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상이 있는 풍경/강현국
아무것도 아닌 듯이 감꽃이 피고 감꽃 그늘 아래 아무것도 아닌 듯이 빈터가 있고 이씨를 기다리는 평상이 있고 김씨를 기다리는 주막이 있고 아무것도 아닌 일로 김씨가 이씨의 멱살을 잡고 이씨가 김씨의 아랫배를 걷어차고 아무것도 아닌 듯이 허리 굽은 아낙이 술상을 다시 내고
아무것도 아닌 듯이 감꽃이 지고 감꽃 그늘 그 자리에 찬바람이 들어서고 아무것도 아닌 듯이 아무것도 아닌 듯이 빌라가 들어서고 아무것도 아닌 듯이 아무것도 아닌 듯이 골프장이 들어서고 사우나가 들어서고 아무것도 아닌 듯이 이씨가 안 보이고 김씨가 안 보이고
아무것도 아닌 듯이 아침마다 나는 허리 굽은 아낙에게 담배를 사고 아무것도 아닌 일로 아침마다 나는 평상만한 그 섬을 쓸쓸해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로 안 보이는 이씨와 안 보이는 김씨에게 전화를 걸고 싶고 아무것도 아닌 듯이 아무것도 아닌 듯이 아침마다 골프를 끝내고 사우나를 즐기고 아무것도 아닌 일로 사라지는 섬처럼 태양에 부대끼고 돌멩이에 부대끼고 땟수건에 부대끼고
<시 읽기> 평상이 있는 풍경/강현국
강현국 시인은 몸속에 ‘젖은 낭만성’를 누구보다 많이 간직한 시인입니다. 그것은 때로 ‘그리움’이라는 이름으로, 때로 ‘하얀 먼 길의 유혹’이라는 이미지로 , 때로 ‘고요의 남쪽’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불러내고 유혹합니다.
이런 부름과 유혹이 소리는 한 인간이 온전한 리얼리스트가 되어 사는 것을 방해합니다. 그러나 그 방해는 불편한 것이면서 동시에 행복한 것입니다. 젖은 낭만성은 때로 성가신 것이지만, 그것은 건조한 우리들이 삶 속에 마르지 않는 샘물 하나를 그리고 흐르는 여울 하나를 간직하고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강현국 시인의 이런 젖은 낭만성은 단선적이거나 근시안적인 것이 아닙니다. 소박한 센티멘털리즘에서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는 세속의 시간표와 우주의 시간표에 삶을 중첩시켜 놓아볼 줄 아는 사람이며, 그 결과 삶이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 말은 유와 무, 채움과 비움, 유한과 무한, 현실과 초월, 밤과 영혼, 이승과 저승, 유정과 무정, 유심과 무심의 이원성, 중첩성, 모순성, 역설성, 반어성을 그가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은 양극의 드라마를 직시할 줄 아는 사람이 소박한 센티멘털리스트일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몸 속에 내장된 젖은 낭만성은 그가 지닌 ‘원죄’이듯 그를 자주 부추기고 움직이며 그 존재를 알립니다. 이것을 숙명적 유전인자라고 말하는 것은 어떨까요?
