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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엔솔로지 [☆길 없는 숲 여기저기☆]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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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나무 2016
[길 없는 숲 여기저기]
제3시선 11 / 책펴냄열린시(2016.00.00) / 값 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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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초대시≫ = = ===
날 저물어
김석규
훈수꾼들이 하나 둘 흩어져 가고
덕지덕지 손때 앉은 장기판
뉘엿뉘엿 햇발도 비스듬히
일수불퇴라며 실랭이질도 몇 차례
장군받아 멍군이야
스르릉 설겅 톱질은 이어지고
최고의 상수는 박수라고
손을 털며 일어서는 두 사람
어깨 구부정히 그림자가 가는
속으로
임동윤
세상 한 가운데로
왕벚나무 뿌리가 뻗어 나와 있다
보드라운 살결의 흙이 말라버리자
뿌리의 길을 가로막는 암반덩어리를 만나자
오늘은, 어둠 속으로 내몰린 것,
그때부터 나무는, 동상의 겨울을 만나고
폭풍우와 맞서는 집이 되었다
아픈 뿌리의 힘으로 꽃들은 피고
눈빛 까만 버찌가 달리고
참매미의 울음이 마른 껍질로 남았다
폭설이 뿌리 바깥을 꽁공 얼린다
세상은 늘 그늘이 많은 법,
풀벌레 울음도 사라진 바깥
그곳은, 네온불빛 현란한 울음의 도가니
두 눈 벌겋게 뜨고 코가 베어지는
그런 바깥은 없다
오직 눈 감아야 할 오늘이 있을 뿐
아아, 눈이 내렸으면 좋겠다
상처투성이 바깥을 덮었으면 좋겠다
구절초
홍일선
일찍 핀
오뉴월 꽃들
염천 뙤약볕 생명들
늦으막히 꽃망울 터뜨리시는
그 꽃 부러웠으리
밭 끄트머리
부꾸러운듯 수줍은듯
꽃피워 모여 사는
구절초 일가
조용히 답했으리
우리 모두
함께 외로웠기에
함께 목말랐기에
더불어 짓밟혔기에
이 땅에 우리 있는 거라고
근황
복효근
사람의 말 같지 않아야 시가 되고, 시로 여겨지고
사람 같지 않아야 시인이 되고, 시인처럼 여겨진다면
시 같지 않아야 사람의 말 같고, 말로 여겨지고
시인 같지 않아야 사람이 되고, 사람처럼 여겨진다면
시의 나라는 슬픈 것인가, 기쁠 것인가
가마구마구 시들이 뛰어다니고
시인들이 낙엽처럼 많은 나라에서
시를 쓸 것인가, 시인이 되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가슴에 손을 얹는 날이 있다
물꽃 아래
김수우
일 톤 트럭에 실려온 도다리 이십 킬로, 저울에 올라갔다가 수족관에 쏟아졌다 퍼덕였다 미끌어졌다 첨벙거렸다 풍덩 흘러 들어갔다 우무럭거렸다 꿈벅거렸다 아득해졌다 먹먹하다 눈송이처럼 아스라하다 시무룩하다 고요하다 링겔에 걸린 절망도 저녁식탁의 숟가락도 장례식도 장례식의 구두들도 밥알처럼 담긴 별도 막막하다 잠잠하다 희미하다 깊은 감옥 짧은 면회처럼 찬란한 지느러미, 하얀 거품을 짓는다
바다로 가는 버스가 까마득히 내 앞에 도착한다 그런데, 길이 없다 물꽃이 진다 바다가 사라졌다 아무리 태풍이 다그쳐도 눈시린 햇살이 졸라도 기도가 저리 절실해도 저도다리들, 바다로 돌아갈 수 없으니, 결코,
