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051
3월1일 [연중 제8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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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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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8_LaE7fzBUM (서창수 베드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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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요셉 성인의 한결같은 충실성과 우직함의 결과, 주님 구원 사업은 원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수도회 입회 때가 생각납니다. 각오가 비장했습니다. 주님의 영광과 그분 나라의 건설을 위해 이 한 몸 바치겠다고 굳게 다짐했습니다. 즐겨 마시던 술도, 잔뜩 폼 잡고 피우던 담배도, 칼같이 끊어버렸습니다.
친구들에게 다 버리겠다고 공언했습니다. 세상도 가족도 뒤로 하고 구름처럼 바람처럼 살겠다고 외쳤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허세가 대단했습니다. 그 시절 돌아보니 웃기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막상 수도회 입회를 해보니? 버린 것보다 얻은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원 없이 공부할 좋은 기회를 주셔서 유익한 공부 참 많이 했습니다. 한없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좋은 일 자리와 직책을 주셔서 좋은 아이들, 좋은 사람들 참 많이 만났습니다. 더 크고 많은 가족 친지들이 생겼습니다. 국제 수도회인 관계로 직무를 수행해나가는 과정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되었으며, 시야와 지평을 넓힐 수 있었습니다. 돌아보니 버린 것은 쥐꼬리만큼이었는데, 얻은 것은 소머리보다 큰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오늘부터 성 요셉 성월을 시작합니다. 요셉 성인의 생애를 묵상해보니, 그분도 참으로 큰 것을, 그리고 많은 것을, 버린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처럼 말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될 것이다.”(마르코 복음 10장 29~30절)
요셉은 주님 구원 사업의 성취를 위해 마리아의 약혼자로서의 평범하고 단란한 결혼생활을 포기했습니다. 요셉이라고 어찌 인간적이고 소박한 꿈이 없었겠습니까? 마리아와 혼인해서 남들처럼 자신의 피가 흐르는 자녀들, 후손들이 번성하는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요셉은 참 많이 버렸습니다. 주님의 계획을 위해 자신의 계획을 버렸습니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하며 자신의 뜻을 과감히 접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자신의 의지, 희망, 꿈, 그 모두를 남김없이 내던졌습니다.
몽땅 버린 요셉의 부모님이나 가족, 친지들이 받았던 충격을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아마 부모님은 상심한 나머지 식음을 전폐했을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은 이상야릇하다는 표정을 지었을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은 겉으로는 쉬쉬했지만, 돌아서서는 수근거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천성적으로 과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누가 뭐래도 도통 말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저 주님께서 일어서라 하시면 일어섰습니다. 걸어가라고 하시면 걸어갔습니다. 한결같은 우직함과 충실성의 결과 주님 구원 사업은 원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요셉 성인의 삶과 생애를 깊이 있게 묵상하고, 작은 것이나마 기꺼이 포기할 줄 아는 성 요셉 성월을 보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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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FmeBPDC2Q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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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매일매일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증거는?>
어제 복음은 돈이 많은 부자가 예수님을 따를 수 없어 슬퍼하며 돌아간 이야기입니다. 재산을 버릴 수 없어서 예수님을 따름을 포기합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오늘 복음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당신을 따르기 위해 버린 것의 백 배를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그 버리는 정도에 따라 첫째와 꼴찌가 결정된다고 하십니다. 사람은 내가 만나러 가는 사람에 따라 어떻게 변하느냐가 결정됩니다.
모든 인간은 누군가를 만나러 갑니다. 그 만나러 가는 대상이 만든 세상으로 들어갑니다. 그 대상이 지옥으로 안내할 수도 있고 천국으로 안내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향하는 방향에 있는 대상이 사랑 가득한 분이라면 당연히 그 뒤엔 천국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탄이 있다면 그 뒤엔 지옥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조건 두 방향 중 한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내가 사랑이신 하느님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바로 세상 집착에 대한 욕구가 사라짐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부자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재물에 대한 집착을 버렸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름은 세상 집착을 버림입니다. 세상 집착이 늘어나는 삶을 살고 있다면 사랑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살려고 하는 욕구를 죽이기 때문입니다.
‘우와한 비디오’에서 성장 가능성이 최대 1m밖에 안 되는 희소병을 지니고 태어난 대성이를 소개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인데 키가 매우 작고 몸무게도 10kg을 넘지 못합니다. 손가락도 작고 팔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은 매우 크고 자유롭습니다.
동생과 놀다가 동생에게 밀려도 “형이니까 참아야지요”라고 말합니다. 아빠가 “대성이 몸 작아서 불편하지 않아?”라고 물으니 대성이는 “아빠, 어쩔 수 없는 거지. 슬퍼하지마, 걱정하지 마!”라고 씩씩하게 말합니다. 모두 자신의 탓인 거 같다며 혼자서 못할 것 같다고 걱정하는 엄마에게 대성이는 “엄마, 나 혼자 할 수 있어”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하려고 합니다.
부모에게 다가가기 위한 이러한 감미로운 죽음. 이것이 기도입니다. 그래도 기도하지 않으면 주님 앞에 설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도는 어쩔 수 없이 자신과 피나는 싸움을 전제하지만, 부모와 함께할 수 있는 감미로움을 선사합니다. 대성이는 그 불편한 손가락으로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그림도 열심히 그립니다.
대성이가 부모에게 다가가기 위해 하는 행위는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이 자신이 그렇게 태어난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며 오히려 부모님을 위로합니다. 이 사실이 대성이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대성이는 지금 부모를 향하여 가고 있고 그 부모가 사랑이기에 대성이도 자아의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마치 뜨거운 용광로를 지나는 것들은 불순물이 다 제거되는 것처럼 사랑의 불로 다가가는 모든 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욕심이 커지면 잘못 가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에사우는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레베카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야곱은 우리 자신을 상징하고 이사악은 하느님입니다. 우리는 미사 때 에사우를 먹고 에사우임을 자청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기에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에사우와 가까워지기 위해 야곱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야곱은 7년 동안 일하여 레아와 혼인하고 또 7년 동안 일하여 라헬과 혼인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6년은 혼인을 통해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많은 재산과 가축, 그리고 가족이 늘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때 에사우를 만나야 합니다. 물론 열심히 살기는 했지만 여전히 에사우 앞에 나설 자신이 없습니다. 자신이 그동안 번 재산을 미리 보내어 에사우에게 다 바칩니다. 그래도 안 될 것 같습니다. 가족까지 다 바쳐도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야곱은 에사우 앞에 나설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 기도합니다. 기도는 천사와 씨름하는 것과 같습니다. 너무 힘이 든 시간입니다. 천사는 야곱의 엉덩이뼈를 다치게 하여 에사우 앞에서 똑바로 걷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이 기도가 주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나 자신까지도 내어드릴 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감미로운 죽음이 우리를 그리스도 앞에 설 힘을 줍니다.
