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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 성월 기획] 다른 나라에도 연도가 있을까?
선·후창 나눠 노래하는 ‘위령 성무일도’ 있다
우리 고유의 가락으로 연도(煉禱)를 바치는 풍경은 한국교회에서는 익숙한 풍경이다. 구성진 음색으로 선창자(계)와 후창자(응)가 노래를 주고받으며 바치는 연도는 어쩐지 우리 전통의 민요처럼 들리기도 한다. 연도는 연옥 영혼을 위해 바치는 기도, 즉 위령 기도가 우리나라의 문화와 정서에 맞게 자리 잡은 토착화의 훌륭한 사례로 손꼽힌다. 위령 기도를 노래로 바치는 것은 우리나라뿐일까?
결론부터 살피면 외국에도 노래로 바치는 위령 기도가 있다. 바로 위령 성무일도다. 위령 성무일도는 수도회에서 바쳐오던 시간전례의 기도문이 정립된 기도다. 바오로 5세 교황은 고대의 전통과 당대의 여러 예식서를 비교해 1614년 「로마예식서」를 편찬했는데 이때 장례예식을 비롯해 위령 성무일도의 통일된 양식이 정리됐다.
위령 성무일도는 연도처럼 선창자와 후창자로 나뉘어 노래로 부른다는 점이 닮았다. 또 시편기도와 찬미가, 주님의 기도로 구성된 점도 비슷하다. 특히 시편기도에서는 시편 129편이 공통으로 포함된다.
반면 연도는 시간과 관계없이 한 번에 모두 바치는 것에 비해, 위령 성무일도는 시간에 따라 독서기도, 아침기도, 낮기도, 저녁기도로 나눠 바친다. 또 연도와 위령 성무일도는 노래 가락도 전혀 다르고, 연도에는 위령 성무일도에는 없는 ‘성인호칭기도’가 포함돼 있다.
연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런 닮은꼴을 이해하기 쉽다. 연도는 우리나라 고유의 독창성이 돋보이는 기도이다. 동시에 보편교회가 제시하는 표준 전례 안에서 전례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기도 하다.
연도를 한글로 기록하고 있는 「천주성교예규」는 「로마예식서」와 중국의 「성교예규(聖敎禮規)」를 참고하고 있다. 중국의 「성교예규」 역시 그 내용 상 「로마예식서」를 토대로 중국의 상황에 맞춰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윤종식 신부는 “외국에도 위령 성무일도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처럼 우리 특유의 운율로 길게 바치는 기도는 아니”라면서 “서양은 묘소가 성당 가까이 있지만, 우리는 묘소가 먼 만큼, 연도처럼 더 정성스럽게 기도하는 것이 활성화 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장례 예식서와 상장례에서 주의할 점
성당 입구에서 성수 뿌리는 예식과 장례 미사 분리해 거행
주교회의는 최근 2년간 상장례와 관련된 예식서(「상장 예식」,「장례 예식」,「장례 미사」)를 잇달아 새롭게 출간했다. 위령 성월을 맞아 예식서의 어제와 오늘을 살펴보고, 상장례 예식에서 주의할 점을 알아본다.
가톨릭교회는 16세기 중국에서 선교를 시작하면서 장례와 제사 문화를 접했다. 제사를 조상에 대한 감사와 공경을 드러내는 미풍양속으로 인정할지, 미신으로 여길지 100년간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1742년 베네딕토 14세 교황은 제사를 ‘미신 행위’로 규정하고 이를 엄격하게 금지했다.
유교 문화가 지배적이던 당시 조선 사회는 제사를 금지하는 교회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신앙 선조들은 박해 속에서도 제사 대신 천주교식 장례를 치렀다. 이때 사용했던 상장례 예식서와 기도서가 바로 「천주성교예규」다.
「천주성교예규」는 로마 예식서와 중국 「성교예규」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우리 장례 문화에 맞게 예식을 재해석한 한국 교회만의 고유 장례 예식서다. 신자들이 현재 사용하고 있는 「상장 예식」의 모본(母本)이기도 하다.