욕
신정민
목욕하길 끔찍하게 싫어하는 노파는
몇 타래의 욕 뭉치일까
여기저기 꼬집히며
홀쭉해진 몸을 씻긴다
마술사의 입에서 잡아당기는 리본 같이
알록달록한 욕들을 풀어내는 노파
사는 동안 울고 웃어야할 양이 정해져 있듯
사는 동안 뱉어내야할 욕도 정해져 있는 것
어머니가 욕하는 걸 한 번도 본 적 없다는 자식들의 말을 믿는다
욕까지 씻길 수 없어
욕을 받는다
나 또한 사는 동안 들어야할 욕이 있어
군말 없이 받아 삼킨다
=== = = ≪회원시≫ = = ===
소금
장진구
달구어진 토판에 허기진 몸이
움돋이 몸짓으로
바람에 날을 세웠다
산나물 상채기마다
스며들어
더운 밥그릇 온기로
하루를 열고 있다
소금 꽃 피우던 빛바랜 흔적들이
짠맛으로 돋아나 서늘한 아픔이다
소주 한 잔을 마셨다
면도자국 검게 돋은 편육 한 점
왕 소금에 찍어
목에 걸린 거스러미 걷어내었다
소금은 바다 위에 피는 구름이다
가슴속에 이는 불꽃
이마를 지나는 바람이다
숨길 노래하는 하늘이다
천도재
박무섭
대웅전 법당 앞에
합장을 하고
영가를 보냐는 살붙이들
극락왕생을 기원한다
사십구재 올리던 날
그 스님 발원문 듣고
백합꽃 화원에서
홀연히 날아간 극락조
그 새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향연香煙 속 살붙이들
슬퍼하는 가슴 속에 날아간 극락조는
온전히 흐르는 한 줄 혈관도 없이
발자국 그림자가
나날이 찍혀있다
소나기
노장현
매지구름이 물쿠어 햇빛을 가리우고
구름 밖에서 섬광이 요란한데
우레는 천지를 호령한다
깽갱이매미는 놀라 울음 그치고
깡마른 땅에 열기 가득 찬데
작달비는 씨실을 엮어
개울물 손잡고 술래 잡이 한다.
빗방울은 화음을 내고
처마 끝 빗물에 사랑 싣고
나뭇잎 고개 들고 너울거린다.
겨릅대 지붕 밑 콩 볶는 소리
옛 이야기에 정이 피어난다.
길섶에 얼굴 가리우고 미소 짓는
수줍은 백화등꽃 향기에
소낙비 발자국 소리 남기고
멀리 사라진다.
해후
박재곤
걸었다
그대와 마주치다
몸을 씻어 말리던
물봉선 꽃들이
출렁이며 다가온다
일제히 속삭이는
그대 입술
혼자서 골짜기 넘어가는 구름
영마루에 누워서
경전을 읽는다
바람은 바람 길을 따라가고
남녘 사투리만
가을 산 속에 남았다
젖몸살
조정이
흰두리가 새끼 세 마리를 낳았다
천방지축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것이라 여겼는데
삼복더위에 부른 배를 바닥에 깔고 끙끙 대더니
품속에 똘똘한 수놈 셋을 품고 있다
눈망울 까만 흰둥이들 어미젖을 빨고 있다
언제 쯤 젖줄을 끊는지도 모르는데
이웃에서 강아지 키우고 깊다고 왔다
새끼 보러 왔다는 걸 어미가 아는 걸까
눈에 익은 이웃을 막아서며 기를 쓰고 짖어댄다
울음으로 벽을 치고 있는
저 진한 핏줄을 무엇으로 자르나
퉁퉁 불은 젖을 바닥에 문지르며
목젖 내려앉은 울음마냥
흰두리, 젖은 목소리를 내 걸고 있다
징 할머니
강영환
춘천에 사는 이희월 할머니(77세)는
한 밤 중에 밭에 앉아 징을 친다
뜯어먹히는 콩잎을 지키기 위해
고라니가 밭가에 와서 꽥괙거리면
할머니도 고라니를 향해 꽥꽥거린다
그놈도 섣불리 콩밭을 탐하지 못하리라
고무신도 태워 걸어 놓고
미장원에서 얻어 온 머리카락도 걸어 놓는다
인적을 피우기 위해 밤새우는 일이
하루 이틀이 아니다 이희월 할머니
주름살이 괜히 생겨난 것이 아니다
꼬부라진 허리를 펴지 못하고
고라니와 눈 맞춰가며 고라니를 보살피면서
