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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 / 임보
2104년 봄 어느 날 새벽
대기권 밖에 설치된 천체 망원 렌즈에
새로운 별이 하나 붙잡혔다
사람들은 그 렌즈의 이름을 빌어
그 별을 호메로스라고 명명했다
그 뒤 호메로스는
수많은 천문학자들에 의해 추적되었는데
아홉 개의 긴 꼬리를 달고 은하계를 떠도는
초록빛 낙지 모양의 아름다운 혜성이라고 했다.
2104년 여름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는
호메로스가 태양계의 외곽을 뚫고
우리들의 세계로 끼여들었다고 보도했다
지상의 모든 망원경들은 가슴을 조이면서
초대받지 않은 태양계의 새 손님
호메로스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2104년 가을
미국의 항공우주국은
호메로스는 지구보다 70배쯤 큰
초속 1000km의 놀라운 속도로
태양계의 중심을 향해 돌진해 들어오고 있는
녹색의 불덩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극히 기적적인 확률이긴 하지만
태양계의 아홉 개 떠돌이별 중
어느 것과 혹 충돌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2104년 11월 12일
호메로스는 천왕성과 불과
1천만km의 간격으로 스치며 지나갔다.
2104년 12월 6일
지상의 모든 생명들은
지구를 향해 다가오는 거대한 불덩이 호메로스를
경악에 찬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신문과 방송들은 종일 아우성을 치고
끓어오르는 P.C.의 모니터들 앞에서
모든 일터의 일손들은 손을 멈추었다
한 시대를 주름잡는 정치가들도
천만군병을 거느린 장군들도
억만금을 쥐고 있는 억만장자들도
다 속수무책
수만 개의 원자폭탄을 일시에 터뜨린다 해도
호메로스의 진로를 1mm도 바꿀 수 없다고
한 천문학자가 침통하게 부르짖었다.
2104년 12월 7일
브라질의 한 인디오 소녀는 그의 일기장에
'지구는 밤을 잃었다'고 기록했다
태양이 지고 나면 호메로스가 동편에 돋아
태양처럼 지상을 다시 밝히고
하늘의 별들을 삼켜버렸다.
2104년 12월 8일
알라스카의 한 에스키모 노인은
'우리들의 세상은 이제 무너졌다'고 중얼거렸다
그들의 백야(白夜) 위엔
불타는 호메로스가
지지 않고 걸려 있었다
빙산의 만년설은 무너져 내리고
빙하의 굳은 얼음 바다는 금이 갔다.
2104년 12월 9일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엔 종일 폭우가 내려
한 선교사의 뒤집힌 막사가
모래의 강물에 떠내려갔다
'주여, 이렇게 오시나이까'
그는 홍수 속에 휩쓸려 묻히면서
그렇게 울부짖었다.
2104년 12월 10일
모든 전자기기의 바늘은 방향을 잃고
모든 동력들은 힘없이 주저앉았다
지구는 백열전구처럼 밝았지만
전파와 전신이 끊어진 세상은
암흑의 수렁이었다.
2104년 12월 11일
뉴욕의 상공에 뜬 호메로스는
드디어 온 하늘을 불태우면서
번개처럼 세상을 가르고 지나갔다
그를 본 지상의 모든 온도계들은 자폭을 하고
거대한 폭풍의 손이 지표의 모든 것들을 뽑아올려
허공 속에 찢어 던졌다
바다의 물결은 그를 향해 수백m나 솟아올랐고
불타오르는 산야와 도시들 위에 다시
산맥보다 높은 해일들이 몰려와 휩쓸고 지나갔다.
2104년 12월 12일
호메로스가 겨우 8백만km의 간격으로 스치고 지나간 뒤
끓어오르는 대기는 뜨거운 먹구름으로 지구를 덮었다
빙하는 녹아 폐허의 대지를 삼키기 시작하고
인간들이 빚은 지상의 모든 바벨탑들은
깊은 어둠 속에 묻혔다.
2104년 12월 13일
지구는 다시 기온이 내리면서
새로운 빙하기
천만 년의 깊은 잠 속에
서서히 빠져들기 시작했다.