흔히 ‘연도책’이라고 불리는 「상장 예식」은 1989년 ‘상장례 토착화 연구 특별위원회’가 구성된 이후 십수 년에 걸쳐 각 분야 전문가의 연구와 검토 끝에 2003년 발간됐다. 연도를 비롯해 우제(초우, 재우, 삼우), 화장, 제사 등 우리나라 장례 문화 특유의 요소들을 가톨릭교회 장례 예식에 맞게 적용시켰다. 이후 새 성경이 나오고 미사경본이 바뀌면서 그에 맞게 수정된 책이 2018년 발간됐다. 수정본은 신자들이 보기 쉽게 책 크기를 키웠고, ‘한국 천주교 가정 제례 예식’을 뒷부분에 첨부했다.
제사를 금지하던 교황청 지침은 1939년 제사를 허용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제사를 미신이나 우상숭배가 아니라 ‘문화 풍속’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한국 천주교회는 제사를 ‘허용’하지만 권장하지 않는다. 제사보다는 성당에서 위령 미사를 봉헌하기를 권고하고 있다.
‘한국 천주교 가정 제례 지침’에 따르면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허락한 제례는 유교식 조상 제사를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조상에 대한 효성과 추모의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차원에서 그리스도교적으로 재해석한 예식이다. 따라서 한국 천주교 제례의 의미가 조상 숭배의 개념으로 오해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한국어본 장례 예식서는 교황청이 발간한 「장례예식 표준판」을 번역하여 1976년 출판됐다. 하지만 라틴어를 그대로 번역한 것이어서 한국의 상장례 문화가 전혀 고려되지 않은 한계를 지녔다. 이후 「상장 예식」이 완성되고 「상장 예식」 안에서 전례 예식 부분만을 따로 뽑아 만든 것이 「장례 예식」이다. 2004년 「장례 예식」(시안)이 만들어지고 나서 2018년이 돼서야 새 성경과 미사경본에 맞게 새롭게 번역, 출간됐다.
새 「장례 예식」은 그동안 관행처럼 행해지던 몇 가지 전례 사항을 수정했다. 우선, 장례 미사 전 성당 입구에서 사제가 시신에 성수를 뿌리고 기도하던 예식과 미사를 분리했다. 이전에는 성당 입구에서 하던 예식을 미사의 시작으로 보고, 사제와 유가족이 모두 성당에 들어오면 미사 시작 예식을 생략하고 본기도로 들어갔다. 새 「장례 예식」에 따르면 장례 미사 전 성당 입구에서의 예식은 ‘죽은 이의 집에서 하는 예식’으로 장례 미사와는 별개다. 성당 입구에서 예식을 했더라도 입당 후 미사 주례자는 제대에 인사하고 십자성호를 긋는 시작 예식부터 빠짐없이 미사를 거행해야 한다.
또 장례 미사 집전이 금지된 날(의무 대축일, 성주간 목요일, 파스카 성삼일, 대림ㆍ사순ㆍ부활 시기 주일)에도 위령 미사 기도문이 아닌 그 날의 전례 기도문을 사용하면 장례 예식을 거행할 수 있다. 장례 미사 때 고별식은 강복과 파견 예식을 대체하므로, 고별식을 했다면 강복과 파견은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
「장례 미사」는 2019년 1월 사제들의 장례 미사 집전 편의성을 높이기 위해 간행됐다. 기존 「장례 예식」에서 미사 통상문과 독서 등을 수록했다. 또 장례 미사와 구분되는 ‘사망소식을 들은 뒤에 드리는 미사’ 기도문과 ‘성당 밖에서 거행하는 기일 미사’ 기도문도 포함했다.
가톨릭대 신학대 전례학 교수 윤종식 신부(의정부교구)
설이나 한가위와 같은 명절 때면 각 본당에선 조상을 기억하며 위령 미사를 봉헌한다. 이때 몇몇 본당에선 제대 앞에 제사상을 차린다. 가톨릭대 신학대 전례학 교수 윤종식(의정부교구) 신부는 “하느님께 드리는 흠숭의 공간과 조상께 드리는 공경의 공간은 명확하게 분리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신자들을 위한 사목적 배려가 오히려 신자들에게 미사와 제사가 같은 것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어서다. 윤 신부는 “미사가 완전히 끝난 뒤 상차림을 하고 연도를 바치거나 다른 장소에서 예식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설명했다.
