자들의 기도로 단축 또는 경감시켜줄 수 있다. 연옥의 영혼들을 도와줄 수 있고 그들의 고통을 경감 또는 단축해줄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현실 속에서도 그 예를 들어 충분히 이해가 가고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예를 들면, 아버지가 빚을 다 갚지 못하고 돌아가셨다고 한다면, 자녀는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서 그 빚을 대신 갚으려 할 것이다. 죽음을 통해서 더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상태에 있는 그분을 위해서 아직은 무엇을 할 수 있는 우리가 대도(代禱)를 한다고 할 때, 즉 대신 고행(苦行)한다든지 대신 속죄(贖罪)의 선행을 하느님께 보여 드린다고 할 때 그 노력은 헛된 것이 아니다.
그분을 위해서, 그분의 명예 회복, 하느님의 모습을 닮음을 완전히 회복시켜 주기 위한 이 행위는 돌아가신 부모의 빚을 갚아서 그분들의 명예를 회복시켜드리는 것보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받아주실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자주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서 미사를 봉헌하며, 이 미사를 통해서 지상교회는 연옥의 영혼들과 통공을 나누고, 만일에 그 영혼이 정화되어 하늘나라에 있다면, 그 기도의 은혜는 다른 영혼에게 베풀어지며, 천상에 있는 그 영혼은 아직도 이 지상에서 순례하고 있고, 많은 어려움과 박해 속에 있는 지상교회를 위해 기도해줄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또한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나이다."하고 고백한다. 연옥의 영혼은 그곳에서 자신의 죄를 다 보속한 후에는 하느님의 생명에 나아갈 것이며, 천국에서 하느님을 직접 뵙게 되고, 그분의 신비에 잠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일시적 정화의 장소인 연옥은 모든 영혼이 하늘나라에 들어감으로써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교회는 이 영혼들을 위한 특별 기간(위령성월)도 마련하고 있지만, 그들이 하루빨리 완전한 구원에 이르도록, 하느님께 일치하도록 선행으로써, 기도로써, 미사를 통하여 우리가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항상 모든 성인의 통공을 기억하면서이다. 그들을 위한 기도나 선행은 그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모든 성인의 통공 안에서 본다면 바로 우리 자신들을 위한 기도이다. 이 미사 동안 우리가 사랑했고, 우리를 사랑했던 돌아가신 부모와 형제 그리고 친지들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도록 주님의 자비를 간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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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오늘은 우리보다 먼저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여 새로운 삶을 살고 계시는 분들을 기억하며 그 은혜에 대하여 감사드리고, 아직 연옥에 남아있는 분들을 위해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는 날이다. 그리고 우리도 언젠가는 맞이하게 될 죽음을 생각하고 현재의 나의 삶을 되돌아보는 날이기도 하다.
오늘은 연옥이 어떤 곳인가를 한번 보겠다. 연옥은 끝이 있는 일시적인 정화의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로서 누구나 결점은 있으며, 완전한 인간은 없다. 그래서 스스로 죄스런 인간이라고 한다. 그리고 죽은 후에는 더는 어떻게 해볼 수가 없다. 하느님을 뵙는 순간 자기 자신 스스로 판단하게 되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발전 가능성은 죽은 다음에는 없다. 그러므로 결점이 있는 부당한 인간으로서 완전하신 하느님께 나아갈 수가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하느님은 정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조그마한 결점도 용납이 안 된다. 이같이 인간이 하느님을 향해서 살아갔지만, 인간적 약점 때문에 가지게 된 부족한 것과 결점을 기워 갚는 그것을 연옥이라고 한다.
이 연옥은 마지막 정화단계라고 보는 것이 좋겠다. 하느님께 나아가는데 죄스러운 결점이 하느님의 완전하심을 통해서 정화되고 구원이 성취되는 마지막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교회가 가르치고 있는 연옥론(煉獄論)은 하느님의 성성(聖性), 정의, 자비를 명백히 보여주며, 인간을 절망과 윤리적인 경솔함으로부터 지켜주고, 더구나 죽은 사람도 도와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증하여 줌으로써 많은 위로와 도움을 주고 있다1) .
연옥에서의 영혼은 자신의 죄에 대해 정화 받는다. 이 세상에서는 죄에 대한 보속을 선행이나 기도로써 대신에 할 수 있으나 연옥의 영혼은 더는 무엇을 할 수 없고, 수동적인 형태로 하느님의 정의로 내려진 벌의 고통을 견디는 것으로 정화와 속죄되는 상태이다.
이 영혼은 하느님이 내리시는 고통을 즐겁게 수용함으로써 죄에 대한 유한적(有限的)인 벌의 보상을 하면 확실하게 정화되는 것이다.
연옥의 고통이란 모든 사람에게 같지는 않다. 각자가 지은 죄에 상응하는 벌을 받게 된다. 그다음 연옥 영혼은 하느님을 마음으로부터 사랑하고, 천국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확실하므로 고통으로 마음의 평화와 기쁨이 흔들리지는 않는다.
