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없는 환아정(換鵝亭:아래그림1/전재)은 이조 태조 초(1395년경)에 산음현
현감 심린이 창건했단다.
고려말~ 이조초에는 감무(監務)가 파견된 작은 현이었으므로 신빙성이 약하지만,
정유재란때 소실된 후 복원과 중수를 거듭하며 산청의 정신적 자산이 되었다는데
그까짓 건립시기가 대수겠는가.
그래서 복원하려 하지만(아래그림2는 조감도/전재) 용이하지 않단다.
옛 환아정 터에 산청초등학교(아래그림3)가 들어서 있기 때문이며(철거불가니까)
복원터를 따로 물색하는 것 또한 역사성이 훼손된다 해서 이론이 분분하다니까.
이름을 진(晉)국 왕희지(王羲之)의 백아환자(白鵝換字)에서 따왔다는데 복원할 때
사대주의적 사고에서 탈피해 정자 이름도 바꿔버리는 것이 어떨까.
중국 산음의 인물 왕희지와 대한민국 산음(산청)과 무슨 개연성이 있기에?
걸핏 하면 남명, 선비정신을 들먹이는데 개도 안물어갈 선비, 선비정신 아닌가.
중국 조차도 버린 선비정신을 언제까지 우려먹으려 하는가.
산청인들은 환아정을 통한 자부심보다 '원인불명'으로 묻어버린 1950년의 소실에
대해 통렬한 자괴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척화비(斥和碑)는 흥선대원군이 강행한 쇄국정책의 상징이다.
병인(丙寅)과 신미(辛未) 두 양요(洋擾)를 치른 대원군이 서구세력의 단호한 배척을
온 나라에 널리 알릴 목적으로 전국의 중요 지역에 세우게 한 비석이니까.
산청초등학교 교정에도 척화비(도유형문화재 제294호:아래그림4. 5)가 있다.
사람의 왕래가 빈번한 환아정 뜰에 세웠는데 일제가(?) 두 조각내어 땅에 묻은 것을
학교 교사 신축때 발견하여 현 위치에 복원했단다.
그런데, 왜 병인년에 만들어 놓고도 5년 후 신미년에 세웠을까.(丙寅作辛未立:비문)
고전 끝에 프랑스군을 물리친(병인양요) 대원군은 쇄국정책 의지를 더 강화해 갔다.
아마, 그래서 그 때 척화비를 만들도록 지시했을 것이다.
그리고는, 5년이나 뜸들이다가 세운 까닭은?
신미년, 미국의 침략(?)이 없었다면 척화비는 유야무야 됐을까.
그랬다면 쇄국정책도 접고 서방의 문물을 과감하게 받아들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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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와 담장 사이인 경호강가 동산에 수계정(脩稧亭:아래그림1)이 있다.
환아정의 복원 중수 때 지어진 정자라는데 서자 취급을 받았나.
환아정에 대해서만 요란할 뿐 언급이 없다.
강가에 세운 점과 정자 이름으로 보아 계사(稧事)가 목적이었을 듯.
당초의 목적이 어떠하던 막힘이 없는 뛰어난 위치다.
남강의 상류가 경호강이다.
경호강의 상류는 엄천(嚴川또는休川),임천이며 임천의 끝은 전남 구례군 산동면
과 경계인 전북 남원시 산내면 덕동리에서 시작되는 만수천이다.
지리산 주능선에서 발원하는 물줄기가 모여 이루는 심원계곡이 남원시 산내면에
들어서면서 달궁계곡이 되고 다시 뱀사골 줄기와 합류해 이룬 내가 만수천이다.
만수천(萬壽川)은 임천(臨川)과 엄천(嚴川또는休川), 경호강과 남강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진양호에 이르러 휴식을 취하다가 마지막 여정인 낙동강길을 떠난다.
지리산을 떠나 긴 여정에도 지칠 줄 모르고 싱싱하게 달리면서 경호강에 이르러
래프팅(rafting) 마니아들을 사로잡는다.
