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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일시: 2025. 3. 12.~14.(수~금) - 음력(2. 13.~15.), 일출 06:48~일몰 18:37
●산행지: 변산지맥 1구간 졸업
●산행코스: 장성갈재-515.5m봉-변산지맥 분기점(왕복)-쓰리봉(서래봉)-갈림길-소갈재-두승지맥분기봉-옥녀봉(거담봉)-수리봉-산불감시초소-왕림고개-도산고개-수산-송촌고개-송촌마을 도로-신광사-신림육교-23번국도-관동 버스정류장-수침마을 입구-내사마을 입구-사천삼거리-선운산I.C입구-흥덕파출소-흥덕중학교-배풍산-이동통신탑-성은목장-현대상하목장-신기삼거리-노동마을 입구-사거리-폐기물 처리장-23번국도-신송리버스정류장-상연마을입구-연봉재 입구-남당버스정류장-신덕삼거리-모충사 입구-신정마을입구-서해안고속도로 굴다리-원동고개-서해안고속도로 굴다리-화전마을-2번군도사거리-장동교-710번지방도-표가네 찐빵-영전삼거리-대성농장 입구-23번국도-사거리-용사,만회마을 입구-영성재-유정재-사창재-상여봉-노승봉-바드재-옥녀봉 갈림길-옥녀봉-이동통신탑-용각봉갈림길-용각봉-세봉삼거리-세봉-관음봉-관음봉삼거리-재백이고개-이동통신탑-대소고개-신선암봉-신선봉-운호고개-삼신산-말재-갑남산갈림길-갑남산-도청마을갈림길-도청경로당-도청버스 정류장-도청 교차로-상록 배수장-사투봉-이정표-궁항치-봉수대지-십자안부-월고리봉수대-봉화봉-변산마실길-쉼터-해넘이공원-격포항
●먹거리: 생수1리터, 튀김건빵, 다이제스트, 단팥빵, 사탕15, 게비스콘2
●준비물: 텐트, 바람막이, 동계패딩, 폴라텍바지, 은박메트리스2, 바닥매트, 스틱, 헤드랜턴, 구급약, 부직반창고, 충전지2, 충전짹, 손수건, 휴지, 물티슈, 팔토시, 비닐우의, 안대, 귀마개, 마스크, 3M장갑, 양말, 핫팩2, 여분의류, 띠지13
●거리: 약 64.2Km(35.1+28.1)
●소요시간: 26.25h(10.44h+15.41h)
●누구랑: 나홀로
●경비: 새마을19,900, 햄버거11,300원, 택시11,910원, 뷔페식사8,000, 흥덕농협하나로(캔맥,다이제,단팥빵,환타)13,240원, 고속(질녀가)22,000, 상경해서 뒤풀이(고기짜장)9,500원
●날씨: 2~15, 첫날 약간 흐림.
●산행경과:
* 3. 12.(수) : 36.1km
- 11:48 : 장성갈재(267m)
- 12:17 : 515.5m
- 12:45~58 : 변산지맥분기봉(728.9m)/ 삼면봉
- 12:49 : 쓰리봉(733.6m)
- 13:22 : 488.1m
- 13:48 : 소갈재(222m)
- 14:00 : 289.1m
- 14:16 ~30 : 두승지맥분기봉(328m)/ 삼면봉/ 행동식
- 14:36 : 옥녀봉
- 14:40 : 수리봉
- 15:31 : 왕림고개(85m)
- 15:40 : 도산재(75m)
- 16:05 : 수산(235.5m)
- 16:32 : 송촌고개(60m)/ 신림저수지
- 17:09 : 신광사삼거리
- 17:16 : 신림육교
- 17:26~48 : 하나로기사식당/ 식사
- 17:54 : 수침마을
- 15:20 : 선운산IC입구
- 18:30~38 : 하나로마트
- 18:40 : 흥덕파출소
- 18:55 : 배풍산(110.1m)/ 수도, 화장실
- 19:33 : 신성레미콘
- 19:38 : 담양국씨세소
- 19:42 : 노동마을
- 19:46 : 신기삼거리/ 대농주유소, 휴게소
- 19:55 : 신송마을
- 20:08 : 상연마을
- 20:18 : 신덕삼거리/ 군계(고창-부안)
- 20:22 : 남당/ 신정마을
- 20:27 : 서해안고속도로굴다리
- 20:49 : 화전마을
- 21:00 : 서해안고속도로굴다리
- 21:14 : 표가네찐빵
- 21:18 : 팔팔주유소
- 21:39 : 영전삼거리/ 면계(줄포-보안)
- 22:15 : 어정밥상
- 22:30 : 용사만회마을회관
* 3. 13.(목) : 28.1km
- 04:45 : 출발
- 05:09 : 113.4m봉/ 면계(보안-상서)
- 05:19 : 유정재(95m)
- 06:00 : 279.5m봉
- 06:24 : 329.9m봉
- 07:01 : 상여봉(395m)
- 07:10 : 노승봉(352.9m)
- 07:53 : 바디재(180m)
- 08:26~33~50 : 옥녀봉삼거리/ 행동식
- 08:29 : 옥녀봉(434.4m)
- 09:12 : 가마소삼거리
- 09:25~32 : 용각봉삼거리
- 09:28 : 용각봉(366m)/ 삼면봉
- 10:49 : 279.6m봉
- 11:36 : 세봉삼거리(402.5m)/ 삼면봉
- 11:48 : 세봉(433m)
- 12:16~35 : 관음봉(424.5m)/ 행동식
- 13:13 : 관음봉삼거리
- 13:20 : 마당바위/ 재백이고개(160m)
- 13:56 : 재백이삼거리
- 14:23 : 273.4m봉
- 14:36~47 : 대소고개(195m)/ 노릿재/ 행동식
- 15: 09 : 295.9m봉
- 15:39 : 묘지봉(434m)
- 15:44 : 돌탑봉
- 15:53 : 신선봉(488.2m)
- 16:04~32 : 북재
- 16:47 : 망포대갈림봉(490m)
- 17:02 : 바람재(350m)
- 17:27 : 삼신봉(486.4m)/ 갈마봉
- 18:12 : 말재(86m)
- 19:00 : 351.6m봉, 행동식
- 20:26 : 도청리경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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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간별 세부거리
장성갈재-2km-변산지맥분기점-2km-소갈재-1.5km-두승지맥분기점-3.7km도산재-3km-송촌고개(708번도로)-2.7km-신림육교(23번도로)-3.1km-사천삼거리-2km-배풍산-2.1km-신기삼거리-3.5km-신덕삼거리-5km-연중마을입구(710번도로)-1.2km-영전삼거리-4.4km-영성재-7km-바드재-1km-옥녀봉-4.9km-세봉삼거리-1km-관음봉-1.4km-재백이삼거리-1.3km-대소고개-2.5km-신선봉-3.6km-말재-1.3km-갑남산갈림길-3.2km-도청교차로-1.3km-사투봉-0.8km-궁항치-3km-격포항
♤ 변산지맥 구간 거리
- 장성갈재 ~ 710번 도로/ 표가네찐빵 30.2km(접속 2km 포함)
-. 변산지맥분기점 ~ 송촌고개/ 708도로 12.2km
-. 송촌고개/ 708도로 ~ 표가네찐빵/ 710번 도로 18km
- 710번도로 ~ 대소고개 22.2km
-. 710번도로/ 연중마을 입구 ~ 바드재 12.6km
-. 바드재 ~ 대소고개 9.6km
- 대소고개 ~ 격포항 15.6km
-. 대소고개 ~ 말재 6.1km
-. 말재 ~ 격포항 9.5km
* 식수 공급지 및 산행 정보
- 신림육교: 편의점
- 신림육교 ~ 흥덕중학교: 식당
- 배풍산: 수도/ 화장실
- 흥덕시내 통과 도로구간 약 17km
- 신기삼거리: SK대농주유소/ 휴게실 매점
- 710번 도로 표가네찐빵
- 개암힐링찜질방: 063}581-0700(연중무휴 24시간 이용), 성인 12,000원
- 흥덕 개인택시: 063)562-6045
- 줄포 개인택시: 063)582-0400, 010-4911-6253
- 신선봉 아래 집터: 개울
- 곰소 개인택시: 063)582-7090, 063)582-2577
- 도청경로당, 도청쉼터: 물 보충가능
- 격포 개인택시:
- 격포항: 화장실, 편의점
* 서울에서 장성갈재 내려가는 길
- 용산역 ~ 백양사역: 06:25, 07:34, ~ 04h, 19,900원
- 백양사역 ~ 장성갈재: 택시 1만원
- 용산역 ~ 정읍역: 05:08, 05:48, 06:29, ~ , 1.38h, 29,600원~39,500원
- 정읍역 ~ 정읍터미널: 도보 300m
- 정읍 ~ 입암 ~ 마을택시 이용(정읍에서 연월행 버스 운행 중단)
* 격포항에서 서울 올라오는 길
- 하나로마트 건너편 팔각정옆 격하2 버스정류장
- 격포 ~ 부안(직행): 4,100원
- 격포 ~ 부안(좌석, 완행): 1,000원, 0.40h
- 부안 ~ 서울(센트럴): 13:40, 15:10, 16:10,~ 3h, 23,1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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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산지맥(邊山枝脈)이란?
호남정맥 내장산 백암봉 부근에서 서쪽으로 갈려나온 영산기맥의 장성갈재에서 서쪽으로 약 1.7km 떨어진 방장산 쓰리봉(733.6m)에서 북쪽으로 분기하여 347.4m봉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수산(秀山, 237m)을 일구고 송촌(708번 도로)에 이르러, 송촌에서 방향을 바꿔 북진하며 신림, 흥덕, 줄포, 보안면 등 네개 면을 지나 변산반도 국립공원이 시작되는 부안군 보안면 남포리 사창마을까지 장장 22km를 지나는데 이 구간은 최고봉이 배풍산(109.2m)이고 주로 2~30m의 비산비야 구릉지이다. 지맥이 변산반도 국립공원에 들어서면 방향을 다시 서쪽으로 뻗어가며 노승봉(352.9m), 옥녀봉(432.7m), 관음봉, 세봉(433m), 재백이고개, 신선봉(491m)을 지나 삼신산에서 두 갈래를 쳐 북쪽으로 잠두산을 일으키고 옥녀봉 산줄기로 나뉜다. 삼신산에서 서쪽으로 뻗어가는 변산지맥은 말재(738번 도로)로 내려섰다 다시 350m봉에서 두 갈래를 친다. 북쪽은 익산봉(151.3m), 원마포(30번 도로), 수리봉(125m), 반월을 거쳐 닭이봉에서 끝을 맺는다. 닭이봉의 물줄기는 모두 서해바다로 흘러든다. 서쪽은 갑남산(409m) 갈림길, 도청리(30번 도로), 사투봉(169.2m), 궁항치를 지나 봉화봉(174.2m)을 세우고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 변산반도 격포항 남쪽에서 끝을 맺고 그 여맥을 묻는다. 도상거리는 약 56.5km 정도 되고 지역의 특성을 살려 이 산줄기를 변산지맥(邊山枝脈)이라 한다. 이 산줄기 좌측으로 흐르는 물은 갈곡천이 되어 곰소만으로 들거나 직접 서해바다로 들고, 우측으로 흐르는 물은 고부천이 되어 동진강에 들거나, 두포천이 되어 서해바다로 들거나 직접 서해바다로 든다.
♤ 변산지맥 개념도
♤ 변산지맥을 지나는 동네
* 장성군(長城郡)
전남의 가장 북단에 위치한 군으로 동쪽은 순창군과 담양군, 서쪽은 고창군과 영광군, 남쪽은 광주광역시, 북쪽은 전북 정읍시와 고창군에 접하고 있다. 군 전체가 대부분 산지를 이루며 영산강 최상류인 황룡강과 장성호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산출기가 뻗어 내려오며, 그 한줄기인 북서쪽의 산줄기는 고창군과 영광군과의 경계를 이루며 장성갈재(일명 노령(盧嶺)에서 태청산(太淸山)으로 이어지는 북동-남서 산줄기이고, 또 하나는 순창군과 담양군의 경계를 이루며 노령에서 도장봉(459m)으로 내려오는 산줄기이다. 이는 남서 방향으로 이어져 병풍산(屛風山, 826m), 불태산(佛台山, 636m) 등을 이룬다. 영산강의 상류 지류인 황룡강이 북동~남서 방향의 구조선을 따라 흐르고, 북하천·약수천·개천·동화천 등의 지류들이 산지 사이를 흐르면서 들을 이루고 이곳에 마을이 입지한다. 노령을 중심으로 각 고속국도 및 철도의 관문이다. 금성산성과 백양사가 유명하며 홍길동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지명은 산세가 깊고 성곽처럼 둘러싸여 있다고 해서 유래되었으며, 고려 시대부터 지명이 사용되었다. 백제 시대에는 고시이현(古尸伊縣, 현 장성), 구사진혜현(臼斯珍兮縣, 현 진원). 소비혜현(所非兮縣, 현 삼계)으로 이루어진 군으로,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고시이현이 갑성군(岬城郡)으로, 구사진혜현은 진원현으로, 소비혜현은 삼계현으로 개칭되어 무진주 관할이 되었으며, 940년(고려 태조 23)에 갑성군을 장성군으로 고쳐 처음 장성이 되었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장성군과 삼계현은 영광군의 속현이 되고, 진원현은 나주목에 속했다. 1413년(태종 3)에 장성은 나주목의 관할이 되고, 진원은 장흥도호부의 관할이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본래는 백제의 고시이현(古尸伊縣)이었는데, 신라에서 고쳐서 갑성군(岬城郡)이라 하였고, 고려에서는 지금 이름으로 고쳐 영광군에 붙였다가 명종 2년(1172)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본조에서는 현감으로 고쳤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 문헌의 「동람도」에는 장성과 진원이 분리되어 있다. '1872년 지방지도'를 보면, 황룡강 물줄기를 중심으로 산출기 남북방향으로 뻗어내려 오는 것이 뚜렷할 정도로 산지가 많다. 고시미(古尸伊), 갑성(岬城), 오산(鰲山), 장성(長城)이 모두 '산울타리의 골짜기 고을'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산이 둘러있고 불이 굽이쳐 스스로 하늘이 이루었네"라는 조종생의 시에 산지가 많은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다. 1895년(고종 32)에 군제 실시로 장성군이 되었다. [통합포탈에서 발췌정리]
* 정읍시(井邑市)
전북 서남부에 위치한 시로 도농복합시이다. 북쪽으로 김제시와 완주군, 동쪽으로 임실군, 서쪽으로 부안군과 고창군, 남쪽으로 순창군과 전남 장상군과 접해 있다. 지리적으로는 호남의 양대 도시인 광주광역시와 전주시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마한의 고비리국, 초산도비리국이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백제 때 정촌현, 대시산군, 고사부리군이 설치되어 있었다. 757년 신라 경덕왕이 정촌현을 정읍현으로 개칭하고 태산군(현재 태인면)의 영현으로 삼았다. 이때 고사부리군은 고부군으로 개칭되었다. 936년 정읍현을 고부군의 속현으로 삼고 감무를 설치했다. 이후 951년에는 고부군에 안남도호부를 설치하였고, 1019년에는 안남도호부를 폐지하고 다시 고부군으로 환원하였다. 조선 시대 1409년 고려 시대의 태산군과 인의현이 합쳐져 태인군이 되었다. 1421년 태인향교가 신축되었다. 1593년 입암산성이 수축되었다. 1894년 고부군수 조병갑의 압정에 반발하여 고부의 농민들이 봉기하였다. 이 민란은 이후 동학농민혁명으로 확산되어 동학혁명의 발상지가 되었다. 고부면과 덕천면 등지에 관련 유적지가 상당수 있다. 호남정맥과 영산기맥이 통과해 산지를 이루는 군의 동남부를 제외한 그 밖의 대부분 지역은 구릉지와 평야지대이다. 동남부에는 상두산(象頭山, 575m)·국사봉(國士峰, 543m)·묵방산(墨方山, 538m)·국사봉(國師峰, 655m)·고당산(高堂山, 640m)·칠보산(七寶山, 486m)·내장산(內藏山, 763m)·입암산(笠巖山, 626m)·방장산(方丈山, 734m) 등 호남정맥과 영산기맥의 비교적 높은 산들이 시의 경계를 이루며 솟아 있다. 내장산은 동쪽으로 트인 말굽형으로 하고 있는 월령봉(420m)·서래봉(580m)·불출봉(610m)·망해봉(640m)·연지봉(蓮池峰, 720m)·까치봉(680m)·신선봉(神仙峰, 763m)·연자봉(660m)·장군봉(將軍峰, 670m)의 9봉으로 이루어져 있다. 호남정맥과 영산기맥의 산지에 연이어 해발고도 100m 미만의 구릉지가 동남부에 널리 분포하며 밭으로 이용되고 있고, 두승산(斗升山, 444m)·동소산(東所山, 225m)·천태산(天台山, 195m)·천애산(天涯山, 198m)·성황산 등의 구릉성 산지가 곳곳에 분포한다. 산지와 구릉지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대부분 해발고도 50m 미만의 넓은 평야로 김제평야의 일부를 이룬다. 충적평야는 해발고도 10∼30m 정도의 낮은 지대로 동진강과 고부천 유역에 발달해 있다. 이 충적평야는 빙기에 해수준이 낮아져 깊게 파인 침식곡을 후빙기에 하천이 퇴적한 매적곡에 해당해 하천의 크기에 비해 그 면적이 넓다. 동진강은 산외면의 흑방산에서 발원해, 옹동면의 상두산에서 발원한 용호천(龍虎川)과 내장산에서 발원한 정읍천을 신태인읍에서 합류한 뒤, 김제시와 부안군의 경계를 이루면서 황해로 흘러든다. 그리고 고부천은 고창군에서 발원해 시의 서쪽 경계를 이루면서 북진해 황해로 흘러든다. 넓은 충적평야는 일찍부터 경지로 개간되고 관개수리시설이 갖추어졌다. 전남과 전북의 경계가 제대로 나누어지는 곳이다. 영산기맥의 고개인 갈재(한자어로 노령)을 넘으면 전남이다. 실제로 과거부터 전남과 전북이 교류하는 교통의 요충지였으며, 현재는 갈재 아래에 뚫린 호남고속도로의 호남터널로 전남북을 왔다갔다한다. 문화적으로도 이 노령산맥이 전남과 전북의 경계가 되어서, 전남 장성과 붙어 있어도 정읍 사투리는 전남의 사투리와 많이 다르며 여느 전북지방 방언과 별 차이 없다. 또한 주민들은 전남권의 대도시 광주광역시보다는 전북권의 대도시 전주시를 더 가깝게 생각한다. 실제로 직선거리로든, 호남고속도로나 1번국도 등의 교통로 기준으로든 전주가 광주보다 좀 더 가깝기도 하다. 유명한 관광지로 국립공원 내장산이 있고, 그 외 옥정호 구절초 테마공원, 라벤더농원 등이 있다. 특이한것은. 시내에 충무공 이순신을 모시는 충렬사가 있다. 이순신 장군과 정읍이 무슨 관계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분이 정읍현의 현감을 맡았던 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재의 충렬사 및 충무공원은 해방 이후에 조성된 것이며, 원래는 시가지 남쪽의 과교동에서 모셨다고 한다. [통합포탈에서 발췌정리]
* 고창군(高敞郡)
전북 서남부에 있는 군으로 북쪽으로 부안군, 동쪽으로 정읍시, 남쪽으로 전남 영광군, 남동쪽으로 장성군과 접해 있다. 행정구역상 현재는 전북이지만 전주시보다 광주광역시가 더 가까운 곳이며 이 때문에 광주광역시의 영향력이 더 강한 편이다.백제 모량부리현(毛良夫里縣)이었고 신라 경덕왕의 전국 지명 한화정책 때 지금까지 사용되는 고창현(高敞縣)으로 바꾸었다. 지금은 전북이지만 이 당시에는 9주5소경 중에서 전주시가 아니라 지금의 광주광역시 무주군을 중심으로 하는 무주군 행정구역 소속이었다. 즉 전남 쪽이었다. 1896년 전라도가 남북으로 분도(分道)될 당시에도 전남에 속했다가 1907년 흥덕, 무장 두 고을과 함께 전북에 편입되었다. 이후 1914년 고창군, 무장군, 흥덕군 3개 군을 통합하여 오늘날의 고창군이 형성되었다. 군의 서북부는 서해 바다와 곰소만에 접해 있고, 동남부는 영산기맥에서 뻗어나온 산줄기에 막혀있는데, 이 산줄기에서 인천강이 발원하여 선운산 옆을 지나 곰소만으로 흘러든다. 화강암이 많아 평야가 많은 편이다. 곰소만 갯벌과 구시포 앞바다와 관련하여 부안군과 해상경계를 두고 다툼이 있었는데 헌법재판소는 이에 대해 고창군 관할이라며 고창군의 손을 들어주었다. 간조시에 곰소만은 고창군 육지와 연결되나 부안군과는 갯골로 경계가 생긴다. 다양한 종류의 특산물이 전국적으로 유명한 산지다. 이 고장의 유명한 산물로 수박, 풍천장어, 복분자를 들 수 있다. 수박은 대산면이 주산지며, 인천강이 곰소만으로 흘러드는 하구에서 양식되는 풍천장어는 복분자주와 함께 선운산을 찾는 사람이라면 한번 쯤은 맛보게 되는 별미이기도 하다. 대산면 수박은 물빠짐이 좋아 농작물이 자라기 좋은 황토 토양에 남부지역 특성상 일조량이 많아 농산물품질평가에서 수박 부분은 항상 수위를 다툰다. 복분자는 흔히들 복분자주의 재료로 알려져 있으나, 약재로도 많이 쓰인다. 풍수가들 사이에서 명성이 자자한 흥덕 윤도를 만드는 장인이 300년에 걸쳐 대를이어 윤도를 만들고 있다. 또한 낙농업도 발달한 편으로, 매일유업의 상하목장 브랜드 우유를 고창군 상하면에서 생산한다. '모양성'으로도 불리는 고창읍성이 고창읍내에 인접해 있다. 현지인들은 고창읍성이라는 이름보다 원래 이름인 모양성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으며 매년 10월이면 지역축제인 '모양성제'가 이 고창읍성 앞에서 열리는데 1973년부터 계속되어온 꽤 전통있는 축제이다. 고창읍성은 전남 순천시의 낙안읍성, 충남 서산시의 해미읍성과 함께 현재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있는 조선시대 읍성(邑城)으로, 평지를 둘러싸는 형태로 축조된 다른 두 읍성과 다르게, 산언덕을 둘러싸는 형태로 축조되어 있다. 성벽 위를 세바퀴 돌면 살아서는 무병장수하고 죽어서는 극락왕생한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현재는 군청 근처에 있는 고창여자고등학교가 예전에는 고창읍성 내에 위치했었다. 고창읍성으로 들어가는 입구 옆에 판소리 여섯마당을 정초한 동리 신재효의 고택이 있으며, 바로 옆에 판소리 박물관이 있다. 한편 무장면 소재지로 가면 무장읍성을 볼 수 있는데, 지금은 읍성 남문 및 객사, 동헌 등 일부 건물만 남아있다. 무장에서 법성포 방향으로 가다 보면 국내 최초의 체험형 관광목장인 학원농장의 청보리밭으로 유명세를 타고있는 공음면에 이르는데, 이 곳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동학당이 최초로 기포(起包)한 곳이기도 하다. 전봉준 다음으로 유명한 동학군 지도자 정읍대접주 손화중이 이 동네의 유지였다. 아산면 죽림리, 상갑리 일대는 수백기의 고인돌이 밀집된 지역으로 유명하다. 물론 고인돌은 강화, 부안, 화순 등 전국 어디에도 있지만, 이처럼 수백기가 몰려있는 경우는 한반도는 물론 세계에서도 보기힘든 광경이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되어 있다. 삼한시대에 마한 54국 중 모로비리국이 고창 지역에 있었다고 한다. 선운산 도립공원, 선운사 또한 유명하다. [통합포탈에서 발췌정리]
* 부안군
전북 중서부에 위치한 군으로 동쪽은 정읍시, 남쪽은 곰소만을 경계로 고창군, 북쪽은 동진강 하구를 경계로 김제시와 인접하며, 서쪽은 황해에 접하고 있다. 북동부는 평야지대이고 남서부는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남서부의 서해에 돌출한 변산반도는 군면적의 2/3를 차지하며, 대부분이 산지로 서해바다의 인접지역을 포함하여 변산반도국립공원을 이룬다. 변산반도는 내륙의 산악지대인 내변산과 서해 쪽의 해군의 동부 평야지역은 중생대 쥐라기의 대보화강암을 기반암으로 하고 서부에는 중생대 백악기 상부의 신라군층에 속하는 퇴적암류가 있으나 대부분 백악기 말 신기화산분출암을 기반암으로 한다. 안지대인 외변산으로 구별된다. 내변산에는 의상봉·낙조대·옥녀봉·갑남산·쌍선봉 등 해발고도 400m 내외의 산들이 솟아 있고 수목도 울창하여 우리나라 팔승지의 하나로 꼽혀 왔다. 낮은 산으로는 계화산·시루봉·백산(白山, 47m)·상소산(上蘇山, 115m)이 있다. 내변산을 북류하여 서해로 흘러드는 백천내의 하류부인 변산면 대항리에는 1996년에 부안댐이 건설되어 부안읍의 상수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리고 고부천이 동진강으로, 해창천이 서해로 흘러든다. 변산반도의 산지 주위에 약간의 구릉지가 발달해 있으며, 그 밖에 나머지는 평야지대이다. 충적평야는 주로 동진강 하류와 고부천 연변에 넓게 발달했고, 해안에서는 간척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계화간척지의 관개를 위해 섬진강댐을 축조하고 유역 변경을 통한 관개수리시설을 건설하였다. 서해안에는 위도(蝟島)·하섬(蝦島) 등 7개의 유인도와 28개의 무인도 등 35개의 도서가 있다. 삼한시대에는 마한 54소국 중 지반국(支半國)이 부안지역에 있었다. 백제시대에는 개화현(皆火縣)이라 칭했으며,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망한 뒤 신라 땅이 되었다. 757년(경덕왕 16)에는 부령현(扶寧縣) 혹은 계발(戒發)이라 하여 고부군(古阜郡)에 예속시켰다. 고려 초에 감무를 두었는데 보안현(保安縣)이 이에 예속되었다. 보안현은 본래 백제의 흔량매현(欣良買縣)이었는데, 신라 때 희안(喜安)으로 개칭되어 고부군에 이속되었다. 고려 때 보안으로 고쳐졌으며 한때 낭주(浪州)라 불리다가 보안감무가 겸임하게 되었다. 이 지방은 해안선을 낀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염창산성을 비롯한 13개의 크고 작은 성과 계화도봉수대·격포리봉수대, 그리고 진(鎭)과 포(浦)가 많이 산재해 있다. 또, 제안포(濟安浦, 옛이름 撫浦)에는 고려시대의 12조창 중 하나인 안흥창(安興倉)이 있어 임피현의 진성창과 함께 전라도 지방의 세미를 경창까지 운송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경상도와 전라도에 자주 출몰하여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가 1355년(공민왕 4) 7월에 검모포(黔毛浦)에 침입하여 조운이 통하지 않게 되었다. 이에 명나라 사람 장인보(張仁甫) 등 6명을 도강(都綱)으로 삼아 각각 당선(唐船) 1척과 전졸 150명을 주어 전라도 조세를 운반하게 했으나, 왜구와 싸우다 크게 패하여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1376년(우왕 2) 왜선 50여 척이 웅연(熊淵)에 내박하여 적현을 넘어 침입, 동진교를 부수어 조운이 중단되었으나 상원수 나세(羅世)와 변안열(邊安烈)이 적병 1천여 명을 행안산(幸安山)에서 격파하였다. 1414년(태종 14) 보안현을 부령현에 병합했다가 1415·1416년에 통합, 분리되어 두 현의 이름을 따서 부안현이라 개칭하였다. 1417년 흥덕진(興德鎭)을 폐하고 부안에 이속시켜 부안진이라고 개칭했으며, 병마사를 두어 판사를 겸임하게 하였다. 1423년(세종 5) 첨절제사로 바꾸었다가 곧 다시 현감을 두었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이 지방의 농민들은 백산(白山)에서 봉기하여 관군에 대항하였다. 1895년 갑오개혁 때 지방관제 개편으로 군이 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고부군에 속했던 백산·거마·덕림 등이 부안으로 이속되었다. 1963년부터 시작된 계화도 간척지공사가 마무리되어 1978년부터 계화도에서 쌀 추수가 시작되었다. 이 지역에는 간척공사로 수몰된 임실군 주민이 집단이주하였다. 1983년 2월 15일 계화출장소가 계화면으로, 진서출장소가 진서면으로 각각 승격했으며, 1987년 1월 1일 산내면이 변산면으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1994년 12월 1일에 동진면 당산리 일부를 계화면 북창리로 이관하는 면간 경계를 조정하였다. 또한 1997년 8월 1일에는 정읍시와, 1998년 8월 1일에는 김제시 및 정읍시와의 시군간 경계조정이 있었다.[통합포탈에서 발췌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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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구리가 터진 김에 변산에 내려가 답답한 마음을 바람꽃에 터트리기로 했습니다. 소염주사를 두방 맞고, 첨단공포증이 있는 제가 주사를 택한건 그만큼 마음이 절박했습니다. 한것도 없는데 동계트레이닝에 의욕이 과했던지 왼쪽 옆구리에 근막 염좌로 죽을 고비를 넘겼어요.ㅋ 목표를 가진 1년동안 체중은 78에서 68Kg대에 안정적으로 진입하고 허리는 34에서 31로 줄었습니다. 목표는 65, 유지가 더 힘들듯 하지만 서서히 달궈가며 꾸준하게 밀어붙이겠습니다.