그 고통의 기간이나 엄중함도 지상교회의 기도와 선업(善業), 신자들의 기도로 단축 또는 경감시켜줄 수 있다. 연옥의 영혼들을 도와줄 수 있고 그들의 고통을 경감 내지 단축해줄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현실 속에서도 그 예를 들어 충분히 이해가 가고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예를 들면, 아버지가 빚을 다 갚지 못하고 돌아가셨다고 한다면, 자녀는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서 그 빚을 대신 갚으려 할 것이다. 죽음을 통해서 더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상태에 있는 그분을 위해서 아직은 무엇을 할 수 있는 우리가 대도(代禱)를 한다고 할 때, 즉 대신 고행(苦行)한다든지 대신 속죄(贖罪)의 선행을 하느님께 보여 드린다고 할 때 그 노력은 헛된 것이 아니다.
그분을 위해서, 그분의 명예 회복, 하느님의 모습을 닮음을 완전히 회복시켜 주기 위한 이 행위는 돌아가신 부모의 빚을 갚아서 그분들의 명예를 회복시켜드리는 것보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받아주실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자주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서 미사를 봉헌하며, 이 미사를 통해서 지상교회는 연옥의 영혼들과 통공을 나누고, 만일에 그 영혼이 정화되어 하늘나라에 있다면, 그 기도의 은혜는 다른 영혼에게 베풀어지며, 천상에 있는 그 영혼은 아직도 이 지상에서 순례하고 있고, 많은 어려움과 박해 속에 있는 지상교회를 위해 기도해줄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또한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나이다."하고 고백한다. 연옥의 영혼은 그곳에서 자신의 죄를 다 보속한 후에는 하느님의 생명에 나아갈 것이며, 천국에서 하느님을 직접 뵙게 되고, 그분의 신비에 잠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일시적 정화의 장소인 연옥은 모든 영혼이 하늘나라에 들어감으로써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교회는 이 영혼들을 위한 특별 기간(위령성월)도 마련하고 있지만, 그들이 하루빨리 완전한 구원에 이르도록, 하느님께 일치하도록 선행으로써, 기도로써, 미사를 통하여 우리가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항상 모든 성인의 통공을 기억하면서이다.
그들을 위한 기도나 선행은 그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모든 성인의 통공 안에서 본다면 바로 우리 자신들을 위한 기도이다.
이 미사 동안 우리가 사랑했고, 우리를 사랑했던 돌아가신 부모와 형제 그리고 친지들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도록 주님의 자비를 간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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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대사에 대하여! =
현재 한국 교회는 위령성월 중인 11월 1일부터 8일까지 열심한 마음으로 묘지를 방문하고,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신자들은 날마다 한 번씩 연옥에 있는 이들에게만 양도될 수 있는 전대사를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전대사를 얻기 위해서는 위의 조건 외에 고백과 영성체를 하고 교황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주님의 기도와 사도신경을 해야 합니다.
한번 고백성사를 받음으로써 여러 번 전대사를 받을 수 있으나, 한 번 교황의 뜻대로 기도함으로써는 한 번만 전대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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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보속>
천국은(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모든 희망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더 바랄 것이 없는 곳’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지옥은 완전한 절망만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연옥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희망이 남아 있는 곳’입니다. ‘죽은 다음의 세상’을 이렇게 희망과 절망을 기준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살아있는 동안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희망이 하나도 없고 절망뿐인 인생을 살고 있다면, 그 인생은 곧 지옥입니다. 여러 가지로 많이 힘든 생활을 하고 있더라도, 아직 희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 인생은 연옥과 같은 것이고, ‘더 바랄 것이 없는’ 인생을 살고 있다면, 그 인생은 천국의 생활과 같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려고 오신 분이고,우리의 희망 자체이신 분입니다. 지옥과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희망을 가질 수 있고, 그 희망은 또 예수님에 의해서 실현됩니다. 우리 교회는 연옥의 존재를 믿고 있는데, 우리 관점에서 표현하면, “연옥이 있어야 한다.”입니다. 천국으로 직행할 정도로 완전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지옥으로 곧장 떨어질 정도로 악한 것도 아닌,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가는, 또는 갈 수 있는 곳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들을 연옥이 존재한다는 믿음의 근거로 삼을 수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태 10,42)
<‘물 한 잔을 주는’ 것과 같은 작은 선행이라도 ‘진심으로’ 실천했다면, 지옥으로 떨어지는 일은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곧장 천국으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일단 연옥에 가서, 자기가 지은 죄들에 대한 보속을 하는 과정은 거쳐야 할 것입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를 바라십니다. 인간들을 지옥으로 보내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모든 죄인들이 회개하고 보속해서 천국으로 들어가기를 바라시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연옥이라는 ‘기회’를 마련해 주셨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이고, 자비 자체이신 분입니다. ‘연옥’이라는 마지막 기회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자비’이고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예수님은 우리를 천국으로 데리고 가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예수님을 따라가기 싫다고, 천국으로 들어가기 싫다고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자기가 거부해서 못 들어갑니다. 그런 경우 말고, 예수님을 잘 따라가다가 본의 아니게 실수한 사람도 있고, 의지가 약해서 죄에 빠진 사람도 있고, 어떻든 여러 가지 이유로 천국에 들어가기에는 자격이 좀 부족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연옥은 그런 사람들을 위한 주님의 배려입니다.>
원래 연옥 존재의 근거는 마카베오기 하권 12장입니다.
