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류(밥類)
봉혜선
저녁 식사 준비 시간. 오늘은 맛있는 무슨 반찬을 해야 할까? 별 반찬이란 무얼까. 별스런, 특별한 반찬이란 말의 줄임말이 아닌가. 그러나 어떻게 그런 별스런 반찬을 매일 준비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럼 답은 밥이다. 밥만 맛있으면 별 반찬 없어도 되지 않을까. 남은 반찬을 넣은 비빔밥은 어떨까. 늘 갖추어 놓은 감자, 양파, 당근, 계란을 넣은 볶음밥은?
퇴근 후 3분 안에 밥상에 앉아야 한다는 남편의 급한 성격 탓에 그간 애를 먹어왔다. 퇴근하는 차에서 거의 매일 전화 하는 이유가 밥상을 차려 놓으라는 채근인 줄 몰랐다. 남편은 김이나 잘 익은, 혹은 막 무친 배추 겉절이나 된장찌개 같은 소박한 반찬에도 밥만 맛있으면 한 그릇 뚝딱 먹는다. 밥. 밥. 남편은 밥을 원했고 나는 밥을 원하는 남편 앞에 막 불에서 내린 찌개, 냉장고 안에서 갓 꺼내야 제일 맛있다는 김치를 꺼내느라 배고파하는 남편의 ‘시간 밥’ 요구에 딱 맞추지 못했다.
남편은 어릴 때 콩밥을 하면 콩을 골라 먹었다고 했다. 막내는 아빠 앞에서 밥을 대하면 콩을 골라내느라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는 속담도 들어맞지 않아서 하얀 쌀밥을 따로 해주면 아이 망친다 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흰 쌀밥은 나이 들어가는 남편이 싫어하는 음식 중 하나다. ‘흰 쌀밥에 고깃국’을 소원하던 세대와 얼마 떨어지지 않았건만. 드문 외식에서도 흰밥을 그대로 남겨놓곤 한다. 늦둥이 막내가 남편이 먹겠다는 현미밥이니 콩밥 등 잡곡밥을 먹지 않아서 한동안 밥은 두 가지를 했다. 밥은 따로 먹는 게 나았다.
밥을 먹는다는 것, 식구라는 말은 한솥밥을 먹는 데에서 생기는 끈끈함이어서 같이 밥을 먹으면 남다른 유대감이 생긴다는 의미일 것이다. 밥상머리 교육의 의미는? 밥이나 먹자는 인사말은 인사말에 불과한 걸까. ‘밥이나’라니, 밥의 중요성 말고도 다른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하루 세 번이나 꾸준하게 반복되고 한 번이라도 거르면 큰일인 것이 밥 말고 또 무엇인가.
학교를 마친 아이는 아침밥 먹어야 하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도 되는 나이고 집 밥을 자주 먹지 않을 테니 아빠에게 맞춰 주라면서 ‘햇반’만 사다 놓으라고 했다. 전기밥솥 두 개를 꺼내놓던 주방이 조금 넓어졌다.두 아들 모두 집 밥 먹을 일이 줄어 자리가 비는 넓어진 식탁 남편 옆 자리에 밥솥과 밥그릇을 갖다놓고 직접 ‘퍼’먹으라고 했다. 밥솥이 가까이 있자 남편은 밥만 얼른 떠먹으며 행복해 했다. 이제 흰쌀밥 구경을 우리 집에서는 할 수 없다.
매일 짓는 밥에 평상시에는 잡곡을 열 가지 이상 넣는다. 식구가 줄었으니 나이 차가 나는 아이들에 맞춘 반찬 고민은 줄어도 밥을 고심하는 문제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별 반찬 없는 걸 티 내지 않은 채 색다르게 하고 싶어 콩이든 뭐든 빼면 당장 보이는 부실함을 꾸짖는 말이 화살이 되어 날아온다. 무한에 가까운 밥의 변신을 이용해보기로 했다. 급한 성격의 남편에게 맞춤해야 하는 밥이니 반찬을 한 데 넣어먹는 밥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무거나 넣어도 밥이 되는 밥의 ‘변신은 무죄다.’