위 시는 강현국이 시집 『견인차는 멀리 있다』 속에 들어 있습니다. 위 시를 읽으며 저는 무심無心, 무사無私, 무사無事, 무위無爲, 무정無情, 무력無力, 무의미無意味, 무아無我, 무식無識, 무관無關 등과 같은 말을 연달아 떠올립니다. 모두 ‘無’라는 말을 앞에 놓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가 계속하여 위 시에서 반복하는 “아무것도 아닌 듯이”란 말과 “아무것도 아닌 일”이란 말이 이런 말들이 연상을 가능하게 합니다. 세속의 시간표와 채점표에 맞춰보면 우리의 삶은 ‘모든 것’입니다. 그 앞에서 우리는 집착에 가까운 집중과 탐욕에 가까운 욕망과, 살인에 가까운 가학과, 자살에 가까운 자학과, 질병에 가까운 나르시시즘에 빠집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세속에서 결사적決死的입니다. 모든 것이 ‘모든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루는 것들도 많고, 그 중에 대단한 사람들은 ‘성공한 자’로 추앙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사決死의 끝은 필사必死입니다. 모든 것과 같은 세속에서 누구나 나이가 들면 죽음이라는 은퇴의 길을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주의 시간표와 그 저울에 올려놓고 보면 ‘모든 것’은 곧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우주의 시간표는 무한이고, 우주의 저울은 공空(zoro)의 눈금에 고착돼 있기 때문입니다. 空이라는 저울 아닌 저울 앞에서 우리는 무심, 무사, 무사, 무위, 무정, 무력, 무의미, 무아, 무식, 무관 등과 같은 말을, 무한無限이라는 시간 아닌 시간을, 무변無邊이라는 공간 아닌 공간을 연달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을 안다고 해서 ‘모든 것’인 세속의 일을 그만둘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육신과 욕망을 지닌 세속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인 세속의 일을 할 때마다 그것을 일일이 따져 물으며 초긴장의 상태가 될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하기에는 우리의 에너지가 빈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듯이” 습관적인 삶을 삽니다. 습관적으로 일러나고, 습관적으로 출근하고, 습관적으로 밥을 먹고, 습관적으로 텔레비전을 봅니다. 그러나 습관은 방편일 뿐, 우리의 근원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동화된 습관의 표피 아래서 우리는 ‘모든 것’인 세속의 시간표와 채점표 때문에 애태우고, 또한 ‘아무것도 아닌 것’인 우주의 시간표와 저울 때문에 막막해집니다.
위 시의 첫 연을 보면 감나무와 감꽃, 그리고 그 아래의 빈터와 평상과 주막이 등장합니다. 시인은 이들이 “아무것도 아닌 듯이” 존재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그냥 무심하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그들은 어떤 해석과 의미도 가하지 않은 정물적인 풍경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하는 시인의 속마음을 슬쩍 훔쳐보면, :아무것도 아닌 듯이“존재하는 그 풍경들은 애써 격정을 극복하거나 감춘 외양일 뿐, 그 아래쪽에는 존재하는 일의 고단함과 뜨거움이 잠복돼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가 지닌 ‘젖은 낭만성’의 흔적입니다.
시인은 바로 같은 제1연에서 “아무것도 아닌 일로” 이씨와 김씨가 멱살을 잡고 아랫배를 걷어차는 신체적 싸움은 언어라는 도구도 사용할 수 없을 만큼 결사적인 자기애의 폭력적 충돌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싸움의 이면을 들춰보는 시인의 마음엔, 이들이 싸움이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일로” 벌어지는 희극으로 보입니다. 아니, 비극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싸우는 동안 인생이 흐르고 세월이 달리고, 그런 희극, 아니 비극 옆에서 허리 굽은 아낙은 그런 일들이 “아무것도 아닌 듯이” 술상을 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허리 굽은 아낙은 삶을 습관처럼 볼 줄 알고 살 줄 아는 현자이자, 삶의 희비극을 웃음이나 눈물 없이 볼 수 있는(보아야한다고 터득한)고수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 옆에서 감정의 떨림을 일으키는 사람은 오히려 시인입니다.
이제 제2연으로 가봅니다. “아무것도 아닌 듯이” 감꽃이 핀 것처럼, “아무것도 아닌 듯이” 감꽃이 지고, 그 감꽃이 진 자리에는 찬바람이 들어섰다고 시인은 말하였습니다. 꽃이 피고 지고, 계절이 오고 가는 일은 다 대단한 일이지만, 그것은 달리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드러내는 일은 얼마나 힘겨운가요. 마찬가지로 그렇게 본다는 것도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요.