“......그가 전사자들이 부활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면,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쓸모없고 어리석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건하게 잠든 이들에게는 훌륭한 상이 마련되어 있다고 내다보았으니, 참으로 거룩하고 경건한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죽은 이들을 위하여 속죄를 한 것은 그들이 죄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었다.”(2마카 12,44-45)
우리는 지옥으로 떨어진 영혼들을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지옥은 모든 것이 다 끝나버린 곳이고, 그래서 기도해도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천국에 있는 성인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지 않는데, 성인들은 이미 모든 것이 다 완성된 상태이기 때문이고, 그래서 우리가 기도해 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천국에 있는 성인들에게 기도를 부탁합니다.)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는 ‘연옥 영혼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 기도는 그들의 보속을 도와주기 위한 기도이고, 조금이라도 더 빨리, 더 쉽게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한 기도입니다. 그래서 ‘연옥 영혼들을 위한 기도’는 ‘사랑 실천’이고, 앞에서 말한 ‘물 한 잔을 주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선행 실천입니다. 따라서 연옥 영혼들을 위한 기도는 ‘나를 위한 일’도 됩니다.
우리가 바치는 기도 덕분에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 영혼들은, 천국에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줄 것입니다. 또 주님께서는 우리가 연옥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를 바치는 모습을 다 기억해 주실 것입니다. <연옥은 ‘벌’을 받는 곳이 아니라 ‘보속’을 하는 곳이지만, 그 ‘보속’은 무척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전해집니다. 연옥의 고통은 주님께서 내리시는 고통이 아니라, 보속하는 사람 자신의 죄책감과 미안함 같은 심정에서 생기는 고통입니다. 주님에게도 미안하고, 사람들에게도 미안하고……. 특히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 정말 미안하고……. 연옥은 자기의 지난 삶에 대한 기억이, 또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한 기억이 계속 떠올라서 큰 고통을 겪는 곳이라고 합니다. 연옥 영혼들의 그 고통과 보속을 생각하고 묵상하면서 지금의 자신의 삶을 새롭게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위령성월을 지내는 올바른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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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위령의 날 첫째 미사에 참여하며 죽은 모든 이의 영혼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구체적으로 가톨릭 신앙은 무엇을 희망합니까? 제1독서에서 욥은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희망, 특히 그분을 뵙게 되리라는 기대를 끝까지 버리지 않습니다.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음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자랑합니다.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참 행복에 관하여 가르치시며 하느님을 뵙게 되리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여기서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다양한 의미로 풀이됩니다. 뜻, 지향, 목적이 순수하며,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에 적합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라는 그리스도인의 희망도 물리적인 눈으로 그분을 뵙는 것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기도 내용처럼,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뜻보다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내 지향보다 그분의 지향이 무엇인지, 내 목표보다 하느님 나라의 목표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며 끊임없이 희망하고 지칠 줄 모르게 기도하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삶 속의 구체적 실천으로 꽃피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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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소요한 사도요한 신부님]
<예수님의 삶을 따라 살아갑시다.>
하느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너희들이 죽지 않으려거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만은 따먹지 말아라.” 그러나 첫 사람들은 하느님의 명령에 불순명했고 그 댓가로 죽음의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첫 사람들의 원죄 이후 그들의 후손들은 원죄의 결과인 죽음의 고통을 예외없이 겪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죽음을 피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과거의 모든 사람은 죽었고 현재의 모든 사람도 죽고 있으며 미래의 모든 사람도 앞으로 죽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알지 못하는 죽음의 때, 즉 시한부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죽음 때문에 많은 사람은 삶의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죽고 나면 다 끝나는 데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한 사람이 한번 죽으면 끝이 나는데 선한 일을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우리의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당신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살리시기 위하여 성부께서 파견하신 그리스도라고 불리고 주님이라고 불리며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리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체험한 사람들은 그분에게서 기쁜 소식을 듣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짊어주시는 이 멍에는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첫째 계명과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입니다. 또한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거든 계명을 지켜라. 그러면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이 계명은 하느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고 너의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체험하고 그분으로부터 이러한 계시를 받은 사람들은 영원히 살기 위하여 그분의 법인 계명을 마음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받들어 실천해 나갑니다. 이 멍에와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예수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명하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멍에와 계명은 예수님 당신이 먼저 실천하셨습니다. 그 실천은 그분이 십자가에서 처참한 죽음을 당하심으로서 그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그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예사로운 죽음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자 이웃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성부께서는 목숨을 바쳐 당신을 사랑하시고, 목숨을 바쳐 사람들을 사랑하신 예수님의 육체를 영원히 살리시고 그분을 모든 사람들의 구원자로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성실히 예수님이 주신 멍에와 사랑의 이중계명을 실천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처럼 영원한 생명을 성부께로부터 얻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산다면 참된 행복에 도달할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희망을 지니고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생각하고 주님께서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지복직관에 도달하게 해 달라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우리도 살아 있는 동안 예수님께서 실천하신 멍에와 계명을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실천하여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삶을 지향하여 도달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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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영일 바오로 신부님]
우리 교회는 어제 모든 성인의 날을 지냈고, 오늘은 위령의 날을 지냅니다. 그 이유는 ‘통공’ 교리에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이렇게 믿음의 내용을 고백합니다. “… 성령을 믿으며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 여기서 통공은 산 이가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하고, 죽은 이가 산 이를 위해 기도할 때 그 기도가 통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 이와 죽은 이의 경계 없이 기도하는 것이 모든 성인의 날과 위령의 날의 취지입니다.