윤 신부는 또 불교에서 유래한 49재를 지키는 풍습이 가톨릭교회 교리와 맞지 않는다고 했다. 49재는 죽은 뒤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윤회설에서 비롯한다. 죽은 뒤 하늘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한 삶을 누린다고 가르치는 가톨릭교회는 윤회를 인정하지 않는다. “49일에 맞춰 미사를 봉헌하기보다 신자라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성령이 강림한 50일을 기준으로 기일 미사를 봉헌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전례의 토착화와 사목적 배려를 강조하다가 자칫 교회 정신과 가르침에 어긋날 수 있는 위험이 있음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
윤 신부는 이어 보다 토착화된 「장례 예식」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현재 우리나라 화장률은 84.6%(보건복지부, 2017)에 이른다. 윤 신부는 “「상장 예식」에는 화장하기 전에 하는 기도가 포함돼 있지만 정작 전례에서 사용하는 「장례 예식」에는 수록돼 있지 않아 이 부분이 좀더 보완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목자에겐 장례 미사 집전뿐만 아니라 화장터, 장지까지도 동반하는 노력이 요청된다”고 말했다.
윤 신부는 상장례 예식에서 죽음이 슬픔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새롭게 태어난다는 기쁨의 의미가 좀더 드러나기를 바랐다. 초기 가톨릭교회는 죽음을 슬퍼하기보다 파스카 신비를 묵상하며 감사의 노래를 불렀다. 윤 신부는 “연도에서 파스카의 의미가 담긴 시편 24편, 113편, 117편이 앞으로 추가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 시편은 초기 교회에선 불렸지만, 중세를 거치면서 생략됐다.
이와 함께 “죽음의 상징이 된 검은색 상복이 부활을 나타내는 흰색으로 복원돼야 한다”고 했다. “한민족의 상복은 흰색이었고, 삼베옷을 입었죠. 그리스도교 부활의 상징도 흰색입니다. 초기 교회 신자들은 장례식 때 흰옷을 입었고요. 지금 상황에선 현실적으로 흰색 양복을 입기는 어렵겠지만, 흰색을 복원할 방법을 고려해야 합니다.”
[전례 영성 – 전례주년] 한 해를 주기로 펼쳐지는 파스카 신비
전례주년은 그리스도의 신비
전례는 물레방아와 같다. 흐르는 시간 속에 빙글빙글 돌아간다. 매일, 매주, 매년의 일상을 찧으며 끊임없이 반복해서 돌아간다. 그날이 그날 같고, 그해가 그해 같던 평범한 날들은 전례라는 물레방아에 찧어지고 빻여져 주님의 시간으로 변화된다.
매일은 주님과 함께 죽고 부활하는 날, 매주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하는 새 창조의 주간, 매년은 “강생과 성탄에서부터 승천, 성령 강림 날까지, 또 복된 희망을 품고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까지” 펼쳐진 “그리스도의 신비 전체”가 된다.
전례주년이란 이렇게 “한 해의 흐름을 통하여 지정된 날들에 하느님이신 자기 신랑의 구원 활동을 거룩한 기억으로 경축하는 것”(전례 헌장, 102항)이다. 그중에서도 “주님 수난과 부활의 파스카 성삼일은 전례주년 전체의 정점으로 빛난다.”
또한 “주일이 한 주간의 절정이듯, 부활 대축일은 전례주년의 절정을 이룬다”(「로마 미사 경본」, ‘전례주년과 전례력에 관한 일반 규범’, 18항).
전례주년의 정점, 파스카 성야
부활 대축일 전례에서도 특히 파스카 성야 예식은 “모든 장엄한 예식 가운데 가장 드높고 존귀하다”(「로마 미사 경본」, ‘파스카 성야’, 2항). 파스카 성야의 “모든 예식은 밤에 거행한다”(3항). 이 밤은 ‘파스카 찬송’에서 노래하는, 그리스도께서 “저승에서 부활하시어 온 인류를 밝게 비추시는”, “대낮같이 밝은” 밤이기 때문이다. 밤을 강조하기 위해 성당 불은 다 끈다. 성당 바깥도 한처음 창조의 순간처럼 어둠에 덮여 있다.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기고 창조의 첫날이 지났던 것처럼(창세 1,1-5 참조), 사제는 새 불에서 파스카 초에 불을 댕기며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빛으로 오시도록 기도한다.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그리스도님, 이 빛으로 저희 마음과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소서”(14항).
