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 벌레’를 던지지 마라
1980년 전후 아르헨티나 군부 세력의 폭압 정치는 참혹하고 비열했다. 군부가 선량한 국민들을 상대로 벌인 이른바 ‘더러운 전쟁’(Guerra Sucia)은 그 나라의 흑역사로 기록돼 있다. 당시 가톨릭교회도 상당한 내상(內傷)을 입었다. 군부는 정권에 협조하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과도한 호의를 베풀었다. 반면 인권과 정의를 외치며 저항하는 성직자들은 교묘한 방법으로 굴복시키려 들었다.
그들이 동원한 교묘한 방법의 하나가 여론에 ‘의심 벌레’를 던지는 것이었다. 예컨대 눈엣가시 같은 신부가 있으면 정보기관이 나서서 그에 관한 정보를 조작하거나 왜곡해 여론에 넌지시 흘린다. 그럼 사람들은 미심쩍어하면서도 자꾸 들려오는 가짜뉴스를 사실인 양 받아들인다. 우리도 군부 독재를 경험한 터라 그들이 쓰는 ‘기술’이 낯설지 않다. “거짓말은 처음에는 부정하고 다음은 의심하나 계속하면 나중에는 믿게 된다.” 나치 정권에서 위세를 떨친 선전선동의 명수 괴벨스가 한 말이다.
‘의심 벌레’라는 단어는 국내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다. 이 단어는 「베르골료 리스트」(분도출판사)에서 발견했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대교구장 호르헤 베르골료 추기경이 2013년 교황으로 선출됐을 때다. 몇몇 서구 언론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과거 군사정권의 폭력에 침묵 내지 협조했다는 혐의를 제기했다. 언론이 제시한 사실(Fact)은 정보기관들이 베르골료의 명성을 더럽히려고 던져놓은 의심 벌레가 대부분이었다. 사멸한 줄 알았던 벌레들이 30년 넘게 습한 음지에서 꿈틀대는 것을 보다 못한 언론인 넬로 스카보가 이 책으로 혐의를 뒤집었다. 저자는 이렇게 논평했다. “여론에 스며든 의심 벌레는 위협보다 더, 무례하게 진행되는 심문보다 더 효과적일 수 있다.”
뜬금없이 의심 벌레를 끄집어낸 것은 근래 전파를 탄 TV 탐사보도물들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MBC ‘스트레이트’는 몇 달 전 살레시오회 청소년센터에서 있었던 불미스러운 사건을 다뤘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도 최근 인천교구 젊은 신부들의 죽음과 인천가톨릭대 초대 총장 신부 성추행 사건 간의 연관성을 보도했다. 방송이 들춰낸 추문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살레시오회와 인천교구도 그 점에 대해 겸허히 사과하고, 개선과 쇄신을 약속했다.
시청자 반응은 두 부류다. 일부 시청자는 ‘제2의 도가니 사건’ 운운하며 비판에 가세했다. 하지만 사실 왜곡과 과장, 억측이라는 지적이 더 많았다. 특히 인천교구 건은 개별 사건임이 명백한데도, 제작진이 무리하게 꿰맞추기를 시도한 데 대한 질타가 쏟아졌다. 파편 같은 사실을 이어붙여 완성한 그림은 어색할 수밖에 없다.
TV 탐사보도물이 그간 사회의 그늘진 곳을 비춰 인권과 정의를 곧추세운 성과를 깎아내릴 생각은 없다. 방송 제작진도 이 우려와 지적을 호교론자의 일방적 변론으로 받아들이지 않길 바란다. 교회의 잘못을 두둔하려는 게 아니다. 제작진이 의도치 않았더라도, 방송을 통해 풀려나간 의심 벌레가 오랜 세월 어디선가 꿈틀거릴 것을 염려할 뿐이다.
교회는 하느님 사업을 할 때 정신을 더 바짝 차려야 한다. “자기 품에 죄인들을 안고 있어 거룩하면서도 언제나 정화되어야 하는 교회는 끊임없이 참회와 쇄신을 추구한다.”(「교회헌장」 8항)는 선언은 속도감 있는 실천으로 드러나야 한다.
이 실천에 나태하면 언젠가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위기는 벼락처럼 갑자기 내리치지 않는다. 추문이 반복적으로 들려올 때, 그럼에도 사람들이 거기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때가 진짜 위기다. 우리는 지금 그런 위기에 빠진 타 종교를 건너다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