얼마 전에 50년을 개신교에서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다가 개종하신 분이 쓴 『개신교가 저버린 보화들』(임승만 안토니오, 좋은 땅, 2014)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분은 이 책에서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죽음 이후의 교리 문제였다고 합니다. 그는 부모님 생전에 부모님을 잘 모시지 못했고 또 부모님의 구원을 위해 굳은 신앙으로 인도하지 못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그러나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 개신교의 입장에서는 아무 것도 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개신교에는 연옥교리나 통공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개신교에서는 죽고 나면 천국 아니면 지옥에 가기 때문에,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단절되고 맙니다. 따라서 추모예배를 하지만 이는 산 자들을 위한 기념예배인 것이며, 따라서 돌아가신 부모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비신앙적인 것이며 죽은 이들에게 불필요하고 전혀 무익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효자로서 그리고 부모님께 송구스런 마음으로 살아가던 터에 가톨릭의 ‘연옥’ 교리와 ‘통공’교리에 대해 알게 되면서 아내와 함께 부모님의 영혼을 위해 개종할 것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전통적으로 연옥(煉獄: Purgatorium)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마카베오 12,41-45 참조)
그래서 대죄를 지은 사람은 곧바로 지옥으로 가지만, 대죄를 모르고 저지른 영혼이나, 소죄를 지은 영혼들은 연옥에서 잠벌의 정화과정을 통해서 정화되어 천국으로 들어간다고 가르칩니다. 잠벌(暫罰: Poenatemporalis)이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 잠시 당하는 벌, 즉 연옥에서 잠시 받는 벌을 의미합니다.
이는 우리가 비록 고해성사를 통해서 용서를 받는다고 해도 잠벌은 남아서 연옥에서 정화 과정을 거치고 난 후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은 이들이 아직도 연옥에서 정화의 과정을 거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 하에 미사도 드리고 기도도 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연옥영혼을 위한 이러한 미사나 기도는 그 분들뿐만 아니라 기도하는우리들에게도 커다란 이익을 줍니다. 왜냐하면 바로 무서운 대죄를 미워하도록 가르칠 뿐만 아니라 보속을 위한 희생과 사랑을 실천하게 되고 또한 그 기도를 받은 이들을 통해서도 은총을 받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우리가 아직 가보지 않은 미지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아는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죽음은 생명으로 가는 문이며, 예수님께서 그것을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다행히도 그 길은 혼자 가는 길이 아니라, 산 이와 죽은 이들 모두 함께 그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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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구 허춘도 토마스 신부님]
<본 고향을 준비하며>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 우리 보다 먼저 가신 조상들을 기억하고, 본 고향,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도록 기도하면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해 봅시다.
1980년 3월 프랑스 파리의 어느 병원에 한 세기를 떠들석하게 하던 존경받는 한 지성인이 급성 폐기종 때문에 입원했습니다. 그는 한달 동안 이 병원에서 문자 그대로 발악을 했습니다. 소리를 지르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고함을 치고 절규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때문에 자기의 병명이 무엇인가를 곁에 서있는 자기 아내에게 조차 묻지 못했다고 합니다.
소리치고 발악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은, 자유라는 이름하에 수많은 글을 남기고,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던 무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였습니다. 이것이 그의 말로였습니다.
1980년 4월 16일 입원한지 한 달만에 사르트르는 병원에서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르트르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에 프랑스의 신문들이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사르트르가 왜 이렇게 죽어야 하는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렇게도 외쳤던 그의 말로가 이렇게 비참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사르트르에게 돌아갈 본 고향이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대서특필했던 것입니다.
그 본 고향이 어디겠습니까?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사르트르는 하느님을 믿지 않고 살았기에, 죽음이 두려운 존재였고, 불안과 공포 속에서 죽었습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우리에게는 돌아갈 본고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합니다. 그 본고향으로 잘 돌아가기 위해 현세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에 마음을 두고 살아갑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진복선언도 같은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마태 5,3~10 참조)은 하느님으로부터 행복을 약속받습니다.