야곱은 형에게 나아가며 일곱 번 땅에 엎드려 절합니다. 그리고 “정녕 제가 하느님의 얼굴을 뵙는 듯 주인의 얼굴을 뵙게 되었고, 주인께서는 저를 기꺼이 받아 주셨습니다”(창세 33,10)라고 말하며 자신의 모든 것, 곧 자기 자신까지 에사우에게 봉헌합니다. 에사우는 야곱에게 상속권을 내주기 위해 저주받을 운명으로 태어났지만, 야곱의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아가기 위해 다 내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시사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래야만 그분 땅에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 살려면 그 에덴동산을 주신 분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창조주께 나아가는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그분을 모든 것의 주인으로 믿기 때문에 그분께 나아갈수록 나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합니다. 이 힘을 기도가 아니면 얻을 수 없습니다.
유튜브 ‘우와한 비디오’에서 ‘꺾인 다리로 전력 질주, 육상선수 상훈 씨’의 사연을 볼 수 있습니다. 상훈 씨는 선천성 소아마비로 갓난아기 때 파출소 앞에 버려져 시설에서 자랐습니다. 늘 방에서 혼자 보내야 했습니다. 시설에 있는 아이들이 부모가 찾아와서 집에 데리고 가면 상훈 씨도 그렇게 따라가고 싶었습니다. 엄마의 사랑이 그리웠던 것입니다. 물론 부모님의 얼굴을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많이 원망하고 많이 그리워했지만, 상훈 씨는 부모를 찾는 노력을 멈추지 않습니다.
상훈 씨는 전북 장애인 달리기 선수입니다. 나이 쉰이 훨씬 넘었지만, 상훈 씨는 언젠가 만날지 모르는 부모에게 자신이 잘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매일 자신과 싸워나갑니다. 아직 장애인 전국체전에서 달리기 금메달을 따지 못했기에 부모를 위해 금메달을 따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서 있기도 힘든 그 다리로 매일 달리기 연습을 합니다. 낮에는 자신과 같은 중증 장애인들을 위해 봉사하는 일을 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만약에 부모님이 살아 계시면 ‘이렇게 잘 커서 잘 지내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실 것 같아요.” 그런데 부모님이 상훈 씨를 TV에서 보았다고 해도 상훈 씨 앞에 나타날 수 있을까요? 현실적으로는 양심상 그럴 수 없습니다. 상훈 씨는 부모를 위해 자신과 싸우고 있는데, 부모는 상훈 씨를 키우기 위해 자신과 싸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상훈 씨는 부모를 어디 있느냐고 찾겠지만 부모는 오히려 그럴수록 더 어두운 곳으로 숨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상훈 씨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부모를 만나기 위해 자신을 부모의 뜻대로 봉헌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나아가는 유일한 방법은 매일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봉헌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기도를 따로 하지 않아도 이미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상훈 씨와는 반대로 우리 부모가 되어주시기 위해 매일 당신 외 아드님을 십자가에 죽이십니다. 그래야 우리 양식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양식을 주지 않는 부모는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양식은 부모의 살과 피입니다. 이런 분께 나의 모든 것, 나 자신을 내어 맡기지 않으면 나는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기 위해 조금씩 더 주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분 앞으로 나아갈수록 나는 더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그분으로부터 수백, 수천 배의 상을 받습니다. 바로 하느님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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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0,28-31 :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오늘 복음말씀은 어제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청년은 재산에 대한 집착 때문에 슬픈 표정으로 예수님을 떠나갔다.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가지고 영생을 준비할 줄 모르고 재물에다 자신의 삶을 의지하는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시면서 슬픈 얼굴로 돌아가는 청년을 안타깝게 바라 보셨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재산의 번영, 부자가 되는 것이 하느님의 축복의 표지라고 믿고 있었고 어떤 사람이 재물이 많고 번영하면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그를 축복해 주신 것이 틀림없다고 믿었던 제자들은 그 말씀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부자가 되는 것은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믿었는데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성미가 급한 베드로가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28절)라고 한다.그러자 예수님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버린 사람은 백 배의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 무엇을 버리는 것일까? 그것은 나를 버리는 것이다. 나의 능력, 나의 재물 이 모든 것을 이기적인 마음으로 나 자신만의 안위와 쾌락을 위하여 사용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지 않으시는 모습으로 살려고 하는 나의 인간적인 모습을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이렇게 나를 버리는 것이지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라는 말씀이 아니다. 이것을 견디어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가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하다. 이에 대한 보상은 이 세상에서도 갚아주시고 또한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초대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현세의 보상을 많이 체험하였다. 여기 저기 다니면서 박해도 많이 받았지만 자신이 쉴 수 있는 집들과 교우 형제자매들과 어머니 같은 여 교우들, 자녀들을 대신하여 대자 대녀들,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들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토지를 버린 사람은 교우들의 토지에서 필요한 것을 얻었던 것이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재물이란 ‘사용하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지, ‘주인이 되다’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예수님께서도 이미 재물이란 자기의 것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맡게 사용하고, 또 다른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기 위해 주어진 것으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뜻보다는, 또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봉사보다는 그 재물에 대한 집착 때문에 그 재산이 그를 불행하게 한다고 하셨다.
