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자료를 보면 토마스는 한국 최초의 선교사이고 최초의 순교자가 분명하다. /고무송 박사
긍정과 부정: 고무송 박사는 주제강연에서 토마스의 평가가 긍정적인 입장과 부정적인 입장으로 나뉘는 것은 분명하다. 긍정적인 입장은 (1)토마스는 한국교회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이다. (2)토마스는 한국교회 개신교 최초의 순교자이다. (3)토마스는 동시통역사로 한국에 왔다. (4)토마스는 항해안내자로 한국에 왔다. (5)다량의 한문성경을 가지고 한국에 복음을 전하러 왔다. (6)토마스는 런던선교회(LMS) 소속 선교사 신분으로 순교했다. 그러나 부정적인 입장으로 (1)제너럴 셔먼호는 무역선으로 위장, 중무장을 한 제국주의 해적선이었다. (2)토마스를 비롯한 승무원 24명 전원이 무장을 했다. (3)제너럴셔먼호는 왕릉의 금을 절취하고자 한 도굴단이다. (4)따라서 토마스는 도굴단 앞잡이라 할 수 있다. (5)토마스는 자신도 무장을 한 제국주의 앞잡이라 할 수 있다. (6)토마스는 불법적으로 입국,그의 순교는 재평가를 받아 마땅하다이다.
발굴자료에서 본 토마스: (1)토마스의 신학교 입학지원서와 선교사 지원서 및 그가 선교본부나 가족에게 보낸 선교편지 등에서 소명감과 헌신도를 가늠해 보면 그는 분명한 선교사의 입지를 가진 것으로 확인된다. (2)토마스는 첫 번째 선교지인 상해에서 돌연한 아내의 죽음을 맞아 LMS를 사임했지만 산동반도 연대로 옮겨 변함없이 무소속 선교사로서 활발하게 활동한 모습을 보여준다. (3)조선인과의 만남을 통해 조선에 순수한 복음을 전하는 것과 성경을 번역하고자, 조선을 새로운 선교현장으로서 그의 소명을 확인한다. (4)당시 조선은 3차에 걸친 천주교박해를 겪었으며, 바야흐로 9명의 서양 선교사를 처형하는 등 병인교난의 그림자가 짙게 그리우고 있는 음험한 상화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토마스는 개신교선교사로서 조선에 복음을 전하겠다는 일념으로 조선을 향하고 있었다. 물론LMS선교사 신분을 재취득하였다. (5)토마스가 비록 무역선이 제너럴셔먼호에 승선, 조선에 입국한 것으로, 중무장한 선원 24명과 함께 있었지만 이는 19세기 당시의 상황을 참작, 역사해석을 하여야 한다. 그들은 신변안전을 위해 무장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19세기 후반에 입국한 선교사들 역시 내지선교사역에 투입될 때는 무장을 했다는 사실을 참조해야 할 것이다.
과연 순교인가?: 토마스의 죽음이 과연 순교라 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에 대하여 대답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마지막 선교편지이다. 그의 편지를 보자. “최근 조선에서 아주 잔인하고 사악한 대학살이 일어났습니다.(중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든 선교사를 대표하여 한 개신교 선교사로서 내가 그 나라(조선)에 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땅을 찾아가기로 결정하였으며 이러한 나의 방문을 통해 이 나라 수도(서울)에서 우리들의 선교사역에 아주 유익한 영향을 미칠 것을 기대해 마지않습니다.” 이를 보건데 토마스는 순교를 각오하고 조선에 왔으며 그는 선교사로서 최초로, 그리고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던 것이 확실하다.
연구과정: 토마스에 대해 연구하는 과정은 그리 쉬운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에 대한 기록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기록들을 수집해 보면 (1)토마스에 대해 최초로 문제를 제기한 것은 그가 소속돼 있었던 런던선교회가(LMS: London Missionary Society) 출판한 ‘런던선교회 100년사(History of LMS 1795-1895)에 의한 것인데, 공식적인 기록은 너무 간단하고 부정적이었다. In 1866, R.J.Tomas B.A. was appointed, but never settled down to work in the capital, and is supposed to have been drowned while on a voyage to corea. “토마스는 선교사로 파송됐으나 임지인 수도(중국 메이징)에 정착하려고는 아니하고 조선 항해 중 익사한 것으로 추정됨” (2)그리피스 교수는 ’은자의 나라 조선‘에서 토마스 목사의 조선선교에 대해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습니다. (제너럴셔먼호)승무원들은 평화적인 통상을 위한 것으로 보기에는 어려울 만큼 중무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애당초 그들의 항해 성격은 의심스러운 것이었다. 여러 왕조의 왕들이 묻혀있는 평양의 왕릉은 순금으로 되어 있다고 중국에는 소문이 닜던 터이니 만큼 그들의 항해는 금을 얻어보려는 속셈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3)한국에서 최초로 토마스에 관해 관심을 갖게 한 것은 마포삼열 목사가 ‘토마스목사순교기념회’를 조직 토마스에 관한 자료를 수집, 역사 무대에 등장시켰다. (4)TMA 총무로 활동했던 오문환 장로(당시 숭의학교 영어교사)에 의해 1928년 출판된 ‘토마스의 일대기를 서술한 토마스전을 펴냈는데 이는 한 권으로 된 최초의 토마스에 관한 단행본이다. 이를 예일대학교 도서관에서 찾아냈다. (5)토마스에 관한 최초의 한국의 학문적 연구는 백남준 박사의 ’한국개신교사‘에 의한 것이다. (6)토마스에 관한 보다 체계적인 연구는 민경배 박사에 의해서이다. 1970년 런던대학교에서 연구하는 동안 토마스에 관한 자료를 일부 발국, ’교회와 민족‘속에 36면에 걸쳐 신학교 시절의 토마스를 쑬하고 있다. (7)토마스에 관해 비판적인 견해로 접근한 것은 이만열 교수에 의한 것이었다. ’한국기독교100년사‘에서 그는 “아무턴 토마스 목사가 상당히 비참하게 돌아신 것이 사실이지만 이것만 가지고 역사에서 그가 위대하다는 이야기는 할 수 없다. 또 제너럴셔먼호 사건 자체도 그 배의 입국목적이나 불법적으로 입국한 경위로 보아 성스럽다거나 아름다운 것이 아니며, 또 토마스 목사도 그 배의 인도자로 왔으니 그다지 높이 평가할 일이 아니라고 본다. (중략) 그리고 그의 죽음이 순교라고 할 수 있겠는가에 대해서도 한국교회는이제 정리해 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