이 사람들은 현세만을 위해 살지 않고, 현세에만 희망을 두고 살지 않고, 하느님에게 마음을 두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유한 사람들, 지금 배부른 사람들, 지금 웃는 사람들, 지금 칭찬받는 사람들’ (루카 6,24~26 참조)은 불행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현세만을 위해 살고, 현세에 마음을 다 빼앗기며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느님이 있어야 할 자리에 세상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어 더 이상 하느님은 함께 하실 수 없게 됩니다.
나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혹 하느님을 자기의 중심에서 밀어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부유하고, 배부르고, 남에게 칭찬받기 위해서만 부지런히 노력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신앙인은 현세만을 위하여 희망을 걸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본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묘지를 돌면서 묘비를 읽고 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묘비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는데, 그 묘비의 글이 흥미로웠기 때문입니다. 묘비의 글은 세 줄이었습니다.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었소."
‘무슨 이런 묘비가 다 있는가’하고 웃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줄을 읽고 난 뒤에 순간 ‘이게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곳에 서서 그렇게 웃고 있었소."
마음이 콱 찔려옴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자세를 가다듬고 긴장된 마음으로 세 번째 줄을 읽었습니다. "이제 당신도 나처럼 죽을 준비나 하시오."
형제 자매 여러분!
본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지금부터 철저히 하며 살도록 다짐합시다. 현세가 아니라 하느님께 마음을 두는 삶을 통해, 나눔과 섬김의 삶을 통해, 천상에서 누릴 참된 행복을 꿈꿔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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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는 천상을 희망한다>
위령의 날을 맞이하여 우리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이들이 하느님의 자비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언젠가 맞이할 죽음에 두려워하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천상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의 ‘사주’를 믿었습니다. 청년 시절에 한번 위험한 고비를 넘길 것이라는 사실과 얼굴이 곱상한 여인과 결혼할 것이라는 말이 용케 들어맞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주에 의하면 그한테는 삼십 대에 재물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믿고 어디 가서든 큰소리를 쳤습니다. ‘두고 봐라. 내 나이 마흔을 넘기 전에 너희와 앉은 자리가 달라질 것이다.’ 서른 고개를 막 넘었을 때 일자리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어떤 사주를 지닌 사람인데 남의 밑에 가서 일하겠느냐?’ 하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몇 년 후에는 친구가 동업하자고 했습니다.
그는 웃으며 거절했습니다. ‘이 사람아, 내가 그런 시시한 장사를 할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는가?’ 그리고 또 몇 년이 흘렀습니다. 해외로 갈 기회가 열렸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나에게는 돈복이 터지게 되어 있다구.’ 하면서 밑이 터지게 가난하게 살다가 그만 일찍 죽게 되었답니다.
그는 저승사자에게 항의했답니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나한테는 재물복이 예정돼 있었잖습니까?’ 그러자 저승사자가 한심스럽다는 얼굴로 대꾸했습니다. ‘우리는 기회만을 제공할 뿐이다. 직장 운 한번, 장사 운 한번, 무역 운 한번, 이 세 번의 기회를 다 주었었네’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기회가 주어집니다. 하느님을 섬기고 주님의 뜻대로 살면서 주님께서 원하는 것을 할 기회가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도 욕심을 부리거나 요행을 바란다면 그 기회는 그저 스쳐 지나갈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편한 쉼이 아니라 자기 힘에 알맞으면서도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쉼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힘들고 어려운 모든 이에게 그 쉼을 약속하십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30) 하시는 예수님의 위로를 받는 것은 하루의 생활을 봉헌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가능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하면 주님의 멍에는 틀림없이 우리에게 위로와 기쁨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 성 엘리지오는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오히려 주님이 정하신 때에 죽기를 원한다. 이는 죽음으로써 만이 하늘에 계신 그리운 아버지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당당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지금 나에게 주어지는 순간순간의 기회들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편히 쉬게 하신다.’라고 약속하심이 우리에게는 큰 위로요, 희망입니다. “죽음은 고통스러운 길이지만 보이지 않는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길입니다.”(성 안눈시아따)
그러므로 죽음을 결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직 주님의 뜻대로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찾아 최선을 다할 수 있음을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사람들은 언짢은 죽음을 두려워하나 언짢은 삶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라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씀이 새롭습니다. 더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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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매일 게임만 하고 전혀 공부를 하지 않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아이 아빠는 공부하지 않고 게임만 하는 자녀의 모습에 화가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 공부 안 하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
그러자 아이도 큰 소리로 말합니다.
“잘 알아. 공부 안 하면 시험 점수가 잘 나오지 않겠지. 그러면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고, 또 제대로 된 직장도 얻지 못할 거야. 연애도 못 하고 내 집을 가질 수 없겠지. 그래도 공부는 재미없어.”