지금 이 순간, 이 세상에 살게 해 주시고, 나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드리며, 나의 재능과 내가 지금 잠깐 관리하고 있는 것들을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고 있으며 그렇게 노력하고 있는지 반성하고 첫째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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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따름과 보상>
“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르 10,28-31)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보상은 ‘버림’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따름’에 대한 보상입니다. ‘버림’은 신앙생활의 목적이 아니라 방법입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하느님 나라에서 보상을(영원한 생명을) 받는 것이고, ‘따름’은 ‘하느님 나라’ 라는 목적지를 향해서 나아가는 일이고, ‘버림’은 잘 따르기 위한 방법입니다. (우리는 버리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얻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목적과 방법을 혼동하면 안 됩니다. 실제로 ‘버림’을 실천하면서도 ‘따름’을 실천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무소유’를 실천하지만 예수님을 믿지도 않고, 예수님을 따르지도 않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무소유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준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라는 베드로 사도의 말에서,‘강조점’은 ‘모든 것을 버리고’가 아니라 ‘따랐습니다.’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강조점’은 ‘버린 사람은’이 아니라,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라는 말에 있습니다. 버리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버리는가? 누구 때문에 버리는가?”가 중요합니다. 이제 반대로 생각해서, “‘버림’을 실천하지 않는 ‘따름’은 가능한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말로 모든 것을 버려야만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가? 우선 먼저, 복음서에서 말하는 ‘버림’이 무엇인지부터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복음서에서 말하는 ‘버림’은 무소유를 실천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인생의 방향과 목적을 완전히 바꾸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버림’이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에, 그 ‘버림’을 실천해야만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경우에, 직업은 버렸지만, 카파르나움의 집은 그대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집을 숙소로 사용하셨습니다.) 또 베드로 사도는 선교 여행을 다닐 때 아내를 데리고 다녔습니다.(1코린 9,5) 바오로 사도는 거의 모든 것을 버렸지만, 직업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천막을 만드는 것이 그의 직업이었는데, 돈이 필요할 때에는 그 일을 했습니다.(사도 18,3) 그처럼 신앙인의 ‘버림’은 맹목적인 무소유가 아니라, 즉 소유물을 무조건 버리고 포기하는 일이 아니라, ‘세속에 대한 초월, 이탈, 자유’입니다.
그렇긴 해도 실제로 버려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1)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방해하는 것들은 버려야 합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 이 말씀에서 ‘미워하다.’라는 말은, 현세적이고 육적인 애착심을 버리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가족을 진짜로 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가족에 대한 현세적이고 육적인 애착심’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누구에게나 가족은 가장 먼저, 가장 많이 사랑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변질되어서, 구원이 아니라 멸망을 향하게 만드는 힘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잘못된 욕망입니다. 바로 그 잘못된 욕망과 욕심과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자기 목숨’에 관한 말씀도 같은 뜻입니다.
2) ‘영원’과 ‘허무’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신앙인은 ‘허무’를 버리고 ‘영원’을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마태 6,19-20)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을 가지고 싶어 하고, 욕심내고,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 욕심과 집착 때문에 영원한 것을 놓치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것을 얻으려면,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을 능동적으로 버려야 합니다.
3) ‘목숨’을 포함해서,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전부 다 ‘우리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잠시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20)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모두 잠시 맡아서 가지고 있었던 것이니, 이 세상을 떠날 때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은 ‘버림’과는 조금 성격이 다른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넓은 뜻으로 ‘버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때가 되면, 우리는 가지고 있었던 것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모든 것을 놓아두고 떠나야 합니다. 그 ‘때’를 대비해서 평소에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 그것도 ‘버림’입니다. ‘내 것’이라고 우기면서 움켜쥐고 있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백배의 보상’은 현세에서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풍성한 은총’을 뜻합니다. (가족과 재산을 백배나 받는다는 말은 풍성한 은총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라는 말 때문에, ‘박해’와 ‘보상’을 모두 현세에서 받는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런 뜻은 아닙니다. 뒤의 ‘내세에서는’이라는 말을, ‘박해도 받겠지만’의 뒤로 옮겨서 읽어야 뜻이 정확해집니다. “현세에서는 박해를 받겠지만, 내세에서는 ......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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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문 홍보를 위해서 출장을 가기도 하고, 신부님들과 여행을 갈 때가 있습니다. 출장을 가거나, 여행을 할 때는 준비물이 필요합니다. 신문 홍보를 위해서는 신문, 구독신청서, 볼펜, 홍보 현수막을 가져갑니다. 여행을 갈 때에는 여권, 운전면허증을 가져갑니다. 그리고 바늘에 실이 따라가듯이 늘 가져가는 것들이 있습니다. 여벌 옷, 세면도구, 면도기, 충전기, 상비약, 책, 노트북을 가져갑니다. 미리 짐을 챙겨두면 마음이 편해지고, 새로운 추억을 만들기 위해 가벼운 발걸음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교회는 연중시기를 잠시 멈추고 내일부터 재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사순시기’라는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사순시기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몸소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떠나신 것을 묵상하는 시기입니다. 사순시기라는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우리에게 필요한 준비물은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수건으로 닦아주었던 베로니카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교회는 사순시기에 필요한 준비물이 4가지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1시간만이라도 깨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아버지 하실 수 있다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교회는 사순시기에 특별히 ‘십자가의 길’기도를 권고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샘이 깊은 물과 같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뿌리 깊은 나무와 같습니다. 유혹이 다가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회개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회개하지 않았던 유다는 희망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베드로는 회개의 눈물을 흘렸고, 희망을 간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면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십니다. 우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십니다. 죄를 지어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지 않아서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자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하셨습니다. 재물을 창고에 가득 쌓아놓은 부자는 하늘나라에는 머물 자리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늘에 보화를 쌓는 방법은 어려운 이웃에게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가난한 이에게 해 준 것이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헐벗은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아픈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행복하다.’라고 하셨습니다. 선을 베푸는 집은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합니다.
네 번째는 단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시기 전에 40일간 단식하셨습니다. 단식은 음식을 절제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는 평소에 즐겨하는 것을 절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담배를 끊어도 좋고, 절주를 하는 것도 좋습니다. 절제하는 시간에 주님의 고통을 묵상하고,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좋습니다. 행복은 좋아하는 것만을 해서는 얻기가 어렵습니다. 욕망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해야 할 일을 좋아하면서 느낄 수 있습니다. 단식과 절제를 통해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행복은 누가 빼앗을 수도 없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도 ‘사순시기’를 시작하려는 우리에게 좋은 준비물을 알려줍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에 여러분의 모든 희망을 거십시오.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전에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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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복음 때문에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버린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집회서의 가르침을 읽는 세상은 결코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없고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보일 우리의 착한 행실은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의 어떤 행실이 세상 사람들의 영혼을 꿰찔러 회개시킬 수 있을까요? 모든 사람이 그저 우리를 보는 일을 통해서 하느님을 느끼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저는 강론을 준비하면서 오늘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 방송을 듣는 모든 분들이 하느님의 축복 안에 들어서는 큰 계기가 되기를 기도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하시면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십니다. 그 극단적인 예수님의 말씀에 우리들이 겁먹을까 염려가 되는지, 오늘 집회서는 그분의 의도를 좀 더 세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 앞에 빈손으로 나타나지 마라. 제물을 바칠 때는 언제나 즐거운 얼굴을 하고 십일조를 기쁘게 봉헌하여라.”
