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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클레오파트라가 순수 이집트인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마케도니아 사람이다.
마케도니아는 유럽의 화약고라고 불리는 발칸반도
그 동네의 알바니아와 불가리아 사이에 있다.
그럼, 왜? 대부분의 사람들이
클레오파트라 그녀를 이집트인으로 알고 있으며,
또, 어떻게 이집트의 여왕까지 되었을까?
☞ 그 내력은 이렇다.
전 세계를 통틀어 최고 정복왕이라면,
동양에는 칭기즈칸, 서양에는 알렉산더가 있다.
알렉산더가 인도까지 통째로 먹으려 설치다가 병에 걸려 죽게 되자
그동안 구축한 그 넓은 땅덩어리를 지역 사령관들이 무상으로 하사받고.
당시 이집트 총독사령부 최고사령관은 프톨레미 장군이었는데.
마케도니아 귀족 출신인 프톨레미는 알렉산더가 사망하자
이집트를 접수하고 왕으로 등극한다.
이게 바로 "프톨레마이오스"왕가의 출발이고
클레오파트라는 그 왕가(BC323~30)의 마지막 여왕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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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지금부터
클레오파트라 그녀의 남성 편력과 그의 능력을 살펴보자면
BC 51년,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죽기 직전 유언하기를
장녀 클레오파트라와 장남 프톨레마이오스 13세 남매를 불러...
“너희 둘이 사이좋게 힘을 합쳐 나라를 공동통치하라”라고 유언을 하였다.
그래서 당시 꽃다운 18세의 클레오파트라와
철없는 10살의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전격적으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근친결혼은 당시 이집트 왕가의 일반적인 풍습이었기에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역사, 문학, 철학, 음악 등 두루 박식함은 물론
특히 8개국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능력을 두루 갖춘 클레오파트라
그러나 '머니머니' 해도
그녀의 가장 큰 매력은 '화술'에 있었다.
우리는 그녀를 서양 최고의 미인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미인과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그녀가 남자를 낚는 특별한 재주는
미모보다는 남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말의 기술'에 있었다고 한다.
여왕인 그녀가 가장 주력한 정책은 로마와의 친선외교였다는데
그도 그럴 것이 막강 로마제국은 중동지방을 죄다 싹쓸이해서
이 지역에 남아있는 유일한 독립국은 이집트 하나뿐이었고.
그녀는 로마 실력자인 폼페이우스가 추진하는 모든 정책에
무조건 찬성을 하며 환심을 사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너무 큰 욕심이 화근
남편이자 남동생을 밀쳐내고 저 혼자 여왕 노릇하려고 설치다가
오히려 남편에게 정보가 새어 아라비아반도로 쫓겨 가는 처지가 되었는데.
어떻게 보면 이집트 내부의 왕권쟁탈전에 불과한 이 싸움이
로마의 영웅들이 개입하면서 역사적 대사건으로 급방향 전환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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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에서 남매간의 왕권쟁탈전이 벌어질 즈음에
로마에서도 대권을 놓고 치고받는 싸움이 전개되는데.
바로, 시저와 폼페이우스의 대결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로마의 삼두정치
군대표 시저, 귀족대표 폼페이우스, 재벌대표 크라수스,
이 세 명이 서로 견제하며 로마를 이끌어가자고 합의 한 것이다.
시저가 영국을 비롯한 온 유럽을 정복하며 위세를 떨칠 때
갑자기 크라수스가 죽으면서 삼두정치의 균형이 깨지게 된다.
로마에 있던 폼페이우스는 때는 이때다 싶어 원로원과 결탁해서
라이벌 시저를 타도하고자 하는 정풍운동을 꾸미게 되고.
그 정보를 입수한 시저는
군대를 이끌고 단숨에 루비콘강까지 진격하였으나,
그곳에서 잠시 고민을 하게 되는데.
루비콘강은 로마와 속국의 경계선으로
원로원의 승인 없이 이 강을 건너면 곧 반역으로 간주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용맹한 시저는 로마로 맹 진격하여 쿠데타를 일으키고
입만 나불대는 귀족, 부호 정치인들을 반혁명분자로 처벌.
정치군인들의 환호를 받으며 로마에 입성하여 최고 실권자가 된다.