날 새는 일에 이력이 났다
광장
정주영
광장은 아우성이다
용오름 하던 푸른 함성
길 따라 바다로 흘러갔지만
그해 유월, 서면로터리
낙동강에서 궐기한 개구리들
광장에 모여 부르던 그 노래
지금도 귀에 걸려 잇다
‘대머리야 대머리야
네 머리를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
떼 창에 놀란 페퍼포그 차량은
지랄탄을 일제히 쏘아 올리고
때 아닌 자욱한 살충제에
끝내, 하늘마저 통곡했던 그날…
세월은 갔어도
기억은 지문으로 남아있다
씹어야 맛이 난다
공연우
아침 이슬이 깨기 전 움직이는 손
평생을 집밥 차리는 일에 닳고 닳아
일흔 다섯 번째 겨울
멀리 와서 되돌아 볼 때
씹는 일이란 예사롭게 여기지만
덜 씹히면
깊은 사랑도 가시처럼 걸리고
깊은 파도 소리도 듣지 못한다
손맛은 거짓을 모른다
알뜰한 손길이 달 속 같이 뜬다
뜻밖에 철이가 만들어 온
유자와 레몬을 섞은 차
씹을수록 묘한 단맛에 푹 빠진다
꽃 향기 속 흐르는 꿀벌 손길이
낙엽처럼 떨어진 입맛
초록잎 같은 생기를 풀어놓는다
그리움
변 송
허우적거릴수록 더욱 깊이 빠져들어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서
굴레에 갇힌 낙타의 혹이 되었다
가깝게 보이다가
멀어져가는 백미러처럼
차오르다 유산되어버린 아픔
어느 여름밤 한 줄기 바람이 되어
가슴을 할퀴고 지나가는
처음 듣는 황홀한 음악 같은 것
설레던 가슴에 푸르름 잃어버리고
낙엽 속에 묻혀간다
메아리가 산속으로 스며들 듯
모래밭에 묻혀 사라져가는
발자국 잊지 못하여
마른 눈물로 얼룩진 눈시울 숨긴다
매듭진 뿌리
박명균
사람은 모태로 태어나
한 평생 그리움을 안고
끈과 끈을 매듭지어 산다.
인연의 그윽한 향기
온자서 자라는 것 같이 보이지만
뿌리는 서로 손을 잡고 있다.
인연을 연결하는 산물
허욕 없는 매듭의 끈은
단단하고 강하며 아름답다.
만나서 사귀고
보이지 않는 뿌리가 가슴에 엉켜
두고두고 하나 되어 영원하고 싶다.
가로등
姜魏錫
서쪽이 해를 삼키면
단단해지는 어둠을 밀치며
눈에 꽃을 켜고
직립하는 신념이 붉다
저녁과 아침 사이는
구만리보다 먼 적막이다
눈 한 점 못 붙이고
귀잠에 빠지는 세상을 투시하며
골목 그림자를 지운다
길고양이 발자국 소리도 삼키고
달맞이 꽃보다 환한 웃음으로
밤夜의 보늬를 벗긴다
하얀 속살이 보이는 밤栗톨까지
고요를 먹고 사는 붉은 종소리다
늦은 시인의 기도
임화자
일요일 늦은 아침 식사 후
맑은 차 한 잔 손에 들고 창가에 앉으니
엷은 햇살과 뭉게구름까지
일렁이는 찻잔 속에서 산들바람이 인다
발바닥이 근지럽기 시작한다
하얀 머리위에 하늘을 이고
눈이 손짓하는 대로
발자국도 부지런히 뒤따른다
분홍색 블라우스는
후덥지근한 바람 냄새도 달다고 살랑거린다
눈길 머문 그림은 렌즈에 담아온다
늦은 밤까지 뒤척이다, 벌떡 일어나
하얀 종이 위에
눈도장 찍은 보물들을 하나씩 꺼내어
간결한 아름다움이 될 때까지 나열한다
눈감으며 살며시 두 손 모은다
꽃들은 모두 한 철 방이다
김경숙
수국은 헛꽃을 만들어
날아다니는 것들을 유혹한다.
이곳에서 해해거리는 날개를 탕진하라고
헛꿈 속에 몸 풀어놓으라고
어느 밤거리에서 호객하는
포주처럼
자세히 보면 꽃이 아닌
보라색 등불 같은
헛꽃,
희롱이 없는 꽃,
여름도 아닌 뒷골목을 지나던
그 불그스름한 눈빛들처럼
골목 양쪽으로 길게 늘어선
꽃 불방들처럼
두눈박이쌍살벌 두엇 날갯죽지를 잡고
한여름 수국은
꽃등으로 한창 성업 중이다.