파스카 초의 행렬이 시작되고 교우들은 그 뒤를 따른다. 모두가 성당에 들어오면 파스카 찬송이 울려 퍼진다. 이어지는 말씀 전례는 “주님께서 한처음부터 당신 백성에게 하신 놀라운 업적들을 묵상하는”(2항) 시간이다. 구약의 마지막 독서가 끝날 때까지 제대 초에는 불이 켜지지 않지만,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음이(요한 1,9 참조) 점점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파스카 성야의 정점, 세례식과 성찬례
“모든 밤샘 전례의 어머니인 파스카 성야”(「로마 미사 경본」, ‘파스카 성야’, 20항)의 정점은 “부활의 날을 맞이하여 교회의 새 지체들이 새로 태어나는 세례식”(2항)이다. 새 신자들은 세례를 통하여 신앙의 빛 속으로 받아들여진다(히브 6,4; 10,32 참조). 세례의 빛을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성사들과 성령을 받을 자격”(「어른 입교 예식」, 24항)을 갖춘 새 신자들은 마침내 모든 신자와 함께 “주님께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의 기념제로, 당신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하라고 당신 백성에게 마련해 주신 식탁에 참여한다”(「로마 미사 경본」, ‘파스카 성야’, 2항).
새 신자들은 이날 처음으로 영성체를 하며, “성찬은 그리스도교 입문의 절정이며 그리스도인 삶 전체의 중심”(64항)임을 깨닫는다.
3일에 걸쳐 거행하는 파스카 성야
교회는 파스카 성삼일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성금요일), 묻히셨으며(성토요일), 부활하신(부활 대축일) 주님을 특별한 예식으로 기념한다.
성금요일과 성토요일은 “손에 등불을 밝혀 들고 주인을 기다리다가, 돌아오는 주인과 함께 식탁에 앉을 수있도록 깨어 있는 밤”(「로마 미사 경본」, ‘파스카 성야’, 1항)과 비슷하다. 이 ‘밤’의 시간은 벌거벗은 제대가 상징하듯, 아직 주님과 함께 식탁에 앉을 준비가 안 된 때이다. 혼인 잔치에 신랑이 함께 있지 않는, 곧 신랑을 빼앗긴 ‘긴 밤’이다(마르 2,20 참조).
따라서 이 두 날에는 “오랜 관습에 따라 교회는 고해성사와 병자 도유를 제외하고 모든 성사를 거행하지 않는다”(「로마 미사 경본」, ‘주님 수난 성금요일’, 1항).
그 대신, “기도와 단식을 하며 주님의 부활을 기다린다”(「로마 미사 경본」, ‘성토요일’, 1항). 특히 성금요일은 의무이고 가능하면 성토요일까지 이어지는 파스카 단식은 성삼일 예식에 참여하는 이들의 “마음을 드높여 주님 부활의 기쁨에 이르도록”(「로마 미사 경본」, ‘파스카 성삼일’, 1항) 돕는다. 그리하여 “장엄한 파스카 성야 예식을 거행한 뒤에야 부활의 기쁨이 찾아오고, 이 기쁨은 50일 동안 넘쳐흐를 것이다”(「로마 미사 경본」, ‘성토요일’, 2항).
주일,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간 첫날 이른 아침”(요한 20,1) 제자들에게 찾아온 부활의 기쁨은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요한 20,26) 있을 때 찾아 왔다. 여기서 “여드레 뒤”, 이른바 제8요일은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 곧 주일의 기원이 되었다. 창조의 첫날인 일요일이 새 창조의 첫날이 된 것이다. 그래서 주일은 창조의 7일을 벗어난, 해가 지지 않는 영원한 날의 상징이다.
이렇게 7일을 일곱 번 보내고, 주님 부활 대축일부터 50일째 되는 날, 곧 성령 강림 대축일에 교회는 부활 시기를 끝맺는다.