경칩(驚蟄) / 임보
2064년 2월 23일
일본 기상청의 지진 관측소가
이색적인 보도를 했다
일본열도의 모든 곳에
땅 속의 개미란 개미는 다 지상으로 나와
나무 위로 기어오른다고 했다
2064년 2월 25일
가축들은 우리를 박차고 튀쳐나오고
뭍의 짐승들은 다 산 위로 몰려갔다
수십만 마리의 들쥐떼들은
서쪽 바다를 향해 뛰어들기도 했다
2064년 2월 28일
나뭇가지 위에 둥우리를 튼 날짐승들도
철새처럼 떼를 지어
북쪽 하늘로 날아갔다
2064년 3월 2일
일본의 모든 공항이란 공항은
떠나는 사람들의 아우성으로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2064년 3월 3일 새벽
마른 하늘에 천둥이 울고
출렁이는 배처럼 땅이 흔들렸다
떠오르던 샛별이 다시 주저앉고
후지산이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바다는 갈라져 불을 뿜고
수백 미터 솟구친 해일이
모든 섬들을 삼켰다
2064년 3월 4일
조선반도의 땅들도 금이 가고
높은 산들이 무너져 강을 메웠다
정오쯤
동해 바다의 거친 해일을 뚫고
거대한 짐승이 등을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붉은 산호초로 덮인 검은 짐승은
서서히 바닷물을 삼키면서
울릉도를 머리 위로 밀어 올리며
태백산맥에 거대한 다리를 걸쳤다
2064년 3월 5일
경칩일(驚蟄日)
세계의 지도가 바뀌었다.
나나이모 / 임보
캐나다의 맨 서쪽에 '밴쿠버 섬'이 있는데
길게 벋어내린 그 섬의 동남쪽에
나나이모라는 작은 도시가 있다
나나이모는 원주민 인디언 말인데
'다 여기 모이자'라는 뜻이라고 한다
옛날 광활한 북미대륙에서 말을 달리던
용맹스런 원주민 후예들은
지금은 거리의 빈민가에서 알코올 중독자로
혹은 마약에 병들어 폐인들이 되어가고 있다
수천 년 동안 지배해 왔던 저 풍요로운 대지를
총을 든 날강도들에게 다 빼앗기고 말았으니
이 얼마나 분통이 터질 노릇인가.
볼기짝에 푸른 몽고반점을 지니고 있다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우리들의 사촌 몽골리안
어느 언어학자는 아파치족의 '아파치'의 어원은
우리말의 '아버지'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영국 프랑스 스페인…
서양의 백인놈들이 상륙해서
대포와 총으로 원주민들을 정복하고
그들의 영토를 다투어 확장해 갔다.
선량한 원주민들은 활과 창으로 대적할 수 없어
서쪽으로 서쪽으로 밀려갔으리
그렇게 쫓기다가 더 밀려갈 수 없는
태평양에 떠있는 마지막 섬
이 섬에들 모여 마지막 결전을 다짐했으리
진지를 구축하고 창에 날을 다시 세우면서
흩어진 전사들을 향해 애타게 외쳐댔으리
여기 다 모이자고, 모이자고―
"나나이모"
"나나이모"
지금도 귀에 은은히 들려오는 것 같은
그 아우성은 어쩌면 우리말의
"너 나 여기 모여!"
"너 나 여기 모여!"
나나이모의 동쪽에는 밴쿠버시가 있고
나나이모의 남쪽에는 빅토리아시가 있다
둘 다 거창한 도시인데
하나는 정복자의 이름이고
다른 하나는 정복국 국왕의 이름이다
나나이모는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작은 도시,
나나이모의 곁에는
'시메이너스'라는 작은 원주민 마을이 있는데
그 의미는 '깨어진 가슴'이라고 한다.
토네이도 / 임보
바람은 다 방향이 있다
북에서 오는 바람은 북풍이요
남에서 오는 바람은 남풍이다
그런데 그 바람이 미쳐서
동으로 가려다 남으로
남으로 가려다 다시 서로
서로 가려다 다시 북으로…
이렇게 방향을 잃고 뒤범벅이 되면
드디어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오른다
그것이 바로 회오리바람
어떤 회오리바람은
가로수를 뽑아 던지고
자동차와 지붕을 날려보낼 만큼
거대한 것도 있다
1999년 4월 미(美) 중서부 오클라호마
46명의 목숨을 앗아간 토네이도
도대체 바람은 왜 미치는가?
무슨 한이 서려 그렇게 회오리치며
지상의 것들을 무참히 뽑아
내동댕이치는가?
