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천항
오천은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고향이다. 유년시절 아버지를 따라 큰 아버지댁에 오면, 나는 이곳 오천항의 바다에 왔었다. 오천항은 예전부터 보령 북부권의 삶과 생활의 중심지였다. 보령 북부권의 모든 길들은 오천과 통한다는 말에서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오천항에 어선과 여러 배들이 떠 있다. 예전에는 허술한 오천항이었는데, 지금은 아주 세련된 오천항이다. 나의 할아버지는 어선을 여러 척이나 운영하셨다. 나는 어릴 적에 할아버지가 운영하시는 배에 타 보기도 하고, 선원들이 바다에서 잡아온 고기들을 어선에서 받아내리기도 했다. 그리고 큰 어머니가 넉넉하게 주시는 생선들을 가지고 집으로 와서 오래도록 맛있는 반찬으로 먹었다. 또한 할아버지는 보령군 오천면 면장과 오천초등학교 교장이셨다. 나의 아버지는 부잣집의 아주 귀한 자손으로 태어나셨다. 할아버지는 보령군의 군수 자리에 오르시기 직전 갑자기 돌아가셨다. 나의 아버지는 항상 할아버지의 훌륭하신 업적을 들려주셨다. 나는 대학생 시절까지만 해도 이곳 오천 바다를 홀로 거닐곤 했다. 지금 바라보이는 저 산모롱이를 돌아 해변을 걷노라면 낯선 시골 남자의 걸음에 놀라기도 했다. 보령군 청라면 장현리 우리 집과는 먼 곳이지만 당시에는 산 능선을 타고 걸어 다녔다. 나는 아버지, 어머니 뒤를 따라 먼 길을 걸어서 왕래했다. 어머니 친정인 오천 외가에는 큰 외숙부 내외가 살고 있었다. 나를 매우 예뻐하셨다. 오천초등학교 앞에서 가게를 운영하셨는데 그 가게에 가면 외숙모는 내게 사탕과 과자를 주셨다. 추억이 어린 오천에 온 것이 꿈결 같다. 지금 나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 이곳 오천항에서 가까운 선산에 누워 계신다. 아버지를 부르며 통곡하고 싶은 심정이다. 어머니는 지금 서울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신다. 내 나이 63세, 환갑을 넘은 나이인 것을, 가는 세월을 어찌 이기겠는가. 아버지는 86세의 일기로 떠나시고, 어머니는 금년 85세 노환으로 기동을 못 하신다. 내 아버지, 어머니의 족적이 서린 오천항을 두 눈에 꼬옥꼭 담아 저장했다. 이 가을 오천 땅, 오천 바다, 오천항에 온 것은 참으로 보람되고 뜻깊은 문학 나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