탐닉耽溺도 탐침探針도 아닌
나는 한여름의 중간
그래도 아직까지는 탐침에 마음 가는데
잘생긴 탐닉 불러들이고 싶은데
그만, 헛꽃들 본분을 이해하고 만다.
그러고 보니
꽃들은 모두 한 철 방이다.
부적
최선희
눈길에 넘어진 시어머니가
자리보전하고 누워계실 때
신문지로 싼 뭉치를 쥐어 주시며]빨리 가방에 넣으라신다
“에미 손가락에 맞게 만들어 끼라”
속삭이듯 말해 얼결에 넣어온 물건을
집에 와서 풀어보니 금가락지 한 쌍이다
반지 하나 없는 손이 안쓰러웠나]
안쪽이 닳아 얇아진, 용트림이 희미해진 반지가 헐겁다
그대로 서랍 속 깊숙이 넣어주었던
반지를 다시 꺼내 본다]
오래 묵은 반지에서
그 길로 가신 어머니, 단내가 난다
여전히 헐거운 반지레 줄을 달아
목에 걸었다
심장에 가 닿은
어머니가 편안해졌다
풀꽃 입은 외도
손삼현
뭍을 떠난 쾌속선
나는 듯 날리는 듯
푸른 섬에 휘파람으로 닿았습니다
괭이갈매기 떼
작은 어선 따라 다투어 날고
돌고래 어린 무리들이
숨바꼭질 하듯 부딪치는 뱃전
유람선이 일으키는 포말
수평선에 닿았습니다
유람선 확성기 유행가를 타고
보타니아에 오른
부산 갈매기들은
가르마 길 작은 봉우리를 오른
갯바람 향은 짭쪼롬 비릿해요
뭍에 붙어살던 찌든 발 뿌리들
해초 짙은 향은 발가락 사이로 파고 듭니다
남쪽에서 온 풀꽃 이름들
듣자 마자 잊어버린
진한 원색을 입었네요
키 높은 메다쉐콰이아
거센 풍랑風浪 보듬고
조각된 향나무들은 파도를 잠재우는
어머니입니다
꽃별
정정순
하늘꽃밭에 자주 간다]
늪에 빠진 별에 숨어
소곤거리는 소리 들으면
힘을 주전해주는 향기
그래 보고 싶었어
검은 커텐을 젖힌다
메시지가 가슴에 들어와
종일 붉은 꽃이 핀다
초승달이 지나가다 꽃밭에 숨어든다
별과 손잡고 춤추며
온누리에 씨 뿌린다
아침 대문 찰에
별꽃이 환하게 피어 있다.
혀의 비밀
박윤자
송곳니에서 튀는 말이 춤이다.
벼랑 끝에 몰린 독사는 독을 비밀번호로 푼다
날마다 피우는 독향에 혀는 말린 손이 없다
주워담지 못하는 수많은 어깨춤사위
분분하는 벚꽃 잎들 화살에 피 흘린다.