그것은 원혼(寃魂)들의 반란이다
한 맺힌 영혼들이 지상을 떠나지 못하고 맴돌다
드디어 한데 뭉쳐 뒹구는 절규다
토네이도는 아메리카 대륙의 주인이었던
인디언 전사들의 영령이 뿜어내는 아우성이다.
죽은 자가 결코 죽지 않았음을 선포하는
사자(死者)들의 처절한 시위다.
장닭 설법 / 임보
― 송대宋代의 선승禪僧에 설두중현雪竇重顯이란 이가
있었다. 그가 역대 선승들의 선禪에 얽힌 일화逸話
백 개를 묶어 낸 책이 <송고백칙頌古百則>이다.
이 책은 각 장마다 고승들의 일화를 소개하는 <본칙本則>을
앞에 두고, 끝에는 이를 칭송하는 선시禪詩 <송頌>을
붙이고 있다. 설두雪竇보다 한 80여 년 뒤에 온 선승
원오극근圜悟克勤이 이 <송고백칙頌古百則>에
<수시垂示> <착어着語> <평창評唱>*을 매달아 보완해
낸 것이 <벽암록碧巖錄>이다. 그러니 <벽암록>의
원저자는 설두이고 원오는 그 보완자라고 할 수 있다.
설두와 원오는 같은 사천성四川省에서 태어났지만
시대를 달리 살았던 사람들이다. 성격 또한 사뭇 달랐다.
설두는 무척 겸손하여 남의 앞에 잘 나서려 하지 않는
소극적인 인물이었지만 원오는 그와는 달리 적극적인
성격의 사람이었다. 당대의 선지식들을 우습게 여기고
운수행각을 일삼던 안하무인의 걸승이었는데, 어느 날
괴질에 걸려 죽을 고비를 치르고는 그 자만심으로
부터 벗어났다.
원오가 태평산太平山에 기거하고 있던 그의 스승 법연法演의
문하로 다시 돌아온 지 한 보름쯤 되던 날이었다.
진陳이라는 사람이 벼슬을 그만두고 향리로 돌아가는 도중
태평산에 들러 법연에게 법문을 청하는 일이 있었다.
법연은 다음의 소염시小艶詩**를 들어 설법했다고 전한다.
소옥(小玉)아 소옥(小玉)아 하고 자주 소옥(小玉)이를 부르지만
소옥(小玉)에게 무슨 일이 있어 그런 건 아니로세
다만 남몰래 정든님 찾는 소리였을 뿐
頻呼小玉元無事 只要檀郞認得聲
진체眞諦는 이와 같이 말의 밖에 숨어 있는 것이라는 내용의
설법이었던가. 진陳은 거기 담긴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그저 겉소리만 듣고 자리를 떴다. 곁에 있던 원오圜悟가
스승에게 대들었다.
“님은 님이고 법法은 법이잖습니까?”
그러자 법연法演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조사祖師가 어떤 놈이냐? 서西에서 온 뜻이냐? 뜰 앞의
잣나무니라!”
이 말을 듣자 원오圜悟는 온 세상이 환히 밝아오는 기쁨을
맛보았다. 그래서 방을 튀쳐나가는데 그때 마침 한 마리의
장닭이 담장 위에서 홰를 치고 길게 울었다. 그 소리를 듣자
문득 “이것이다!” 하고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그러니
그 장닭이라는 놈의 설법이 법연法演 선사의 그것보다
한 수 위였던 모양이다.
* 수시: <본칙>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 앞에 덧붙인 서론.
착어: <본칙>이나 <송>의 자구字句에 대한 설명인 註.
평창: <본칙>이나 <송>에 연유된 고사를 밝히거나
<본칙>에 대한 보다 자세한 講論.
* 소염시: 안록산과 양귀비의 고사를 소재로 한 시.
양귀비가 몸종 소옥小玉이를 부르는 것은 情夫인
안록산을 남몰래 찾는 암호였다고 함.
- 임보 시집 <장닭 설법>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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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닭 설법 - 임보
<장닭 설법>은 내 설화시집인『장닭 설법』의 표제시다.
대개의 설화시들은 서사적 요소를 담고 있으므로
비교적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런데 이 <장닭 설법>은
좀 까다로운 작품이다. 소위 선불교에서의 ‘돈오頓悟’라는
어려운 문제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므로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우선 이 작품은 체재부터가 다른 시들과는 다르다.