“주간마다 주일이라고 불린 날에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또 일 년에 한 번 주님의 복된 수난과 함께 이 부활 축제를 가장 장엄하게 지낸”(전례 헌장, 102항) 교회는 부활 시기 50일 전체를 마치 부활 대축일 하루처럼 여기며 이 전체 시기를 통틀어 “대(大) 주일”이라고 부른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주일은 최초의 근원적인 축일”이며 “전례주년 전체의 토대이며 핵심”(전례 헌장, 106항)이라 말한다.
전례주년 전체를 비추는 파스카 신비
전례주년에는 파스카 축제 말고 성모 마리아와 다른 모든 성인의 축일들, 그리고 대림, 성탄, 사순 같은 전례 시기들도 포함되지만, 사실 이 모든 기념은 “파스카라는 단 하나의 신비가 지닌 다양한 측면이 전개되는 것이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171항). 그래서 “빛의 근원인 파스카 성삼일에서 시작하여 부활의 새로운 시기는 전례주년 전체를 찬란히 비춘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168항).
파스카 만찬인 성찬례를 한 해의 중심(파스카 성야)이요, 한 주의 중심(주일 미사)이자, 하루의 중심(매일 미사)으로 놓고 살아갈 때, 전례주년은 참으로 “주님의 은혜로운 해”가 되고, 매주, 매일이 “구원의 날”, 매 순간은 “은혜로운 때”(2코린 6,2)가 된다.
[홍보위원회가 전하는 가톨릭+서울] 모든 성인 대축일(11/1)과 할로윈(10/31)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매년 10월 31일이면 용산구 이태원 일대는 형형색색 코스튬 분장을 한 사람들로 거리가 마비됩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축제 ‘할로윈(Halloween) 데이’를 기념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할로윈이 친숙한 문화로 자리매김하면서 곳곳에서 사람들은 유령이나 괴물 복장을 하고 축제를 즐깁니다.
할로윈의 기원은 고대 켈트족의 삼하인(Samhain) 축제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켈트족은 1년의 끝을 10월 31일로 인식했고, 그날에 유령이나 마귀가 저승에서 온다고 믿었습니다. 이들에게 해를 입지 않기 위해 귀신으로 변장하고 음식을 나누며 악령을 달래기 위한 축제를 지냈습니다. 서기 800년 이후, 그리스도교의 전파와 함께 이 축제는 ‘모든 성인(聖人) 대축일(11월 1일)’ 전날 밤의 행사로 자리 잡았습니다. 모든 성인 대축일 전야제를 뜻하는 말(All Hallows’ eve)이 줄어서 ‘올핼러우윈(All Hallow e'en)’이나 ‘할로윈(Halloween)’이 됐고, 오늘날에는 할로윈(Halloween)이라 부릅니다. 가톨릭교회는 할로윈을 무작정 금지하기보다 모든 성인 대축일의 의미를 부각해 교회의 교리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변형시켰습니다.
하지만 현대의 할로윈에서는 모든 성인 대축일 전야 축제로서의 모습은 찾기 어렵습니다. 최근 상업화된 할로윈 축제를 두고 외국 문화를 단순히 모방하기만 하고 의미를 생각하지 않는 축제는 지양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11월 한 달을 위령성월로, 11월 2일은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로 보냅니다. 이날은 모든 성당과 성직자 묘역에서 세상을 떠난 이를 기억하는 미사가 거행됩니다. 그 전날인 11월 1일 모든 성인 대축일은 하늘에 있는 모든 성인을 기리는 대축일로,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는 성인들의 모범을 본받고자 다짐하는 날입니다. 성인이 죽은 날은 하늘에서 다시 태어난 날로 여기는데, 성인뿐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순교자와 의롭게 산 사람들의 새로운 탄생을 모두 축하하는 날입니다. 이날은 하늘의 성인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삶을 공경하고 본받으려 기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8년 모든 성인 대축일을 맞아 “성인이란 달력 속에 등장하는 가장 유명한 성인들뿐 아니라, 옆집 이웃과 우리 가족, 우리가 아는 모든 이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위령성월을 앞둔 우리는 죽음 너머의 삶을 묵상하고, 주변 어려운 이웃에게 더 관심을 보이며, 하느님 사랑을 증거하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상업화된 할로윈 축제를 무작정 즐기기보다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범을 따라 생활하다 죽은 후 하느님과의 일치를 누리고 있는 모든 이를 기억하고 기려야 합니다. 우리 또한 죽음 뒤의 새로운 삶을 바라며 희망의 여정을 계속할 힘을 얻도록 기도합시다. 지상의 우리와 천국의 모든 성인 간의 연대성을 깨우치고 주님을 닮은 ‘성인’이 될 수 있도록,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성인들께 전구(轉求)를 청합시다.