우리는 세례로 다시 태어난 하느님의 사람들입니다. 세례는 이제 ‘드디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따르기 시작한 사람’의 표시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다짐을 가졌던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배신했습니다. 예수님과 삼년을 함께 보낸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기기까지 했습니다.
세례를 받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다짐한 맹세만으로는 아직은 모든 것이 미지수라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하느님의 복된 약속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쉼 없는 결단의 연속을 살고 틈 없는 긴장의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그래서 바오로사도는 그리스도인에게 악의 세력과 싸우기 위해서 “맑은 정신으로 믿음과 사랑의 갑옷을 입고 구원의 희망을 투구로 쓰라”(1테살 5,8참조)고 권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받고 새 사람이 된 만큼, 하느님의 자녀로써 갖춰야 할 품격과 품위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하루에도 수많은 선택의 갈등이 주어집니다. 우리들이 모든 선택에 신중해야 하는 것은, 죄는 용서받을 수 있지만 그 죄의 결과는 계속 이어진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선한 일을 계획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선한 일을 행하도록 하여서 이 세상이 그리스도인 때문에 변화되고, 그리스도인 때문에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다.
복음적인 모습은 착한 행실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복음의 삶은 말이 아니라 모습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에 충실하고 예수님의 명령에 따르는 구체적인 실천을 요구합니다.
우리 하느님은 창조적이시고 지극히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믿을 수 있습니다. 오늘 내가 하느님을 기억하고 행한 모든 사실을 눈 여겨 보시고 오늘 내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바라는 모든 일을 기뻐하시며 오늘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비워낸 손길을 축복하시며
오늘 우리가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흠숭의 찬미를 바칠 때에 응답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계명에 충실 할 때에 베풀어지는 은총은 체험한 사람만이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이제 그 주인공이 되실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힘차게 작용하는 그리스도의 기운을 받아 우리는 해 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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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주일 아침 늦잠을 포기하고 성당에 가서 미사를 합니다. 천주교 신앙을 반대하는 부모나 형제 친척을 뒤로하고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어렵게 번 재물을 교회 유지나 자선 사업에 기부합니다. 신앙인이기에 사회에서 하지 말아야 할 행위와 선택의 고민이 있습니다. 이러한 희생들이 나의 구원을 보장해 주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 주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3)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가 대변하듯,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일이나 어떤 부분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의 전체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만일 영원한 구원을 얻기에 방해가 된다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선택입니다. 이러한 희생과 추종은 ‘고난 뒤에 따라올 불사불멸의 영광’,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낳게 합니다.
우리 마음에 새로운 힘이 생깁니다. 우리가 걷는 신앙의 길에는 박해와 시련이 따르지만 아울러 넘치는 보상이 뒤따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가족을 멀리한 사람들은 백 배가 넘는 신앙의 형제자매를 얻게 됩니다. 우리가 포기한 재물은 하늘 나라의 보물 창고에 저장되며, 우리가 베푼 자선은 하늘 나라의 상급으로 빛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보루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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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손삼석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바로 이어진 부분으로서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르라'는 예수님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제 복음에서 전적인 포기를 요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지 못해 울상을 하고 떠나갔던 어떤 사람과는 달리 오늘 복음에서는 제자들의 대표였던 베드로가 나서서 '저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라고 함으로써 어제 복음의 어떤 사람과는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이 말에 대해 예수께서는 전적인 포기의 구체적인 대상을 열거하십니다. 즉 제자들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가를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그것은 집, 형제, 자매, 어머니, 아버지, 자녀, 토지 등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소유와 관계입니다.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귀하고 중요한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이지요. 예수께서는 현세의 포기가 내세의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줄 것이며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고 하심으로써 우리의 가치관을 완전히 뒤엎어 놓으십니다.
오늘 짧은 복음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만 오늘 복음은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치있게 여기고 중요하고, 첫째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예수께서 보시기에는, 또 하느님 나라에서는 꼭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이 세상에서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는 하찮게 보이고, 꼴찌라고 여겨 소홀히 하는 것들이 저 세상에서는 오히려 중요하고 가치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잘 산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묵상하려고 합니다.
언젠가 KBS TV Special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소설 '혼불'의 작가 최명희의 일대기를 다룬 것을 감명깊게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소설을 집필하기 위해 작가는 자기 자신의 모든 것, 모든 삶을 바쳤습니다. 자기가 쓰는 소설의 문장 하나 하나, 글 하나 하나에, 심지어 쉼표, 마침표까지 아름답게 쓰기 위해 정성을 들이는 그 모습이 참으로 장해 보였습니다.
그 작가가 그리 길지 않은 삶을 살고 떠나갔습니다만, 이 세상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가슴을 찡하게 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갔습니다: "정말 이 세상 잘 살고 갑니다." 그녀의 작품도 훌륭했습니다만 차라리 그녀의 삶은 더 멋져 보였습니다.
오늘도 단 한번 주어진 자신의 삶을 더 잘 살기 위해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바쁘게 뛰고 노력하시는 부산 평화방송 청취자 여러분!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과연 무엇이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고, 잘 살도록 만들어 주겠습니까? 재물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겠습니까? 권세나 명예가 그렇게 하겠습니까?
이런 것들은 우리의 삶을 순간적으로 여유있게 하고 편리하게 할지는 모르겠으나, 우리의 삶을 잘 살게 하고 풍성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재물, 권세, 명예, 쾌락 등을 추구하면서 한 생을 살고서 이 세상을 떠나면서 결코 '정말 이 세상을 잘 살고 갑니다'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다가 우리보다 먼저 가신 위인들의 삶을 보면 어느 누구 하나 소유에만 매달리지 않고, 또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단 한 번의 삶에 충실하려고 무던히 노력했다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 자주 '소유는 행복'이라는 등식을 만들어 놓고 모든 것, 모든 노력과 시간과 삶을 그 등식에만 대입해서 살려고 하는 것을 자주 봅니다. 그러니 자연히 이 세상과 사람들의 삶이 메마르고 각박해지는 것입니다.
