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 / 안도현
1
사기그릇 같은데 백년은 족히 넘었을 거라는 그릇을 하나 얻었다
국을 담아 밥상에 올릴 수도 없어서
둘레에 가만 입술을 대보았다
나는 둘레를 얻었고
그릇은 나를 얻었다
2
그릇에는 자잘한 빗금들이 서로 내통하듯 뻗어 있었다
빗금 사이에는 때가 끼어 있었다
빗금의 때가 그릇의 내부를 껴안고 있었다
버릴 수 없는 내 허물이
나라는 그릇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동안 금이 가 있었는데 나는 멀쩡한 것처럼 행세했다
ㅡ 시집『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창비,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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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도현 시인
1961년 경북 예천 출생.
19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 『모닥불』 『그대에게 가고 싶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 바닷가우체국』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간절하게 참 철없이』 『북항』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산문집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백석 평전』외.
현재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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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금처럼 이어진 상처와 상처 가 오히려 안쪽을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저는 시 「그릇」을 읽으면서 저와 그대의 안쪽에 무수히 나 있을 상처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허물없이 내 허물을 보여줘도 좋을 사람, 떠올려보았습니다.
쉬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안쪽을 들여다보기 좋은 계절이네요. 자신뿐만 아니라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안쪽도 살뜰하게 살피는 가을이 되면 좋겠습니다.
- 박성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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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이 지닌 태생적인 빗금을 빙렬(氷裂)이라 한다. 그릇 자체의 하자(瑕疵)임에 분명한 이 빙렬에 세월의 때가 깊게 스밀 때 명품이 태어난다. 일본인들이 신성시하는 이도다완[井戶茶碗]도 그 투박한 외형에 곁들인 무심한 빙렬의 전개가 없었다면, 거기 스민 고즈넉한 삶의 때가 없었다면 지고의 미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삶 또한 그렇지 않겠는가? 아쉬움과 그리움, 절망과 좌절의 빙렬들이 무수히 모여 한 인간이 되는 것. 오늘 우리 가슴 안의 그릇이 지닌 때 묻은 빗금들을 가만히 살펴보자. 회한과 부끄러움의 빗금들이 가득 쌓인 그릇일수록 그릇은 조금씩 완성형에 가까워지는지 모른다.
- 곽재구 시인
오랜만에 보는 안도현 시인의 시입니다. 한동안 절필을 선언한 까닭을 아시는 분은 아실 것입니다. 미묘한 시기이기에 그 이유까지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반가운 마음으로 시를 읽습니다.
나는 하나의 ‘그릇’입니다. 그릇은 무엇을 담고 있습니까. 보편적으로 그릇은 육체를 상징합니다. 그렇다고 ‘물질적인 무엇’만을 담고 있는 그릇은 아닙니다. 내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그 그릇에 영혼이 함께 담겨 찰랑거리기 때문입니다. 육체가 외적인 것이라면 영혼은 내적인 것입니다. 육체가 보이는 나를 결정하는 것이라면, 영혼은 보이지 않는 것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오래된 그릇이 육체라면, 영혼은 그 그릇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육체입니까. 아니면 영혼입니까.
‘현실적’으로 육체가 더 중요합니다. 예쁘고, 잘생기고, 멋진 사람에게 눈이 갑니다. 그것은 성을 가리지 않습니다. 강동원 같은 남자에게 김태희 같은 여자에게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있습니까. 또 다른 현실, 현실적으로 그와 같이 한 생을 같이 보내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단 한 순간만이라도 같이 있기를 원할 것입니다.
영혼을 살찌우는 것은, 육체가 부족한 사람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차선책은 아닙니다. 이것은 다른 개념입니다. 이원론적으로 육체와 영혼이 ‘양극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쉽게 예를 들자면 ‘더하기와 빼기’나 ‘곱하기와 나누기’와 같은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우리는 육체와 영혼이 인간의 범주 내부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수평적으로 봅니다. 그래서 그렇고 그런 것(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판단합니다.
영혼과 육체가 연관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둘은 자력을 가지고 있어, 서로에게 영향을 줍니다. 육체가 아프거나 약해져 있을 때 영혼 또한 약해집니다. 바로 저 같은 사람은, 육체가 병으로 약할 때 쉽게 화를 내거나 짜증을 냅니다. 화를 낼 일도 아니고 짜증 부릴 일도 아닌데. 하지만 성자라고 불릴 만큼,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은 육체의 고난 속에서도 영혼만큼은 환하게 빛납니다. 우리는 굶으면 허기로 아귀로 변하지만, 수십 일을, 선한 의지를 이루고 지키기 위해 자청해서 단식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육체를 버릴 각오로. 육체가 전부라고 생각하는, 육체를 빛나는 장신구로 채우려 일생을 사는 저와 같은 범인과는 다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육체가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의미 있습니다. 다만 육체는 ‘피투(하이데거의 용어입니다)’ 다시 말해 ‘던져진’ 것입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가 ‘피투’라면 영혼은 ‘기투’의 대상입니다. 스스로의 자각을 통해 던져진 것입니다. 우리는 피투의 상황으로 존재할 수 있고, 스스로의 자각을 통해 기투의 상황으로 옮겨갈 수 있습니다.
나는 그릇이라는 ‘피투의 존재’입니다. ‘버릴 수 없는 내 허물이 / 나라는 그릇이란 걸 알게 되었다’라는 스스로에 대한 인식 이것이 바로 ‘기투’입니다. 새벽, 나라는 한 인간의 허물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더 부끄러운, 5월 5일 어린이날의 아침입니다.
- 주영헌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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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그릇'이 심상치 않다. "국을 퍼서 밥상에 올릴 수도 없"을 만큼 뭔가가 달라진 것이다. 물론 백 년의 시간을 건너와 애초의 가치가 사뭇 달라진 게 그 이유라면 이유겠지만, 아무래도 그릇은 그릇이어야 하는데, 시인은 뭔가에 사로잡힌 듯 그 너머에 골몰한다. 그는 한참을 살펴보다 그릇의 "둘레에 가만 입술을 대보"는 것이다. 멀어서 백년이고, 앞으로도 그러하겠지만 시인은 드문드문 이가 빠지고 뭉툭해진 '둘레'가 그릇의 아가미처럼 느껴진다. 호흡과 맥박도 가깝고 그것이 살아온 삶의 각각도 손에 닿을 듯하다. "나는 둘레를 얻었고 / 그릇은 나를 얻었다" 는 문장은, 따라서 대상을 투영하는 시인 고유의 감각적 '특이(特異) 면에서도 사유의 '밀도'다. 동시에 타인에게 덮친 저 불가해한 지난 4년을 털어내고 다시 시를 쓰고자 하는 '의지'가 아닐까.
시인이 그릇의 '둘레'에 내포된 의미를 생각하면 할수록 시 쓰기의 욕망이 점점 뜨겁게 타오르고 있음을 느낀다. 그가 '둘레'에 입술을 대는 순간, 은밀하게 봉해진 그것의 내력이 한꺼번에 시인을 관통했기 때문이다. 둘레란 그릇의 '형상'을 만드는 자리이고, 또한 '깊이'와 '관능'을 생산해내는 세계와의 유일한 접촉/결합이다. '그릇'을 지탱하는 '강도(剛度)' 로' 꽉 차 있고, 바깥과 안을 구분하며 항상 '그릇'으로 되돌아오게 한다. 시인도 마찬가지. 그는 '둘레'를 내면화 하면서 다시 한 번 자신의 시 쓰기가 어디를 지향하는지를 확인한다.
- 박성현 시인・서울교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