몸이 온전치는 않으나 여러 여건을 고려하여 의상암과 불사의방에서 수도를 한 당대 고덕대승 의상과 진표의 눈에 비친 변산의 모습을 찾아나섭니다. 왕건은 변산에서 배를 건조해 나주전투를 치뤘고, 여몽연합군도 변산에서 배를 건조해 일본 정벌에 나섰네요. 교산 허균은 조선후기 전란 후 피폐한 시대상황을 보고 홍길동을 불러오고, 연암 박지원은 변산적을 이끄는 허생전을 불러옵니다. 류형원 또한 우반동 반계에서 세월을 낚고 사회개혁을 갈구합니다. 그 험난했던 시절도 어김없이 변산바람꽃은 피었겠지요. 의구한 산천을 매개로 한 시대를 풍미한 역사적 인물들을 만나보는 즐거움, 변산을 속속들이 살펴볼 기회를 갖다니 새삼 지맥 섭렵을 취미로 갖게 된데 대해 고마움이 느껍습니다.
페친이신 석포선생님은 변산이 어염시초이긴하나 밥을 얻어먹은건 양파를 심고, 간척을 일군 이후부터라 설파하시네요. 대소마을 신선골을 먼 발치에서 바라보며 여생을 대소마을에 내려 놓으신 페친 태하선생님도 생각이 났습니다. 처음 계획은 흥덕에서 1박, 신선대 아래 북재에서 비박을 해볼렸는데 흥덕에 19시에 도착했고 이후 만회,용사마을 회관까지 야간 도로행군으로 22:30분 하루를 마쳤습니다. 다음날 04:45분 출발하여 본격적인 변산반도에 달라붙었고 국립공원이라 국공요원이 띠지를 제거한 변산지맥은 그야말로 실전이었습니다. 알바까지 변산지맥을 좌우 둘러보며 풍족하게 진행하였습니다.
도청리 대나무숲엔 밤을 나는 온갖 잡새들이 빼곡하네요. 한밤중에 대나무숲에 갇혀 헤집고 다니느라 고생했습니다. 군산사는 매제가 마을회관으로 마중 나와 변산은 매조지 못하고 미완으로 도청리에서 마무리 하기로 했습니다. 긴장이 풀리자 왼무릎과 왼쪽 옆구리에 통증이 밀려와 마지막 5Km를 강행했드라면 돌아가실뻔 했어요.^^ 새벽에 일나가는 매제를 기다리게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고 물론 조진대고문님의 강력한 테클이 예상되지만 모든 일에 숨막힐 정도로 완벽을 기하기보단 하나의 사연으로 빈공간을 채워 오래 기억하는 방법도 괜찮아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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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갈재에는 통일공원이 있는데 통일공원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이 서명한 남북정상회담 합의문 표시석이 있습니다.
♤ 장성갈재(267m, 葛岾)/ 노령(蘆嶺)/ 도계/ 군면계(전북 정읍시 입암면 - 전남 장성군 북이면)
전남 장성군 북이면 원덕리와 전북 정읍시 입암면 동천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일제시대 착공되어 목포에서 신의주까지 지역별로 순차적으로 개통이 된 국도1호선이 지나는 곳이다. 노령이 장성갈재로 불리웠는데 갈재 아래로 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이곳도 옛 영화를 잃어가고 있다. 입암산과 방장산 사이의 낮은 능선인 노령부터 장성갈재까지가 전남에서 북으로 가는 대표적인 고개가 되는데 국도1호선과 호남선 철도, 호남고속도로가 모두 여기를 통과한다. 이 고개 남쪽은 전남 장성군 북이면이고 북쪽은 전북 정읍시 입암면이다. 전남에는 목란마을이, 전북에는 군령마을이 고개 첫 마을이며 모두 예전에는 주막거리가 있었던 마을인데 옛날 과거길 가는 선비들로부터 소금장수, 소장수, 방물장수, 새우젓장수 등 수많은 민초들의 발길이 다다랐던 곳이다. 갈재를 한자로 갈대 노(蘆)자를 써 노령(蘆嶺)으로 했다지만 다른 시각도 있다. 조선 후기 문인화가인 이하곤(李夏坤, 1677∼1724)은 ‘남유록(南遊錄)’에서 ‘노(蘆, 갈대)’라는 이름을 가진 기생의 일화로 인해 노령(갈재)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기생은 북이면 원덕리 목란마을 아래 원덕제(저수지) 북쪽에 암봉으로 이루어진 봉우리 ‘갈애바위’ 전설의 주인공이다. 갈재는 전라좌도는 물론 전라우도 등 크고 작은 한양길이 모이는 주요 통로였다. 재를 넘으면 전북 전주 길목인 정읍이 펼쳐지는데 장성댐 밑 청암역에서 이 고개를 넘으려면 고개밑 원덕리 미륵원에서 쉬거나 여러 사람이 무리를 지어 넘어야 했다. 고개는 산적들 소굴이었다. 1520년 중종 때 군사까지 파견될 정도였다. 이 미륵원 인근 500m쯤에 주막이 7개나 된 주막촌 ‘목란’이 있었다. 장사꾼이나 과거 지망생들이 목란에서 투전판이나 술 따르는 여인의 유혹에 걸려 인생을 망친 일이 많았다는 전설이 있다. 목란과 미륵불이 있었던 원덕주막 사이 동쪽 산허리에는 처용암(處容岩)이란 미인 바위가 보이는데 이 암봉을 바라보면 짙은 두 눈썹과 눈, 코, 입이 마치 아리따운 여인과 같다. 한 쪽 눈을 다친 사람의 얼굴 형상을 한 갈애바위는 이곳 주막에서 태어난 ‘갈아’란 여인은 뭇사내들의 신세를 망쳐 어떤 장군의 칼에 찔려죽었다고도 하고 기생 ‘갈애’가 과거를 보러 가는 유생과 주변의 관리들을 현혹해 나라에서 엄벌을 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후로 바위는 애꾸눈이 되고 인근 마을에서 애꾸눈 미인들이 태어났다는 전설이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은 상처 입은 갈애의 얼굴처럼 변한 갈애바위에 위령제를 지내주었다고 한다. 이 전설과 관련, 정비석씨의 ‘기생열전’에서는 조선시대 성종때의 기생 ‘노화’가 나온다. 미색이 뛰어나 그의 치마폭에서 장성 현감 셋이 파직된다. 파견된 사헌부 관원마저 노화의 유혹에 걸려 팔뚝에 정표를 해준다. 다음날 관헌에게 붙들려 온 노화는 그의 팔뚝을 보여주며 노래한다. “노화의 이 팔뚝에 뉘 이름 새겼는고, 고운 살에 먹이 베어 글자도 선명코나.” 결국 이 기생은 관원의 첩으로 들어 앉혔다고 한다.
♤ 장성군 북이면 원덕리(院德里)
전남 장성군 북이면 원덕리(산39-1)에서 정읍시로 이어지는 고갯길인 ‘삼남대로 갈재’가 문화재청 2021. 12. 8.고시에 따라 국가지정 문화재 명승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갈재는 충청·전라·경상도를 뜻하는 삼남지방과 서울을 잇는 ‘삼남대로’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고갯길로 돌길과 흙길의 원형이 아직까지 남아 있으며 참나무, 단풍나무 등이 우거진 아름다운 풍경을 지녔다. 갈재(葛岾)는 문헌기록에 노령(蘆嶺), 위령(葦嶺), 적령(荻嶺) 등으로 표기되어 있고 갈대가 많은 고갯길이란 뜻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갈재 주변에는 갈대가 자라지 않는다. 한양과 통하는 길인 만큼, 역사에 남은 중요한 사건들도 많았다. 고려시대에는 현종이 거란의 침입을 피해 나주로 몽진(蒙塵, 임금이 난리를 피해 도망감)할 때 갈재를 이용했다. 조선시대 유학자인 우암 송시열이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건넜던 고개가 갈재였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동학농민운동 당시에는 녹두장군 전봉준이 황룡촌 전투에서 관군에 승리한 다음, 전주로 향하며 갈재를 넘었다고 한다. 이목을 끄는 기록도 다수다. 갈재에는 숙박시설이 없어 나그네들이 하룻밤을 묵기 위해 역원(驛院, 조선시대 여관)을 찾았는데, 장성 쪽에는 지금의 장성호 일원에 청암역(靑巖驛)이 있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청암역은 12개 동의 건물에 500여 명이 근무했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삼남대로 갈재의 왕래가 실제로 빈번했음을 알 수 있다.
♤ 정읍시 입암면(笠岩面)
정읍시 입암면은 원래 정읍군의 남이면, 서일면과 흥덕군(興德郡)의 이동면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1914년 3월 3개면을 병합하여 입암면으로 되었으니 명칭의 유래는 입암산으로 말미암아 불리워진 것이다. 입암면은 갈재 밑에 위치하여 예로부터 교통의 요지였으며 고대 교통수단의 기관이었던 왕신원(往信院:旺壽里)과 삼례도(參禮道)의 천원역(川原驛; 현 川原里)이 있었으며 조선 중종(中宗) 때는 갈재에 산적이 많아 한때 교통이 불편해지자, 노령군보(蘆嶺軍堡)를 두었으니 현 입암면 등천리의 군령교(軍令橋)는 당시의 군보(軍堡)의 영(營)이 있었던 곳이다. 또 입암산성은 호남의 요새로 국난이 있을때마다 국방의 거점이 되었으니 임진란에도 많은 의병들이 순절한 곳인데 최근세에 와서 호남선 철도가 노령으로 개통되고 또 국도와 호남고속도로가 모두 이곳을 통과하니 역시 교통의 요충지이다. 따라서 천원리는 교통의 요충인 동시에 군사의 요지인 것이다. 몇가지 기록에서 간추려 볼 때 1592년(宣祖 25年) 임진난에 호남의병들이 장성에서 출발하여 11월 천원(川原)에 이르러 군사훈련을 하였으며 1894년 봄 동학농민군들이 장성에서 전주로 올라가다 천원에서 밤을 지냈으며 그해 12월 일본군과 이규태의 관군이 천원에서 며칠을 머물며 작전을 한곳이다.
분기점으로 올라가며 살펴볼 거리가 많네요. 입암산 갓바위와 시루봉, 내장산의 툭 튀어나온 망해봉, 무등산, 두승산 등등등 지리산은 가려져서 보이지 않습니다.
♤ 515.5m봉/ 도계/ 삼리봉(장성군 북이면 원덕리, 정읍시 입압면 등천리 → 연월리)
변산지맥이 분기되는 방장산 쓰리봉으로 오르면서 뒤돌아 보면 영산기맥의 입암산, 갓바위, 시루봉, 그리고 장성갈재로 내려오는 영산기맥 능선이 바라보이고, 오른쪽으론 입암저수지 옆으로 호남고속도로가 흐르며 멀리 모악지맥의 모악산도 한눈에 찾아볼 수 있다. 장성갈재 주변을 넓게 살피기에 적합한 일대가 두루 내려다 보이는 봉우리라서 보루라도 있었던 것일까 예전의 성터처럼 보이는 돌담이 있는 넓은 공터이다. 산죽길을 따라 안부로 내려선다.
쓰리봉에 변산지맥 출발을 신고하고 다시 분기점으로 돌아갑니다. 분기점 산패가 철쭉나무에 매어 있습니다.
♤ 변산지맥분기봉(728.9m)/ 시군계/ 삼면봉(정읍시 입암면 연월리, 장성군 북이면 백암리 → 고창군 신림면 가평리)
변산지맥 분기점에 산꾼들의 옛 산행기에 단골로 등장하는 고흥류공 묘지는 흔적도 보이질 않고 묘터에는 억새풀만 무성하다. 변산지맥의 분기점에서 지맥은 장성군과 헤어지고 전북 정읍시와 고창군의 경계를 따라 북으로 내려선다. 변산지맥을 출발하는 인증을 위해 잠깐 쓰리봉을 다녀온다.
♤ 방장산(方丈山, 743m)/ 전북 고창군 - 전남 장성군
전북 고창군 신림면과 전남 장성군 북이면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전형적인 육산의 산세를 지녔음에도 악산 못지 않은 기개와 뛰어난 조망을 자랑한다. 방장산은 지리산, 무등산과 함께 호남의 삼신산으로 추앙 받아온 산이다. 당당한 기세로 전남북을 가르고 있는 모습을 보면 호남지역의 명산으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방장산은 산세가 크고 험한데다가 전남북을 이어주는 요충지라서 백제가 신라에 멸망한 뒤 백제 유민으로 구성된 의적들의 본거지가 되었다. 이들은 도적성으로 불리는 성을 쌓고 지나는 사람들을 약탈하곤 했는데, 이런 활동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방장산은 중국 삼신산의 하나에서 빌려온 이름으로 ‘산이 넓고 커서 백성을 감싸준다’ 라는 뜻이다. 한국은 중국의 삼신산을 본떠 금강산을 봉래산, 지리산을 방장산, 한라산을 영주산으로 불렀다. 호남지역에서는 방장산, 무등산, 지리산을 삼신산으로 불렀고 전북에서는 일봉래로 변산을, 이방장으로 방장산, 삼영주로 두숭산을 삼신산으로 하였다. 예전에는 이 산을 방등산 또는 반등산으로 불렀다. 반등산은 산이 높고 장엄해서 절반밖에 오르지 못한다는 의미이며 조선 인조 때에 명나라를 숭상하던 조선사대부들이 중국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을 닮았다는 이유로 방장산으로 고쳤다고 한다. 방장산 남쪽 백암리의 수도골에는 절이 많았다 하며, 예부터 한말에는 천주교인들의 은신처가 되기도 했다. 동으로 헬기장봉과의 사이에 유독 흰바위로 이루어진 절벽이 있었는데 이 바위에서 백암마을 이름을 짓고, 삼한시대의 성으로 전해오는 벽오산성(碧梧山城)이 벽오봉을 남긴 것으로 짐작된다.
저는 써레 형상으로 생긴 비스므리한 세 봉우리가 영어 쓰리봉으로 변화되었다에 한표를 주고 싶습니다.
♤ 쓰리봉(733.6m)/ 도군면리계(장성군 북이면 백암리 - 고창군 신림면 가평리)
전남 장성군 북이면과 전북 고창군 신림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봉우리가 연달아 3개가 있다고 해서 쓰리봉이라고 하는데 봉우리 정상은 암릉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지만 여러가지 일설이 있고 공식적인 지도상에는 이곳을 방장산이라 표기한 곳도 많이 보인다. 일설에는 이곳에서 쭉 이어지는 봉우리중 3번째 높은 봉우리여서 쓰리(Three)봉이라 부른다고 했는데, 봉수대의 높이가 방장산 정상보다 높았는데 6.25때 폭격으로 높이가 낮아져 715m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도적떼가 많아서 일본말 쓰리, 서쪽에서 왔다는 서래(西來)가 변해서, 농기구 써래가 변해서, 장성, 정읍, 고창 3개의 고장에 속하는 봉우리라고 해서 등등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정확한 유래는 실전되어 알 수가 없다.
♤ 고창군 신림면(新林面)
신림면은 고창군의 동부에 있으며 행정구역 개편 전의 이름인 신평리와 임리에서 ‘신(新)’자와 ‘임(林)’자를 따 신림면(新林面)이 되었다. 본래 흥덕군 지역으로, 1914년 4월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무장군과 흥덕군이 고창군에 통합될 때, 일남면·이남면의 대부분과 일서면의 일부 지역이 합쳐 신림면이 되어 12개 법정리로 개편되었다. 1935년 3월 1일 도령 제1호에 따라 벽사면 부송리·벽송리·법지리 3개 리가 편입되어 15개 리가 되었고, 1973년에는 제하리와 1987년에는 송암리가 흥덕면에 각각 이관되어 13개 리가 되었다. 법정리로는 가평리·덕화리·도림리·무림리·반룡리·법지리·벽송리·부송리·세곡리·송룡리·신평리·외화리·자포리가 있다. 신림면은 대부분 50m 내외의 구릉성 평지이고, 남동쪽은 100~700m 내외의 영산기맥의 줄기인 방장산(方丈山, 733.6m)과 연결된 산지이며, 북동쪽과 남서쪽에 100~300m 내외의 산지가 일부 있다. 하천은 중앙에는 덕화천, 동쪽에는 용복천, 서쪽에는 자포천, 남쪽에는 세곡천, 북쪽에는 고부천, 북서쪽에는 갈곡천과 시실천 등이 흐르고 있다. 관개 시설로 중앙에는 내동제와 송용제, 동쪽에는 가평제·유점제·월계제, 서쪽에는 동원제와 장수제, 남쪽에는 남세제·동호제·반룡제·신림저수지·신평제·월평제 등이 있다. 남동쪽 신림면 신평리와 신림면 반룡리 경계에는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으로 넘어가는 고창고개가 있다. 신림면은 동부는 호남정맥과 연결된 산간지대이며 서부는 평야지대로 전·답 위주의 전형적인 농촌지역이다. 신림면의 관광 자원으로는 조선시대 효자 '오준'에게 하늘이 감동하여 만들어 준 효를 상징하는 샘물인 '효감천(孝感泉)'이 있다. 400여㏊의 대규모 저수지로 청정해역에서만 자라는 빙어가 풍부하여 1년 365일 낚시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신림저수지, 신선들이 목욕을 하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을 품고 있는 용추폭포가 있다.
♤ 488.1m봉
산죽이 빼곡하고 너덜겅을 지나는 급내림길이다. 소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다. 바위가 있는 곳을 지나 우틀로 내려선다. 소갈재 내림길이 급경사에 잡목이 많고 낙엽때문에 많이 미끄럽다.
철탑을 지나 소갈재에 도착하는데 왼쪽으로 고창군 신림면에서 조성한 마실길 임도와 닿고, 소갈재 이후 등산로는 괜찮아집니다.
♤ 소갈재(小葛峙, 222m)/ 소위령(小葦嶺)
준희선생님 "여기가 소갈재입니다" 한쪽이 떨어져 나간 훼손된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정읍시 입암면 연월리와 고창군 신림면 가평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노거수 느티나무 한그루가 고개를 지키고 있고 양방향 길이 아직도 이용하는 것처럼 상당히 뚜렷하다. 장성갈재=노령은 장성과 정읍을 잇고, 여기 소갈재는 고창과 정읍을 잇는다. 소갈재는 고창과 정읍의 경계로 소가 짐을 지고 가다가 목이 말라 위경련을 일으킨다고 하여 소갈재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설도 전해져 내려온다. 소갈재는 소노령(小蘆嶺), 소갈치(小葛峙) 등으로 불리었으며 『만기요람』에 "소노령(小蘆嶺)은 흥덕(興德, 지금의 고창군)과의 경계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대동지지』(정읍)에도 "소노령(小蘆嶺)은 서남쪽 30리에 있다. 흥덕과의 경계이다."라고 수록되어 있고 『호남지도』에 반등산과 율치 사이에 소노령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해동지도』, 『광여도』 등에도 고창과의 경계부에 소노령으로 기재되어 있다. 고개 지명과 관련해 노령의 옆에 위치해 소노령이라고 한다는 설이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보면 신림면 신평리와 정읍시 입암면 연월리를 잇는 고개는 갈대가 많은 작은 고개라는 의미의 소위령(小葦嶺)으로 나와 있다. 소갈재는 우리말로 ‘작은 갈재’인데 한자로 ‘소위령’으로 표기한 이름임을 알 수 있다.
♤ 289.1m봉/ 시군삼리봉(정읍시 입암면 연월리, 고창군 신림면 가평리 → 덕화리)
참나무 괴목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다. NO.63송전탑을 지나 조금을 올라선 봉우리로 지맥의 왼쪽이 가평리에서 덕화리로 바뀌는 지점이다. 직진으로 마루금을 유지하여 지맥길을 이어간다.
♤ 고창군 신림면 덕화리(德化里)
방장산을 뒤로 한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경지가 넓게 분포하여 논농사가 주로 이루어지는 곳으로 월계리, 덕곡리, 화동, 대장동 등을 병합하면서 덕곡과 화동의 이름을 덕화리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덕곡, 월계, 유점, 못안마을 등이 있으며 덕곡마을은 덕화리의 중앙에 자리한 마을이다. 월계마을은 덕곡 서쪽에 있는 마을로, 뒷산이 달 형국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유점마을은 유기점이 있었다 하여 칭해진 이름이며, 못안마을은 앞에 연못이 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라 한다.
♤ 두승지맥분기점(328m)/ 시군계/ 삼면봉(고창군 신림면, 정읍시 입암면 → 고창군 성내면)
준희선생님 분기점 산패와 독도대선배님 코팅지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정읍시 입암면 연월리와 고창군 신림면 덕화리, 고창군 성내면 용교리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삼면봉으로 변산지맥은 여기부터 정읍시와 작별을 고하고 좌틀하여 온전하게 고창군 내안으로 들어서서 신림면과 성내면의 경계를 따른다. 두승지맥은 오른쪽이고 변산지맥은 왼쪽으로 꺽어진다.
♤ 두승지맥(斗升枝脈)이란
영산기맥 장성갈재에서 올라선 써래봉에서 북으로 변산지맥이 분기하여 소갈재로 내려 앉았다가 다시 올라선 옥녀봉(349.6m)이 옥녀봉 직전의 전위봉격인 328m봉에서 북동으로 또 하나의 산줄기를 갈라내는데, 이 산줄기는 계속 북진하면서 두승산을 지나 부안의 백산을 끝으로 고부천이 동진강을 만나는 부안 동진강교 아래에서 산줄기를 마감하는 도상거리 약 34km의 산줄기이다. 서쪽으로 변산지맥과 함께 고부천의 물막이가 되고, 동쪽으로는 동진강을 흘려 보낸다. 두승산(斗升山, 445.1m)은 산경표(94頁)와 대동여지도에도 표기가 있고, 백산(白山, 48.3m) 역시 대동여지도에 표기된 족보있는 산이다.
♤ 두승지맥 개념도
♤ 고창군 성내면(星內面)
성내면은 고창군의 북동부에 위치하며 행정구역 개편 전의 이름인 칠성동과 내토리에서 ‘성(星)’자와 ‘내(內)’자를 따 성내면이 되었다. 본래 흥덕군 지역으로, 1914년 4월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무장군과 흥덕군이 고창군에 통합될 때, 일동면·이동면 지역의 대부분과 이서면의 일부, 고부군 일부 지역을 합쳐 성내면이 되어 13개 법정리로 개편되었다. 1987년에는 조동리 일부가 정읍시 소성면에 편입되었다. 법정리로는 대흥리·덕산리·동산리·부덕리·산림리·신대리·신성리·양계리·옥제리·용교리·월산리·월성리·조동리가 있다. 성내면은 대체적으로 50m 내외의 구릉성 평지이며, 동남쪽에 100~300m 내외의 산지가 일부 있고, 서쪽은 동림저수지가 있다. 하천은 중앙에 용교천, 서쪽에는 강정천, 북서쪽에는 고부천, 북동쪽에는 소성천 등이 흐르고 있다. 저수지로 동쪽에는 두암제·신시제·월성제, 서쪽에는 동림저수지·국지제·옥사제, 남쪽에는 성내저수지와 해평제, 북쪽에는 생근제와 위동제 등이 있다. 고창을 오고 가는 관문으로써 호남, 서해안 고속도로를 이용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자연의 오묘함과 함께 장관을 이루고 있는 전국 최고의 철새도래지 동림저수지는 자연을 사랑하고 깨끗한 환경을 추구하는 성내면의 노력이자 자랑이다.
고속도로 같은 등로를 따르며 왼쪽으로 영산기맥의 방장산이 높다랗습니다.
♤ 옥녀봉(玉女峰, 349.6m)/ 거담봉/ 3등삼각점(담양 301/ 1988재설)/ 면계(신림면 - 성내면)
반바지님 옥녀봉 코팅지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고창군 신림면 덕화리와 성내면 용교리의 경계에 있다. 정상에는 쉼터용 벤취 2개가 있고 글씨가 많이 마모된 삼각점, 거담봉이란 표지목이 있는데 국립지리원 지도에는 옥녀봉이라고 표기가 되어있다. 옥녀봉을 내려서며 철탑을 지나고...
♤ 수리봉(305m)
옥녀봉에서 7분만에 봉우리를 올라서는데 수리봉이란 표지목이 있다. 지도상에 아무런 표시가 없는 무명봉이다. 수리봉을 내려서서 한동안 임도를 따른다. 전주이씨 선산의 묘지를 지나는데 임도사거리에 생뚱맞게 산불감시초소가 서있다. 그리고 그 앞에 고인돌이 있다.
♤ 155m봉/ 면계/ 삼리봉(신림면 덕화리, 성내면 용교리 → 신림면 도림리)
조경수들이 심어져 있다. 지맥은 성내면 경계와 헤어져 오리지널 신림면으로 들어선다. 지맥의 오른쪽으로 흘러내리는 물이 고부천의 발원지를 형성하는 구간입니다.
♤ 왕림(85m, 旺林)고개/ 고창군 신림면 도림리
고창군 신림면 도림리 왕림마을에서 덕화리 월계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로 고개 좌측 아래에 있는 왕림마을은 마을의 지형이 호형(虎形)국인데 나무가 없음으로 마을 남서쪽으로 약 200m 지점에 자리를 잡고 범에게 숲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면서 마을 이름을 왕림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마을에 숲이 무성하면 마을이 흥하고 숲이 없으면 폐한다고 하여 많은 나무를 심어서 숲이 우거져 있는데 이 때문에 마을 이름을 왕림이라 명명하였다. 고개를 가로질러 넓은 농로를 따라 걷는다.