시저에게 패한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피신하여 정치적 망명을 요청하는데
약소국 이집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요즘 흔히 보는 국제간의 처리방법처럼 스리슬쩍 제3국으로 송환하느냐,
새 실력자 시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아예 폼페이우스를 죽이느냐,
갑론을박 끝에 결국 그의 목을 쳐서 시저에게 선물한다.
폼페이우스를 쫓아 이집트까지 진군한 시저는
자연스럽게 이집트 국보위원장 비슷한 그런 막강한 권력을 맡게 되고.
이때, 이집트 왕가는 클레오파트라와 그의 동생이자 남편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 남매가
서로 패가 갈려 으르렁대면서 서로 자신이 이집트의 실권자라고 '아등바등' 싸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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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위원장격인 시저는 이들 남매를 불러 중재를 하려고 하는데
이날 밤 그 유명한 모포 자락 일화가 탄생하게 된다.
시저의 중재를 받아들여 봤자 결국
남동생과 공동통치 하라고 할 것이 '뻔할 뻔자'라고 생각한 클레오파트라는
대물 시저를 낚아 어떻게 해보려는 작전을 짜서는
아무도 모르게 아주 토실한 자신을 미끼로 썼다.
역사적인 그날 밤, 시저의 숙소엔 대충 묶은 군용모포가 배달되었고
그 모포를 풀던 시저는 호흡이 멎을 뻔했다.
완전 나체의 ‘쭉쭉빵빵’한 여인이 요염하게 몸을 꼬고는
'날 어떻게 잡수시던가 마음대로 하세요?' 하는 눈빛을 하고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클레오파트라이다.
그녀는 시저라는 엄청난 대물을 낚기 위하여 자신을 미끼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천하의 시저도 그 토실한 미끼에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그날 밤 클레오파트라의 부러질 듯한 곡선을 그리며
결국엔 시저라는 엄청난 대물을 품에 안겼다.
대세는 기울어
시저를 밤새 '오뉴월에 엿가락'처럼 녹여버린 그녀에게 모든 힘이 쏠리자,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버린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그래도 그를 추종하는 세력을 규합해서 시저에게 덤비다가 오히려 완전 박살나니
그때가 BC 47년
마침내 클레오파트라 그녀의 전성시대가 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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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다시
막내 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결혼하면서 여왕자리에 오르고
이때 그녀는 이미 시저의 아기를 잉태하여 있었으니
천하의 대물 시저는 완전한 그녀의 포로가 되었다.
이집트에서 머물던 시저는
소아시아, 아프리카까지 정복하고 로마에 개선하는데
이 때 시저는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는 명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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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 시저는 새로운 헌법을 만들어 10년 임기의 독재관이 된 뒤.
클레오파트라를 로마에 모셔다 왕궁에 고이 모신다.
그녀는 이제 로마제국의 여왕이 되는 꿈을 꾸며
낮에는 퍼스트레이디 연습을 하고 밤에는 만찬을 주도해
로마 정치인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기에 여념 없었다.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 역사의 진리
시저의 독재가 점점 지나쳐 급기야 황제 자리까지 넘보게 되자
부르터스를 포함한 반 시저파 행동대원들이
거사를 단행하여 시저를 살해해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도 믿었던 시저가 살해당하니
그녀가 로마에 계속 머물다간 목숨도 부지 못할지 모르는 일이기에
부랴부랴 이집트로 되 돌아와서,
무심하게 어린 남편을 죽이고 또 다시 아들 케사리온과 결혼한다.
☆☆☆
이때 로마의 정세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정권 싸움으로 혼란정국이 계속된다.
이 둘은 자기의 힘을 과시하기 정복전쟁 시합을 벌이는데.
초반전은 옥타비아누스보다 안토나우스의 승리한다.
안토니우스는 지금의 터키까지 쾌속 진출한다.
그런데 사실 안토니우스는 '염불보다는 잿밥'에 맘이 있었다.
정복전쟁은 핑계고,
속셈은 클레오파트라를 만나 어떻게 해 보고 싶었던거였다.
안토니우스는 그녀가 로마에 있었을 때 이미 홀딱 반해 있었다.
그녀를 어떻게든 낚아보려고 이집트 가까이 있는 터키에 자리를 잡고
정성스럽게 미끼를 던지며 구애를 한다.
☆☆☆
그러나 안토니우스의 껄떡거림을 눈치 챈 클레오파트라는
계속 미끼 주위만 맴돌며 애간장을 태운다.