작품의 앞에 장황한 해설이 붙어 있다. 해설의 내용은
선승들의 일화를 담고 있는 <벽암록碧巖錄>이란 책의
유래와 그 책의 저자인 원오圜悟에 대한 설명이다.
마치 드라마의 앞에 달려 있는 프롤로그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드라마적 체재를 시에 끌어들인
셈이다. 한편 설명을 요하는 시어에는 주註를 달았는데
이는 논문의 형식을 원용한 것이기도 하다.
이야기의 내용은 이렇다.
원오의 스승 법연法演이 진陳이라는 사람의 청에 의해
설법을 하는데, 그 설법의 내용이 <소염시小艶詩>다.
양귀비가 평소에 그의 몸종인 소옥小玉이를 “소옥아,
소옥아!”하고 자주 부르는 일이 있었는데, 이는 정작
소옥이를 찾는 게 아니라 그의 정부인 안록산을 찾는
암호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양귀비가 부르는 ‘소옥’은
‘소옥’이 아니라 ‘안록산’인데 물정 모르는 사람들은
그 진의를 파악하지 못하고 迷妄에 빠진다. 법연의
설법은 현상 밖에 참모습은 따로 있으니 현상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혜안을 가지고 현상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으리라.
그런데 이 설법을 곁에서 듣고 있던 원오가 스승에게
대든다. 어떻게 그 하찮은 여인의 사랑 이야기를 가지고
세상의 이치를 설파하려 하십니까? ‘님’을 가지고
‘법’을 말하려는 것이 못 마땅한데요! 하고 따지는
것이다. 그러자 스승 법연이 일갈(一喝)한다.
이놈 제법 잘난 척 사리를 분별하려 드는구나,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분별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부처라고
해서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존재도 아니다.
세상의 이치라는 것은 설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런 내용의 꾸짖음이다.
‘조사祖師가 어떤 놈이냐?’
조사는 달마(達磨, ?~528) 대사를 가리킨다.
중국에 불법을 전수하기 위해 천축天竺으로부터 왔던
고승이다. 선종禪宗의 남상濫觴이 된 분이어서 祖師라고
칭한다. 법연은 원오의 머릿속에 자리한 득도 해탈에
대한 욕심을 읽는다. 부처가 되겠다는 욕심이 부질없음을
일깨운다. 달마 같은 선사에 집착할 것 없다.
‘서西에서 온 뜻이냐? 뜰 앞의 잣나무니라’
이 구절은 조주(趙州, 778~897)의 선문답으로 널리
알려진 유명한 말이다. 한 학승이 조주 선사에게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조주가 ‘뜰 앞의 잣나무니라’ 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법연이 바로 그 조주의 말을 인용해서 원오를
깨우치려 한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
불법을 전하기 위해서 왔노라고 그렇게 간단히 대답할
줄 아느냐? 저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한 마리 멧새가
왜 그렇게 거기 앉아 있는가? 저 뜰 앞에 서 있는
한 그루 잣나무가 어떻게 해서 저렇게 저 자리에 있는가?
누가 그것을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자연이다.
그 오묘한 자연의 섭리를 누가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때 조주의 뜰 앞에 잣나무가 아닌 참나무가 있었다면,
‘뜰 앞의 참나무니라’고 했을 것이고, 만약 개가
지나갔다면 ‘개니라’고 대답했을 지도 모른다.
원오는 법연의 일갈을 듣고 문득 자신의 좁은 ‘생각의
틀’을 깨뜨린다. 논리에 갇혀 있던 속박의 세상으로부터
벗어난다. 해탈解脫이다. 밖으로 튀어 나온 원오는
담장 위에서 우는 한 마리 장닭과 마주친다.
그때 원오는 사물의 진체眞體에 부딪친다.
베일을 벗은 순수한 한 마리의 ‘날 장닭’을 본다.
소염시로 비유하자면 ‘소옥’이 아닌 ‘안록산’을 본 것이다.
원오의 앞에 나타난 장닭은 조주의 앞에 서 있던 잣나무처럼
우연한 사물에 지나지 않는다. 닭이 아닌 다람쥐나 혹은
한 마리 매미가 대신할 수도 있으리라.
해설이 글을 더 어리벙벙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하기사 돈오頓悟를 체득하지 못한 속인俗人이 건방지게
쓴 글이니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 임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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