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희덕의 <뿌리로부터> ”
뿌리로부터
나희덕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제는 뿌리보다 줄기를 믿는 편이다
줄기보다는 가지를,
가지보다는 가지에 매달린 잎을,
잎보다는 하염없이 지는 꽃잎을 믿는 편이다
희박해진다는 것
언제라도 흩날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뿌리로부터 멀어질수록
가지 끝의 이파리가 위태롭게 파닥이고
당신에게로 가는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당신은 뿌리로부터 달아나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
뿌리로부터 달아나려는 정신의 행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허공의 손을 잡고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
뿌리 대신 뿔이라는 말은 어떤가
가늘고 뽀죡해지는 감각의 촉수를 밀어올리면
감히 바람을 찢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무소의 뿔처럼 가벼워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는 뿌리로부터 온 존재들,
그러나 뿌리로부터 부단히 도망치는 발걸음들
오늘의 일용할 잎과 꽃이
천천히 시들고 마침내 입을 다무는 시간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미 허공에서 길을 잃어버린 지 오래된 사랑
* 나희덕 시집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문학과지성사)에서 발췌.
* ‘뿌리에게’에서 ‘뿌리로부터’의 거리는 무척이나 멀다. 그야말로 ‘뿌리로부터 멀어지기 위한 싸움’이 느껴진다. ‘뿌리에게’가 스무 살에 쓴 시이고, ‘뿌리로부터’가 마흔여섯에 쓴 시이니 물리적인 세월의 거리가 있겠지만 앞의 시가 ‘뿌리와의 합일’을 꿈꾸면서 ‘대지의 사랑과 헌신’을 보여준다면, ‘뿌리로부터’는 앞서 말했듯이 멀어지기 위해 허공에 맡기려는 지향점을 말해준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한마디로 굳건하게 뿌리를 내리기보다 얼마나 가늘고 뾰족한 촉수를 밀어올리느냐가 중요하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길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바람을 찢으며 온몸으로 흩날리기도 하는 존재여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