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야,[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고야 Francisco Goya,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Saturn, 1821 ~ 23년
사투르누스'는 '크로노스'로 잘 알려진 시간의 신이다. 하늘의 신 우라노스와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아들. 그는 낫으로 아버지 우라노스의 성기를 거세하여 바다에 던졌다. 그리고 누이인 레아를 아내로 맞았다. 부친을 살해했다는 죄의식과 자신 역시 자식들에게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늘 두려웠다. 그래서 자식을 낳는 족족 삼켜버렸다.
'크로노스가 모래시계와 낫을 징표로 삼고 자식을 삼키는 것은 이 땅에서 태어나는 모든 것들의 시작과 끝을 주관한다는 것의 비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스스로 자행한 부친살해와 그것이 주는 심리적 공포로 늘 불안하고 노심초사하는 부친을 상징한다. 그 불안은 제우스에 의해 현실로 드러났다.
아내 레아는 제우스를 잉태할 때 지혜를 발휘하여 제우스를 가까스로 도피시켰다. 모든 영웅이 그렇듯이, 그는 버려지고 훗날 난관을 극복하여 참다운 영웅이 되는 법. 제우스는 성장하여 토사제를 구해 크로노스에게 먹이고 잡아 먹힌 형제들을 토하게 했다. 제우스는 아버지 크로노스를 지하 세계에 감금하였다. 부친살해, 우라노스, 크로노스, 제우스의 관계에서 외디푸스 콤플렉스를 읽는다. 그러나 고야의 크로노스는 부친살해의 무의식도 아니고, 시간의 시작과 끝에 관한 것도 아니다. 다만 인간의 분노, 공포와 두려움 등 어두운 내면이 있을 뿐이다. 크로노스는 아들을 삼키는 것이 아니라 우적우적 뜯어 먹는다. 이미 머리와 오른팔이 뜯겨 나갔다. 마악 왼팔을 뜯어 먹으려는 중이다.
본래 제우스에게 도움을 준 여신은 테미스다. 테미스에 의해 세상은 혼돈의 카오스에서 질서(코스모스)를 회복했다. 그러므로 제우스가 테미스의 도움을 입었다는 것은 비로소 질서의 세계가 안정적으로 시작됐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고야는 잔인하게 살육하는 크로노스를 형상화함으로써 어떤 희망도 거짓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검은 배경은 인간의 악마적 본성과 폭력적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낸다.
고야는 이성이 잠들면 광기가 출몰한다고 경고했다. 그의 예술적 상상력은 그로부터 시작된다. 계몽주의자다운 발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