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란 무엇인가
실존주의는 20세기 전반(前半)에 합리주의와 실증주의 사상에 대한 반동으로서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철학 사상이다.
실존(existence)은 원래 이념적인 본질(Essence)과 대비하여 상용되는 철학 용어로서, ‘밖에(ex)’ ‘서 있는(Sistere)’ 현실적인 존재를 의미한다. 실존은 이념적 본질 밖에 빠져나와 있는 현실적 존재를 의미하며, 자기의 존재를 자각적으로 물으면서 존재하는 자기 자신 곧 주체적인 ‘나’를 의미한다. 실존이란 말은 어떤 것의 본질이 그것의 일반적 본성을 의미하는 데 대하여, 그것이 개별자(個別者)로서 존재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면 실존과 본질에 대하여 살펴보자.
본질이란 어떤 것이 존재하는 이유나 목적을 말한다. 책상의 본질은 무엇인가? 책을 펴고 보거나 글씨를 쓰기 위한 도구다. 의자의 본질은 사람이 앉기 위한 것이다. 신발은 발을 보호하기 위해, 우산은 비를 막기 위한 것이 그 본질이다.
그러면 인간의 본질은 무엇일까? 효도를 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일까 아니면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태어난 것일까? 그러나 인간에게는 아예 그런 본질이 없다. 인간은 무엇을 위하여 태어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존재에 관해서는 어떤 보편적 본질을 규정하는 것은 곤란하다. 인간의 생존 방법에는 미리 공통적 기준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때마다 자신의 생존 방법을 창출해가는 것이 인간다운 삶이다. 인간은 각자가 자유와 책임의 주체이며, 개개의 실존에서 자신의 본령을 발휘해야 할 존재이다.
인간이 태어날 때 무슨 본질을 가지거나, 어떤 의도를 가지고 태어난 것은 아니다. 자신이 의도하고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도 없다. 그냥 세상에 던져진 존재다. 하이데거는 이를 가리켜 ‘세계-내-존재’인 ‘현존재’라고 불렀다.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이다. 이를 인간의 피투성(被投性 Geworfenheit)이라 한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내던져진 존재이며, 아무런 본질을 갖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이것이 실존이다. 그냥 존재하는 실존이다. 실존에게는 본질이 없다. 그래서 실존은 본질에 우선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피투성은 과거의 운명이다. 그러나 지금부터의 현재는 나의 선택과 결단에 따라 달라진다. 나는 미지의 미래를 설계하고, 미래를 내 의지대로 향하여 던지는 것은 나의 자유이다. 미래의 삶을 향하여 내 스스로가 선택하고 내던지는 것이다. 이것을 인간의 기투성(企投性 Entwurf)이라 한다. 내가 기획하고 선택한다는 뜻이다. 피투성이 필연성이었다면, 기투성은 가능성이다. 인간에게 어떤 규범이나 역할, 의무 같은 본질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았다. 내 그림은 내가 그리는 것이며, 내가 그리고 칠해야만 작품이 완성되는 것이다. 자신의 선택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을 만든다. 인간은 피투로 태어났지만 기투로 살아가는 존재다. 그런데 여기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강조한다. 자기가 선택한 일에는 자기가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실존주의다.
이처럼 실존주의는 보편주의 틀에 저항하며 등장한 사조다. 삶의 방식은 각기 다르다. 어떤 규격에 집어넣어 꿰맞추려는 삶은 불행하다. 나의 주체성을 버리고 다른 사람들과 같은 보편성에 기초하여 사는 것은 노예의 삶이다. 그것은 나를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상실한 수동적이고 맹목적인 삶이다.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을 하였다. 타인이 판단하는 평가에 의존하여 사는 것은 지옥이라는 뜻이다. 평준화된 삶, 동질화된 삶, 서로를 비교하면서 남과 동일한 관점으로 사는 삶, 수평화 획일화된 삶은 다 지옥이다. 우리는 남이 욕망하는 것을 내가 욕망하면서, 남에게 인정받으면서 살기를 원한다. 남과 항상 비교하면서 살아간다. 남을 의식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자기를 잃고 사는 이러한 삶은 진정한 나의 삶이 아니라, 지옥의 삶이요 노예의 삶이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내가 원하는 대로의 삶이 온전한 삶이다. 하이데거는 산행의 길에는 길이 없다고 하였다. 보편적 길이 아니라 자기가 가는 길이 진정한 길이라는 것이다. 밀(J. S. Mill)도 진정한 자아실현의 길이 진정한 길이라고 하였다. 사회제도에 길들여진 삶이 아니라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는 삶이 진정한 삶이라는 것이다.
실존주의는 개인의 자유, 책임, 주관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철학적, 문학적 흐름이다. 실존주의에 따르면 인간 개인은 단순히 생각하는 주체가 아니라, 행동하고, 느끼며, 살아가는 주체자(master)이다.
사르트르는 존재를 즉자(卽自)와 대자(對自)로 나누었다. 즉자란 그 자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상태를 말하고, 대자란 자기의식을 가진 인간의 존재를 말하는 철학 용어다. 즉자는 주어진 길을 따르는 자, 전통적 가치에 순응하는자, 자기 역할에 순응하는 자다. 대자는 스스로 선택하는 자, 전통적 가치를 회의하는 자, 대자가 저항이라면 즉자는 순응이다. 실존이 본질에 앞서기 때문에 인간은 즉자적 삶이 아니라 자기를 조명해 보는 대자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존주의는 헤겔의 관념론과 콩트의 실증주의를 반박하며 제기되었다.
헤겔은 모든 사건에는 본질적인 면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했다. 헤겔에게 그 본질적인 면이란 보편적 이성인 시대정신이다. 그는 이 정신을 절대정신(Absoluter Geist)이라 이름하였는데, 인간의 역사는 이 절대정신이 그 본질을 점차 분명하게 드러내는 과정이다. 예를 들어, 고대 국가에서는 군주 한 사람만 자유롭고 모두가 노예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서양 중세에는 군주뿐만 아니라 봉건 제후들도 자유로워졌다. 그리고 이제 프랑스 혁명으로 시작된 새로운 시대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로워졌다. 즉 헤겔은 절대정신이 영웅을 선택해 자신을 실현시킨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헤겔이 이해하는 것처럼 그렇게 체계적인 존재가 아니다, 내라는 존재가 먼저 있고, 인간이라는 공통성질을 논할 수 있는 것이지, 인간이라는 본질이 먼저 있고 내가 그 본질 속에 꿰맞춰지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실증주의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실증주의는 모든 것을 과학적 실증적으로 입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을 어떻게 그렇게 두부모 자르듯 명확하게 과학으로 구분해 낼 수가 있단 말인가.
이러한 실존주의는 19세기 중엽 덴마크 출신의 철학자 키르케고르와 프로이센 출신의 철학자 니체에 의하여 주창된바, 이 사상은 후에는 야스퍼스, 마르셀 등으로 대표되는 유신론적 실존주의와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보부아르 등의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첫댓글 50년 전 대학에 들어가 실존과 즉자라는 말들을 들으며, 도서관에 가서 열심리 이와 관련되는 책들을 읽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 당시 "실존은 본질에 우선한다!"라는 문장을 읽고 탄복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물이 본질이 먼저인데, 인간만이 존재가 우선인 이런 상황. 아주 큰 충격이었습니다. 오늘 다시 이 글을 읽으며, 실존주의 철학을 읽으며 가슴 설레던 기쁨을 느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