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냉전기 한반도-동아시아 평화의 길
정성희 자주연합 집행위원장
1950년 한국전쟁은 단지 한반도 내부의 전쟁이 아니었다. 그것은 냉전기 동아시아 질서를 결정한 국제전이었다. 당시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승전 이후 압도적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세계 패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소련과 중국을 봉쇄하기 위한 전략적 공세를 강화하고 있었다. 한국전쟁 과정에서 미국은 북진통일과 중국 압박을 동시에 추진하려 하였으며, 그 중심에 더글라스 맥아더의 전략이 존재했다.
당시 중국 내전(1947년~1949년)에서 패배하여 대만으로 쫓겨난 장개석 국민당 정권은 한국전쟁을 중국 본토 재진입의 기회로 보았다. 맥아더는 압록강·두만강 인근 핵 공격과 중국 본토 폭격까지 검토하였고, 대만의 국민당 군대를 동원한 중국 남부 상륙 가능성까지 구상하였다. 그러나 해리 트루먼 행정부는 제3차 세계대전을 우려하여 맥아더를 해임하고 핵전쟁 시나리오를 차단하였다. 이것은 냉전기 미국 패권이 강력하였음에도 직접적인 미중 전면전과 소련 참전은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사례였다.
오늘날 신냉전기 동아시아는 당시와 유사하면서도 본질적으로 다른 조건 위에 놓여 있다. 미국은 다시 대중국 견제를 핵심 전략으로 삼고 있으며, 대만 문제는 미중 전략대결의 최대 충돌 지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동시에 한반도 역시 미중 대결과 분리된 독립 공간이 아니라 동일 전역 속에 편입되고 있다. 미국이 한미일 군사협력을 강화하고, 중국은 러시아 및 조선과 전략적 연대를 강화하면서 동아시아 전체가 거대한 군사적 긴장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냉전기와 지금의 가장 결정적 차이
그러나 냉전기와 지금의 가장 결정적 차이는 힘의 구조이다. 1950년 미국은 세계 GDP의 약 40%를 차지하였다. 전후 제조업 생산의 절반 이상을 미국이 담당했고, 핵 독점과 해양 패권까지 장악하였다. 반면 오늘날 미국의 세계 GDP 비중은 IMF 기준 약 26% 수준으로 감소하였다.
반대로 중국은 구매력 기준 세계 최대 경제 규모로 성장하였으며, 첨단 제조업·배터리·조선·희토류·5G 분야에서 미국을 위협하고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전쟁 장기화 속에서도 군수생산만이 아니라 국가 경제를 유지, 발전시키며 전략적 승기를 잡고 있으며, 특히 조선은 미 본토를 위협하는 다종다양한 핵·미사일 능력을 통해 군사적 억지력을 크게 강화하였다.
우크라이나전쟁 이후 중러 전략 협력은 더욱 강화되었고, 조러관계는 유사시 상호지원 조항 의 준군사동맹에 경제·과학기술·문화까지 결합된 ‘포괄적 전략동반자 조약’ 체결로 급속히 발전하고 있다. 여기에 조중 관계 역시 미국의 대중 압박 심화 속에서 조선의 전략적 중요성이 다시 커지고 있다. 결국 미국이 냉전기처럼 압도적 힘으로 동아시아 전체를 통제할 수 있는 시대는 끝났다. 전쟁 위기는 있으나 실제 전쟁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네오콘 세력은 패권 약화를 만회하기 위해 동아시아 위기를 증폭시킬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우크라이나전쟁에서 러시아를 굴복시키지 못하고, 중동에서도 이란 압박 전략이 먹히지 않을 뿐 아니라, 이란 미사일의 보복으로 중동 친미 국가의 미군기지들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미국의 호전광들은 대만 문제를 중심으로 중국과의 충돌 위험을 높이는 방향으로 전략 중심축을 이동시키는 유혹에 젖어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문제는 대만 유사시 한반도가 결코 안전지대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주한미군은 대북 억지력이나 한반도 방위군이 아니라 미중 전략대결을 위한 인도·태평양 전략의 일부로 재편되었다. ‘전략적 유연성’은 곧 한반도 병력과 기지가 대만 문제에 활용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브런슨 주한미군 사령관이 한국을 대중국 ‘전초기지’ ‘불침항모’라고 떠들 듯이, 중국은 조선을 미중 전쟁의 후방 거점으로 인식할 수 있다. 대만 위기는 곧 한반도 위기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세 가지 시나리오와 한국에의 영향
이런 조건에서 미국의 향후 동아시아 전략은 크게 세 가지 시나리오로 전망할 수 있다.
첫째 시나리오는 동아시아 개입 강화 및 대중 봉쇄 심화이다.