경호강가의 생초 경호정(鏡湖亭: 아래그림2)도 휴식과 감상의 적지라 하겠는데
아직 시즌이 아라라 아쉽다.
선비정신과 래프팅,
갓 쓰고 자전거 타는 모습 같지 않은가.
경호강변 야산에는 생초국제조각공원(아래그림3)이 조성되어 있다.
거금을 들여 박물관까지 신축했으나 전시할 자료(유물)가 없단다.
김포, 설봉(이천), 남망산(통영), 유달산(목포)에도 국제조각공원이 있다.
다음에는 어디에 또?
지자체들이 왜 이리 경쟁 일변도인가.
이러다간 온 나라가 조각공원화 될라.
국제는 커녕 전시할 만한 국내 조각품이라도 확보할 수 있는가.
자칫 부실하고 작품의 질적 저하로 식상할까 염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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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서면(今西) 화계리(花溪).
우뚝한 필봉산, 왕산자락에 전구형왕릉(傳(仇衡王陵:아래그림1~3)이 있다.
가락국(駕洛,金官伽倻)10대 구형왕의 능이란다.
다만, 전해 올 뿐 확증이 없다 하여 '전(傳)구형왕릉' 이라 한다는데 '傳'자에 불만을
품은 탐방객이 그랬는가.
그 글자를 뭉개버렸다(아래그림3)
김유신사대비(아래그림4)와 문화재자료 50호로 지정된 덕양전(아래그림5. 6)으로는
구형왕릉의 접두어 '전'(傳)자 떼어내기가 역부족인가.
하도 휘들리는 문화재청이라 의구심이 드는데 그 탐방객도 나와 유사한 심정이었나?
그래도, 자잘한 돌로 된 무덤이지만 우리나라 유일(?)의 피라미드형 7단 적석총(績石
塚)이라는 이유에선지 사적(제214호)으로 지정되어 있다.
가락국은 기록이 제각각인데 삼국유사에 의하면 임인년(서기 42)에 건국하여 490년
만인 임자년(532)에 신라23대 법흥왕이 이끈 군사에 패하여 신라에 합병되었다.
"가락국 멸망의 한(恨)을 고스란히 품고 왕산 자락에 잠든 구형왕은 편안히 흙속에
묻히는 것조차 거부하고 돌로 무덤을 만들게 해 후세인들이 산 이름까지 왕산으로
불렀지 않나 싶습니다"
금서면장의 말인데 왜 내 코끝이 찡했을까.
조금 아래에는 '新羅太大角干純忠壯烈興武王金庾信射臺碑' (신라태대각간순충장열
흥무왕김유신사대비:아래그림4)가 서있다.
사후(死後)에 신라의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봉(封)됐지만 김유신은 가락인이었다.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의 13세손이며 구형왕의 증손자다.
'사대비'가 서있는 곳은 김유신이 어린 시절에 자신의 증조부인 구형왕 무덤 앞에서
수년간 시묘살이 할 때 활쏘기를 연마하던 곳이란다.
왕릉으로 오르는 마을(화계리) 끝에는 덕양전(德讓殿:아래그림5. 6))이 있다.
구형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춘.추(음3월16일, 9월16일)향례와 음력 초하룻
날과 보름에 삭망 향례를 올리는 곳이란다.
덕양전 지근의 망경루(望京樓:아래그림7. 8)는 고려의 유신(遺臣) 농은 민안부(農隱
閔安富)와 관계된 정자다.
이성계의 쿠데타로 망한 고려 유신들의 은거지가 개경 만수산 자락의 두문동이다.
농은은 두문동72현 중 살아남은 한 분이다.
어떤 연유인지 그는 이곳 산음 대포리까지 남하해 농사지으며 은둔생활을 했단다.
은둔중에도 매월1일과 15일에 왕산 중턱에 올라가 송경(松京)을 바라보며 고려왕을
그렸는데 후세인들이 부르는 왕산 중턱의 망경대(望京臺)가 바로 그 자리라고.