양회임도 왼쪽 아래로 덕화공설묘지 표지석이 도로 옆에 서있네요.
♤ 도산재(75m)/ 23번군도
반바지님 코팅지가 쇠기둥에 매어져 있다. 고창군 신림면 도림리에서 가평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2차선 23번 군도가 지난다. 고개 오른쪽에는 커다란 목장이 있고 왼쪽에는 덕화공설묘지가 있는데 지명은 고개 아래에 있는 신림면 도림리 도산마을에서 따온듯 하다. 목장이 마루금을 점거하고 있어 목장을 오른쪽으로 우회한다.
걷기좋은 돌탑길을 걸으며 지맥의 왼쪽이 덕화리에서 다시 가평리를 만나 수산정(秀山亭)에 도착합니다.
♤ 수산(秀山, 235.5m)/ 육각정자, 돌탑/ 무인산불감시탑/ 삼리봉(신림면 도림리, 가평리 → 신평리)
평지에 우뚝 솟은 산이다. 느티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다. 고창군 신림면 가평리와 신평리, 도림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고창군 신림면의 진산이다. 정상에는 수산정(秀山亭)을 비롯하여 벤치, 그네, 운동기구들이 보이는데 정작 지명 유래에 대한 기록은 빠져있다.
♤ 135.5m봉
송촌마을로 내려가는 등로에 있는 봉우리이다. 수산을 내려서며 지맥의 오른쪽이 도림리에서 송용리로 바뀌면 신평리와 송용리의 경계를 따라 내린다.
왼쪽으로 신림저수지가 보이고 송촌교차로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계단으로 내려섭니다.
♤ 송촌고개(松村峴, 60m)/ 708번도로/ 신림저수지/ 삼리경계면(신림면 송용리, 신평리 → 자포리)
고창군 신림면 송용리 송촌마을 윗쪽에 있는 고개로 고창에서 정읍으로 이어지는 708번 지방도가 지나는 곳으로 고개 정상 양쪽에는 버스 정류장이 있다. 여기서 약 21km를 도로를 따르는 경우도 있다. 도로를 건너 버스정류장이 있고 송촌마을 표시석을 끼고 오른쪽으로 꺽어진다. 등로 좌측으로 신림저수지가 보인다. 신림저수지는 전북 고창군 신림면 자포리와 송용리, 반룡리, 세곡리에 걸쳐 있는 저수지로서, 고창에서 동북 방향으로 입암행 지방도 708호선을 이용하여 4㎞ 정도 가면 찾을 수 있다. 방장산에서 발원한 맑은 물이 흘러들어 수원이 좋고 수심이 깊으며 안정된 좋은 낚시터가 형성되어 있으며, 주로 대형 붕어와 잉어가 잡히며 여름철 캠프낚시에 고르게 나오고 갈수기에는 제방권이 포인트이며 봄철 산란기에는 상류 수초대에서 월척이 많이 나온다고 하며 고창의 33개 저수지 중 신림저수지가 가장 규모가 크다. 송촌마을 도로에서 김해김씨 산정가족묘원 방향으로 올라간다. 송촌 교차로에서 대항리임도까지는 가시덤불, 잡목지대, 대나무숲 등 어지러운 등로를 지난다.
비산비야의 송촌을 지나며 마을이나 밭으로 해발고도 50m 이하의 도로를 따르는데 큰 도로도 가끔씩 있지만 대부분 농로나 임도길입니다.
♤ 고창군 신림면 송용리(松龍里) 송촌마을
송촌마을은 행정구역 개편 전의 이름인 송촌과 용암리에서 송(松)자와 룡(龍)자를 따 송룡이 되었다고 하며 다른 의견은 농암리(籠岩里)의 농(籠)을 용(龍)으로 잘못 따 송용리가 되었다는 의견이 있는데, 현재 행정리로 농암마을이 있고, 마을 이름의 유래가 기록으로 전해오는 것으로 보아 후자가 더 타당해 보인다. 자연마을로는 구정, 내동, 농암, 신송, 송촌 마을이 있으며 농암 마을은 마을 앞 장등에 용바위가 있었는데 그 용바위를 보고 농암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구정마을은 수랑샘이 있는 마을로서 샘이 아홉이 생겨야 마을이 흥하리라는 전설이 있다 하여 구정이라 명명하였다. 신송마을은 송촌 서쪽에 새로 된 마을이란 뜻으로 신송이라 명명하였다. 1750년경 고성김씨가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본래 흥덕군 이남면의 지역으로,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내동·송촌·신송리·농암리 일부와 일서면 수침리의 일부가 병합되어 송용리가 되었고, 신림면에 편입되었다.
등로 오른쪽으로 들판 가운데로 흐르는 고부천이 바라다 보입니다.
♤ 고부천(古阜川)
고부천은 전북 고창군 신림면 도림리에서 발원하여 동림저수지를 지나 동진강과 합류하여 서해로 흘러드는 하천으로 하천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부천이 정읍시 고부면을 관통하여 흐르고 있어, 고부면 지명이 반영된 듯 하다. 고부천(古阜川)에 눌제가 있어서 눌제천(訥堤川) 이라고도 하는데 상류는 옛 이름이 오천(烏川) 즉 가무내인데 현재의 이름은 흥덕천이라고 해야 옳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동진강 제2지류인 고부천은 신림면 도림리 무명산에서 발원하여 남서쪽으로 약 3㎞를 흘러 내려가서 신림면 송용리를 지나 북쪽으로 급회하여 흐르며, 약 6㎞ 흘러 내려가서 좌안으로 가서 동림저수지로 유입한다. 성내면 덕산리를 지나 정읍시를 좌측으로 흐르며 동진강과 합류한 뒤 부안군 동진면에서 동진강 하구에서 합류된다. 그 뒤 새만금 지역의 서해로 흘러든다. 고부천은 고창군 내에서 신림면·흥덕면·성내면을 지난다. 동진강 유역은 전북의 벼농사 문화의 발상지이자 중심지이다. 이는 김제(金堤)의 옛 이름인 벽골(碧骨)이 화향(禾鄕)의 이두음(吏讀音)이었고, 김제도 벼를 황금과 같이 귀하게 여겼던 농본사상에서 연유된 이름이라고 하는데, 삼국 시대에 축조된 김제시 부량면의 벽골제(碧骨堤)와 정읍시 고부면의 눌제(訥堤) 등은 벼농사에 필요한 물을 저수하기 위한 수리시설이다. 예로부터 벽골제와 눌제는 익산의 황등제와 함께 삼호(三湖)로 불렸다. 동진강 유역은 동학농민혁명의 봉기 발단이 된 주 무대이기도 하는데, 고부군수 조병갑이 만석보를 쌓고 수세를 너무 많이 거두어 들인데서 발단이 된 동학농민혁명이었다. 정읍시 신태인읍에서 정읍시 고부면 방향으로 가다가 동진교를 건너 하류쪽으로 바라보면 만석보를 쌓았던 흔적을 대할 수 있다.
지맥이 낮고 임도가 곁에 있어 임도를 따릅니다.
♤ 42.6m봉/ 삼각점봉/ 리계(신림면 송용리 - 무림리)
소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다. 지도상에는 엄연히 족보있는 봉우리인데 김해김공 묘지가 쥔장 행세를 한다. 식별이 불가한 삼각점은 묘지의 끝지점 가장자리에 있다.
♤ 신광사입구/ 편의점
태고종 종단 소속의 사찰이다. 신광사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도로를 따른다.
♤ 고창군 신림면 무림리 임리(林里)마을/ 23번 구도로
도로에 내려서니 만화리와 임리의 표시석이 있는 23번 구도로 내려선다. 고창군 신림면 무림리에 있는 임리(林里)의 이름에서 ‘숲말’이라고 하여 무림리(茂林里)가 되었고, 임리마을은 숲이 우거졌다 하여 임리라 명명하였으며, 만화(萬花)마을은 뒷산에 매화낙지혈이 있다하여 명명된 마을이다. 무림리는 신림면의 중심지로서 신림초교, 신림중학교가 있고, 기관으로는 신림면사무소, 신림면보건지소, 신림우체국, 흥덕농협 신림지점, 고창경찰서 흥덕지구대 신림치안센터 등이 있다. 문화 유적으로는 임리마을에 고흥유씨 삼효자정려(高興柳氏三孝子旌閭)가 있다. 또 수령이 약 200년 되고 높이가 10~15m의 소나무 네 그루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고, 마을 인근에는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만화마을에는 1949년에 건립된 만화서원(萬化書院)이 있다. 무림리 서쪽에는 국도23호선이 남북 방향으로, 남쪽에는 지방도 14호선이 동서 방향으로 각각 지나고 있다.
♤ 신림육교/ 신림초교/ 23번국도/ 편의점/ 삼리경계면(신림면 무림리, 송용리 → 법지리)
신림삼거리이다. 육교 옆에는 신림초교가 있고 육교 아래로는 강진에서 시작하여 함평, 영광, 고창에서 부안, 김제를 거쳐 천안까지 이어지는 23번국도가 지나는데 교통량이 많다. 육교에서 내려서면 신림초교 담벼락이 길을 막는다. 학교 안쪽이 맥길이나 인도로 우회하여 북쪽으로 알뜰 주유소와 한국타이어 간판이 있는 곳에서 좌틀로 꺽어진다.
등로 오른쪽으로 23번국도가 나란히 지나는 비포장 도로를 따르다 신림육교에서 헤어진 23번 국도를 다시 만나는데 23번국도가 지맥길입니다. 23번국도에 들어서자마자 관동마을 버스정류장이 나옵니다.
♤ 버스정류장 옆에 있는 고창군 신림면 관동마을 표시석
고창군 신림면 관동마을이 있는 법지리(法止里)는 원래 ‘법줄(法茁)’이라고 불렸으나, 무성한 숲으로 호랑이 피해가 심해 마을을 떠나는 이가 많았다고 한다. 이곳을 지나던 도사가 법(法) 자(字)는 불가(佛家)에서 호랑이를 뜻하고, 줄(茁) 자(字)는 숲이 무성하다는 뜻으로, 줄자를 지(止) 자(字)로 고치면 피해를 면할 수 있다고 하여, 법지(法止)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법동’·‘법지’·‘법지동’이라도 불렸다고 하는데, 자연마을로는 강변, 관동, 법동, 새터, 서법, 점촌, 통정 마을이 있다.
♤ 화시봉(403.6m)/ 화시산(火矢山)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화시산은 현의 서쪽 15리에 있다"라는 기록이 있고 '화시'라는 지명과 관련해 「여지도서」에 "화시산은 현 서쪽 10리에 있는데 반등산(방장산)으로부터 시작해 북쪽으로 소요산에 이르며 전해지는 이야기로 산꼭대기에 큰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홀연히 저절로 쪼개져 불화살처럼 날아갔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대동여지도』에 고창현과 흥덕현 경계에 있는 사슬치(沙瑟峙)에서 북서쪽으로 산줄기가 이어지다 화시산을 이루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 밖에도「해동지도」「광여도」등의 지도에 두 현의 경계부에 '화시산'이 기재되어 있다.
지맥이 신림면에서 흥덕면으로 진입하여 수침마을 버스정류장을 지납니다.
♤ 고창군 흥덕면 사천리 수침(水砧)마을, 외사(外沙)마을/ 신림면 법지리, 무림리 → 흥덕면 송암리)
고창군 흥덕면 사천리에 있는 수침마을은 본래 용수동으로 불리다가 갈곡천이 범람하여 마을이 모두 물에 잠긴 일이 있은 후에 새롭게 붙여진 이름이고, 외사마을은 사천 바깥쪽을 이루는 마을로 1800년 초 가뭄이 극심할 때 이 지역은 농사에 아무런 지장도 받지 않았는데, 현감이 그 사실을 알고 마을 명칭을 외사천으로 부르게 하던 것이 고쳐진 것이다.
사천삼거리까지 23번 국도를 계속 따르기도 합니다.
♤ 내사(內沙)마을/ 대명산업/ 면리계(흥덕면 송암리, 신림면 법지리 → 흥덕면 사천리)
고창군 흥덕면 사천리에 있는 내사마을에서 다시 23번국도를 버리고 왼쪽 태양광단지 옆 황토밭으로 올라선다. 지맥은 신림면과 이별하고 좌우 모두 흥덕면으로 진입한다.
♤ 63.1m봉
시누대가 빽빽한 밀림을 이루고 있다.
♤ 고창군 흥덕면 사천리(沙川里)
등로 오른쪽으로 사천삼거리가 보인다. 고창군 흥덕면에 있는 사천리는 동쪽은 낮은 언덕지형이고 서쪽은 갈곡천이 흐르는 하천 유역의 평야지역이며 적교, 수침, 외사, 내사, 야동 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갈비탕집, 흥덕기사식당 등등 길가에 음식점들이 많이 보입니다.
♤ 선운산I.C입구/ 야동교
흥덕면소재지로 가기전에 오른쪽 소나무 조경단지로 올라서고 밭을 가로질러 꿈나무 어린이집쪽으로 향한다. 야동마을 버스정류장을 지나며 흥덕장례식장에서 지맥의 오른쪽이 흥덕면 흥덕리와 만나고 흥덕장례식장을 지나 사천삼거리, 흥덕복지센터를 지나 배풍산으로 향한다. 왼쪽에 고창북고교가 있는 삼거리에서 오른쪽 도로를 따라 진행한다. 흥덕제일교회에서 좌틀하고, 흥덕파출소도 지나고 흥덕중학교 정문으로 들어가면 오른쪽 끝에 배풍산 오르는 등산로가 보인다.
장성갈재에서 숙박시설이 있는 흥덕까지 오는데 약 18km, 약 7시간이 소요되었네요.
♤ 고창군 흥덕면(興德面)
고창군 북동부에 있는 면소재로 백제 때 상칠현이었는데 신라의 통일 이후 고부군 상질현으로 이름을 고쳤다. 고려 때는 창덕현으로 이름을 고쳤다가 1298년(충렬왕 24년)에 흥덕현으로 고쳤다. 조선 말기 현내면이 되어 13개 동리를 관할하였다. 1895년 흥덕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북면의 주항·회목·사포·대촌·후포·용두·석우·신송·연장·용소·목우·신덕·연지·노동·미동·구송·석신·동림·동신·관동·회화정·하남당·외남당·내남당·대양·제내·용반·중남당·오정의 29개 동리, 일동면의 산양·관동 각 일부, 부안군 건선면의 신흥·신정 일부, 고부군 서부면의 중리 일부를 병합하여 흥덕면이라 하고 고창군에 통폐합되었다. 1935년 3월 1일 도령 제1호에 따라 벽사면의 사천, 석교의 2개리를 병합하였고,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2호에 따라 신림면 제하리, 1987년 송암리를 병합하였다. 인근의 성내면·신림면·부안면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으며, 서해안고속도로가 지나고, 국도 22호선이 동서로, 국도 23호선이 남북으로 관통하는 교통의 중심지이다. 문화유적으로는 전북 유형문화재 제77호인 흥성동헌(興城東軒), 전북 유형문화재 제36호인 흥덕당간지주, 흥덕향교(興德鄕校), 흥덕읍성(지금의 배풍산공원) 등이 있고, 국보급 판소리 명창 김소희(金素姬) 생가가 있다. 임진왜란 때에는 흥덕면 출신의 채홍국(蔡弘國) 등 90여 명이 호벌치대첩의 성과를 올렸던 남당 회맹단이 아직도 보존되어 있다.
배풍산에서 내장산 망해봉과 두승산, 그리고 가야할 내변산의 산줄기를 바라봅니다. 배풍산 정상이 개끗하게 공원으로 조성되는 바람에 옛 모습은 모두 사라졌는데 중학교에서 보면 오른쪽보다는 왼쪽으로 올라다녔다고 하는군요.
♤ 배풍산(培風山, 110.1m)/ 배풍정/ 3등삼각점(무안 310/ 1984 재설)/ 삼리봉(교운리, 흥덕리 → 치룡리)
전봇대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고 삼각점은 바로 옆에 묘지같은 조그만 둔덕에 있다. 체육시설이 있으나 운동기구들은 모두 녹이 슬어 방치되어 있다. 전망대쪽에서 내려선다. 배풍산은 고창군 흥덕면 치룡리와 교운리·흥덕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정상은 넓은 공터에 각종 체육시설과 배풍정이라는 2층 팔각정, 흥덕 배풍정 조성비와 3등삼각점이 있다. 배풍산은 산의 형상이 배가 복주(伏奏:엎드려 사룀)한 형이라 하여 배풍산이라 부르고 있다. 흥덕면은 지형이 배의 형국이라서 무거운 짐을 싣게 되면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신분에 관계없이 지붕에 기와를 얹지 않고 초가지붕을 하는 풍습이 있었고, 마을 가운데 우물을 파면 배 바닥에 구멍을 내는 것과 같다 하여 식수도 마을 주변을 흐르는 시냇물을 이용하였다. 배풍산은 흥덕면의 주산이고, 흥덕면 소재지에 위치해서 흥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배풍산의 산줄기는 호남정맥의 내장산 까치봉과 백암산 사이의 순창새재에서 서쪽으로 분기한 영산기맥이 입암산을 지나 방장산을 가기 전 북쪽으로 나눈 변산지맥이 뿌리다. 이 변산지맥은 곧바로 북쪽으로는 두승산으로 산줄기 하나를 나누어 놓고, 다시 배풍산을 지나 변산과 부안군 방향으로 이어지며 물줄기는 동쪽의 고부천을 통해 동진강에 합류하여 서해로 흘러들고, 서쪽은 갈곡천을 따라 서해로 흘러든다. 흥덕현이 있을 때 배풍산에 토성이 축성되었는데, 북쪽 중턱에는 토성의 흔적이 있고, 기와가 발견되기도 하였으며, 『호남읍지(湖南邑誌)』에는 토성 동쪽에 위치한 홍동은 동부라고 부르다가, 1945년부터 홍동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배풍산에 올라가는 초입에 흥성동헌이 있다. 배풍산에는 부안댐 광역 상수도 사업으로 고창군 일원에 수도물을 공급하는 흥덕배수장이 설치되어 있고, 정상에는 흥덕면민을 위한 근린 체육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정상에 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화장실, 급수시설이 있어요. 배풍령이란 지명이 있는걸로 보아 배풍산을 넘나든 고개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 배풍산 의병전적지
배풍산은 마을 행정단위에 파견된 수령이 정무를 보던 동헌이 있던 곳으로, 지금은 주변 마을 분들이 저녁에 마실을 가는 산이다. 흥덕면 일대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삽혈 동맹으로 뭉친 의병들이 의병소를 설치하고 활동을 시작한 남당회맹단과 훈련을 하였던 배풍산의 유적지가 있다. 갑오 농민군, 항일운동과 독립투사의 의기를 보여주었던 반외세 깃발을 올렸던 지역으로 많은 기록과 유물이 남아있다. 1597년 배풍산까지 쳐들어온 왜군을 맞아 줄포의 장등까지 적을 몰아낸 출발지이다. 159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유 재침을 일으키며 “전라도는 빠짐없이 공격하고 충청경비는 가급적 공략하라”라는 명령을 하달하며 전라지역 초토화 작전에 돌입하였다. 바다와 산맥으로 좌우가 차단된 전라도의 특성으로 고창·부안은 전주·정읍과 남도를 연결하는 길목으로 왜병들은 해로를 이용해 줄포에 상륙하여 부안으로 진격했다. 그러자 채홍국이 다시 뜻있는 의사 33명을 추가하여 모두 126명의 의병이 배풍령, 장등원을 거쳐 부안 호벌치에서 23일간 왜병을 맞아 싸웠으나, 수적인 열세에 밀려 많은 의병이 전사했다. 특히, 4월 중순 이후 약 1주간에 걸쳐 계속된 호벌치 전투에서는 의병장 채홍국 삼부자, 김영년 부자는 물론, 의병 대부분이 전사하는 일대 혈전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부안·흥덕 일대는 결국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의병이 적을 격퇴하지는 못했으나 무명의 향촌 선비들과 농민·천민·승려계층이 하나로 결합, 최후까지 침략군에 대항하여 싸운 의병항쟁이었다.
날이 어두워 대나무숲에 길이 보이지 않아 고생했습니다. 대나무숲 가운데 있는 묘지에서 사라진 길을 찾지 못해 헤매다가 인삼밭으로 우회를 했네요. 지맥의 왼쪽이 교운리 → 사포리로 바뀌고, 축사 임도를 따르는데 냄새가 엄청나네요. 신성레미콘 공장을 지나 다시 23번국도를 따라 후반전 약 8km 맥길을 이어갑니다.
♤ 담양국씨세소
배풍산에서 내려서며 대나무숲과 인삼밭을 지나 성은목장과 상하현대목장으로 진행한다. 담양 국씨의 시조 국주(鞠周)는 송나라의 공경대부(公卿大夫)였는데, 금나라가 송나라의 황제였던 흠종(欽宗)을 납치해간 정란이 발생하자 이 난을 피해 1128년(인종 6) 고려에 입국하여 귀화하였다. 국주는 고려에 입국하자마자 인종을 배알하고 군신의 예를 취하였는데, 인종이 크게 기뻐하면서 국주에게 감정관(監正官)을 제수하여 고려 조정에 출사시켰다. 그리고 당시 중원의 신흥 강국으로 부상하던 금나라에서 송나라를 제압하고 고려에게 군신의 관계로 대할 것과 많은 공물을 요구하였는데, 인종은 국주를 금국봉사(金國奉使)로 임명하여 금나라의 요구에 외교적으로 대처하게 하였다. 국주는 왕명을 받고 여러 번 금나라에 왕래하면서 군신관계의 부당성을 주장하여 외교적으로 평등관계를 맺고 귀국하였다. 이에 인종은 국주에게 삼중대광(三重大匡) 추성군(秋城君)에 봉하고 담양(潭陽)을 본관으로 정해주었다고 한다.
여기부터 보안면 남포리의 용사, 만회마을까지는 줄포를 지나 계속 도로를 따라 진행하는 구간입니다.
♤ 신기삼거리/ 삼리경계면(흥덕면 사포리, 치룡리 → 신송리)/ 휴게실, 매점
삼거리에 안내판이 즐비하다. 국악 명창 김소희선생 생가를 지난다. 신기삼거리를 지나 지맥의 오른쪽이 치룡리에서 신송리로 바뀐다. sk대농주유소 옆에 휴게실이란 매점이 있다.
♤ 국악 명창 김소희(晩汀 金素姬 본명: 김순옥)
김소희 선생은 전북 고창군 흥덕에서 태어난 만정 김소희(晩汀 金素姬 본명:김순옥)는 국악계의 사표(師表)이며 국창(國唱)으로 불리웠다. 1917년 13세에 광주로 가서 명창 송만갑의 제자로 국악에 입문하고15세에 서울로 올라가 조선성악연구회에서 정정열 등에게 소리.춤.기악을 두루 사사하였다. 김소희는 100년에 한번 나기 힘든 천부적인 목소리에 노력을 더하여 3~4년의 짧은 기간에 명창의 반열에 올랐고 정악, 한학,서예 등을 익혀 그의 예술에 품격을 더하여 왔으며 판소리 춘향가 김소희(制)를 창제하고 인간문화재(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 받았다. 국창 김소희는 도제교육으로 많은 제자를 길러 냈으며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를 설립 운영하여 국악 전문교육의 초석을 마련하고 해외공연을 통하여 우리 전통음악의 진면목을 세계에 떨친 선구자이다. 김소희는 국민훈장 동백장,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제1회 동리대상,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 등을 수상하였고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 이사장을 역임하던 중 1995년 4월(향년 79세)에 타계하였으며 묘소는 유언에 따라 고향에 모셔졌다. 정부에서는 금관문화훈장(제1호)을 추서하였고 '광복50주년-역사를 만든 한반도의 주역 50인"에 선정되었다.
노동마을 입구 버스정류장을 지납니다.
♤ 노동(蘆洞)마을/ 고창군 흥덕면 신송리(新松里)
고창군 흥덕면 신송리에 있는 노동마을은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려고 할 때, 때마침 기러기가 날아가면서 입에 물고 있던 갈대를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 갈대골로 부르던 것이 노동으로 고쳐진 것이다.
♤ 사거리/ 고창군 흥덕면 후포리(後浦里)/ 삼리경계면(흥덕면 신송리, 사포리 → 후포리)
23번도로에서 왼쪽 인삼밭으로 들어갔다가 동래정공 묘지에서 다시 23번 국도로 나온다. 왼쪽으로는 흥덕면 후포리 후동, 후서로 가는 길이다. 고창군 흥덕면에 있는 후포리는 서쪽으로 갈곡천이 곰소만으로 흘러나가고 낮은 언덕과 일부 평야로 이루어져 있으며, 자연마을로는 후서, 후동, 대촌 등이 있다. 후서, 후동은 1700년대 말 김해 김씨 형제가 갯물이 들어오는 길목 언덕에 터를 잡고 마을을 이루었다 하여 처음에는 뒷개로 부르다가, 후에 후서, 후동으로 고쳐진 것이다.
♤ 신송리 버스 정류장/ 고창군 흥덕면 신송리(新松里)
고창군 흥덕면에 있는 신송리는 남동쪽으로 동림저수지가 펼쳐져 있는 낮은 언덕지형이다. 자연마을로는 송내, 불당, 구송, 신송, 노동, 신기 등이 있으며, 신송은 소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곳에 마을을 이루었다고 해서 신송당으로 부르다가 신송으로 고쳐 부른 것이다.
지맥이 왼쪽이 후포리에서 신덕리로 바뀝니다.
♤ 상연마을 입구/ 고창군 흥덕면 신덕리(新德里)
고창군 흥덕면에 있는 신덕리는 자연마을로 목우, 신덕, 원덕, 하연, 상연 등이 있다. 1600년대 후기에 동래 정씨, 전주 최씨, 연안 차씨 등이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루었다. 당시 유명하였던 지리학자 이서구가 이 마을을 지나다가 정씨 거주지역을 신덕, 최씨 거주지역을 원덕, 차씨 거주지역을 재덕으로 부르면 좋겠다고 하여 그대로 부르던 것이 현재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 목우는 소를 방목하여 목축을 크게 한 곳이란 뜻에서 목우촌으로 불리다가 목우로 고쳐진 것이다.
지맥이 오른쪽이 신송리에서 용반리로 바뀝니다.
