⑦익산향교(益山鄕校)
향교는 유교문화 위에서 설립·운영된 교육기관으로, 중앙의 성균관과 연계시키면서 지방에 세운 것이다. 향교의 연원은 숭유억불(崇儒抑佛)과 유교문화이념을 정치이념으로 표방한 조선시대부터이며, 지방 수령의 책임 아래 그 운영이 활성화되고 있었다.
소수의 귀족문벌과 많은 양인신분층에게 유학교육의 기회를 부여하여 교생(校生)으로 이를 통해 신분상승의 사회적 변화를 추구하기도 했다.
교생에게는 군역(軍役)과 호역(戶役)면제, 생원·진사 시험 응시 등의 특전이 부여되었다.
조선시대에 학업의 시작은 7, 8세부터이지만 교생의 연령이 16세로 제한을 받는 것은 16세부터가 바로 국역(國役)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었다.
교육공간으로서 강의실인 명륜당(明倫堂)과 기숙사인 재(齋)가 있었으며, 공자의 위패를 비롯한 4성과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배향하는 대성전으로 군·현마다 학생 정원의 규모가 다르듯이 건물의 규모도 대소의 차이가 있었다.
향교의 본래적 기능은 유교문화의 교육적 기능이 주된 것이었으나 속내는 정치적 기능이 강했었고 부수적 기능으로는 지방민 화합의 문화적 기능도 한몫했다.
국가는 모든 향교에 유학을 교수, 관리하는 교관(敎官)을 임명·파견했다. 그러나 수령의 적임자조차 부족한 상황하에서 교관까지 선임한다는 것은 여의치 않았다.
조선왕조 중기·후기로 가면서 관학 교육기관에 대한 비판적 언론과 사학(私學) 교육기관의 활성화로 인해 학도들은 향교를 기피하고 서원,·서당 등의 사학기관을 찾게 되었다.
향교는 출발에서부터 정치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
즉 향교에서 유학을 교육받은 지방민은 생원·진사 시험을 거쳐 다시 성균관에 입학하고 문과시험을 통과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중앙의 정치권에 진입할 수 있었기에 중앙정치권에 진입하기 위한 합법적이고 개방된 절차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동시에 지방 지식인은 중앙정치를 비판하기도 하여 향교가 중앙정치력과 지방사족들의 자연스런 만남의 장소이자 정치력의 구현 장소라는 점에서 정치적 구심처가 되었다.
향교는 지방 지식인들의 구심처였으므로 지방 단위의 문화행사, 특히 유교문화이념에 따른 행사가 여기에서 이루어졌다.
춘추의 석전대제(釋奠大祭)와 삭망의 분향이 향교의 문묘에서 이루어지고, 사직제. 성황제.기우제. ·여제 등도 향교를 중심으로 거행되었기 때문에 지방민의 기원이 이곳에서 규합되었다.
내가 다녔던 금마초등학교는 개교 100주년이 넘었다.(1911.9.15개교)
학교 소풍장소는 아니지만 그 당시의 기억으로는 익산향교(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15호)의 석전대제(釋奠大祭)는 봄과 가을 두 번의 행사로 4학년 전반이 의무적으로 참여했던 생각이 난다. 태조 7년(1398)에 지어진 후 임진왜란(1592) 때 불타 없어진 것을 그 뒤에 다시 지었고 최근에 개보수 증축으로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대성전·명륜당·동재·서재·제기고·내외삼문·홍살문·하마비 등이 있다.
익산시에는 용안면에는 '용안향교', 여산면에는 '여산향교', 함라면에는 '함열향교'가 있는데 금마면에는 '익산향교'가 있다. 이름이 '금마향교'가 아니고 '익산향교'인 까닭은 금마면이 익산시의 중심지에 있고 가장 중요한 향교 때문이었을 것으로 본다. 향교와 나의 초등학교간의 거리는 300m정도의 지척에 있어 봄, 가을 석전대제가 있는 날이면 아침부터 흰 두루마기에 검정 유건(儒巾)을 쓴 할아버지들이 홍살문 쪽으로 들어가시고 학교 쪽으로 바람이 불면 석전대제를 집사하시는 분이 홀기(笏記)에 따라 집전하시는 큰 목소리와 낭낭한 축문 낭독의 소리가 교실까지 들려 6년 동안 봄, 가을에는 줄곧 보았던 곳이다.
석전대제가 끝나면 참여 학생들에게는 연필 1자루씩 꼭 나누어 주었다.
모든 것이 귀해 몽당연필을 대나무 깍지에 끼워서 침 발라가며 쓰던 시절이라 연필 1자루는 큰 선물이었다. 석전대제의 제물은 모두다 날것으로 제수해서 인지 음식을 먹어본 기억은 없다. 석전대제에 참석하지 않는 학년 때는 유리창 너머로 행사가 끝났다고 보이게 될 때쯤에는 후다닥 달려가 시치미를 떼고 행사 참여 학생처럼 뒤에 섰다가 연필 1자루를 몰래 탔던 솔솔 했던 재미가 여기 명륜당 마당 이 자리라 생각하니 나 혼자 소웃음이 나온다.
담장 아래에 공적비(功績碑)를 읽어보면서 걸어 나오는 경의와 성역을 표시한 홍살문까지의 길은 너무나 고즈넉하여 나의 발자국소리도 경솔한 느낌이 든다. 홍살문을 보니 철제에 빨간 페인팅으로 만들어져서 목제시대 정서를 철제시대에서 찾기는 억지인 것 같다.
마지막 하마비(下馬碑)를 뒤로하고 참배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