그림자에 발목 잡혀 나갈 수 없는 방패
검붉은 가슴만 쥐어짠다
연륜이 담긴 소프라노가수
흰 머리카락 눈이 시리다
맑은 동굴에 독을 풀어서
목울대 밀어 올린다
혀끝 오르내리며 ‘밤의 여왕 아리아’
너끈하게 쳐낸다
독이 춤이 되는 너를 사모한다
기도
민정원
멈추고,
비우고,
귀 기울이기
풀벌레 날아다니고
직박구리 노래하고
나뭇잎 흔드는 바람소리
숲 어딘가 흐르는 개울물소리
아픔 숨기는 너의 신음소리
노을빛 속 뒤돌아보는 하루의 허물
별과 별사이 우주의 숨소리
기도는
그렇게 듣는 것
줄
이남훈
김씨가 줄에 매달려있다
아파트 외벽에 거미처럼 붙어 있다
줄을 잡고 싶었지만
줄 댈 곳이 없어
공중에 걸린 아슬한 줄을 붙들고 있다
그는 서녘하늘을 끌어와
노을 색을 입히는 중이다
체육공원에서 암벽등반이 한창이다
허리에 줄을 맨 클라이머들이
인공암벽을 오른다
공중에 떠 있는 모습은 같지만
질감이 서로 다른 줄
줄이 끊어졌다
허공에 걸린 줄을 놓친 김씨는
더 이상 벽을 탈 수 없었지만
암벽등반 신호는 다시 울렸다
여행 오신 매미를 보다
이리안
한 밤 중 감결
자지러지는 고음에 소리를 찾아가다
건넌방 바닥에서 비명을 지르며 뱅뱅 도는 매미
전기 위치를 누를 틈도 없이
수건으로 감싸 방충망을 여니 작게 소리내며 날아간다
날이 훤해지고 자리에서 매미 허물을 보았다
튀어나온 두 눈
텅 빈 몸 속 양 옆구리에 붙은 탯줄같은 하얀 실줄기
땅속에서 가봉해 재단사는 누구지?
뭐라고?
세상 뜰 때는 흔적이 남는다고?
책상 위 하얀 아사천 위에 놓인 매비 부조
마음속에 향을 피우고
떡과 과일과 술을 올려야하나?
알맹이에게
흉터날 저물어
신진련
빗장 닫힌 아랫배는 門이었다
찬바람 불면
첫딸의 흔적에서
봉합되지 못한 어머니의 음성이 삐걱거렸다
돈 들어 배를 쨌는데 겨우 딸이냐
여자가 여자를 낳은 자리는 왜 이리 아물지 않는지
딸아이다 품에 안길 때마다
닳아버린 나무 대문을 빠져나가는 바람처럼
감추고 살아온 문틈에서 시린 소리가 났다
슬그머니 아랫배를 쓸어본다
울퉁불퉁 문턱만 남아 있는
아이가 나온 자리
손바닥으로
오래전 첫 울음소리를 가만가만 읽는다
아들을 낳고서야 용서받은
한때 門이었던
자국
엄마 밥
정한지
密陽식당 가정식 백반을 사 먹으며
햇살 밞은 밝은 밥을 생각한다
빈 속 채웠던 밥상 따라가면
옥상에 노을 펼친 파란 대문이 있다
잠든 적 없는 문 열어주던 엄마
처진 어깨 말없는 눈길 보내면
더운 김 올라오는 둥근 밥 지어주었다
된장찌개 곁들인 희고 따뜻한 밤에
빽빽하게 숨긴 피톨같은 묵언들
“괜찮다 괜찮다”
출렁이던 빈속을 틈없이 채워
낡고 헤진 심장 조용히 꿰매주었다
지상에서 가장 비밀스런 밥상으로
어느 새 단잠 든 꿈결
나는 아침 구름으로 부풀어 둥글어졌다
아침 햇살
김원용
여기,
아침햇살은 어디로부터 오냐고
동쪽 마음에서
붉게 타오르고 있잖아
타는 빛,
그대 생각은 어디로부터 오냐고
아하,
내 마음 속으로부터 오잖아
저기,
낙엽은 붉은 비 되어 흩날리고
그대 가슴은
석양노을보다 빨갛게 물들고 있잖아
치유治癒
김주현
귓불 시린 빗속을 뚫고
기별도 없이 찾아온 기쁨이
동그렇게 몸을 말고
유리창을 타고 흐른다
미망迷妄 속에서 길을 잃어
비어버린 손안에
은빛 구슬이 하나씩 모인다
들불에 데어 쓰린 발등 위로
따스한 바람이 지나가고
쓰러져 울던 꽃잎은 다시 일어나
등불을 켠다
어제와 결별한 곳에서
이젠
내가 웃으며 서있다.
