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시 신북읍 발산리 입구에는 ‘맥국(貊國) 터’라는 표석이 있다. 표석에는 삼국시대 이전 이곳이 맥국의 중심지라는 내용을 적어 놓았다. 이곳에서 마을 산세를 살피면 뒤로는 산들이 병풍처럼 서 있고, 앞에는 율문천이 흐르며, 좌우로는 청룡과 백호가 원을 그리며 큰 보국을 형성했다. 보국 가운데는 넓고 평탄한 평야가 있고, 외곽으로는 소양강과 북한강이 흘러 외부와 통하는 길이 확보돼 있다.
발산리로 들어가면 맥국과 관련된 여러 흔적들을 볼 수 있다. 우선 마을 뒷산 이름이 발산(鉢山)이다. 산의 모습이 중의 바리(밥그릇)처럼 둥글게 생겨 붙여진 것이다. 이 산을 마을 사람들은 맥국산 또는 왕대산이라고도 부른다. 발산 아래는 궐터라고 부르는데 왕궁이 있었다고 한다. 삼한골에서 율문천까지 길게 뻗은 맥뚝 제방은 왕궁을 둘러싼 성터였다. 궐터마을 남서쪽에 있는 지석묘는 맥국 지배자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남쪽 우두산은 맥국으로 들어오는 초입으로 정상에 토성을 쌓고 왕궁을 방어한 흔적이 있다.
맥국이 언제부터 이 지역에 자리 잡았는지 정확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동북아 최강자였던 고조선(BC 2333년~BC 108년)이 힘을 잃어가던 시기로 추정한다. 당시 한반도 전역에는 많은 부족국가가 있었다. 경기·충청·전라도 지방에는 목지국을 비롯한 54개의 소국, 경남 일대에는 구야국 등 12개, 경북 일대에는 사로국 등 12개 소국, 오늘날 중국 길림성 장춘 일대는 부여, 함경도 함흥일대는 옥저, 강원도 원산에서 강릉에 이르는 동해안 지역에는 동예, 그리고 동예의 서쪽 춘천지역에는 맥국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부족국가들은 1세기를 전후해 강력한 고대국가로 흡수됐다. 목지국 등은 마한을 거쳐 백제로, 구야국 등은 변한을 거쳐 가야로, 사로국 등은 진한을 거쳐 신라로, 부여·옥저·동예 등은 고구려로 흡수·통합됐다. 단지 맥국만은 가장 늦게까지 남아 신라 선덕여왕 6년(637)에야 신라로 편입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대해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춘천은 산이 높고 골이 깊어 인구와 산물이 적으므로 주변 강국이 내버려 둬서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맥국의 지형은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풍수의 이론체계인 용·혈·사·수·향으로 분석해보면, 첫째는 용이 크고 장원하다는 점이다. 금강산 남쪽 매자봉에서 뻗은 해발 1천m가 넘는 용맥(산맥)이 대암산, 도솔산, 사명산, 부용산 등을 일으키며 먼 거리를 달려 이곳의 주산인 수리봉(656m)을 세웠다. 용맥을 사이에 두고 북한강과 소양강이 흐른다.
둘째는 혈의 결지조건인 산세가 순하다는 점이다. 수리봉까지 험했던 산세가 현무봉인 발산으로 내려오며 순화됐다. 마을은 산맥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흙은 밝고 깨끗하다. 다만 아쉬운 것은 산세가 너무 순화돼 강한 기운이 없다는 점이다. 사람도 너무 순하면 큰일을 도모하지 못하듯 맥국이 강력한 고대국가로 발전하지 못한 까닭이라 하겠다.
셋째는 사가 사방을 둘러싸고 있다는 점이다. 사는 주변 산을 말하는데 뒤에는 현무, 앞에는 주작, 좌는 쳥룡, 우는 백호가 크게 원을 그리듯 보국을 형성했다. 산들이 겹겹으로 감싸면 바람을 막아 보국의 기를 안정시킨다. 또한 외부로 쉽게 노출되지 않고 적의 침략 시에는 방어에 유리하다. 맥국이 부족국가로 오랫동안 남을 수 있었던 이유다.
넷째는 수가 풍부하고 대강수가 합수한다는 점이다. 도시 내부를 흐르는 율문천은 발원지가 많고 수량이 풍부하다. 이를 풍수에서는 내당수 또는 명당수라고 하는데 주로 생활 및 농사 용도로 쓰인다. 외곽에는 소양강과 북한강이 흘러와 의암호에서 합수한다. 큰 강은 외부와 통하는 교통로 역할을 한다. 그래서 문명 발상지 대부분의 도시들은 두 강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다섯째 향은 앞쪽 하늘이 넓게 열려 있어서 햇빛·달빛·별빛이 잘 들고 있다. 이런 지형은 기후가 순조로워 건강하고 농사도 잘 된다. 결론적으로 맥국 터는 강력한 힘은 없어도 오랫동안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땅이라 하겠다.
형산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