그러나 진정 숙고해봐야 할 인간사의 ‘대사건’들이 “아무것도 아닌 듯이 빌라가 들어서고” “아무것도 아닌 듯이 골프장이 들어서고 사우나가 들어서”는 현실을 보면서 무감각과 무정견과 무지의 극단에 숨어 있는 위험에 대해 경고합니다. 세속에서의 욕망의 바벨탑이 아무렇지도 않게 하늘로 치솟는 현실을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면역과 내성 속에서 “아무것도 아닌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하루의 일과를 마칩니다. 역시 감정이 동요를 일으키는 것은 시인뿐입니다. 그런 시인 옆에서 멱살을 잡고 아랫배를 걷어차며 싸우던 이씨와 김씨도 “아무것도 아닌 듯이” 안 보입니다. 그들의 싸움에도 우리는 무관심했지만, 그들이 사라짐에도 우리는 마음을 주지 않습니다. 이씨와 김씨의 출현과 사라짐, 그것은 수많은 이 땅의 타인이란 우리에게 돌이나 바위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그저 스쳐가는 사물에 불과하다는 인간심리의 한계이자 특징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제3연으로 오면 시인이 역시 진지함과 막막함을 습관처럼 변용시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도 역시 “아무것도 아닌 듯이” 아침마다 허리 굽은 아낙에게 담배를 사는 것입니다. ‘아침마다’ ‘허리굽은 아낙’ ‘담배’ ‘(담배를) 사는 것’ 이들 모두가 다 생각하려 들자면 평생에 걸쳐 심사숙고해도 그 전모가 밝혀지기 어려운 대단한 과제들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습관처럼, “아무것도 아닌 듯이”, 그들을 무심하게 건너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듯이” 살아가는 삶 속에서도 그는 그 외양과 달리 진정 무감각하거나 초탈한 삶을 살지 못해 걱정입니다. 그를 ‘모든 것인 것’처럼 사로잡는 것이 삶의 곳곳에 매복되어 있고, 그는 그 덫에 걸려 ‘아무것도 아닌 일’로 그것이 ‘모든 것인 것’처럼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어디 “아무것도 아닌 일”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우주의 시간표와 저울에 올려놓고 보면 하찮은 것들, 아무것도 아닌 것들로 인해 시인은 쓸쓸해하고, 사라진 김씨와 이씨를 궁금해하며 전화를 걸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반복됩니다. 그는 “아무것도 아닌 듯이” 아침마다 골프를 즐기고 사우나를 하지만, 어느새 그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부대끼며 흔들리는 것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이런 부대낌과 흔들림을 “아무것도 아닌 일”로 “태양에 부대끼고” “돌멩이에 부대끼고” “땟수건에 부대”낀다고 적었습니다. 태양, 돌멩이, 때수건, 이런 것들이 다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면서 시인과 우리를 안달하게 하고, 초라하게 하고, 불안하게 하는 것들입니다. 그것이 비록 환상일지라도, 우리는 그 환상 앞에서 ‘부대끼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듯이” 살아가며 삶의 고단함을 덜어냅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것‘을 ’모든 것인 것‘으로 착각하며 삶에 비만한 애증을 보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과 ’모든 것인 것‘ 사이에서 세상은 어긋나지만, 그런 어긋남의 긴장 때문에 과열과 냉담의 극단을 피해가며 교묘한 균형을 이룩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과 ‘모든 것인 거’ 사이에서 강현국 시인의 ‘젖은 낭만성’은 윤활유처럼 흐르고, 그런 흐름이 작용으로 그는 시인일 수밖에 없는 듯이 시를 씁니다. 낭만성도, 시도 시인됨도, 다 ‘고단한 영광’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것을 쉽게 접을 수 없다는 데서 위와 같은 좋은 시가 탄생된다면, 이것은 놀라운 일임에 분명합니다.
―정효구, 『시 읽는 기쁨』, 작가정신,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