[성모 동산의 꽃과 풀들] 가을 성모 동산의 결실들, 밤 · 박 · 석류
초목들은 대체로 봄에 싹을 틔우고 여름 내내 왕성하게 자란 끝에 가을이 되면 한해를 치열하게 살아온 결실을 낸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초목들에서 그 나름의 메시지를 읽어 냈다.
밤
갈색으로 반짝이는 열매를 내어 주는 밤나무는 참나무과 낙엽교목으로, 아시아·유럽·북아메리카·북부 아프리카 등 온대 지역에 10여 종이 분포한다. 그 중에서 한국·중국·미국·유럽 지역 밤나무들의 열매는 단맛이 뛰어나서 식용으로 인기 높다.
우리나라에는 밤나무가 중국의 승려들에 의해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는데, 역대 왕조들은 밤나무 재배를 권장했다. 고려 시대에는 왕이 농경지를 제외하고 나무가 자랄 만한 곳에는 밤나무, 옻나무, 닥나무를 심게 했고, 조선 시대에는 법전인 ‘경국대전’에 밤나무 과수원 관리에 대한 내용을 수록하고 부역을 면제하면서까지 밤나무 재배와 생산을 독려했다. 그런데 20세기 중반에 병충해로 말미암아 토종 밤나무들이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고, 지금은 해충에 강한 토종 밤나무들과 일본의 밤나무를 개량한 품종들이 재배된다.
소아시아에서는 열매의 단맛이 뛰어난 밤나무를 오래전부터 재배했다. 그리고 이 품종(유럽 밤나무)이 로마 제국 시대에 유럽에 전해졌다. 그리하여 오늘날 섬나라 영국에서도 1천 년 이상 된 밤나무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널리 퍼졌다. 그리고 유럽 곳곳의 여러 수도원들은 정원에 밤나무를 많이 심었다.
밤나무의 학명은 카스타네아(castanea)인데, 이는 밤나무를 일찍부터 재배한 소아시아의 도시 이름 카스타니스(Castanis)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이 이름의 뿌리는 ‘순결한, 정결한’이라는 뜻의 라틴어 카스투스(castus)다.
이름에서 그리고 열매의 독특한 모습을 보고, 그리스도인들은 밤을 정결(순결)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밤은 가시로 뒤덮인 겉껍데기 안에서 보호될뿐더러 그 가시들로부터는 아무런 손상도 입지 않는바, 정결의 덕[貞德]이 가시들로 상징되는 육체적 유혹들을 물리치고 거둔 승리이고 가시투성이 밤송이 안의 알밤이 그 승리의 결실을 나타낸다고 본 것이다. 수도원들이 밤나무를 재배한 것도 아마 이런 상징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가시로 뒤덮인 밤송이는 그리스도의 고통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밤은 원죄에 둘러싸여 계시면서도 원죄에 물들지 않으신 동정 성모 마리아와 그분의 원죄 없으신 잉태도 암시한다. 성미술 작품에 더러는 밤나무가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때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리킨다. 이는 밤나무의 본줄기를 자르면 그루터기에서 길고 곧은 가지들이 새로 돋아나서 왕성하게 자라는 특성과 관련된 상징성이다.
박
박은 박과의 한해살이 덩굴식물이다. 지금은 보기 어려운 풍경이만, 이 땅에 초가집이 많던 시절에는 집집마다 박을 심어서 줄기가 지붕으로 타고 올라가게 했다. 그리하여 가을이면 크고 둥근 박들이 초가지붕 위에서 영글어 갔다. 인도와 아프리카가 원산지인 박이 한국에는 중국을 통하여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박은 열매를 관상용으로, 식용으로, 생활용기로, 또한 수박의 대목용으로 이용하기 위해 재배되었다.