'소유만이 행복이다'는 생각에 아무리 가지고 쌓아보아도 순간적인 만족이나 기쁨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르나 결국 무상함을 느끼고 그것이 참 행복이 아님을 알 것입니다. 때로는 무집착, 무소유, 포기 등이 얼마나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행복하게 만드는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상의 것을 추구하고 더 갖기 위해 자신의 삶을 바쳤더라면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라고 자신있게 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스스로 모든 것을 포기했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을 소유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무엇을 나누고 버리고 포기하기 위해 전적으로 투신하는 것이라고. 눈을 크게 뜨고 마음을 비우고, 아집과 집착을 버리면 참으로 잘 사는 길이 보일 것입니다.
애청자 여러분, 오늘 하루 또 우리가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만 잠시 멈추어 서서 '내가 얼마나 잘 살고 있는가?', 또 '진정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묻지 않으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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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부산 분도명상의 집)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무엇을 버리고 있는가?>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른 제자들에게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를 비롯한 제자들은 스승의 십자가 죽음 앞에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스승마저도 버리고 배반하고 맙니다. 예수님을 위해 자신을 버려야 하는데 자신을 위해 예수님을 버리고 있지는 않은 지 반성하며 오늘도 죄 많은 우리를 버리지 않고 사랑으로 당신의 몸과 피를 나눠 주시는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미사를 온 정성을 다해 봉헌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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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28-31
28 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29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30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31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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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 예수님! 오늘은 제가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바친 기도문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주님, 저는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수도생활을 시작했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 저는 ‘과연 무엇을 버렸는가?’ 되돌아보게 됩니다. 가정을 갖는 것을 버리고, 재물을 소유하는 것을 버리고,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싶은 것을 버리고 그렇게 순명과 기도로 살아왔다고 생각되지만, 진정 그것이 당신과 복음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저 자신을 위한 것이었는지 의문이 듭니다.
제 뜻을 버리지 못해 괴로워하던 시간도 있었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마음, 더 많이 공부하고 싶은 욕심을 버리지 못한 때도 있었습니다. 제가 원하지 않는 것을 당신께서 원하실 때 믿음으로 당신을 받아들이지만 원망의 마음을 버리지 못한 적도 있습니다. 너무 힘드니까요! 아무도 없는 곳에서 고독 속에 혼자 머물며 고요히 기도에 전념하고 싶지만 많은 사람들이 밀려와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 달라고 요청할 때, 갈릴래아에서 많은 군중 속에 계신 당신의 그 연민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적도 있습니다.
십자가의 수난 앞에 스승마저도 버린 제자들처럼 그렇게 위기 앞에, 고통 앞에 당신의 더 큰 사랑과 더 큰 섭리를 헤아리지 못하고 도망친 적도 있었습니다. 비참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당신의 일이라 착각하며 바벨탑을 쌓듯이 저의 일을 하기 위해 발버둥친 적도 있었습니다.
자비로우신 주님, 저는 당신 때문에 그리고 복음 때문에 가족을 버리고 떠났지만, 저에게는 새로운 더 많은 영적 가족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가족들이 때로는 만만찮습니다. 또한 아무 것도 저의 것으로 소유하지 않고 집착하려 하지 않지만, 점점 많은 것들이 저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당신만으로 족할 뿐인데, 더 가난하고 싶은데, 더 많은 것들을 나누고자 하는 이들의 마음을 외면할 수가 없습니다. 받은 것, 가진 것을 나누고 또 나누지만 자꾸 채워지니 당신의 섭리는 오묘하기만 합니다. 저를 통해 당신께 무엇인가를 해 드리고 싶은 그런 마음인가 봅니다. 저와 공동체에 나누는 그들의 모든 정성들이 당신을 향한 순수한 사랑 때문이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것은 당신 것이기에 아무런 바람없이 나눔 그 자체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당신의 아들 딸들이기를 기도합니다.
저의 모든 것이신 주님, 저는 당신만으로 만족하고 당신만을 위해 살고 싶습니다. 가족도 재산도 백배로 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에게 주시는 것은 당신 교회를 위해, 당신 수도원을 위해, 당신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 모두 되돌려 드립니다. 저는 당신의 것이기에 당신께서 오히려 저를 통해 백배 천 배의 사랑의 나눔을 하소서. 제 목숨이 필요하면 그것 마저도 가져 가소서.
현세에서 받는 박해는 달게 받겠습니다. 때로는 미숙한 이들의 오해, 때로는 믿지 않는 이들의 조롱, 때로는 해결해야 하는 많은 일들, 때로는 지나치게 의존하는 이들의 과도한 요구들, 때로는 제 안에서 일어나는 저 자신에 대한 자괴감과 무력함이 저를 힘겨웁게 하지만 그것조차 없다면 어찌 당신의 십자가에 함께 할 수 있겠습니까!
내세에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하신 주님,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 이미 당신과 함께 영원을 살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일에 지친 몸과 사람에 두려운 마음으로 당신과 함께 겟세마니 동산에 있다고 할지언정 그것으로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모든 순간이 당신과 함께 하는 천국입니다.
첫째였던 베드로가 십자가 앞에 스승마저 배반하고 버려 꼴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당신을 만나 성령으로 충만해진 그는 다시 첫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꼴찌들에게 첫째가 될 수 있는 희망을 심어 주었습니다. 설령 저의 삶의 실수와 죄, 당신을 저버리는 어둠으로 꼴찌가 된다 할지라도, 저 먼 발치 마지막 자리에서 당신을 뵐 자격조차 없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감사하며 당신을 만날 때를 묵묵히 기다리게 하소서. 당신의 성령께서 오시면 첫째도 꼴찌도 모두 함께 어울려 당신의 첫째임을 깨닫게 될 것을 믿습니다. 이제 자신의 힘으로 하겠다는 모든 교만을 버리고 겸손하게 넘어짐 속에서도 오직 당신께 의탁하게 하소서.
주님, 모든 지나가는 것에 집착하지 않게 하시고, 비워진 것을 다시 채우려는 욕심을 버리게 하소서. 그저 당신이 하실 수 있도록 저를 내어 맡기며 흘러갈 것을 흘러가게 내버려 둘 수 있는 믿음을 주소서. 텅 비워진 방, 텅 비워진 욕심, 텅 비워진 관계들, 텅 비워진 시간들, 그리고 텅 비워진 마음에 감사하며 지금 여기에서 당신의 사랑을 살게 하소서. 저는 당신만으로 충분하니 더 이상 당신 아닌 무엇으로 채우려는 갈망을 없애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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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부자청년 이야기’에 이어지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10,27) 하고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나서서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르 10,29-30)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버린다는 것’의 의미가 단지 버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버리는가에 있음을 깨우쳐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 소중한 것들을 “예수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버려야만 하는가?