미국이 중국 견제를 최우선 전략으로 삼고, 대만·남중국해·한반도 전역에서 군사개입과 동맹체계 강화를 확대하는 경우이다. 현재 진행 중인 한미일 군사협력 강화가 더욱 본격화되는 형태라고 볼 수 있다. 한국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일까.
군사적 전초기지화 심화이다. 주한미군은 단순한 대북 방어군이 아니라 대만과 동중국해까지 연결되는 인도·태평양 전략 자산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 확대는 한반도 병력과 기지가 중국 견제 작전에 활용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 경우 한국은 의사와 무관하게 미중 충돌의 직접 당사자로 전락할 위험이 커진다.
남북 군사긴장이 급격히 고조될 가능성이 있다. 조선은 한미일 군사협력을 사실상 대북·대중 포위체제로 간주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의 대중 압박이 강화될수록 조선 역시 핵·미사일 능력 고도화와 군사행동 수위를 높일 가능성이 있다. 한반도는 냉전기와 유사한 군사 대치 상태로 회귀할 위험성이 존재한다.
경제적 부담이 급증할 것이다. 한국 경제는 중국 의존도가 매우 높다. 중국은 한국 최대 교역국이며, 반도체·배터리·화학·철강 등 핵심 산업 공급망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미국의 대중 디커플링 압박이 심화될 경우 한국 기업들은 시장·기술·투자 측면에서 이중 압박을 받게 된다.
외교적 자율성이 축소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 중심 진영에 강하게 편입될수록 중국·러시아와의 관계는 악화될 가능성이 크며, 한국의 균형외교 공간은 좁아진다. 이는 장기적으로 한국 외교를 더욱 종속적 구조로 만들 수 있다.
둘째 시나리오는 동아시아에서도 후퇴하는 급격한 역외 균형이다.
미국이 재정 부담과 군사적 한계를 이유로 동아시아 직접 개입을 축소하고, 해양 바깥에서 간접 개입만 유지하는 형태이다. 즉 미국이 일정 수준 후퇴하며 지역국가들 스스로 균형을 맞추게 만드는 전략이다. 겉으로는 한국의 자율성이 커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더 큰 불안정성이 초래될 수도 있다.
우선 안보 불안과 군비경쟁이 급속히 확대될 수 있다. 미국의 보호막이 약화되면 일본은 군사대국화 속도를 더욱 높일 가능성이 크다. 한국 내부에서도 핵무장론과 독자 군사력 강화 요구가 확대될 수 있다. 동북아 전체가 상호 불신 속에서 군비경쟁에 돌입할 가능성이 높다.
한미동맹 구조 변화로 인한 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 주한미군 감축 또는 역할 축소 가능성이 제기될 경우 한국 사회 내부에서 안보 불안과 정치적 갈등이 심화될 수 있다. 동시에 한국은 독자적 안보체계를 빠르게 구축해야 하는 압박에 직면하게 된다.
일본의 영향력이 확대될 가능성이다. 미국 후퇴 이후 일본이 동북아 안보질서의 핵심 축으로 부상하려 할 것이다. 이 경우 한국은 역사·영토 문제와 별개로 일본 중심 안보체계에 편입될 압박을 받을 수 있다.
미중 사이에서 전략적 선택 압박이 더욱 강해질 수 있다. 미국이 직접 개입은 줄이면서도 정치·경제적으로는 중국 견제를 요구할 경우, 한국은 스스로 더 큰 전략적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
셋째 시나리오는 일정 기간 동맹국을 키운 뒤 철수이다.
미국이 당장 철수하지는 않지만, 일본·한국의 군사력 증강과 역할 확대를 유도한 뒤 장기적으로 부담을 넘기는 방식이다. 현재 미국 전략가들 사이에서 상당히 현실적인 시나리오로 거론된다.
한국의 군사비 부담이 구조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이미 한국 군사비는 세계 상위권 수준이다. SIPRI 기준 한국은 세계 10위권 군사비 지출국이다. 미국이 동맹국 역할 확대를 요구할 경우 첨단무기 구매·미사일방어체계·해군력 증강 부담이 더욱 커질 수 있다.
한국군의 지역 개입 압박이 확대될 수 있다. 한반도 방어를 넘어 대만해협·남중국해 문제까지 역할 확대 요구가 제기될 수 있다. 이는 한국군의 임무와 전략 범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문제이다. 남북관계 악화 가능성이 높다. 조선은 한국군의 역할 확대를 미국 주도의 대중·대북 포위 전략 참여로 간주할 가능성이 높다. 결과적으로 남북관계 복원 공간은 더욱 축소될 수 있다.