날 저물어
김순녀
곱디 고운 노을빛은
찬연한 발자국을 남기며
서산에 걸터 앉아 있다
지나버린 슬픔은
어둠 속에 감추어 두고
다시금 되돌아보지 않으련다
모진 비바람이 씻어버린 순간들
고독과 외로움도 다 나려놓고
지금 이대로
길을 걷고 싶다
해가 자취를 감추기 전
써야할 노트를 열어
하나씩 또 하나씩
행복을 그리고 싶다
매듭짓지 못한다
정명자
아버지가 보냐주신 빨간 장미 한 다발
들고 오면 달라는 사람이 많아
배달시 켰다며 너털웃음이다
꽃송이 크고 이뻐 품은 향기 맡으려는데
“꽃만 그만 보고 밥상이나 차려라”
눈길이 자꾸 꽃으로 가는 걸 참지 못하다
그만 잠에서 깼다
찌개 속에 닮아 있는 엄마 손맛 칭찬하며
먼저 간 엄마도 옆에 앉혀 놓은 듯 불러내던 아버지
한 번은 꼭 집에 모셔 갓 지은 따순 밥상으로
효도 한 번 해보리라 다짐하지만
내 집 아니면 잠도 자지 못한다는 시어머니를
우리 아버지 따뜻한 밥상 대접해 드리게
딱 하루만 모셔 줄 수 없겠냐고
동서에게 혹은 시누이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이
목에 걸려 입 박으로 나오지 못했다
‘
시집 간 딸이 차려주는 밥상 기다리다
그만 지쳐 먼 길 가신 아버지는
그 밥상이 궁금해 꿈결에 찾아왔는데
꽃에 반한 어린 딸, 밥상도 못 차렸다
오래된 집
서랑화
웅크린 먼지들이 산란을 하고
숫자에 갇힌 차가운 적막은
문지방 넘어 안방까지
빠르게 포진하고 있다
여유롭게 템포를 유지하는
긴 시계만 주인을 기다리고
태엽을 감아놓은 오르곤도
천연스레 졸고 있는 집
모질게 질러대는 전화벨이
어둠을 입은 그림자를 몰고
안방으로 안주한 냉기를
분주히 깨우고 있다
어느새 창문 틈을 헤집고
속살로 파고드는 햇살
늘어진 먼지들이 주인인양,
서투른 기지개를 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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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나무 시 3’을 내면서
영광문화예술원 시창작반에서는 금년애도 엔솔로지 <그림나무 시>를 낸다. 세 번째가 되는 이 작업이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이뤄지길 꿈꾸어본다. 함께하는 도반들이어서 큰 이견이 없는 한 이뤄질 수 있다는 생각이다.
시의 뿌리는 현실인식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시의의미를 현실 속애서 찾으려고 고심하는 회원들의 모습을 볼 때 시인으로서의 자질을 잘 갖추고 있구나하는 안도를 하게 된다. 공허한 말장난으로 현실을 외면하는 의식없는 시인이 아니라 기꺼이 현실의 부정적인 모습에 분노하는 그리고 그 분노를 삭혀서 결고운 언어로 형상화 시켜내는 시인이기를 기대한다.
비록 언어가 부족하고 의미의 깊이가 최고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할지라도 한걸음씩 다가서는 모습이 어쩌면 숭고한 자기 수련이라는 담근질을 통해 얻어지는 최선의 향기가 아닐까 한다. 삶은 결과가 아닌 과정이라고 볼 때 쉽게 결과에 매달리가보다는 먼길을 돌아서 갈지라도 과정이 주는 행복에 기꺼이 빠질 수 있는 구도자이기를 염원해본다.
시에 대한 정답은 없다. 시가 지닌 최선은 바로 자유정신이다. 어떻게 시에 접근하든 간에 그것이 객관성을 가지고 독자를 찾아 간다면 그것이 바로 정답이고 시다.
개인적 사변에만 머무르지 않는 시가 아름답다. 객관화된 개인적 사변이어도 상관없다. 누구에게나 공감을 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훌륭한 시가 도리 수 있다. 수없이 쏟아지는 많은 시들 중애서 살아남을 수 있는 시는 바로 홀로 독자들 사이에 우뚝 서서 숨 쉬고 있는 작품일 것이다. 객관성이야말로 시를 살아남게 하는 호흡일 것이다.
자신만의 시세계를 갖추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아끼지 않은 회원들의 결실을 거두는 이 책이 세상에 나가 독자들에게 위안이 되고 사랑받는 영혼이 되기를 꿈꾸어 본다.
초대에 기꺼이 참여해주신 시인분들께 감사올린다.
2016. 10.30.
그림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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