서양에서는 박이 흔히 요나 예언자의 이야기와 관련되는 식물로 이해된다. 요나는 니네베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섭리가 못마땅해서 끝까지 그분께 맞섰다. 그런 요나를 하느님께서는 한 식물을 이용하여 깨우쳐 주셨다(요나 4,5-11 참조. 우리말 성경에는 이 식물이 ‘아주까리’로 번역되어 있는데, 성경 판본에 따라서 ‘박’으로 나오기도 한다. 이 이야기에서 유래한 영어 관용구 ‘Jonah’s gourd’, 곧 ‘요나의 박 덩굴’의 뜻은 그래서 ‘급속하게 성장했다가 이내 시들어 버리는 것’이다).
전에 그리스도인 순례자들은 박을 길을 나설 때 물을 담아 가지고 다니는 그릇으로 이용했다. 그리하여 박(조롱박)은 사도 성 야고보(대)와 라파엘 대천사를 가리키는 특별한 표지가 되었고, 또 때로는 부활하시어 순례자처럼 꾸미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동행하신 그리스도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련성 때문에 박은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하게도 되었다. 성미술 작품에 박이 더러는 사과와 함께 등장하는데, 이 경우에도 박은 주님의 부활을 뜻한다. 악 또는 죽음을 상징하는 사과에 대응하여 악과 죽음을 해소하고 극복하게 해준 것이 주님의 부활이기 때문이다.
석류
석류나무는 석류나무과의 낙엽소교목이다. 서아시아와 인도 서북부 지역이 원산지이며, 한국에는 고려 초기에 중국에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사전 등에는 석류나무가 남부 지방에서 심어 기르는 나무라고 소개되어 있지만, 이제는 서울과 경기도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석류나무는 관상용 또는 약용으로 재배되는데, 5∼6월에 붉은 색 꽃이 피고 여기서 맺힌 열매가 9∼10월에 갈색이 도는 노란 색 또는 붉은 색으로 익는다. 여성호르몬과 유사한 성분을 많이 함유하여 ‘여성의 과일’이라고 불리는 석류의 속은 여러 개의 방으로 나뉘고 각 방에는 즙이 많은 붉은빛 과육이 씨앗을 둘러싼 모양의 소낭이 들어 있다.
석류는 씨가 많은 과일이어서 동양에서는 포도와 더불어 다산을 상징하는 과일로 꼽혀 왔다. 한편, 그리스도인들은 석류를 교회의 상징으로 보았다. 한 열매 안에 수많은 씨들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씨들은 교회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을, 그들이 교회와 하나를 이루는 신실함을, 그들이 믿는 영원한 삶에 대한 약속을 상징한다. 석류는 그리스도교 세계에서도 일찍이 다산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하게 되었다. 열매가 익으면 과피가 벌어지는데, 이때 붉은 과즙은 그리스도의 피와 고통을, 씨들이 밖으로 돌출해 나오는 현상은 그분이 무덤을 열고 나오시는 부활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련성으로 해서 성모자를 그린 성미술 작품에서 석류를 종종 볼 수 있다.
[전례, 그 능동적 참여] 진리는 만남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진리는 만남이다(la verita e un incontro)”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남이라는 요소는 전례와 신앙생활을 이루는 기본 구조이자 원리입니다. 이 원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작이 바로 마리아의 삶에서 시작됩니다.
만남은 대화의 가장 중요한 시작입니다. 만남이 없다면 어떠한 대화도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진정한 만남은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가 있습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사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낼 수 있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제가 좋아해 자주 암송하는 정현종 님의 ‘방문객’ 이라는 시처럼 만남은 어마어마한 일이며 두 존재의 역사의 만남입니다. 마리아를 은총의 중재자라고 부릅니다. 하느님과 인간을 만나게 해준 인간! 하느님을 인간과 만나게 해준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누구를 만나게 해준다는 것은 이미 만나게 해주는 존재가 두 존재를 만난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고백문인 사도신경이나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에서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께 잉태되어나시고” 라고 고백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를 통하여 이 땅에 인간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이것은 마리아의 신앙과 순명으로 일어난 엄청난 역사입니다.