♤ 남당 버스정류장/ 고창군 흥덕면 용반리(龍盤里) 남당(南堂)마을
남당마을은 고창군 흥덕면 용반리에 있으며 남당마을 뒤에는 임진왜란 때 채홍국(蔡弘國)·고덕붕(高德鵬) 등 92인의 의사가 혈맹했다는 혈맹단(血盟壇: 일명 술무덤, 술무덩, 숫무덩, 맹무덤)이 있다. 용반리에는 자연마을로 남당, 대양, 용반 등이 있는데, 마을에 이무기가 용이 되려고 오랫동안 앉아있다가 승천했다는 바위가 전해 오는데 이 때문에 처음에는 용바위섬으로 부르다가 후에 용반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 신덕(新德) 삼거리/ 버스정류장/ 군계(고창군 흥덕면 - 부안군 줄포면)
고창군 흥덕면에 있는 신덕리는 마을에서 덕 있는 사람이 많이 나올 것이라 하여 신덕이라 하였다. 조선 말기 흥덕군 북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연장동·용소동·목우촌·용두리 일부를 병합하여 신덕리라 하고 흥덕면에 편입하였다. 원덕 서남쪽으로 삿갓 모양의 삿갓봉(일명 입봉, 笠峯)이 솟아 있고, 단진포(일명 전정포, 田正浦) 북쪽으로 임잇골(일명 임희, 林希), 목우(牧牛) 서쪽으로 예전 절이 있던 절골, 상연(上連) 동북쪽으로 예전 부자가 살 때 황새들이 자주 날아와 부자의 노적가리 위에 새끼를 깠다는 항샛골, 단진포 서쪽으로 어살을 매고 막을 치고 살았다는 살매기 등의 골짜기가 있다. 목우 서남쪽으로 산등성이인 수박등이 있고, 신덕에서 연장(連莊)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삿갓재가 있다. 연장 동쪽에 개방죽이라는 작은 못이 있고, 용소(龍沼) 서북쪽 골짜기 아래에 단진포라는 개(강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가 있으나 지금은 쓸모없는 땅이 되었다. 신덕삼거리를 지나면서 변산지맥 분기점인 쓰리봉에서 같이해 온 고창군과 완전한 작별을 고하고 부안군에 접어 들었는데 합수점인 격포항까지 같이 한다.
♤ 부안군 줄포면(茁浦面)
군의 남부에 위치한 면으로 면소재지는 줄포리이다. 본래 부안군 지역으로 건선면이라 하여 대동·대중·율지 등 38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입상면 일부와 고부군 서면 일부, 고창군 북일면 일부를 병합해 1931년 줄포면으로 개칭되었다. 해발고도 40m 미만의 구릉지가 대부분으로 동부 고부천 유역에 충적평야가 발달해 있고 줄포리에서 곰소만 쪽으로는 간척사업에 의해 확장된 땅이다. 농업이 주산업으로 수산업은 거의 폐업되었다. 옛날에 줄포는 부안군 남부의 농산물과 수산물이 거래되던 물산의 집산지였다. 전라남도의 법성포, 충청남도의 서천과 함께 남부 서해안의 3대 포구로서 조기잡이철에는 칠산어장과 위도근해어장에 많은 객주들이 모여 조기와 젓갈류의 집산과 매출이 활발했으나 곰소만의 매립으로 옛날의 영화는 찾을 수 없다. 도로는 부안·흥덕·고창·영광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지나 교통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장동리에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김홍원의 묘와 신도비, 줄포리에 김상만가옥이 있다. 줄포·장동·우포·신·난산·파산·대동 등 7개 리가 있다.
♤ 모충사(慕忠祠) 입구
남당회맹단(南堂會盟壇: 향토문화유산 제4호)은 고창군 흥덕면 용반리 남당마을에 있는 사적지로 회맹단은 임진왜란(1592)때 이 고장출신 의병장 채홍국과 맹주장 고덕붕 등 92인이 이곳 맹단에 모여 백의종군하기로 창의회맹하고 의곡 300석을 모아 의주행재소로 보내는 한편 동년 10월 25일에 출병하여 순천에 이르렀으나 송경락의 주화로 진격하지 못하고 회군하였다. 그 후 정유재란(1597)이 일어나자 다시 의병을 규합하여 그해 3월 23일에 흥덕 장산등에서 왜적을 격퇴하고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동년 4월 23일 부안 호벌치 전투에서 중과부족으로 92의사와 300여 의병이 장열하게 순국하였다. 이런 충절로 채흥국은 고종9년(1872)에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정려가 내려졌으며 1986년 에는 이곳에 모충사를 건립하고 채홍국, 고덕붕등 92의사와 300여 의병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과 더불어 구국혼을 추모하고 있는 사적지이다.
♤ 신정마을 입구/ 부안군 줄포면 신리(新里)
부안군 줄포면 신리에 있는 새로 생긴 마을이라 신정마을이라 부른다고 한다. 신덕삼거리에서 줄포면에 진입하며 지맥의 오른쪽은 줄포면 신리, 왼쪽은 줄포면 우포리에 접한다.
♤ 서해안고속도로/ 영천삼거리
서해안고속도로를 신리3교 굴다리로 통과하여 화전마을 방향으로 영천삼거리를 지난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지나자마자 계속 같이 걸어온 23번 국도를 버리고 오른쪽의 2차선 도로로 향하며 신리로 들어선다.
♤ 원동고개/ 원재
♤ 부안군 줄포면 장동리(壯洞里)
도로에서 줄포면 장동리의 모습이 바라보인다. 부안군 줄포면에 있는 장동리는 두포천이 마을을 따라 길게 흐르며 자연마을로는 각골, 네거리, 소금에피, 원장동 등이 있는데 각골은 지형이 잠복한 용의 뿔 같다 하여 이름 붙여졌다. 네거리는 각골 북서쪽 네 갈림길에 있는 마을이고 소금에피는 앞산이 소금을 굽는 가마처럼 생겼다하여 붙은 이름이다. 원장동은 장동리의 원마을을 말한다. 줄포면에서 가장 높은 지역은 장동리에 있는 도지산(42.4m)이다.
♤ 화전마을 입구/ 부안군 줄포면 난산리(卵山里) 화전마을
평강채씨 세장비를 지나자마자 오른쪽으로 꺽어져 서해안고속도로 굴다리를 지나고 굴다리를 지나자마자 화전마을 이정표쪽 왼쪽 도로로 향한다. 줄포면 신리, 난산리, 파산리, 장동리의 경계지점이다. 화전마을이 있는 부안군 줄포면 난산리는 고부천이 마을을 따라 길게 뻗어 흐르며 곳곳에 소류지가 있으며 자연마을로는 나머리, 남면, 목중, 목하, 원난산 등이 있다. 나머리는 원래 남월이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나머리가 되었다. 남면은 목중리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목중은 목화동상리와 목화동하리 가운데가 된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목하는 난산 동쪽에 있는 마을로 목화동의 아래쪽이 된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원난산은 난산리의 원마을이다.
♤ 2번 군도 사거리
도로에서 왼쪽으로 꺽어져 장동리 내로 들어서며 줄포방향으로 향한다.
♤ 장동교
세번째 서해안 고속도로 아래를 지난다. 서해안 고속도로 굴다리인 장동교를 지나면 전주이씨 세장비가 보인다.
♤ 710번 도로/ 표가네찐빵
서해안 고속도로 줄포I.C로 이어지는 710번 도로에서 줄포면 대동리와 만나 좌틀로 꺽어진다. 도로 건너 표가네찐빵 분식집이 있다.
♤ 오일뱅크 주유소/ 부안군 줄포면 줄포리(茁浦里)/ 연중마을 입구
부안군 줄포면 소재지로 이어지는 710번 지방도를 버리고 88주유소 뒷쪽으로 지맥길을 이어간다. 면소재지가 있는 줄포리는 서해와 맞닿은 만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으며 자연마을로는 동편, 새터, 서편, 용서동, 은행정, 장성동 등이 있다. 동편은 줄포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새터는 줄포리에 새로 된 마을이다. 서편은 줄포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용서동은 지형이 용형이라 하여 이름 붙여졌다. 은행정은 정자처럼 쓰던 큰 은행나무가 있었다 하여 이름 붙여졌다. 장성동은 장승이 있었다 하여 이름 붙여졌다. 이곳은 동아일보 사주였던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가 양아들로 나온 큰집이 있던 곳이다. 아들인 김상만의 고택(국가민속문화재 제150호)이 있다. 김성수가 아호를 딴 그의 원 고향 고창군 부안면 인촌리는 선운산 가는 길에 있다. 질마재 서정주시인의 바로 그곳이다.
영성재까지 계속 임도를 따릅니다. 버스정류장이 있고 삼거리에 불켜진 시골집 창문이 따뜻하게 보이네요.
♤ 영전삼거리/ 면계(줄포면 장동리 - 보안면 영전리)/ 부안군 보안면 영전리(英田里)
멀리 변산국립공원이 보이기 시작한다. 드넓은 태양광단지도 지나고 뽕나무밭도 지나고 707번 지방도로가 지나가는 영전삼거리로 내려선 다음에 우틀로 꺽어진다. 부안군 보안면 소재지인 영전리는 자연마을로 기와골, 방죽안, 신월리, 원영전, 찬시암골 등이 있다. 기와골은 신월리 서쪽 마을로 기와를 만들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방죽안은 신월리 동쪽 마을로 앞에 방죽이 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신월리는 영전 북쪽 마을로 반달같이 생겼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원영전은 영전리의 원마을이다. 찬시암골은 찬물이 솟는 샘이 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신덕삼거리에서 이곳까지 같이온 줄포면과 작별을 고하고 보안면으로 面界가 바뀐다.
보안면은 이름따라 장군출신들이 많군요. 기억에 남는 대표적인 인물로 전통시절 고명승장군이 생각납니다.
♤ 부안군 보안면(保安面)
부안군 보안면은 뿌리 깊은 역사를 지닌 곳이다. 우선 ‘보안(保安)’이라는 이름 자체가 1077년이나 됐다. 고려 태조 23년(940년)에 보안현이 생겼고, 보안현은 이후 조선 태종 16년(1416년)에 부령현과 합쳐지며 부안진이 됐다. 1895년 부안진이 군(郡)으로 승격하면서 보안현의 옛 이름을 그대로 살린 오늘날의 보안면을 뒀다. 보안면은 조선 중기의 실학자 반계 유형원이 ‘반계수록’을 완성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서울 사람인 반계가 이곳에 들어온 곳은 9대조인 유관의 사패지(왕이 큰 공을 세운 신하에게 내린 땅)가 부안현 우반동(오늘날에는 우동리라고 불림)에 있었기 때문이다. 반계는 32세 때 이곳에 들어온 뒤 우반동 산자락에 ‘반계서당’을 짓고 학문 활동과 제자 양성에 몰두했다. 반계는 이곳에서 벼슬에 나가지 않고 평생을 살면서 이상향을 건설하고자 학문연구에 전념했다. 우리나라 실학사에 길이 남을 ‘반계수록’ 26권은 근 20년에 걸쳐 집필된 것으로 영조 46년(1770년) 왕의 특명에 의해 간행되어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농촌을 부하게 하고 민생을 넉넉하게 할 그의 여러 가지 주장과 사상은 이익, 안정복, 정약용 등에게 이어져 훗날 실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으로 발전했다. 보안면은 또 고려 중기의 가마터인 유천리(현 외포리) 청자도요지가 있는 곳이다. 넓은 벌판의 구릉 주위로 40여개의 가마터가 널려 있는데, 11~14세기의 뛰어난 순청자와 상감청자는 물론 고려백자, 상감백자, 진사백자, 1m 이상의 매병 등이 출토되었다. 유천리는 전남 강진 지방과 함께 우리나라 청자의 대표적인 제작지로 알려져 있다. 국가사적 제69호인 유천리 도요지의 복원·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지난 2011년에 부안청자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 26.3m봉/ 삼각점봉
707번 도로 대성농장 간판이 있는 갈림길삼거리에서 왼쪽의 시멘트 도로로 향한다. 대성농장을 지나자마자 왼쪽으로 소나무 조림지가 나오는데 이곳에 지도상 삼각점이 있는 26.3m봉이다.
♤ 41m봉/ 부안군 보안면 남포리
지맥의 오른쪽이 상입석리로 바뀌고, 이어서 지맥의 왼쪽이 남포리로 바뀐다. 남포리는 과거 포구가 있던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수량이 급격하게 줄고 영전저수지가 조성돼 뱃길을 이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너머로 야트막한 41m봉이 보이는데 임도로 돌아간다.
♤ 23번 국도/ 원천마을/ 장군감자탕
23번 국도 남쪽에는 오일뱅크 주유소가 보이고, 생선회와 매운탕을 파는 어정가든, 원천마을 표시석과 가든 북쪽에는 원천 버스정류장이 있다. 23번 국도를 따라서 김제, 부안쪽으로 향한다.
♤ 사거리/ 보안면(상입석리 - 남포리)
23번 국도와 4번 군도가 교차하는 사거리이다. 직진하면 김제, 부안쪽으로 향하고 오른쪽은 부안군 주산면, 왼쪽은 격포와 곰소항으로 향하는데 맥길은 직진이다.
♤ 보안면 남포리 용사(龍社), 만회(萬回)마을 입구
23번 국도변에 용사, 만회마을 표시석과 버스 정류장, 사랑감나무 체험장 표지판이 있다. 용사 마을은 용사동(龍社洞)과 사창(社倉) 두 마을이 합해진 이름으로 사창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세금으로 거둔 조곡을 쌓아두던 창고가 있었다하여 사창(社倉)이라 하였고, 또 다른 지명으로는 이곳을 제안포(濟安浦) 또는 무포란 지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현재 남포리 88번지가 당시 창고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도 23호선이 지나는 이 마을은 3개의(용사동, 사창, 샛터) 뜸이 합해져 구성되어 용샛골이라고 부르는데, 용사(龍社)라는 지명은 용혈과 개구리 혈이 있어 뱀이 개구리를 삼키려하는 생사축와형(生蛇逐蛙形) 혈로, 의식이 부럽지 않게 살 수 있는 혈이라 하여 용사라고 부르다가 1943년 농업용수를 개발하고자 일본인들이 남포저수지를 막으면서 용혈과 개구리 혈이 물에 잠겨 이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한다. 이곳 용사 마을 앞쪽 저수지 밑에는 지석묘 6기가 있는데 길이가 3.2m 폭이 2.5m 높이 0.5m의 거대한 지석묘가 있어 옛 선조들의 생활을 짐작케 하고 있다. 만회마을은 옛날 만석동과 회룡동이 합해져 태어난 이름이다.
어렴풋이 어느분 후기에서 불은 켜져있는데 난방은 돌아가고 사람은 없다는 소스를 접하고 무조건 가보기로 합니다. 하지만 1층은 잠겨져 있고 2층은 운동기구가 있는 다목적실로 문이 열려 있어 아주 편하게 쉴 수 있었습니다. 이장님에게 미리 허락을 구해야 합니다. 아니면 야간공용건조물침입죄로 보안파출소에 끌려가요.^^
♤ 용사, 만회회관
만회 마을은 지난 1916년 만석동과 회룡동 두개의 마을이 하나로 합쳐져 만들어진 마을로, 마을 뒤쪽으로는 내변산 줄기인 감로봉이 우뚝 서서 멀리서 바라보며 산세가 마을 전체를 감싸고 눈을 부릅뜬 채 바라다보는 형상이다. 이 마을이 형성된 것은 이웃마을인 사창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차츰 안쪽으로 밭을 일구기 위해 이주하다보니 감로봉 바로 밑에까지 오게 되었다 하며,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이 마을 뒷산의 감로봉은 영봉으로 이 마을 만석동에 천주교 성지인 만석공소가 있어 김대건 신부가 우리나라에 천주교를 들여온 이래 이곳 만석공소에서 두 분의 신부님과 세분의 수녀, 한분의 수사가 배출되었다 하며 지금도 이곳 만석공소에는 한 달에 한번 매주 셋째 주 일요일 20여 분이 모여 미사를 드리고 있다고 한다. 남포 남쪽에 있는 성방청마을에는 옛날 형방청이 있었다고 하며 사창마을 동쪽에 있는 논인 옥터거리는 옛날 옥(獄)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23번국도를 따르다가 영성재 좌우로 들머리를 잡는다면 왼쪽보다는 오른쪽으로 오르는게 수월하다는군요.
♤ 영성재/ 강릉유씨 재실
가야할 상여봉이 보이고 23번 국도를 따르다 영성재 재각 뒷쪽으로 오른다. 영성재 왼쪽 '용사샛터길'을 따라 부안군 보안면 남포리 마을로 들어선다. 용사샛터길 끝에서 오른쪽 붉은색 벽의 민가 뒤쪽이 변산지맥 마루금이다. 길은 민가 앞에서 끝나고 왼쪽 과수원에는 큰 개가 지켜서고 있다. 민가 바깥쪽 담벼락으로 신속히 들어가 산속으로 진입한다.
용사, 만회회관에서 과수원 사이 양회임도를 따라 113.4m봉을 바라보고 인가 뒤쪽으로 올라섭니다.
♤ 113.4m봉/ 면리계(부안군 보안면 남포리 -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소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다. 좌우로 과수원이 있고 정면에 113.4m봉을 보고 진행하여 영성재 뒤쪽 산으로 빽빽한 잡목 숲을 뚫고 올라선다. 정상에 폐타이어봉 진지가 구축되어 있다.
♤ 부안군 상서면(上西面)
상서면은 부안군의 중앙에 위치하고 면소재지는 가오리이다. 지형상 서부는 고산준령이 중첩하고 지형이 험하며, 동북부 일대는 광활한 평야로 구성되어 토지가 비옥하고 농산물이 풍부하다. 성예봉(355m), 덕성봉(328m), 상여봉(390m) 등이 솟아있으며, 상서면 전체 면적의 75%가 산림이며, 변산반도국립공원으로 지정될 만큼 자연 경관이 수려하다. 체련공원을 시작으로 울금바위, 우금암(遇金岩)을 지나 개암사(開巖寺)에 이르기까지 1시간 반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특히 개암사 가는길 3㎞ 구간에는 1,200여 그루의 벚나무가 늘어서 있고, 4월 초·중순경에는 벚꽃이 만개하여 벚꽃 터널길이 장관을 이룬다. 사산저수지 등의 관개시설이 잘 갖추어진 장동리, 검교리, 가오리 일대에 농경지와 가옥이 밀집해 있다. 쌀,보리 생산과 잎담배, 과수 재배가 활발하다. 유물유적으로는 감교리에는 고인돌군과 고려시대 세워진 개암사, 개암사대웅전(보물 제 292호) 등이 있다. 익산-고창을 연결하는 국도23호가 면 중앙을 지난다. 가오, 감교, 고잔, 용서, 장동, 통정, 청림 등 7개의 마을이 있다.
오래전 도로를 따라 바보들의 행진 도보여행을 하며 줄포에서 호벌치를 넘어 부안 원숭이학교로 지났던 기억이 있어요.
♤ 유정재(留亭峙, 95m)/ 유진치(留陣峙)/ 호벌치(胡伐峙)
반바지님 코탕지가 나무에 매어 있다. 부안군 보안면과 상서면 사이에 있는 야트막한 고개이다. 변산지맥의 낮은 산자락이 북쪽으로 이어지다가 변산반도의 봉우리들과 연결되며, 유정재는 그 사이에 위치한다. 유정재 고갯마루를 경계로 행정 구역이 나뉘고 물길이 달라진다. 행정 구역상 북쪽은 부안군 상서면에 속하고, 남쪽은 부안군 보안면에 속한다. 유정재 북쪽으로 흐르는 물길은 주상천을 이루어 새만금 지역으로 이어지며, 유정재 남쪽으로 흐르는 물길은 신창천이 되어 곰소만(줄포만)으로 들어간다. 국도 제23호선이 유정재를 통과한다. 유정재를 일명 유정자고개 또는 유정치라고 한다. 고개 이름과 관련하여 북쪽에 유정마을이 있으며, 행정구역상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에 속한다. 유정(留亭)이라는 말은 적과 싸우기 위하여 이곳에 진(陣)을 쳤다는 뜻의 유진(留陣)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는 백제부흥운동(660~663) 시기에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 592~667)이 백제군을 진압하고 이 일대에 군대를 주둔시키면서 유진치(留陣峙)라는 지명이 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유정재가 위치한 곳은 전통 지리학 개념으로 보면 영산기맥에 해당하는 방장산에서 갈라져 북쪽으로 달리는 이른바 변산지맥에 해당한다. 호벌치란 지명은 7세기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이곳에 상륙하여 유진치와 주류성 일대에 통수부를 설치하였던 사실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유정재는 고창, 흥덕, 정읍 등 남쪽 방면과 해안을 끼고 있는 줄포, 곰소로부터 부안읍으로 들어오는 길목이어서 삼국 시대에는 백제 부흥군이 나당연합군을 맞아 이 부근에서 싸웠다. 그리고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선조 30) 의병장 채홍국(蔡弘國, 1534~1597)을 중심으로 하는 의병들이 고창, 흥덕을 거쳐 쳐들어오는 왜군을 맞아 최후까지 싸운 이른바 호벌치 전투(胡伐峙戰鬪)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정유재란 호벌치전적비는 유정자(柳亭子) 고갯마루에 위치하였는데 1964년 도로 확장 공사에 따라 지금의 자리인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로 옮겨졌다. 정유재란 호벌치전적지는 1976년 전라북도 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되었다. 호벌치 전적비 옆에는 이른바 코 무덤이 있다. 코 무덤은 정유재란 당시 전라도를 장악한 왜군이 남원, 부안 등지에서 조선 병사들과 양민들의 시신에서 잘라 낸 코를 일본에 묻던 것으로, 1993년 11월 26일 비총(鼻塚) 봉안식을 거행함으로써 호국의 역사가 서려 있는 이곳에 영면(永眠)하게 되었다.
♤ 259.5m봉
된비알을 올라서면 폐 군초소가 있는 봉우리이다.
♤ 279.5m봉/ 면리계(부안군 보안면 남포리 -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소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다. 능선에 올라서면 보안면과 상서면의 면계이다. 예전에 군부대가 주둔했는지 폐초소와 폐안테나가 있는 봉우리로 둥그렇게 원형으로 쌓여진 석축이 있다. 북쪽으로 진행하던 변산지맥이 변산반도를 향해 서쪽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지점이다. 좌틀로 지맥을 이어간다. 남포리에서 만석동, 천주교만석공소에서 이곳으로 올라와 진행하는 경우도 있다.
♤ 사창재(社倉峙, 265m)
사창재 임도는 남북 방향으로 개암사로 넘나드는데, 지도상에는 조금 더 진행하여 329.9m봉을 내려가면서 만나는 곳이 사창재로 표시되어 있다. 조곡을 쌓아두었던 사창(社倉)이 있었던 부안군 보안면 남포리 용사마을에서 상서면 감교리에 있는 개암사로 이어지는 임도에 위치해 있다. 개암사는 죽염으로 유명한 사찰이며, 이곳부터는 변산국립공원에 속하는지 출입금지 표지판과 이 지역의 민요가 적혀 있는 안내판이 보인다.
오른쪽으로 나무사이로 우금산과 울금바위가 보입니다.
♤ 329.9m봉/ 우금산갈림봉/ 면계/ 삼리봉(보안면 남포리, 상서면 감교리 → 청림리)
소나무에 높이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다. 북쪽으로 우금산이 빠져나가는 봉우리로 지맥의 오른쪽이 상서면 감교리에서 청림리로 바뀌는 지점이다. 지맥은 계속 좌틀로 꺽여 진행한다.
♤ 우금산(禹金山, 332m)
부안 우금산은,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리다보면 마치 마이산의 말 귀처럼 보이는 두개의 봉우리가 보이는데, 그 산이 우금산이고 정상의 바위가 우금암이다. 두 개의 봉우리 중 동봉은 오를 수가 없고 서봉은 오를 수가 있다. 부안읍에서 줄포 쪽으로 약 10km 쯤 거리의 상서면 감교리의 서쪽에 솟아있는 우금산은 변산반도국립공원 동북부에 속하며 높지는 않으나 유서깊은 고찰 개암사(김유신장군의 사당)와 아름다운 호수 개암저수지를 서남쪽 기슭에 품고 있고 울금바위·우금산성 등의 명소가 있다. 우금산성은 총 길이 3.96km의 석성으로, 묘암골(묘암사터)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통하는 계곡에 남문이 있고 서남쪽으로는 개암사 뒷산의 울금바위 남면과 이어진다. 동쪽으로는 213고지를 지나 북동쪽 300고지에 닿고 이곳에서 서쪽으로 꺽여 서북쪽 213고지를 지나 남서쪽 울금바위 북면으로 이어진다. 동쪽으로 뻗은 60m 가량의 성벽은 옛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개암사의 병풍 역할을 하는 변산 우금산은 변한과 백제 멸망의 가슴 아픈 사연을 안고 있다. 또 우금산성은 삼국시대 석축산성으로, 개암사 뒷산의 우금암에서 개암재 능선 밑으로 다듬은 돌과 자연석으로 쌓은 성터가 3km 넘는다. 이규보의 시에는 신라 장군 위금(位金)이 성을 쌓아 위금산성, 문헌비고에는 삼한시대에 우(愚)와 진(陳) 두 장군이 성을 쌓고 주둔해 우진산성으로 불린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러나 이 성은 백제 의자왕 20년(660년) 무렵 백제 부흥을 위해 복신 장군이 유민을 규합하고 군비를 정돈하여 항전하다 나당연합군 김유신 장군과 소정방에게 패한 유적지로 보고 있다. 그리고 하나의 석성을 놓고 주류성, 백제산성, 위금산성, 우진산성, 우금산성 등 혼선을 가져오고 있는데, 부안군에서 표기한 우금산성으로 통일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또한 정상의 바위는 우금바위, 울금바위, 우진암, 우금암 등 이름이 많다. 일곱 봉우리 전체를 부를 때는 우금산이다. 개암사에서 북동쪽으로 올려다보면 높이 40m쯤 되는 두 개의 우금암이 육중하게 솟아있는데, 때로는 금슬 좋은 부부 같고, 한편으로는 혹처럼 불거져 보인다. 1979년 개암사에 도둑이 들어 부처님 내장에 있는 물건을 훔쳐가면서 다라니경과 별기라고 쓰인 종이 한 장을 남겼는데, 주류성을 고찰하는 데 귀중한 사료가 되었다고 한다. 주류성은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멸망하는 과정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비극의 역사 현장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개암사 입구에는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 김유신 장군의 사당이 버티고 있다. 아무튼 그 사당은 백제의 마지막 저항군을 우금산성에서 섬멸하고 소정방과 김유신이 축배의 술잔을 나눴다는 역사적인 사실보다 전쟁의 승자적인 전설에 의해 후손들이 지었다는 게 정설이려니 싶다. 우금산 줄기는 변산지맥이 배풍산을 지나면 또 다시 북쪽으로 주산 줄기와 헤어져 서쪽으로 가다 곧바로 쌍선봉 줄기와 두 갈래를 친 뒤, 옥녀봉을 지나면 의상봉 방향으로 산줄기 하나를 보내고, 우금암을 솟구친 뒤 주산 들녘으로 숨어든다. 물줄기는 서쪽은 부안댐에 합류되어 서해에 살을 섞고, 동쪽은 개암제, 서산제에 합류되어 서해로 골인한다. 산행은 부안읍에서 줄포 방면 군내버스를 이용 개암사 입구에서 내려 개암저수지에서 시작한다. 저수지 호반길, 개암마을, 개암사, 울금바위, 우금산성터, 우덕마을 순으로 걷는데 4시간에서 5시간 정도 걸린다.