그 대답은 먼저 ‘예수님이 누구신지’, ‘복음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곧 ‘예수님과 복음’이 그 모든 것들을 버릴만한 의미와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이를 비록 잘 모른다 하더라도, 예수님을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채 알지 모르면서도 매료당할 수는 있기 때문입니다. 곧 우리는 끊임없이 복음과 예수님을 더 사랑하려고 애쓰면서, 그 의미와 가치를 깨달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결국, 우리는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을 넘어, 지금 내가 알고 있는 복음을 넘어, 진정 복음인 복음을 알아가면서 진정 예수님이신 예수님을 알아가는 여행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게 차차 예수님과 복음을 깨달아가면서, 우리는 예수님 이외의 것들을 조금씩 버려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아무리 값지고 좋은 것들도, 그것들이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갑니다. 또한 나에게 소중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오히려 장애물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을 버리는 일은, 진정으로 사랑할 때만이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그분에 대한 사랑이 작아서일지 모를 일입니다.
사실, 사랑이야말로 진정 소중한 것을 위해 자신이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을 버릴 수 있게 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중심이요 궁극적인 것을 발견하게 되면, 우리도 아빌라는 데레사처럼 이렇게 노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 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고 아무 것도 너를 두렵게 하지 말라.
모든 것은 다 지나갈 뿐, 하느님은 변치 않으시니 인내는 모든 것을 얻는다.
하느님을 소유한 이는 부족함이 없으니(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그렇습니다. 만약, 우리가 진정 예수님과 복음을 사랑한다면,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대변혁이 생길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위해 하느님 나라와 그 의로움을 구하는 데는 첫째가 되고, 자기 자신을 위한 다른 것을 구하는 데서는 꼴찌가 될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예수님과 복음과 사랑이 늘 첫째가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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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마르 10,28)
주님!
모든 것을 버리되, 버리고 온 제 자신도 버리게 하소서.
당신을 따르되, 당신을 따르고 있는 제 자신도 버리게 하소서!
저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께서 목숨을 버리시며 이루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당신의 것이 되어, 온전히 당신만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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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버리는 이의 기도>
마르코 10,28-31 (따름과 보상)
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버리는 이의 기도>
당신이 되어야
내가 있다하시니
내가 있고자
당신이 되게 하소서
나를 버려야
당신이 된다하시니
당신이 되고자
나를 버리게 하소서
나날이
나를 버림으로써
영원히
내가 있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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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비우는 만큼 채워주신다>
세상 사람들은 소위 출세를 하려고 애를 씁니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지배하며 권력을 누리려고 합니다. 부정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자기 잇속을 챙기려 합니다. 그러나 그 출세라는 것이 세상에서는 성공일지 모르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을 따랐습니다”(마르10,28).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구원받는다는 것을, 출세하는 정도로 생각하였나 봅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렸다고 자랑삼아 말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내가 모든 것을 버렸으니 한자리 주십시오.’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수난과 부활에 대해 두 번째 예고하셨을 때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가에서 논쟁한 것에서 드러났고, 세 번째 예고를 하셨을 때에도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도록 해주십시오.’ 하고 청하는 것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린 이유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버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버려야지, 자신을 위해서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가르침과 복음을 위해서 살려면 자신을 버려야 하고, 자신을 위해서 살려면 예수님을 버려야 합니다.
“사실 진정으로 무엇인가를 버린 사람은 그것을 버렸다는 것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을 좋아했던 자신의 과거를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함께야) 세상에서는 많은 것을 가진 것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권력을 지닌 것을 첫째로 여기지만, 하늘에서는 많은 것을 어떻게 사용하였는가를 봅니다.
무엇을 위해 썼느냐가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내가 잘 먹고 잘 입고 편하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하느님 앞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이 영원한 생명, 구원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장애가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룰 수는 없지만 버려야 할 것을 하나씩 기쁘게 버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고 내가 버린 것은 무엇인가요? 아니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지요? 재물, 권력이나 명예. 자식이나 건강을 첫째라고 생각한다면 그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주님 마음에 드는 꼴찌의 자리를 차지하여 마침내 천상에서 첫째가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인간관계나 소유물이 영원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말합니다. “모든 것에서 마음을 비우고 주님만을 찾으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얻을 것입니다. 비우는 만큼 그분께서는 채워주실 것입니다.” 지상의 것들을 버리는 것이 그에 상응해서 천상의 것들을 채우는 것이라는 깨우침을 얻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1베드1,13-15의 말씀으로 마무리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받을 은총에 여러분의 모든 희망을 거십시오.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전에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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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지방 카파르나움을 떠나 유다 지방 예루살렘으로 걸어가고 계십니다.(마르 9,33; 10,1 참조) 십자가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길 위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을 멈추지 않으십니다(10,1 참조)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하여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10,28)
하느님 나라를 위한 제자들의 과감한 선택과 결정은 부자 청년의 머뭇거림(10,22 참조)과 대조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물었던 부자는 지상에서 가지고 있던 재물 때문에 하늘에서 받을 수 있는 보화를 포기하고 떠났습니다. 반면에 제자들은 가족의 유대와 소유의 안전을 포기하고 예수님 곁에 머물러 있습니다.(1,18.20 참조) 제자들은 부자 청년이 하지 못한 행동, 곧 소유한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요청에 응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용기 있는 결정에 대한 보상을 약속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그 어떤 것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포기한 것들을 백 배로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은 부자 청년이 간절히 바라던 것이었습니다.(10,17 참조)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따를 때 수많은 어려움(포기, 박해 등)이 함께 따른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얻게 될 유익도 많음을 환기시켜 줍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분과 함께 걷고 있는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있습니까? 그것을 받고자 가진 것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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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르10,29.30)
<왜, 믿는가?>
어제 복음은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와 부자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가진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기를 힘들어 하는 부자는 결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복음(마르10,28-31)은 어제에 이어지는 말씀으로, 가진 것을 나누기 힘들어하는 부자와는 달리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에 대한 말씀입니다.
왜, 믿고 있으며, 왜, 보이지 하느님을 믿습니까? 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사랑합니까? 그 믿음과 사랑이 지향하는 나의 구체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다시 묻는다면, 지금 나는 믿는 사람의 모습인가? 정말 현세의 복과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고 있는가?