성모님의 잉태, 하느님의 인간 구원방식인 대화와 만남 있었기에
처녀 마리아가 자신의 순명과 신앙으로 응답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천사 가브리엘의 인사를 거절하였다면 온 인류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상상해본다면 어떻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되심은 바로 마리아의 어머니 되심과 동시적인 역사적 순간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것은 하느님의 인간 구원방식인 대화와 만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이러한 순명과 신앙의 응답을 기념하는 대목인 “동정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나시고” 라는 대목은 밑줄이 그어 있으며 이 대목에서 깊은 절을 한다고 교회 전례 지침은 명령하고 있습니다.
주일은 작은 부활이라고 합니다. 이 작은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로 우리의 생명이신 구원의 역사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 거룩한 주일의 미사전례를 보면 평일미사와 다른 특징 중 하나가 바로 대영광송을 하는 것입니다.
주일미사 때 대영광송을 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대영광송은 성탄날 울려 퍼진 천사들과 목동들의 찬송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경축하는 것은 부활의 뿌리입니다. 마리아의 순명으로 이 땅에 아기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십자가의 인간 예수 그리스도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일에 대영광송을 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개신교에서는 이러한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을 이루게 한 마리아의 역할에 대해 신경의 내용을 삭제하거나 그 의미를 약화하거나 오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초대 교회부터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미사와 그 밖의 전례 그리고 교리 안에서 마리아의 구원역사 안에서의 역할을 역사적으로 제시하고, 이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방식인 만남의 방식을 전례적 표현과 신앙고백 그리고 영성생활에 담고 이를 후세에 전승하였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묵주기도를 시작하면서 사도신경을 바치면서 “동정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나시고” 라고 말하며 절을 하고, 주일미사 때 대영광송을 하며 마리아가 예수아기를 낳아주심을 경축하며 하느님이 사람이 되심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진리는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더 나아가 “진리는 만남입니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부부의 사이가 멀어졌을 때 그들의 혼인을 주례했던 사제가 그들에게 “여러분이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해보십시오”라고 말했더니 부부가 다시 사랑을 꽃피웠다고 합니다.
성경 묵상과 전례 참여 때 만남이라는 중요한 요소 잊지 말아야
“어떻게 만난 사이인데?” 라는 질문을 한다면 모든 존재가 그 존재가 갖는 역사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 만남을 통한 생명력을 느낄 것입니다. 앵무새처럼 사도신경을 외우고 습관적으로 주일미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다가오는 모든 이들이 역사 자체임을 깨닫고 그 만남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이 바로 우리 행복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은 공생활을 시작하는 첫 말씀으로 “행복하여라!” 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만나라!” 라는 뜻입니다. 마리아는 처녀가 아기를 갖는다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사건 예고를 천사로부터 들은 후 홀로 있지 않고 엘리사벳을 만나러 서둘러 길을 떠났습니다.
천사와의 만남은 바로 엘리사벳과의 만남으로 이어졌습니다. 즉 하느님과의 만남과 대화가 바로 이웃과의 만남과 대화로 이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하나인 것을 의미합니다.
레지오 마리애 활동의 기본 방식은 만남과 대화입니다. 우리가 주회합을 중요시 하는 것은 만남과 대화의 기본방식을 실천하기 때문입니다. 주회합에서 함께 기도하고, 보고하고, 배우고, 의견을 나누는 것은 만남과 대화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만남과 대화는 생명과 기쁨을 가져다주고 위로와 희망을 갖게 합니다.
우리는 묵주기도를 시작하며 예수님의 발에 친구합니다. 그 순간 우리는 십자가 아래 있는 성모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루의 짜증나고 피곤하고 힘든 일들이 그 순간 숙연함 앞에 사라집니다.
말씀의 식탁과 성찬의 식탁을 통해 우리를 만나길 원하신 예수님은 바로 성모 마리아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분이 너희 어머니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십자가에서 우리는 성모 마리아의 자녀로 탄생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천상의 아룀으로 성자의 어머니로 그리고 십자가의 성자의 말씀으로 온 인류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성경을 묵상할 때 그리고 전례에 참여할 때 우리는 만남이라 중요한 요소를 결코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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