♤ 개암사(開巖寺)
개암사는 조계종 선운사의 말사로 634년(무왕 35) 묘련(妙蓮)이 창건한 백제의 고찰로 개암이라는 이름은 기원전 282년 변한의 문왕이 진한과 마한의 난을 피하여 이곳에 도성을 쌓을 때, 우(禹)와 진(陳)의 두 장군으로 하여금 좌우 계곡에 왕궁전각을 짓게 하였는데, 동쪽을 묘암(妙巖), 서쪽을 개암(開巖)이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676년(문무왕 16)에 원효와 의상대사가 우금암 밑 우금굴에서 수도하며 중수하였고, 1276년(충렬왕 2) 원감국사(圓鑑國師)때는 30여 동의 건물을 세워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며 능가경(楞伽經) 설법으로 많은 사람을 교화시켜 이 산의 이름을 능가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1314년(고려 충숙왕) 원감국사가 조계산 송광사에서 와서 중창하여 30여 동의 건물을 세우고 부처가 능가산에서 대혜보살을 위해 가르침을 모은 대승불교의 경전인 능가경을 가르쳤기에 능가산으로 부르고 있다. 1414년(태종 14) 선탄이 다시 중창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황금전을 제외한 전 당우가 소실되었고 1636년(인조 14)에 계호스님이 다시 중창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개암사 뒤, 우금암을 포함한 길이 3,960m의 주류성(周留城)은 백제의 유민들이 왕자 부여풍(扶餘豐)을 옹립하고, 3년간에 걸쳐 백제부흥운동을 폈던 사적지로도 유명하다. 유물로는 조선 중기의 건물인 대웅전(보물 제292호)과 1689년(숙종 5)에 조성한 전북 유형문화재 제126호인 동종(銅鐘)과 「중건사적기」가 있는데 백제 부흥군이 주류성에서 왜병과 나당연합군의 전쟁을 기록해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유희경 그 사람은 한양에 올라와 도봉산 입구 도봉정사를 공사감독했다네요. 절을 허물고 그 자리에 지은 도봉정사...
♤ 부안 기생 이매창(梅窓, 1573~1610)/ 계량
이곳 부안은 옛부터 풍요의 고장이라 그런지 문화 예술에 뛰어난 인재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관기(官妓)였던 이매창과 시조시인 신석정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황진이와 쌍벽을 이루며 황진이, 김부용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기생으로 꼽힌 이매창은 본명은 향금(香今)으로 알려져 있으며 계유년(癸酉年) 출생이라고 하여 계생(癸生), 계랑(癸娘)으로 불리었다 하고 동음자인 ‘계생(桂生)’, ‘계랑(桂娘)’도 쓰였다. 자(字)는 천향(天香)이다. 처음에는 ‘섬초(蟾初)’라는 호도 사용했고 가장 널리 알려진 ‘매창(梅窓)’은 그녀의 자호(自號)다. 조선시대 3대 기생으로 꼽히는 대표적 여류시인으로 ‘만인의 연인’으로 불리며 매창은 ‘매화가 핀 창’이라는 뜻으로 그녀의 이름은 이계생, 부안 현리였던 이탕종의 서녀(庶女)로 부안의 관기였던 이매창은 시와 가무에 능하였으며 가사, 한시, 거문고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이매창은 부안에서만 살아 황진이에 비해 명성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작품으로는 시조와 한시 58수이며 매창집 1권이 전해지고 있다. 한편 우리나라 대표적 시조시인이었던 신석정(1907~1974)은 역시 전북 부안 출신으로 평생 이 지역을 벗어나지 않았다고 하며, 전원적, 목가적, 낭만주의적 시풍으로 반세속적이며 자연성을 고조한 동양적 낭만주의에 입각하여 시를 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실을 피하고 이상적인 세계를 표현하였다. 고려의 문신 정지상을 비롯해 조선의 서거정, 김종직, 김시습 등이 절경에 이끌려 부안을 찾았다. 지배 이데올로기를 거부하고 조선의 ‘체게바라’가 되기를 원했던 허균은 파직당한 후 부안으로 내려와 선계폭포의 깎아지른 벼랑 위에 위치한 정사암에 머물며 ‘홍길동전’을 창작했다. 성리학의 폐단에 분노한 조선 중기 실학자 유형원도 내변산과 외변산의 길목에 위치한 우동리에 19년 동안 머물며 ‘반계수록’을 완성한다. 조선 선조 때 부안현 현리의 서녀로 태어났지만 어린 나이에 천애의 고아가 되면서 부안현청에 기적을 올린다. 그리고 시인이자 선비인 유희경을 만나 변산반도의 산하를 주유하면서 시를 짓고 때로는 거문고를 탔다. 하지만 28세 연상인 유희경과의 만남은 영원히 함께할 수 없는 사랑이었다. 매창은...
‘이화우 흩날릴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는 시로 애끓는 심정을 전했다.
그러니 유희경은 답시(答詩)로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그리움이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
오동나무에 비 뿌릴 젠 애가 끊겨라
라는 시로 화답했다.
매창이 지은 수많은 시 가운데 지금까지 전해오는 시는 ‘이화우(梨花雨)’를 비롯해 58편으로 목가시인이자 저항시인으로 유명한 신석정(1907∼1974)이 번역했다. 부안이 낳은 대표적 시인인 신석정은 자연과 민족, 민중을 소재로 주옥 같은 시를 남긴 인물이다. 특히 1967년 발표한 ‘산의 서곡’은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집으로 100여 종의 꽃이 등장한다. 매창은 부안읍 남쪽에 있는 봉덕리 공동묘지에 그와 동고동락했던 거문고와 함께 묻혔다. 그 뒤 지금까지 사람들은 이곳을 매창이뜸이라고 부른다.(지금의 매창공원) 그가 죽은 45년 후(1655)에 그의 무덤 앞에 비석이 세워졌고, 그로부터 다시 13년 후에 그가 지은 수 백편의 시들 중 고을 사람들에 의해 전해 외던 시 58편을 부안 고을 아전들이 모아 목판에 새겨 '매창집'을 개암사에서 간행하였다. 당시 세계 어느 나라를 둘러보아도 한 여인의 시집이 이러한 단행본으로 나온 예는 없다. 시집이 나오자 하도 사람들이 이 시집을 찍어달라고 하여 개암사의 재원이 바닥나기도 했다고 전한다.
♤ 석불산(石佛山) & 암탉봉
부안군 하서면에 있는 산으로, 모산은 변산지맥의 329.9m봉이다. 갈재를 지나면 나타나는 쓰리봉(733.6m) 부근에서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로 이어지는 변산지맥 사창재 직전의 329.9m봉에서 북동쪽으로 가지를 쳐 우금산을 일구고, 우금산을 일군 산줄기는 우슬재를 지나면서 다시 두 갈래로 갈라지게 된다. 이 중에서 북동쪽으로 가지를 친 산줄기가 옥녀봉을 일군 다음, 주상천 직전에서 마지막으로 솟구쳐 올린 봉우리가 석불산과 암탉봉이다. 석불산과 암탉봉을 일군 산줄기는 부안군 계화면 의복리에서 그 맥을 주상천에 넘겨주고 있다. 석불산(石佛山)이란 이름은 옛날 중국에서 돌부처를 실은 작은 배가 바다를 건너와서는 산 북서쪽 아래에 있는 불등리에서 산으로 올라가 산 속에 돌부처를 숨겼다고 해서 이런 이름을 붙였다는 설과 옛날 스님 한 분이 바다를 헤엄쳐 건너와서는 이 산에 올라가 오랫동안 산속에서 참선하다가 돌부처가 되었다고 해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산기슭에 불등, 부처댕이, 석불사, 석불저수지 등 불교와 관련된 지명이 몇 군데 있다. 이러한 전설에 따라 이곳이 중국에서의 불교 전파와 관련된 지역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아울러 산 남쪽 기슭에는 임진왜란 때 선조를 업고 임진강과 대동강을 건너 의주까지 피신하는데 공을 세운 호성공신 고희 장군의 사당인 효충사와 영정 및 유물관이 있다. 효충사 바로 옆에는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촬영하기 위해 세운 석불산 영상랜드가 있었으나 2019년에 철거했다고 한다. 산 동쪽 아래에는 계화도 간척사업을 하면서 만든 청호저수지가 있고, 북쪽 아래에는 당산제로 유명했던 돈지마을이 있다. 돈지 마을은 본래 하서면 소속이었으나 간척사업 이후에 계화면에 편입되었다. 마을이 호랑이 앞에 돼지가 놓여 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 돈지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며, 당집을 허물고 "우희정"이란 정자를 세웠으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당산제도 50년 전에 중단되었다고 한다.
♤ 328.1m봉
연이어 328.1m봉이 나오고 봉우리를 지나면 반바지님 사창재 코팅지가 보이는데 조금 더 진행하여 나오는 삼거리가 사창재인듯 하다. 조곡을 쌓아두던 창고가 있던 장소는 사창이겠고, 그 사창으로 넘나들던 고갯길이 사창재이다.
♤ 주산(舟山, 232.2m)/ 소산(所山)/ 파산(巴山)/ 망산(望山)
등로에서 동북 방향으로 주산이 바라다 보인다. 부안군 보안면 월천리와 주산면 소산리, 사산리 경계에 걸쳐 있는 산으로 배뫼는 배 주(舟)자 주산의 한글 표기가 아니라 소산(所山) 즉 '바이뫼'가 음운 변화하여 된 것이라고 한다. 『동국여지지승람』 (부안)에 "파산(巴山)은 현의 남쪽 20리에 있는데, 일명 망산(望山)으로도 불리고 세간에는 소산(所山)으로도 불린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산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 소산리(所山里)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주산면에 편입된 조선시대 소산면(所山面) 등의 지명도 '배뫼'의 한자 표기인 '소산'과 관련된 것이다. 큰 뱀이라는 의미의 파산(巴山)과 망산이라는 다른 명칭이 있다. 『조선지형도』(줄포)에 주산(舟山)으로 표기되고 있다.
♤ 상여봉(喪輿峰, 389.2m)/ 삼각점봉
완만한 오름길을 따르면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부안군 보안면과 상서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상여봉의 유래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멀리서 보았을 때 봉우리 형상이 네모진 상여와 닮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지도에는 봉우리의 지명은 없고 그냥 389.2봉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깨지고 마모된 데다가 이끼가 뒤덮혀 판독이 어려운 삼각점이 있다.
♤ 노승봉(老僧峰, 352.9m)/ 면계/ 삼리봉(상서면 청림리, 보안면 남포리 → 우동리)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높이 매어 있다. 부안군 보안면 남포리와 우동리 상서면 청림리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이다. 정상에는 선산김공의 묘지가 자리잡고 있고 왼쪽으로 선계폭포로 내려가는 뚜렷한 등로가 있으나 지맥길은 오른쪽 아래로 내려서는데 지명의 유래는 알 길이 없으나 늙은 스님과 관련된 것이 아니면 풍수지리학상으로 고승이 제자들을 모아놓고 불공을 드리는 노승예불(老僧禮佛), 혹은 호승예불(好僧禮佛)의 지세일 수도 있다. 영산기맥을 하면서도 초당대 이후로 노승봉을 지난 기억이 있다. 노승봉 아래의 우동리에 있는 선계폭포는 변산의 4대사찰(내소사, 개암사, 실상사, 성계암)중의 하나였던 성계암이 있었던 성계암 분지에 있는 폭포이다. 이성계가 성계골에 머물면서 도를 닦고 수련하였다는 설에 의하여 성계폭포라고 부르나 정확한 근거는 아니며 근처에는 반계 유원형 선생의 유적지가 있다. 우틀로 꺽어 내려선다.
십승지라면 우복동의 그 소의 창자처럼 구절양장을 말함이겠지요.
♤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牛東里)
병란과 기근을 피하기에 적합하다는 십승지의 땅 변산에서도 가장 명당이 우반동(愚磻洞)이라고 했다. 행정구역상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지금은 우동마을이라 부르지만 옛 지명은 우반동이다. 우동리는 우반동의 동쪽에 있어 ‘우동(愚洞)’ 또는 ‘동편’이라고도 불렀는데, 한자 ‘우(愚)’의 획수가 많고 복잡하여 ‘우(牛)’ 자로 바꾸었다고 전한다. 우반동은,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였고 바디재 위에 올라서면 바다를 조망한다. 옥녀봉 아래에 자리를 잡은 우반동은 상여봉으로 연결되는데, 상여봉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남포리와 경계를 형성하며 좌청룡을 이루고, 옥녀봉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매봉을 만들어 우백호를 이룬다. 남쪽으로 천마산이 안산(案山) 역할을 한다. 천마산과 남포리 산 사이의 낮은 골짜기에서 실계천이 흘러나와 마을 한가운데를 지나는데, 이 내를 장천(長天)이라 불렀다. 굴바위 일대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는 예전에 우반동이라 하여 유명 인사들이 많이 찾아오고 기거하였다. 대표적으로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1435~1493), 홍길동전의 저자 교산(蛟山) 허균(許筠, 1569~1618), 실학자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1622~1673)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연암 박지원은 이곳에 살지는 않았지만 우반동을 무대로 그의 소설작품을 구상하고 쓴 인물이었다. 혁명가 허균이 공주목사에서 파직되어 부안에 왔을 때 굴바위에서 가까운 선계 폭포 위쪽 정사암(靜思庵)에서 소설 홍길동전을 완성하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전란을 피해 기거하기 좋은 이른바 십승지지(十勝之地) 중의 하나가 부안 변산인데, 그 구체적인 장소가 바로 우동리 일대로 알려져 있다. 굴바위는 생활이 궁핍하여 유랑하다가 도적 떼가 된 사람들의 은신처이기도 하였다. 산수가 빼어나게 좋고 주위에 물산이 풍요로운 변산, 그 중에서도 굴바위 일대의 우동리는 사람들의 이상향이었을 것이다. 1618년 능지처참이라는 극형을 받고 49세로 처형당한 허균이 가고 35년이 흐른 1653년 유형원이 이곳 우반동을 찾아들었다. 선생이 32세 때 가족과 함께 이곳으로 이사해 1673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다고 했다. 선생은 이곳에 묻혔지만, 묘는 나중에 선산인 경기도 용인으로 이장해 지금은 묘터만 남았다.
♤ 변산 십승지(十勝地) 종주지도
예부터 변산을 일러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산이 겹겹이 쌓여 높고 깎아지른 듯하며 바위와 골이 그윽하다"고 하였으며 이중환이 저술한 택리지(擇里志)에도 "산 안에는 많은 봉우리와 골짜기가 있는데 이것이 변산이다"라고 묘사하고 십승지의 하나로 꼽았다. 정감록에 등장하는 십승지는 거의가 백두대간 자락에 위치하는데, 백두대간을 벗어난 승지가 두 곳이 있다. 그중 하나가 공주, 유구이고, 또 다른 하나가 변산 동쪽의 호암(壺岩, 병 바위)이다. 그 중 공주 유구는 백두대간에서 나온 금북정맥이 산간으로 이어져 터를 정하고 있지만, 변산은 호남정맥에서 분지(分支)된 지맥이 머리를 북쪽으로 치올리면서 나지막한 구릉지대와 넓은 평양지(平洋地)를 변환하며, 천전은맥(穿田隱脈)으로 진행하여 서해 바닷가 앞에서 몸통을 위로 솟구친 산진처에 해당한다. 우리나라 십승지 중, 유일하게 바닷가에 있으면서 삼면을 바다에 드리우는데, 수 백 개의 산봉우리가 해안과 내륙에서 첩첩이 터를 보듬는 승지이다. 그래서 전북지방에서는 예전부터 변산을 삼신산의 하나인 봉래산이라 불렀다. 그것은 고창의 방장산과 고부의 두승산(斗升山, 瀛洲山이라 함)을 합쳐 호남의 삼신산으로 여겨왔기 때문이다. 한편 변산이 감추고 있는 십승지도 여타의 승지처럼 딱 여기라고 꼬집어 말하는 사람은 없다. 이곳 역시 구체적으로 기록한 문헌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정감록의 두 비기(秘記) 모두 변산 호암(壺岩)아래 동쪽임을 분명히 제시하므로써 '병 바위' 또는 '병' 과 관련된 장소나 사물의 소재를 유추해야 답을 찾을 수가 있다.
♤ 279.7m봉
정상에 봉분이 조그마한 묘 하나가 있다.
직진하면 알바이고 왼쪽으로 내려서야 합니다. 선답자님의 띠지가 길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 298.4m봉
바드재로 내려가는 마지막 봉우리라선지 서레야님의 바드봉, 바디봉이라는 코팅지가 나무에 매달려 있다. 누구에게나 세상 시름 잊고 유유자적 살고 싶은 장소가 하나쯤 있을 것이다. 그 중에 한 곳이 부안군 보안면 우반동이다. 우동리는 본래 부안군 임하면 지역으로 우반동의 동쪽에 있으므로 우동 또는 동편이라고 하였는데, 만화동 동쪽에 있는 계룡산에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명당자리가 있다고 하며, 우동에서 성계안으로 가는 고개인 버디재는 옥녀봉(434.2m)이 옥녀가 비단을 짜는 형국이므로 이곳은 베틀의 버디(바디)라고 한다. 우동 북쪽에 있는 골짜기인 성곗골은 선계사(仙啓寺)라는 절터가 있었다. 그 절터에는 8미터쯤 되는 돌탑이 서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주춧돌만 흩어져 있다. 이 절에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팔도의 명산을 돌아다니며 공부를 할 때, 아름다운 변산이 보이는 이곳에 암자를 짓고서 두 사람의 선생을 모시고 글과 무예를 익혔다 전해온다.
묘지에서 급경사로 낙석방지용 철망의 빈틈으로 내려선다. 입산금지구역을 빠져나와 여기부터 변산반도 국립공원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 바디재(180m, 筬峙)/ 버드재/ 2차선도로/ 1번군도/ 면계(보안면 - 상서면)
부안군 상서면 청림리에서 보안면 우동리를 넘어가는 고개로 1번군도가 지나간다. 고개 왼쪽 아래에 있는 우반동은 조선 숙종 때 실학자 반계 유형원이 살았던 마을이라 한다. 고개는 마치 강원도에 있는 고개처럼 구절양장(九折羊腸)의 멋진 고개이다. 우동에서 성계안으로 가는 고개인 버디재는 옥녀봉이 옥녀가 비단을 짜는 옥녀직금형(玉女織錦形)의 형국이므로 이곳은 베틀의 바디(筬)에 해당하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고갯마루에 디따시 넓은 공터가 있다. 안내표지판 뒷쪽으로 올라선다. 여기서부터 입산 가능구역으로 변산국립공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부연설명을 하자면 용천지맥을 하며 기장과 산성산의 관계도 그러하다. 기장(機張)이 베틀(織機)을 차려(張)놓은 형국이라하여 붙은 이름으로 풍수상으로 옥녀직금형으로 성산은 베틀의 바디에 해당하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기장군 기장읍 서부리에 있는 성산(筬山, 368m)은 정상부에 기장산성이 있어 산성산으로 많이 알려져 있고, 안내도, 이정표, 정상석에도 산성산(山筬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국립국어원 맞춤법에 따르자면 두음법칙이 있어 유씨로 표기하는데 문화류씨 문중에서는 류씨라고 표기합니다. 참고로 버들류씨는 없습니다. 한문을 버들류(柳)자를 사용할 뿐...
♤ 반계 류형원(磻溪 柳馨遠: 1622~1673)
왜란과 호란이 쓸고간 시대의 참상을 바라보며 자란 실학자 유형원은 그의 호를 반계라 하였으니 반계는 주나라 문왕의 시절 강태공이 세상을 낚을 날을 기다리며 낚시를 드리운 계곡을 말한다. 하나 그의 저서는 100년이 지나고 영정조시대에 가서야 주목을 받는다. 반계 류형원은 본관은 문화 류씨이며, 세종 때에 우의정을 지낸 류관(柳寬)의 9세 손으로 조선조 광해군 14년(1622)에 외가인 서울 정릉에서 태어났다. 조선조 효종 10년(1653)때인 32세에 부안군 우반동(우동리)으로 이사하여 20여 년 동안 살면서 개혁 사상이 담긴 반계수록(磻溪隨錄)을 편찬하였으며 부안군 우반동에 남아있는 반계의 유적으로는 우거지터, 반계서당, 반계우물, 묘터 등이 있으며, 반계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 자신이 직접 고안한 배 4~5척을 직접 만들어 사용했으며 말을 기르기도 했다. 또한 활과 조총 수십자루를 준비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가르쳤고, 우물을 만들어 주기도 하였다. 이것은 반계가 자신의 학문을 직접 실천하고자 했던 증거이기도 했으며, 반계는 부안에서 많은 제자들을 가르켜 산경표를 저술한 여암 신경준(旅菴 申景濬), 황윤석(黃胤錫), 위백규(魏伯珪), 이복원(李馥遠), 하백원(河百源), 이윤성(李潤聖 ) 등, 이 지역 출신의 실학자들을 많이 배출했다는 점에서 한국 실학의 비조(鼻祖, 시조)인 동시에 호남 실학의 비조이기도 하다. 묘소는 한남정맥 국사봉에서 구봉산으로 가다가 달기봉 직전 안부에서 정맥 가까이에 있다.(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석천리), 조비산 가는 길에 묘소 입구를 지나기도 한다.
바드재에서 0.8km를 올라서는데 옥녀봉으로 오름길이 꽤 가파르네요. 조망바위에서 1957년 만든 우동리 우동제를 내려보고, 변산지맥 분기점도 찾아보고 멀리 곰소만 건너 선운산도 바라보입니다.
♤ 옥녀봉 삼거리
묘지가 있는 옥녀봉갈림길 삼거리에서 이정표가 없는 오른쪽으로 탐방로 아님을 넘어 지맥에서 조금 벗어나 있는 옥녀봉에 다녀와야 한다.
♤ 옥녀봉(玉女峰, 434.4m)/ 무인산불감시카메라탑/ 4등삼각점(부안 431/ 1984 재설)
내변산국립공원내의 옥녀봉은 부안군 상서면 청림리와 보안면 우동리의 경계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우리나라 산의 지명중에서 백운산, 깃대봉, 국사봉과 함께 유난히도 산 이름 중에 옥녀봉이 많다. 옥녀(玉女)란 몸과 마음이 옥처럼 깨끗한 여인으로, 절세미인인 동시에 풍요와 다산(多産)을 나타내는 표상이기도 하며 옥녀봉은 마을의 수호신으로, 남녀합궁의 뜻으로 등장한다. 옥녀는 본디 도교에 등장하는 인물로 옥황상제와도 관련이 깊다. 경남 거제의 옥녀봉에 관해 옥황상제의 옥녀가 내조암 약수터에서 내려와 사슴과 더불어 놀다가 목욕하였다는 전설이 전하는 것으로 미루어 옥녀는 선녀와 같은 존재로 보인다. 변산에도 세 곳에나 옥녀봉이 있다. 남옥녀봉(바디재), 북옥녀봉(어수대 북쪽, 하서와 상서의 경계), 서옥녀봉(변산면, 운호리와 마포리의 경계)이다. 『삼국유사』에 “진표율사는 선계암에서 옥녀봉을 지나 마천대 불사의방장에 도착하였다.”고 하는 기록이 보인다. 옥녀봉 정상에는 그린나래 산패가 연두색 팬스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 내변산
내변산은 전국 명승지 중에서 가장 인기가 좋고, 한국 8대 관광지로 선정되었는데 변산에는 최고봉인 의상봉(508m)을 비롯한 신선봉(488.2m), 쌍선봉(459m), 관음봉(424.5m) 등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산봉우리와 그 사이 개암사, 내소사, 월명암 등 유서 깊은 고찰이 있다. 또한 직소폭포, 봉래구곡, 낙조대 등 승경이 곳곳에 산재하고 있으며 그 주변에는 유천도요지, 구암 지석묘군, 호벌치와 우금산성 등 역사 유적지가 있다. 채석강, 적벽강, 신석정 시비, 한국에서 최초로 조성된 금구원 조각공원, 그리고 변산 해수욕장, 격포해수욕장 등 4개의 해수욕장까지 갖추고 있다. 1988년 변산반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157㎢ 넓이에 35km의 해안선을 가지고 있어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곳이다.
♤ 의상봉((義相峰, 508m)/ 기상봉(椅上峰, 495.6m)/ 마천대
새만금이 있는 북쪽으로 변산의 주봉인 의상봉이 희미하게 보인다. 정상에는 국가중요시설(대공레이다)이 차지하고 있어서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쉽지 않은 곳이지만 그래도 변산을 얘기하면서 의상봉은 빼놓을 수가 없다. <부안군지>와 <한국지명총람>에 의하면 일명 기상봉으로 불리는 의상봉은 통일신라 문무왕 때 고승 의상대사가 변산의 마천대(磨天臺) 북쪽에 의상사를 짓고 수도한데서 유래됐다. 신라 진덕여왕 때 고승 부설거사(浮雪居士)가 영조, 영희와 함께 수도를 가던 길에 벙어리인 묘화(妙花)라는 여인을 만나 말문이 열리게 했다. 그러자 그녀의 부모가 천상배필임을 알고 결혼을 청했으나 부설이 거절하자 묘화가 “억조창생을 구하려는 고승이 작은 계집의 소원도 못 들어 주느냐”는 말에 승복해서 묘화와 살며 월명과 등운 남매를 낳았다. 그는 현재 월명암 선방으로 쓰이는 부설암을 짓고 수도에 정진하면서, 딸에게는 월명암, 아내를 위해 월명암 옆에 묘화암(일명 묘적암), 아들에게는 등운사를 지어 수도케 했다. 월명암에서 홀로 수도하던 월명에게 불목하니가 음심을 품자 의상사에서 수도하던 의상대사에게 상의하여 그 청을 들어줬는데 그래도 끊임없는 불목하니의 음심을 참지 못한 월명의 하소연을 듣다 못한 의상대사가 불목하니를 아궁이에 밀어 넣어 죽여버리고 말았다. 결국 불목하니의 육보시(肉普施) 청을 들어준 월명은 생불하고 살인을 저지른 의상대사는 생불하지 못했다는 가슴 아픈 설화도 전해온다. 이중환이 저술한 택리지(擇里志)에는 변산은 소금 굽고 고기잡이, 산중에는 기름진 밭이 많아 농사짓기에 알맞으며 땔나무와 조개 따위는 사지 않아도 될 만큼 넉넉하다고 했다. 『삼국유사』와 『동국여지승람』, 그리고 고려의 문장가 이규보는 의상봉 마천대의 일명 다람쥐 절터로 불리는 불사의방(不思議房)에서 고승 진표율사가 자기 몸을 던지는 망신참법(亡身懺法)으로 득도한 미륵불교의 성지로 추앙하고 있으며 의상봉, 관음봉, 지장봉, 원효굴, 불사의방 등 불교와 관련된 지명이 많다. 유명한 사찰 터로는 실상사, 청림사, 의상암, 등운사, 불사의 방장, 선계사 등이 즐비하다. 원효대사, 부설거사, 의상대사, 진표율사, 진묵대사, 월명 등 불가의 이름난 고승들이 변산에서 배출되었으며, 근래에는 증산교의 창시자 강일순, 원불교의 소태산 등이 월명암을 비롯한 주변의 사찰에서 득도했다는데, 의상봉 아래에 있는 불사의방에 내려가서 천인단애를 이룬 절벽을 내려가자 오금이 저린다. 전주목사로 부임한 이규보가 이곳을 방문했다가 “높이가 백자쯤 되는 나무사다리가 절벽에 의지해 있는데 이곳을 오를 때 다리가 와들와들 떨려 천신만고 끝에 진표대사 진용(眞表大師 眞容)에 참배했다.”고 술회했다. 불사의방은 진표율사가 절벽으로 몸을 던지고 망신참법을 통해 득도했다는 곳으로 천인단애를 이룬 마천대 암벽 중간에 있다. 밧줄을 타고 유격 훈련하듯 암벽을 내려가면 암벽의 네 평쯤의 반석 위에 주춧돌과 와편이 흩어져 있다. 기와를 얹은 집을 암벽에 쇠말뚝을 박아 잡아 맨 작은 암자로 추정된다. 암벽에 쇠말뚝 박은 흔적과 다람쥐에게 밥을 줬다는 바위에 사각으로 된 구멍이 선명하다.
♤ 288.8m봉
참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다. 옥녀봉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내려선 암릉으로 이루어진 봉우리이다.
삼거리로 다시 돌아와 심한 내림길을 따라 용각봉 삼거리로 지맥을 이어갑니다.