몸이 단 안토나우스는 체면이고 뭐고
이집트를 공격해 들어갈 태세로 중무장을 하고 설쳐대자
클레오파트라는 그제서야
못 이기는 척 안토니우스를 만나 준다.
아마도, 그때가 BC 41년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만나 깊은 사랑의 늪으로 빠져들게 된다.
28살의 익을 대로 익은 농염한 그녀 클레오파트라는
당시 42살의 안토니우스를 완전한 육체의 포로로 만들었다.
사랑의 노예가 된 안토니우스는 로마의 정사는 까맣게 잊고서
그녀의 치마폭에 쌓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냈다.
훗날 플루타르크는 그들의 사랑을 이렇게 기록 했다.
"그녀는 언제나 관능적인 쾌락을 새롭게 찾으려 노력했고
그녀의 그러한 매력에 안토니우스는 온 마음을 빼앗겼다“
“그녀는 그를 잠시도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으며
잠시도 그가 한 눈을 팔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사랑에만 빠져 꼭 해야 할 일을 안 한 게 아니었었다.
그들은 짝짜꿍 힘을 합쳐 인근 국가들을 하나둘 정복을 해 나간다.
시리아, 키프로스, 아르메니아, 파르티아, 리비아, 페니키아, 실리시아 등
결국 그녀는 ‘님도 보고 뽕도 따고’ 사랑도 얻고 식민지도 얻게 된다.
하지만, 이렇듯 화려한 영광을 재현한 그녀의 행복도 잠깐
그녀의 급성장에 위협을 느낀 로마의 칼날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로마와 이집트를 거머쥔
안토니우스의 독주에 더 겁을 먹은 것이다.
☆☆☆
안토니우스가 로마로 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안토니우스의 반대파들이 정치공세를 펼치는데
로마 원로원의 기록에 의한 당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설전을 보면 이러했다.
옥타비아누스 : 안토니우스, 당신은 너무 방탕하다, 동방의 요부와 놀아나다니....
안토니우스 : 그녀는 내 아내와 다름없다. 요부라니?
옥타비아누스 : 그래도, 명색이 로마의 실력자가 그렇게 여자 품에만 있으면 되겠는가?
안토니우스 : 전쟁 중인데 왜 이래, 그녀와 힘을 합쳐 정복한 나라가 몇인데
옥타비아누스 : 안토니우스, 너는 내 여동생과 결혼한 놈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
안토니우스 : 아니 처남, 그러는 처남은 딴 여자랑 거시기 안했나?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서로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사이란다
☆☆☆
모처럼의 로마 방문에
화가 머리끝까지 뻗친 난 안토니우스는
내친김에 원로원에 아예 승부수를 던지게 되는데.
나, 안토니우스를 ‘동방제국의 왕’으로 인정해 달라고 요구한다.
즉 로마의 실력자 + 이집트의 왕 자리를 요구한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안토니우스를 못마땅히 여기던 반대파들이 찬성하겠는가?
반대파들은 안토니우스의 약점을 찾는데 혈안이 됐고
드디어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을 입수해 전격 공개해 버린다.
그 유언장에는,
"나 죽게되면, 그녀가 있는 이집트에다 묻어 주세요"
이런 유언장의 내용을 접한 로마시민들은 경악, 분개했고
안토니우스의 인기는 급강하 했다.
☆☆☆
이 기회를 놓칠리 없는 옥타비아누스는 전쟁을 선포한다.
아마도 그때가 BC 31년. 드디어, 옥타비아누스는 이집트를 향해 전쟁을 선포한다.
겉으로야 이집트에게 선전포고 한 것이지만,
속마음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제거 하는게 주 목적이었다.
그리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악티움 해전이 벌어진다.
전함의 수적으로 본다면, 이집트 전력이 더 센 것처럼 보이지만
이집트 전함은 굼뱅이이고 로마 전함은 그야말로 날쌘돌이였다.
별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이집트 군대는 고래밥이 되고 말았다.
한때, 로마와 이집트의 실력자에서 패전 장수로 몰락한 안토니우스는
분과 충격을 가눌 길 없어 독방에 기거하며 은둔생활을 하게 되고
그러나 곤경에 처하면, 남자보다 강해지는 게 여자 아니겠는가?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에게 용기와 생기를 넣어주려 갖은 방법으로
안간힘을 썼다고 기록돼 있다.