예수님께서 향해 있는 곳으로 나의 마음이 향해 있다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는 지금의 나의 모습은 많이 변해 있을 것 같습니다.
무엇 때문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고 있으며, 무엇 때문에 "아멘!"이라고 자신 있게 외치고 있는가?
오늘은 3월의 첫째 날인 '삼일절'입니다. 민족의 독립, 곧 우리나라의 기쁨과 자유와 해방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애국지사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믿는 이들이 지향하고 있는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억압받는 이들에게 기쁨과 자유와 해방이 주어지는 나라입니다.
지금 가진 것이 많고, 충분한 기쁨과 자유와 해방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처럼, 나에게 예수님의 가치는 필요 없다고 외치면서 살아가는 나 자신은 아닌지?
모든 예언자들이 계시하고(드러내고) 있었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믿는 이들의 전부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하고, 오늘 부활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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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산책하러 나갔다가 길에서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저를 본 개가 사납게 짓는 것입니다. 갑작스러운 짖음에 깜짝 놀라 움찔했습니다.
솔직히 그렇게 놀랄 것도 아니었습니다. 제가 키우는 개보다 훨씬 작은 중형견이었고, 주인이 개 목줄을 꽉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성적인 생각과 달리 약간의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목줄을 놓쳐 나를 공격하지는 않을까?’라는 ‘혹시’나 하는 두려움일 것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불안과 공포의 분위기가 사라진 적이 있을까요? 그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불안과 공포를 안고 살지도 않습니다. 불안과 공포를 이겨낼 방법을 찾으면서 더 나은 삶을 향해 묵묵히 앞으로 걸어갔습니다. 따라서 노심초사 전전긍긍하며 자신 없는 마음으로 살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이를 극복할 힘을 우리는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시냇가에 자라는 나무는 매일 부는 바람에 걱정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나무는 흔들리지 않을 자신의 체력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더 기울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우리가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불안과 공포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가장 힘센 주님과 함께하고 있음에 안심하며, 조금 더 나은 나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원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을 올바르게 따르는 모습이 아닐까요? 이를 위해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주님을 따른다는 것을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 따름은 모든 것을 버려야만 가능했습니다.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리는 것도 해야만 했습니다. 즉, 세상의 것보다 하느님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박해받을 수도 있지만, 이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사람은 그에 합당한 보상을 얻게 된다고 약속하십니다. 세상의 눈에서는 분명 꼴찌의 삶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세상의 눈을 뛰어넘어, 꼴찌가 첫째가 되는 삶으로 변화시키십니다.
그래서 제1독서의 베드로 사도 말씀처럼,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에 여러분의 모든 희망을 거십시오.”를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의 것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멀리해서 어리석다는 말을 듣겠지만, 이런 세상의 꼴찌 모습이 하늘에서는 첫째의 모습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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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추종追從의 여정>
-주님, 사랑, 버림, 따름-
모 인사의 진단에 절대적으로 공감했습니다. ‘갈등과 분열의 세계라지만 한국내의 갈등과 분열은 최고다. 88% 갈등사회다.’라는 진단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남북의 분열과 갈등, 지역간, 계층간, 세대간, 남녀간, 노사가, 정규직과 비정규직간 참으로 끝없이 분열되어 갈등하는 산산조각난, 폭발 직전의 작금의 사회 현실같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죄의 결과가 분열이라 합니다. 죄의 결과, 관계의 파괴로 인한 분열과 갈등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통합과 일치의 사회를 말합니다. 특히 요즘 정치권에서 회자되는 주제가 ‘통합’입니다. 어떻게 분열과 갈등이 아닌 통합과 다양성 속의 일치를 이룰 수 있을까요. 참으로 당면한 최대의 화두라 할 수 있습니다.
어제 복음의 부자는 주로 청년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부자 청년은 재물이 많아 예수님 추종에 실패했습니다. 재물과 주님이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진리가 입증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삶의 비전이, 삶의 중심이 부재했던 것입니다. 중심이 비전이 둘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에게 삶의 유일한 비전이자 중심은 주 예수 그리스도뿐이라고 고백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이 우리의 영원한 비전이자 꿈이자 희망이자 중심이라 고백합니다. 예나 이제나 구도자들의 궁극의 열망은 똑같습니다.
유일회적 한번 뿐인 소중한 인생을 참으로 진짜 살아 보고 싶은 열망입니다. 바로 하느님을 찾아 수도원에 온 성소자들의 공통적 특징입니다. 제가 자주 강조했던 말마디가 있습니다.
“우리 수도형제들이 함께 통합과 일치의 공동체를 이뤄 살 수 있는 것은 성격이, 마음이, 기질이, 서로 같아서가 아니다. 이렇게 살기로 하면 함께 살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다. 이런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 수 있는 것은 서로 좋아서, 마음이 맞아서가 아니라, 바라보는 중심, 비전의 방향이 같기 때문이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제대로의 방향이다. 바로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주 예수 그리스도는 공동체의 영원한 비전이자 중심이다.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삶의 중심이자 의미이다.”
평생 매일 끊임없이 주님 중심의 공동체의 통합과 일치를 확인하고 성취해주는 결정적 수행이 바로 공동체의 가시적 중심인 성전 안에서의 형제들이 함께 주님께 바치는 공동전례기도입니다. 이런 공동전례기도의 수행이 없었다면 공동체는 벌써 분열과 갈등으로 공중 분해 되었을 것입니다.
너무나 자명한 진리입니다. 과연 분열과 갈등의 사회에서 믿는 이들의 공동체만이라도 통합과 일치의 모범은 물론 나라와 사회의 통합과 일치를 위해서도 전력 투구해야 하겠습니다. 참으로 간절히 항구히 기도하는 정치 지도자들이라면 얼마나 좋을런지요! 기도할 때 회개요 겸손이요 지혜의 선물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추종의 여정에 궁극의 요소는 무엇일까요.
첫째, 중심입니다.
물론 우리의 영원한 중심이자 비전은 주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수도공동체를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라 정의합니다. 바로 이 중심이자 비전이자 방향이신 주님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삶의 여정을 주님을 따르는 추종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라는 주님의 말씀도 기억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해 삶의 영원한 비전이자 중심인 예수님을 스승님으로 선택했다는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참으로 추종의 여정에서 늘 새롭게 확인해야 할 영원한 비전이자 중심이신 주님입니다.