이 아이는 공부 안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 것일까요? 모르는 것일까요?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잘 안다면 공부를 안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공부를 학창 시절에 그리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신부가 되고나서 또 신부답게 살기 위해서는 공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부의 무게를 느끼면서 공부를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알면서도 행동하지 않으면 정말로 아는 게 아니다.”라는 스티븐 코비의 말이 떠올려집니다. 진정한 앎은 행동을 반드시 따르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교리를 통해 또 성경 말씀을 통해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과연 진짜 앎일까요? 행동하지 않으면 입으로만 안다고 할 뿐 진짜 아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의 중요성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행동으로 나의 진짜 앎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갑자기 들이닥친다고 하셨습니다. 그 시간과 그 장소를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늘 깨어 준비하라는 것이 주님의 말씀이지요. 오늘 복음 말씀도 그런 점을 볼 수 있습니다. 잘 준비한 처녀는 슬기로운 처녀로, 준비하지 않은 다섯 처녀는 어리석다고 이야기하십니다. 그 준비는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우리의 행동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행동을 통해 주님을 제대로 알아갈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은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또 우리 자신의 죽음을 앞당겨 준비하는 위령의 날을 지내고 있습니다. 이 위령의 날에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잘 맞이하려는 우리의 행동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묵상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입으로만 준비해야 한다고 말만 하는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입이 아닌 몸으로 행동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제대로 알 수 있고, 또 그 주님을 잘 맞이하는 지혜로운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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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모든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둘째 미사)
<영원한 쉼을 향하여>
마태오 11,25-30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멍에를 메어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영원한 쉼을 향하여>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오 11,29ㄴ-30)
주님께서
몸소 지워주신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짐을 기꺼이 지고
오늘도
영원한 쉼을 향하여
가슴 벅찬 길을 나섭니다
짐이 무거울수록
발걸음은 가볍습니다
주님께서
몸소 마련해주실
영원한 쉼은 그만큼
가벼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몸소 메어주신
나눔과 섬김과 살림의
멍에를 오롯이 메고
오늘도
영원한 쉼을 향하여
가슴 벅찬 길을 나섭니다
멍에가 갑갑할수록
발걸음은 편합니다
주님께서
몸소 마련해주실
영원한 쉼은 그만큼
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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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3년 11월 02일 - 위령의 날
- 기도로서 위로하는 우리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위의 세 말씀으로 나눔을 하려고 하는데 위의 세 말씀을 연결하여 결론과도 같이 정리하면 이렇게 되겠습니다.
-나는 반드시 보리라!
-구원을 받게 되리라!
-나는 꼭 행복하리라!
우리도 이래야 합니다. 죽어서라도 꼭 주님을 보고야 말리라 마음먹어야 합니다.
왜 그렇게 꼭 봐야 합니까?
그것은 오늘 욥기에 의하면 그분이 먼지에서 일어서는 분, 곧 부활의 주님이시고 오늘 로마서에 의하면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신” 분, 곧 우리를 죽도록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욥처럼 사는 동안 고생고생하였는데 고생만 하고 주님마저 못 뵈면 너무 억울하기 때문이고, 이렇게 고생했으니 주님 뵙는 것을 상으로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하는데 사랑과 부활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우리가 고통을 사랑으로 보상받지 못하고, 고생을 부활로 보상받지 못한다면 어떻게 살고 왜 삽니까?
사랑과 부활의 주님이 안 계신다고 믿고 그래서 고통을 사랑으로, 고생을 부활로 보상받지 못한다고 그리 믿는 사람은 그래서 더 이상 삶을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자살을 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과 부활과 구원의 하느님 때문에
-성인들의 통공을 믿고
-육신의 부활을 믿고,
-영원한 사람을 믿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만 행복하면 되겠습니까? 앞서 봤듯이 우리가 믿는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이 없도록, 우리의 행복 안에 그들의 불행을 품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불쌍하고 불행한 모든 영혼을 품지 못한다면 가까운 이들의 영혼이라도 우리는 품고 기도해야 합니다.
위령이란 불쌍하고 불행한 영혼을, 살아있는 영혼이건 죽은 영혼이건 기도로서 위로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며 그들을 위해서 적어도 위령 성월인 11월 한 달만이라도 아니 오늘만이라도 기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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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 것인가?>
-깨어 준비하며 주님을 기다리는 삶-
"내 영혼,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애타게 그리건만 그 하느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오리까."(시편42,3)
천주교 대구대교구청의 묘지 양쪽 입구에는 ‘오늘은 나, 내일은 너(Hodie mihi Cras tibi)’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오늘은 내가 죽지만, 내일은 네가 죽는다’라는 뜻으로 메멘토 모리(Men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는 라틴어)와 비슷한 말입니다. 특히 위령의 날 오늘 마음에 담고 지내시기 바랍니다.