신혼 때 비빔밥을 잘 먹는 사람이 성격이 좋다는 말을 듣고 ‘남편은 비빔밥을 좋아하지 않을 거야’ 라고 생각했다. 더불어 비빔밥 용 여러 가지 기본인 재료 준비는 생각도 하지 않고 다른 밥상을 차렸다. 어느 날인가. 별다른 비빌 재료가 아닌데 큰 그릇을 가져오라고 했다. 밥을 더 먹으려나 하고 가져다주니 김치를 넣고 김을 마구 구겨 잘라 참기름도 없이 썩썩 비벼 자연스레 입으로 가져가는 게 아닌가. “어머, 성질 더러운 사람은 비빔밥을 안 좋아한다던데!”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다. ‘성질이 좋은가? 아님 스스로도 성질이 안 좋다는 걸 안다는 건가?’ 생각을 읽었는지 남편은 그 이후 정말이지 아무거나 넣고 비빔밥으로 만들어 먹었다.
밥은 흰쌀 혹은 현미 등 주 곡물을 중심으로 콩, 보리, 조, 수수, 기장, 율무 등등 온갖 잡곡을 넣으면 넣는 대로 이름이 된다. 흰 쌀 대신 현미를 제일 많이 넣어도 콩을 넣으면 콩밥, 조를 넣어 지으면 조밥이듯 주연보다 조연이 조명을 받는 셈이다. 콩밥, 보리밥 혹은 꽁보리밥, 조밥, 율무밥, 기장밥으로 밥은 본질을 해치지 않으면서 무한 확대된다.
여름에 주로 하는 열 내리는데 도움 되는 보리밥엔 열무김치와 된장찌개가 제 격인 것처럼 밥에 넣는 잡곡에 따라 준비해야 하는 반찬도 달라져야 한다. 잡곡밥에 야채를 넣었다. 무밥, 콩나물밥, 당근 밥, 가지 밥... . 밤, 잣, 은행 몇 알, 버섯 등을 넣으면 영양밥이 되고 주꾸미, 새우, 굴 등 해물을 품은 밥 이름은 해물 밥이다. 쇠고기, 돼지고기를 넣어 짓거나 다 된 밥 위에 조리가 필요 없는 계란과 참기름과 간장을 넣으면 한 끼는 손색이 없다. 기본인 밥에 넣는 재료에 따라 일품요리가 되니 별 반찬 있는 한 끼로 충분하다. 밥은 또 변신한다. 카레 밥, 짜장 밥, 덮밥... 이런 밥이 주인 식당 반찬은 김치와 단무지 정도다.
분식점에 라면 메뉴가 다양하다. 기본 라면에 계란 라면, 치즈라면, 떡라면, 김치라면, 만두라면 등 들어가는 재료에 따라 이름이 정해진다. 가격도 달라진다. 집에서라면 계란 한 개는 기본이고 먹다 남은 김치를 넣거나 애매하게 남은 만두 한두 개, 떡 조각을 집어넣어 치즈 이불을 덮는 것이 품은 들어도 비용 문제는 아닌데. 마트의 라면 코너에 날로 늘어나는 라면 종류는 이제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비빔국수, 열무 국수, 잔치 국수, 멸치국수 등 국수의 변신도 얼마든지 확장된다. 면발의 굵기에 따라서도 얼마든지 다양한 요리가 되는 것이 국수다.
1년에 천 끼도 더 해내는 밥이다. 수영을 할 줄 알면 스쿠버다이빙이나 윈드서핑이 더 쉽고 여타 여름 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 스키를 탈 줄 안다면 눈이 반갑고 보드나 여타 눈으로 하는 스포츠를 낯설어 하거나 겁을 내지 않는다. ‘그저 기본만 갖추어져도’ 라는 소박한 소원을 품어왔다. 나도 밥이나 라면이나 국수처럼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화무쌍하고 발전 가능성 많은 사람이길 원한다.
<<수필문학11월 호>>
서울 출생
한국산문 2019.12 <투명함을 그리다> 로 등단
한국 문인 협회 회원, 한국산문 작가협회 회원, 편집위원.
디지털 문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