경제적 종속 구조 심화 위험이 존재한다. 미국 무기체계 의존과 방산 연계가 확대될수록 한국 산업구조 역시 미국 군사전략과 결합될 가능성이 커진다. 이는 독자적 산업·기술 전략 공간을 축소시킬 수 있다.
미국 철수 이후의 공백 문제가 남는다. 미국이 동맹국 군사력 증강 이후 일정 시점에 개입을 줄일 경우, 한국은 높은 군사비와 긴장구조만 떠안은 채 더 불안정한 지역질서 속에 놓일 가능성이 있다.
결국 세 시나리오 모두 공통적으로 한반도를 미중 전략대결의 전면 공간으로 만든다는 특징을 가진다. 첫째는 한국을 미국 대중봉쇄의 전초기지로 만든다. 둘째는 미국 후퇴 속에 동북아 군비경쟁을 격화시킨다. 셋째는 한국을 미국 전략의 대리 수행자로 만든 뒤 부담을 전가할 가능성이 있다.
한국의 핵심 과제: 전략적 자율성 확대
따라서 한국의 핵심 과제는 어느 시나리오가 오더라도 종속이 아니라 전략적 자율성을 확대하는 데 있다. 그것은 단순한 ‘중립’이 아니라 정치 자주, 외교 균형, 군사 자강, 경제 다각화를 통해 미중 어느 한편의 소모적 전초기지가 되는 것을 피하는 국가전략이다. 동시에 남북관계 복원과 북미관계 개선, 그리고 동아시아 다자안보협력체 구축을 추진하여 군사블록 대결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남·북·미·중·러·일이 참여하는 다자안보협력체를 통해 군사충돌 위험을 관리하고, 상호불가침과 경제협력을 병행하는 방식이다. 유럽이 냉전 이후 유럽안보협력회의(CSCE)를 발전시켜 OSCE 체계를 구축한 것처럼, 동아시아 역시 새로운 다자평화체제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
물론 현실적 장애는 크다. 미중 전략경쟁이 첨예하고, 역사 문제와 영토 갈등도 존재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군사위험이 커질수록 집단안보체제 필요성도 커진다. 특히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미중 사이의 최전선에 위치하면서 동시에 대륙과 해양을 연결하는 접점에 있다. 따라서 한국이 어느 한 편의 전초기지로 고착되는 것은 국가적 위험을 자초하게 된다. 이 때문에 한국은 자주적인 국가전략을 모색해야 한다.
물론 주변국들의 도움만으로 평화를 지킬 수 없다. 북은 핵 무력, 남은 재래식 무기의 안보 불안은 이란의 ‘비대칭 억제 전략’을 벤치마킹하여 해소할 수 있다. 이란이 미군 접근을 어렵게 만드는 Anti-Access(접근거부=적군이 전장 자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전략), Area Denial(지역거부=적군이 이미 특정 지역에 들어왔더라도 자유롭게 활동하지 못하게 만드는 전략), 미사일 중심 억제전략, 장기 제재·전쟁 인내 능력, 국가적 결속 유지 같은 요소들을 참고해야 한다.
첫째, 정치·외교적 자율성을 강화해야 한다. 한미동맹 일변도가 아니라 중국·러시아와의 관계 역시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균형외교가 필요하다. 둘째, 북미관계 개선과 남북관계 복원을 강력히 추진해야 한다. 대북 적대정책이 지속되는 한 한반도 평화 역시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셋째, 경제 다각화를 추진해야 한다. 미중 갈등 속에서 특정 국가 의존도를 줄이고 공급망·에너지·기술 협력을 다변화해야 한다. 넷째, 군사적 자강과 평화정책을 병행해야 한다. 전쟁 억지와 평화관리 능력을 동시에 강화하는 방향이어야 한다.
나아가 헌법 3조·4조 개정 논의, 국가보안법 폐지, 상호 체제 인정과 교류 확대 등 제도적 차원의 적대 해소 논의도 검토되어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이념 문제가 아니라 군사적 충돌 위험을 줄이기 위한 구조적 평화 구축 문제이다. 결국 신냉전기의 핵심 과제는 ‘어느 진영에 종속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전쟁위험을 줄이고 자율적 생존 공간을 확대할 것인가에 있다.
냉전기의 한국은 세계 패권 충돌의 희생 공간이었으나 신냉전기에는 결코 그런 대상으로 남아 서는 안된다. 한국이 자주 외교와 균형 전략, 평화협력 구상을 추진할 수 있다면 한반도는 동아시아 대결의 최전선이 아니라 평화공존·평화협력·평화번영·평화통일의 연결 공간으로 전환될 수 있다. 그것은 한국만의 생존 문제가 아니다. 동아시아 전체의 미래와 직결된 문제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군사블록의 확대가 아니라 전쟁을 막을 새로운 질서에 대한 상상력과 정치적 결단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