어제 11월 위령성월의 첫날은 모든 성인 대축일이었습니다. 하느님의 희망과 위로를 반영하는 성인들이기에 위령성월은 “희망과 위로 성월”로 또 “성인성월”로 불렀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전례력으로 대림시기를 앞둔 마지막 시기 11월은 성인성월로 생각해 모두가 성인들을 기리며 성인들처럼 한 번 살아보자는 것입니다.
어제 교황님은 수요일 베드로 광장에서 삼종기도후 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 짧은 강론에서 “우리는 더불어의 여정에 선물인 거룩함으로 불리었다.” 말씀하시며 새삼 우리의 삶은 성화의 여정임을 강조하셨습니다. “거룩함은 ‘행복한 삶’을 위해 모두에게 주어진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믿는 이들의 삶은 날로 행복해지는, 노화의 여정이 아닌 성화의 여정이요, 저물어가는 여정이 아니라 여물어가는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교황님은 또 11월 위령성월의 기도지향으로 교황인 자신을 위해 기도해줄 것을 청했습니다. “여러분의 기도는 나에게 힘을 주고 내가 성령께 경청하며 교회와 동행할 때 분별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말씀하셨습니다. 이어 “교황이 된다는 것은 ‘하나의 과정(a process)’으로, 그는 목자가 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가게 된다. 이런 과정중에 그는 더욱 사랑이 많아지고, 더욱 자비로워지고, 그리고 무엇보다, 매우 인내하시는 하느님 우리 아버지처럼, 더욱 인내하게 되는 것을 배우게 된다.” 말씀하셨습니다. 배움의 여정중에 끝없이 인내하며 끊임없이 내적으로 성장해야 할 우리의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은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며 기도하는 위령의 날이자 우리의 삶을 깊이 성찰해보는 날이기도 합니다. 삶과 죽음은 하나입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물음은 어떻게 살 것인가? 물음으로 직결됩니다. 매일 생미사와 더불어 연미사를 봉헌하며 죽음은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묻게 됩니다.
죽음이 있어 삶은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죽음이 없이 끊임없이 연장되는 삶이라면 도저히 삶이 선물임을 모를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수십년전 소스라친 깨달음이었고 지금도 그 체험은 생생합니다. 응접실안 은은한 향기를 발하던 동양란이 향기를 그쳤고 잘 들여다 봤더니 꽃이 떨어 진것입니다. 저는 난향기는 늘 당연한 듯이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알아봤더니 1년 지나야 다시 핀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소스라치게 깨달은 것이 “삶은 선물이다.”라는 자각입니다.
꽃이 지자 꽃향기가 선물임을 깨달았듯이 죽음이 있어 비로소 삶이 귀한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아파봐야 건강이 선물이었음을 깨닫는 이치와 똑같습니다. 이런 자각이 하루하루 찬미와 감사와 기쁨으로 선물인생을 살게 하고. 이렇게 살 때 찬미와 감사로 선종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물같은 삶에 선물같은 선종의 아름다운 죽음일 것입니다.
곱게 물들어가는 단풍처럼 곱게 사랑으로 물들어가다 단풍지듯 홀가분한 떠남의 죽음일 것입니다. 봄꽃도 아름답지만 가을 단풍의 격조는 더 뛰어나고, 일출의 찬란도 좋지만 일몰의 장엄함은 더욱 감동적이듯 이런 죽음도 가능할 것입니다. 아주 예전 25년전 써놨던 두편의 시가 생각납니다. 세상 떠나기 몇 년전 노년의 마인라도 수사님이 가을마당 낙엽을 쓰는 모습을 그린 “노수사老修士님”이란 시입니다.
“깊어가는 가을
낙엽 쓰는 노수사님
묵묵히 삶의 뒤안길에서
낙엽과 함께 집착의 쓰레기들 말끔히
쓸어내는 노수사님
그대로 무념無念, 무욕無慾, 무심無心의 가을이었다, 자연이었다”-1998.11.9.
이어 다음날은 “죽음”이란 시를 썼습니다.
“땅 위를 덮고 있는
고운 단풍잎들
두려워하지 말라
죽음은 귀환歸還이다, 해후邂逅다, 화해和解다, 구원救援이다.
‘수고하였다. 내 안에서 편히 쉬어라.’
들려오는 자비로운 하느님 아버지의 음성이다”-1998.11.10.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 물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절박한 물음으로 직결됩니다. 삶은 양이 아니라 질입니다. 오래 많이 사는게 아니라 하루하루 거품이나 환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제1독서의 지혜서의 가르침이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영예로운 나이는 장수로 결정되지 않고, 살아온 햇수로 셈해지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예지가 백발이고, 티없는 삶이 곧 원숙한 노년이다. 짧은 생애 동안 완성에 다다른 그는 오랜 세월을 채운 셈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께 선택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거룩한 이들을 돌보신다.”
이런 깨달음이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본질적 깊이의 찬미와 감사의 지혜로운 삶을 살게 합니다. 모든 것이 은총이며 감사임을 깨달아 깨어 준비하며 주님을 기다리며 살게 합니다.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이미 주님과 일치된 존재들이기에 늘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께서 이렇게 깨어 준비하며 살도록 우리를 도우십니다. 제2독서 로마서에서 바오로 사도의 고백은 바로 우리의 고백이 됩니다.