♤ 안부(250m)/ 입산금지구역
오른쪽으로는 청림리의 가마소와 와룡소로 내려가는 등로인데 옥녀봉에 왔던 등산객들이 이쪽으로 내려가는지 일반 산악회의 띠지들이 많이 보이고 왼쪽의 우동리쪽에는 굴바위라는 표지가 보이는데 굴바위 입구에는 남근석 두개가 서있다. 남근석이 세워진 곳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마치 여인들의 자궁처럼 생긴 커다란 동굴이 있는데 이곳을 굴바위라고 한다. 홍길동에서 활빈당의 주무대이기도 하다. 안부에는 목책과 이정표, 구조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이정표(↑가마소 삼거리 3.3km ↓굴바위 0.9km, →옥녀봉1.1km)가 있다. 그러나 용각봉쪽으로는 이정표가 없는데 이곳은 등산객이 다닐 수 없는 비탐구간이다.
능선으로 올라서면 용각봉은 왼쪽으로 약 90m 다녀와야 하는데 지맥은 우틀입니다. 오른쪽으로 세봉까지 가야할 마루금이 한눈에 들어오고 내변산 의상봉, 쇠뿔바위봉 그리고 쌍선봉이 찾아집니다.
♤ 용각봉갈림길/ 알바주의지점
용각봉 삼거리에서 직진으로 향하니 뚜렷한 등로가 보인다. 용각봉갈림길에서 다시 관음봉으로 향해 길을 나서는데 이곳은 변산국립공원지구 중에서 비탐방 구간이라 그 흔한 이정표도 없고 등로도 상당히 거칠다. 알바주의지점이다. 용각봉삼거리에서 바짝 긴장해야 한다. 앞에 뾰족하게 353.7m봉이 보이지만 지맥 오른쪽 청림리에 있는 봉우리로 지맥능선은 아니다. 무심코 굵은 산줄기로 직진하기 쉬우나 지맥은 용각봉삼거리에서 조금 진행하다가 353.7m봉 직전에 왼쪽으로 내려서야 한다.
♤ 용각봉(龍角峰, 366m)/ 삼면봉(상서면 청림리, 보안면 우동리 → 진서면 석포리)
지맥의 오른쪽인 내변산쪽은 상서면 청림리이고 바닷가 외변산쪽으로 부안군 보안면에서 진서면 석포리로 바뀌는 삼면봉 지점이다. 용의 뿔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인데 그런 감흥은 들지 않는다. 비슬지맥을 하면서도 이와 유사한 명칭으로 천연 바위로 된 용각산 정상석을 잠시 다녀온 기억이 있다.
♤ 부안군 진서면(鎭西面)
진서면은 본래 옛 조선시대의 좌산내면 지역으로서 1914년 우산내면과 통합되어 산내면의 3개리(진서, 석포, 운호)로 편성되었다가 다시 분리된 곳이다. 진서면의 내소사(來蘇寺) 들머리에는 네 개의 작은 마을이 있으니 석포, 용동, 원암, 입암 마을이다. 이 마을들은 내소사라는 사찰과는 뗄 수 없는 관계로 절 밑 동네이니 사하촌(寺下村)이라 이름할 만하다. 1947년 3월 산내면 진서출장소가 설치되고, 1983년 2월 면에서 승격 분리되었다. 2009년 1월 곰소리가 추가되어 재조정 되었다. 진서면은 산간 임해지역으로 수산자원과 산림자원이 풍부하다. 부안읍에서 서남방 23km 지점에 위치하고, 동으로 보안면에 접해있다. 북으로는 내소사, 남으로는 곰소만, 고창군과 접하고 있다. 산, 들, 바다가 고루 어우러져 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건이 고루 갖추어진 어염시초의 고장으로 45㏊의 염전에서 연 200톤의 천일염과 전국전으로 유명한 곰소젓갈, 쭈꾸미, 건어물, 생선회 등의 풍부한 먹거리와 사계절 바다낚시, 내소사국립공원의 전나무 숲이 있다. 서해안고속도로 개통과 더불어 곰소다용도부지 완공, 대단위 관광단지 개설이 완공되면 진서면의 또다른 면모를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부안군 진서면 진서리(鎭西里)
부안군 보안면 유천리 도요지(사적 제69호)는 고려 중기에, 부안군 진서면 진서리 도요지(사적 제70호)는 고려 후기에 조성된 청자 가마터이다. 고려청자의 본향인 것이다. 몽고가 고려에 침입했을 때, 일본 정벌용 배를 건조하기 위해 변산(진서리 구진마을)에 조선소를 설치했다고 한다. 이때 벌목사(작목사)로 변산에 부임한 고려 문신 이규보는 "변산은 우리나라 재목의 보고"라고 기록했다. 『동국여지승람』 『택리지』 등 조선시대 지리서에도 변산의 '하늘을 가리는 울창한 숲'과 '첩첩한 바위골짜기들'이 언급돼 있다. 『격암유록』을 쓴 풍수가 남사고는 변산을 '십승지지'(전란을 피해 살 만한 곳)의 한곳으로 꼽았다. 곰소항은 전북 부안군 진서면 진서리에 있는 어항으로 지방 어항(漁港)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지방 어항은 이용범위가 지역적이고 연안어업 지원의 근거지가 되는 어항을 의미한다. 시설 관리자는 부안군수다. 하루 어선 130여척이 드나들 정도로 상당히 큰 규모의 어항이다. 조선시대 해군의 요충지(검모포진)였던 곰소항은 1940년대 천일염을 비롯한 군수 물자를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한 군항으로 사용됐다. 1960년대부터는 어업 근거지항으로 발전하며 성장했다.
♤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石浦里)
마을 앞은 서해와 맞닿아 있고 마을 뒤로 산지가 위치하고 있으며 자연마을로는 원암(元岩), 입암(立岩) 등이 있다. 원암은 뒷산에 원바우가 있다 하여 이름 붙여졌다. 입암은 큰 바위가 우뚝 서있다 하여 이름 붙여졌다. 석포리는 전에 좌산내면 지역으로, 돌이 많은 냇가에 있는 마을이라서 독개, 돌개, 또는 석포라 불렸다. 전해오는 옛이야기에 따르면 대적광전의 불상인 관음상이 서역으로부터 돌배를 타고 원암리 앞 갯벌에 닿았는데 관음상을 모셔서 내린 그 곳을 석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석포는 돌개라 해야 알아듣기 쉽고 마을 뒤로 가파른 노랫재를 오르면 대소골로 들어갈 수 있다. 원암마을에서 산으로 쪼꼬시 올라가서 재백이고개에서 쉬었다가 계곡을 따라 가는 길 재촉하면 직소폭포에 닿는다. 내소사고려동종(보물 277호), 대웅보전(보물 291호), 영산회괘불탱(보물 제1268호) 등의 고적이 있다.
♤ 가마소 안부(210m)
왼쪽으로는 석포저수지로 이어지는 희미한 등로가 보이고 오른쪽은 가마소로 내려가는 길이다. 가마솥에서 이름이 붙여진 것 같고 변산 산중에서 교통이 제일 불편한 곳에 있었으나, 기암절벽과 협곡은 수석이 수려하여 내변산의 풍치에 더욱 어울리는 곳이기도 하다.
♤ 364.2m봉
이정표가 있는 사거리에서 출입금지 구역으로 직진하여 만난 암릉으로 이루어진 갈림길 삼거리 봉우리이다.
♤ 279.5m봉
준희선생님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암릉 구간을 타고 올라가면 만나는 돌무더기가 있는 봉우리이다. 직진으로 내려선다.
♤ 세봉삼거리/ 삼면봉(402.5m, 진서면 석포리, 상서면 청림리 → 변산면 중계리)
내소사 일주문으로 향하는 뚜렷한 등로가 나오고 세봉 방향으로 향한다. 오른쪽으로 가마골에 솟은 천총산(266.4m)으로 이어지는 능선 삼거리인데 직진하여 관음봉삼거리 내소사 방향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세봉삼거리를 지나면 왼쪽 아래로 내소사가 내려다보인다.
♤ 부안군 변산면(邊山面)
1987년 산내면이 변산면으로 개칭되었다. 변산(邊山), 직역하면 '가장자리(변방)의 산'이다. 여기에 '반도'가 더해져 '변산반도'가 된다. 변산반도는 제법 큰 산 덩어리여서 부안군의 보안면, 상서면, 진서면, 변산면, 하서면 등 5개면이 연접되어 있는 서해바다쪽으로 돌출된 반도로 변산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해안의 길이가 98㎞에 이른다. 지도를 보면 금강을 지나 군산을 시작으로 호남땅에 들어선다. 이어 내륙으로 쑥 들어간 김제를 거쳐 서해로 툭 튀어나온 전북 부안 변산반도와 닿는다. 삼면이 바다에 안긴 한반도가 품은 작은 반도 변산은 서해가 품은 아름다운 해변으로 꼽힐만큼 빼어난 미모를 갖췄다. 서해의 진주라고 불리는 이유다. 허나, 어디 해변만으로 진주라는 이름을 얻었을까. 변산이 품은 해안에는 모래와 바다만 있는 게 아니다. 멋들어진 기암들이 수문장처럼 바다와 뭍의 경계를 지킨다. 이는 호남정맥에서 갈라져 나온 변산지맥이 서쪽으로 향하다 순식간에 서해 바다로 몸을 숨긴 덕분이다. 입수하기 전 사방으로 뻗은 산줄기가 빚어낸 기암들은 변산반도 전체를 절경으로 만드는 일등공신이다. 산을 낀 내륙의 산줄기를 내변산이라 하고 해안쪽은 외변산이라 부르며 이를 통칭해 변산반도라 일컫는 변산반도 국립공원이다. 우리나라 유일의 반도공원으로 산이지만 바다와 산을 동시에 품고 있다. 산과 들과 바다가 어우러진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춘 명소이자 전북의 대표 관광지로 1987년까지는 도립공원으로 부안군에서 관리하였으나, 88년에 우리나라의 20번째 국립공원으로 승격됐다. 호남정맥에서 나뉘어 온 변산지맥의 산줄기가 서해로 튕겨나온 변산반도 내변산에는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산봉우리와 그 사이 직소폭포·봉래구곡·낙조대 등 절경이 곳곳에 산재하고 있다. 그 주변에는 유천도요지·구암 지석묘군·호벌치·우금산성 등의 역사 유적지와 내소사와 월명암이라는 역사깊은 사찰이 있다. 변산의 산세는 용맥이 강이나 바다를 바로 앞에 두고 갑자기 멈춰선 경우에 해당해, 이른바 산진처의 명당이다. “변산의 청룡, 즉 동쪽 산세는 사창재, 노승봉(상여봉), 바드재를 건너 옥녀봉으로 이어지다가 잠시 남서쪽으로 흐르는 듯하다가 내소사의 주산인 세봉을 건너서 월명암의 주산인 쌍선봉으로 반원을 그리며 내뻗은 다음에 학치, 청림리 삼예봉에서 끝난다. 변산의 백호, 즉 서쪽 산세는 개암사의 주산인 우금산에서 우슬재를 거쳐 의상봉으로 이어진다고 보며 이 두 흐름을 갈라놓은 것이 그 옛날 백천이었는데, 지금은 부안호가 되어 없어졌다. 변산반도 서쪽 끝에 자리한 아담한 격포항, 격포에서는 갯바위와 변산이 자랑하는 해안 기암을 코앞에서 실컷 구경할 수 있다. 지척에 자리한 닭이봉(85m)에 오르면 격포해수욕장은 물론 위도까지 한눈에 펼쳐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변산이라고도 하는데 말이 떠돌다가 변(邊)으로 되었고 변한(卞韓)의 이름을 얻은 것이기 때문이라 하나 그런지 아닌지 알지 못한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또한 변산을 물산이 풍부하다는 뜻으로 천부(天府)라 했다하며, 고려시대 이규보(李圭報)의 시를 인용하여 '강산이 맑고 좋음은 영주산, 봉래산과 겨룰만 하고 옥을 세우고 은을 녹여 만고에 한가지로다.' 라고 소개하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백제 땅에 변산이 있으니 옛날에 변한(卞韓)이라고 하였다.(百濟地有卞山故云卞韓)’는 구절이 있으니 변한의 위치와 관계없이 변한에서 유래한 듯하다. 내소사의 일주문에 능가산(들어가기 힘들다는 뜻으로 법어에서 나온 말)으로 쓰여 있다. 변산을 능가산이라고 하는데 이건 불교 경전인 능가경에서 따온 지명이다. 능가산(楞伽山)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능가경을 설한 곳으로 ‘도달하기 어려움(不可到)’ ‘오르기 힘듦(難入)’이 담긴 뜻이며, 능가산이 어디인지 정확하지는 않으나 대체적으로 스리랑카로 비정한다. 능가경은 ‘랑카에서 설법한 내용을 담은 경전’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로 원제는 대승입능가경(大乘入楞伽經)이다. 중생속에 갖추어져 있는 여래가 될 수 있는 씨앗인 여래장에 대한 사상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불경이다. 인간과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진 미륵성지 변산은 『정감록』에 우리나라 십승지로 기록돼 있다. 정감록에 나오는 변산 동쪽의 길지(吉地)는 구체적으로 어딘가? 내변산으로 통하는 입구인 우슬재나 바드재를 좀 잘 봐야된다. 그저 그 길목만 잘 지키면 인근의 청림리와 중계리는 참 좋은 피난처가 되는 셈이다. 정감록에 나오는 호암을 찾으려면 상서면 통정리에서 우슬재를 넘어가면 되는데, 우슬재를 살짝 넘어가면 쇠뿔바위가 나오고, 이 봉우리는 변산 최고봉인 의상봉의 오른쪽에 있다. 변산은 아주 옛날서부터 미륵이 나타난 땅이고, 관음보살의 성지요. 원효, 진표, 진묵 등 큰 스님들이 도를 닦으신 것만 봐도 보통 땅이 아님은 틀림없다. 근세엔 증산교를 세운 강일순이도, 원불교의 소태산도 다 여기 변산서 도를 닦았다. 예로부터 부안을 “생거부안(生居扶安)”이라 하였는데 조선시대의 암행어사 박문수가 “어염시초(魚鹽柴草: 물고기, 소금, 땔나무, 산나물)”가 풍부하여 부모님 봉양하기가 좋아 생거부안으로 한데서 유래되었으며 산해절승(山海絶勝)으로 유명하다. 또 부안에는 풍요를 뜻하는 “변산삼락(邊山三樂: 맛과 풍경, 이야기의 즐거움)”이 있는 곳이다. 예로부터 변산에 유명한 것이 세 가지로 변재(邊材), 변청(邊淸), 변란(邊蘭) 삼변(三邊)을 꼽았다. 변재는 변산의 소나무를 이르는 것이며, 변청은 변산 곳곳의 바위벼랑 벌집에서 꿀을 이르는 것으로 질이 좋기로 유명해 왕실에도 진상되었다고 한다. 변란은 변산에 자생하는 난으로 보춘화(報春花)를 이르는 말이다. 보춘화는 일찌감치 꽃을 피워 봄을 알리는 춘난이다. 변산바람꽃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왼쪽 아래로 내소사와 석포리가 내려다 보이고, 곰소만 건너편으론 경수지맥 산줄기가 마주 보입니다.
♤ 세봉(細峰, 433m)/ 이정표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와 진서면 석포리에 걸쳐있는 산으로 바로 옆에 있는 관음봉의 명성에 밀려 덜 알려져 있으나 뾰족하게 솟은 암릉 봉우리가 가히 장관을 이룬다. 지명의 유래는 알 길이 없으나 어떤 자료에는 관음봉과 함께 능가산이라 부르고 있다. 한문 표기로는 ‘가늘 세(細), 봉우리 봉(峰)’이라 표기해 놓은 것을 보아 봉우리가 뾰족해서 붙혀진 이름으로 보인다. 세봉 왼쪽 아래로는 내소사의 부속암자인 청련암이 자리를 잡고 있다. 관음봉 내소사 방향으로 내려선다.
내소사에서 한참 산꼭대기로 올라와 세봉 바로 아래에 있는 암자입니다.
♤ 청련암(靑蓮庵)
지장암과 함께 내소사에 딸린 부속암자로 관음봉과 세봉 사이에 자리해 있으며 산 아래로 곰소항이 보이고 줄포만 건너 선운산 자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동아일보를 창간한 인촌 김성수가 17세에(1907) 청련암에서 공부할 때 고하 송진우ㆍ백관수도 함께 수학하며 평생의 지기가 되었던 곳이며, 원불교의 창시자 소태산 박중빈(少太山 朴重彬)이 곰소에서 실상동으로 올 때 보통 우동리로 하여 우바위재를 넘어가나 때로는 내소사 앞을 지나 왼쪽으로 직소폭포로 넘어가는 완만한 길을 택했던 곳에 있는 곳이 청련암이다.
♤ 내소사(來蘇寺)/ 소래사(蘇來寺)
내소사는 전북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에 있으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24교구인 선운사의 말사로 『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에 따르면 내소사의 원래 이름은 소래사(蘇來寺)였으며 백제 무왕 34년(633년) 혜구(惠丘)스님이 창건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다시 태어나서 온다'는 뜻으로 소래사였는데, 조선 인조 11년(1633년)에 청민선사가 중건한 뒤부터 이름이 내소사(來蘇寺)로 바뀌었다고 하며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 592~667)이 석포리에 상륙해 이 절을 찾아와 군중재를 시주한 일을 기념하기 위해 절 이름을 내소사로 바뀌었다고 하는 설이 있으나 사료적 근거는 없다. 중국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세웠기에 내소(來蘇)라 이름 지었다는 건 와전된 것, 이 절에 관한 기록은 『동국여지승람』과 고려 후기의 문신인 최자의 보한집(補閑集) 가운데 고려 중기의 문신인 정지상(鄭知常)이 지은 漢詩〈제변산소래사(題邊山蘇來寺)〉라는 시가 있고, 이규보(李奎報)의 남행일기가 있는데 모두 소래사로 기록이 되어 있어 언제 내소사로 절 이름이 바뀐지는 분명하지 않다. 1633년(인조11)에 청민(靑旻)스님에 의해 중건되었고, 1902년 관해(觀海)스님에 의해 수축된 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이 절에 있는 중요문화재로는 고려동종(보물제277호), 법화경절본사본(보물제278호), 대웅보전(보물제291호), 영산회괘불탱(보물1268호)가 있고 그밖에 설선당, 보종각, 봉래루, 3층석탑 등이 있다. 내소사에는 일주문 앞과 경내의 봉래루 앞 마당에 두 그루의 당산나무가 있다. 일주문 앞에 있는 당산나무는 수령이 약 700년 된 할아버지 당산나무이고 절집 안에 있는 당산나무는 수령이 약 1,000년쯤 되는 할머니 당산나무이다. 이곳 진서면 석포리 입암(立岩: 선돌)마을 사람들과 내소사가 함께 음력 정월 열나흘날에 마을의 수호신인 당산신(堂山神: 당산 할아버지와 당산 할머니)에게 풍요와 평안 등을 기원하는 지역공동체의 의례인 당산제를 지낸다. 내소사 전나무숲은 일주문에서 피안교(彼岸橋)까지 길이가 600여m 밖에 안되는 거리이지만 ‘한국의 아름다운 길’로 선정된 전나무 숲으로 오대산 월정사숲에 비견될 정도로 멋지다. 내소사는 임진왜란 당시 큰 피해를 입었던 곳으로 내소사 앞 터가 휑했다고 한다. 그 후 스님들이 전나무를 심었고 지금은 약 500그루가 울창히 서있다. 전나무에서는 하얀 수액이 나오는데 이 때문에 '젖나무'로 불리던 것이 전나무가 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전나무에서는 피톤치드(phytoncide)라는 살균물질이 나무에서 분비되기 때문인데, 전나무가 편백나무에 이어 두 번째로 피톤치드가 많이 방출되는 나무라고 한다.
♤ 변산 8경
변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통틀어 일컫는 말로 변산 8경이라 하는데 1경: 웅연조대(雄淵釣臺, 줄포에서 곰소와 격포를 잇는 서해의 아름다운 밤의에 낚시를 드리운 어촌의 평화로운 풍경), 2경: 30m를 비류직하 하는 직소폭포(直沼瀑布), 3경: 소사모종(蘇寺暮鐘, 내소사의 저녁 종소리), 4경: 월명무애(月明霧靄, 월명암에서 내려 본 내변산의 아지랑이), 5경: 서해낙조(西海落照, 낙조대의 낙조와 채석강의 낙조), 6경: 채석강의 돛단배(採石帆舟), 7경: 지포신경(止浦神景, 지서리에서 쌍선봉까지의 경관), 8경: 개암고적(開巖古蹟, 개암사 부근의 주류성 등 고적)이다.
♤ 월명암(月明庵) & 부설거사(浮雪居師)
내변산은 나지막한 능선을 따라 깊은 계곡이 여럿이고 나무 또한 울창해 풍광이 곱다. 그 중 산내면 중계리에는 신라 때 창건됐다는 월명암이 있다. 변산의 제2봉인 쌍선봉(498m) 중턱에 자리잡은 월명암에서 바라보는 아침 바다의 물안개는 변산8경의 하나다. 암자 뒤편의 낙조대(448m)에서 서해로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는 것도 역시 변산8경으로 손꼽는다. 우리나라 불교 고승 가운데 세명의 행보가 눈여겨볼 만하다. 그 세명이란 7세기에 활동하였던 의상(義相), 원효(元曉), 부설(浮雪)이다. 의상과 원효는 태행지맥에서 해골바가지 해탈(解脫) 사건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부설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흔히 부설거사(浮雪居士)로 불린다. 결혼하여 아들과 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3인은 여자와 결혼문제에 대하여 각기 대처 방식이 달랐다. 먼저 의상은 철저하게 여자를 멀리하는 청정비구(淸淨比丘)의 삶이었다. 의상을 죽도록 사모했던 중국 처녀 선묘(善妙). 그녀는 자신의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물속에 뛰어들어 용이 되었다. 죽어서 용이 된 선묘는 영주 부석사(浮石寺)에까지 따라와 의상을 지키는 신장(神將)이 되었다. 원효는 요석공주와 잠깐 살면서 아들 설총을 낳았다. 그렇지만 요석궁에서 결혼생활을 계속하지는 않고 다시 승려생활로 되돌아갔다. 부설은 도반스님들과 순례를 하던 중에 묘화(妙花)라는 처녀의 간곡한 청혼을 받는다. 하도 간곡하게 청혼을 하는 바람에 차마 거절하지 못한다. 결혼해서 아들(登雲)과 딸(月明)을 낳은 뒤에도 계속 수행 정진하여 도통하였다고 전해진다. 부설 자신뿐만 아니라 이후에 부인과 아들, 딸이 모두 도통하였다. 부설거사는 신라 진덕여왕(제 28대) 때의 이름 높은 고승이었다. 이웃 김제 만경에서 태어났다 하며 속명은 진광세(陳光世)라 했는데, 어려서 출가하여 이 곳 변산의 월명암에서 영조(靈照), 영희(靈熙)와 함께 수도를 하였다 한다. 길을 떠나 가는데 고향인 만경(萬頃) 못 미쳐 두능이라는 데를 지나다 날이 저물어 구씨라는 사람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 구씨(具氏) 집에는 묘화(妙花)라는 벙어리 딸이 하나 있었는데 이 벙어리 묘화가 하룻밤 묵어 가는 세 수도승 가운데 부설을 보더니 원래 부처님 곁에 피어 있는 연꽃 한송이를 꺾은 죄로 벙어리가 되어 부설에게 결혼하여 줄 것을 간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큰 뜻을 품고 수도의 길을 떠나는 부설이 들어 줄 리가 없었다. "어찌 한 여인의 작은 소망을 위하여 장부의 큰 뜻을 꺾으려 하오" 하고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그랬더니 묘화가 하는 말이 "그대의 큰 뜻을 어찌 꺾으려 하겠습니까? 그대는 불도를 깊이 닦아 수많은 중생을 구제하려 한다면서 어찌 소녀의 소박한 소망 하나 들어주지 못하고 그로 인하여 뒷 날 많은 중생을 구제하기에 앞서 우선 눈앞에 있는 이 불쌍한 소녀부터 구제하라는 내가 죽게 되면 장차 큰 뜻을 편다 하여 무슨 뜻이 있겠나이까?" 묘화의 끈질긴 요구에 감동한 부설은 자기의 뜻을 굽혀 묘화와 결혼하기로 하였으며 두 친구 영조와 영희는 오대산으로 떠났다. 부설은 묘화와 결혼하여 아들 딸 남매를 낳고 살면서 아내와 더불어 쉬지 않고 공부를 계속하였다. 그가 사는 마을의 하늘엔 언제나 하얀 눈이 떠돌아 다녔다 하여 사람들은 두능리 마을을 부설촌(浮雪村)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부설거사의 법명도 여기에서 땄다고 한다. 이렇게 아들 딸 낳고 끊임없는 수도생활에 힘쓰며 살아가는데 하루는 오대산으로 공부하러 갔던 영조, 영희 두 친구가 찾아 왔다. 반갑게 맞이하는 부설을 보고 두 친구가 하는 말이 "그대는 여자에게 빠져 낙오자가 되어버렸으니 참으로 아깝고 가엾은 일이네" 하고 비웃음 반, 위로 반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옆에서 이를 듣고있던 묘화부인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내 남편과 그대들 중 누가 더 깊은 공부를 하였는지 한번 도력을 겨루어 보시지요” 하였다. 그리하여 병 세 개에다 물을 가득 담아 벽에 걸어놓고 그들에게 방망이로 병을 쳐보라 하니, 병이 깨어지면서 병 속의 물이 쏟아졌다. 이어서 부설거사가 남은 병을 치니 병만 깨어지고 병모양을 한 물은 그대로 공중에 매달려 있는 게 아닌가! 이를 본 두 스님은 아무 말도 못하고 서둘러 떠나버렸다. 신라 신문왕 12년(692년) 내외는 남매를 데리고 지난날 공부하였던 변산으로 들어가 월명암 근처에 부설암을 지었다. 낙조대 밑에다는 묘화부인을 위하여 묘적암(妙寂庵)을 세웠으며, 그의 아들 등운(登雲)을 위하여는 월명암 뒤에 등운사를 세우고 딸 월명각씨(月明角氏)를 위하여는 지금의 월명암(月明庵)자리에 월명암을 지어 일가족 네 사람이 각기 한 암자씩을 차지하고 수도에 힘써 불도를 깨우쳐 널리 펴니 이때부터 변산에서 불교가 크게 융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월명암은 내소사의 말사로, 전북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 변산반도 봉래산 쌍선봉 아래 있으며, 이름 그대로 어둠 속의 인간들에게 길을 비춰주는 달빛(월명)이 되고 있다.
♤ 부설거사 팔죽시(八竹詩)
此竹彼竹 化去竹 차죽피죽 화거죽 : 이런 대로 저런 대로 되어가는 대로
風打之竹 浪打竹 풍타지죽 랑타죽 : 바람 부는 대로 물결 치는 대로
粥粥飯飯 生此竹 죽죽반반 생차죽 : 죽이면 죽 밥이면 밥 이런 대로 살고
是是非非 看彼竹 시시비비 간피죽 :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른 대로 보고
賓客接待 家勢竹 빈객접대 가세죽 : 손님 접대는 집안 형편대로
市井賣買 歲月竹 시정매매 세월죽 : 시정 물건 사고 파는 것은 세월대로
萬事不如 吾心竹 만사불여 오심죽 : 세상만사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도
然然然世 過然竹 연연연세 과연죽 : 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 대로 보낸다.
여기서 ‘죽’(竹)자는 우리말 ‘대로’라고 해석한다.