둘째, 사랑입니다.
주님께 대한 열렬하고 항구한 사랑입니다. 추종의 여정에 날로 깊어지는 영원한 도반이자 스승이신 주님과 사랑의 우정 관계인지요.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힘은 관계의 힘, 우정의 힘입니다. 주님께 갖고 갈 수 있는 것은 신망애信望愛의 관계 하나뿐입니다.
환경이 좋아 천국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 형제들과의 관계가 좋아야 천국입니다. 참 좋은 손님은 빈손으로 와도 반갑고 기쁘듯 주님과 깊은 우정의 관계에 있는 이는 빈손으로 와도 주님께는 반갑고 기쁠 것입니다. 자주 피정하는 분들과 나눴던 대화도 생각납니다.
“여기 수도원이 천국입니다.”
“아닙니다. 장소의 환경이 좋아서 천국이 아니라 관계가 좋아야 천국입니다. 주님의 관계, 형제들과의 관계가 나빠 남남의 분열과 갈등의 관계라면 거기가 지옥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장소개념이 아니라 관계 개념입니다.”
이래서 삶의 중심이자 비전이 주님과 날로 깊어가는 우정이 공동체 일치에 결정적 요인이 됩니다. .
셋째, 버림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저절로 따라오는 이탈의 버림과 비움입니다. 영원한 참보물이신 주님을 만났기에 세상 소유물들은 짐이 될뿐입니다. 부자 청년은 참으로 주님을 못났기에 버림에 실패했지만 베드로는 참으로 삶의 영원한 비전이자 중심인,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신 주님을 만나 사랑했기에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베드로의 버림이 끝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결코 단번에 이뤄지는 버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평생 우리 삶의 여정이 사랑의 여정이듯, 버림이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하루하루 날마다 버리고 비워가야 할 여정중인 우리들입니다.
넷째, 따름입니다.
죽을 때 까지 살아 있는 그날까지 안팎으로 끊임없이 비우고 버리고 떠나 주님을 따르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의 바로 우리 여정의 궁극의 목표이자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자주 제가 강조하는 말마디가 있습니다.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게 죄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탄력좋은 믿음으로 희망으로 사랑으로 다시 새롭게 주님을 따르는 여정에 오르는 것이다.”
참으로 버림과 따름에 항구했던 이들에 대한 주님의 축복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아버지는 하느님 한 분뿐이기에 아버지만 빼고 인적, 물적 모든 축복의 선물에,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까지 약속받는 이들이 바로 추종의 여정에 항구했던 이들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경각심을 촉구합니다.
“그런데 첫째가 꼴지가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추종의 여정에 방심은 금물이라는 것입니다. 도중하자하지 않고 제 페이스대로 한결같이 목표지점까지 완주하는 추종의 여정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 해도 지금 꼴찌가 된 현실이라면 구원은 요원합니다. 한결같이 추종의 여정에 충실한지 바로 오늘 지금 여기 내 현주소를 드려다 보게 됩니다.
분열과 갈등의 시대에 참으로 멋진 통합과 일치의 모범을 보여줄 수 있는 그리스도 중심의 교회 공동체입니다. 바로 제가 33년 동안 정주하여 몸담고 살아가는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 공동체’가 그 빛나는 모델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추종하는 여정에 결정적 네 요소가 되는 중심, 사랑, 버림, 따름입니다.
참으로 국외나 국내나 어렵고 혼란한 시절입니다. 국가의 명운이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닐 대통령 대선이 3월9일입니다.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에 감사한 마음 가득합니다. 바로 오늘부터는 3월 요셉 성월의 시작이고, 내일 재의 수요일부터는 은총의 사순시기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겹 경사같은 기분입니다. 그대로 깨어 회개와 기도, 말씀공부와 사랑 실천에 전념해야 할 영적훈련장과 같은 3월 요셉 성월에 사순시기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사순시기를 앞둔 우리 모두에게 추종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십니다. 사순시기를 앞둔 오늘 추종의 여정에 결정적 모범이신 주님의 수제자 베드로의 권고가 참 유익하고 고맙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에 여러분의 모든 희망을 거십시오. 이제 순종하는 자녀로서, 전에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1베드1,13-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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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말씀 기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새 달을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봄을 맞이하는 이 달이
모든 이에게 새로운 희망의 달이 되게 하시고
새로 시작하는 달이 되게 하소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주님으로부터 "받을 은총에 모든 희망을 걸게" 하소서.
주님께 오롯이 '순종하는 자녀'로서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거룩하신 아버지를 닮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나의 주님!
나는 주님을 위해 무엇을 봉헌했나
생각해 봅니다.
나는 복음을 위해 무엇을 포기했나
생각해 봅니다.
현세적 욕심 때문에
가진 것을 포기하지 못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 부자 청년이 되기보다는
지금 별로 가진 것이 없어도
온 몸과 마음으로 주님과 복음을 위해
나를 내어 놓음으로써
현세의 은총과 하늘나라를 얻어누리는
가난한 벗이 되게 하소서.
오! 나의 하느님, 나의 전부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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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_r8Q148vu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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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르 10, 31)
3월
첫날이다.
봄이
되어간다.
우리의 생활은
우리의
현실이 된다.
현실 안에서
예수님을 위해
버린 것이
하나도 없다.
끊임없는 변명과
헛된 구호만
펄럭일 뿐이다.
버림에 대한
반성과
따름에 대한
화해가
필요한
시간이다.
예수님을 보고
우리 생활을 보니
우리자신이
참 한심하다.
걸어가면서
깨닫게 되는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따름의 기쁨이다.
예수님의 손을
다시 잡는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우리를
먼저 아신다.
우리의 현실을
이끌고 가시는
주님의 따뜻한
손이다.
사람이란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
하느님의 사람은
매순간 순간을
버리고 따르는
이들이다.
사람이
되는 것이
첫째와 꼴찌보다
더 중요하다.
다시 버리고
다시 기쁘게
따르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버림이 우리를
씻어주고
따름이 우리를
채워준다.
십자가를
지나야만
참된 따름이
있음을 다시
보게 된다.
십자가의 꼴찌와
십자가의 첫째
모두 십자가에서
철이 들고 있다.
십자가가
이러한
우리자신을
받아주고 있다.
3월의
십자가와 함께
발걸음을
내딛는
삼월의 첫날이다.
반가운
버림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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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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