한데, 단성의 문익점과 정천익 양 후손들의 시비를 빼닮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보통,목은 이색(牧隱李穡), 포은 정몽주(圃隱鄭夢周), 야은 길재(冶隱吉再)를 고려의
유신 삼은(三隱)이라 한다.
6은은 위 3은과 도은 이숭인(陶隱李崇仁), 수은 김충한(樹隱金沖漢)과 함께 농은(農
隱)을 말하는데 공교롭게도 유신중에 농은 호를 가진 이가 둘이다.
여흥민씨 농은 민안부와 옥천조씨 농은 조원길(農隱趙元吉).
그래서 양 가문의 주장이 아전인수식이란다.
민안부의 호는 원래 소암(素菴)이었는데 산청에 은거하는 동안에 스스로 농암이라고
개작했다는 것이 사실인가.
민안부의 농은유집(農隱遺集)에 있다는 갑골문자 천부경(天符經)의 진위 여부는 왜
밝혀지지 않고 있는가.
양 가문의 열을 식힐 결정적 키(key)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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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산 오르는 도중에 '류의태우물'아래그림1~3)이 있다.
TV드라마 '허준'의 산물일 것이다.
그러나 '의성(醫聖) 허준의 스승 신의(神醫)류의태'라는 사제관계를 전제로 한
실명의 우물이라면 이 우물은 가짜다.
역사성도 사실성도 없는 픽션(fiction虛構)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신의, 의성 여부는 차치하고 이조19대 숙종때 사람 유이태(이조시대 의원명단
에 등재돼 있는 유일한 이름)가 14대 선조때 어의 허준의 스승이 될 수 있는가.
산청군의 관계자들이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TV드라마의 위력에 편승해 관광상품화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동의보감의 고장을 상징하는 전통한방관광단지도 왕산 중턱에 조성중이니까.
류의태우물까지 반쯤은 임도가 나있다.
채준수 KEPCO(한국전력)창원지점장 부부(아래그림3)가 내게 상당한 시간을
선사했다.
기꺼이 나를 편승하게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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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천 위의 임천교(아래그림1)는 산청군 금서면과 함양군 유림면을 잇는다.
유림면을 거쳐 본통삼거리(아래그림2)에 도착했으므로 구형왕릉이 많이 우회하게
했을 뿐 아니라 본통치 넘는 것도 포기하게 한 것이다.
본통치는 우리 국군의 잔혹사(?)가 뿌려진 고개란다.
여수순천 반란사건때 양민들이 반란군 통비자(通匪)로 몰려 국군에 의해 억울하게
학살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니까.
살육의 비극이 멎은지 반세기가 지나서도 은폐 사실들을 일일이 들춰내는 역사가
두렵지 않은가.
함양군 수동면 화산리 섬동마을 길가에 신축한 정자(아래그림3)가 무척 고마웠다.
혼자라는 이유로 퇴박만 맞아 굶은데다 종일 앉아보지 않았으니 아니 고맙겠는가.
이즈음의 정자는 운좋게 명가에 태어나 조상덕에 할 일 없이 빈둥대며 세월 죽이는
한량(閒良)들, 소위 시인묵개의 전유물이 아니다.
고달프게 일하다가 땀식히고 피로를 푸는 민초들의 휴식처요 마을공론을 도출하는
민주광장이며 나같은 길손의 오아시스다.
고색짙고 유서깊은 내력이 별거냐.
달빛에 물들면 신화요 햇볕에 바래면 역사가 된다잖은가.
이 정자도 지금은 아무 채색 없고 알아주는 이 없지만 한 세월이 흐른 후에는 고색
창연한 신화와 역사로 채색될 텐데.
아무리 그렇다 해도 편액 서수정(嶼水亭)의 내력이 없단 말인가.
마을 이장에게 물었지만(전화로) 모른단다.
취락 전부터 작은 계곡물이 마을을 돌아 흘렀다 해서 '섬동' 이라 했다는 마을이름
유래에서 '서수'(嶼水)를 찾아보았다.
수동면사무소의 한 분이 마을(섬동)과 면(수동면)의 합성일 것이라고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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