관음봉 오름길은 암릉으로 되어 있는데 계단이 설치되어 있네요. 내변산쪽으로 의상봉 국가중요시설도 보입니다. 불사의방은 어디에 있을까요? 관음봉 정상이 빙둘러 조망 맛집입니다. 재백이재와 대소고개가 보이고 오른쪽으로 대소마을과 부안호가 보이네요. 그 뒤로 가야할 신선봉과 망포대를 찾아봅니다. 왼쪽 능선이 원 지맥길이나 암릉구간으로 천길 낭떠러지라 마루금과 상관없이 내소사.원암.직소폭포 쪽으로 진행하여 우회하는 구간입니다. 관음봉에서 나무울타리를 넘어 묵묘를 지나 바윗길 틈새로 내려서고, 전망대에서 내소사를 구경한후 우틀하여 바위지대를 천길 낭떠러지로 바짝 붙어 약간 왼쪽으로 나무 있는 바위능선으로 조심조심 내려서면 낭떠러지 아래를 왼쪽으로 우회하는 뚜렷한 등로가 나옵니다.
♤ 관음봉(觀音峰, 424.5m)/ 면계(변산면 중계리 - 진서면 석포리)/ 조망데크, 정상석, 장의자
내소사 뒷편에 우뚝 솟아 있는 관음봉은 변산면, 진서면의 경계에 세봉과 함께 솟아 있는 바위산으로 예전엔 능가산이었고, 내소사 일주문에도 능가산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관음봉으로 지명이 바뀌어 있다. 서쪽은 망포대, 신선암 줄기가, 동쪽은 옥녀봉 줄기가 역시 곰소만 쪽으로 뻗어내려 곰소만을 북쪽으로 함께 에워싸고 있는 모습이다. 그 남쪽 기슭에 품고 있는 고찰 내소사에서 바라보면 동서북에서 에워싸 아늑하고 포근한 맛을 준다. 관음봉은 동쪽의 세봉과 함께 능가산, 봉래산이라고도 부르며 지금도 내소사 일주문에는 '능가산내소사'란 현판이 걸려있는 이 산은 바위를 깍아 세운 듯 내소사를 병풍처럼 둘러서있는 형상으로 바위봉과 울창한 수림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곳이다. 내변산의 최고봉인 의상봉을 비롯 쌍선봉과 천홀산(또는 천총산) 그리고 북으로 흘러내리는 직소천과 백천내, 해창천이 굽이굽이 흐르는 계곡과 남으로는 곰소만이 작은 강이나 호수처럼 아름답게 보인다.
♤ 직소폭포(直沼瀑布)
등로에서 오른쪽으로 직소폭포가 바라보인다. 내변산의 최고명소는 직소폭포인데 부안 3절의 하나로 채석강과 함께 변산을 상징하는 경관이다. 약 30m 높이의 물줄기가 벼랑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그 장관, 그 아름다움은 황홀하기까지 하다. 예로부터 직소폭포와 중계계곡을 보지 않고는 변산을 말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폭포의 소(沼)를 실상용추(實相龍湫)라고 하는데 용이 승천한 곳이라는 뜻으로 불경(佛經)에 나온다. 아래로 내려가며 분옥담, 선녀탕, 금강소 영지, 백천, 음지가 직소폭포 위의 대소와 함께 봉래구곡(蓬來九曲)인데 1곡 대소(大蘇), 2곡 직소폭포(直沼瀑布) 3곡 분옥담(噴玉淡), 4곡 선녀탕(仙女湯), 5곡 봉래곡(蓬來谷)은 있으나, 아쉽게도 부안댐 축조로 인해 6곡에서 9곡까지는 터만 남아있다고 한다.
♤ 관음봉 삼거리
관음봉을 우회하여 절개지 사면으로 걸어 마루금에 복귀한다. 왼쪽은 내소사로 내려가는 길이고 지맥길은 재백이, 직소폭포, 내소사삼거리 갈림길에서 재백이재로 향한다.
♤ 마당바위
마당바위에서 변산 8경중 제1景인 곰소 웅연조대(雄淵釣臺)를 감상한다. 일반 등산로는 마당바위 아랫쪽으로 이어지나 지맥길은 이정표 뒷쪽으로 이어진다.
♤ 355.9m봉
등로에서 좀 외진 곳이라 그런지 일반 등산객들의 화장실이 되어 있다.
재백이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내려서고 묘지가 나오면 왼쪽으로 붙어 마루금에 복귀합니다.
♤ 재백이고개(宰伯峴, 160m)/ 원밭재/ 원바위재/ 이정표
내소사 초입에 위치한 입암마을에서 내소사를 거치지 않고, 관음봉이나 직소폭포 방향으로 이어지는 고개로 원밭재 또는 원바위재라고도 부른다. 옛날 나라에 가뭄이 들면 원님들이 직소폭포에 가서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넘나들었든 고개로 재백이는 재상과 관백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출입금지 지역을 넘어야 말재로 갈 수 있다.
♤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 원암(元岩)마을
등로에서 석포리 원암 마을이 바라보인다. 원암은 뒷산에 원바우가 있다하여 붙혀진 지명이다.
♤ 273.4m봉
이동통신탑 중계기가 있다. 산패는 없고 선답자 띠지가 잔뜩 매달려 있다. 능선을 따라 똑바로 내려서면 알바이고 왼쪽 비탈사면으로 내려서는 능선이 지맥이다. 내려서며 선답자 띠지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
대소고개 왼쪽으로는 석포리 대소도원 농장입구로 나가고(약 0.8km), 석포삼거리까지는 약 2.7km, 오른쪽으로 대소마을까지는 약 30분 소요됩니다.
♤ 대소고개(大沼峙, 195m)/ 노랫재/ 노릿재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에서 대소마을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유인 남평문씨 음택 가운데로 길이 나있다. 오른쪽에는 봉분과 상석이 있고 왼쪽에는 석물인 장명등이 서있다. 고개 오른쪽 아래에 있는 대소마을은 부안에 있는 가장 오지에 속하는 마을로 어떤 자료에 의하면 지리산 청학동의 시발점이 이곳 대소마을이라고 한다. 직소천이 흐르고 있으며 석포리의 행정구역이 생각보다 훨씬 크다. 대소마을의 옛 지명은 ‘대소뜸’으로 현재는 ‘큰 대(大) 늪 소(沼)’를 써서 대소(大沼)라 부르나 근처에 있는 내소사의 원래 자리였다는 설도 있지만 이것은 부안의 향토사학자의 의견을 들어보면 낭설이라 하며 고려 때 큰 절이 있었다고도 전해온다. 이 지역 향토사학자들은 이 일대의 지명들이 노래 부르는 노릿재(노랫재), 북치고 장구치는 북재, 지금은 아차봉이라 부르는 징바위 등, 노랫가락(음률)과 연관된 지명이 많아 퉁소를 뜻하는 ‘대소(大簫)’라고 불러야 맞다고 하며, 이 고개를 이 지역 사람들은 대소고개가 아닌 노릿재라 부른다. 대소마을쪽으로 내려가다가 왼쪽 능선으로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맥산행이 시작된다.
♤ 대소(大沼)마을/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
대소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인 분지형 마을로 9.3㏊ 농경지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한국동란 후 변산의 신선대에는 일심교 신도들이 모여들어 18가구 80여 명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일심교는 '유불선 동서학 합일 갱정유도'를 내세우며 세계의 모든 종교가 유교로 뭉쳐질 것을 믿는 강대성이 세운 신종교이다. 6~70년대까지만 해도 이곳 신선대와 북재 등에는 촌락을 이루며 신학문, 현대문명과는 담을 쌓고 자기들의 방식에 따라 구름을 벗하고 유수를 지근한 채 여러 가구가 살았다. 특히 북재는 독꾼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교통의 불편함과 종교적인 이유로 정부에서 오지인들의 보호 정책이라는 미명하에 지리산 청학골 또는 타지로 모두 이주를 시켰다고 한다. 독꾼은 도를 닦는 사람들을 부르는 명칭으로 이분들은 조선시대 유교적인 생활관습을 그대로 쫒아 상투머리에 한복 즉, 흰색 바지저고리를 입고 다녔다. 대소마을을 가로질러 흐르는 물줄기는 신선대 신선샘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망포대, 분초대 물줄기와 해발 150m에 위치한 대소마을에서 만나는데 내변산 최고의 경관인 봉래구곡 중 제1곡에 해당하는 대소가 위치하는 마을이다. 이 물줄기는 이후 2곡 직소폭포, 3곡 분옥담, 4곡 선녀탕 등 봉래계곡을 거쳐 서해로 빠져나간다. 대소마을은 지도상에는 잘 표시되어 있지 않고 신선골로 표기되어 있다. 여기에서 신선암과 신선대도 갈 수 있다. 대소마을을 가기 위해서는 석포마을 끝까지 자동차로 이동해서 급경사의 노릿재를 넘어서야 한다.
♤ 290m봉
암릉 구간에 전망이 좋은 바위 암봉으로 내소사 뒷봉인 관음봉과 곰소항이 멋지게 조망되는 곳이다.
♤ 곰소항(熊淵港)/ 곰소/ 웅연(態淵)/ 부안군 진서면 곰소리
곰소항은 부안군 진서면 진서리에 있는 항구로 전북에서는 군산항 다음으로 두 번째 큰 어항이다. 줄포만에서 시작해서 곰소항 앞까지 이르는 호수같이 잔잔한 서해바다의 아름다운 전경을 말하는 것으로 야등을 밝힌 어선과 돛단배가 한가롭게 앞바다를 지날 때, 휘황찬란한 야등 불빛이 투영되어 물에 어리는 광경이 장관을 이루며 어부들이 뱃노래를 부르는 광경을 웅연조대라 하며 변산8경중 제1경으로 친다. 줄포항이 토사로 메워져 폐항이 되자 1938년 진서리 앞바다의 곰섬을 중심으로 동쪽의 범섬과 연동, 서쪽의 까치섬과 작도리를 잇는 제방을 쌓아 만든 항만이며 서해어업의 전진기지항인데, 곰소(態淵)라는 말은 곰처럼 생긴 두개의 섬이라는 말과 그 섬 앞바다에 깊은 소(沼)가 있어 생긴 이름이며 ‘곰소 둔벙속같이 깊다.’라는 속담이 있다. 곰소항은 어업과 주변의 염전으로 급격히 발전하고 있으며, 주요 어획 물로는 갈치·조기·오징어·병어·꽃게·아구·새우 등이 있다. 근래에는 김양식이 활발하며 어업무선국·냉동공장·김건조장 등의 시설이 있으며 위도와의 여객선이 운항된다. 곰소항은 줄포항이 토사로 인해 수심이 점점 낮아지자 그 대안으로 일제가 제방을 축조하여 만들었는데 목적은 이 지역에서 수탈한 각종 농산물과 군수물자 등을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서였다. 진서에는 항구 북쪽에 8ha에 달하는 드넓은 염전이 있어 소금 생산지로도 유명하지만, 근해에서 나는 싱싱한 어패류를 재료로 각종 젓갈을 생산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젓갈가게가 밀집되어 있는 대규모 젓갈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이곳은 여느 곳의 생산물보다 깊은 맛이 있고 쓴맛이 덜하다는 곰소염전의 천일염을 사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겨울날의 어리굴젓을 시작으로 토하젓, 낙지젓, 명란젓, 밴댕이젓 등 십수 가지의 젓갈들이 나름의 맛을 뽐내며 준비되어 있는 곰소항의 풍경은 주말이면 젓갈 쇼핑을 겸한 수많은 관광객의 발걸음으로 활기가 넘치는 장소이다.
♤ 295.9m봉
왼쪽으로 진서면 운호리로 향하는 뚜렷한 등로가 보이는 갈림삼거리이다. 지맥은 오른쪽으로 향한다.
♤ 302m봉/ 리계(진서면 석포리 - 운호리)
지맥은 오른쪽으로 꺽어지는데 왼쪽 운호저수지 방향으로도 시그널이 걸려있어 햇갈리는 지점이다.
♤ 부안군 진서면 운호리(雲湖里)
산기슭을 흐르는 약 5km 정도의 긴 계곡에는 맑은 물이 흘러내리고 물안개가 피어올라 마치 흰구름이 떠있는 모양이 되어서 예로부터 하늘 위의 맑은 구름(雲)이 모여 호수(湖)가 된 마을 구름호수(雲湖)마을로 지었다 한다. 진서면 소재지인 곰소에서 서남쪽으로 국도 30호선인 변산 우회 도로를 따라 약 6km 지점 해발 10m에 위치한 해안산간마을이다. 구름호수마을은 산과 들과 바다가 함께 어우러진 마을로 마을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인 신선대를 중심으로 산골짜기마다 흐르는 물이 모여 운호댐을 이루고 있다. 그 능선을 타고 내려오면 북(鼓)과 흡사한 모양의 봉우리인 고암봉(鼓岩峯)이 있으며 서남쪽으로는 군신봉(君臣峯)이 있다. 군신봉 산세의 정기가 있었는지 1720년경 조선 숙종임금 때 장흥(長興)고씨 종가에서 장수를 배출한 바가 있다고 한다. 인근에는 월명암, 낙조대, 내소사, 유천도요지등 관광자원과 마을 앞에 펼쳐진 서해바다 칠산어장에서 갓 잡아 올린 각종 활어회와 수산물, 어패류를 맛 볼 수 있으며 또한 간조시엔 갯벌체험, 만조시엔 바다낚시를 즐길 수 있다.
♤ 433.7m봉/ 산소봉/ 묘역봉
돌탑과 묘지 한기가 있어 묘역봉이나 돌탑봉으로 불린다.
신선대의 전위봉 격입니다.
♤ 신선암(神仙岩峰, 440m)/ 돌탑봉
넓은 암릉구간이 펼쳐지는 곳으로 신선봉 아래에 있는 암릉구간이라 신선암봉이라 부른다. 평평한 암릉구간이 펼쳐져 있으며 앙증맞은 돌탑도 서너개가 보이고 맞은편으로 신선봉이 보인다.
오른쪽으로 조금 내려서면 옛날 집터가 있고 그들이 마시던 우물터가 있고, 마을 가운데로 냇가가 흐릅니다.
♤ 신선봉(神仙峰, 488.2m)/ 무인산불감시카메라/ 부안군 진서면 - 변산면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부안군 진서면과 변산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산불감시카메라가 있다. 이곳은 변산 십승지로 이어지는 등로로 변산반도 국립공원 내에는 유난히도 신선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신선대, 신선봉, 신선암, 쌍선봉, 선인봉, 삼신산, 선녀탕, 선계폭포, 관선마을 등이 있으나 그 정점에 있는 산이 이곳 신선봉이라고 한다. 옛날 신선들이 노닐었다는 신선대 아래에 봉래구곡 발원지 신선샘이 있으며, 암릉 정상에 서면 변산의 봉우리들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고, 산세가 험하고 깊어 한국동란 때에는 빨치산본부가 최후까지 자리잡고 있었다고 한다.
물이 부족해 보충할겸 독꾼들의 집터를 찾았지만 정확하게 알 수 없었습니다. 물은 아쉬운대로 너덜겅에서 1리터를 보충하고... 시간이 없어 아쉬웠지요. 암부로시아나 넥타르가 분명할텐데... ㅋ
♤ 북재
신선대에서 망포대 방향으로 전진해 2부능선 내려선 곳으로 망포대 너머로 분초대 가는 길에 북재(敲峙)란 지명이 또 있다.
♤ 437m봉/ 면계(진서면 운호리 - 진서면 중계리)
신선봉에서 내려선 봉우리로 실질적으로 리계가 만나는 곳이다.
망포대삼거리에서 약간 뒤돌아나와 조망대에서 오른쪽 아래로 마루금을 진행합니다. 비실이대선배님 띠지가 길안내를 담당하고 저도 홀대모 띠지 한장 투척했습니다.
♤ 490m봉/ 망포대갈림봉/ 면계/ 삼리봉(진서면 운호리, 중계리 → 변산면 운산리)
조망바위에 올라 조망을 감상하고 지맥길은 조망바위 왼쪽으로 내려선다. 시원하고 멋진 등로를 잠시 따르다가 삼거리를 만나 좌틀로 가야 하지만 약 490m 무명봉에 올라 망포대를 감상하고, 다시 뒤돌아나와 바위를 만나 오른쪽 486.4m방향으로 내려가 지맥과 합류한다. 망포대와 망포대삼거리 지점에서 지맥의 오른쪽이 변산면 중계리 → 운산리로 바뀐다. 변산십승지(망포대)로 이어지는 직진의 윗쪽 능선길이 뚜렷하다. 망포대와 삼각점봉은 가까이에 따로 떨어져 있다. 조망바위에서 지나온 신선봉, 그리고 망포대가 바라보인다. 산절승, 해절승인 호남의 3대 명산 변산의 여덟 곳 경치를 가리켜 ‘변산 8경’이라 한다. 변산은 바깥에 산을 세우고, 안을 비운 형국이다. 그래서 해안선을 따라 98km에 이르는 코스를 ‘바깥변산’이라 부르고, 수많은 사찰과 암자가 있어 한때는 사찰과 암자만을 상대로 여는 중장(僧場)이 섰다는, 산의 안쪽을 ‘안변산’으로 부르기도 한다. 주봉인 의상봉(508m), 주류산성(331m), 남옥녀봉(432.7m), 옥락봉, 세봉, 관음봉(424m), 신선대(486m), 망포대(492m), 쌍선봉(459m) 등의 산들이 안변산을 에워싼다. 그 안에 백천내의 물이 부안댐에 갇혀 고창·부안 사람들의 식수원이 되고, 남은 물은 해창(海昌)에서 서해로 흘러 보낸다.
♤ 망포대(望浦臺, 494.1m)/ 3등삼각점(부안 306/ )
부안군 변산면 운산리 뒤에 위치한 산으로 내변산에서 최고봉인 의상봉 다음으로 높은 봉우리다. 정상에 서면 한눈에 들어오는 면소재지인 지서리의 옛 이름이 지지포(知止浦)라 지리적 특성에서 망포대란 이름이 연유했다. 또한 망포대는 변산8경의 하나인 지포신경(止浦神景)을 이루는 기름박골 지포계곡의 주봉이지만 이보다 봉래구곡의 원류 신선골 발원지 봉우리로 더 이름이 알려져 직소천의 원류가 시작되는 산으로 소개되어 있다.
♤ 지맥 우회길
지맥길은 이곳에서 조금 더 진행하여 올라선 조망바위에서 왼쪽으로 꺽어지나 이곳에서 왼쪽으로 가는 산꾼이 많다. 이곳은 물론 변산반도 전체가 국립공원내라 국공파의 소행인지는 몰라도 선답자의 시그널이 잘 안보인다.
♤ 바람재(350m)/ 운호고개(雲湖峴)/ 부안군 진서면 운호리
운호저수지 윗쪽 계곡 능선에 있는 고개로 야생화가 천지삐까리다. 특히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붉노랑 상사화(꽃무릇)와 노란 복수초, 변산바람꽃 등이 많아 사진애호가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바람재 외에 내변산 봄 야생화 군락지는 서쇠뿔바위봉 가는 청림마을 뒤편 옛길과 용와마을 영은사 계곡에 변산바람꽃 군락지가 있고, 낙조대에 분초대 지나 망포대와 아차봉으로 갈라지는 안부 북재에 복수초 군락지가 있다. 운호계곡으로 내려서는 길이 있고 지맥은 능선을 따른다. 운호계곡은 내변산에서 빼어난 단풍 명소이다.
♤ 운호계곡
부안군 진서면에 있는 운호리(雲湖里)의 본래 이름은 ‘여룬개’이다. 지금도 객지로 시집간 할머니들을 여룬개떡(댁)이라 부르고 있는데, 여기서 ‘개’는 바닷물이 드나드는 바닷가를 뜻하는 말이다.(갯마을, 개흙, 갯바위). ‘여룬’의 정확한 뜻은 알 수 없으며 다만 마을 명칭이 ‘여룬개→운포→운호리’로 변경되었는데 이를 참고로 추정한다면 ‘여룬’은 ‘열운’을 소리 나는 대로 풀어 쓴 게 아닌가 생각되며 여기서 ‘운’은 구름 운(雲)자가 일관성 있게 나타나는 걸로 보아 ‘구름’을 뜻하는 것 같다. 운호저수지 오른쪽으로 노적봉이 보이고 그 뒷쪽으로 보이지는 않으나 관선마을이 있다. 관선마을은 신선봉과 연관이 있는 마을로 부안을 연구하는 향토사학자들의 얘기로는 ‘신선봉에는 아마도 신선이 되고자 염원했던 인간들과 이를 이끌던 신선이 살았을 것이고 그 중에 지도자들급만 우화등선(羽化登仙 :사람이 날개가 돋아서 하늘로 올라가 신선이 된다는 말)하듯 신선봉 주위에서 살았고, 일반 사람들은 산 아래 마을에서 수행하듯 살며 신선봉을 바라보며 살던 장소가 관선(觀仙)마을이었다고 한다.
♤ 삼신산(三神山, 486.4m)/ 갈마봉
참나무 가지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달려 있다. 부안군 진서면 운호리와 변산면 운산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지형도에는 삼신산이란 지명의 표기는 없고 그냥 486.4m라고 표기가 되어 있으며 부안군의 자료에도 삼신산에 대한 기록은 없다. 서울 마운틴 삼신산 산패도 함께 하는데 동아지도에는 갈마봉으로 표기되어 있다. 삼신산 오른쪽에 있는 부안군 변산면은 토지가 비옥하고 산림이 우거져 예로부터 사람 살기가 적당한 지역으로 중부지역에 ‘생거진천, 사거용인’ 이란 말이 있기 전부터 호남지역에서는 ‘생거부안, 사거순천’이란 말이 있었다고 하는데 특히 부안 내에서도 ‘살아서는 변산이요, 죽어서는 순천’이란 말이 고서(古書)나 구전(口傳)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조선 성종때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에는 “변산은 하늘이 내린 천부(天府: 흙이 매우 기름져서 생산물이 많이 나는 땅)’라 기록되어 있고,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풍수가, 예언가이기도 했던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는 자신의 저서인 “격암유록(格庵遺錄)”에 ‘변산은 변란과 기근이 없는 십승지지(十勝之地)요, 사람의 몸을 능히 지킬 수 있는 보길지(保吉地)’라 했다. 옛 사람들은 변산(내변산)을 일컬어 신선들이 사는 삼신산 중의 하나인 봉래산으로 ‘신선들이 사는 이상향’ 이라 했고, 내변산과 외변산을 만물의 시원(始原)과 바람의 근원지인 태극지형으로 보아 산태극, 물태극의 요지라 하여 명당지혈(明堂之穴)로도 여겼다. 특히 변산은 산맥이 다하여 바다로 떨어지면서 지기(地氣: 땅의 기운)가 강하게 응결된 곳, 즉, 산진처(山盡處)라 하여 모두가 살고싶어 하는 양택명당처이다. 삼신산을 지나자마자 맥길은 우틀로 급하게 꺽어진다.
♤ 413m봉
삼심산(486.4m)에서 100여m를 내려와 무명봉에서 말재로 무척 급하게 우틀로 내려간다.
♤ 351m봉
351m봉에서 가 파르게 내려서서 말재에 거은 가까이 다가설 무렵 지맥의 오른쪽이 변산면 운산리 → 마포리로 바뀐다.
마동방조재와 유유동천을 이어주는 도로가 넘는 고개입니다. 절개지 오른쪽으로 내려서서 출입금지, 산불예방 현수막 뒤로 올라서네요.
♤ 말재(馬峙, 86m)/ 736번도로
부안군 진서면 운호리와 변산면 마포리 마동마을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지명의 유래는 마동마을과 관련되어 있다. 마포마을은 포구 계열의 지명이 상징하듯 예전에는 마을 앞까지 조수가 드나들었던 곳인데 일제 강점기에 간척이 이루어졌다. 마을의 주산(主山)인 백마산(白馬山)이 말이 뛰어노는 형상인 주마탈안(走馬脫鞍) 형국인 데서 마을 이름이 연유했다고 한다. 마포를 오호(午湖)라고도 하는데 오(午)는 십이간지 중 말에 해당한다. 736번 지방도가 지나가며, 옹벽위에는 깨진 수준점이 있고 운호리쪽에는 배수지가 있다. 말재 북쪽 마포리쪽에는 선비들이 놀았다던 고을, 유유마을(儒遊洞) 골짜기에서 발원하는 유유천에서 북류하며 유유교를 지나 만들어진 유유제(儒遊堤)가 있으며, 유유천을 타고 마포리 입구 고사포해수욕장 남쪽에서 서해로 유입하며, 부안 누에타운이 있다. 변산면 유유마을은 150년 전통의 누에마을이다. 누에곤충과학관·탐험관·체험관으로 이뤄진 누에타운은 명주실을 뽑아내는 유용곤충 누에(집누에나방의 애벌레)와 고치, 뽕나무와 오디 등 누에와 관련한 모든 것을 배우고 관찰하며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2차선 아스팔트 도로에 내려 왼쪽으로 도로 따라 20여m 진행, 옹벽위에 있는 수준점을 지나고 도로교통표지판 있는 곳에서 갑남산 가는 산길이 열린다.
♤ 207.7m봉
말재에서 경사가 심한 등로를 올라선 첫봉으로 우틀로 향한다.(왼쪽능선길 알바주의)
뒤돌아보니 삼신산 능선으로 둥그런 보름달이 훤히 떠오릅니다.
♤ 351.6m봉/ 4등삼각점(부안 422/ 1984 복구)
준희선생님 산패가 가는 참나무에 매어 있다. 말재에서 능선까지 된비알에 잡목이 심해 험난하게 오른다. 정상에는 4등삼각점만 있을 뿐 그저 밋밋한 봉우리이다. 왼쪽으로 갑남산이 보인다.
변산경찰수련원에서 올라오는 등산로가 있는가 봅니다. 날은 저물고 다녀오기엔 시간이 빠듯합니다.
♤ 갑남산갈림봉(350m)/ 면계/ 삼리봉(변산면 마포리, 진서면 운호리 → 변산면 도청리)
지맥 왼쪽이 진서면 운호리 → 변산면 도청리로 바뀌며 지맥의 좌우가 오롯이 변산면으로 들어서는 지점이다. 갈림봉에서 갑남산까지는 직진으로 왕복 약 1.5km, 소요시간 40분 거리이다. 갑남산갈림봉에서 오른쪽으로 내려선다.
♤ 갑남산(甲南山, 408.5m)/ 깃대봉/ 무명묘지
무인산불감시카메라와 앙증맞은 돌탑, 헬기장이 있는 봉우리를 지나고, 도청마을로 내려가는 갈림길도 지난다. 부안군의 변산면 도청리와 마포리·진서면 운호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어느 산꾼이 돌덩어리에 갑남산 435m라고 표기를 해놨는데 높이 차이는 있지만 이마저도 표시를 안 해놨으면 지나치기 좋을만큼 그저 밋밋한 산이다. 무명묘지는 이장을 해서 파묘자리가 되었다. 갑남산 서쪽으로 채석강, 수성당, 적벽강 등의 비경을 안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곰소만 건너 개이빨산과 마주하고 있는데 산의 서쪽 해안에 격포·상록해수욕장이, 남쪽에는 모항(茅項)해수욕장이 있다. 갑남산 최고의 포인트는 모항을 내려다 보는 황홀한 조망에 있다. 깃대봉이라고도 하는데, 산세가 갑옷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 모항(茅項)/ 부안군 변산면 도청리(道淸里)
모항은 줄포만에서 서해로, 또는 서해에서 줄포만으로 통하는 목에 위치하고 있어서 외지의 선박 출입이 빈번하였다. 또 1940년대 초 곰소항이 개설되기 이전에는 위도(蝟島)는 물론이고 고창, 영광, 흑산도를 내왕하는 요지의 항구이기도 하였다. 격포에서 남동쪽으로 해안 도로를 따라 약 6㎞쯤에 위치한 줄포만(茁浦灣)에 반도처럼 툭 튀어나와 돌출된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인 조그마한 어촌이다. 우리말로 ‘띠목’이라 불렸다고 한다. 해안선 따라 수십 그루의 해송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반달 모양의 아담한 해수욕장에 잠기는 명품 노을이다. 안도현 시인의 ‘모항 가는 길’ 이라는 시에서 그 아름다움을 표현한 바 있다. 모항을 아는 것은 변산의 똥구멍까지 속속들이 다 안다는 것이다. 특히 모항은 우리나라에서 해가 가장 늦게 지는 곳이다.
