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 9장 35절 – 41절
예수님은 언제나 , 항상 그리고 어느 경우에도 자의적으로 즉 스스로 어떤 일을 행하므로 그 결과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시려고 한 적이 한번도 없으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도 항상 삼위일체 하나님안에서 일을 행하시고 친밀함 안에서 일을 이루셔서 온전한 헌신을 통해 하나님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그런 태도를 지향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떤 환자들을 치유하실 때 먼저는 하나님아버지 안에 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이시는 그 일을 보시고 그 일에 헌신하시므로 성취하시고 그 성취를 통해 하나님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없이 자기가 바라는 일을 행하고 그 결과가 좋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자세는 항상 영광을 자신과 하나님이 나누어 가지는 자세입니다. 이런 자세를 예수님은 철저하게 배격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가다가 한 맹인을 보게 됩니다. 제자들은 세상의 관점을 따라 인과응보의 개념에 따라 그 사람이 소경된 것이 그 부모의 죄나 그 사람의 죄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죄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하심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어떤 부분에서는 맞을 수 있지만 또 어떤 부분에서는 전혀 옳지 않습니다. 회개하지 않은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심판이나 징계를 받아 소경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경우에 세상적인 관점을 따라 판단하기 전에 먼저는 하나님께 묻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묻기를 잘하는 태도는 신앙의 성숙을 위해서 너무나 중요합니다. 세상적인 관점을 통해 그 소경된 자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의 소경됨은 죄로 인한 심판의 결과물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시기 위해 예비된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예수님과 동행하는 시간에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일이라고 여겨지는 그런 일들을 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일은 그 시점에 하나님이 행하시는 바로 그 일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자세의 본을 보이십니다. 예수님은 그 소경된 자의 눈에 예수님의 침으로 이겨진 진흙을 바르십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일이라고 하는 테두리에 들어가는 행동입니다. 하나님아버지는 예수님께 바로 안식일에 일이라고 여겨지는 그 일을 행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평가보다도 사람들의 평가를 귀하게 여기셨다면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지탄을 받을 일을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아버지의 행하심에 동참하시기 위해 안식일에 일이라고 여겨지는 그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사람뜰로부터 받는 평가보다도 하나님아버지로부터 받는 평가를 앞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실로암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바로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진흙을 눈에 발라 치유하셨다고 하는 것 때문에 분란이 일어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했으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분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라고 하였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표적을 행하신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 명백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자 바리새인들은 치유를 받은 그 사람을 심문합니다. 눈을 뜨게 된 그 사람은 바리새인들 앞에서 담대하게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바로 실로암 즉 보냄을 받은 자의 태도입니다. 그러자 그 부모에게 그들의 아들이 참으로 맞느냐고 묻습니다. 그 부모들은 출교당함이 두려워 대답하지 않습니다. 눈을 뜨게 된 사람은 출교를 당하게 되는 위협 속에서도 예수님을 증거했지만 그 부모들은 출교가 무서워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로 보냄을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의 차이입니다. 오늘 우리는 실로암 즉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설령 증거함으로 불이익을 얻는다 할찌라도 예수님을 담대하게 증거해야 합니다.
이제 눈을 뜨게 된 그 사람은 출교를 당합니다. 유대사회에서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 지극히 어렵게 된 것입니다. 낙심할 수 밖에 없고 불안해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에 있는 그 사람에게 예수님이 다시 찾아 오십니다. 그러시면서 육체의 치유 뿌만 아니라 영의 치유도 이루어 주십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전인적인 치유입니다. 예수님은 전인적인 치유를 주시기 위해서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아들 즉 메시야를 믿느냐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증거하십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바로 전인치유입니다. 영의 치유가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하나님의 일 즉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는 일을 통해서 하시길 열망하신 그 일을 하십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의 통로였습니다. 예수님은 심판을 말씀하십니다. 그 심판은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시고 본다고 여기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이 보지 못하는 자임을 인식하고 예수님께 보는 자가 되게 해 달라고 구하는 자는 보게 됩니다. 바로 영적분별력을 말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보는 자라고 여기고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지 못하는 자들은 영적분별력을 회복하지 못합니다. 이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때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의원이 쓸 때 있는 것과 같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보지 못하는 자들이면서도 소위 선생이라고 불리우며 보는 자들이라고 자부하기 때문에 즉 그 교만으로 인하여 죄가 그들을 주관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