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고르반
혹시 ‘고르반’이란 말을 들어보셨나요? 성서에 나오는 말입니다. 고르반, 신께 바치는 헌물이나 제물을 말하지요. 종교적인 입장에서 성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 집단(바리사이)은 고르반 제도를 오용(誤用)하지요. 신께 드린다는 명분으로 부모 공경을 거부합니다. 아무리 선한 형식이라도 본래의 뜻이 소멸되면 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과거에 좋았던 유전이나 전통이 현실에서는 무력한 예입니다. 단지 무기력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본질이 본래의 성질을 상실하고 생명력을 잃어버릴 때, 비본질은 무시무시한 힘으로 변하지요.
전통이 본질을 잃기 쉬운 이유는 상투성 때문입니다. 오늘 좋은 것이 십년 후에도 좋은 것이 아니지요. 처음에 지녔던 본래의 정신이 시간 흐름에 따라 훼손되거나 굳어버린 겁니다. 이런 상투성은 ‘변함이 없다’는 미덕을 지닌 것처럼 보이지만 관습에 대한 문제의식이 사라지면 ‘기성사실’에 종노릇한다는 의미도 있지요. 전통에서 메시지가 빠지면 무지막지한 짐이 되고 맙니다. 벗어놓은 옷은 ‘내’가 아닙니다. 그 옷이 아무리 폼 나고 화려해도 ‘내’가 될 수 없지요. 그 속에 있었던 내가 진짜 ‘나’입니다.
이뿐이겠습니까. 결혼반지는 결혼을 기념하고, 부부임을 상징하는 것이겠지요. 만약, 결혼한 남성이 허구한 날 술집에 앉아 그곳에 종사하는 여성과 부적절한 사랑을 하고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서도 아내에게 미안함을 가지고 괴로워합니다. 와중에도 그의 손에 결혼반지가 끼워져 있습니다. 자기위안이요, 자기기만입니다. 그 순간, 반지는 결혼의 상징물도, 사랑의 증거도, 이것도 저것도 뭣도 아닙니다. 반지는 그냥 금딱지일 뿐입니다. 과거의 애정 증표가 현재 사랑을 지속해 주지는 않습니다. 결혼반지에 배우자나 결혼이나 사랑이란 의미가 결부되기 위해서는 그것에 걸 맞는 삶을 살아야지요.
사람들은 목에다 십자가 모양의 목걸이를 걸고 다닙니다. 십자가는 로마시대에 사형수를 처형하는 형틀입니다. 사형의 도구죠. 예수 그리스도가 그곳에 달려 처형당했어요. 유쾌할 수 없는 상징물입니다. 따라서 금으로 새겨진 십자가 자체에 어떤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더욱이 십자가는 주술적 도구도 아닙니다. 나도 남들처럼 목에 액세서리 하나쯤 걸어야겠다 싶어 보석 가게에 갔더니, 사장님이 골라주는 십자가 모양의 목걸이를 걸었다고 가정합시다. 그렇다고 그것이 신앙적 행위라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 자체가 신앙적 영험함이 있는 신묘한 물건일 수 없다는 겁니다. 금으로 만들었다면 금목걸이요, 은으로 만들었다면 은목걸이일 뿐입니다.
하나 더 예를 들면, 가슴에 금배지를 달고 나라를 들었다 놓았다 하더라도 애국 충절에서도 으뜸은 아니지요. 금배지 조각에 권위가 담겼을 리 있겠습니까. 금딱지가 아무리 빛나봐야 햇살에 비친 윤슬만하겠습니까. 드라큘라나 원귀를 쫓아내는 신기한 광선이 발사될 리 만무하지요. 금배지는 금딱지일 뿐입니다. 그럼, 배지의 상징? 상징은 상징일 뿐입니다. 상징이 지닌 본래의 정신이 현실 속에서 무지에 의해 변질될 때 기고만장한 완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금배지를 부착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죠.
그렇다면, 고르반에, 반지에, 십자가에, 금배지에 합당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대관절 기준이 있다면 뭐라 말해야 합니까. 누가 보고 있는 것이 진짜 기준이며, 누가 알고 있는 것이 진짜 세계일까요? 낡은 것은 늘 새로운 것에 도전받고, 낡은 것을 전복시킨 새로움은 상투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또 다른 새로움에 의해 낡은 것이 되고 마는 순환의 비밀 앞에 무엇이 기준이 된단 말입니까.
어거스틴의 「시간론」에서 어느 정도의 희망을 찾고자 합니다. 약술하면 이렇습니다. 시간은 비존재입니다. 과거는 이미 없는 것, 미래는 아직 없는 것, 현재는 머물러 있지 않는 것, 고로 시간은 현재의 지속입니다. 현재성의 관점에서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이렇습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지만 우리의 기억에서 현존하는 것, 현재는 지금 지나가고 있지만 직관으로 현존하는 것,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 우리의 기대 속에 현존하는 것, 그러므로 과거는 과거 일의 현재, 미래는 미래 일의 현재, 현재는 현재 일의 현재입니다. 그러니 시간은 우리 마음에 늘 현존합니다. 시간은 현재의 지속입니다. 지금 이 시간은 영원한 현재가 되는 셈이지요.
그런 점에서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은 지금이요, 우리는 사실상 영원한 현재를 경험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간단하게 말해 좋은 종교, 좋은 부부, 좋은 의원님이 되는 기준은 뭡니까. ‘지금 나는 이 사회가 공감하는 윤리적 기준 안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현실적인 답을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반드시 도덕적인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비도덕적이야 한다는 말은 더더욱 아닙니다. 근데요, 괜찮은 종교, 괜찮은 부부, 괜찮은 의원님은 결단코 도덕의 기반위에 있었습니다.
대구에서 태극기 집회가 열렸습니다. 지나다가 집회 행렬과 마주쳤습니다. 확성기 소리가 쩌렁쩌렁합니다. 연단 위에서 아실만한 한 분이 연설을 합니다. 어찌, 말하는 것이 걸걸합니다. 청중은 열렬한 화답을 하더군요. 애국이랍니다. 맞습니다. 그들의 진심은 분명 애국 맞을 겁니다. 그분들 입장에서는 나라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맞습니다. 근데 그 사랑엔 심각한 딜레마를 내포합니다. 두 가지. 사랑하면 할수록 타자는 아프다는 것. 또 하나는 태극기를 들었다고 다 애국은 아니라는 것!
우리는 지금, 新고르반을 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