♤ 조망바위
갑남산을 다녀오며 지나온 산불감시초소가 보이고, 앞으로는 둔바말저수지와 도청마을, 30번 도로를 건너 변산지맥의 마지막 사투봉과 봉화봉 그리고 격포항의 방파제까지 한눈에 바라다 보인다.
♤ 290.7m봉
♤ 306.1m봉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306.1봉에서 좌틀로 꺽어져 내려서며 맥길을 이어간다. 잡목지대를 지나 도청리 마을로 내려선다.
♤ 225.4m봉
안부에서 왼쪽으로 내려서기도 하고, 지맥을 따라 칡넝쿨과 잡풀덩쿨 지대를 지나 넘어서기도 한다.
♤ 114.7m봉
묵밭끝 상수도배수장 앞에서 우틀로 대나무숲을 지나 도청마을로 내려선다.
도청마을을 지나는 도로가 마루금이고 정면으로 사투봉을 바라보며 진행합니다.
♤ 도청마을 도청경로당/ 부안군 변산면 도청리(道淸里)
도청리는 부안군 변산반도 서남쪽 끝에 자리해 갑남산을 중심으로 마을 뒤로 산지가 위치하며 마을 앞으로 서해와 맞닿아 산지와 해안으로 이루어진 지역으로 대부분 주민이 어업에 종사한다. 자연마을로는 각수암, 건네뜸, 뒤목, 상두, 언포 등이 있다. 각수암은 도청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네모진 바위가 있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건네뜸은 도청 앞 내 건너에 있는 마을이다. 뒤목은 뒷밭을 개간하여 마을을 이루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상두는 지형이 코끼리의 머리와 같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언포는 개를 막아 마을을 이루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상록 해수욕장과 모항 해수욕장이 있다. 궁항로가 변산로와 만나기 직전에 상록 해수욕장을 끼고 두포마을이 있고, 변산로가 궁항로와 만나기 직전 도청마을이 있다. 두 도로가 변산로와 연결되는 언포마을에 변산경찰수련원이 있다. 수락마을 앞 해안에 솔섬이 있는데 전라북도교육청 전북 학생 해양 수련원이 자리한다. 변산로에서 분기한 모항해변길과 모항길 또는 모항안길 등은 모항마을에 있는 많은 숙박 및 음식점들을 연결해 준다.
사투봉 오르는 구간으로 잠시나마 가시잡목으로 고생하는 구간입니다.
♤ 도청교차로/ 30번 국도
곰소항에서 변산으로 가는 30번국도가 지나는 곳이다. 고속도로 아래로 진행한다. 도청교차로 지하를 지나자마자 고속도로 건너기전 왼쪽으로 꺽어진다. 좀 더 진행하여 오른쪽 공터로 진입하여 시멘트 도로를 따른다. 오른쪽 능선이 맥길이나 그냥 시멘트 도로를 따라서 올라야 가시와 사투를 피할 수 있다. 다른 방법으로 성산교회를 지나 30번국도 지하도를 건너 왼쪽으로 가는데 지하도 건너기 전에 왼쪽으로 가면 작은 굴다리가 나온다. 굴다리를 통과해 임도따라 진행하다 오른쪽으로 꺽이는 부근에서 왼쪽 계곡으로 들어선다. 계곡의 작은 지곡이 합쳐지는 곳에서 가운데 능선으로 올라 묘지를 지나 능선에 올라선다. 능선에 올라 오른쪽으로 가다 지맥과 합류해 왼쪽으로 가면 임도가 나온다.
♤ 86m봉
지맥길을 가로막은 상록배수지 배수장을 지나 올라선 봉우리이다.
♤ 부안군 변산면 도청리 언포(堰浦)마을/ 언포해수욕장
언포마을은 지금으로부터 약 300여 년전 조선조 중엽 인조(仁祖) 때 최(崔)씨 일가가 처음 이곳에 터를 잡으니 산과 바다가 접하고 있어 어염시초(漁鹽柴草)가 풍성(豊盛)하므로 사람 살기가 좋아 찾아드는 사람이 늘어 마을을 이루고 소금을 굽는 가마터에서 소금을 만들었다 하여 염포(鹽浦)라 부르기도 하였다. 또한 바닷물의 자연현상으로 모래 등이 갯벌을 막았다 하여 둑 언(堰), 개 포(浦) 자를 써서 언포(堰浦)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일제강점기에 제방시설로 농경지가 조성되면서 마을이 번창하여 한때는 목화(木花) 및 연초(煙草) 공판장을 운영하였다고 한다.
♤ 부안영상테마파크
등로에서 부안영상테마파크의 모습이 보인다. 부안영상테마파크는 KBS와 부안군이 공동으로 출자하고 별도의 회사가 운영, 관리하는데 16.5㏊에 이르는 그 규모도 대단하지만 반영구적인 시설 활용을 위한 세트장의 사실적 고증과 웅장함이 놀랍다. 경복궁과 창덕궁의 주요 전각들이 복원된 왕궁 시설을 중심으로 양반가와 서원, 일반 백성의 가옥과 장터, 성터 등 다양한 건축물들이 성곽으로 둘러싸인 넓은 터를 따라 자리하는 모습은 마치 조선시대의 한양을 재현해 놓은듯 하다.
♤ 사투봉(死鬪峰, 169.2m)/ 리계(변산면 도청리 - 격포리)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와 도청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폐쇄된 군부대 막사와 예전에 있었던 KBS 도청 중계소는 철거된 채 없고 그 흔적만 보인다. 지명의 유래는 알 길이 없지만 사투봉의 유래는 격포항 옆 닭이봉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닭이봉 아래에 있는 격포마을의 형국이 지네형국이라 마을의 재앙이 끊이지 않자 닭과 지네가 상극이란 것을 이용하여 맞은편에 있는 이곳에 족제비 석상을 세워 닭이봉과 마주보게 하였더니 마을의 재앙이 물러갔다고 전해지면서 이곳을 사투봉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정표가 보이고 맥길은 '등산로 출구방향'으로 이어진다.
♤ 159.8m봉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등산로 출구방향'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궁항과 격포항을 오가는 도로입니다.
♤ 궁항치(弓項峙, 65m)/ 2차선도로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 격상마을에서 궁항마을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변산마실길 등산안내도가 서있다. 고개 넘어 조그만 항구가 있는 궁항마을에는 KBS 대하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촬영한 전라좌수영세트장이 있고, 관광객이 많은지 펜션들이 많이 보이고, 개섬(犬島)도 보인다. 121.1m봉까지 잡목이 심하다. 왼쪽으로 조금 내려가서 이순신 세트장 입구 안내판이 있는 곳에서 올라붙는다.
♤ 궁항(弓項)마을/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
궁항 마을은 지금으로부터 삼백여 년 전 조선조 중엽(朝鮮調中葉) 명종(明宗) 때 한 선비가 이곳저곳 떠돌다 이곳의 절경을 보고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 뒤로는 반월(半月) 모양을 한 산이 둘러 있고 마을 앞 바다에는 견도(犬島) 일명 개섬이 100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 서쪽 해안을 도당금(濤堂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도당금은 옛날에 연대는 알 수 없으나 한 장사(壯士)가 이곳에서 무술을 연마하여 장수(將帥)가 되고자 해안의 돌을 옮겨서 석당(石堂)을 지어 살게 되었는데, 어느 날 천둥 번개가 치며 폭풍이 일어나 석당이 무너지며 장사도 죽었다. 그런데 폭풍이 잔잔해지자 장사 시체는 간 곳이 없고 바다에 섬이 생겼다고 한다. 그 후 이 섬을 중심으로 어장(漁場)이 형성되니 어부들이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게 되었으며 장사(壯士)가 죽어서 개가 되었다 하여 견도(犬島) 일명 개섬이라 하였다. 견도(犬島)에서 바라보면 마을 형국이 활 모양이며 견도(犬島)는 활촉으로 개섬과 마을 사이에 100m의 목이 있다 하여 활 궁(弓), 목 항(項), 일명 활목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잠시 간벌로 가파른 마루금을 오릅니다.
♤ 121.1m봉/ 봉수대지/ 폐헬기장
예전에 봉수대가 있었던 터에 봉수대는 없어지고 쥐똥나무를 심어놓았다. 봉수대지에서 봉화봉을 바라보고 진행한다. 왼쪽으로 궁항이 내려다 보인다.
♤ 부안군 변산면 도청리 두포(頭浦)마을
등로에서 두포마을의 모습이 보인다. 두포 마을은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 조선조 중엽 인조 때 소금장수가 이곳을 지나다가 소금 굽는 가마터가 있어 그곳에서 일하며 살게 되었다는데 해수가 하루에 두 번씩 왕래하는 목에다 그물을 치고 고기를 잡으며 이곳에 처음 정착하게 되었다. 그 후 안(安)씨, 박(朴)씨, 김(金)씨, 전(田)씨들이 정착하면서 마을을 이루니 바닷물이 오간다 하여 통할 통(通) 자 개 포(浦) 자를 써서 통포(通浦)라 부르게 되었으며 통포(通浦) 높은 곳에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루니 윗머리골 일명 상두동(上頭洞)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통포(通浦)는 언포에 속하고 상두동은 도청에 속하였으나 1972년에 행정구역(行政區域) 조정으로 통포(通浦)와 상두동(上頭洞)을 합하여 행정리로 분리하면서 마을 책임자와 마을 어른들이 의논하여 상두동(上頭洞)의 두(頭), 통포(通浦)의 포(浦) 자를 따서 두포(頭浦)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궁항 전라좌수영 세트장
등로 왼쪽 아래로 보이는 궁항마을 전라좌수영 세트장은 2005년 방영된 “불멸의 이순신” 드라마에 힘입어 궁항마을엔 약 70만 명의 관광객들이 다녀갔고 지금도 사극촬영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아름다운 풍광을 보려는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부안은 영상의 메카로 불려도 좋을 만큼 곳곳에 촬영지가 널려 있다.
♤ 월고리(月古里) 봉수대/ 봉대산(烽臺山, 175.2m)/ 2등삼각점(위도 23/ 1997재설)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에 있는 봉수대로 정상에는 봉수대와 2등삼각점이 있다. 변산면 격포리와 격상 마을(웃컽) 서남쪽에 있는 산으로 조선 시대 봉화를 올렸던 곳이어서 유래한 지명으로, 산 정상에 봉대가 있어 봉대산(烽臺山)이라고도 한다. 월고리 봉수는 전국의 다섯 개 직봉 노선 중에서 제5로 직봉의 스물일곱 번째에 해당하는 봉수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부안)에 "월고리산 봉수는 현의 서쪽 75리에 있는데, 남쪽으로 무장 소응포산에 응하고, 북쪽으로 점방산에 응한다."라고 하고, 『동국여지지』(부안)에는 "격포 봉수는 격포 뒷산에 있는데 예전에 월고리라 불렀던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부안)에 "봉화가 3곳이니, 현의 서쪽 월고이(月古伊)는 남쪽으로 무장 소응포에 응하고, 북쪽으로 점방산에 응한다."라고 하여 월고리산이 '월고이'로 불렸음을 확인할 수 있다. 『광여도』(부안)에 '월고리봉'이, 『해동지도』(부안)에 격포진 위에 '월고리봉대'가 표시되어 있다. 점방산은 금강정맥이 지나는 군산 월명산 정상에 있는 봉수대이다. 조선 후기 전라우수영에 소속되었으며, 남동쪽에 있는 고창 소응포 봉수에서 신호를 받아 북동쪽에 있는 점방산 봉수로 연결하였다. 봉수 간의 대응 거리는 소응포 봉수와는 15.24km이고, 점방산 봉수와는 10.76km이다. 현재 봉화산 정상에는 남북으로 길쭉한 타원형 형태의 평탄지에 거화시설(炬火施設)인 연대 한 개가 복원되어 있다. 이는 부안군에서 오랫동안 방치되어 훼손되었던 월고리 봉수를 1995년에 복원한 것이다.
♤ 월고리(月古里) 봉수대지 안내판
월고리 봉수대는 격포의 닭이봉 건너편의 봉화산을 말하는데 이곳 정상에 오르면 섬과 좌우의 해안을 한꺼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 한간에서 부르고 있는 격포리 봉수대를 호리산 봉수대와 월고리 봉수대 두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데 월고리 봉수대는 문헌상의 이름이고, 호리산 봉수대는 민가들에 구전으로 전해오는 명칭이다. 월고리 봉수대 기록은「동국여지승람」34권에 있고, 「조선보물 고적조사 자료집」에 담겨져 있다. 격포는 일찍이 수군의 요새지로 수군의 별장이나 첨사(僉使:이조 때 각 진영에 속했던 무관직)가 주둔했던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전라우수영 관할의 격포진이 있었던 곳으로 봉수대 역할이 컸다.
지맥은 봉화대에서 끝내는게 아니고 봉화봉에서 마무리 하고 다시 봉화대로 돌아와 왼쪽으로 내려섭니다.
♤ 봉화봉(烽火峯, 171.9m)/ 봉두산(峯頭山)
월고리 봉수대에서 조금 더 내려서면 예전에 모형 봉수대가 있었던 곳에 지금은 철거되고 공터만 남아 있는데 지도에는 이곳을 봉화봉이라 해놨다. 봉화봉을 예전에는 봉두산이라 했다. 봉두산(峯頭山: 격포의 머리산이란 뜻)에서 다시 월고리 봉수대 쪽으로 되돌아 간다. 봉화봉을 다녀와 봉수대 왼쪽으로 간 다음에 오른쪽 능선 아래로 내려선다. 삼거리에서 원 지맥은 오른쪽이지만 군부대가 있어 바닷가까지 가지 못하므로 격포항으로 간다.
임도에서 서해랑길을 만나 격포항까지 갑니다.
♤ 변산마실길 안내도
부안군 변산반도국립공원은 우리나라 유일의 반도형 국립공원이다. 반도이기 때문에 바다와 육지가 어우러져 산, 들, 바다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명승지, 관광지가 많다. 변산은 오래전부터 한국의 8경으로 꼽혔다. 마실은 '마을'의 사투리로, 마실길은 옆집 놀러 가듯 걷는 길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변산반도 서북쪽인 새만금 방조제 남쪽 끝 지점에서 시작해 변산반도 남동쪽인 줄포만갯벌생태공원까지 해안을 따라 나 있는 마실길은 1코스에서 8코스까지 8개 코스로 나눠지며, 총 길이는 66㎞ 정도다. 변산 해안의 길이는 약 99㎞이며, 새만금 방조제 길이가 약 33㎞이고, 변산 해안의 약 3분의 2, 새만금 방조제 길이의 약 2배가 마실길로 조성된 셈이다. 변산마실길 사거리에서 직진으로 향한다.
산을 내려오면 정면으로 화장실이 보입니다.
♤ 격포항 해넘이공원 주차장
격포항 너머 닭이봉을 바라보면서 해넘이공원으로 내려간다. 격포항에 꾸며진 해넘이 공원에는 예전에 비행기와 미사일이 전시된 안보전시관은 철거되어 버렸고 변산 마실길을 비롯한 이정표들만 즐비하다. 격포항여객터미널과 회센터가 있다.
♤ 격포항(格浦港)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에 있는 어항으로 해양수산부에서 선정한 우리나라 [아름다운 어촌 100개소] 중 한 곳이다. 1986년 3월 1일 1종 항으로 승격되었으며 주변의 위도, 고군산군도, 홍도 등 서해안 도서와 연계된 해상교통의 중심항이다. 또한, 채석강교, 분수광장, 채석강 광장, 낚시터 및 전망대, 해안 산책 보도교, 조명타워가 주변에 조성되어 있다. 격포항의 요트마리나는 요트 계류장으로 37척의 요트가 접안할 수 있는 시설과 관리동을 갖추고 있다. 1985년 기본조사를 실시하고 1986년 3월 1일 국가어항으로 지정되었으며, 1996년 방파제와 물양장 시설을 완공했다. 격포항 주변은 서해 청정해역의 감칠맛 나는 수산물이 많이 나오는 곳으로, 봄 주꾸미 산란철과 가을 전어철에는 차를 주차할 공간이 없을 정도로 전국 각지에서 온 미식가와 관광객들로 붐빈다. 주꾸미, 갑오징어, 꽃게, 아구, 우럭, 노래미, 광어, 전어, 백합, 바지락 등의 수산물이 많이 나오며 격포항 주변으로 수산시장과 횟집, 음식점들이 많이 있다. 특히, 격포항은 바다 위로 떨어지는 해넘이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며, 도보로 이동이 가능한 격포해수욕장, 채석강과 해식동굴이 해안 절경을 이룬다. 격포항에 도착한 변산지맥의 맥은 서해바다로 입수한다. 호남정맥 순창새재에 갈라진 영산기맥을 타고 오다가 장성갈재 윗쪽 쓰리봉에서 분기한 변산지맥 56.5km를 이곳에서 마무리 짓는다.
♤ 닭이봉(鷄峰, 85.7m)/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
격포항 여객터미널 너머로 보이는 닭이봉과 그 아래 채석강의 모습, 격포항 맞은편에 있는 닭이봉(鷄峰)은 채석강을 우산처럼 받치고 있으며 산 아래에 있는 격포마을의 지세가 지네형국으로 되어 있어, 마을에 재앙이 끊이지 않자, 지네와 닭이 상극이라는 것을 어느 지사에게 알아낸 다음, 마을 사람들은 이를 제압할 수 있는 족제비 석상을 만들어 사투봉에 세워 닭이봉을 마주보도록 하였더니 재앙이 물러갔다고 하는데 이러한 전설에 의해 산 이름을 닭이봉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닭이봉 아래에 격포해변이 끝나는 곳에 해식애(海蝕崖)에 이루어진 채석강(採石江)이 있다. 채석강은 변산팔경중의 제6경인 채석범주(彩石帆舟)로 기이한 바위와 함께 빼어난 경관을 이루고 있는데, 중국의 당나라 시인 이태백이 배 타고 술을 마시다가 강물에 뜬 달을 잡으려다 빠졌다는 채석강과 흡사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서봉지맥의 끝에도 비슷한 계두봉(鷄頭峰, 44.1m)이 있다.^^ <한국지명총람>에는 ‘달기봉(계봉鷄峰)은 격하 서북쪽 해변에 있는 산으로 높이 80m이며 황금 닭이 알을 품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명당이 있다.’고 나와 있다. 풍수지리에서 이러한 지형을 황금 닭이 알을 품는 이러한 모습을 한 지형을 대가 끊이지 않고 자손이 번창하는 길지로 본다. 이 때문에 변산은 인심좋고 물산이 풍부한 땅으로 알려졌다. 더욱이 닭이봉은 격포의 북쪽에 위치해서 격포를 수호해주는 주산이다. 국토지리정보원 <지형도>와 <전라북도 전도>에는 닭이봉에 대한 기록이 없으나 <부안군행정지도>와 <변산마실길> 안내도에는 닭이봉이 나와 있다. 그런가하면 <한국지명총람>에는 채석강과 닭이봉(닭기봉)에 대해 중국 시성 이태백이 뱃놀이 했던 비경으로 예찬했는가하면 친일파 이완용의 적폐도 디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채석강은 격포 서북쪽 해안을 따라 있는 변산반도의 명승지의 하나다. 해안을 끼고 층암절벽이 마치 수만 권의 책을 쌓아놓은 것처럼 높이 솟아 있다. 그 밑에는 바닷물결이 끊임없이 파도치고 가는 모래밭에는 여러 빛깔의 바둑만한 돌이 수없이 깔려있어 유람객들은 이 돌을 주워다가 그대로 바둑알로 쓴다 한다. 절벽 위로는 달기봉(닭이봉, 계봉)의 숲이 우거지고 멀리 칠산七山 앞바다의 섬들이 보인다. 저녁 때면 돌아오는 돛단배와 지는 해가 바다를 아름답게 수놓아 좋은 경치를 이룬다. 중국 당나라 시인 이태백이 뱃놀이를 했다는 중국 채석강과 비슷하다하여 그 이름을 땄다고 한다. 한말에는 이완용이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때 이곳까지 음식, 침구를 마련하는 등 민폐가 심했다.‘고 한다.
♤ 격포 버스정류장
격포항에서 인증샷을 남기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한다. 이곳에서 부안가는 버스는 직행과 좌석버스, 완행버스가 있는데 직행버스는 버스 요금이 4,100원이고 좌석버스와 완행 버스는 부안까지 무조건 1,000원이다. 시외버스 터미널은 격포항에서 한참을 가야 하지만 좌석과 완행 버스는 격포항 바로 옆에 하나로마트 건너편 팔각정옆 버스정류장이 있다. 이곳에서 출발하는 좌석버스를 타고, 고사포와, 변산해수욕장, 새만금 방조재, 비득치를 거쳐 부안 읍내에 도착하는데 40분이 채 안걸린다. 부안(扶安)은 김제평야와 인접한 곡창지대로 또한 바다가 가깝고 변산(邊山)이라는 좋은 산이 이웃에 있어서 예로부터 ‘생거부안(生居扶安)’ 이라 하였다. 충청도의 진천이 ‘생거진천(生居鎭川)’이라는 말을 진천군의 브랜드로 사용해 널리 알려져 있지만, 진천군은 효자 아들이 재가한 어머니를 살아 계실동안 모시라는 말에서 유래됐지만 실제로 생거의 땅은 부안의 전매 특허였다.
채석강(彩石江)과 적벽강(赤壁江)은 강이 아니라 중국의 지명에서 따온 이름으로 바닷물에 침식된 퇴적암의 층리가 수만권의 책을 쌓아올린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 채석강(彩石江)
외변산에는 7천만 년 전 중생대 백악기에 생성된 격포리(格浦里) 해안의 채석강과 적벽강이 특히 유명하다. 이 두 곳의 명칭은 강이지만 실제는 해안의 바위벽이다. 채석강이니 하는 이름은 시선(詩仙) 이태백(李太白)과 대문장가 소동파(蘇東坡)가 노닐던 중국 지명을 본뜬 것이다. 그만큼 경관이 수려하다는 뜻이다. 채석강은 썰물 때 드러나는 변산반도 서쪽 끝 격포항과 그 오른쪽 닭이봉 일대의 층암절벽과 바다를 총칭하는 이름이다. 기암괴석들과 수천 수 만권의 책을 차곡차곡 포개 놓은 듯한 퇴적암층 단애로, 중국의 채석강彩石江과 그 모습이 흡사해 채석강이라 부르게 되었다. 닭이봉 한 자락이 오랜 세월동안 파도에 깎이면서 형성된 퇴적암층이 절경이다. 물이 빠지는 썰물 때면 채석강 바위 아래도 내려가 퇴적암을 볼 수 있다. 채석강이 있는 격포항에서 격포 해수욕장까지 약 2Km정도 바닷가를 거닐 수도 있다. 채석강 바위의 정상인 닭이봉은 가파르지 않아 쉽게 올라갈 수 있고 자동차로 오를 수 있다. 정상의 전망대에서는 격포항과 격포해수욕장, 멀리 고군산군도가 한눈에 잡힌다. 바다생물과 해식동굴의 신비로운 모습채석강은 하루 두 차례 물이 빠지면 들어갈 수 있다. 간조 때는 물 빠진 퇴적암층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바다생물과 해식동굴의 신비로운 모습을 볼 수 있다. 간조 때 해식동굴에서 바라보는 낙조와 노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 적벽강(赤壁江)
변산 해변의 절경을 빚어내고 있는 적벽강은 붉은색을 띤 바위와 절벽으로 해안이 이루어져 있어 맑은 물에 붉은색이 영롱하다. 석양 무렵 햇빛을 받아 바위가 진홍색으로 물들 때 장관을 이룬다. 채석강에서 해수욕장 건너 백사장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붉은 암벽으로 이루어진 적벽강이 있다. 서해안의 대표적인 풍경인 갯벌과는 다른 오랜 침식작용과 풍화작용이 빚어낸 기암괴석과 지질을 토대로 푸르고 너른 바다와 자그락자그락 소리를 낼 것만 같은 조약돌이 지천이다. 변산의 적벽강과 채석강은 국내 최고의 낙조를 조망할 수 있다.
첫댓글 퐁라라 운영자님 변산지맥 졸업하고 오셨네요.
봄이되니 미세먼지가 많이 보입니다.
우리가 갔을 때는 베풍산에 공사중이었습니다.
산패를 걸만한 곳이 없어서 전주대에다 설치했는데
지금까지도 잘있네요.
삼각점은 간신히 찾아서 보았는데 지금은 뽑혀 있네요.
페기가 된건지 재설치를 할려는지는 다음에 답사하시는 분 산행기에서
확인해야 겠습니다.
변산지맥 원샷종주 축하드림니다.
부뜰이운영자님!
도청리 경로당에서 기다리던 매제차로 1시간 걸려 새로 뚫린 도로로 새만금 다리를 지나 군산 조촌동 동생집(더샾)으로 가서 집밥에 쇠주 한잔을 마시는데(다들 저녁을 먹은 상태라~) 소주가 참 달디달았어요. 동생이 편하고 정성스럽게 맞아주어 아침에 일어나니 회복력 왕킹짱이었습니다. 카카오택시 응답이 오질않아 고속버스터미널로 물어물어 걸어나가다 경암동 철길을 만나 구경하고 상경했답니다.^^
동생은 금욜날 조퇴를 내고 기다리던 참이었다며 금욜 군산시내 관광을 하고 저녁먹고 상경하라던데 이상하게 다시 가서 끝지점을 마무리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언젠가 격포항 채석강, 닭이봉을 다시 방문할 기회가 오지 않을까요.^^
퐁라라운영자님의 변산지맥 원샷 마무리를 축하드립니다.
꼬박 이틀걸려 주야없이 60km가 넘는 멋진 길을 걸으셨네요.
어둠속에 잡목을 헤치면서 날머리 도청리마을에 이르셨군요.
산줄기 내내 드러나는 변산반도의 정취가 묻어나는 느낌입니다.
멋진 발자취를 남기시느라 수고많으셨습니다.
방장님!
하루가 빠듯합니다. 댓글이 늦어 죄송^^
어젠 군산 여동생에게 공기청정기를 배송했어요. 밥 참 비싸게 먹었죠. 107만원이니...
실은 2년 전에 여동생이 아파트에 입주했는데,
변산지맥 끝내고 들려 집들이 선물을 사준다 해놓고 작년에도 못 내려갔네요.
어제는 오후에 정형외과에서 치료받고 센터에 나갔는데
볼더링을 조금 했습니다. 크게 통증이 없는 걸로 보아 이젠 낫는 길에 들어섰나보네요.
오늘도 아점으로 고기 궈먹고 점심 때 센터에 나가볼려고요.
이제 외벽으로 나가야 하니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