“우리는 압니다. 우리의 옛 인간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이 소멸하여, 우리가 절대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죽음은 다시는 우리 위에 군림하지 못합니다.”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의 일치의 삶을 살게 되었으니 용기백배 힘이 납니다. 세례성사에 평생 계속되는 성체성사,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깨어 준비하며 주님을 기다리는 종말론적 삶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모두 유비무환, 오늘 복음의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전혀 준비되지 않았던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 신랑이 도착했을 때 얼마나 놀랍고 당황스러웠을까요? 전혀 죽음이 준비되지 않았는데 죽음을 맞이한다면 역시 후회되는 일이 한둘이 아닐 것입니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자.”
성녀 젤투르다의 임종어이기도 합니다. 준비하며 기다렸다 신랑을 맞이했던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잘 준비했다 죽음을 통해 주님을 맞이한 젤투르다 성녀였습니다. 준비하고 있던 슬기로운 처녀들은 구원의 혼인잔치에 입장했고, 뒤늦게 등잔을 준비하며 돌아 온 다섯의 어리석은 처녀들 앞에 문은 닫혔고 주님의 냉엄한 말씀이 마음을 얼어 붇게 합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 후회해도 너무 늦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이 또한 우리에게는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나를 아시는가?’ 에 앞서 ‘나는 주님을 얼마나 아는가?’ 끊임없이 자문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사랑할수록 앎도 깊어집니다. 회개하여 즉시 영혼의 기름 등잔에 신망애의 기름을 가득 채우라는 말씀이요, 늘 유비무환의 준비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깨어 준비하며 기다렸다가 주님을 맞이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복음의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늘 깨어 준비하며 기다리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5,13)
"하느님 찬양하라, 내 영혼아, 한평생 주님을 찬미하라. 이 생명 다하도록 내 하느님 기리리라."(시편 146,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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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구원 기도!>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 교회는 오늘 성당에서 혹은 묘지에서 죽은 모든 이들을 기억하는 '위령미사'를 봉헌합니다. 그러니 오늘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지상교회와 연옥교회와 천상교회가 소통하는 날'입니다.
'산 이들이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것'은 '지상교회와 연옥교회가 소통하는 모습'이며,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구원하는 거룩한 행위'입니다. 연옥에서 단련받고 있는 영혼들은 '산 이들의 구원기도'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합니다. 그들 스스로 구원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11월 1일 모든성인대축일부터 11월 8일까지 묘지를 방문하여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서 기도할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 전구기도와 하느님의 자비'로 죽은 이들이 하느님 품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5,20)
이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은총에서 비롯됩니다. 이 믿음과 은총으로 우리는 죄로부터 해방됩니다.
나의 이 믿음과 나에게 쏟아진 이 은총이 죽은 이들의 구원을 위한 도구로 쓰여집니다. 살아있는 우리가 지니고 있는 이 영적 도구로써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납니다.
11월 '위령성월'과 오늘 '위령의 날'을 맞이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특별한 자비가 연옥에 있는 영혼들에게 내려지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청하면서, 그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합시다!
"믿는 이들의 영광이시며 의로운 이들의 생명이신 하느님, 성자의 죽음과 부활로 저희를 구원하셨으니, 세상을 떠난 하느님의 종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부활의 신비를 믿은 그들이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본기도)
"주님,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들에게 비추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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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RHMQaZCq3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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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 9)
아름답던
단풍도
낙엽이 됩니다.
모든 자연의
이치이며
순리입니다.
죽음을 잊고
살기에
삶의 소중한
매 순간들을
놓치며 살아갑니다.
태어남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습니다.
늦고 빠름의
차이만
있을 뿐
하느님께서 주신
공평한 죽음은
어느 사람에게나
똑같이
적용됩니다.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느님 안에서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죽음을 위로하는
기억과 기도는
서로의 마음을
이어줍니다.
기억과 기도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연옥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며
우리자신을
보게됩니다.
사랑은 기도로
실천으로
실현되어야 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일하지 못하기에
사랑이
아픈 것입니다.
아프면
묶이게 되고
묶이면 서로에게
따스할 수
없습니다.
삶과 죽음이
하느님 안에서
사랑으로
조화를 이룹니다.
영원히
존재할 수 없는
우리 삶입니다.
삶과 죽음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위령의 날입니다.
하느님께로
갈 수밖에 없는
우리 삶을
봉헌합니다.
삶과 죽음
기억과 기도
사랑과 봉헌
하느님과 나
이 모든 것은
만남으로
하나가 됩니다.
죽은 모든 이를
위해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기도입니다.
기도로
나눌 줄
아는 사랑과
낮추는 마음으로
우리 모두의
죽음을 기억합시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간절한 기도를
기억합시다.
우리가 누구이며
누구여야
하는지를
깨닫는
위령의 날
새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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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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