서로의 깊은 사랑을 확인한 두 사람은 잠시 행복에 젖었고
그 많던 식민지 다 뺏기고 이집트만 달랑 남았어도 둘은 행복했다.
☆☆☆
그러나 2년간의 행복도 잠깐 이들의 사랑이 다시 위협받게 된다.
옥타비아누스 그가 그러한 모습을 두고만 보았겠는가?
그는 다시 이집트를 겹겹이 포위하고서는 위협을 가한다.
“안토니우스....너 ..어여 모가지를 내밀어라.”
이에 안토니우스는
“모든 권력 포기하고 평민으로 살테니 그녀와 함께만 있게 해줘”라며,
사정해 보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이제 그와는 더 이상 상대하지 않겠다며
클레오파트라와 대화를 하려 한다.
“이제 너와는 상대 하지 않겠다. 너의 여왕과 상대하마”라고 하며
클레오파트라에게 제안하기를,
“클레오파트라 당신이
안토니우스 목을 따서 바치면 너만은 살려주마”
하지만, 그녀가 그리 ‘호락호락’ 했겠는가?
“이게 뭔 개뼈다귀 같은 소리여”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다시 한 판 붙자고 한다.
이번도 역시 ‘뻔할 뻔자’로 이집트 군대는 아주 ‘아작’이 난다.
썩어도 준치요, 왕년에 천재라고 이리 깨지고 저리 깨지면서도
안토니우스는 결사적 항전의 선봉에 섰는데
그런데 이게 어찌된 것인가
"여왕이 전사했다"는 소문이 들렸다.
이에, 급격히 전의를 상실한 안토니우스는
'그녀가 없는 세상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 그는
자결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건 웬 코메디
아니면, 이집트 판 "로미오와 줄리엣" 인지
"여왕은 아직 살아있다"라는 소문이 다시 도는 것이었다.
아직 목숨이 실낱같이 붙어있는 안토니우스는
부하에게 명해서 자기를 여왕 있는 곳에 데려다 달라고 한다.
여왕은 여왕대로 로마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싸늘히 죽어가고 있는 그를 맞이하며 클레오파트라는 오열을 한다.
☆☆☆
당시, 그 장면을 플루타르크는 이렇게 묘사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를 누인 뒤 자기 옷을 덮어주고서
“내 사랑 나의 남편 전하라고 애절하게 부르며
전투로 엉망이 된 자신의 비참한 처지도 잊은 채
멍이 들도록 그녀 가슴을 치고 얼굴로 비벼 피를 닦아 주었다"
안토니우스는 그녀에게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는 뭐든 하라"고 말한 뒤
그토록 사랑했던 그녀 팔에 안겨 숨을 거두고 말았다.
☆☆☆
얼마 뒤 그녀는 로마군에게 체포되어 포로 신세가 된다.
이로 인해 이집트가 로마의 속국이 되는 역사의 시작이기도 하다.
그녀는 옥타비아누스의 허락을 얻어
안토니우스의 장례식을 치르고는 죽기를 작정하고 그날로부터
단식에 들어 갔다.
그러자 당황한건 옥타비아누스였다.
그녀를 산채로 로마로 압송해서 로마시내를 질질 끌고 다녀야
자신의 승리가 더욱 돋보일 것이라고 계산했었는데...
옥타비아누스는
그녀를 달래기도 하고, 협박하기도 하면서
"만일 단식을 그만두지 않으면, 네 자식들을 죽이겠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다시 음식을 입에 댔으나,
비참하게 사느니 깨끗이 죽겠다는 마음에는 변함없었다.
일설에는 그녀가 옥타비아누스를 몸으로 유혹해서
목숨을 구차하게 부지하려 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역사가 플루타르크는
"창백하고 야윈 몰골로 유혹은 어림없었을 것" 이라고 일축한다.
☆☆☆
이윽고 그녀가 로마에 끌려가기 3일 전
그녀는 몸을 정결히 하고 의관정제하여 안토니우스 묘를 참배한 뒤
자기 방으로 돌아와서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편지를 썼다.
"나를 안토니우스 곁에 묻어 주오"
편지 받고 놀란 옥타비아누스가 부랴부랴 사람을 보냈으나
그녀는 이미 스스로 독사에게 물려 자결한 뒤였다.
39살의 클레오파트라는
이렇게 그 화려한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